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더블 서프라이즈 
 

새해 전야 자정, 새해를 알리듯 아르덴 근처의 모든 미군 포병대가 일시에 포문을 열었고, 독일은 해가 바뀌기 직전에 북풍 작전(노르트빈트 작전)을 개시해 제6집단군 좌익을 공격했다. 한편 독일은 공군의 총공격을 시도한다. 날 수 있는 모든 항공기를 총동원해 연합군의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에 활주로에서 모두 파괴한다는 작전이었다(이제 독일군에는 경험이 많은 노련한 조종사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이들도 일본의 가미카제 돌격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처구니 없는 사실은 '살아 돌아오라'는 단서를 달면서 각 편대에 조종사들을 감시하는 제트전투기가 한 대씩 따라붙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가미카제와 뭐가 다른가. 더 황당한 사건은 보안을 위해 보덴플라테 작전을 대공포부대에 알리지 않아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무리를 보고 당연히 오인한 대공포대들에 의해 16대 전투기가 격추당했다는 것. 독일군의 기습은 일부 성공했으나 결과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초래했고 조종사를 보충할 인력을 구하기는 불가능했다. 이로써 독일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 스트라스부르에 대한 시각은 미군과 프랑스의 입장이 전혀 다르다. 미군이 지리적 가치를 따진다면 프랑수는 주권 회복의 상징으로서의 가치를 둔다. 우리나라의 경우 독도가 지리적 가치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이제는 상징성이 갖는 가치의 무게가 훨씬 큰 것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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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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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있다. 설레고 즐거웠던 시간은 잠시였고 이후 전쟁같은 시기를 지나 무관심으로 일관된 가정 생활이었다. 이혼을 하지 않은 이유는 오직 카톨릭 신자라는 것 뿐이었다. 아내가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고, 남편은 충실하게 아내의 병수발을 전담했다. 그러나 여자는 안다. 그가 내심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을, 마지못해 살았던 가정 생활에서 드디어 해방될 것에 대해 기뻐한다는 것을. 여자는 남편의 미소가 슬프지 않았다. 그를 이해했다. 그녀가 정작 슬펐던 것은 같은 죽기 직전까지 부정당했던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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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의 감정을 왜곡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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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연합군의 반격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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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7일 미군의 공중 투하가 진행되었고, 이 작전에서 하늘로 날아오른 900여 대 항공기 중에서 23대가 격추되었다. 바스토뉴 남쪽에서는 연합군이 돌파한 지역을 차단하려는 독일군과 넓히려는 연합군 간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블래들리는 아이젠하워에게 독일군의 추진력이 떨어지는 공격의 적기이며 지금 때를 놓치면 독일군의 강력한 반격을 당할 수 있으므로 몽고메리를 압박하라고 재촉했으나 브래들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소련이 동계 대공세를 준비하면서 독일군의 병력 이동이 예상되고 있었다. 거기에 남쪽에서 패튼의 진격이 지체되고 있는 것도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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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끝나가고 있었다. 
 
 
 

해가 바뀌도록 전투가 이어진다. 지쳐가는 군인들도 안쓰럽지만 민간인의 공포, 그리고 새삼 히틀러의 광기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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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크리스마스  
 
 
독일 공군이 바스토뉴 상공에 떨어트린 마그네슘 신호탄을 시작으로 짧았던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은 끝났다.  독일군은 공군의 폭격으로 크리스마스 대공세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서북쪽과 동남쪽 두 갈래로 공격해서 수 시간 내에 바스토뉴를 점령할 계획이었던 코크트는 이끄는 사단의 약한 전력에 당황했고, 이들과 미군은 샹 마을에서 뺏고 뺏기는 치열한 전투를 이어갔다. 이 시각 독일의 마우케 전투단과 쿤켈 전투단은 각각 다른 방향에서 샹 마을에서 채 3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헴룰의 작은 마을을 공격했다. 샹, 롤리, 헴룰 인근의 전투 지역에서 폭격에 의한 피해는 엄청났으며 마을 주민들의 안전은 무시됐다.
  
 
 
"대공세는 엄청난 희생만 초래하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마을 몇 개를 점령한 것으로 끝났다." (코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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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독일군에서도 현실 파악을 하고 있는 장교가 한둘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지경이 되도록 히틀러를 원수 자리에 계속 놓아두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는 생각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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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2월 24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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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튼 휘하의 제3군단이 남쪽에서 바스토뉴로 향하던 중 강력한 독일군의 저항에 직면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연합군의 전투폭격기는 독일군의 집결지를 폭격하여 적의 공세를 분쇄한 덕택인지 바스토뉴 방어선의 미군 병사들은 사기가 높았다. 여전히 혹한과 폭설은 병사들을 곤혹스럽게 했고, 식량 사정 역시 나아지지 않아서 많은 병사가 벨기에 시민들이 나누어주는 음식에 의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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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프랑스인, 벨기에인, 네덜란드인의 파시스트들로 구성된 게슈타포의 산하 부대(지휘관은 스위스인)가 민간인을 사살했다는 대목에서 "왜? 이들에게는 어떤 신념이?"라는 당황스러움이 가시기도 전에 더 충격적인 것은 학살한 주민들 시신 위에 '벨기에 놈들에게 살해당한 독일 영웅들을 위한 복수'라고 쓰여 있는 문구였다. 심지어 그 가해자들 중에는 벨기에인도 있었다. 그야말로 거지같은 전쟁이다. 그 와중에도 크리스마스이브 밤이라고 캐롤송은 울리고, 미군 고위 장교는 황제놀음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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