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전체에다가 밑줄을 긋고 싶었다.

그해 여름, 7월 마지막 주와 8월 내내, 그리고 9월의 3일간 난 평생 그 여름을 사랑해왔다 - P165

나는 우리가 걷고 또 걷는 동안 당신이 격식을 차리느라 지루하다는 말을 못 한 건 아닌지, 그게 궁금했다. "우리는 킬네이에 갈 수도 있어요." 내가 제안했다. "당신에게 킬네이를 보여주면 좋을 텐데." 당신은 미소 지으며 그러고 싶지만 당신에게 너무 슬프지 않을까요, 라고 말했다. 당신과 함께면 슬플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 P168

"놓치지 마, 윌리."
"뭐를요?"
"너의 사랑. 선물 같은 거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근데 메리앤이 날 좋아하는지조차 모르겠어요. 그녀가 좋아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잖아요."
"당연히 널 좋아하지. 편지를 써, 윌리. 제발, 얼른." 그녀는 다급하게 말하더니 잠시 내 팔에 손을 얹었다. 조니 레이시 앞에서 드러낸 만족감과 그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낸 미소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어떤 슬픔이 그곳에 있었다. 시카고로 내쫓긴 소녀를 다시 생각나게 하는 내밀하고 외로운 슬픔이었다. - P182

당신 방 앞에 선 나는 아주 가볍게라도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그저 문을 열었다. 모든 두려움과 도덕이, 세상의 모든 잣대가 내게서 사라졌다. 난 아무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당신이 알아야 한다는 것 말고는,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면 당신이 적어도 약간의 위안을 얻을지 모른다는 것 말고는. 난 램프를 화장대에 올려놓고 당신 이름을 불렀다. - P198

"내 말은, 이멜다, 일이 그렇게 된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일은 우연히 일어난단다." - P291

그는 사진속의 미소를 짓고 그가 사랑하는 소녀는 밀짚모자 띠에 조화 장미를 달고 있다. 그들은 딸의 미친 상념 속 짧은 서사시에서 자신들이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이 끝에 볼로냐 소녀의 머리 위를 떠돌던 성체만큼이나 놀라운 기적이 있음을 안다. 그들은 오늘같은 날이 허락된 것에 감사하고, 추함이라곤 없는 딸의 고요한 세계의 은총에 감사한다. - P33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alcutta 2023-11-18 2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마크 카와이^^

새파랑 2023-11-19 08:43   좋아요 1 | URL
ㅋ 친구가 개띠라고 🐕 북마크를 줬습니다 ㅋㅋ
 

뭔가 10퍼센트 부족했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고독이 나를 짓누른다. 친구가 그립다. 진실한 친구가………… - P37

이런 나의 탄식을 곁에서 들어줄 사람이라면 아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하루 종일 그 누구하고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은 채 거리를 헤매다 밤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면 녹초가 된다. 손톱만큼밖에 안 되는 우정과 사랑이라도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을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놓을 것이다. - P37

보통은 죽음에 대해 곧 잊어버리지만, 누군가와 기약없이 헤어진다거나 하면 나도 모르게 ‘나는 외톨이로 살다가 이대로 죽겠지‘라는 생각이 들어 견딜 수가 없다. 나는 슬픈 마음으로 비야르를 쳐다보았다. - P46

늘 그렇다. 아무도 나의 애정에 대답해 주지 않는다. 내가 바라는 건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저 몇 명의 친구를 갖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그럼에도 늘 나는 외톨이다. 다들 나를 기대하게 만들고, 그렇게 박절하게 떠나가 버린다. 나는 정말 운도 없다. - P50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잠이 오지 않아, 군대에서의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생각해보기로 했다. 고통스러운 경험을 했던 장소도 기억 속에서는 아름다운 장소로 바뀌었다. 이율배반적인 이야기다. 어렸을 적에 배운 노래는 되도록 부르지 않으려고 한다. 너무 자주 불러대면 추억이 퇴색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군대에서의 일들도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되도록 회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추억은 머릿속에 소중히 간직해 두는걸로 족하다. 내 머릿속에는 추억의 서랍이 있다. 나에게 그런 추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P86

고독, 얼마나 아름답고 또 슬픈 일인가. 스스로 선택한 고독은 더할 나위 없이 숭고하지만, 내 뜻과 상관없는 오랜 세월의 고독은 한없이 서글프다. 강한 사람은 고독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친구가 없으면 외롭다. - P17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책도 최고다. 사랑을 할 줄 아는 인간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다.

