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시.은총의 일격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1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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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3026

"책 속엔 삶이 들어 있지 않소. 책 속에 있는 것은 삶이 타고 남은 재, 흔히들 인간적 경험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거요."


퀴어문학이 보여주는 사랑의 극단을 좋아한다. 가끔 육체적으로 너무 세밀하게 묘사(?)하는 작품은 좀 싫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심리에 대해 묘사하는 작품은 정말 좋아한다.


이번에 읽은 알렉시/은총의 일격(두편의 단편이다)은 내 취향과 완벽히 맞는 작품은 아니었다.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됨에도 주인공들은 자신의 속내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10마디 단어중에 1마디 단에에만 속내를 숨겨놓는다. 마치 누군가가 훔쳐볼 것을 걱정하듯이, 마치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아직까지 내가 당신에게 부탁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너무도 힘들 게 써나갈 이 글을 한 줄도 빠뜨리지 말고 읽어달라는 거요. 삶을 사는 것도 힘들지만, 자기 삶을 설명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라오."] P.20



그래서일까? 드러낼 수 없었던 주인공의 생각과 감정을 찾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더 진정성 있게 느껴졌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완벽하게 글로 써내려 갈 수 있을까? 머릿속에 있는 생각중 과연 몇 퍼센트가 글이라는 형태로 표출될까?


우리의 생각이 글로 표출될 때 그 생각은 정제되어 나올 수 밖에 없다. 때론 과장되고, 때론 생략되어지면서 말이다.



<알렉시>는 주인공인 알렉시가 부인을 떠나면서 그녀에게 남긴 편지로 된 글이다. 그는 그녀를 떠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그녀에 대한 애정이 없었음을, 그동안 그가 품었던 어려움을 편지글로 전달한다.

[난 늘 죽는 것이 쉬우리라 생각했소. 내가 죽음을 생각하는 방식은 사랑을 상상하는 방식과 크게 다 르지 않았다오. 힘이 다 빠진 상태, 아마도 달콤할 패배이리라 생각했지. 그날 이후 사는 내내 그 두 가지 강박적 생각이 번갈아 나타났소 하나에 시달리면 다른 하나가 나타나서 낫게 해주면서 말이오. 하지만 그 어떤 추론도 두 가지 병에서 다 낫게 해주진 못했다오.] P.44



하지만 왜 그가 그녀를 떠나려는지에 대한 진짜 원인에 대해서는 쓰질 않는다. 다만 그의 성적 취향이 동성애임을 암시하는 몇마디 단어가 아주 잠깐 등장한다.

[난 조언을 구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소, 금지된 성향의 첫번째 결과는 우리가 우리 자신 속에 갇히게 된다는 거요. 침묵하든지 아니면 공모자들에게만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오. 나 자신을 이겨내려고 애쓰 는 동안 고통스러웠던 건, 나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도 연민을 품어주는 사람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 진정한 선의가 누릴 자격이 있는 아주 약간의 존중이라도 베풀어줄 사람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소.] P.55



그런데 알렉시는 동성애자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아내를 떠나려는게 맞는걸까? 자신을 찾기 위해(동성애) 소중했던 것(아내)을 버리는 행위에 대해 나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그대여, 우리는 삶이 우리를 변화시킨다고 믿지만, 그렇지 않다. 삶은 우리를 마멸시키고, 우리 안에서 마멸되는 것은 우리가 배워서 알게 된 것들이 오 난 전혀 변하지 않았소. 단지 나와 나 자신의 타고난 기질 사이에 사건들이 끼어들었을 뿐이오. 나는 이전의 나 그대로였고, 어쩌면, 환상과 믿음이 하나둘 스러져갈 때마다 우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더 잘 알게 되니, 이전보다 더 깊숙하게 나 그대로였소. 수없이 노력하고 수없이 성의를 쏟았지만 결국 이전과 똑같은 나..] P.107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이 의문은 떠나지 않았다.





<은총의 읽격>은 조금 더 재미있고 쉽게 읽을 수 있는 단편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내전을 치루고 있는 발트해 연안을 배경으로, 에릭이라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된 책인데, 주요 등장인물은 딱 세명이다. 에릭(남), 소피(여), 콘라드(남) 인데...


소피와 콘라드는 남매지간이다. 그리고 소피는 주인공 에릭을 좋아한다. 그런데 에릭은 콘라드를 좋아한다. 소피는 이 사실을 모른다. 에릭은 자신에게 계속 다가오는 소피를 받아주지 않는다. 소피는 왜? 하며 괴로워한다. 미친 삼각관계의 끝은 과연 어떻게 될까?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게임을 이끌어간 것은 그녀였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걸었기 때문에 더욱 치열했다. 게다가 주의를 쏟아야 할 다른 일이 많아 신경이 분산된 나와 달리, 그녀는 오로지 나에게 집중했다. 나에겐 콘라드도 있었고, 전쟁도 있었으며, 그 이후로 버렸지만 그때까지는 어느 정도 야심도 있었다. 그녀에게는 이내, 마치 주변 사람 모두가 비극의 단역이 되어버린 것처럼, 오직 나만 혼자 존재했다.] P.145



이 작품에서도 에릭의 동성애적인 말이나 행동은 드러나지 않는다. 읽다보면 에릭이랑 콘라드 사이에 뭐가 있긴 한건가? 라는 의문도 생긴다. 그러면서 아! 1인칭 주인공 시점이어서 그렇구나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어디까지 솔직할 수 있는걸까?

["무서워하지 않는 건 나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하지만 행복하기만 하다면." 그녀는 첼로의 저음처럼 늘 나를 감동시키는 투박하면서 부드러운 원래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단 오분이라도 행복하다면 그건 신이 내려준 신호일 거예요 당신은 행복한가요? 에릭?"] P.174



그리고 결국 진실을 알게 된 소피는 두 사람을 떠난다. 그녀가 느꼈을 배신감은 어느정도 였을까?



