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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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만을 기다렸습니다. <고의는 아니지만> 이후 두번째 단편집인가요? 지금 달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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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노프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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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독서가 나를 이루고 있는 성분을 증명할 때가 있다. 아는 얘기, 모르는 이야기, 알지만 사실은 모르는 이야기, 그런 것들이 섞여 들어간 책을 읽을 때 나는 내가 어느 시대에 태어나 언제를 살아왔는지를 절감한다. 말이 묘하게 거창하다. 다시 말하자. 나는 90년대 초반 생이고, 막 페레스트로이카가 일어난 후 세상에 태어났고, 살면서 공산주의(-사회주의)에 대한 열망이나 호기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책에 대해 이야기 하기 위해 이런 설명을 거쳐야 하는 이유는, 이 책이 다름아닌 <리모노프>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작가 엠마뉘엘 카레르가 쓴 이 소설은 현재 활동하고 있는 러시아의 야권 인사 <리모노프>의 인생을 다룬 전기소설이다. '전기소설'이 되면서 이 소설은 허구와 현실 사이의 경계를 가늠할 수 없게 하는 줄다리기를 선보이는데, 덕분에 독서하면서 여러 번 나를 텍스트 바깥으로 꺼내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게 모두 '사실'이라고 믿게 될 것 같아서.

 

카레르는 <리모노프>를 상당히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 한다. 그는 소설 안에서 '나'로 등장하며, 나는 리모노프에 대한 소설을 쓴다. 즉, 소설 속에서 소설을 쓰는(그렇다고 이걸 메타 소설로 보기는 어려울 듯한데) 구도가 등장한다. 그러면서 화자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삽입한다. 이 때 자신은 뭘 하고 있었고, 어떤 느낌을 받고 있었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리모노프의 인생과 맞물려 나가면서 전개되는 것이다. 독자에 따라 호오가 있겠지만, 나는 이 방식이 '리모노프'라는 문제적 인물을 조명하는 데 꽤 효과적일 수 있는 방식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리모노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곁에 있는, 고생을 좀 거쳤지만 마음만은 선하고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고, 카레르가 계속해서 그런 사람도 '있다', 우리와 다르게 생각하던 그 러시아의 민중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기 때문이다.

 

 <리모노프>

 

말하자면, '전기'를 썼음에도 카레르는 리모노프를 영웅으로 추앙하거나 추켜세우지 않는다. 리모노프는 일종의 파시스트이며, 극우세력이기도 하고, 스탈린과 나치를 옹호하는 사람이다. 그는 백혈병 걸린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면 속으로 욕을 퍼부을 정도로 우리의 시각에서는 '비인간적'이고, 폭력, 난교, 살인 등에도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도리어 그것들과 함께 삶을 살아온 사람이기도 하다. 소설은 그런 리모노프가 거쳐온 일생을 찬찬히 정리하면서 현재 리모노프의 위치까지를 서술하는 데에서 끝이 난다. 안타깝게도, 소설 내내 풍운아처럼 온갖 고생을 거치며 살아온 리모노프의 현재는, 굳이 서술하자면 '별 볼일 없다.' 독자도 작가도 이걸 잘 받아들이기가 어려운데, 우리가 마치 우리의 고생을 성공에게 바치는 대가처럼 생각해서 일 것이기도 하고(마치 그게 등가교환이 되는 것이라는 것처럼), 리모노프가 보여주었던 강렬한 모습이 결말에는 견지되지 않아서 일 것이기도 하다.