우리의 생각은 연기처럼 올라가 하늘을 흐리게 만듭니다. 나는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하늘이 내 손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미 저녁이지만, 당신에게 오늘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전하지 않은 채로 하루를 흘려보내고 싶지 않네요. - P17

나는 페이지마다 하늘의 푸르름이 스며든 책만을 좋아합니다. 죽음의 어두움을 이미 경험한 푸름 말이에요 나의 문장이 미소 짓고 있다면, 바로 이러한 어둠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를 한없이 끌어당기는 우울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왔습니다. 많은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이 미소를 얻었어요. 당신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금화와 갈은 이 하늘의 푸르름을 나는 글을 쓰며 당신에게 돌려드리고 있답니다. 이
장엄한 푸름이 절망의 끌을 알려주며 당신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 P21

"마리아예요." 이 말이야말로 삶에서 생각해야 할 전부다. 자신의 목소리, 자신이 뱉은 말 그리고 강렬한 침묵 속에서 불쑥 나타나는 인간 외에 다른 수수께끼는 없다. - P30

우리는 말을 할 때 바로 그 말속에 머물며, 침묵할 때면 바로 그 침묵 속에 머문다. 하지만 음악을 연주할 때는 그 자리를 정리하고 벗어나, 말과 침묵의 고역에서 해방된 희미한 선율 속으로 멀어져 간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멀어져 가는 한 젊은 남자처럼, 우리도 멀어져 간다. 목적지를 안다면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음악 안에 있다는 건 사랑 안에 있는 것과 같다. 연약한 인생의 오솔길에 들어선 것이다. 우리는 A라는 점에서 B라는 점으로, 한쪽 빛에서 다른 쪽 빛으로 건너간다.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며 그사이 어디쯤에 우리가 있다. 불확실함을 견디고 주저함에 미소지으며, 다른 모든 것은 잊은 채로 우리 안의 희미한 생의 움직임에 주의하면서 말이다. - P54

그래도 인젠가 끝은 찾아온다. - P57

단 한 번의 봄이 일생의 모든 봄이었고, 단 한 순간의 삶이 모든 순간을 살아낸 삶과 같았다. 사랑은 누군가가 강처럼 별처럼, 금은화처럼 당신에게 말을 건네는 순간 시작된다. 그 꽃의 향기는 나를 취하게 하고 어제는 그녀를 취하게 했다. 더는 이 곳에 있지 않고 땅속에 머물다 이제는 이름을 알게 된 천사들 곁에 있는 그녀를. - P68

두 눈은 영원에 둘러싸인 채 나는 신비로운 대기를 삼킨다. 그리고 나는 쓴다. 이것이 대답 없음에 대한 나의 대답이요, 함께 일어나는 선율이며, 시간의 잎사귀에서 들려오는 날갯짓 소리다. 당신이 더는 이 세상에 없기에, 나는 당신에게 미모사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는 없지만 미모사는 당신에 대해 아주 잘 알려준다. 모든 고결한 것은 죽은 자들의 나라를 건너 우리에게 이르는 것이라고. - P70

각 페이지에 쓰인 모든 단어들이 너에 관한 것임을 너와 너를 향한 나의 사랑 사이. 너와 너에게 전할 나의 단어들 사이, 그리고 너와 밤에 잉태된 단어들 사이의 황홀한 우연의 일치에 관한 것임을. 그 단어들은 너를 따라 내 영혼에 들어와 나를 평화롭게 만드는 무질서가 낳은 것이었다. - P76

내가 글을 쓸 때 네가 방해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너만을 위해서 글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너를 알기 전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가 만나기 전 어두웠던 무한한 시간 속에서조차 나 는 너를 위해 글을 썼다. 이 메마른 사막 속에서 난 사랑을 기다리며 글을 썼다. 사랑이 올 수 없는 불가능 속에서 사랑이 오는 것을 기다리며 글을 썼다. 밤보다 더 격렬한 단어로, 밤보다 더 어두운 단어로 글을 썼다. 밤이 지나가길 바라면서, 더 깊은 어두움으로 밤이 흩어 지기를 바라면서. 그러던 내가 지금은 사랑 안에서, 밝 은 빛 안에서 글을 쓴다. 빚을 지나기 위해, 더는 이지러지지 않는 빛에 도달하기 위해, 세월의 더딘 윤회에도 길을 잃지 않는 빛을 얻기 위해 빛보다 더 환한 단어들로 글을 쓴다. - P76

