익명 소설
앙투안 로랭 지음, 김정은 옮김 / 하빌리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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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학에서 스릴러 소설 찾기가 쉽지 않은데 작품성, 대중성을 모두 잡은 작품으라고 하니 자못 궁금하다. 미셸 우엘벡의 작품들과 견줄만할 정도로 가치가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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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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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누구요?"
"우린 사람이오."

(p137) 
 


선문답같은 등장인물의 대화와 부조리극으로 오래 전부터 유명한 이 작품은 한 번만 읽기에는 부족하다. 모호하고 이해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읽으면 읽을수록 눈에 보이는 것들이 많아지는 작품이다. 이번까지 세번째 읽는다.  


50여년간 실체도 명확하지 않은 고도Godot라는 인물을 기다리는 두 남자. 에스트라공은 이만 떠나자고 하고, 블라디미르는 고도를 기다리겠다고 한다. 그들의 하루는 단조롭기 그지없다. 한 그루의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를 입씨름하고, 서로의 불만을 토로하고, 목을 매려다가 실패하고, 소년에게서 내일의 다짐을 받고, 고도를 기다릴 뿐. 이것이 반복되는 그들의 매일이다. 







베케트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를 통해 일상의 단조로움, 의미없는 행위, 현대인이 갖는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극도의 개인주의로 깊어지는 외로움을 얘기하고 있다. 


제 발이 잘못됐는데도 구두 탓만 하는 게 인간이라고 말하는 블라디미르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뉘우친다는 에스트라공의 말은 획일화된 현대사회의 틀 안에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신을 밀어넣지 못해 도태되는 인간의 모습을 자조한다.  


블라디미르는 구세주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당시 같이 못박힌 두 도둑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 현장에 있었던 네 사람 중 단 한 사람만이 구원받은 도둑의 얘기를 썼는데, 후세 사람들은 오직 그 사람의 기록만 믿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에스트라공은 간단히 대답한다. 사람들이 다 바보라서 그렇다는 것. 이는 너나할것 없이 모두 하나의 방향으로 달려갈 때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리고 누가 정해놓았는지 알 수 없는 기준선에 도달하기 위해 자아쯤은 놓아버리며 안전을 명분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권리를 헐값에 팔아버리고 이후에 찾아오는 자괴감에 우울해지는 우리네 모습을 그대로 투영한다.  


럭키에게 욕설과 폭력을 행사하는 포조에게 인간으로서 창피하고 파렴치한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 주인으로부터 겨우 얻어먹는 럭키의 뼈다귀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뜯는 에스트라공의 모습에서, 버림받지 않기 위해 자아를 버리면서까지 복종하는 럭키에게서, 부조리의 한 단면을 보게 된다. 쓰임이 다하면 버려지는 소모품처럼 인간도 마찬가지라는 그들의 대화를 읽자니 인생의 공허와 외로움을 새삼 느낀다.  


2막에서 에스트라공은 혼자 있을 때가 낫다고, 그들은 차라리 헤어지는 게 낫다고 말하면서도 블라디미르와 붙어다닌다. 이러한 모습은 버림받을 게 무서워 폭력을 감수하는 1막에서의 럭키와 닮아 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왜 고도를 기다리는지, 무엇을 염원하는지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ㅡ 


1막과 2막의 차이를 보자면 일단 나무. 1막에서 묘사된 나무에는 마치 죽은 것처럼 잎이 전혀 없는데 2막 시작에서는 나무에 잎이 달려 있다. 두 번째는 검정색이었다가 흐릿하게 바랜 구두의 색깔. 이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기억하는 어제는 사실 훨씬 이전이었음을 암시하면서, 그들이 긴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서 고도를 기다려왔음을 얘기하고, 원을 그리듯 끊임없이 모자를 돌려쓰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단조롭고 반복적인 삶에 한 점 의혹과 변화를 시도하지 않은 채 인생이란 죽는 날까지 각자의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믿는 우리에게 본질적인 삶의 근본이란 무엇인지를 고찰하게끔 한다.  


