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의 끝 쏜살 문고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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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2117

˝나를 짓누르던 그것이 나의 사랑이었을까? 만일 사랑이 아니었다면 무엇이었을까? 내 성격이었을까? 나였을까? 삶이었을까? 그렇다. 죽어서도 난 내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내 육신의 욕망, 관능의 욕구, 질투에서는 벗어나리라.˝


연인 관계에 있어서 질투란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없을때 나타나는거라 생각한다. 만약 당신과 내가 연인이 된 게 운명이 아닌, 하필 그 시기에 그 장소에서 서로 만났기 때문이라면, 굳이 내가 아니었더라도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질투가 시작될 것이다. 당신의 옆자리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누군가는 괴로울 수 있다.


그렇다면 이건 믿지 못한 사람의 잘못일까? 믿음을 주지 못한 사람의 잘못일까? 확실한건 한번 시작한 질투는 죽을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에 내가 읽은 <질투의 끝>은 총 네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마르셀 프루스트의 초기 단편집인 <쾌락과 나날>에 수록된 단편중에서 네편을 선별한 거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네편의 단편 모두 대단히 대단히 대단히 좋았다. 그중 두편만 소개해 보자면...




1. <실바니아 자작 발다사르 실방드의 죽음>


이 작품은 죽음을 앞둔 자의 질투의 끝을 보여준다. 병 때문에 살날이 얼마 안남은 발다사르는, 그럼에도 여전히 장엄하고 완벽한 모습을 보인다. 여전히 삶에 의욕을 느끼며 죽음마져도 그를 피해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눈속에서 만큼은 알수 없는 슬픔이 느껴졌다.

[죽음을 앞두고도 저렇게 쾌활하고 여전히 극장에 가고 싶어 한다고 해서 무언가를 감추고 있거나 특별히 용기를 낸 것은 아님을, 저렇게 죽음 가까이 다가가도 삼촌은 오직 삶만을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P.20



그 슬픔의 원인이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살아가는 의지가 되는건 바로 질투였다. 예전에는 자신의 연인이었지만, 지금은 다른사람의 연인이 되어버린 시라쿠사 공녀 때문에 그는 질투의 잔인함을 느낀다. 공녀는 발다사르에 대한 연민 때문에 그를 친절하게 대하기는 하지만 다른 연인에 대한 속마음을 감출수는 없었고, 이런 그녀의 감정을 아는 발다사르는 더욱 괴로워한다. 그가 힘든건 가다리고 있는 죽음 때문이 아닌, 떠나가버린 사랑 때문이었다.

[발다사르를 이따금 잔인한 현실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단 하나 있었으니, 바로 그가 여전히 감각과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는, 하지만 이미 카스트루치오를 향해 절대 꺾이지 않을 격정적 사랑에 빠진, 그래서 그가 잊으려고 애쓰는 시라쿠사 공녀, 피아의 냉담한 태도였다.] P.30



결국 발다사르는 쓰러진다. 그리고 이제 살날이 한달도 채 남지 않게 된다. 그럼에도 질투는 끝나지 않는다. 그는 공녀가 그의 연인과 함께 무도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하게 되고, 그의 누이에게 공녀를 불러달라고 간절히 부탁한다. 공녀는 발다사르 집에 방문한다. 그리고 그에게서 무도회에 가지 말라는 부탁을 듣는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한다. 발다사르는 결국 그녀에게 작별을 고한다. 그리고 몇일 후 그는 운명한다.

[아, 언젠가 나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보면, 혹은 나의 기일이 돌아오면, 조금이나마 나의 애정을 기억해 주시오. 그러면 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당신이 오는 길 위에 마법처럼 꽃이 만발할 거요. 죽은 나를 생각해 주시오. 하지만 어쩌겠소! 삶의 열정과 우리의 눈물과 우리의 기쁨과 우리의 입술이 해내지 못한 것을, 죽음과 당신의 엄숙함이 이루어 내길 바랄 수는 없으리!] P.38



어쩌면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죽음보다도 질투가 더 괴로운 건지도 모르겠다.





2. <질투의 끝>

이 작품은 죽어야만 끝이나는 질투의 끝을 보여준다. 너무나도 다정한 연인관계인 오노레와 손느 부인은 매일매일 사랑을 키워나간다. 오노레에게 있어서 시간은 그녀를 만날 때에만 의미가 있었고, 그녀와 함께 하지 않는 시간은 단지 그녀를 기다리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만나지만, 주변사람들은 두사람을 연인으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이처럼 그들의 애정은 비밀스럽지 않았기에 더욱 신비로웠다. 누구든 그 애정에 다가갈 수 있었다. 그 애정은 마치 사랑에 빠진 여인이 팔목에 차고 있는 신비한 팔찌, 그 여인을 살게 하고 또 죽게 하는, 이름이 보이지만 알아볼 수는 없는 글자로, 호기심 많은 이들이 보기에 분명 뜻이 있기는 한데 도통 그 의미를 알 수 없어서 실망스러운 글자로 각인된 팔찌 같았다.] P.88



오노레는 그녀와 함께한 파티에서 그녀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자르를 뜨자 혼자만의 행복한 망상에 빠진다. 만약 자신의 마음이 그녀로부터 멀어지는게 느껴진다면 그녀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할거라고, 대신 그녀가 다른 사랑을 받아들여서 삶을 다른 쪽으로 옮기려고 하면 질투하지 않고 그녀를 붙잡지 않을거라고.