해설을 읽어보니 이런 작품을 <말하려는 것을 남겨두고 그 주변의 것들을 기술함으로써 대상을 드러나게 하는 기법인 '음각적 글쓰기'> 라 한다고 한다. 어쩐지 문장들이 상당히 입체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남겨 둠으로써 오히려 핵심을 부각하는 글쓰기, 이게 정말 사람의 마음이랑 비슷한게 아닌가 싶다. 드러나는 고통보다도 숨겨져 있는 고통이 더 고통스러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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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05-17 21: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엇갈린 작대기만 봐도 혼란하다 혼란해 ㅎㅎ전자책 한참 전에 사놨는데 읽어보긴 해야겠네요. ㅎㅎㅎ

새파랑 2023-05-18 06:07   좋아요 3 | URL
엇갈린 작대기 맞습니다 ㅋ 제가 편견을 안기지려고 노력을 많이 하지만 나한테 저런(?) 상황이 발생하면 충격이 클거 같아요 ㅎㅎ

희선 2023-05-18 0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 소설로도 높이 평가 받는다는 말이 있네요 그때는 이런 거 말하기 어려웠겠습니다 없지는 않았지만, 많은 나라에서 동성애를 금지하기도 했군요 그런 걸 금지하는 법이 있었다니... 지금 생각하니 왜 그런 법을 만들었나 싶기도 하네요 그때 사람은 많이 힘들었겠습니다 지금도 차별이 아주 없지 않지만...


희선

새파랑 2023-05-18 06:09   좋아요 0 | URL
그때보다는 그래도 지금이 많이 좋아지고 표현하기도 더 자유로운거 같아요. 아 전쟁소설로도 높이 평가받는다니 몰랐습니다~!!

독서괭 2023-05-18 04: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음각적 글쓰기라니 흥미롭네요. 나 자신에 대해 얼마나 솔직하게 쓸 수 있는가.. 특히 퀴어의 경우는 더 힘들겠어요.

새파랑 2023-05-18 06:10   좋아요 2 | URL
예전에 퀴어문학하면 독서괭님이 선구자 아니셨나요? ^^ 음각적 글쓰기 라고 하던데 읽다보면 뭔가 빙빙 돌려 말하는게 느껴집니다 ㅋ

페넬로페 2023-05-18 07: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용해주신 문장들이 이 책을 읽고싶게 만드네요~~
‘책 속에 있는 것은 삶이 타고 남은 재‘라는 문장이 좋아요^^
알렉시가 아내에게 무슨 말을 남겼을지도 궁금하고요
이제부터 책 좀 열심히 읽어야겠어요^^

새파랑 2023-05-18 09:32   좋아요 2 | URL
여행은 잘 복귀하셨나요? ^^ 페넬로페님 이제부터 열독서 모드시겠군요 ㅋ 이 책 추천합니다~!!

coolcat329 2023-05-18 1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있는데 발췌글 읽어보니 참 모호하네요. ‘음각적 글쓰기‘ 또 하나 알았습니다. 책 속엔 삶이 타고 남은 재가 들어있다는 말이 멋지네요

새파랑 2023-05-18 11:27   좋아요 1 | URL
ㅋ 저도 이번에 처음 들어봤습니다 ㅋ 역시 없는게 없는 쿨캣님의 서재군요~!!

그레이스 2023-05-18 22: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퀴어 문학이었군요
자주 올라오길래 궁금하긴 했는데...^^

새파랑 2023-05-19 13:17   좋아요 2 | URL
표지부터 약간 퀴어문학 느낌이 있습니다 ~! 상당히 괜찮았습니다~!!
 

읽고 싶은 책은 많은데 시간이 부족하고, 리뷰도 잘 않쓰다 보니 리뷰를 쓸 자신이 없어서 최근에 읽은 책을 몰아서 리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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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302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되찾은시간 2) 13권 : 프루스트

정말 어렵게 어렵게 완독했다. 큰 이야기 흐름이 없어서인지 읽기 힘들었다. 그리고 잃시찾의 결말이 이거야? 하는 의문도 느꼈다. 원래 위대한 작품(?)은 마지막에 큰 한방(교훈, 반전, 감동, 여운 이런거?)이 있어야 한다는 선입견이 있어서 인지 아쉬움이 남았다. 당연히 내가 이 작품의 진가를 잘 몰라서 이렇게 느꼈겠지만...

일단 잃시찾 시리즈 완독에 의미를 두고 싶다. 몇년이 지난 후에 다시 읽으면 좀 이해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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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3023 언어의 무게 : 파스칼 메르시어

<언어의 무게>의 주인공인 레이랜드는 어린시절 삼촌집에 있는 지중해 지도를 보면서 지중해에 접해 있는 모든 나라의 언어를 배우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리고 이 다짐은 그를 번역가라는 직업을 갖게 한다.

