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나 쇼팽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3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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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손가락이 잘린 시체. 그는 피아니스트일까요. 쇼팽의 음율과 소설의 조화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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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부족주의 - 집단 본능은 어떻게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가
에이미 추아 지음, 김승진 옮김 / 부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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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주의(부족주의)에 의한 폐해와 그에 대응하는 실패 사례를 통해 지향해야 할 바를 구제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미국인이 미국의 오류에 대해서 쓴 저서이기에 표면적으로는 괴리가 느껴질 수 있으나 이를 각 국가의 정당정치와 집단주의, 그리고 차별에 적용시켜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자는 베트남, 아프카니스탄, 이라크 전쟁과 베네수엘라에 대한 미국의 대응 사례와 자국 내 인종민족주의 및 이념의 정체성을 들어 극복하지 못한 집단주의의 원인을 지적한다.  
 
 미국내 집단주의와 차별에 대한 부분은 많은 생각을 들게 한다. 이는 한국 (정치)사회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여성과 남성, 경제적 지배층과 피지배층 등 차별과 서로를 향한 혐오는 곳곳에서 날이 서 있다. 세계적 차원에서 이분법적 냉전시대는 종식됐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적이 아니면 동지고, 좌파가 아니면 우파다. 중도는 기회주의자로 치부되고, 배려와 공감과 연대는 선거 시즌이 아니면 찾아볼 수 없다.   
 
책에서는 미국 내 이민자 정책으로 인구 비율에 있어 유색 인종이 급격하게 증가함에 따라 흑인과 멕시코계 뿐만 아니라 백인 가난한 계층, 무슬림, 여성, 게이와 트레스젠더, 진보 진영, 트럼프 지지자들 등 모든 계층이 공격받고 있다고 느낀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길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을 수도 있는 공포와는 비할 바 아니라고 일축한다. 더불어 경계를 허물기 보다는 서로 동료의식을 갖고 연대해야 한다고 충고하다.
 
259.
우리는 동료 미국인으로서, 공동의 일을 해 나가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가진 부족적 적대를 인식해야 한다.
테러를 우려하는 사람은 이슬람 공포증이라고 비난받지 않으면서 그 우려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 인구 구성의 대대적인 변화와 이민자의 유입을 걱정하는 사람도 인종주의자라고 비난받지 않으면서 그 우려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라고 다를까. 기득권층, 남성 우월주의자, 우익 단체들, 정규직 등 사회 주류의 자리에 있는 이들은 역차별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서로를 향해 끝이 없는 혐오를 쏟아내는 것은 무의미하다. 대척점에 있는 대상이 무언가를 가져간다는 것이 내가 가질 몫을 빼앗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민의식의 결여다. 지니온 역사와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고 상대에 대한 이해와 목적의식을 공유하며 연대해야 한다. 
  

 

 


개인이 제정신이 아닌 것은 드문 일이지만 집단은 제정신이 아닌 게 정상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너무나 자주, 가난한 다수가 새로이 얻게 된 정치권력을 사용해서 그들이 증오해 마지않는 소수에게 보복을 하고, 소수는 또 소수대로 새로이 권력을 갖게 된 다수의 공격 대상이 될 것을 두려워해서 폭력에 의존한다. 이것은 로켓 과학이 아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부족 정치의 원칙일 뿐이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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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휴식하라 - 회복과 치유를 위한 33일간의 철학 세러피
안광복 지음 / 사계절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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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가치를 이루기 위해 사람들과 함께 하는가?'

 

새로운 책이 나올 때 마다 챙겨서 읽는 안광복 선생의 신간이다. 이 책의 목적은 저자의 여는 글에 아주 잘 드러나 있다. 

 

p7

아무리 바빠도 밥 먹고 화장실 갈 시간은 있어야 하는 법, 성찰의 시간도 다르지 않다. 하루 15분, 30분이라도 조용히 물러나 삶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돌아볼 여유를 가지시길 바란다.  

 

하루에 한 챕터씩, 33일간 읽을 수 있게끔 나눠져 있다.

상처, 욕망, 집착, 매너리즘, 용기, 혜안 등 굳이 순서대로가 아니어도 내가 필요로 하는 지혜와 조언을 지성인들을 통해서 구할 수 있다. 

