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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업 사회 - 일할 수 없는 청년들의 미래
구도 게이.니시다 료스케 지음, 곽유나.오오쿠사 미노루 옮김 / 펜타그램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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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의 일이다.

 

대학생 기자단을 필두로 만들어진 미디어 <미스 핏츠>최씨 아저씨에게 보내는 편지가 소개 되었다. 나는 그 새로운 미디어에 사소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편지의 내용만은 20대로서 구구절절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월세, 취직에 대한 걱정, 미래에 대한 불안 등이 진하게 묻어나는 협박편지에 박수를 보냈더란다.

 

그러다 어느 날의 하교 길, 교정이 끝나는 곳에 깃발 같은 현수막을 들고 계신 아버님을 만났다. 현수막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써 있었고, 아버님은 당신을 향해 다가온 몇몇 대학생과 말씀을 나누고 계셨다. 나는 가만히 서서 현수막 글씨를 읽어보았다. 그리고 도무지 좁혀지지 않는 아버지 세대와 나 사이의 거리감을 도대체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는지, 막막해졌다. 둘 다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더 그랬다.

 

아버지의 말씀은 간단했다. ‘너희는 노력하지 않았다. 너무 많은 것을 처음부터 바라보고 있으니 취업이 힘든 게 아니냐. 우리 때는 그렇지 않았다. 불굴의 정신!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너희의 아버지로서 너희를 응원하고 사랑한다.’ 그에 대한 우리 세대의 답변은 이랬다.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니다.’

 

이제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났던가. 최근 인터넷 서점의 인문 란을 뒤져보면, 능력사회, 공부, 노력, 자기계발을 강조하는 사회가 가진 허구성을 강조하는 책이 많다.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의 인식은 그렇지 않다. 얼마 전 추석 때에도, 공장에는 사람이 없어 난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야 그렇겠지했다.

 

이 나라에서 대부분의 청년은 대학을 나온다. 나는 지금 대학이라는 교육(?)장에 진입하지 못하는 자의 수를 무시하는 위험한 발언을 하고 있지만, 내가 초중고를 나오면서 느낀 점은 어느 곳이든 대학이라는 이름을 단 곳에 대부분의 친구들이 진학한다는 거다. 우리나라 만큼 고등 교육을 많이 받는 나라는 찾기 힘들고,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경쟁하고 노력하는 이 풍토는 오바마가 언급했을 정도로 유명하다. 나는 솔직히 그 아버님의 글을 보며 화가 났는데, ‘공장에라도 가라는 말 뒤에 숨겨진 그게 노력이고, 그게 치열한 삶이다, 라는 뉘앙스. 너희는 지금 너무 풍족한 시대에서 살아 맷집이 부족한 것뿐이라는 그 뉘앙스가 진저리나게 싫었기 때문이다.

 

누가 우리를 풍족하게 키웠는가? 우리는 풍족하게 크는 대가로 감내해야할 것이 정말 없었는가? ---대학교를 필수적인 교육코스로 밟으며, 기성세대가 우리에게 가르친 건 참고 공부하면 무언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그 희망의 끝이 공장인가? 나는 지금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비하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당신들이 그토록 주창해온 노력을 우리는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해왔고, 그에 걸맞은 가치관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걸 말하고 싶은 거다. 이렇게 공부했으니 어디는 가야지, 이렇게 공부했으니 뭔가는 해야지. 그러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 생각 때문에 더 괴로워하고, 더 미끄러진다. 노력했는데도 되지 않는다면 허탈해지고, 노력했음에도 비난받으면 허무해지며, 노력이란 말이 무서워진다.

 

그럴 땐 그냥 포기하는 편이 차라리 마음도 편하다. 노력이면 된다는 기치 아래에서 자라왔으니, ‘노력해도 안 된다.’는 현실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청년 백수 중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취업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들이 게으르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건 세간의 인식이요, 상황에 맞부딪히지 않은 누군가의 착각이다. 물론, 분명 어떤 경우 개인의 탓도 있을 테다. 개인의 특질이 사회적 구조와 맞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것은 한 개인개인의 경우요, 이토록 많은 청년 실업자 모두에게 대입해서 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사설이 길었다. 나는 이런 개인적 생각을 배경으로 <무업사회>를 읽었다. 그리고 조금은 실망했다. <무업사회>가 나쁜 책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제목과 소개만 보고 너무 과도한 기대를 그 책에 불어넣은 게 문제였다.