[이제 그는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불을 붙이고, 마른 담뱃잎 연기 를 현기증이 날때까지 폐 깊숙이 들이마셨다. 눈을 감았다. 이제까지 중요한 것은 언어였다. 모든 것은 이름이 불리고 이야기된 후에야 실제로 존재했다. 레이랜드가 찾아 나선게 아니라 그게 그에게 와서 부딪쳤다. 처음부터 그랬다. 언어없이 사물에 도달 하기를, 사물과 사람과 감정과 꿈에 닿기를 원할 때도 자주 있었지만 언제나 그 사이에 언어가 다시 끼어들었다. 언어로 이해해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할때면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곤 했다. 리비아와의 경우에만 언어가 필요하지 않았다.]  P.21



번역가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성공한 레이랜드에게 시련이 온다. 뇌종양에 의한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이제 그의 삶은 1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는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하고 (끝이 보이는) 두번째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건 그래도 행복한 경우야, 불안으로 독살된 잃어버린 시간 뒤에는 기다린 보람이 있는 시간이 오니까. 나는 이제 그런 시간이 없어. 내가 두려워하는 그 시점에 도착하면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고, 그 자리가 나에게는 모든 시간의 종말이 될 거야. 지금 뭘 해야할지 모르겠어. 이 종말이 최대한 빨리 오기를 모든 불안을 삼킬 순간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야 하나? 아니면 끝까지 싸워서 불안으로부터 남은 시간을 얻어내고 눈에 보이는 최후의 날들에 적합한 필사적인 현재를 쟁취 해야 할까? ]  P.108



하지만 11개월이 지난 후에야 레이랜드의 뇌종양 판정은 차트가 바뀜에 따른 오진이였음이 밝혀진다. 그가 평소에 느꼈던 두통은 단순 두통이었다.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오진, 레이랜드는 안도와 분노를 함께 느낀다. 그리고 이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세번째 삶을 시작한다.

[˝그럴 마음도 없습니다. 불현듯 다시 미래가 생겼어요.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어쨌든 달라질 테지요. 당신의 미래가 달라지리라는 거야 말할 나위도 없고 말입니다.˝]  P.230



한번의 인생에서 세번의 삶을 시작한 레이랜드는 더이성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그는 과거의 인연들에게 더욱 헌신한다. 그리고 번역가 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번역가 역시 제3의 언어를 자신의 언어로 바꾸는 창작의 영역이지만, 이제부터는 나의 언어로 나만의 이야기를 펼치려고 한다. 그 이야기의 끝은 어떨까?

[하지만 이제 몇 주, 어쩌면 며칠만 지나면 다 ‘지나간다‘는 삶이 ‘끝‘이라는 느낌에 담긴 외로움은 누구도 덜어주지 못했지.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격렬하고 필사적이며 혼란한 소원이 있었다. 누군가 와서 나를 이 외 로움에서 건져주기를, 나를 받아들이고 자기 안에 품어서 흘러가는 마지막 시간을 나홀로 겪지 않아도 되게 해주기를 바랐지. 누 군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 달라야 했지. 누군가 이 마지막 길을 ‘덜어주길 바랐어. 말하자면 내 안에 파고들어와, 나 홀로 무방비상태로 종말에 대면하지 않게 마법처럼 도와주기를.]  P.318



제목만큼이나 무게가 느껴졌던 작품. 책의 무게(두께)도 장난아닌 작품이다. 책을 읽는 내내 착함, 정직함, 바름 이런 단어들이 떠올랐다. 정말로 주위에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들만 있다면 언젠가는 세상도 그렇게 바뀔까?

[질병이 삶이 언제 끝나는지 결정하는 것을 왜 우리가 견디며 받아들여야 할까? 그걸 스스로 결정하는 게 누구나 누릴 당연한 권리라고 왜 생각하지 않을까? 누군가 ‘이제 그냥 충분하니까‘라고 말하는 게 왜 훌륭하고 정당한 사유로 간주되지 않을까?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직접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당신이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우리가 함께 듣던 음악을 이곳으로 가지고 왔어. 오늘 저녁에 들으면서 내 생각은 당신에게 가 있겠지. 내가 파리로 돌아 가자마자 가장 먼저 찾아가는 사람도 당신이 될 테고.]  P.619



가끔 힘든 일이 닥칠때면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했다. 하지만 언제나 생각에서 끝날 뿐이었는데, <언어의 무게>를 읽고나서 꼭 어떤 중요한 계기가 있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건 다짐이 아니라 행동이니까, 그리고 그 행동의 시작이 바로 또다른 삶의 시작이니까.

[˝인생은 아름답다. 삶이란 언제나, 매순간 시작되 니까.˝]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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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3024 이중 작가 초롱 : 이미상

한국문학을 그렇게 즐겨 읽지 않는다. 한국문학이 이해하기도 쉽고 번역의 어색함도 없어서 가독성이 좋긴 하지만, 뭔가 작가가 몸을 사린다는(?) 느낌과 감동(교훈)을 강요(?)한다는 느낌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나의 선입견이긴 하지만... (내가 한국문학을 다 읽어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아닌 작가와 작품도 당연히 있을것이다...)


이러한 원인은 아마 작가와 작품을 동일시하는 인식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국문학을 읽으면 과감성이 아쉬울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미상 작가의 단편집인 <이중 작가 초롱>은 그렇지 않았다. 문장들이 너무 솔직해서 좀 놀랐다.


이 작품집은 초롱이라는 인물이 주인공이든 스쳐지나가는 인물이든 어쨋든 등장하는 연작소설이다. 총 여덟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 작품집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은 표제작인 <이중 작가 초롱>이었다.


등단 이전에 쓴 작품과 등단 이후에 쓴 작품의 괴리감으로 인해 독자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는 작가 초롱은 말 그대로 이중작가 취급을 받는다. 작품과 작가를 땔래야 땔 수없는 현실에 대해 작가는 이야기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건 단지 작품일 뿐이라고, 독자의 생각과 다르다고 틀린건 아니라고.

[‘악하다‘ 도 그런 말 중 하나였다. ‘되짚다‘보다 ‘복기‘가 ‘잘못 읽다‘보다 ‘독‘이 더 그럴듯하게 느껴지듯, ‘생각이 짧다‘ 정도면 족했을 텐데도 사람들은 기어이 초롱의 소설에 대해 악하다는 표현까지 썼고 거기에는 ‘아‘ 해도 될 것을 ‘악!‘ 하고야 마는 문학의 낯간지러운 과장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부당한 환기가 맴돌이치고 있었다. 초롱도 그 점을 잘 알았지만 그렇다고 상처를 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P.75



이 외에도 부조리를 타파하고자 했던 운동권 세대가 자식들에게는 오히려 기득권과 똑같은 모습으로 어떻게든 좋은 대학, 스팩을 쌓으려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하긴> 도 좋았고, 다른 작품들도 전반적으로 획기적인 느낌이었다.