 

  

 

■ ■ ■ ■ 

 

 

인생의 모든 순간에 주인공일 필요는 없다 (공자)

공자의 말씀을 빌어 '스물 살다움'과 '50대다움'에 대해 말한다. 종종 SNS나 지인들을 보면 '어른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들을 본다. 어린시절의 순수함과 '꼰대'가 아님을 강조하는 표현일까? 아마 더하여 책임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 않을까한다. 그런데, 사실 모든 사람이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게 될지 상상해 보라. 어린 시절이 순수하기만 하지는 않다. 지나간 과거이기에 그렇게 느껴질 뿐이다. 그 시기에도 치열하게 성장의 아픔을 겪는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실수나 잘못은 어리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있다. 이를 거쳐 어른이 되는 것인데, 어른이 되기 싫다니...... .

갈수록 어른이 필요한 세상이다. 나는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 노후에 누군가에게 혜안을 줄 수 있는. 

 

  

 

다 이기지 마라 ㅡ 다원적 평등 (마이클 월저)

다원적 평등이란 어떤 측면에서는 존경받지 못할 사람들도 다른 면에서는 명예롭게 될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우리 사회가 이를 받아들이기에는 어린시절부터 각자의 다양한 재능을 인정받은 경험이 필요할 듯 하다. 국어, 영어, 수학, 과학의 성적이 절대적인 현 교육제도에서 한 분야에 천재성을 보이면 모를까 입시 주요 과목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나타나는 재능은 묻히기 쉽다. 미술이나 음악에 재능이 있어도, 엘리트 체육 특기자가 아니라면 체육에 관련한 재능도 성적이 우수해야 하며, 다중지능에 나와 있는 항목들은 성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내면에 숨겨져 있는 재능을 끄집어 내기도, 그 재능에 평등을 부여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현재 한참 자라고 있는 아이들만큼우 이제라도 다양한 평가 방식을 통해 다원적 평등을 꾸준히 보여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그러면 다음 세대 아이들이 사는 세상은 좀 달라지지 않을까? 

  

  

 

번아웃 탈출 (아우구스티누스)

'진정 번아웃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의미 찾기'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이 문장에 무척 동감한다.

한 시절 그렇게 살았다. 진학을 하고, 취직을 하고, 샐러리맨이 되어서 수입이 생기면 갖고 싶을 것을 샀다. 왜? 주변 사람이 모두 그렇게 살고 있고, 그렇게 살아야하는 거라고 가르쳐 준 이는 없지만, 그렇게 배웠다. 타고난 성정과 교육이 더해져 성실과 정직을 모토로 집단생활을 했기에 나름 성과도 나쁘지 않았다. 근래 시중에 직장 생활이나 번아웃에 관련한 서적들이 쏟아지듯 출간되는 걸 보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지 않을까싶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삶의 방식을 누구도 표면적으로는 강요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저 부모에게서, 선생에게서, 주변인들에게서 학습되어져 의미 부여 없이 달린다는 거다. 달릴 때 달리더라도 자신이 왜 달리는지 알고 달리면, 그 달리기에 가치를 부여하면, 조금이나마 힘이 덜 부칠듯 싶다.

  

  

 

노예는 반복할 뿐이지만 자유인은 성찰한다 (아리스토텔테스)

오랜 전 광고에서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카피가 있었다. 그런데 책에서는 더 보태자면 "열심히 일했으나 성과가 없더라도 쉬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것만'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쉴 틈이 없다고 불평한다. '나'는 일상의 노예인가, 아닌가!

스스로 냉정하게 판단해 볼 일이다. 

 

  

 

최고의 스펙은 도덕성 (디오게네스)

얼마 전 의도치 않게 EBS 다큐에서 도덕성에 관한 실험을 한 프로그램을 동영상으로 시청했다. 이 얄궂은 도덕성은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 나라고 얼마나 다를까싶다. 정도의 차이일 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성공을 향해서는 도덕성 쯤은 그저 철학책에 나오는 구시대적 유물같은 단어에 불과하다. 저자의 '욕심이 없는 자가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는 말에 격하게 공감하면서도 마냥 자유롭지 못한 현실에 고개를 숙인다. 

