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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없는 세계
미우라 시온 지음, 서혜영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평점 :
음식점 엔푸쿠테이에서 일하는 후지마루. 언젠가는 엔푸쿠테이의 주인 쓰부라야처럼 멋진 요리사가 되는 꿈을 키우며 열심히 일한다. 열흘에 한 번 T대 자연과학부 식물학 교수 마쓰다 연구팀에 점심을 배달하면서 후지마루는 식물의 세계를 처음 접하게 된다. 마쓰다 교수팀의 대학원생인 모토무라를 통해 좀더 식물에 가깝게 접근하고, 팀원들과도 친해지면서 (식물)과학을 향한 연구자들의 순수한 열정에 감동한다.
모토무라의 배려로 연구 중인 애기장대 잎의 단면을 현미경을 통해 처음 본 후지마루는 새로운 세계를 맛보며 연구 열정이 가득한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두 번 고백을 하지만 모두 거절 당한다. 비록 거절당했지만 모토무라가 연구에 집중하기 위해 연애와 결혼의 의사가 없기 때문임을 밝혔으므로 그들은 여전히 친구같은 관계를 유지한다.
오로지 식물 연구에 대한 열정으로 개인 생활을 포기하면서 매진하는 연구원들. 그 과정에서 식물학을 연구하는 학생이나 연구원들의 고민 들이 드러난다. 기업에 취직한다는, 학교에 남아 교수가 될 수 있다는, 창업이 가능하다는, 그 어떤 미래도 보장되지 않은 학문의 길. 그 길 위에서 이미 경제적 자립을 이룬 동년배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때때로 여러 의미에서 불안하지만, 연구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기 위해 서로 위로와 격려를 주고 받으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는다.
161.
"그러나 '배가 고프니까' '맛있고 예쁘니까'라는 기분은 인간의 깊은 곳에 자리한 중요한 욕구입니다. 기초연구도 같은 욕구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알고 싶다'는 마음은 공복감과 비슷해요.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지 않고는 배갤 수 없기 때문에 연구하는 겁니다.
식물(연구)와 결혼했다고 단언하는 모토무라는 '잎사귀 제어 시스템' 연구를 목표로 애기장대의 사중변이체를 성공시키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혼신을 다한 노력 끝에 드디어 사중변이체 떡잎을 성공시킨 모토무라. 논문 발표만 남겨둔 상황에서 오류를 발견한다. 처음 계획했던 'AHHO' 유전자가 들어가야 하는데, 실수로 'AHO' 유전자가 들어가 버린 것이다. 'AHHO'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고, 'AHO'로 하기에는 '잎사귀 제어 시스템'의 연관성을 확신할 수 없다. 모토무라는 고민 끝에 마쓰다 지도교수에게 털어놓는데, 마쓰다는 질책보다는 대안과 위로를 전한다.
349.
깜빡 실수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선입견 없이 잘 관찰하고 성실하고도 공정하게 계속 사실을 기록한다. 실패로 끝난다고 해도 생각을 거듭해서, 이 세계의 이치에 조금씩 다가가기를 계속한다. 자신의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왜"라고 질문을 던지며 수수께끼의 근본을 향하여 계속해서 연구한다. 그것이 실험이며 연구다.
학창시절 공부와는 담쌓고 산 후지마루지만 모토무라를 비롯한 연구원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무엇인가에 진지한 애정을 갖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집중한다는 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러면서 자신이 요리를 대하는 마음도 이와 같다는 생각에 설레고 흐뭇하다.
18.
자른 채소를 불빛에 비춰보면서 굉장하구나, 하고 빠져드는 때가 있다. 이것저것 다 누군가가 설계도에 기초하여 만든 것같이 아름답고 정묘하다. 채소만이 아니라 생선 내장의 배치, 뼈의 형태, 눈알이나 비늘의 질감도. 그때마다 후지마루는 생명체를 먹는 거구나, 하고 느낀다. (...) 후지마루는 말로는 잘 표현할 수 없었지만, 결국 요리란 건 생과 사를 잇는 멋진 행위라고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개념과 감정이 없이도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번식을 하는 것이 식물에게 자연스러운 것처럼, 좋은 사람을 만나면 호감을 느끼고 사랑할 수도 있는 것이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임을, 그것이 부담스럽고 불편한 일이 아님을 모토무라는 후지마루를 통해서 천천히 깨닫는다. 그녀가 사랑을 무겁게 여기지만, 그 무거움을 이기는 행복감을 느끼는 걸 보면 식물이 자라듯 모토무라 또한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96.
"식물에는 뇌도 신경도 없어요. 그러니 사고도 감정도 없어요. 인간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개념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도 왕성하게 번식하고 다양한 형태를 취하며 환경에 적응해서 지구 여기저기에서 살고 있어요. 신기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 그래서 저는 식물을 선택했어요. 사랑 없는 세계를 사는 식물 연구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누구하고든 만나서 사귀는 일은 할 수 없고, 안 할 거예요."
255.
'사랑이 무겁다......'라고 모토무라는 생각했다. 후지마루가 가라아게에 담은 사랑은 깨닫지 못했지만, 즐거워하는 부모님의 모습에서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는 느낄 수 있었다. 무겁지만 행복하다.
내성적인 가토가 선인장을 매개로 후지마루와 사이가 좋아진 것, 대학원 시절 자신이 부탁한 사진을 찍기 위해 산에서 추락사한 친구에 대한 자책감을 안고 있는 마쓰다 교수, 오랜 연구원 생활로 연인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은 이와마, 연구를 빙자해 대학 잔디밭에 식자재로 사용할 고구마를 심은 모로오카 교수 등 소소한 에피소드들 잔재미를 주지만, 무엇보다 자연과학부 식물 연구소와 온실 등을 묘사한 장면들이 삽화 한 컷 없이 독자로 하여금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소설의 구성은 이렇다 할 만큼 독특한 면이 많지 않고, 스토리 또한 극적인 사건 없이 일상적이고 평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 재미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처한 상황에서 애쓰며 살고 있는 건 모두 똑같다는 후지마루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렇지"를 연발하면서 따뜻한 늦겨울 햇살이 쏟아져들어 오는 창가에 앉아 이 소설을 읽고 있자니, 온실 한가운데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이번 봄에는 잎이 크고 넉넉한 식물을 들이겠다는 다짐을 둔다.
뭔가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그 사람이 걸어가는 길을 비춰주는 경우가 있구나,하고 그들을 보면서 모토무라는 실감한다. (...) 모토무라는 취미든 일이든 사람이든, 사랑을 기울일 수 있는 대상이 있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지탱하는 힘이 아닐까 하고 거듭 생각한다. - P229
언어도 없고, 기온이나 계절이라는 개념조차 없는데도, 식물은 정확히 봄을 알고 있다. 온도계나 일기장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건 초겨울의 따뜻한 날씨가 아니라 진짜 봄이다. 슬슬 여느 해와 같이 활발하게 생명 활동을 할 시기가 왔다‘라고 판단하고 기억한다. 반대로 인간은 뇌와 언어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는 건지도 모른다. 고뇌도 기쁨도 모두 뇌가 내놓는 것이고, 그것에 휘둘리는 것은 물론 인간이기에 맛볼 수 있는 묘미겠지만, 관점을 바꿔놓고 보면 인간은 뇌의 포로라고 할 수도 있다. 실은 화분의 식물보다도 더 좁은 범위에서밖에 세계를 인식할 수 없는, 자유롭지 못한 존재. -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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