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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세부터 헬로라이프 스토리콜렉터 29
무라카미 류 지음, 윤성원 옮김 / 북로드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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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라카미 류.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 선정도서 소식과 함께 와서 반가웠던 마음도 잠시, 책을 받아보기 전까지는 걱정이 앞섰다. 나는 사실 일본 소설을 많이 읽지 않고, 그 중에서도 일본 본격문학작가라고 할 수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나 무라카미 류, 오에 겐자부로(하루키와 그를 병렬로 배치하면 그가 화를 낼까..?)의 소설은 정말 거의 읽어본 적이 없다. 오죽하면 나는 근 10년간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외국작가라는 하루키의 작품 중 당당하게 '읽었다'라고 말할 만한 작품이 없는데, 너무 어릴 적에 읽어서이기도 하고, 나이가 들자 괜히 피하게 되어서이기도 하다. 각설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라카미 류'를 알고 있었다.

 

그를 알게 된 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인 삼촌을 통해서다.

당시 중학생이던 나에게 삼촌은 당신의 서재를 아낌없이 개방해주셨는데, 그 서재 한 구석에 꽂혀있던 책이 무라카미 류의 '이비사'였다. 지금에야 이비사(=이비자)가 뭔지 알지만, 당시만해도 나는 그 말이 주는 왠지 모르게 하늘하늘한 어감과 하얀 날개가 그려져 있는 책의 표지를 보며, 아 이건 어떤 부드러운 소설일까 생각했더란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아마 삼촌 당신께서도 그 책을 무라카미 하루키와 혼동한 탓에 가지고 계셨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하루키의 책이 아님을 알고 읽지 않으신 것이 아닌가 하는데), 왜냐하면 내가 그 책을 가져가는 것을 방기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라카미 류의 장편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의 소설은 매우 난폭하다. 사실, 그 텍스트 자체에 어떤 문학성이 깃들어있는가,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떠나 나는 이비자를 나에게 '레즈비언 섹스' '게이 섹스(강간)' '쓰리썸' '레즈비언 쓰리썸+코카인' 등등의 여러가지 조합이 가능함을 알려준 소설로 기억하고 있다.

 

서론이 길었는데, 아무튼 이런 어릴 적 기억 탓에, 아 대체 '55세부터 헬로라이프'라는 이 명랑한 제목을 달고 이 작가가 또 무슨 섹스와 퇴폐의 향연을 선보일까 생각했었는데, 생각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펼쳐져서 놀랐다.

 

소설은 총 5가지 중편, <결혼상담소>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 <캠핑카> <펫로스> <여행도우미>로 이루어져 있다. 제목에 충실하게, 각각은 중/장년 나잇대의 주인공들을 다룬다. 그들은 각각 그들의 나이에 일어날 법한 문제로 곤경에 처해있다. 이를테면 <결혼상담소>의 주인공은 남편과의 황혼이혼 후 결혼정보업체에 다니고,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주인공은 퇴직 이후의 삶이 막막한 순간, 노숙자로 전락한 과거의 동창을 만난다. 5가지 작품 모두 주로 '황혼의 사랑'과 '퇴직 이후의 삶'에 방점이 찍혀 있는데, 아무래도 그 두 가지가 중장년층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여서가 아닐까 생각된다.

 

최근 개봉한 <장수상회>도 그렇고 요 근래는 노년층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한국이 초고령화사회로의 진입을 앞두고 있다는 점이 자꾸 상기되다보니 그런 노년층의 이야기, 은퇴 이후의 이야기들에 자꾸 마음이 쏠린다. 그 이후의 삶을 상상하기가 어려운 건 아마도 육체적인 한계와 함께 온 '삶' 이후의 생활 때문 아닐까. <55세부터 헬로라이프>에는 이 지점을 짚어내는 구절이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시간을 투자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안간힘을 다해 정리한 끝에 돌아온 업무가 빌딩경비나 청소라는 건 슬프지 않아?"

