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슈 파랑
기 드 모파상 지음, 송설아 옮김 / 허밍프레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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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편 소설 네 편이 실려있다. <사랑>을 제외한 세 작품은 풍자와 해학, 유머와 위트가 소설 전반에 흐른다.  



사냥꾼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암컷 오리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수컷 오리. 
이시도르의 일탈이 과연 방종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너무나 천진한 테오듈 사보의 고해성사.
무슈 파랑의 복수, 그 이후가 궁금하다. 





 



책을 읽다보면 등장인물들의 표정이 눈에 그려져 웃음이 절로 나온다. 특히 <위송 부인의 장미청년>과 <테오듈 사보의 고해성사>는 영국인에 대한 프랑스인의 적대감, 종교와 신앙심에 대해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인간이 가진 다양한 면모와 성격을 입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익살꾼 사보는 교회와 신부를 싫어해 평소에 얄미울 정도로 신부를 놀림감으로 만든다. 그런데 큰 공사비가 걸린 교회 보수 사업이 시작되자 돈 욕심에 자존심을 버리고 신부를 찾아가 그가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이며 고해성사를 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모파상은 이러한 장면들 하나하나에 인간 사회가 갖는 모순과 부조리를 위트 넘치는 화술로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위송 부인의 장미청년>에서도 마찬가지다. 강요된 정조를 지키는 처녀를 찾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위송 부인의 의도 자체, 그리고 청년 이시도르의 탈선(?)에서 인간의 이중성을 꼬집고 있다.  



<무슈 파랑>에서는 유년시절부터 그를 키우고 어머니의 임종까지 지켜준, 한마디로 어머니와 다름하지 않으며 폭군에 가까운 늙은 가정부 줄리와 제 주장이 강하고 이기적인 아내 앙리에트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두 여자 사이에서 지레 죽을 판인 파랑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여기까지는 이 소설도 해학적이라고 생각했으나 이후부터는 분위기가 전혀 달라진다.  


독자는 아들 조르주의 친부를 밝히는 데에 있어서 파랑의 갈등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진실을 알든 모르든 각기 다른 이유로 의심과 고통에 짓눌릴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이러한 갈등은 치정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여러 갈래에서 맞닥뜨리는 딜레마다. 파랑은 이 문제를 두고 20년 가까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는 끝까지 해법을 찾지 못한다. 그가 아내의 외도를 알게 된 이후 긴 세월 동안 우울과 상실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이유가 이에 대한 혜안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읽다보면 '이렇게 괴로워하느니 차라리 진실을 알고말지' 싶은데, 문득 얼마 전 온라인 북클럽에서 어느 분이 '천성'에 대해 한 말씀이 떠올랐다. 그야말로 노력으로 어쩌지 못하는 타고난 성정이라는 게 사람마다 있으니 파랑도 그런 게 아닐까라는 생각(더 당황스러운 건 아내가 유책 배우자인데 파랑이 생활비로 매달 만 프랑을 지급한다. 그것도 외도 상대 남자와 함께 사는 아내에게)도 들고. 어쩌면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일 수도 있고. 


아무튼 파랑은 자신이 비극적 폭탄을 맞았던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에게 복수한다(이성적으로 말하자면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이들을 상대로 고통받지 말고 당신의 삶을 살라고 말해야겠지만, 파랑의 복수에 나는 속이 다 시원했다. 조르주는 아무 잘못이 없다만). 복수 이후 파랑은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가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소설에 그려지지 않는다. 독자가 그의 마음을 짐작해볼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다른 독자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이 소설에서 데이지(위대한 게츠비), 키티(인생의 베일), 이디스(스토너)를 능가하는 비호감 캐릭터가 등장한다. 파랑의 아내 앙리에트. 그녀가 파랑과 결혼을 한 이유만으로도 예사로운 사람은 아닌데, 한 술 더 떠 파랑이 자신을 돈으로 샀기 때문에 짜증난다고 말한다(파랑의 입장에서 그런 생각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는 파랑의 '선의'가 어리석음이고, '신뢰'가 갑갑함이라고 얘기하면서 그런 사람이 자신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증오한다고 소리치는데, 이는 결국 질투는 고사하고 아내의 외도를 알아채지 못하는 그의 무신경과 멍청함에 화가난다는 것이다. 죄의식은 고사하고 이런 사고회로는 어떻게 하면 만들어지는지... . 파랑과의 결별 이후 소설에서 간간이 보여지는 앙리에트 삶의 모습은 괘씸하지만 제 살 길을 잘 찾아갔다는 점에서 파랑보다 현명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모파상의 소설은 권선징악과는 거리가 멀다).