  

 

 

성장을 끌어내는 '관심의 눈' (제러미 벤담)

신독愼獨 : 아무도 안보는 곳에서도 도리에 더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 마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신독의 태도를 갖추는 과정이다(p139)'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로운 행동과 사고를 취하는 것이 요즘 추세다. 하지만 아무리 높은 자존감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남의 시선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시선으로 타인을 보고, 타인의 어떤 시선을 의식하며 살고 있을까? 비난과 경쟁에 사로잡힌 시선이 아니라, 서로서로가 각자의 보이지 않는 인내와 노력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준다면, 그리고 내가 나를 자주 들여다 본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살만해지리라 생각한다.  

 

 

 

혐오하지 말고 분노하라 (마사 누스바움)  

누스바움은 분노와 혐오를 나눈다. 분노는 세상을 발전시키지만 혐오는 사회를 타락시킬 뿐이다. 왜 그럴까? 분노는 정당하지 못한 처사에 대해 상대와 맞서게 한다. 반면, 혐오는 상대를 피하고 외면하게 만든다. 분노는 눈을 치켜뜨고 상대와 싸우는 가운데 진실을 밝히게 하지만, 혐오는 상대를 멀리한 채 편견만 키워 나간다. 

p149

 

혐오에 대한 질문을 소수집단 혹은 사회적 약자에게 던지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혐오'의 주체가 아니다. 그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몰아간 집단과 그 사회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왜, '그들'을 혐오하느냐고. 

 

 

 

유혹하지 말고 설득하라 (귀스타브 르봉) 

 

"대중을 유혹하려 하지 말고 꾸준하게 설득하여라. 옳은 신념을 가꾸고 내려놓지 마라." 

 

총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공천에서 떨어진 후보는 무소속으로 출마하고, 어떤 후보는 당선이 되면 복당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벌린다. 이들의 정치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정치인가? 재선을 노리는 후보들 중에도 장기적인 플랜이 있는 사람은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당선이 급급해 옳든 그르든 다수가 원하는 공약을 천편일률적으로 내놓고 있다. 그런데, 이들 뿐이랴. 하루를 초시대로 사는 현대인들은 당장에 성과가 보여야 하고, 대기만성형은 무능력자임을 돌려 말할 뿐이다. 이런 세상에서 옳은 신념을 설득하는 것도, 지켜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득하라. 세상은 더 빨라지지만 그 빠른 세상을 기억하며 사는 인간의 수명은 더 길어질테니.  

 

 

 

보고 싶은 것 말고 보아야 할 것을 보라 (아마르티아 센)

깊게 뿌리 내린 민주주의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나라가 광복과 경제적 자립을 스스로 하지 못한 반면 민주화 만큼은 시민의 힘으로 이뤄냈기에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만 이를 잘 지키기 위해서는 누구도, 무엇도 절대적으로 옳은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렇기 때문에 때문에 드러나는 문제점을 수용하고 공감하며 해결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주입된 욕망에서 탈출하라 (발터 베냐민)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늘 새롭고 화려한 상품에 둘려싸여 있다. 광고에 등장하는 상품만 사면 광고 속 주인공처럼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환상을 꿈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든 사람이 꿈을 실현하기도, 어떤 이는 꾸는 것 조차도 어려운 세상이다. 세계가 하나의 금융으로 묶여 있는 현재에 자본주의의 출구는 어디일까? 저자는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소개하며 묻는다. 

 

새로운 대안은 자본주의가 심어 준 욕망에서 벗어나 '다르게 생각하는 용기'를 품을 수 있을 때 열리기 마련이다. 우리는 과연 쇼윈도가 가리키는 세상과 다른 세계를 꿈꿀 수 있을까? 

p104

 

어려운 듯 하지만 시각을 조금만 틀어보면 크게 어렵지 않다. '성공=부자'라는 공식의 틀만 깨면 된다. 인간이 타인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는 이상, 절대 부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부자의 기준이 매일 달라질테니까. 나는 어디에 가치를 두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 가치로 인해 매일의 삶이 만족스러운가? 그렇지 않다면 그 가치를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 □ □ □ 

 

 

독자가 철학을 이토록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쓰는 분이 얼마나 될까싶다. 저자는 '철학은 어렵다는 편견'을 늘 깨뜨린다. 철학에 관련한 책을, 누구나 차 한 잔 하면서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게 참 좋다.