"꿈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캠핑카> 中

 

꼭 이런 느낌이다. 열심히 뛰라고 해서 열심히 뛰어왔는데, 어떤 결실도 없이 낙하한 것 같은 느낌. 뛰라고 해서 뛰었더니 단물은 다 빨리고 퉤 버려진 느낌. 그런데 나는 여전히 내가 뛰었던 그 레일에서 뛰고 싶은 거다. 왜 거기서 내가 뛸 수 없지? 물으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몸이 먼저 말을 해준다. 말하자면, 현대사회의 중장년층은 누구보다 열심히 달렸지만 과실을 얻지 못한 사람들 같다. 정서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55세부터 헬로라이프>는 그런 현실과 5-60대 인물상들을 나름대로 '희망'차게 그려낸 글이다. 글을 읽고 있노라면 이런 세상에 희망이라는 건 사실 누군가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5편 모두에서 모든 상황은 부정적이고 암울하지만, 어떤 경험을 통해 인물들은 앞으로의 삶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발견한다. 사실 이 지점이 <55세부터 헬로라이프>에 대해 묘한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 지점이다.

 

사실, 이 중편집을 읽으면서 몇 번 의심을 했더란다. 이게 무라카미 류가 '지금' 쓴 게 맞나? 마지막 작품을 보면 방사능 얘기가 나오니까 최근작은 맞는 것 같은데, 이게 정말 일본의 중견작가가 쓴 소설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도리어 이 분위기는 한때 붐을 일으켰던 일본 여류작가 몇몇과 굉장히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읽었던 '무라카미 류'라는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더 이질감이 컸는지는 모를 일이다.

 

혹은, 이게 일본소설의 풍일지도 모르겠다.(내가 좋아하는 일본소설 작가는 이사카 코타로 정도인데, 그가 워낙 이 풍에서 저 풍으로 날아다니는 데다가, 최근에는 또 읽지 않아서 비교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확실히 그가 주제를 있는 그대로 내뱉는다는 점이, 그리고 이를 거의 온전히 주인공의 내면으로 풀어낸다는 점이 나는 좀 낯설게 느껴졌다. 그림 속에 숨겨져 있었더라면 조금 더 은근했을 것을 끄집어 내어 보여주자 흥이 식어버린 느낌이 들었달까? 아마도 곧 한국의 미래가 될(그리고 사실 지금 한국의 현재이기도 한) 중장년층 문제를 상당히 온유하게 다루고 있어 쉽게 다가갈 수 있었고, 가독성도 높았다. 공감되는 부분도 물론 많았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직설적이라는 점이 이 소설과 나를 조금 멀어지게 한다. 신문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라고 뒤에 적혀있던데, 어쩌면 신문연재소설의 특성상 무라카미 류가 작가로서의 자기 자신을 조금 굽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많은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소설도 좋지만, 소설은 때로 공감과 설득이 아니라 낯설게 함으로써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아쉬웠던 책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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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 제1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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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쾌하지만 가볍지 않고, 우습지만 있을 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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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아이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우리 동네 아이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9
나지브 마흐푸즈 지음, 배혜경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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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역사 선생님은 종종 가르치셨다. 역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게 해주는 거울이라고.

어릴 적에는 그런가보다, 저게 역사과목의 '의의'니까 열심히 외워야겠다, 하고 외웠는데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 수록, 과연 이게 정말 역사의 의의일까 하는 의심이 짙어진다. 그게 역사기록이 존재하는 의미라고 하기에는, 속된 말로 하자면, 지금 현재가 너무 '구리다'.

독재를 겪고도 다시 독재 속으로 들어가는 나라, 포퓰리즘을 겪고도 포퓰리즘에 휘말리는 사람들, 부패를 척결하고 나서 다시 부패로 돌아오게 되는 사회. 이런 모습을 보면,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하지만" 정말로 "배우는가"는 확실하지 않은 것 같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나지브 마흐푸즈의 <우리동네 아이들>은 이 지점을 서구사를 통해 건드리는 이집트 소설이다. '이집트' 소설이라고 하니 굉장히 생소한데, 내용은 그렇지 않다. 성경(구약, 신약)과 마호메드의 이야기, 근대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소설 속의 상징도 무엇을 뜻하는지 유추하기 어렵지 않다. 서문에서 화자가 밝히는 대로, 이 책은 '우리 동네'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지만 사실 그 자체가 '인류사'에 대한 서술이기도 하다. (물론, 이 '인류사'에서 동양인으로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동양, 즉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등은 배제되어있다는 점이 이 책을 읽을 때 가장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소설은 우리 동네에 있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대저택, 흡사 에덴처럼 묘사되는 이 저택에서 이드리스가 쫓겨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저택의 주인 자발라위의 첫째 아들 이드리스는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막내이자 천한 어머니를 가진 아드함이 뽑히자 아버지 자발라위에게 반감을 품고 그에게 반발한다. 그리고 그는 그 대가로 저택 밖으로 쫓겨난다.

