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라가 언젠가는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 가족으로 받아들일 때부터 인지하고 있었던 마리우스는 술라가 보이는 현재의 행보에 놀라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술라가 그럴 수 밖에 없을 거라고 납득한다. 술라는 우정을 나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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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2월 20일 수요일 
 
 
몽고메리는 뫼즈의 지배부터 프륌까지 배치된 모든 연합군 부대의 지휘권을 장악했다. 
 
독일군의 작전에 룩셈부르크가 제외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브래들리는 상황이 급박함에도 룩셈부르크에서 움직이지 못해 스스로를 가둔 꼴이 되었다. 어떻든 룩셈부르크의 수도는  철통같이 지켜지고 있었다. 
 
미군은 큰 대가를 치르고 노비유를 지켜냈고, 생비트를 둘러싼 공방은 최고점에 이르렀다. 그리고 독일군은 엘센보른 능선에서 전사자 782명을 희생시키고 완패했다. 
 
 
 
ㅡ '철조망에는 광풍에 날린 허수아비처럼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라는 표현이 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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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2월 19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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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퍼 전투단은 스투몽을 공격해 장악했다. 버티다 결국 항복한 미군 병사의 규모는 참전했던 커트 보니것의 말에 의하면 '미군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항복(장병 8000명)'이었다고 한다. 미군에게 있어 이에 버금가는 재앙은 독일의 기갑사단에 의해 대량의 의료장비와 약악품 특히 모르핀을 내줬다는 것이다. 미군 병사들에게 있어서 부상은 곧 죽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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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뫼즈강의 다리를 봉쇄해야만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교량을 막고 리에주 통과를 막아야 했다. 이에 아이젠하워는 몽고메리의 건의를 받아들여 뫼주의 지베부터 바스토뉴의 북쪽을 지나 독일 방어선 뒤의 프륌까지, 그리고 패튼의 제3군, 미들턴의 제8군단을 포함한 북쪽의 연합군 전부를 지휘할 권한을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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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전투 중 벌어진 사상자를 제외하고 독일군은 민간인이든 적군이든 무자비하게 사살했고, 연합군은 재판의 과정을 거쳤다고는 하나 대부분 처형한 점을 생각해 보게 된다. 길어진 전쟁에 상대에 대한 증오만 커져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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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슈코르체니와 하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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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코르체니 중령의 8개 팀과 하이테의 낙하산 부대가 미군 방어선을 뚫고 침투했고, 이들은 연합군 병사로 위장해 전과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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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헌병의 검문에 의해 붙잡힌 독일군 귄터 슐츠 소위는 '파리로 침투해 아이젠하워와 고위 장성들을 납치하는 비밀 임무'를 수행 중이라고 자백했다. 이것이 슐츠 자신이 사실이라고 믿었었는지, 혼란을 목적으로 거짓말을 한 것인지, 살기 위해 임기응변으로 둘러댄 진술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덕분에 아이젠하워의 경호는 거의 감옥 수준이었고, 블래들리를 비롯한 고위 장성들이 외출할 때면 더욱 신경을 곤두세웠다. 검문이 강화되면서 미 장군이 감금되거나 심지어 아이젠하워까지 잠시 동안 붙잡혀 있어야했던 상황까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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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모든 전쟁에 희생양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선택권이 없는 명령과 복종은 아무리 읽어도 이해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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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2월 18일 월요일 
 
 
이날 제2보병사단에서 로슈라트-크린겔트 일대의 전투에서 구축전차, 바주카포 등 73대의 전차를 파괴했고 독일 전차 티거 2대를 기능 불능으로 만들었다고 보고했는데, 이는 아르덴 대공세 중에 몇 안 되는 승리 중 하나였다. 
 
 
미군은 독일군의 진로 예정을 알지 못했으나 그나마 파이퍼 부대에 의해 짐작이 가능해졌다. 미군은 바스토뉴에 집결을 서둘렀으나 미군 측 주요 사령부들은 여전히 정보가 부족했고 그때문에 정확한 상황 파악을 할 수 없었다. 
 
 
 

ㅡ 한창 전투 중일 때는 그다지 무섭지 않다가 막상 사격이 잦아들면 그때서야 엄습했다는 공포를 감히 알 것같다는 말은 할 수 없지만 짐작은 간다. 부상당한 채 포로가 된 히틀러 친위사단 소속 병사는 미국의 피를 수혈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고 하는데, 사람을 이렇게까지 세뇌를 시킬 수 있나싶어서, 현재도 유사한 사람들이 있어서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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