너와 함께 글을 쓴다. 밤과 낮의 단어들, 사랑의 기다림과 사랑의 단어들, 절망과 희망의 단어들. 나는 너와 함께 이 단어들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본다. 우리만이 알고 있는 이 깨달음 속에서 글을 쓴다. - P77

너에게 쓴다. 이 수첩뿐만이 아니라 내가 쓰는 모든 것 안에 네가 있다. 몽펠리에로 보내는 이 글의 처음 부터 끝까지 네가 있다. 단지 상황에 따른 것만은 아닌, 당신에 대해 말한다는 내가 처한 그 불가능성 안에 네가 있다. 네가 내 안에 있는 이 밤에, 단어들에서 비롯 된 밤과 뒤섞인 네가 있는 빛나는 밤에 나는 글을 쓴다. 너에게 쓴다. - P77

너를 불러본다. 이 페이지 위에서 너를 부른다. 이 숲에서, 이 연못 근처에서, 이 길 위에서, 우리의 발걸음이 영원으로 닿던 이 땅 위에서 너를 부른다. - P77

"나는 책에 속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이 말이 이렇게 들린다.
"책이나 세상 그 무엇으로 인해 그녀에게서 단 일 초라도 멀어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들이 끝내 허무의 입에 삼켜지고 대리석처럼 단단한 이에 찢어 발겨지는 것을 바라보는 걸 방해받고 싶지 않아요." - P81

나에게 이상적인 삶이란 책이 있는 삶이며 이상적인 책은 어느 여름날 쥐라‘의 길에서 마주친 사자상 분수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던 차가운 물과도 같다. - P93

아름다움에는 부활의 힘이 있다.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천국에 들어서지 못하는 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오직 그 이유 때문이다. - P129

세상은 성인들로 넘쳐난다. 순교자들 말이다. 나는 저 두 단어를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는 날마다 늘고 있는 그들을 ‘알츠하이머‘라 부른다. 점점 더 늘어나는 그 병이 우리에게 기본으로 축소된 삶을 선물한다. 고단하고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일들, 물건을 사고 타인을 질투하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전부인 현대 생활의 모든 질서에서 우리를 해방한다. 이들에게는 삶이 아닌 삶, 한 번도 삶이었던 적이 없는 삶은 끝이 난 것 이다. 그들의 눈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해 두려울 정도로 열려있다. 그들이야말로 세상을 허물어 뜨리는 형이상학적 질병의 먹잇감이다. 우리는 그들을 살아있는 보물처럼 여겨야 한다. - P133

그들은 떨리는 손으로 천사의 손을 찾는다. 천사가 존재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가끔 그들은 한 때 그들과 가까웠던 죽은 이들에게도 말을 건넨다. 모든 것을 잊은 그들이지만 오래전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들은 잊지 않는다. - P134

사람들은 그들이 우리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알아본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원초적인 것이다. 비록 아버지는 나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었음에도 내가 누군지 여전히 알고 계셨고, 나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직접 경험하고 느끼는 것들은 과학이 우리에게 말하는 모든 것들보다 훨씬 커다랗다.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질문들에 교묘히 돌려 답했다. 내가 누군지 물으면 ‘우리가 잊지 않은 녀석‘이라 하셨고, 어머니에게는 ‘최고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쉽게 기억을 잊는 이 사람들은 중요한 것은 절대 잊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와 다른 점이다. - P134

나는 하늘의 푸르름을 바라본다. 문은 없다. 아니면 오래전부터 문은 이미 열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끔 이 푸르름 안에서 꽃의 웃음과 같은 웃음소리를 듣는다. 곧장 나누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소리를, 그 푸르름을, 당신을 위해 여기 이 책 속에 담는다. - P1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시 최진영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독보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우리 사이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가까웠다면...
어린 나무는 말을 잇지 못하고 맞은편의 나무를 가만히 바라봤다.
좋았을까?
맞은편 나무가 나뭇잎을 마주쳐 바스락 소리를 내며 물었다.
둘 중 하나는 죽었을 거야 - P8

왜 모두 다를까. 다른 삶을 살다가 결국 죽을까. 생명은 어째서 태어날까. 탄생이 없다면 두려워할 죽음도 없을 텐데. - P153

한편으로 정원은 목화가 선물한 라일락 나무를 매일 아침 해가 드는 곳으로 옮기고 비 예보가 있으면 창밖에 내놓는 사람이었다. 목화의 출퇴근길을 걱정하는 사람. 양말과 속웃을 살 때 목화 것까지 사고, 자기는 김밥만 먹으면서도
목화가 끼니를 대충 때우려고 하면 염려하는 사람. 어딘가에 부뒷히거나 베여서 목화의 몸에 상처가 생기면 바로 알아보는 사람. 모두 정원의 사랑이었고 그와 같은 다양함에는 충돌이 없였다. - P184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신에게 구걸할 일이 늘어난다는 것. 목화는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 P187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건 아니라고 - P222

어떤 사랑은 끝난 뒤에야 사랑이 아니었음을 안다.