ㅡ 


네 편의 소설들은 모두 1880년대에 쓰여졌다. 당시의 시대성을 감안해도 인류가 마주하는 정서와 고뇌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자신도 모르게 타인에게 주는 상처, 진실된 사랑, 이해와 공존에 대한 의식 등 삶이 지속되는 한 꾸준히 생각하고 고민해야하는 것들을 돌아보게 됐다.  


그것이 우리가 모르는, 그리고 기억해야 하는 대다수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내는 힘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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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지에서 생긴 일
마거릿 케네디 지음, 박경희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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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8월 22일, 소설의 프롤로그에서는 절벽의 붕괴로 펜디잭 매너 호텔이 주저앉아버렸고, 사망자와 생존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미리 알려준다. 책을 읽으면서 독자가 궁금해지는 부분은 과연 누가 살아남았으며, 어떻게 생존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등장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호텔 주인인 시달 가족부터 투숙객에 이르기까지 평범하지 않다. 너나할 것 없이 이기심, 자만과 교만, 거짓과 비열함, 나태와 무관심, 허영과 위선, 폭력과 완고함, 자격지심과 피해의식 등으로 뒤엉킨 인간군상의 집합소처럼 그려진다.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인 레이디 기퍼드, 타인의 불행을 통해 즐거움을 찾는 미스 엘리스, 형의 헌신과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더프와 로빈, 자식을 편애하는 것을 정당하게 생각하는 시달 부인, 자신이 세상에서 중요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랙스턴, 강압적인 아버지 때문에 자존감이 바닥에 있는 이밴절린, 희생을 통해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했던 제리, 딸을 잃고 감정을 공유하지 못하는 페일리 부부, 마치 세상사에 있어 초월자인 양 구는 은둔자 딕 시달, 세상의 모든 불행을 짊어진 사람처럼 구는 코브 부인, 자격지심에 엇나가는 열 살 소녀 히비와 다른 모습이지만 같은 아픔을 안고 있는 코브가의 세 자매 등 이들 외에도 우리 주변에서 있을 법한 인물들이 이야기를 엮어간다. 



우리는 종종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을 구속하고, 어느 누군가의 친절과 헌신에 감사하지 않는다. 타인의 상실과 슬픔에 대해서 가벼운 위로를 던지면서 곧 잊어버리고, 나의 결핍에는 과장되게 고통을 지운다. 무심함이 세련됨이라고 착각하는 세태 속에서 자신의 행운보다 타인의 불행에 더 희열을 느끼는 미스 엘리스의 모습이 소설 속 캐릭터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ㅡ 