이드리스는 이후 꾀를 부려 신실한 아드함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데, 이때 아드함을 부추기는 것은 그의 아내 우마이마다.

성경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알 만한 이 구도는, 바로 아담-사탄-이브의 구도다. 이렇게 볼 때, 저택의 주인 자발라위는 '신'을 표상하는 존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이런 식으로 카인과 아벨, 모세, 예수, 마호메드의 이야기를 차례로 늘어놓는다. 그 이야기는 언뜻 역사의 이야기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이를테면 마호메드의 상징인 '까심'이라는 인물의 경우 나이가 많은 상속녀와 결혼하고, 예수의 상징인 리파아는 아내(즉, 유다)의 밀고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그 덕에 술술 읽히는 것이 장점이라면 장점이고, 그 탓에 예상가능하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흥미로운 점은, '아드함-후심-자발-리파아-까심-아라파(아담-아벨-모세-예수-마호메드-근대인) 이 순서로 내려가면서 점점 자발라위와의 접촉점이 없어지는 것처럼 형상화되었다는 데 있다. 아드함은 자발라위(신)의 아들이었고, 그와 직접 대면했지만, 자발은 어두운 곳에서 그를 만나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리파아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까심은 그의 하인을 만나는 식이다. 즉, 자발라위와 아드함의 후손은 점차점차 멀어진다. 그러더니, 근대 과학을 상징하는 '마법'을 쓰는 아라파에 이르러서는 아예 자발라위가 죽어버린다. 과학의 시대 이후 더 이상 신을 믿지 않고 찾지 않는 인간을 이런 식으로 이야기화 해놓은 점이 이 소설의 탁월한 지점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유일하게 어떤 광채도, 어떤 지적인 힘도, 강한 의지도 없는 아라파의 모습이 유독 인상깊고 씁쓸하다.

 

 우리 동네에 망각이라는 전염병이 돌지 않았다면 그는 좋은 본보기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망각은 동네에 전염병처럼 늘 창궐한다. p.304 (<자발>편이 끝나면서)

 

어쨌든 사람들은 안락한 생활을 더없이 기뻐하며 즐거운 삶을 누렸다. 그들은 자신감에 차 확실하게 "오늘이 어제보다 낫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왜 망각은 전염병처럼 우리 동네를 휩쓸고 지나가는 걸까? p.440 (<리파아>편이 끝나면서)

 

 

 

소설은 매 편이 끝날 때마다 '망각'에 대해 이야기한다. 망각은 계속해서 평온해진 마을을 다시 휩쓸고, 마을 사람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수장과 관리인을 출현하게 만든다. <까심> 편에서 사람들은 이제 망각을 완전히 몰아내야할 때가 왔노라고 이야기하지만, 마호메드 이후 이슬람을 생각할 때 그 말은 아주 공허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까심 뒤에 오는 자를 보라. 그는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근대인, 가장 초라한 주인공 아라파다.

 

다행스러운 건, 바로 그 아라파, 용기없고 비겁한 아라파가 마지막 순간 하나슈에게 비밀의 노트를 남기고 떠난다는 점이다. 그 소식만을 믿고, 마을 사람들은 다시 기다린다. 하나슈가 언젠가 나타나 이 마을을 다시 불의 없는 마을로 바꿔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인내한다.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밤이 지나면 낮이 되듯, 불의는 반드시 사라져. 우리는 우리 동네에서 압제가 멸하고 기적과도 같은 날이 훤히 밝아 오는 것을 보게 될 거야."

​그러나 과연 그럴까?