나는 무엇보다 내가 그 헷갈리는 러시아식 이름과 지명을 계속 감내하고, 모르는 단어를 찾아가며 장장 530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을 전부 읽었는데 이 사람이 이렇게 시시한 재야인사가 되어버렸단 말이야? 하는 생각이 들어 괜히 억울했다. 하지만 따져보면 이건 소설이 아니라 '전기 소설'이고, 현실은 소설 같지 않으니 이 소설은 어떤 면에서 가장 현실을 훌륭하게 모방한 소설이다. (그리고 그게 소설의 본령이라는 점을 나 같은 낭만주의자들은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마도 프랑스판 '리모노프'>

사실 이 소설을 며칠 간 들고다니면서 읽었고, 그 때마다 '러시아'라는 나라에 대해 생각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러시아가 만들어간 역사에 무지한 나로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이 책에 숨어 있었다.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전쟁, 옐친이 이끌던 이른바 '민주적'인 정부의 말로, 잠깐 동안의 쿠데타와 푸틴까지. 리모노프라는 사람이 그 굴곡을 겪으면서 살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그가 이미 신기하다. 그런 리모노프의 정신세계는 더더욱 신기하고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 글에서 리모노프와 카레르의 세계가 양 쪽에서 나타나는 구성이 매우 효과적이라 생각하는데, 각각 러시아-프랑스라는 출신의 특성상 그들이 보여주는 반응이 그 당시 그 사회가 품고 있던 가치와 문화의 틀을 거친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리모노프는 프랑스인 카레르가 옳다고 배운 모든 것들을 무시하는 사람이지만, 공산주의 이후 경쟁적 자본주의를 성공적으로 이식하지 못한 러시아인들의 어떤 정서가 그런 리모노프를 지지했고, 그를 정치권의 인사로 만들었다. 카레르와 서방은 그런 리모노프에게 호의적일 수 없었겠지만, 그런 한편, 러시아의 '민주주의'가 자행하는 일에도 호의적일 수 없었다. 러시아의 이데올로기는 어떤 방식의 껍데기를 뒤집어쓰던 간에 독재적이었고, 서방은 러시아의 '민주주의'가 어떤 행태를 보이는 지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과연 우리가 옳다고 믿는 모든 가치는 강제되는 순간 위험해진다. 그 내용이 얼마나 선하고 '인간'적이며 좋은 지에 전혀 무관하게.

 

카레르는 이런 부분을 꼬집으면서, 리모노프가 보여주는 인간의 본성을 건드린다. '점잖은 사람'이자, 일종의 득도한 사람처럼 보이는 리모노프의 이중성을 건드리면서 그를 특별한 사람처럼 만들어보이지만, 사실 이런 카레르의 시선은 러시아 나츠볼들을 보는 내내 지속된다. 폭력적인 언사를 아끼지 않지만 순박하고 의리있는 사람들. 순박하고 정이 있지만 폭력을 자행하기 꺼리지 않는 사람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카레르가 마치 그것이 이 사람들의 독특함인 것 처럼 느껴지도록 글을 썼다는 것이다. 그의 글에서 이미 계속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적인 폭력성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말이다. 말하자면, 현재 서구의 '교양인'처럼 문명화되고 교육받은 우리는 리모노프와 무엇이 그리 다른가? (삶의 어떤 양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 떠오르는 생각의 문제에서.)

물론 그럼에도 우리는 다르다.

다른 삶을 거쳐왔고, 다른 체제에 살았으며, 다른 시간을 보냈다. 문제는 그 다름을 당신이 인정할 수 있는가다. 정말로 당신은 공산주의를 이해하고 있나? 그 시절을 이해하고 있을까? 제국의 영토를 가지고 있던 나라가 한 순간에 해빙으로 나아가면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자국민들이 가지는 느낌을 우리의 측면에서 상상하고 생각해 소거하는 건 아닌가? 타자를 이해하고 싶다면, 우리가 옳다고 믿는, 우리의 삶을 지배해온 가치관에서 공산주의를 볼 때 흔히 벌어지는 흑백논리와 이분법을 경계하자.