[한밤, 나는 초롱의 글을 읽으며 상상한다. 나를 육박하듯 빠르고 거칠게 공격해오는 내 딸 초롱이 코너에 몰린 나는 기분좋게 당혹 한다. 내가 키운 거한테 내가 먹힌다니. 나는 카이스트에 갈 석형의 딸은 하나도 아쉽지 않다. 초롱이 나의 이상이다. 그런 애들이 있다. 새벽까지 술 먹다 동기 한 놈 집에 쳐들어가 만나게 되는 애들, 아빠 친구한테 인사해야지, 가 채 끝나기도 전에 방문을 쾅 닫으며 인사도 없이 들어가는 애들 아비와 아비의 친구와 아비의 세대를 쌩까며 쾅 하고 후두부를 가격하는 문소리를 내곤 ‘쿨‘하게 사라지는 애들 쾅쾅. 뺨을 갈기듯 문은 내 앞에서 쾅쾅 닫히고 나는 가만히 부러워진다. 멋지지 않은가? 우리가 우리 부모에게 가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것을 우리에게 가하는 새끼를 길러낸 다는 것이.]  P.21



그러나 작품속 문장들에 너무 많은 암시가 들어있어서 한두번 읽고는 이해할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다. 수수께끼를 푸는 느낌으로 책을 읽었다. 이러한 경향은 후반부 작품으로 갈 수록 심해지던데, 작품의 끝에 실린 해설을 읽고나서 아이쿠 내가 또 잘못읽었네 하는 생각도 했다.


절대 쉬운 작품은 아니었고 잘 읽히는 작품도 아니었지만 이미상 작가가 대단한 작가인것 만은 확실히 느꼈다. 최근에 읽은 한국문학 작품중에 가장 인상적인 책이었다. 혹시 이 책을 읽게 된다면 해설은 꼭 마지막에 읽어보기를 당부드리고 싶다.

[당신도 말의 시간차공격을 당하는가? 나는 요새 자주 말의 시간 차공격을 당한다. 오래전에 들은 별것 아닌 말이 멀쩡히 몸을 돌아 다니다 갑자기 내장을 찢는다. 그러면 나는 시간차 공격을 당한 배구 선수처럼 속수무책이다. 상대편 공격수가 뛰어서 나도 뛰었는데, 어느새 공격수는 사라지고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다음 공격수가 스파이크를 때려넣는 것 같다. 말의 강타, 나는 그저 당할 뿐이다. 도끼날 아래 장작처럼. 게다가 배구와 달리 말의 이차 공격은 수년, 심지어 수십 년 후에 비로소 시작되기도 한다.]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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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3025 블랙 쇼맨과 환상의 여자 : 하가시노 게이고

예전만큼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즐겨 읽지는 않지만 가끔 읽는다. 뭔가 시원한 글이 읽고 싶어질때면 생각이 나는데, 친구가 이 책을 샀길래 빌려서 읽었다. 블랙 쇼맨 시리즈는 처음 읽어봤는데, 이 작품은 살인사건 장편 추리소설은 아니고 다소 평범(?)한 사건을 추리하는 3편의 단편이 실려있는 작품이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답게 가독성이 좋고 재미있어서 읽기 시작하자마자 세시간만에 다 읽었다. 내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특히 체호프 이야기가 나와서 좋았다.

[˝저는 <벚꽃 동산>을 좋아하는데, <바냐 아저씨>도 인기가 있어요. <갈매기>나 <세 자매>도 좋고요, 출판사에 따라 수록된 작품도 달라요.˝]  P.95



개인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중 <백야>, <환야>, <편지>가 좋았었다.






이렇게 해서 그동안 밀려있던 작품들의 리뷰를 간단하게 써봤다. 뭐든지 밀리는건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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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3-05-07 18: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의 해석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돌아오세요 ㅋㅋ

새파랑 2023-05-07 18:26   좋아요 1 | URL
가끔 리뷰를 쓸때마다 내가 제대로 읽은게 맞나? 라는 자책(?)을 합니다 ㅋ

물감 2023-05-07 21: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등장한 새파랑님 페이퍼 좋아요 ㅎㅎㅎ 말씀하신 과감성의 이유로 저 역시 한국문학에 아쉬움이 많아요. 장르소설이 아닌 이상 저자의 철학과 사상이 들어가니 ‘방방봐‘에는 어폐가 있고요. 그래도 한국문학 좋아합니다! 제 알라딘 독서 통계를 보니까 한국문학만 별점 평균 4개고 나머지들은 3개로 나와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새파랑 2023-05-08 06:45   좋아요 3 | URL
역시 물감님은 한국문학 전문이십니다~!! 물감님 별다섯은 정말 희귀한거 같아요. 전 거의다 별 다섯이라는 ㅎㅎ 저도 이제부터는 한국문학에 관심을 많이 가지겠습니다~!!

레삭매냐 2023-05-07 22: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 읽고 나서 바로 리뷰를 쓰지
않으면 나중에도 다시 쓰게 되
기가 힘들더라구요...

간단 리뷰 인상적입니다.