앞이 안 보이는 포조가 누구냐고 묻자 블라디미르는 그들이 사람이라고 답한다. 여기에서 '사람'은 여러 의미로 이해된다. 현대인이 (럭키로 대변하는) 짐승과는 달리 '사람답게' 살고 있는지, 혹은 사회적 약자를 '사람으로서 인정'하고 있는지, 아니면 시와 노래와 춤과 연민의 '인간성'을 잃지 않았는지, 이것이 베케트가 독자와 관객에게 던진 질문이 아닐까. 



흥미로운 점은 세상이,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그렇다고, 베케트가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에스트라공, 블라디미르, 럭키가 어떤 잘못을 해서도 아니고, 그들의 운명이나 시대가 유난스러운 것도 아니다. 세상은, 그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개개인의 인생은, 시대를 초월해 누구나 예외없이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떠나자고 말만 할뿐 정작 떠나지 못하는 에스트라공과 기약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가 같은 장소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과는 반대로 포조와 럭키는 비록 앞을 못보고 말을 못할 지언정 길을 떠난다. 새로운 길을 떠난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안주한다고 해서 행복을 장담받을 수도 없다.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가다가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데서 넘어진다면 일어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떠나면 된다는 포조의 말에서 앞선 질문의 답을 대신할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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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약국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1
김희선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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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2
도시엔 사라져가는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싶다. 


작가는 춘천에서 자라 현재 원주에서 약국을 운영 중이다. 나는 춘천은 비교적 구석구석 다녀봤지만, 원주는 백운산과 치악산을 가본 것이 전부다. 그래서 작가가 책에서 춘천 가는 길의 휴게소를 언급했을 때 '음... 가평휴게소쯤이겠군.', 또는 명동 거리와 소양호라는 단어를 읽었을 때 고개를 주억거렸다면, 약국에서 바라본 원주 시내의 풍경은 도무지 그려지지가 않았다. 원주 시내를 가 볼 핑계가 생긴 셈이다. 








버섯, 새, 고래, 거북, 문어, 나무, 외국인 이주민, 그리고 그들과 주류로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 야생 동물이 인간 세상에 들어오기까지 혹은 혐오동물로 전락하기까지, 그리고 동물실험을 비롯한 동물학대, 이주 노동자, 군 의문사, 존엄사, 노화, 자연의 순리와 생명의 순환, 생동성, 그리고 각각의 생명체들이 갖는 생의 경이로움 등 에세이를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잠시 머물다 흘러갔다. 


내가 줄줄이 늘어놓은 단어들만 보면 상당히 심각한 글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은 제법 묵직하고 심오한 현상들이 우리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고 있음을 얘기하고 있다. 약국을 드나드는 이웃들에게서, 극지방뿐 아니라 동네마다 하나쯤은 있는 뒷산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친구와 나누듯 담담하게 써내려간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작가가 발췌한 소설과 시와 옛 문헌의 일부들, 그리고 소소하지만 늘 바쁜 일상에서 잠시 갖는 철학적 사유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어려운 철학이 아닌 우리의 삶 속, 찰라의 순간에 떠오르는 그 수많은 생각들이야말로 철학이 아니랴. 


지난 주말에 엄마와 밥을 먹으면서 내가 알고 있는 엄마 친구들의 안부를 물었더랬다. 북가좌동(책에서 이 동네 이름이 나와 불현듯 떠오른 아줌마)에서 경영식집을 하던 친구분은? "걔 죽은 지가 언젠데." 절친 숙이 아줌마는? "절교했다." 노인들이 무슨 절교냐고 했더니 절교할 때는 노인이 아니었다나... .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나는 그렇게 나도 모르는 새에 잠깐 알았다가 잊어버린 이들을 하나둘씩 떠올렸다. 


도시에서 사라져가는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싶다는 작가.
에세이를 다 읽은 후 이전에 읽었던 그의 몇몇 소설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작가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 소리없이 사라져 간 이야기들을 쓴 거였구나... 라는 것을.