 

<무업사회>는 일본의 젊은이들을 다루고, 니트족, 프리터로 사는 사람들의 통계적 숫자, 그들을 다시 취업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경위, 그리고 그들의 전반적인 속내를 얘기한다. 내가 바랐던 책이 조금 더 구조적인 문제에 치중하는 류 였다면(사실 일본에서 번역되어온 책이라는 부분에서부터 이 점을 포기해야했어야하는 것은 맞다. 한국과 일본의 풍토가 다를테니까), 이 책은 청년 실업자가 어떻게 사회로 복귀할 수 있는가를 다루는 일종의 보고서 같은 느낌이었다. 책의 처음부터 이 청년 실업자가 발생하게 된 경위가 결코 세간의 인식처럼 게으름이나 나태함이 아님을 밝히는데, 이때 <무업사회>는 구조적 측면보다는 개인의 정신적 측면을 좀 더 강조한다. 말하자면, 청년 실업자 중 다수가 실패의 경험, 취업이라는 상황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인지, 사실 일반 사회과학 서적보다는 임영인 신부님의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세요>와 비슷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서울역 노숙자를 도우며 신부님이 쓰신 책인데, 노숙인들의 문제가 단순히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과 같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노숙인들 역시 노동의 현장에 있다가 한 순간에 튕겨나온 사람, 정신적으로 심한 트라우마가 있거나 실패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는 얘기가 주로 적혀있는데, <무업사회> 역시 그랬다. 그래서인지 뒤쪽에 있는 수기를 보아도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고, 이런저런 공포증이 있었는데 잡트레이닝을 통해 극복할 수 있었다, 도움이 되었다는 류의 얘기가 많이 나온다.

 

<무업사회>는 이 사회를 미끄럼틀 사회라 부른다. 정규 루트에서 한번 이탈하고 나면 지속적으로 내려가게 되어 멈출 수 없는 사회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사회에 대한 분석, 그리고 여기서 무업으로 이어지게 되는 현황 등이 궁금했는데 책 자체는 그보다 좀 더 어떻게이 이탈자들을 다시 사회로 북귀시킬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춘 것처럼 보였다. 나쁘지 않고, 분명히 필요한 이야기이지만 뭐랄까. 해결책 부분은 매우 원론적인 이야기가 반복되었고 문제를 깊게 파헤치기보다는 프로젝트에 대한 보고서를 쓰는 데 치중한 느낌이 강했다. 무엇보다, 당연한 얘기이긴 하지만 노력의 끝은 또다시 노력이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 읽고 나서 만족감이 오래 남지 않아 아쉬웠던 책이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책에 대한 선입견을 가진 나머지 독서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이 고개를 들이민다. 곧 한국에도 프리터라는 실제적으로 용어가 도입되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인데, 그때 즈음 다시 읽어보아도 좋을 것 같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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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프게도 2월은 축농증과 함께 왔다. 이러다가 콧물사하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걱정이 되는 가운데, 1월에 나온 책들을 살펴본다. 행인지 불행인지, 이번에는 다른 달처럼 여럿 중 고민하는 일은 없었다.

 

1. 글쓰는 여자의 공간

 

 

 

여성작가들을 글쓰기로 내몰았다, 글쓰기의 열정을 불러일으켰다는 공간. 대체 어디이며 거기서 무슨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책 소개가 유독 마음에 드는 책. 우리나라 여성작가로도 이런 류의 서적이 나오면 좋겠다.

 

 

 

 

 

 

2. 덕후감

 

 

 

 대중문화와 정치의 연관관계를 연구하는 분께서 쓰신 독후감 아니고 '덕후감'. 학계로서는 최근의 현상을 다루는 듯하다. 덕후이고, 덕후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꼭 읽어보고 싶은 책.

 

 

 

 

 

 

 

3.하리하라의 눈 이야기

 

 

 

90년대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하리하라를 알지 않을까. 중/고등학교 시절 그녀의 책은 늘 필독서 목록에 있었다.

이번에는 눈 이야기라니, 흥미가 간다. 현대인은 시력의 동물이 아닌가.

 

 

 

 

 

 

4.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테리 이글턴을 글을 읽고 '????'했던 게 어제 같은게 저렇게 예쁜 책이 그의 글을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편집부는 이 책이 '쉽다'고 소개하고 있다! 허위광고가 아니라면 실로 읽어보고 싶지 않을 수 없다.

 

 

 

 

 

 

5. 미치광이, 루저, 찌질이 그러나 철학자

 

 

 

 

대체 칸트는 누구고 헤겔은 누구이며 그들이 무슨 주장을 했는지.

가볍게 읽어보고 알 수 있을 것 같아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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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과 영원 - 푸코.라캉.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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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은 책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본인의 독해력 때문.