새파랑 2023-05-08 07:46   좋아요 1 | URL
요새 좀 게을러져서 리뷰쓰기가 좀 귀찮더라구요 ㅡㅡ
그래도 책의 완독은 리뷰쓰기라 생각해서 몇자 적었습니다 ㅎㅎ

희선 2023-05-08 02: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다 읽으신 거 축하합니다 한번 다 읽은 것도 대단합니다 언젠가 또 만나시겠네요 새로 시작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걸 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하는 게 좋을 것 같기는 한데... 사람은 꼭 뭔가 일이 일어나야 지금까지 잘못 살았어 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새파랑 님 오월에도 즐겁게 책 만나시기 바랍니다


희선

새파랑 2023-05-08 07:48   좋아요 2 | URL
5월에는 호기롭게 책을 읽겠다고 다짐했는데 잘안되네요 ㅜㅜ
희선님도 즐겁게 책 많이 만나시길 바라겠습니다~!!

coolcat329 2023-05-08 07: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잃시찾 완독 정말 대단하시고 축하드립니다. 새로운 한 주 화이팅하세요!

새파랑 2023-05-08 07:49   좋아요 1 | URL
완독했지만 완독한거 같지 않은 기분입니다 ㅋ 쿨캣님도 이번주 화이팅 입니다~!!

거리의화가 2023-05-08 09: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 몰아쓰기 진짜 힘들죠ㅋㅋㅋ 정리하느라 고생하셨어요. 책을 읽고 나서 딱히 떠오르는 게 없거나 내가 읽은 의도를 책에서 못 찾았을 때나 너무 좋은데 정리가 안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리뷰쓰기 곤란합니다^^; 무엇보다 잃시찾 완독은 엄지척이에요!

새파랑 2023-05-08 12:43   좋아요 2 | URL
사실 정리한건 없고 그냥 생각난대로 막 써서 좀 그렇습니다 ㅡㅡ 화가님의 잃시찾 완독 리뷰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건수하 2023-05-08 14: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잃시 완독 축하드려요!
오랫만에 새파랑님 리뷰 보니 좋습니다 :)

새파랑 2023-05-09 07:45   좋아요 2 | URL
리뷰 자주 쓰고 싶은데 읽은책이 별로 없네요 ㅜㅜ 허접하지만 책 읽고 리뷰 열심히 쓰겠습니다~!!

파이버 2023-05-10 16: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밀린 리뷰가 많습니다... 저도 새파랑님도 얼른 여유 있는 시간이 찾아왔음 하네요ㅎㅎ 저도 히가시노 게이고 <백야행>, <편지> 좋아합니다 ^^~

새파랑 2023-05-10 17:00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ㅜㅜ 왜 이리 시간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ㅜㅜ
백야행이랑 편지 좋으셨군요~! 저도 아주 좋았었습니다 ^^
 
나주에 대하여
김화진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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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3020

"저는 아무도 상처주지 않아도 알아서 상처를 받는 능력이 있어요. 그리고 그 상처를 무시하거나 덮어놓지 않고 내내 뚫어져라 바라보는 습관도 있고요. 아주 최악이죠."



내가 남자여서 그런지 여성에 대한 심리, 마음을 다룬 작품을 읽다보면 여성은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하면서 놀라기도 하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아! 나랑 생각이 비슷한 측면이 있네 하면서 공감하기도 한다.



이런 느낌을 받은 작품이 표제작 <나주에 대하여>와 <꿈과 요리> 였다.




<나주에 대하여>에는 '김단'이라는 여주인공과, 그녀의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인 '나주'라는 여성이 주인공의 회사에 들어오게 되고, 같은 사무실을 쓰면서 느끼게 되는 주인공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주인공은 '나주'를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주인공은 SNS를 통해 그녀를 염탐하고 있었다. 왜 그녀는 '나주'에 대해 그렇게 집착할까? 하지만 주인공은 '나주'에게 자신의 집착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떠보기만 한다. 왠지 약간 무섭기까지 하다.


이유는 있었다. 주인공의 남자친구는 11개월전 사고로 사망해서 더 이상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SNS를 염탐하면서 예전의 여자친구에게서 남자친구의 흔적을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보다 더 남자친구에게 어울렸을 거라고 생각되어지는 '나주'. '나주'는 전 남자친구의 죽음을 알고 있을까?


그런데 '나주'에 대한 주인공의 감정은 질투보다는 친해지고 싶음에 가까웠다. 어쩌면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였을지도 모른다.


남자친구는 나를 만나기 이전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떤 사람을 만나고 있었을까? 과거를 더 좋아했던건 아닐까? 사람에 대한 궁금증은 헤어진 후에도 이별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꿈과 요리> 는 대학 동창인 '수언'과 '솔지'의 속마음을 옂볼수 있는 작품이었다. 함께 어울리는 것보다는 혼자있는 것을 좋아하는 '수언', 그리고 함께 어울리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주도하는 '솔지', 대학생때 두 사람은 서로 친하지 않았다. 아니 싫어했다고 하는게 더 맞는 표현일거다.

[수언은 늘 솔지의 목소리가 복잡하다고 느꼈다. 고민을 털어놓 고 이런저런 의견이나 감상을 말할 때의 목소리에 레이어가 있다고, 곁이 있었다. 수언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솔지를 풍부해 보이 도록 하는 매력적인 곁이 아니라 쓸데없는 겁이었다. 굳이 분류하 자면 스스로 처세를 잘한다고 믿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를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의식하는 (그렇 지만 자신은 매우 자연스럽다고 믿는) 자의식이 도드라지는 사람의 겹이었다.] P.95