소설은 목요일에 펜디잭에서 머무는 사람들의 열띤 논쟁에서 절정을 이룬다. 정치, 권력, 평등과 공정, 신분, 차별, 돈, 이념, 도덕 등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의 생각을 쏟아내는데, 그들의 말만큼이나 행동이 일치하는 인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가난해 본 적이 없는 자가 말하는 가난이 가져다주는 행복, 타인에 대한 배려와 너그러움이 없는 자가 말하는 교양, 자신이 가진 힘을 비열하게 사용하는 자가 말하는 계급투쟁, 자식을 억압하고 강요하는 자가 말하는 신의 사랑과 가르침,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자가 말하는 공정, 제 처지에 대한 분노로 가난이 모든 죄의 면죄부인 것처럼 항변하는 과부, 비열한 처세술로 살아가면서 노동의 가치를 부르짖으며 노동량과 노동 시간 단축을 주장하는 하층민, 가난의 원인을 개인의 무력과 게으름에 두고 그들의 욕망을 허영이라고 단정하는 상류층 인사, 골방에 틀어박혀 가정사를 포함해 주변 모든 일을 외면하면서 사회적 구조의 결함과 도덕불감증을 지적하는 은퇴한 법조인. 세상의 부조리를 조목조목 짚는 그들의 말은 틀리지 않다. 모두 옳다. 하지만 그들의 성토는 공허한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페일리 부인이 스스로의 권리를 지켜내기 위해서라면 싸움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이밴절린에게 건넨 조언, 딕 시달이 말하는 자만심과 자존감, 그리고 인내와 굴종의 차이, 삶과 사람이 중요하며 인간은 모두가 외롭고 누구도 타인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다는 낸시벨의 깨달음은 눈여겨 읽을 만 하다.  


붕괴사고에서 살 수 있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다. 만약 그 기회들 중 단 한 번이라도, 어느 한 사람이라도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들은 모두 살았을 것이다. 펜디잭 호텔에 머무는 사람들은 각자 제 말만 하기에 급급하고 누구의 말도 경청하지 않는다. 생존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살아있는 이유가, 소설이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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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드는 밤
엘리자베스 하드윅 지음, 임슬애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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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6월이다. 당분간 무엇을 하며 살지 정했다. 바뀌어버린, 심지어 뒤틀려버린 기억을 과제로 삼아 이 삶을, 지금 살고 있는 삶을 계속 살아갈 생각이다.
(첫문장)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기억을 더듬으며 마치 의식의 흐름처럼 편지, 독백, 유추 등의 형식으로 써내려간다. 화자는 1인칭 시점의 '나'인데, 작가 엘레자베스 본인을 소환한 듯 보인다.  


소설은 엘리자베스의 가족, 동료, 친구 외에 지인들 혹은 직접 관계를 맺은 적은 없지만 건너건너 말로만 들었던 이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직업, 인종 및 국적, 사회 계층도 저마다 다 다르고, 화자가 추억하는 기억의 장소 역시 여러 곳이 등장한다.  


소중한 친구 M을 시작으로 후아니타, J, 주디스, 미스 크레이머, 알렉스, 라일, 마리, 루이자, 닥터 Z와 시모너, 조젯, 아이다, 안젤라, 마이클, 미스 라보어 등등. 


보스턴, 뉴욕, 암스테르담, 또다시 뉴욕. 
1940년대 뉴욕, 52번가의 비밀스런 재즈 클럽, 재즈와 트럼펫, 그리고 진심어린 허무주의, 할렘의 거리.  



소녀 시절 성인 남성과의 교제를 통해 터득한 기브 앤 테이크의 이치, 지역 교사 자격증 취득, '타락'이라는 단어조차 달콤했던 소녀 시절, 어린 시절의 유원지 댄스장, 학창시절의 댄스파티, 경마장의 기억, 장난스런 포옹과 댄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불면의 밤, 이혼, 권태, 질투, 상실과 아픔, 흔들리고 슬프고 격렬한 중년의 나날들, 그리고 뉴욕의 서재. 


가정 살림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매춘을 하고 결국 성병으로 죽은 아가씨, 과거의 방탕한 생활을 숨기고 살아가는 교사들, 파도와 같았던 어머니의 여성성, 스스로를 좋아하지 않았던 알렉스의 삶의 목적, 가정 폭력과 근친 강간과 난치병이라는 불우함 속에서도 지켜내야하는 것들을 지켜내려 하는 조젯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  


화자는 자신이 살아온 경험, 오랜 시간 지켜봐온 사람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하는 자기만의 상상을 통해 인생을 고찰하고 사유한다. 


냉철한 지식, 삶의 미완성, 사라지는 희망, 독신과 결혼, 홀로 살아가는 삶, 여행, 도시, 예술, 노동, 관능, 청춘, 부모와 가족, 무심과 무감, 인내, 삶의 결핍, 부부 간의 사랑과 헌신, 불륜, 지옥에서의 생존과 그 이후의 삶, 가족의 죽음, 은퇴, 새로운 삶의 시작. 