 

나는 90년대 초반에 태어났고, 공산주의는 전혀 알지 못하고, 그래서 끊임없이 상상해야 한다. 그 시절 그 이념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나는 이미 그 이념이 현실에서 구현되었고, 그 결과 실패했다고 배웠다. 그 지식이 내게 준 선입견을 경계하며 세상을 읽지 않으면, 결국에는 내 세상 속에 갇혀버리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삶이 내 인생의 결과가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리모노프>가 내게 준(카레르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하나의 교훈은 이것: 너 자신을 알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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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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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이 증명하는 언어라는 것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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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제 3세계 문학을 좋아한다. 이 쪽의 문학은 번역이 많이 되지 않아 접해볼 일이 많이 없는데, 그런만큼 번역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작품의 질을 보증해주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이집트 소설이라고 하는데, 외국 소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이국적 정취와 함께 인류 보편적인 삶에 대한 사유가 어떻게 녹아 있을지 궁금해진다. 그런데다가 심지어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에 속해있다니, 번역은 출판사와 역자에 따라 너무 차이가 나는 만큼 호소식이 아닐 수 없다. (믿고 보는 민음사라는 믿음은 김연경 소설가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으로...) 출판사의 책 소개만 보면 이집트 판 <백년의 고독>같기도 한 것이, 눈이 가던 출간 소식 :D

 

 

 

 

 

작가분 성함이 익숙하다 했더니, 예전에 읽었던 <죽을만큼 아프진 않아>의 작가분 이셨다. 청소년 소설 느낌이 나던 <죽을만큼 아프지 않아>가 떠오르면서, 새로 나왔다는 그의 중편소설이 궁금해진다. 한국작가가 주는 기쁨 중 하나는, "그때 그 작가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에 작품으로 답해준다는 것. 유려했던 문체와 능청스러운 캐릭터를 기억하는 만큼, 사실 예쁜 구두가 그려져 있는 표지가 낯선데, 과연 어떤 소설일는지?

 

 

 

 

 

 

 

 

 

손해사정사이던 주인공, 항상 타인의 목숨의 가치를 평가하는 일을 해오던 주인공이 자신의 목숨이 얼마의 가치를 가지고 있느냐를 감정하기 시작하는 이야기라고 한다. 사실, 나는 <지평> 이후 프랑스소설을 살짝 겁내게 되었는데, 번역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엔 역자까지 확인했다. 다행히 같은 역자가 아닌 고로, 이 책을 읽고 싶다는 의지를 한 층 더 불태울 수 있었다는 말씀. 카피라이터 출신의 작가도 흥미롭고, 무엇보다 아마존 베스트셀러였다니 '대중적'으로 재미있을 것 같은 느낌이 솔솔 풍긴다.(그리고 난 대중적인 게 좋다...☆)

 

 

 

 

3월 신간 페이퍼는 여기서 끝.

사실 무엇보다 추가하고 싶었던 책은 이번 세계문학상 수상작인

이 작품이었다.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 그런데 이 책은 3월에 나와서, 2월에 나온 책 중 일부를 선정하는 3월 신간페이퍼에는 넣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 ㅠ_ㅠ 4월 신간페이퍼를 작성할 때 잊지 말고 넣고 싶은 작품이다. 일단 세계문학상 수상작은 대중적이라고 생각해서 챙겨 보는 편인데다가, 88만원세대가 나온다니...벌써부터 짠내가 솔솔 풍겨서 손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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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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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에서 일상을 공유하는, 그 중 특히 문화생활을 즐기는 사람 중 이른바 '교양인' 아닌 사람이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할 때, 나는 마치 다음과 같이 묻고 있는 기분이 든다. "현대인들 중 속물 아닌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글쎄, 여기서 말하는 '속물'을 정확히 무어라고 지칭해야 할까? 선한 척 하지만 사실 선하지 않고, 도덕적인 체 하지만 본능적으로 이기적이며, 심지어는 '도덕적'인 것 조차 자신의 특성과 명예가 되기 때문에 선택할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 혹은, 우리가 흔히 '속물'을 지칭할 때 말하듯 교양이 없고 식견이 좁고, 세속적인 일에만 신경을 쓰는 사람?