어떤 사랑은 끝이 없어서 사랑이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떤 사랑은 너무 멀리 있어 끝이 없다.

어떤 사랑은 너무 가까이 있어 시작이 없다. - P233

젊은 시절 자기가 살리던 단 한 명들처럼 자기 또한 누군가의 단 한 명이었을 가능성에 대하여. 그렇게 살아났기에 사람을 살리는 일을 맡았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 P241

인간만이 목적이나 의미를 생각하고 뒷에 걸린다. 굴레에 같힌다. 고통을 느끼고 죄책감에 빠지며 괴로워한다. - P5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책도 정말 좋다. 두번 읽었다. 세번 읽어야 겠다.














이렇게 세상의 첫 막이 내리면 다른 무언가가 시작된다. 대개는 따분한 무언가다. 글을 읽게 되면서부터 우리는 자신에게 무가치한 희생만을 요구하는 것들을 사게 된다. 말하자면 교실에 앉을 자리 하나, 혹은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떠맡는 직책 하나. 그러고 나면 우리는 단념한다. 우리는 꼭 읽어야 하는 것만 의무적으로 읽는다. 거기에 기쁨은 없으며 즐거움조차 누릴 수 없다. 복종이 있을 따름이다. 학업을 마칠 때까지, 사막의 입구에 다다를 때까지 중요한 건 오직 복종이다. 그다음에 우리는 아무것도 읽지 않는다. 신문조차도 우리는 집에 책이 한 권도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된다. 작가들에게는 참으로 수수께끼 같은 사람들이다. 모래 속에 묻힌 집들이랄지, 마귀든 책이든 세상 무엇도 침투할 수 없는 삶들이다. 그들에게도 간혹 사전은 한 권 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약삭빠른 영업사원이 팔고 간 백과사전도 있다. 하지만 읽기 위한 책은 아니다. 아이들을 위해, 미래를 위해, 궂은날을 위해 예비해 둔, 가구나 다름없는 책. 참나무로도 소나무로도 만들어지지 않은 좀 이상한 가구다. 손도 대지 않을, 월부로 구입한 스무 권짜리 작은 종이 가구. - P13

책을 읽지 않는 삶은 우리를 잠시도 놓아주지 않는 삶이다. 신문에 나오는 이야기들처럼 온갖 잡다한 것들의 축적으로 질식할 듯한 삶이다. - P16

사랑은 아무 데도 없다. 전시에 부족한 식량처럼, 죽어가는 사람의 짧은 호흡처럼, 사랑도 모자란다. 놀이에 몰두해 있는 아이에게 시간이 모자라듯 사랑도 그렇게 부족하다. 사랑을 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정말로 많은 시간이 필요해서, 우리 안에 자리한 사랑의 욕구를 채워주기엔 시간은 늘 역부족이다. 우리 안에 자리한 목소리와 피의 요구, 창공 같은 그 목소리에 흐르는 우윳빛 피의 요구를 채워주기에는 말이다. - P35

오랫동안, 오랫동안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사랑의 본성이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 이 사실 이야말로 사랑이 갖춘 위엄이자, 사랑의 놀라운 특성 이다. 소음과 부산함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온갖 발작으로부터도 훌쩍 떨어져,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 사랑은, 그리고 사랑의 가볍고 경쾌한 자각이자 더없이 겸허한 형상이며 각성한 얼굴인 시(詩)는, 심오한 기다림이고 달콤한 기다림이다. 부드럽고도 오묘하게 반짝이는 희망이다. - P36