'수언'은 '솔지'의 행동을 의미없는 것이라고 무시했었고, '솔지'는 혼자서만 고고한척 하는 '수언'이 눈에 가시였었다. 하지만 몇년 후 '수언'은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사에 취직했고, '솔지'는 어학연수를 다녀오는데 우연히 한 카페에서 마주친다. 외로워서 그랬던걸까?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수언은 자신이 사랑하는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영화평론가라는 걸 알게 된 이후부터 그 직업이 갖고 싶었다. 다만 핑계 대지 말자고 생각했다. 수언은 자신이 특 별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되고 싶다고 해서 반드시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그런 일은 아무에게도 없으며 자신 역시 똑같다고. 잘하면 되겠지만 잘해도 안될수도 있는 거라고. 될 때까지 하겠지만 결국 안 되었을때 누구의 탓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누군가는 그렇게까지 비장한 게 우습다고 할지 몰라도 그래야 했다. 자신을 싫어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한 것까지만 후회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 이후는 생각하지 말자. 미래는 잘 모르니까 안되어도 누구를 탓하며, 그걸 가지고 핑계를 대거나 알리바이를 궁리하며 꿈을 포기했네 어쩌네 하고 연극적으로 과장되게 굴기는 싫었다.] P.97



직접적으로 드러낸 적은 없었지만 그렇게 서로에 대해 서운한 감정이 아직 남아있는데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두 사람은 과거에 대해, 서운했던 감정은 이야기 하지 않는다, 마음속에서만 되풀이할 뿐이다. 그럼에도 친하게 지낸다. 마치 마음속에 시한폭탄이 있는것처럼, 두 사람은 마음을 감추지만 갈등의 위험은 점점 커져만 간다. 그러다 펑 터지는데...


어쩌면 두 사람이 서로에게 서운했었던 이유가 서로에 대한 호감, 끌림 때문은 아니었을까? 다가오지 않았던 서로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간직한 그들의 우정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감춰둔 마음을 상대방이 알기는 쉽지 않다.



김화진 작가님(원래 직업은 편집장이라고 하던데...)의 마음을 다룬 여덟편의 단편들 모두 좋았다. 개인적으는 퀴어(레즈비언) 분야 이야기를 선호하지 않는데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흥미로웠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떤 마음인지는 알 수 있었다. 역시 편집도 잘하는 분이 글도 잘쓰나 보다.




- 공감했던 문장들 -

[나는 생애 전반에 걸쳐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원망했다. 내가 가지지 못한 성향을 가진, 내향 인간들을 항상 좋아하면서도 서운했다. 나는 매번 제안하는 쪽이었기 때문에, 사람을 천천히 알아가고 조심스럽게 가까워지고 싶다는 사람들의 팔을 붙들고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흔드는 쪽은 백이면 백 나였다. 그런 나도 좀 병적인가. 어느 모임에서나 그런 유의 사람들을 좋아해. 서촌으로 커피 마시러 갈래요? 광화문으로 생선구이 먹으러 갈래요? 하고 물으면 그들은 언제나 사려 깊은 표정으로 아, 네, 좋아요. 언제든 단이씨 편하신 시간에…… 라고 대답해왔다. 거절이 아닌 것만으로 마음이 놓였지만 한편으로는 늘 속이 꼬였다. 너희들은 좋겠다. 우아하게 컨펌할 수 있어서 좋겠어. 누군가가 물어보면 음 하고 고민하고 마침내 네. 라고 대답할 수 있어서 좋겠다. 나도 그런 역할 좀 맡아보고 싶네.] P .63(나주에 대하여)



[나는 머쓱하다는 표정을 지어내며 너의 말을 듣는다. 기분은 좋 았지만 한편으론 무슨 소린가 싶기도 하다. 나도 너처럼 우아하게 가만히 있어도 괜찮고 싶거든. 괜히 아무도 부추기지 않았는데 혼자 침묵에 불안해져 까불지 않고, 나도 누가 웃겨주면 웃고만 있고 싶다고. ] P.65(나주에 대하여)



[예은씨, 혹시 많이 힘든가요. 그 말을 하려다가 하지 못했다. 사실을 되물어봤자 사실일 뿐이라는 생각에 손가락이 자꾸만 멈췄다. 힘들면 그만두라는 말도 말뿐이고, 넌 잘할 거야 원래 잘 견뎠잖아 하는 말은 욕보다 나쁘고, 퇴직한 이 후 말을 고르는 일에 신경을 덜 쓸 수 있어서 좋았는데 아주 오랜 만에 그런 자신이 싫었다. 예은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을 아무리 골라봐도 마땅한 것이 없었다. 텅 빈 것 같았다. 오늘 많이 바빠요? 일 아직 안 끝났어요? 끝없는 물음표를 찍고 싶었지만 곧 모조리 지워버렸다. 은영은 속에 담긴 말을 고르다가 결국 가장 건져올리기 싫었던 문장에 머무르게 되었다. 바쁜 게 아닐지도 몰라. 힘든 게 아니라 힘들어도 이제 나랑 얘기할 필요가 없는 거겠지.] P.141(근육의 모양)



[저 준비하던 거 그만뒀어요. 못하겠어요. 사실 진작 못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그만뒀어요. 잘 모르겠어요. 이젠 아무것도 못 하겠어요. 계획하고 준비하는 거. 미래가 좋을 거야 하고 나한테 내가 최면거는 거.] P.166(척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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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3-04-17 15: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화진 작가님 민음사 편집부에 계신 분으로 알고 있어요 몇 년 전에 강연도 들었었는데 소설을 내셨네요 ㅎㅎㅎ
‘나주에 대하여‘라는 소설이 이런 내용이었군요. 주인공이 ‘나주‘에 대해 집착? 관심을 가지는 것은 남자친구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 예전 직장에서 A라는 남자의 현 여친, 전여친 모두 같이 일했던 적이 있었는데, 둘은 아예 말 안하더라구요 .... ^^;;;;;;

새파랑 2023-04-17 16:37   좋아요 2 | URL
강연도 하시는 유명한 분이시군요~! 저도 민음사 책은 많이 읽었는데 몰랐었습니다 ㅎㅎ

전 표지랑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읽었는데 좋더라구요~!!