철학 에세이요, 명상집같은 느낌도 함께 든다.  

요즘에는 '하루 견과류', '하루 비타민'처럼 영양 식품을 하루 분량치로 소포장해서 판매하는 모습을 많이 본다. 하루에 서너쪽씩 읽는 '하루 철학'. 마음 영양제 한 봉씩 먹는다는 생각으로 읽어보면 어떨까. 그날만큼은 넉넉하고 든든한 하루가 될테다. 

 

 

 

참을 수 없는 세계란 어쩌면 새로움에 대한 강박적 추구에도 불고하고 '영원히 지속되는 일상적 진부함'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그런 세계가 아닐까. 이런 세상은 사유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반복되는 삶의 패턴들 속에서 진지한 생각거리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싶다면 지금처럼 아무것도 생각할 것 없는 상태 자체에 대해 따져 뭉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 그 다른 세계를 상사하고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믿는데서부터 출구가 열리기 때문이다.

발터 베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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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 없는 검사 표정 없는 검사 시리즈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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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는 한 명 한 명이 독립된 사법기관이다. 

p172

 

 

오사카 지검의 검찰 사무관으로서 검사 보좌 일을 맡은 지 얼마 안된 미하루는 처음 만난 검사로부터 '자네 같은 사무관은 필요 없다'라는 말을 면전에서 듣는다. 그녀에게 독설을 내뱉은 사람은 1급 검사로 표정이나 몸가짐에 한 치의 빈틈이 없고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으며 오로지 신념과 원칙에 입각해 사건을 대하는 오사카 지검의 에이스 후와 슌타로 검사다.  

 

감정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사무관 미하루와 감정 없는 로봇처럼 보이는 후와 검사, 두 사람이 파트너가 된 이후 첫 사건이 송치된다.  

  

 

여덟 살 어린 여자아이가 살해된 사건으로 용의자는 소아성애자이며 8년 전에 여자아이를 납치, 감금죄로 복역한 이력이 있는 32세 남성 야기사와 다카히토. 그가 범인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지만, 용의자는 사건 당일 알리바이가 없다. 증거 목록에는 현장에서 수집한 야기사와의 머리카락과 그의 발자국으로 추정되는 발자국 사진, 흙 뿐이다. 그런데 경찰서에는 그나마 증거 현물이 남아 있지 않다. 결국 증거가 불완전한 상태로 검찰에 송치된 사건. 

 

용의자의 가족, 주변 이웃들의 탐문까지 마친 후와는 진범이 따로 있음을 알아낸다.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정확한 알리바이를 말하지 않는 야기사와. 이대로라면 범인으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인데, 그는 왜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일까? 

 

  

 

두 번째 사건.

4월 15일 니시나리구 기사노사토의 다세대 주택 203호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는 203호에 세 들어 살고 있던 25세 여성 스마 나쓰미와 동거인으로 보이는 34세 남성 구스바 미네타카. 두 사람은 칼에 의한 자상과 절창으로 사망했다. 현장에서는 흉기인 등산용 나이프가 발견되었으나 시중에 흔하게 유통되는 상품이고, 지문도 나오지 않았다. 더구나 머리카락, 체액, 지문, 발자국 등은 피해자들의 것이다.

 

수사 선상에 오른 용의자는 시내 대형 마트에서 근무하는 35세 남자 야타가이 사토시. 경찰은 평소에 스마를 스토커한 야타가이를 체포하지만, 그는 그날 스마의 집에 가지 않았으며 명백한 알리바이를 주장한다. 그러나 경찰에서 작성한 서류에 의하면 그의 알리바이는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사건 수사를 위해 초건을 끝낸 후와는 야타가이가 주장한 알리바이를 확인하기 위해 다툼이 있었다는 술집과 근처 파출소를 찾아가고, 그의 알리바이가 주장한대로 사실임을 확인한다. 그렇다면 경찰 기록에는 왜 누락되어 있었을까? 또한 살인에 사용된 흉기 및 그외 증거품을 확인하기 위해 경찰서를 찾아간 후와는 이번에도 증거품이 분실됨을 알게 된다. 지난 사건에 이어 박스 채 사라진 증거품.  