 

 

 

양심고백을 하나 하자면, 나는 학부를 막 마친 인문학도 임에도 라캉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지지난 학기였나. 열정적으로 라캉과 지젝의 글에 대해 설명하는 한 교수님을 만나 정신분석학을 이해해보려 노력했으나 처참한 학점과 함께 실패했다.

 

이에 더해 르장드르는 이제껏 들어보지도 못한 철학자였고, 푸코가 그나마 친숙하다지만 그의 논지를 백퍼센트 이해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탓에 <야전과 영원>을 받자마자, 아니, <야전과 영원>이 이번달의 도서로 선정되자마자 꽤나 골머리를 앓았더란다. 표지만 봐서는 알 수 없던 책의 두께와 이서문을 지난 이후 시작되는 "라캉은 왜 난해한가?"를 논하는 실로 난해한 저술에 사실 독서의욕이 떨어졌다. 하여, 라캉과 르장드르를 제치고 푸코부터 읽기 시작했다. 차지하는 지면이 많은 만큼 여기 뭔가 중요한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 였다.

(이 책은 총 950페이지에 달하는데, 뒤에 100페이지는 주석이고, 400페이지부터 그 전까지가 제 3부, 즉 푸코에 관한 이야기다. 말하자면 내용의 지분 절반이 푸코에게 있고, 라캉과 르장드르가 나머지 반을 나눠 가지고 있다.)

 

내가 읽어본 푸코의 저작은 <안전, 영토, 인구>와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뿐이다. 그마저도 후자는 영어본으로 접했던 터라 제대로 이해했다 보기엔 무리가 있다. 때문에 푸코를 시작할 때에도 꽤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아타루는 3부의 1장부터 6장까지 푸코의 이론을 설명하는데 할애, 친절히 하나하나 짚어준다. 물론 아타루 본인의 논지를 따라가다보니 다소 선별적인 소개가 되는 것은 사실. 하지만 푸코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나 같은 독자로서는 푸코의 이론을 푸코의 언어보다 친절한 언어로 만날 수 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XD 심지어 굉장히 즐겁게 읽을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이 책의 의미는 충분하다 하겠다.

 

아타루는 이 푸코에 대한 장을 천천히 기술해나가며, '오래된 것(주권 개념)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규율/생명정치)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푸코의 초기 주장이 어떻게 전복되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절반의 독서였으나, 이런 아타루의 논의가 왜 "인간의 주체화"와 연결되는지, 그리고 왜 반목하는 두 인물, 라캉과 푸코- 그리고 르장드르를 끌어들여야했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타루의 책은 '사람은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해 나름대로 답했던 세 인물을 끌어들여 절충하는 책으로도 보이고, 아타루 본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이 세 인물을 통해 주창하는 책으로도 보인다.

 

장장 95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을 통해 아타루가 말하려는 바는 꽤 명료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끝없이 얘기되는 많은 존재들(역사나 문학 같은)의 종언, 거기 섞인 비관주의와 무기력을 비판한다. 푸코가 제시한 개념인 '규율적 생명정치'는 여러가지 우연의 결합이 낳은 결과임을 지적하고 따라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음을 말하는 것. 그게 아마 이 책의 목적이 아닐까? 보이지 않는 지배, 보이지 않는 적과 그에 따른 '길잃음'의 감각이 휩쓸고 있는 현재의 인문학에 대한 석학의 질책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 마지막 문단에 쓴 두드리는 소리에 대한 아타루 나름의 애정과 집념 역시 이 연장선상에 있으리라. 책 제목이 암시하듯이.

 

계속 필기를 하며 읽었는데, 유독 문장 그대로 받아쓴 부분이 있다. 나로서는 이 책의 핵과 맞닿아있다고 느꼈던 부분이다.

 

"근대인이란 정치 내부에서 살아가는 존재로서 자신의 삶 자체가 문제시 되는 동물이다. 이는 삶이 '삶을 지배하고 경영하는 기술'에 모조리 포섭되었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삶은 그로부터 쉼없이 도주하는 것이다."

 

 

 

*) 개인적으로 덧붙이는 이런 저런 생각.

1. 읽으면서 바우만과 바타유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바타유의 에로티즘을 읽을 때 분명 무진 애를 썼던 것 같은데, 이제와 보니 내용이 선명하게 떠오르질 않는다. 다시.. 읽어야지..