사족
마토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신시아 라일런트의 <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라는 책이 생각났다. 그림책 속 할머니는 자신이 죽으면 혼자 남겨질 강아지가 안쓰러워 마당에 들어선 길강아지를 선뜻 들이지 못한다. 누군가 노년에 반려 동물을 키우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노년에 반려동물의 죽음을 감당하는 것도, 동물을 혼자 남겨두는 것도 두렵다는 이유에서다. 마토의 이야기를 읽으니 사실 반려동물을 들이기가 더 조심스러워졌다. 말도 통하지 않는 그들과 어떻게 마음을 주고 받아야할지, 이미 많은 죽음을 보아온 내가 또 하나의 죽음을 보탤 용기가 있을지(물론 인생사,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사고나 질병없이 순리대로 산대면야), 잘 모르겠다. 



p107
아세트아미노펜 300밀리그램과 카페인 30밀리그램을 먹어서 나아지는 것이 몸의 통증만일까? 마음이 아플 때도 누군가는 진통제를 먹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기엔 내가 너무 어렸던 건지도 모른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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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의 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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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 청년의 군 입대 성장기 혹은 연애소설이라고 단순하게 정리하기에는 이 소설은 너무나 영리하고 나름 복잡하다. 역사적 사건을 풍자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소설 속에서 반란의 주동자이자 실존 인물인 뿌가쵸프를 미워할 수 없게 묘사한 소설의 마지막에는 '~카더라'로 끝내면서 교묘하게 한 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인다. 
(현대 소설에서 이러한 방식을 사용한 몇몇 작품들이 있는데 제목이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에 의해 어느 연대의 중사로 등록된 뻬뜨루샤는 열일곱 살이 되어서 마침내 군 입대를 하기에 이른다. 군복무를 하게 되어 뻬쩨르부르그에서의 화려한 삶과 자유를 상상하면서 기뻐했는데, 그의 희망에 찬 상상은 보기좋게 날아갔다. 아버지는 아들을 제대로 사람 만들어보겠다는 취지에서 오렌부르그로 보내버린다. 하지만 뻬뜨루샤의 낙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아버지의 옛 동료인 안드레이 장군은 오랜 친구의 뜻을 존중해 그의 아들을 끼르기즈 까이사쯔끼 초원에 접경한 외딴 요새인 벨로고르스끄로 배속시킨다. 산 넘어 산이다. 만사 포기한 뻬뜨루샤의 군 입대는 시작부터 좌충우돌이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의 변곡점을 찍게 될 결정적 인물을 외딴 요새에서 만나게 된다.  



소설의 중반부까지는 상당히 유머러스하고 유쾌하게 진행이 되는데, 등장인물들의 인연이 후반부에 큰 영향을 미친다.  


소설은 1773년부터 2년에 걸쳐 실제로 일어났던 뿌가쵸프의 농민 폭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앞서 썼듯 실제 사건을 소재로 당시 서민들의 피폐한 삶을 에둘러 서술하는데,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개인의 삶이 지향하는 소박한 만족과 행복이다.  


풍자소설에 가까운 작품은 백성의 처지나 군사력을 따져가며 현실적인 대안없이 그럴싸한 말로 포장해 원론적인 내용만 반복하면서 봉쇄령을 고집하는 러시아군 장교들과 제 말이 맞다고 헐뜯기에 바쁜 까즈끄 장수들의 모습에서 당시 사회 지도층을 꼬집고 있다.   


입대와 함께 화려한 삶을 기대했건만 오지로 발령이 나면서 가득했던 불만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진다. 위기와 고난을 이겨내는 동안 뻬뜨루샤가 열망하는 것은 출세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을 데리고 귀향하는 것. 작가는 한편으로는 정부의 폭정과 농민 폭동으로 피폐해진 서민들의 삶을 서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뻬뜨루샤의 깨달음을 통해 역사라는 거대한 굴레 안에서 미미하게만 느껴지는 민중 한 명 한 명의 삶이 갖는 소중함을 얘기한다.   