현실에서 전여친 현여친은 사이가 좋을수는 없겠조? ㅋㅋ

독서괭 2023-04-18 14: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새파랑님 서재에서 보기 드문 한국문학! ㅎㅎ 여성들 이야기군요. 나주에 대하여, 이 단편 재밌을 것 같습니다. <러브레터> 영화가 떠오르네요. 오겡끼데스까..

새파랑 2023-04-18 16:44   좋아요 2 | URL
러브레터 정도의 감동(?) 까지는 아닙니다만 ㅋ 뭔가 요즘 시대의 감성을 느꼈습니다 ^^ 제가 한국문학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가끔 땡기는 제목이랑 표지가 있습니다 ^^
 
여자의 빛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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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3017

"사랑했던 유일한 여자를 잃었다는 이유로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해보게. 그건 사랑이 없는 거라네."



조종사이자 주인공인 남자 "미셸"은 아내인 "야니크"를 홀로 집에 두고 6개월간 휴가를 떠나기 위해 공항에 가지만 비행기를 타지 않고 다시 집근처로 돌아온다.(하지만 집으로 가지는 않는다.) 부부싸움이라도 한걸까?

[나는 예감 같은 건 믿지 않지만, 무신론에 대한 믿음 또한 오래전에 잃어버렸다. “난 더 이상 그런 걸 믿지 않아"라는 언급 은 여전히 사실이지만, 한편 그 이상 기만적인 것도 없다.] P.7



"미셸"은 택시 문을 열고 내리다가 한 여자와 부딪친다. 그녀의 이름은 "리디아". 마침 달러만 있고 프랑스돈이 없던 "미셸"에게 "리디아"는 돈(택시비)을 빌려준다. 그리고 함께 한 카페에 간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이야기를 한다. 목적은 달랐다. "미셸"은 그녀에게 접근하지만, "리디아"는 단지 수표를 기다리는 것 뿐이라고 한다.

["사람은 늘 과장하는 법이지. 이제 끝장이라고 스스로에게 말 하기를 즐기지. 인도 피리의 짓눌린 곡조를 듣고 혼자 살아가는 거요. 할 수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하기 위해서 말이오. 하지 만 낯선 이를 바라보는 눈길에는 아직 포기하지 않은 희망이 담 겨 있소.] P.22



그러던 와중에 "리디아"는 6개월전에 자동차사고로 남편과 어린 딸을 잃었다고 말한다. 집에 가지 않는 남자 "미셸"과 가족을 잃은 아픔이 남아있는 "리디아"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런데 "미셸"은 왜 집에가지 않는걸까? 그리고 "리디아"의 말은 진심인걸까? 어딘가 아픔이 있어 보이는 그들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들의 하룻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하고, 이후 나름 반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꼭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 그래! 그들은 어떻게 될까? 그들은 뭘 바라고 살까? 정말 부당한 일이야. 만약 내가 당신을 만나지 못했다면, 난 만나지 못한 당신을 증오하면서 삶을 탕진했을 거야.'] P.40




<여자의 빛> 이 책 정말 좋았다. 초반에 밑줄 치면서 읽다가 밑줄 긋는걸 포기할 정도로 재미있었다. 로맹 가리 특유의 유머와 심각한 상황에서도 진지함을 놔버리는 문장, 시종일관 취한것 처럼(실제로도 취한) 보이는 "미셸"의 모습까지 다 좋았다. "미셸"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누가 정상일 수 있을까?

[희미한 어둠 속에서 나는 보았다. 하나의 형체가 손을 들어 올 려 내 입술을 어루만지는 것을. 내 숨결 속에 나도 모르는 어떤힘이 있어, 어떤 불굴의 나약함이 있어 내 중얼거림이 그녀에게 전달되기라도 한 것처럼.] P.142



로맹 가리의 말년(1977년)에 쓰여진 이 책은 로맹가리가 전 부인인 진 세버그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로맹 가리가 생각하는 사랑, 그것은 이별하고 떠나더라도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삶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사랑은 계속되어야 한다.

[불안감 때문에 나를 드러낼 그 어떤 시도도 할 수 없었다.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다. 삶을 계속하기 위해서 는 사태를 직면하고 상대를 죽게 내버려 두고 누군가를 사랑해야 했다. 갈매기와 까마귀, 고함, 파열, 마지 막 순간들, 브르타뉴 지방의 한 장소, 내 입술에 닿는 당신의 이마, 여자의 빛, 그리고 다른 많은 버팀벽들처럼 내려앉지 않기 위해서 투쟁하는 무거운 눈꺼풀.] P.94



Ps. 난 에밀 아자르 보다는 로맹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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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4-12 15: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에밀 아자르보다는
로맹 가리 ~~~

아무리 해도 오리지날이
더 좋더라는.

오래 전에 로맹 가리 책
끌어 모아서 읽던 시절
생각이 나네요.

새파랑 2023-04-12 15:37   좋아요 2 | URL
역시 레삭매냐님도 로맹가리 파군요 ㅋ 이 책 평점이 안좋아서 읽기전에는 좀 걱정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완전 좋았습니다~!! 레이디 L 보다는 더 좋은거 같아요~!!

페크pek0501 2023-04-12 16: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명한 작가의 짧은 소설이라 맘에 드네요. 장바구니에 담겠습니다.
맘에 드는 작품을 여러 번 읽는 즐거움을 잘 아는데 이럴 땐 짧은 게 최고입니다.^^

새파랑 2023-04-12 16:47   좋아요 1 | URL
찾아보니까 이 책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더라구요 ㅋ 로맹 가리의 다른 유명한 책들이 많지만 좀 두껍다보니 ㅋ 공감합니다. 저 이 책 두번 읽었습니다~!!