 

나는 소설을 좋아하면서도, 사실 어떤 소설을 읽을 때 그 이야기가 너무 내 이야기 같아서 불편할 때가 종종 있다. 대중소설에서는 그런 경우가 많이 없는데, 그래서 그런 쪽의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이기도 하다. 현실에 숨쉴 것 같은 속물, 나를 보는 것 같은 인물의 허영과 이중성을 밀고하는 듯한 글을 읽는 것보다, '캐릭터'의 완전하고 논리적인 세계를 보는 게 내 마음에 작은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앞면은 그렇게 두꺼워 보이지 않으나..>

 

하지만, <플래너리 오코너>는 결단코 그런 위안이 되는 소설은 아니다.

소설은 끈질기게 문학의 본분을 실현하려는 듯 독자를 붙잡는다. 약 30편에 달하는 단편을 묶어둔 단편집이니만큼 읽다보면 저자인 오코너 자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가 궁금해지기도 하고, 얼핏 이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고 내가 상상한 오코너는 이런 이미지였다.

 

얼굴 하얗고 창백한데 동그란 알이 달린 1900년대 지식인풍 안경을 쓰고 늘 책을 보는 머리 좋은 여자.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동의하지도, 그렇다고 동의하지도 않는 얼굴로 앉아 '그게 진짜 그런가?'하고 딴지 거는 사람. 세상이 아름답다고는 도통 믿을 수 없고, 사람의 미덕 역시 믿지 못하며, 현대 문명이 만들어낸 낭만적 인간형 따위는 우습게 생각하는 여자.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아니냐고? 글쎄, <플래너리 오코너>를 한 번 손에 들고 이 어마어마한 분량의 소설을 전부 읽어나가 본 사람으로서, 이 정도 평가조차도 후하다는 느낌이 든다.

오코너의 단편에는 몇몇 소재가 지속적으로 등장하는데, '시골-도시','검둥이','기독교','예수' 등이 단편적인 예시다. 오코너는 이런 소재를 다양하게 변주하여 활용하면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주제의식을 전개시켜 나간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그녀는, 삶의 '예측 불가능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알고 있다'는 인간의 자의식과 자신감을 가볍게 비웃는다. '선(善)'하면 복을 받는다는 순진한 권선징악 정신이나 '선' 혹은 "사랑"으로 누군가를 구원하리라는 생각 역시도 조소의 대상이 되기는 마찬가지다. 읽어 내려가다보면, 오코너가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사랑이나 정의감으로 구원받는 얘기? 그건 소설 속에나 있는 거고."

 

그래서일까?

분명히 상징이 들어가 있고 부조리하게 느껴질 법한 상황으로 점철되어있는 소설이 대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오코너의 글을 읽으면서 계속 소설이 아니라 현실의 단면을 읽어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두께가 어마어마하다. 한꺼번에 다 읽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닐 뿐 더러 좋은 글임에도 질리게 되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사탕 아껴먹듯 읽어야 한다! ㅠㅠ>

 

그 어떤 단편에서도 지속적으로, 무언가가 일어나리라 '예상'하거나, 자신의 기준에 맞춰 타인을 재단하고 '상상'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기대며 예상은 모조리 배반당한다. 검둥이는 모두 아틀란타에서 왔다, 검둥이는 자신보다 아래다, 라고 생각한 노인은 옆집 이웃으로 뉴욕 출신 흑인을 만나게 되고, 자신은 우월하고 선량한 백인이라 생각하던 부인은 자신이 '백인쓰레기'라 평한 여자를 앞에 두고, 여대생에게 "지옥"으로 돌아가라는 외침을 듣는다. 플로리다에 범죄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플로리다 여행일정을 취소한 할머니는 자기 고집대로 가족들을 이끌고 가지만, 범죄자는 플로리다가 아니라 그녀의 가족 앞에 나타난다.

 

뿐만인가?