요새가 함락되고 사령관과 부관은 살해 당했고, 남은 군사들은 무기를 빼앗긴 채 허수아비가 되었다. 뻬뜨루샤는 무엇을 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조국 수호에 기여해야 하는 군인으로서의 의무도 이행해야 하고, 사랑하는 여인도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뻬뜨루샤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까? 이러한 딜레마는 의외로 쉽게 답을 찾는다. 뻬뜨루샤가 화를 면하게 된 것은 오래 전 눈보라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남자에게 대단치 않은 호의를 베푼 덕분이었다.


뿌가쵸프는 안다.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유사시에는 아주 쉽게 그의 목에 칼날을 내밀 것이라는 사실을. 어쩌면 우리는 온갖 핑계를 대며 칼자루를 수시로 바꿔쥐는 쉬바브린이나 폭도들과 비슷하게 처세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죽은 고기를 쪼아먹는 까마귀가 아니기를.   


한마디로 작가는 반복되는 상황을 통해서 인생은 새옹지마이자 역지사지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어떻게 삶을 살아야할지를 고찰하게 한다. 



까자끄 인들은 뻬뜨루샤가 첩자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하며 모두들 그를 사형해야 한다고 난리다. 그러나 뿌가쵸프는 눈보라가 친 그날, 뻬뜨루샤가 사준 술 한 잔과 추위를 막을 토끼 가죽 외투를 잊지 않고 (그의 입장에서) 선처를 베푼다. 우리가 살면서 필요한 건 이런 마음이 아닐까. 누군가에게 나눈 선의는 잊되, 받은 선의는 잊지 않는 것. 아마도 우리는 이와 반대로 기억하고 행동하기에 많은 부분에서 무언가 억울해 하고 불만이 커져가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마지막, 뿌가쵸프와 뻬뜨루샤의 시선이 마주치고, 뿌가쵸프가 고개를 끄덕이던 그 순간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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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거시제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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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형식으로 사랑, 언어, 고독, 입시, 현실의 모순, 인공 신체 등을 유쾌하게 풀어내고 있다. 아홉 개의 중.단편이 실린 소설집인데, 각 작품마다 들었던 짧은 생각들이다. 







[수요곡선의 수호자]
인간의 내면과 감정을 가진 것도 모자라 해탈에 이르는 로봇 마사로. 수요곡선을 상승시키기 위한 로봇을 개발한다는 상상이 기발하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이미 과잉생산 및 공급 시대로 접어들었다. 자동화시스템으로 일자리는 현저히 줄어들어가고, 저가 소비가 늘면서 쉽게 쓰고 쉽게 버리는 게 일상화 되어 세계 곳곳에 쓰레기산은 높아간다. 더하여 인공지능의 예술 창작까지 가능한 연구 개발을 서두르는데, 도대체 인간의 영역을 얼마나 좁히려 하는 건지. 앞으로 인간은 숨만 쉬고 살 작정인가. 



[치카타파의 열망으로]
소설은 22세기의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읽다보면 코비드19 시국을 기점으로 급변한 사회상을 허구적으로 보여주면서 대감염병 시대에 폭발한 문제들이 과연 감염병만이 원인이었을지를 고찰한다. 


언어와 문자에서 격음이 사라지고 예사소리로만 이루어진 언어 체계로 바뀐 미래 시대. 거센소리가 사라진 언어는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듯 하지만 시대의 정서를 발화하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느껴진다. 문득 조만간 한글의 문자 체계에서 거센 소리, 된소리가 사라지는 것을 넘어 모음이 아예 소멸하는 건 아닌지 갑자기 걱정이 된다. 



[미래과거시제]
작가의 우려(?)대로 이 소설은 사랑 이야기로 읽힌다. 다만 언어와 묶여 더 아름다운 사랑 소설이 됐다고 생각한다. 그냥 나 혼자의 생각으로 이 소설 앞에 배치된 <치카타파의 열망으로>의 대학원생이 강은신은 아니었을까라는 재미진 상상을 해봤다. 



[접히는 신들]
종이접기 천재 은경의 말을 듣다보면 영화 <트랜스포머>가 생각난다. 따지고 보면 자동차에서 스탠드형 로봇으로 젼환하는 그들의 전환 방식이 종이접기와 뭣이 다른가 싶고. 그런데 이 소설에서 2,3차원의 물질을 접는 것뿐 아니라 공간을 접어 활용한다는 발상, 그리고 무기, 심지어 사람까지 접어서 수송할 수 있으며, 물건의 용도 자체가 새롭게 형성된다는 상상은 얼마나 기발한지. 물론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공간이 접어지는 시대에는 정말 영혼도 접어서 수송이 가능할까. 