바우만은 왜 자꾸 떠오를까, 그가 논하고 있는 '리퀴드 근대'나 현시대의 도덕적 불감증 같은 개념은 푸코보다 좀 더 후대의 것인데. 그의 비관적인 포즈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히 내가 읽은 얼마되지 않는 철학책의 저자이기 때문일까?

 

2. 읽다보면 결국 인간 사회의 근원에는 종교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유럽의 경우 그리스도교. 동양은 유럽의 근대적 형식이 들어왔기 때문에 비슷해진 걸까? 아니면 사목 같은 형태가 동양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을까?(이를테면 공자와 그 제자들처럼)

 

3. 학교/수도원/감옥 등이 만들어냈던 규율과 신체의 관리는 최근에도 많이 얘기되고 있는 것 같다. 몸의 탄생 이라는 책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비단 기관만이 아니라, 이제는 상품이 이런 규율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는 듯 하다.

 

4. 이 책에서 '세속화'라는 단어를 종종 보는데 뒤만 독해를 했기 때문인지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 와닿지가 않는다. 이를테면, "푸코는 세속화를 믿고 있다."같은 문장은 무슨 뜻일까? 혹시 설명해주실 분 계신가요 ㅠ.ㅠ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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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불감증 - 유동적 세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너무나도 소중한 감수성에 관하여
지그문트 바우만.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지음, 최호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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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의 이름을 처음 접한 건 "리퀴드 근대"를 통해서였다. 당시 연애라는 주제로 작은 스터디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이 노 철학자의 책이 두번째 선정 도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엔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읽었는데, 읽다보니 어슴푸레하게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일 만한 대목들이 있었다. 그래도 전체적인 내용은 여전히 아리송했다. 그러던 내가 바우만이 하는 말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된 건, '쓰레기가 되는 삶들'을 읽은 이후였다.

 

내가 이해한 대로 바우만이 제기하는 현대의 문제를 정의해보자면,

인간의 상품화인 것 같다. 최근에 일어난 매칭프로그램을 통한 연애나 바우만이 생각하는 현대의 소통방식을 생각하면 그렇다. 한쪽만 원하면 잘라낼 수 있는 관계, 언제든 끝날 수 있는 관계, 자신을 보여주지 않고 상대만을 탐색하는 관계 등등 그가 지적하는 여러가지 부분이 현대 기술과 함께 도래한 소통 방식이라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이에 대한 그의 통찰이 매우 합당하다 생각하고, 실제 현대인의 삶을 적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여긴다. (다만, 리퀴드 근대에서는 그의 주장이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보였다. 인간성이 기술과 함께 공존할 가능성을 떠올리기보다는, 기술이 인간에게서 '인간성'이라 불리는 속성을 빼았아가버릴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도덕적 불감증'은 바로 이 바우만이 또 다른 철학자 레오니다스 돈스키스와 함께 한 문답을 엮은 책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후자의 글을 읽어본 적은 없고, 그의 이름도 사실 처음 들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의견이 적절히 섞여있는 이 책에서 돈스키스의 말에 많이 공감했고, 그 통찰력에 놀랐다. 특히나 인상 깊었던 건 2장과 3장이었는데, 이 부분에서 '현대 기술에 익숙해진 사람에게 어떤 성격이 나타나는가?' '왜 그런가?'라는 질문이 잘 다루어졌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악과 선의 이야기가 나오던 첫 장은 너무 어려운 이야기가 훅 시작되어서 읽기 좀 힘든 부분도 있었다. '아디아포라' 얘기는 홀로코스트와 광주 사태 등에서 일어났던 인간의 비인간화를 떠올리게 했는데, 그런 한편 이 얘기가 현대의 특성인 '고백사회'와 맞물려 독자로서 초점을 잃어버린 기분을 느꼈다.(말하자면, 책은 논리정연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 혼자 길을 잃었다 ㅠㅠ)

 

책을 통틀어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내용은

우리가 우리를 비존재로 만들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자기에 대해 얘기하고 폭로함으로써 권력관계를 형성한다는 것. 특히나 이 과정에서 '피해자'가 어떤 권위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서술은 너무 적확해서 놀라울 정도였다. 피해자에게 도덕적 성인의 이미지가 덧붙여진다는 건 일상에서는 하기 힘든 말이나 명백한 사실이기도 하다. 사실 이 부분은 읽으면서 바로 전달의 신간도서였던 페이스북 심리학이 많이 생각났다. 저마다 자기고백, 자기노출을 일삼아 존재감과 정체성을 확보하는 시대, 그 뒤에 숨은 게 공포라는 감정까지. 현대인이 기술과 함께 이야기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종족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리고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나왔듯, 신자유주의 시대로 들어서면서 "무능의 불법화"가 일어나고 이에 따라 낙오하지 않기 위한 배척이 생긴다는 지적, 또한 낙오가 언제든 나의 일이 될 수 있다는 불안 얘기 역시 흥미로웠다. 음, 다만 이에 관련해 이 책에 대해서는 상당한 불만 사항이 있다.