'사랑'으로 뛰어난 아이에게 기회를 주려 했던 선생은 아이의 비웃음과 조롱을 살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이와의 커넥션 마저 잃어버린다. '추방자'를 데려와 농장의 일원으로 삼자 도리어 농장에서 누군가는 추방되고, 추방자만 추방시키면 다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리라 생각했건만, 추방자의 추방과 함께 모든 것의 몰락이 찾아온다. 오코너의 소설 대부분은 이런 식이다. 삶의 아이러니, 사람들의 이중성, 그리고 완고한 기독교적 믿음이 가진 허상성을 가감없이 다룬 오코너의 언어 하나하나가 신랄하고, 그걸 읽어나가다보면 뭐랄까 좀, 씁쓸해진다. "사람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걸까?" 이 질문이 절로 나오게 하는 힘이 소설 안에 있다.

 

오코너의 소설은 당연하게도, 이렇게 이렇게 살아라, 하는 글이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처럼, 힘들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대안이 있음을 말하는 소설이 있는 반면, 오코너의 소설은 대안이 아니라 그저 후벼파고, 이면을 바라보게 하고, 문명 안에서 "푸줏간"과 "경찰관"의 존재 덕에 유지되는 이 거대한 인간사회라는 실험관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뺨을 내리치는 소설에 가깝다.(물론 푸줏간과 경찰관은 콘레드의 소설에 나오는 것이지만.)

 

단점이 있다면, 수록된 단편의 수가 많다보니 한꺼번에 읽으면 약간 버거워지고, 세상이 싫어지고, 그냥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가 몰려오게 된다는 점! 하나하나 따로따로 보는 미덕이 필요하다. 나는 하루에 6-7편씩 읽었더니 나중에는 어으어...이런 상태가 되어서 무슨 괴기 독서몬 처럼 책을 읽고 있었다.

 

특히 재미있게 읽었던 단편들을 몇 가지 언급하자면,

 

<좋은 사람은 드물다> <불 속의 원> <인조 검둥이> <추방자> <좋은 시골 사람들> <절름발이는 먼저 올 것이다> <계시>

 

특히 <좋은 사람은 드물다>와 <절름발이는 먼저 올 것이다>가 가장 인상 깊었다. 인간의 이성, 사회에 팽배한 믿음, 사람에 대해 문명이 전제하는 것들을 모두 비웃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당연히 응당 사람이라면~해야지! 하는 생각을 뒤집는 솜씨도 일품. 기독교에 대한 부분도 그렇고, 사람에 대한 부분 자체에도 공감 가는 구석이 많았다. <추방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 사람들이 미국에 일꾼으로 오게 된 상황을 다뤘는데, 인간의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겹의 사람(이 개념을 뭐라 해야할지. 서벌턴이라고 말하기는 적절치 않은데..), 그 층위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던 소설이다. <계시>도 마찬가지.

 

읽으면서 계속 함께 생각났던 다른 작품들이 꽤 있는데,

먼저 <케빈에 대하여>와 <다섯번째 아이>.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이 그저 존재하는 '악'과 같은 아이와 사회화된 사람 사이를 다룬 두 명작이 계속 떠올랐고,

조지프 콘레드의 <어둠의 심연>(영화화한 <지옥의 묵시록>도) 역시 간간히 생각이 났던 것 같다. 

 

최근 읽었던 한국 단편 소설로는 김영하 작가의 <아이를 찾습니다>를 같이 읽어보면 흥미로울 것 같다. 그러고보니 김연수 작가가 이 오코너의 소설 중 <좋은 사람은 드물다>를 추천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음, 확실히 읽어봄직 한 소설. 내가 느끼기로는 현대소설 중 오코너의 주제의식을 공유하는 작품은 정말 많은 것 같다. 다만 오코너처럼 표현하는 작품은 오코너의 것일 뿐. 그리고 그건 어떤 작품 간의 우열의 문제는 아닐테다.

 

벅찼던 독서량에 부지런한 독서의 중요성을 느끼게 해준 책에 감사를 표한다. 흑.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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