만약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운다면, 우리는 그 앞의 압제와 그에 맞서 이긴 정의를 배우는 것이 아닐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보다 우리는 하나의 패턴을 배운다. 무언가가 과도하게 일어서면, 반드시 반대 급부가 생긴다. 부패가 만연하면 문제가 생기고, 문제가 생기면 누군가 일어난다. 그가 세운 정의는 시간이 지나면 퇴색한다. 곧 다시 부패가 일어나고, 이에 대한 반(反)으로 정의가 일어난다. 이렇게 계속 반복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조금씩 진보해나가고, 그 결과 언젠가는 최상의,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누군가는 말하지만, 글쎄, <우리 동네 아이들>을 보다보면, 나아지는 것은 기술이고 물질일 뿐 사람의 정신이란 참 엇비슷한 곳에서 움직이는 것만 같다. (게다가 최근 한국사회를 보면, 이 정신이라는 것이 결코 근대적 교육만으로 향상될 수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이드리스의 딸과 아드함의 아들이 결합해서 나온, 그러니까 태생적으로 선과 악, 무지와 교활함을 뒤섞어 놓은 생명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어쩌면 이 반복, 이 무한한 망각 자체가 인류의 운명이 아닌지, 이게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닐지,하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이 ​폭력에 대한 무기력감으로 번지지 않을까, 그리고 그 순간부터 반복은 커녕 고통만이 남는 것이 아닐까, 싶으면서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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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휴학기를 끝내고 학교에 돌아갔더니 이제는 시간이 훅훅 간다! 어느새 벌써 4월의 신간페이퍼를 올리게 되다니, 벌써 한 해의 3분의 1이 가고 있다니 참 기분이 이상하다.

3월 신간평가단 도서는 내가 원했던 책 중 하나인 <우리 동네 아이들>이(2권 완결인데 2권 모두! 올레!), 그리고 무라카미 류의 <55세부터 헬로 라이프>가 선정되었다. 개인적으로 류의 소설은 <이비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당시 중학생이던 내게 그 소설은 지나치게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조금 걱정이 되긴 하지만 ^_ㅠ 일단 힘을 내어 읽어보는 것으로!

 

각설하고, 4월에 보고 싶은 3월에 나온 책은?

 

(1) 구병모,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작가! 구병모 작가님의 신간이 나왔다. 이번달 도서로 선정되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꼭 구매할 책. 구병모라는 이름은 낯선 독자라도 그녀의 베스트 셀러 <위저드 베이커리>를 서점을 오가며 한 번은 본 일이 있으리라. <위저드 베이커리>로 창비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방주로 오세요> <피그말리온 아이들> 등의 청소년 문학과 <아가미> <파과> 등의 장편소설을 냈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그녀의 가장 탁월한 성취는 단편집 <고의는 아니지만>이다. 아이를 돌보며 느끼는 젊은 엄마의 감정이나 성추행 피해자-가해자에 대한 색다른 시선 같은 것들이 정말이지 소름돋을 만치 세밀하다. 환상적 상상력과 더해진 그 길고 툭툭 사람을 건드리는 문체가 늘 서늘하게 사람을 찌르는 느낌! 안타깝게도 최근 낸 장편소설은 그런 스스로의 시선과 장르적 문법 사이에서 후자의 편을 들어준 느낌이 진했다. 하지만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은 이미 슬쩍 훑어본 결과, 그녀 특유의 장르-문학성 사이의 줄다리기를 성공적으로 해낸 느낌. 특히 수록된 작품 중 <이창>은 이미 문지웹진문학상 작품집으로 살펴본 바 있다. XD 웰컴 백 구병모!

 

(2)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최근 <버드맨>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읽어봐야지, 하고 결심했으나 여직까지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미국 소설의 대가 레이먼드 카버. 카버의 가장 유명한 책은 <대성당>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별다른 근거는 없고 그저 내가 가장 많이 들어본 카버의 책이기 때문이다. 그런만큼 사실 이번 3월 신간을 둘러보다가 이 책을 발견하고 어쩐지 반가웠다. 앗! 다른 책도 있었구나! 하는 무지가 주는 기쁨 같은 느낌이 불현듯...!

 

 

 

 

 

(3) 아르노 슈트로벨, 관

 

 

이번에 민음사 <죽은 자의 제국>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그 분야 책에 조금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마침 이 책이 신간으로 나와있었다. 책 소개에 관에서 깨어난 할머니가 나와서 흠칫 놀랐다. 최근 외국에서 사망선고를 받고 관에 들어간 할머니가 관을 두드리며 깨어나 화제가 된 적이 있기 때문. 그런데 또 그런 소재의 심리 스릴러라고 하니, 이건 안보고 버틸 재간이 없다 싶다.  