 

경찰서 내부에 깔려있는 안이한 업무 태도인가, 혹은 단순한 관리 소홀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의도된 계획인가! 후와는 이를 계기로 오사카 내 경찰서의 증거품 분실 및 관리에 대한 대대적인 확인 절차에 들어가고, 이 결과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다. 오사카 경찰들을 모두 적으로 만든 후와. 그러나 그는 늘 그랬듯 전혀 개의치 않는다. 

 

증거 불충분으로 용의자 무혐의 처리된 상황에서 원점으로 돌아온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피해자와 관련한 사람들을 탐문하는 미하루와 후와.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죽은 구스바의 문란한 이성 관계와 그들 중 임신 후 자살한 여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여성의 신원을 확인하고 범인이 누군지 확신한 그날, 후와는 누군가로부터 총으로 저격 당하고 응급 수술에 들어간다. 후와를 저격한 사람이 진범일까?

 

  

 

 

■ ■ ■ ■ 

  

 

소설은 검사를 주인공으로 한 범죄소설로만 읽히지 않는다. 조직 내 제 식구 감싸기와 검경 유착, 상명하복 방식의 조직 체계, 인력과 시간 부족이라는 핑계로 안이하게 관리되는 사건 자료와 증거들 등 사회적으로 권력이라는 칼을 가진 자들이 범할 수 있는 부정부패와 비리, 인습과 안이함에 대해 지적한다. 또한 작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독자들에게 충분히 딜레마에 빠질만한 질문을 던진다. 

  

 

법은 사람이 만든다. 사람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법의 오류를 의심하지 않고 원칙만 지킨다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 

 

111.

검찰은 피의자에게 벌을 주는 기관이 아니야. 피의자의 위법 행위를 입증하고 추궁하는 것. 검사의 것 책무는 굳이 따지면 그 정도고,피의자의 행위를 판가름해서 형량을 정해 벌을 내리는 건 판사의 임무라고. 우리는 법의 수호자이기는 하지만 집행자는 아니라는 말이야. 우리가 증오해야 할 것은 죄지, 그걸 저지른 인간이 아니야. 그런데도 피해자에게 과다하게 감정을 이입해 쓸데 없는 징벌 의식을 지닌 상태로 법정에 임하는 것이야말로 유치한 정의감을 남용하는 행위지.

 

221.

자네(후와) 사전에는 '정'이나 '적당히' 같은 단어가 없지. 오로지 흑과 백, 혐의가 있다, 없다의 양자택일이었고 피의자의 집안 사정이나 자라 온 환경 등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어. 

 

두 사건을 대하는 후와 검사의 태도에는 비인간적이라든가, 냉혹한 면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기적인 권력과 야합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통쾌하다. 그리고 용의자의 성향이나 개인사와는 별개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모습은 합리적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 없기에 억울하게 누명을 쓸 뻔한 용의자를 구해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옳기만 할까?

신념은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그 신념을 어떤 방식으로 지켜내야 하는지에 따라서 독이 되기도, 약이 되기도 한다.

재미있는 부분은, 후와 검사는 사법 종사인이 감정에 휘둘리는 건 절대 있어서는 안될 일이라고 못을 박지만, 정작 미하루가 배심원들의 감정적인 결정에 대해 비난하자 이 부분에 있어서는 충분히 용납을 한다. 그는 이런 부분까지 모두 감안한다. 재판에 있어 감정이 필요한 부분의 역할까지. 

 

 

 

후와에게 정의란 무엇일까?

그는 정의를 풋내나는 감정이라고 일축한다. 고용주와 노동자의 정의, 기득권 층과 사회적 약자의 정의, 성별에 의한 정의, 연령층에 따른 정의. 점점 더 다양화 되고 세분화 되며 도덕과 윤리 개념이 사라져가는 현대에 정의란 무엇일까? 인본주의를 기본으로 한 정의도 이제는 정의롭지 못하다. 언제까지 정답도 없는 정의의 딜레마에 빠져있어야 하는가? 정의 실현은 히어로 영화에서나 존재할 것인가?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사람, 그에게도 아픈 과거가 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자신을 벼리고 벼린 후와 슌타로. 그가 법과 사건을 대하는 태도는 법전에 명시된 원칙과 스스로 세운 신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때론 비정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사람이 눈 앞에 보이는 상황과 원인, 까닭을 납득시켜야 하는 이는 오직 자신이다.