 

첫째, 번역이 어색하다. 사실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원문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일반적인 번역투가 그렇듯 명사 앞에 붙는 수식어구가 너-무 많아서 도저히 이 문장이 뭘 뜻하는지 알 수가 없다. 개인적 독해력의 부족 탓도 있겠지만, 돈스키스의 물음 및 분석- 바우만의 분석 및 대답으로 이루어진 구조인데 도대체 돈스키스가 뭘 물었으며 바우만이 무슨 대답을 한 것인지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중간 중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부분이 있으나, 그 부분만 이해하고 넘어갈 뿐이라 본의아니게 매우 파편적인 독서가 되어버렸다.

 

둘째, 바우만의 기존 저서를 읽지 않은 사람들이 과연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든다.

내가 읽은 바우만의 책은 두권 뿐이지만, 이 책의 독서를 많은 부분 그 책들에 대한 기억에 의존했다. 그러지 않고 독해하기가 어려웠고, 의미없는 가정이지만 내가 이 책을 시작으로 바우만을 접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자들의 책이 모두 그렇지만, 불친절하다. 매우 불친절하다. 둘 사이의 대담을 엮어 책으로 내겠다면 적어도 일반적인 '대담' 수준에서부터 시작해주었어야 한다는 게 내 의견이다.

 

(물론 이것은 책이 너무 어려워 하는 푸념일 수 있다. 사실 이번에 선정된 다른 도서, <야전과 영원>에 대해서는 이런 류의 평이 불가능한데 그건 누가봐도...전공서..or 인문학 덕후 용이다. 둘 아니면 읽지 않으리라는, 이 책으로 아마도 인문학 강좌가 가능하리라는 예감이 강하게 드는 포스를 풍기는 책이라 이미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있다. 그러나 <도덕적 불감증>의 귀여운 표지와 뒷쪽에 선정된 문구(아, 슬프게도 너무나 자극적인데)는 이 책을 보다 대중적인 책이라 믿게 만드는 힘이 있으므로 위와 같은 평이 가능했다 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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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페이퍼에서 소개하는 '신간'은 2015년 12월에 출간된 책입니다.

 

1. 젠더 허물기

 

 

삶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그렇지만 '성'에 관련된 이야기는 특히나 더 개인의 경험에 의존한다. 최근 유행하는 '여혐' '남혐' 같은 단어들 뒤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그 깊은 골을 어떻게 메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바람직한 통찰을 제시하지 않을까 기대하며, 읽고 싶은 신간 1위로 넌지시 선정해본다.

 

 

 

 

 

 

2. 무업사회

 

 

 

지난 해였나, 인문/사회 분야 신간평가단의 신작 도서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 꼽혔다. 워낙 읽고 싶었던 책이라, 이번에는 이쪽 신간평가단을 지원하게 된 것이었는데, 내용이야 다르지만 비슷한 컨셉으로 일본의 젊은이들을 인터뷰하고 현황을 다룬 책이라 하니 관심이 간다. 어떤 면에서, 일본은 한국의 근미래를 보여준다는 견해에 동의하니 더더욱 그런지도.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심지어 표지조차 넘나 일본 스러운 것.....

 

 

 

 

3. 사표의 이유

 

 

 

바야흐로 기만적인 노력의 시대, 소진의 시대. 시스템을 분석한 글이 아니라, 개개인이 그 체제를 어떻게 감지하고 느꼈는지를 보고 싶었다. 미생부터 시작된 흐름이 점차 인문 사회 계의 출판 유행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작은 우려와 함께 읽고 싶은 신간으로 선정해본다.

 

 

 

 

 

 

 

4. 이슬람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당신이 여자로 태어난다는 가정하에, 태어나고 싶은 나라를 고른다면 과연 그 나라에 중동권 이슬람 국가들이 포함될 것인가. 나는 그 감각을 모른다. 한국에도 여전히 성적으로 불편한 요소들이 잔재해있지만, 적어도 이처럼 노골적이지는 않다. 그런 종교적 배경 아래에서 사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5. 후쿠시마에 산다.

 

 

 

 

 

읽고 싶은 신간으로 선정한 이유는 위의 책과 상동.

상상만으로 끔찍한 사고와 대면한 누군가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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