우리네 삶에서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는 수많은 파도들을 하나하나 맞닥뜨리며 실망하고 체념하며 상실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하지만, 다시 사랑하며 손을 맞잡고 춤을 출 수 있는 것이 인생임을, 그러니 서로를 연민하며 살아가야함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 



1916년에 태어나 이 소설을 예순세 살에 출판했고, 91세에 별세한 작가. 아흔의 작가는 삼십여 년 전의 자신의 사유를 어떻게 생각할지 무척 궁금해졌다. 책을 읽다보면 간혹 만나고 싶은 작가가 있는데 이 분이 그랬다. 


문장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불현듯 떠올랐다는 듯이 툭툭 내뱉는 문장들 하나하나 공감하지 않은 문장이 없었다. 필립 로스는 '이 소설에서는 문장 하나가 사진 천 장을 대신한다'라고 평했는데, 개인적으로 책의 표지처럼 문장들이 별가루 같았다.



p186.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은 고통. 거기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 위장할 뿐, 형용사의 날개를 달고 도망칠 뿐. 문단의 끝에서 단검에 찔리는 것은 달콤하지. (...) 다 잊어버리고, 나는 아끼는 사람들의 기억에 남고 싶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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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정원
홍준성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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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늙은 식물학자 얀코가 일곱 살때인 1092년을 시작으로 병을 앓으면서 죽음을 기다리기까지 그녀가 기록한 천 장의 메모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미스터리한 사건을 추적한다.    



무차별적인 학살이 벌어졌다. 빈민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구는가? 마치 인구수를 줄여서 식량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처럼, 여느 때처럼 늘 있어왔던 흔하디흔한 식량 폭동일 뿐인데. 그날의 진압은 확실히 이상했다. 빈민들 대다수는 곡물관리청을 점거하고서 최후의 저항을 준비 중이었는데, 정작 계엄군이 향한 곳은 서쪽 골목에 있는 로벨토 가街였다. 똬리나무가 발견됐던 지하철 공사 현장. 그리고 수 년이 흐르는 동안  똬리나무와 관련된 사람들은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면 죽음을 맞았다.  








프롤로그부터 무척 흥미진진한데, 이 소설의 재밌는 점은 시간적 배경이다. '기적이 사라진 해'로부터 약 천 년이 지난 뒤다. 그런데 기적이 사라진 날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배경이 11~12세기 무렵으로 나타나지만, 현실에서 봤을 때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인지, 미래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즉 시.공간적 배경이 모두 허구라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전작인 <카르마 폴리스>의 대홍수를 기점으로 천 년여가 흐른 뒤의 비뫼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아님 말고). <카르마 폴리스>의 고아 소년 '42' 역시 몬세라토 수도원 부속 고아원 출신이다.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는 그들만의 논리와 방식은 작금의 현실을 꼬집고 있음은 아닌지.  



하인학교에 들어간 얀코가 애정을 갈구하며 칭찬받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다른 고아 하인후보생들과는 달리 우등과 낙제 사이의 회색지대에 머물며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으로 행운을 거머 쥔 죄책감을 달래는 모습은 흡사 우리의 모습같다. 적당한 위선과 위악 사이에서 누구나 그렇다는 것을 핑계 삼으며 타인의 고통에 슬그머니 한 발 물러나는 나의 모습이기도 하고.   


그러한 얀코를 조건없이 지켜주는 두 사람이 있다. 고아원 친구 난쟁이 참토, 그리고 연인 비나드. 고아원에서부터 남방한계선까지 얀코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나타나 헌신적으로 얀코의 보호막이 되어 주었던 참토와 동료들의 참혹한 고통과 죽음 앞에서도 연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던 비나드를 통해 얀코는 생각했다. 억울하고 비참하기만 했다고 여겼던 자신은 과분한 삶을 산 것이라고.  