 

53.

누군가를 믿는 건 나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것과 같은 뜻이야. 절대 허투루 생각할 만한 게 아니지. 조직을 상대할 때는 더욱 그렇고. 

    

일부러 적을 만들려고 그러는 건 아니야. 그냥 나 자신이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할 뿐.  

p203

 

자신이 속한 집단, 권력, 출세에 영합하지 않는 검사. 꼭 검사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원칙과 윤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아지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나저나...

후와 슌타로, 매력있네.

 

[소설 속으로]

204.

대체 이렇게까지 정의감을 부정하는 사법 관계자가 존재하기는 할까. 사법에는 엄연한 법의 정의가 있고, 검사에게는 질서, 판사에게는 판결이라는 정의가 있다. 

286.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상명하복의 수직 사회라는 점과 끼리끼리 문화까지. 경찰과 조폭은 밖에 내거는 기치는 달라도 조직을 구성하는 논리에 큰 차이는 없다는 걸 자네도 알지 않나? 

288.

다른 직업이면 몰라도 사법 종사자는 주변에 영합될 필요도, 영합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313.

예산과 인원 부족, 비좁은 자료실 환경 따위와는 상관 없다. 수사 자료가 분실된 가장 큰 원인은 관계자들의 시선이 오로지 내부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상사와 부하, 부족한 예산과 불편한 시설, 그리고 자신들이 일으킨 불상사에 대한 책임전가. 그들은 하나같이 내부만을 바라봤고, 범죄 피해자는 보려고 하지 않았다.

 

 

조직의 이익이 먼저인가, 개인의 윤리가 먼저인가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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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치마를 입은 여자
이마무라 나쓰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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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 '보라색 치마'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 

첫문장

 

담한 체형과 어깨까지 내려온 검은 머리. 뺨에는 드문드문 기미가 나 있고, 머리카락은 탄력이 없어 푸석푸석하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상점가 빵집에서 크림빵을 산 후 늘 같은 자리인 공원의 제일 안쪽 벤치에서 크림빵을 먹는다. 공원에서 놀던 아이들은 '보라색 치마'에게 장난을 걸고, 그녀는 아이들의 장난에 짜증 내지 않는다. 

 

녀가 아케이드상가 맞은편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네 부류로 반응을 보인다. 모르는 척하는 사람, 잽싸게 길을 비켜주는 사람, 길조로 여기고 주먹을 불끈 쥐는 사람, 징크스 삼아 못내 슬퍼하는 사람. 한 마디로 유명인사다.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보라색 치마'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걷던 속도를 유지한다. 시장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그녀는 물건이나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고 빠르게 걷는다. '나' 즉 '노란색 카디건'이 그녀를 유심히 관찰하는 이유는 '보라색 치마'와 친구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노란색 카디건'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보라색 치마'는 정규직이 아니다. 근무를 하는 날이나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 한 달을 일하면 한 달 쉬기도 하고, 한 달 중 며칠만 일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녀가 연속 두 달 동안 무직 상태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노란색 카디건'은 그녀가 늘 앉는 공원 벤치에 구직 정보지를 슬쩍 놓아둘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적당하다고 판단하는 직장을 직접적으로 표시까지 해놓는다. 심지어 면접볼 때 사용하라고 향이 나는 샴푸 샘플을 그녀의 집 현관 문고리에 걸어둔다. 드디어 '노란색 카디건'이 유도하는 직장에서 근무하게 된 '보라색 치마'. 그곳은 바로 '노란색 카디건'의 직장이다. 이제 그녀는 '보라색 치마'와 친해지기만 하면 된다! 

 

텔 메이드라는 직업상 단정한 용모를 규정할 수 밖에 없는데, '보라색 치마'는 거의 낙제에 가깝다. 그녀가 제대로 적응할까 걱정스러운 '노란색 카디건'. 그러나 걱정은 기우였다. 빠른 속도로 적응해 나가는 '보라색 치마'는 직장 생활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조차 그녀의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직장 동료와 잘 어울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관례처럼 내려온 소소한 부정행위에 대해서도 배운대로 실천(!)한다. 급기야 소장과 부적절한 관계까지 이르는 '보라색 치마'.  