 

 

 

 

 

 

 

사실 지난번에 내 무지로 인해 3월 신간 페이퍼에 쓴 <행복만을 보았다>도 조심스레 추천해보고 싶다. 며칠째 알라딘의 메인 홈페이지에 프랑스 최고 베스트셀러로 떠 있는 데다가 손해사정사가 자기 인생을 따져보는 이야기라니 흥미로우면서도 문학적이다. 안 끌리지 않는 카피일리가 없어서 책이 나한테 반칙을 한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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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리미티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선셋 리미티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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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가만히 누워 생(生)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다. 어떻게 살아야할까가 아니라, 나는 어디서 왔을까, 왜 왔을까, 정말 이유가 있어서 왔을까, 사실 제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이 모든 것이 무용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면 불현듯 서럽고 무서워지면서, 계속 이렇게 불안한 상태로 사느니 차라리 빨리 죽어 끝을 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어진다. 산다는 건 참 그렇다. 불안과 삶은 뗄 수 없는 관계여서, 사람은 늘 불안을 삼키고 살아가는 듯 하다. 나는 언제 죽게될까, 어떻게 죽게 될까, 어떤 사람으로 살게 될까, 그 삶에는 어떤 '가치'가 있을까. 죽을 때는 많이 아플까. 그런 기우들은 불안에서 파생되어 나와 때로 삶을 잠식한다. 너무 깊게 빠져들면 의미라곤 없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순간 내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참 쉽지가 않다.

 

코맥 매카시의 <선셋 리미티드>는 사실 <리모노프>보다도 빨리 읽었다. 자살을 시도하던 백인 교수와 얼떨결에 그를 구한 흑인 목사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극 형식으로 다루고 있는 이 짧은 소설을 읽는데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던 반면, <리모노프>는 워낙 장편의 대서사시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셋 리미티드>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독서 후 생긴 동명의 영화에 대한 욕구 때문이었다. 영화 선셋 리미티드를 꼭 보고 싶어 찾아다녔는데 찾지 못해서 아직도 그게 조금 아쉽다. 극 형식의 소설이라지만 사실 희곡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재담을 가지고 펼쳐지는 이 소설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참 궁금하다.

 

물론 단순히 영화를 보지 못해 글을 쓰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나는 이 소설에 대해 어떻게, 무엇이라고 적어야 할지 꽤 오래도록 고민해야 했다. 소설은 단순히 '자살'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성에 기초해 살아가는 르네상스 이후의 인간, 혹은 근대의 인간 그 자체를 다루고 있다. 나는 그 일원으로서, 그것도 이 소설에 나오는 백인 교수와 꽤 비슷한 생각을 오랫동안 해온 근대인 중 하나로서, 이 글에 대해 '쓰기'시작할 때 그 행위가 내게 미칠 여파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글을 쓰다가 우울해질까봐 글을 쓰는 일이 꺼려졌다.

 

소설에서 나오는 흑인과 백인은 인종을 넘어서 흑과 백, 그리고 서로 반대되는 방향에 있는 인간군상을 드러내보인다.

목사인 흑인은 자신이 신을 '체험'했다는 것을 들어 백인의 자살을 막으려고 하지만, 백인은 신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의 한 명으로서 그는 비단 신 뿐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지켜야 한다'라고 합의되어진 가치의 절대성 자체 마저 신뢰하지 못한다. 문화, 예술, 문명의 가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가 믿는 그 가치들은 결국 "연기가 되어 다하우 강제수용소의 굴뚝으로 날아가버린" 가치들일 뿐이다.

 

<영화 '선셋 리미티드'의 한 장면으로 추측됨. 사진 출처는 구글>

 

이런 백인 교수는 인간의 지성을 대표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이성으로 파악한 세상은 부조리하고, 도통 모든 일에 '의미'가 있는 조화로운 세계 같지 않다. 그는 그래서 인간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규범에 냉소적이다. 우연히 만난 사람이라도 어려움에 처해있으면 도와야한다는 목사의 말에 그는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하며, 모든 것은 '합의의 문제'라고 단언한다. 말하자면, 그의 세계에 절대적인 가치나 믿음은 없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존재할 수 없는,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그의 삶이란 척박하고 끔찍하다. 그래서 그는 시속 130km로 달리는 기차 선셋 리미티드에 뛰어들려 하는 것이다.

 

그런 반면, 그 백인 교수를 말리기 위해 그를 잠시 자신의 집으로 끌어온 흑인 목사는 살인전과가 있지만 신을, 예수를, 성경을 믿는다. 일반적인 눈으로 볼 때 얘기하기 껄끄러운 장소인 교도소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는 그곳에서 자신은 신을 찾았다고 말한다. 그는 자살 하려 했던 교수를 술꾼에 비유하며 "술꾼이 걱정하는 건 술로 죽을 기회가 오기도 전에 술이 떨어지는 것"이라 단언한다. 술꾼은 진짜로 원하는 것, 즉 하나님의 사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사실은 진짜로 원하지도 않는 술을 끊임없이 갈구한다는 것이다.(이 부분에서 라캉이 연상되는 것은 나 뿐일까?) 그렇게 말하며 목사는 교수가 갈구하는 죽음이 바로 이 술꾼의 술과 같은 것이라 단언한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원하지만 얻을 수 없는 것 같기 때문에 교수는 죽음을 원하는 '체' 한다는 것.