얀코가 그토록 지하의 똬리나무에 집착했던 이유는 복수였다. 복수가 아니라면 살 명분이 없었고, 어쩌면 살기 위해서 명분을 만들어야만 했을테니까. 얀코는 수시로 자문한다. "나는 왜 살려고 하는가." 



사랑과 비극, 분노와 복수, 고독과 회한, 기억과 망각, 후회와 미련, 연민과 우정, 삶과 죽음에 대해 통찰하면서 우리 사회가 여전히 안고 있는 수많은 부조리와 모순들을 짚어낸다. 산업재해, 우생학, 농업의 붕괴와 그에 대한 여파, 국제 경제의 모순, 공기업의 부패, 빈민 구역의 건물 붕괴 및 화재 사고, 시대의 변화에 따른 산업의 흥망성쇠, 이슈를 이슈로 덮는 정치 프레임과 언론 조작, 여론몰이 등 그야말로 정치, 경제, 산업 등 전반적 현대사를 아우르며 한국뿐 아니라 현재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들을 절묘하게 엮어내면서 우리의 미래를 그리고 있다.   


얀코는 젊은 시절 문득, 자신이 이 저주받은 도시에서 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필사적으로 병마와 죽음에 저항하면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는, 노쇠한 얀코가 남기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ㅡ 


올리버 트위스트, 레 미제라블, 고골의 페테르부르크가 존 르카레의 형식을 띠며 철학적 사유를 하는 소설,이라고 한다면 이 소설의 그림이 그려지려나? 구성도 얄미울 정도로 극적이다. 매 장章이 연이어 서술되지 않다보니 대충 읽을 수가 없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고 진실을 향해 달려간다. 그런데 마지막, 비나드의 편지는 너무나 부드럽고 사랑스러우며 희망적이라서 더 슬프다. 책을 읽는 동안 수많은 생각들이 엇갈리고 작가의 철학적 사유에 나의 생각을 실어보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화룡정점은 얀코에게 쓴 비나드의 편지다. 


얀코와 함께 떠날 수 있었던 비나드. 그랬다면 두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비나드의 편지는 왜이렇게 애달픈지, 이 편지를 읽었을 얀코는 어떤 심경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기에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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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곳에서 온 언어
미즈바야시 아키라 지음, 윤정임 옮김 / 1984Books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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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시작부터 저자는 왜 그토록 프랑스어의 세계로 들어서고 싶어 했던걸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 본인이 자문자답한다. 1970년대 일본 대학가는 여전히 정치가 큰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고, 68사태의 후유증은 대학에 잔혹한 모습들로 남아 있었다. 대학생인 저자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말들의 공허함이었다. 생기 잃은 단어들, 속 빈 문장들, 실체 없는 말들이 번식하며 안착하지 못한 채 부유하고 있었다. 온갖 매체를 통해 쏟아지는 말들, 대형 광고판에 쓰인 어휘들, 전단지에 인쇄된 담론들, 이러한 것들이 일상의 언어를 구성했고, 저자는 그 모든 것에서 불쾌감을 느꼈다. 이 부분이 책의 초반부에 서술되는데, 개인적으로 상당히 공감했다. 








그는 보편화된 언어 인플레의 느낌에 쫓기고 있었고, 도피의 선택지이자 유일한 타계책이 프랑스어였다. 저자가 프랑스어를 좇게 된 결정적 사건은 일본의 철학자이자 에세이스트 모리 아리마사의 저서 <노트르담 멀리에서> 나오는 '경험'에 대한 글이었다. 진정한 말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에 대해 얘기하는 글이 그에게 격동을 일으켰다는데, 사실 이 부분이나 이후에 서술되는 언어와 음악에 대한 얘기들을 읽으면서 저자의 기질적인 면도 적잖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싶다.  



어린 시절 내내 들어왔던 형의 음악은 저자를 그에게 있어서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어로 이끌었다. 형에게 음악이 그렇듯, 프랑스어는 저자에게 부성父性의 언어다. 인내심을 요구하는 훈련의 대상이자 작업의 대상, 자신과 혼연일체가 된다는 점에서 저자에게 프랑스어는 음악이었다.  