 

'보라색 치마'를 동정해 보살피듯 하던 직장 선배들은 이제 더 높은 시급을 받는 그녀를 질투하고 헐뜯는다. 본사에서 분실된 비품에 대한 관리 감독의 강도를 높이겠다는 사항이 전달되면서 그동안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부정 행위를 모두 '보라색 치마'에게 뒤집어 씌우려 한다. 또한 관계를 정리하고자 하는 소장은 상황이 녹록치 않자 그녀를 스토커로 몰아붙인다.   

 

'보라색 치마'는 무엇이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그저 시키는대로 했을 뿐인데, 칭찬 일색이었던 그들은 왜 자신을 비난할까? 

 

 

 

 

■ ■ ■ ■ 

 

 

'노란색 카디건'이 '보라색 치마'와 친해지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보라색 치마'는 타인의 시선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자신의 외모와 입성, 그리고 공원에서 빵을 먹는 행동 등 일반적으로 남을 의식할 만한 상황에서 그녀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더구나 동네 꼬마들이 짓궂은 장난을 걸어와도 불쾌하게 여기지 않고 순수하게 받아준다. '노란색 카디건'은 (어떤 의미에서든) 주변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당당한 그녀가 부럽다. 

 

아쉽게도 '보라색 치마'와 달리 '노란색 카디건'은 그 존재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p7

 

그런데 심지어 그녀는 운동 신경도 뛰어나고, 적응력도 빠르며 출근한지 얼마 안된 직장에서까지 칭찬과 관심의 대상이 된다. 안타까운 건 '노란색 카디건'이 아무리 옆구리를 찔러대도(?) 그녀는 '노란색 카디건'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이쯤되면 질투할만도 한데, 가장 극적인 순간에 슈퍼 히어로처럼 나타나 그녀를 구원해 주는 '노란색 카디건'. 그러나 애쓴 보람도 없이...... . 

 

그렇지만 사라진 '보라색 치마'의 공원 벤치 자리에 '노란색 카디건'이 앉았다. 이제 그 벤치는 그녀 전용이다. 

 

 

 

 

□ □ □ □ 

 

비정규직이자 일용근로자이고 관계에 미숙한 '보라색 치마'는 사회 부적응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도 모르는 새에 '노란색 카디건'의 도움으로 사회 집단 안에 들어오면서 단정한 용모와 익숙해져가는 사회 생활에서 독자는 뭔지 모를 안도감을 느끼게 되지만 이것도 잠시, 자신과는 다른 대우를 받고 있다는 '비교'가 개입이 되면서 '보라색 치마'는 이전과는 다른 혐오의 대상이 된다.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에게서 배운 사회적 지식이 오히려 화살이 되어 돌아온 상황.

단지 친해지고 싶다는 이유로 대상을 스토킹하는 '노란색 카디건'. 의도를 생각하면 안쓰럽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정도면 범죄다. 그러나 '보라색 치마'와 굳이 비교하자면 보통의 일반적인 직장 여성이다. 그녀는 어떤 결핍으로 '보라색 치마'를 스토킹한 것일까? 집단 구성원에서 너무 평범해 존재감이 미비한 다수의 사람들. 극단적인 설정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노란색 카디건'은 타인의 관심에 굶주린 현대인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르겠다.

두 여성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근무하는 동료들, 동네 사람들을 보면서 결국 우리가 '일반적', 혹은 '정상'이라고 규정하는 범위가 기준을 들이대는 대상에 따라 잣대가 달라진다면 어떤 의미가 있나싶다.

결국 '보라색 치마'가 떠난 자리를 꿰차고 앉아 뿌듯해 하는 그녀를 보면서 흔하디 흔한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떠올랐고, '관심'의 경계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남의 시선이 아닌 나의 시선으로 자신을 본다면 경쟁적으로 올라오는 SNS, 댓글 폭력, 혐오와 비난의 수위는 조금이나마 줄어들지 않을까?

물건이 든 봉투를 옆에 놓고 크림빵 봉투를 꺼냈다. 빵은 살짝 따뜻하다. 우선 반으로 갈라서, 한쪽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다른 한쪽을 입으로 가져가려는 바로 그 순간, 탁!하고 누가 어깨를 때렸다. 

절묘한 타이밍에 내 어깨를 때린 아이가 꺅꺅 웃으면서 도망갔다.

소설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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