 

이렇듯 서로 너무나도 다른 포지션에 서 있는 두 사람은 끊임없이 대립하고 계속해서 대화하지만 끝내 생각의 차이를 좁혀가지 못한다. 백인 교수는 흑인에게 이끌려 잠시 생을 연장했지만, 결국 다시 떠나간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그 자체만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하나의 비유처럼 느껴진다. 잠시간 믿음의 세계에 이끌려왔지만, 결국 끝에는 그곳에서 떠나가야하는 인간들에 대한 비유 말이다.

 

언젠가 수업에서 역사학과의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인간의 권리라는 것, 이른바 '천부인권'이라는 것은 모두 만들어진 개념이라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존엄한 것이 아니라 존엄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라고. 교수님은 거기에 첨언하시기를, 그렇게 만들기 까지, 그러니까 모든 인간이 존엄성을 보장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노력이 필요했는지를 상기하고 그 소중함을 느끼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현존하는 어떤 종교 교리 내에서의 신과 같은 존재는 믿지 않고, 그런 신들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신'이라고 우리가 규정하는 어떤 존재의 현존은 정말이지 믿고 싶다. 그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 지와 무관하게, 그런 것이 있으리라 믿고 싶다. 왜냐하면 신은 인간과 달리 정말 의심의 여지조차 없는 '절대'적인 존재이며, 우리 삶에 어떠한 종류의 '의미'를 부여해줄 수 있는 존재일테니까.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욕구와 함께 의문이 따라온다. 신이 정말 있다고? 그렇다면 신은 누가 만들었는데? 그 신은 왜 우리를 만들었고, 우주를 만들었는데? 하는 의문 말이다. 아마 이런 끊임없는 불안을 생산해내는 능력이 지성을 발달시킨 인간에게 주어진 원죄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늘 결론은 하나로 귀결되는데, 에잇, 어차피 죽을 용기는 없으니 어찌됐건 필연적으로 끝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일단 살아보자!는 것이다. 끝이 아무것도 아니더라도 일단 주어졌으니 살아보자는 것. 하지만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다.

 

<선셋 리미티드>의 교수가 어떤 중요성도 부여하지 못하는 인간의 규범과 존엄성은 물론 만들어진 개념이다. 현대에서 인식하는 사랑, 연애 그런 개념이 만들어졌듯. 하지만 그 개념들이 만들어진데에는 이유가 있고, 그 개념들의 효과로 우리는 지금 동등하게(혹은 서로가 동등하다고 믿으며) 살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맹신하지 않지만 나는 간혹 생각한다. 그 존엄성이 보장되지 않던 시기에 내가 태어났더라면 내 삶이 어떻게 달라졌었을지를. 그 상상을 하다보면, 존엄성 자체의 절대적 가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존엄성의 필요성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아마도 그래서 지금 규범으로 만들어진 것들은 지켜져야하는 것이 아닌지, 변화하더라도 아주 조심스레 변화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한다.

 

물론 이렇게 생각해도 불안하다. 산다는 건,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발버둥 친다는 건 항상 불안을 품고 있는 일이니까. 매카시가 건드리는 인간의 필연적인 고뇌를 읽으며 또 한 번, 이깟 인생, 하고 생각할 만큼 항상 요동칠 준비를 하고 살아간다는 건 버겁고 힘겨운 일이다.

 

하지만, 아, 무엇이 어찌되었든 나는 살고 싶다. 지금보다 더 자유롭게, 덜 아프게 살고 싶다. 나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삶의 매 순간마다 죽음을 향해 한 발자국씩 나아가고 있으니, 살아 있을 수 있을 때는 항상 최선으로 살고 싶다. 그러나 그 일은 왜 그다지도 어려운가? 왜 우리는 생에 충실하자 다짐하면서도 미지의, 그러나 반드시 올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불안감 앞에서는 이토록 무력한가?아, 산다는 건 정말이지, 전부 이런 것일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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