십대 후반,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듣고 또 들었던 저자. 그의 프랑스어에 대한 사랑은 모차르트에 대해 지녀 왔던, 그리고 지금도 여전한 그 사랑에 의해 부양된 것이다. 그가 모차르트, 특히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매혹되었던 것은 무엇일까? 모차르트의 중간적 위치, 그리고 모짜르트가 존재와 외양 사이에 가식없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며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하녀이면서도 귀족과 성직자를 상대로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수산나에게서 상당한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아니나 다를까 글의 후반부에 수산나에게 매료됐음을 고백한다.  


서문을 시작으로 2부에 접어들기 전까지 불현듯 떠오르는 음악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이었다. 듣는 것으로나 연주하는 것으로나 베토벤 소나타 중 가장 아끼는 곡인데, 덕분에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함께 했다. <피가로의 결혼>을 들으면 좋았으련만 독서 중에는 가사 있는 음악은 사양이라... .  


ㅡ 


일본 - 프랑스 - 일본 - 프랑스 - 일본으로 이어지는 언어적 이방인이 쓴 이 에세이는 조금 독특하다. 저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한 것도 아니고, 이중 언어 환경에 내몰린 것도 아니다. 모국어에서 느껴지는 한계를 타파하고자 스스로 앞으로 살아갈 언어를 선택했다. 저자는 장 자크 루소와 장 스타로뱅스키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을까? 



오늘날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를 내보이려 하지 않는다. 사회적 거래에 속하는 온갖 가치들은 인간 존재의 진정한 개인성을 은폐한다는 이유로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현대 사회의 만연한 언어 인플레 속에서 기만당하는 인간의 고통을 얘기한다. 정지된 단정적 사유나 분명한 관념들이 아니라, 사유에 대한 노력, 이탈과 유배의 노력이 중요하며 틀에 박힌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저자가 지향하는 바다. 


저자는 중도, 중개적 상태, 불완전한 중간을 좋아한다. 그것은 더 이상 순수한 상태라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상태의 온갖 구성적 특징도 아직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언어뿐 아니라 그가 일본과 프랑스라는 중간에 있는 실질적 위치와도 연관있어 보인다.  


저자에게 프랑스어는 구어口語일 뿐만 아니라 문어文語이다. 그럼에도 저자의 구어체 프랑스어에는 뭔가 자연스러운 면이 결여되어 구어의 차원으로 적절하게 흘러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꾸준한 의식의 경계 태세를 유지했고, 서른다섯 해 만에 자연스러워졌음에도 자기 검열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책으로 만난 저자는 모국어 정체성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듯 하다. 오히려 언어를 선택해 가족 공동체의 언어로 정립해가는 과정을 흥미로워하는 것 같았다.  



쉰여덟 살, 그의 인생의 삼분의 이를 프랑어로 살아 온 저자는 더 이상 민족지적인 의미에서 일본 공동체에 있지 않다고 느끼고, 국적의 소속에 따라 그가 규정되어지길 바라지 않는다. 한편으로 존재 깊숙한 곳에서 태생적 언어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느낌을 갖도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긍정한다. 물론 그는 프랑스인이 아니고, 프랑스에 머문 기간은 고작 7,8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원적 영토에서 벗어나 있다는 데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저자는 스스로 일본인도 프랑스인도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다.  


자신에게 이방인의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타자의 관점으로 관조하는 언어로 인해 프랑스어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어에 대한 애착도 느낀다. 그에게서 프랑스어가 사멸할 때 스스로를 죽은 사람으로 여길 것이라는 말에서 저자의 프랑스어에 대한 애착과 자신이 부여한 정체성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유년의 형상인 일본어, 분신의 형상인 프랑스어. 말, 그리고 언어가 갖는 힘에 대한 찬사. 언어는 단순한 말을 넘어서 삶의 장소를 만들어내는 일임을 이 책을 통해 느끼고 저자의 감정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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