[인류의 대변자]
하필 소설의 그 지점에서 카모마일차를 입에 물고 있었다니. 정말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모습으로 입 안에 있던 물을 뿜어내고 사레가 들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한참을 웃었다는. 아무렴, 그날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지. 외계인도 예외없이, 그날 하루 만큼은 우주와 지구의 평화도 일단 보류. 뒤에 실린 작가 노트를 보면 나는 <인류 대변자>를 작가가 의도했던 바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해석한 것 같다. 



[임시 조종사]
판소리 버전 SF소설. 판소리 장단에 맞춰진 서술 방식이나 근대 이전의 옛말을 사용한 것도 인상적이지만 배경 역시 옛 시대부터 미래까지 아우르고 있어 머릿속에서 소설이 영화 필름처럼 그려지며 읽는 맛이 있다.  


나는 생뚱맞게 영화 <대호>가 생각났다. 그곳에 로봇만 드문드문 보인다면, 하임의 출정 장면은 이와같지 않을까..., 더하여 내가 경험할 수 없었던 한 시대였구나, 라는 생각. 그리고 비장한 와중에 툭툭 튀어나오는 유머! 



[홈, 어웨이] 
일 년에 몇 번쯤 야구 직관을 하는 나는 가끔 3루 베이스 관중석에서 관람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라는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아직까지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원정팀 응원. 올해는 꼭 한 번 해봐야겠다...라고 생각하다가도 어우... 생각만 해도 너무 외로울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덧, 이 소설은 야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절반의 존재]
인간은 이미 실제로 크고 작게 인공물에 의지하고 있다. 작게는 보청기부터 골절, 인공 장기 등 치료와 미용을 위해 대체제를 사용한다. 심지어 동물 장기 이식까지 연구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이런 점을 소재로 삼아 미래를 그린 여러 소설에서 '인간'을 규정하는 기준 혹은 경계에 대한 얘기는 적지 않다. 이 단편소설 외에도 다른 책들을 읽다가 든 생각은 인종, 성, 성소수성 들을 대하는 우리의 사고 방식과 큰 차이가 없다는 데에 미쳤다. 지하임이 인간이냐 아니냐가 왜 중요할까. 누군가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본인을 제외한 타인들에게 왜 중요한 잣대가 되어야 할까. 


다와도 요코의 소설들에서 보이는 인물들처럼 스스로 만들어가는 정체성이야말로 큰 힘을 발휘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알람이 울리면]
J 여사가 예전에 하신 말씀이 있다. 오래 사는 게 아무리 좋아도 한 시절을 함께 살아온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혼자 남아 살고 싶지는 않다고.  


시간이라는 영역에서 빠져나와 혼자서 '멈춤' 상태로 있다는 것, 과연 슬픔도 기쁨도 외로움도 아픔도 박제될 수 있을까. 문득 예브게니 보돌라스킨의 소설 <비행사>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50년만에 냉동보존상태에서 깨어난 그는, 살아있음에 행복했던가. 


ㅡ 


이 책을 읽다보면 참 묘해진다. 분명 실린 소설들이 독립적인 작품들인데, 마치 시간여행을 하듯 차원을 옮겨가며 작품이 실린 순서대로 이어지면서 한편으로는 단정할 수 없는 어느 지점에서 만나는 듯한 느낌이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나만 그런지도 모르겠다만). 개인적으로 연작 아닌 연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편 소설집이지만 실린 순서대로 읽기를 권하며, 완독을 하면 표지의 그림이 아주 잘 납득이 된다. 매 작품마다 <작가 노트>가 실려있는데, 미니 북토크같은 느낌이 있어 이런 부분도 소소한 재미로 다가온다. 무거울 수 있는 소재와 주제들인데, 읽는데 너무 무겁지 않아서 좋았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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