물감 2023-04-12 16: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4월은 부지런히 달리시는군요 ㅋㅋ
에밀 아자르로 출간한 건 좀 별론가요?
니콜 크라우스 다 읽으면 <자기앞의 생>읽을 생각이었거든요...

새파랑 2023-04-12 16:48   좋아요 3 | URL
부지런하고 싶습니다 ~! 오늘 오래간만에 시간이 나서 좀 달리고 있습니다
에밀 아자르로 출간한게 총 네권인데 그중 <가면의 생> 빼곤 다 좋습니다 ㅋ <자기앞의 생> 완전 좋습니다~!!

페넬로페 2023-04-12 20: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집에 가지 않는 남자와 가족을 잃은 여자!
설정부터 취하게 하는 건 아닌지~^
저는 자기 앞의 생도 좋았어요^^

새파랑 2023-04-13 14:46   좋아요 2 | URL
책이 얇아서 자세히 줄거리를 쓰면 예의가 아닐거 같아 생략했습니다 ^^ 저도 자기앞의 생 완전 사랑합니다~!!

그레이스 2023-04-13 09: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로맹가리가 나와서 새파랑님이구나 했습니다 ㅋㅋ

새파랑 2023-04-13 14:47   좋아요 2 | URL
제가 로맹 가리를 좀 존경합니다 ^^

희선 2023-04-16 02: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셸이 왜 집에 가지 않는지 바로 나오지 않지만, 나중에 나오는가 봅니다 미셸한테는 무슨 일이 있었을지... 집에 가지 못할 일, 집에 가고 싶지 않은 일...


희선

새파랑 2023-04-18 16:40   좋아요 0 | URL
나중에는 아니고 중간쯤 나옵니다. 이유가 완전 큰 단서(?)입니다. 들어갈수가 없는 큰 이유가 있더라구요 ㅜㅜ

독서괭 2023-04-18 14: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기앞의 생>이랑 <마법사들>만 읽었는데,, <자기앞의 생>은 너무 좋았고, <마법사들>은 그냥그랬어요. 이 책 새파랑님이 아주 좋았다고 하시니 꼭 읽어봐야겠어요^^

새파랑 2023-04-18 16:42   좋아요 1 | URL
<마법사들>은 저 아직 안읽었는데 표지가 좀 그래서 ㅋ <새벽의 약속>도 한번 읽어보세요 좋습니다~!!
 
코틀로반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9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음, 김철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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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3016

"집을 올리는 사람 자신은 스스로 무너져가고 있어. 그럼 누가 그 집에 살지?"


생각하지 않으면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걸까? 아무 생각없이, 타인에 의해, 타인이 만든 허상에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한다면 더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저 도구일 뿐이다.

[온세상은 아무런 의문 없이 오로지 존재하는 것 자체에만 몰두해 있었고, 보셰프만이 거기서 떨어져나와 침묵하고 있었다.] P.12



코틀로반(구덩이)를 파내려가는 사람들은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저 허울좋은 이상을 쫓을 뿐이다. 코틀로반이 자신들의 무덤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저 사람들에게 왜 관이 필요한 거예요? 죽어야 하는 자는 부르주아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P.102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배척한다, 가진자에게 분노한다, 함께 가기 보다는 그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공고히 한다. 그러나 자신들 역시 적으로 몰릴 것이라는, 결국엔 버려질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보시오. 오늘은 내가 이렇게 사라지지만, 내일은 당신들이 사라지게 될 거요. 오직 당신들 우두머리만 사회주의에 도달하게 될 테니 두고 보시오."] P.170



대의라고 생각해서 그럴수도 있다. 미래를 위해, 아이들을 위해, 그들만의 사상을 위해. 하지만 미래는 현재의 연속이다. 현재가 비참한데 장미빛 미래가 있을까? 그리고 그러한 대의는 누굴 위한 걸까?

분노는 또다른 분노를 만들 뿐이다. 사람은 생각해야 된다.





줄거리 요약보다는 즉흥적으로 리뷰를 썼다. 읽는 내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생각났다. 두 작품다 풍자적이지만 <동물농장>이 우스꽝스럽고 재미있다면 <코틀로반>은 무겁고 진지하며 한번에 이해하기 힘든 작품이었다. 하지만 <동물농장>에 비해 좀 더 깊이가 느껴졌다. 조지 오웰이 옆나라(?)에서 러시아를 바라봤다면, 플라토노프는 러시아의 직접적인 당사자였기 때문일까?



미래에 대한 생각없이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파는 모습과 빈농세력이 부농세력을 추방하는 장면을 보면서 왠지 남일 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내 무덤을 파고 있는건 아닌지 잘 생각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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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4-12 1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이네요. <동물농장>이 우화로서 사회주의의 모습을 풍자했다면 이 작품은 좀 더 직접적으로 묘사했다는 느낌을 주는 것 같네요. 나중에 한 번 비교해보며 읽어봐도 좋겠습니다.

새파랑 2023-04-12 15:33   좋아요 1 | URL
그런데 동물농장은 잘 읽히는데 이책은 잘 읽히는 편이 아닙니다 ~ 계속 좀 우울합니다 ㅋ 작품속 배경도 왠지 흐린날씨일거 같고. 그런데 다 읽고나면 오! 이런 느낌을 받으실거예요~!!

페넬로페 2023-04-12 15: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현재 저의 무덤을 파고 있지나 않은지 두려워요.
뭔가 섬뜩하다는 느낌도 받고요.
즉흥적 리뷰에 삶의 철학이 느껴집니다^^

새파랑 2023-04-12 15:34   좋아요 0 | URL
요새 책을 별로 못읽다보니 리뷰 밀리면 다른 책을 못읽을거 같아 날림(?)으로 썼습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