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지검의 검찰 사무관으로서 검사 보좌 일을 맡은 지 얼마 안된 미하루는 처음 만난 검사로부터 '자네 같은 사무관은 필요 없다'라는 말을 면전에서 듣는다. 그녀에게 독설을 내뱉은 사람은 1급 검사로 표정이나 몸가짐에 한 치의 빈틈이 없고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으며 오로지 신념과 원칙에 입각해 사건을 대하는 오사카 지검의 에이스 후와 슌타로 검사다.
감정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사무관 미하루와 감정 없는 로봇처럼 보이는 후와 검사, 두 사람이 파트너가 된 이후 첫 사건이 송치된다.
여덟 살 어린 여자아이가 살해된 사건으로 용의자는 소아성애자이며 8년 전에 여자아이를 납치, 감금죄로 복역한 이력이 있는 32세 남성 야기사와 다카히토. 그가 범인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지만, 용의자는 사건 당일 알리바이가 없다. 증거 목록에는 현장에서 수집한 야기사와의 머리카락과 그의 발자국으로 추정되는 발자국 사진, 흙 뿐이다. 그런데 경찰서에는 그나마 증거 현물이 남아 있지 않다. 결국 증거가 불완전한 상태로 검찰에 송치된 사건.
용의자의 가족, 주변 이웃들의 탐문까지 마친 후와는 진범이 따로 있음을 알아낸다.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정확한 알리바이를 말하지 않는 야기사와. 이대로라면 범인으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인데, 그는 왜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일까?
두 번째 사건.
4월 15일 니시나리구 기사노사토의 다세대 주택 203호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는 203호에 세 들어 살고 있던 25세 여성 스마 나쓰미와 동거인으로 보이는 34세 남성 구스바 미네타카. 두 사람은 칼에 의한 자상과 절창으로 사망했다. 현장에서는 흉기인 등산용 나이프가 발견되었으나 시중에 흔하게 유통되는 상품이고, 지문도 나오지 않았다. 더구나 머리카락, 체액, 지문, 발자국 등은 피해자들의 것이다.
수사 선상에 오른 용의자는 시내 대형 마트에서 근무하는 35세 남자 야타가이 사토시. 경찰은 평소에 스마를 스토커한 야타가이를 체포하지만, 그는 그날 스마의 집에 가지 않았으며 명백한 알리바이를 주장한다. 그러나 경찰에서 작성한 서류에 의하면 그의 알리바이는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사건 수사를 위해 초건을 끝낸 후와는 야타가이가 주장한 알리바이를 확인하기 위해 다툼이 있었다는 술집과 근처 파출소를 찾아가고, 그의 알리바이가 주장한대로 사실임을 확인한다. 그렇다면 경찰 기록에는 왜 누락되어 있었을까? 또한 살인에 사용된 흉기 및 그외 증거품을 확인하기 위해 경찰서를 찾아간 후와는 이번에도 증거품이 분실됨을 알게 된다. 지난 사건에 이어 박스 채 사라진 증거품.
경찰서 내부에 깔려있는 안이한 업무 태도인가, 혹은 단순한 관리 소홀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의도된 계획인가! 후와는 이를 계기로 오사카 내 경찰서의 증거품 분실 및 관리에 대한 대대적인 확인 절차에 들어가고, 이 결과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다. 오사카 경찰들을 모두 적으로 만든 후와. 그러나 그는 늘 그랬듯 전혀 개의치 않는다.
증거 불충분으로 용의자 무혐의 처리된 상황에서 원점으로 돌아온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피해자와 관련한 사람들을 탐문하는 미하루와 후와.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죽은 구스바의 문란한 이성 관계와 그들 중 임신 후 자살한 여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여성의 신원을 확인하고 범인이 누군지 확신한 그날, 후와는 누군가로부터 총으로 저격 당하고 응급 수술에 들어간다. 후와를 저격한 사람이 진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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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검사를 주인공으로 한 범죄소설로만 읽히지 않는다. 조직 내 제 식구 감싸기와 검경 유착, 상명하복 방식의 조직 체계, 인력과 시간 부족이라는 핑계로 안이하게 관리되는 사건 자료와 증거들 등 사회적으로 권력이라는 칼을 가진 자들이 범할 수 있는 부정부패와 비리, 인습과 안이함에 대해 지적한다. 또한 작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독자들에게 충분히 딜레마에 빠질만한 질문을 던진다.
법은 사람이 만든다. 사람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법의 오류를 의심하지 않고 원칙만 지킨다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
111.
검찰은 피의자에게 벌을 주는 기관이 아니야. 피의자의 위법 행위를 입증하고 추궁하는 것. 검사의 것 책무는 굳이 따지면 그 정도고,피의자의 행위를 판가름해서 형량을 정해 벌을 내리는 건 판사의 임무라고. 우리는 법의 수호자이기는 하지만 집행자는 아니라는 말이야. 우리가 증오해야 할 것은 죄지, 그걸 저지른 인간이 아니야. 그런데도 피해자에게 과다하게 감정을 이입해 쓸데 없는 징벌 의식을 지닌 상태로 법정에 임하는 것이야말로 유치한 정의감을 남용하는 행위지.
221.
자네(후와) 사전에는 '정'이나 '적당히' 같은 단어가 없지. 오로지 흑과 백, 혐의가 있다, 없다의 양자택일이었고 피의자의 집안 사정이나 자라 온 환경 등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어.
두 사건을 대하는 후와 검사의 태도에는 비인간적이라든가, 냉혹한 면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기적인 권력과 야합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통쾌하다. 그리고 용의자의 성향이나 개인사와는 별개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모습은 합리적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 없기에 억울하게 누명을 쓸 뻔한 용의자를 구해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옳기만 할까?
신념은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그 신념을 어떤 방식으로 지켜내야 하는지에 따라서 독이 되기도, 약이 되기도 한다.
재미있는 부분은, 후와 검사는 사법 종사인이 감정에 휘둘리는 건 절대 있어서는 안될 일이라고 못을 박지만, 정작 미하루가 배심원들의 감정적인 결정에 대해 비난하자 이 부분에 있어서는 충분히 용납을 한다. 그는 이런 부분까지 모두 감안한다. 재판에 있어 감정이 필요한 부분의 역할까지.
후와에게 정의란 무엇일까?
그는 정의를 풋내나는 감정이라고 일축한다. 고용주와 노동자의 정의, 기득권 층과 사회적 약자의 정의, 성별에 의한 정의, 연령층에 따른 정의. 점점 더 다양화 되고 세분화 되며 도덕과 윤리 개념이 사라져가는 현대에 정의란 무엇일까? 인본주의를 기본으로 한 정의도 이제는 정의롭지 못하다. 언제까지 정답도 없는 정의의 딜레마에 빠져있어야 하는가? 정의 실현은 히어로 영화에서나 존재할 것인가?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사람, 그에게도 아픈 과거가 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자신을 벼리고 벼린 후와 슌타로. 그가 법과 사건을 대하는 태도는 법전에 명시된 원칙과 스스로 세운 신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때론 비정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사람이 눈 앞에 보이는 상황과 원인, 까닭을 납득시켜야 하는 이는 오직 자신이다.
53.
누군가를 믿는 건 나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것과 같은 뜻이야. 절대 허투루 생각할 만한 게 아니지. 조직을 상대할 때는 더욱 그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