내가 책을 읽는건, 보기 위해서예요. 삶의 반짝이는 고통을, 현실에서보다 더 잘 보기 위해서예요. 위안을 받자고 책을 읽는 게 아닙니다. 난 위로받을 길 없는 사람이니까.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책을 읽는 것도 아니에요. 이해해야 할 건 하나도 없으니까. 내가 책을 읽는 건 내 삶 속에서 괴로워하는 생명을 보기 위해섭니다. 그저 보려는 겁니다. - P88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의 없다. 가난한 삶만 있으면 된다. 너무 가난해 아무도 원치 않는 삶, 신 혹은 사물들을 피난처로 삼는 삶이다. 그곳에는 무가 차고 넘친다. 왁자지껄한 소음과 수많은 문들로 이루어진, 자체의 풍문들로 길을 잃은 삶과는 반대되는 삶이다. 그런 삶들을 가지고는 제대로 글을 쓸 수 없다. 그런 삶에서는 말할 거리가 하나도 없으니까. 우리는 오로지 부재 속에서만 제대로 볼 수 있고, 결핍 속에서만 제대로 말할 수 있다. 구걸하는 이 여인의 순결한 얼굴을 보려면 노트를 한 장 한 장 넘겨볼 수밖에 없다. 저녁 시간 차곡차곡 쌓이는 그 글들을 바라볼밖에. 어린아이의 잠 속에서 불어나는 엄청난 유산이다. - P91

우리 안엔 아무것도 없다. 아무도 없다. 색깔도 형태도 없는 기다림이 있을 뿐.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이 기다림은 공기와 공기가 섞이듯 우리 안에 존재한다. 그 무엇과도 닮지 않은, 지루함의 절정이라고나 할 수 있는 기다림. 이 기다림이 그곳에 항시 존재 했던 건 아니다. 우리가 항시 무였던 것도, 그 누구도 아닌 사람이었던 것도 아니다. 유년기의 우리는 전부였고, 신은 우리 영역의 미미한 일부에 불과했었 다. 풀밭 속의 풀잎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 P119

유년기가 끝나면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우리 자신이 죽은 이후로 우리는 기다리기 시작했다. - P119

내 고독의 물방앗간에 당신은 새벽처럼 들어와 불길처럼 나아갔다. 당신은 내 영혼 속에 범람하는 강물처럼 들어왔고, 당신의 웃음이 내 영토를 흠뻑 적셨다. 내 안으로 돌아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암흑천지에 큰 태양 하나가 돌고 있었다. 만물이 죽은 땅에 옹달샘 하나가 춤추고 있었다. 그토록 가녀린 여자가 그렇게나 큰 자리를 차지하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 P121

사랑 밖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사랑 안에는 알 수 없는 것들뿐이다. - P121

시간이 흘렀다. 세월이 불타버린 문턱에 재 한 줌 남지 않았다. 우린 태초의 해맑은 나뭇잎들 곁에 그대로 남아있다. 당신은 그 작은 파티 드레스를 한 번도 벗지 않았다는 듯이, 나는 거기서 만물의 순진성을, 이 땅 위에 실현된 어느 성탄의 기적을 끊임없이 예감했 다는 듯이. 사랑은 언제나 우리의 얼굴에서 어둠을 걷어내고 순결한 아이의 얼굴을 되돌려준다.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사랑이 전부라는 듯이. - P122

그런 다음 당신은 떠나버렸다. 배신을 한 건 아니었다. 당신 안에 나 있는, 굴곡이 단순한 같은 길을 따라간 것일 뿐. 당신은 눈처럼 하얀 작은 드레스도 가지고 가버렸다. 이 드레스는 더 이상 내 삶에서 춤추지 않았고 내 꿈속에서 맴돌지도 않았다. 내가 잠을 청하며 눈을 감은 순간 눈꺼풀 밑에서 펄럭였을 뿐. 눈과 세상 사이, 바로 그곳에서. 세월의 바람을 맞으며 열에 들떠 펄럭였다. 비애의 뇌우가 그것을 가슴 위로 내리쳤다. 금 간 유리창 위로 내려지는 덧문처럼. - P122

부재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부재를 경험한 사람은 자신이 무(無)임을 자각한다. 임박한 죽음 앞에서 몸을 떠는 짐승의 막연한 자각이다. - P123

당신이 내 고독의 원인은 아니다. 고독은 당신보다 훨씬 앞서 내 안에서 잠자고 있었다. 당신은, 그것을 깨어나게 한 당신은 그 고독을 가장 닮은 여자일 뿐. - P124

사랑이 끝나는 순간 세 동방박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우수와 침묵과 기쁨. 그들이 푸른 대기 속을 천천히 나아간다. 어둠의 왕관과 황금눈물을 가지고서. 유년기에서 걸어 나온 이들이다. 그들은 영혼 속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천천히. 날마다 조금씩. 우수와 침묵과 기쁨. 언제나 같은 순서다. 침묵이 한복판에, 중심에 있다. 침묵의 희고 작은 드레스. - P1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