[또한 오노레는 만일 프랑수아즈가 다른 사랑들을 받아들여서 삶을 서서히 다른 쪽으로 옮겨 가는 날이 온다면 그녀를 붙잡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질투하지 않고, 심지어 그녀에게 더 점잖고 더 영광스러운 경의를 바칠 수 있을 남자를 직접 골라 줄 수도 있으리라.] P.90



하지만 이런 오노레의 열린(?) 마음은 파티에 참가한 뷔브레의 한마디에 무너지게 된다. 뷔브레는 오노레에게 손느 부인은 쉽게 공략할 수 있는 여자라고,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아주 격정적인 여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오노레는 자신의 연인에 대한 험담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항변하지 못한다. 대신 이날 이후 끝이 보이지 않는 의심과 함께 질투에 빠지게 된다. 질투의 시작.

[하지만 프랑수아즈와 떨어져 있는 동안, 혹은 곁에 있더라도 그녀의 눈 속에 불길이 어른거리는 동안이면 다른 누군가가 오래전에, 어쩌면 어제, 어쩌면 내일, 그 불을 지피는 상상을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오노레는 다른 여인 곁에서 순전히 육체적 욕망에 굴복하기를 반복했고, 그러고 나면 지금껏 이런 일이 얼마나 자주 있었는지, 프랑수아즈를 여전히 사랑하면서도 거짓말을 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떠올렸다. 그러자 그녀 역시 거짓말을 할지 모른다는, 그를 사랑하면서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자기를 알기 전에 이미 지금 자신을 달아 오르게 하는 뜨거운 열정으로 다른 남자의 품에 달려들었으리라는 생각이 더 이상 허무맹랑해 보이지 않았다] P.94



오노레는 자신의 괴로움을 손느 부인에게 털어놓는다. 손느 부인은 오노레에게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나는 오노레 너만을 사랑한다고 진심을 전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고, 오노레 역시 그녀의 말이 진심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한번 심어진 질투의 씨앗은 사라지지 않는다. 문득 문득 그녀에 대한 안좋은 소리를 들었던 기억을 떠올리고 괴로워한다. 어떻게 해도 그녀의 마음에 대한 확신을 못하게 된다. 질투의 계속.

[설사 그녀가 단 한 순간조차 자기 아닌 다른 남자의 것인 적이 없었다는 불가능한 확신을 얻는다 한들, 뷔브르와 함께 문 앞까지 왔던 그날의 알 수 없는 고통은, 그때와 비슷한 고통 혹은 그 고통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은, 그것이 근거 없는 소문이라고 증명된 이후라 하더라도, 절대 그를 놓아주지 않았으리라. 그것은 마치 누군가 우리를 죽이려 하는 꿈을 꾸다가 깨어난 뒤 꿈이었음을 알면서도 공포에 떠는 것과 같고, 다리가 잘린 뒤에도 그 없는 다리에서 고통을 느끼는 것과 같다.] P.95



오노레는 어느정도 질투의 끝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였고, 그녀와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오노레의 불행은 끝난게 아니었다. 그는 길을 가다가 마차에 치여서 두 다리가 골절되고, 복부에 타박상을 입는다. 그는 자신이 다친 것 때문에 손느 부인의 사랑이 떠날거라고 절망하게 되고 다시 질투에 빠진다. 그리고 자신이 죽어야만 이 질투가 끝날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질투의 끝.

[죽어야 한다면, 죽고 나면 질투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죽기 전에는? 내 육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어쩔 수 없다! 내가 질투하는 것은 오로지 쾌락이고, 나의 육신이 질투하고 있을 뿐이고, 그녀의 마음과 그녀의 행복은 내 질투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바라는 것인데, 누가 제일 잘 해낼까? 내 육신이 사라지면, 영혼이 육신을 이기면, 이전에 많이 아프던 때처럼 내가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조금씩 떨어져 나오게 되면, 그래서 더 이상 미친 듯이 육체를 갈망하지 않고 그만큼 영혼을 사랑하게 되면, 그때는 질투하지 않으리라. 그때는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리라.] P.112



인간의 의심과 욕망, 질투는 살아있는 동안 계속따라다니며 죽어야만 없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질투라는 감정이 어떻게 보면 대단히 유치할수도 있지만 프루스트가 쓰니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고결하게까지 느껴졌다. 한번 부서진 마음을 완벽하게 치유할 수는 없는걸까?


이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떠올랐다. 해설을 보니 <질투의 끝>이 <잃시찾>의 전단계라고 하는데, 맞는 말인거 같다. <잃시찾>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요약해서 들어가 있는 작품이 <질투의 끝>이라고 할까? 개인적으로는 <잃시찾>에 비견될 정도로 대단히 좋았다. <잃시찾>을 읽기 시작하기에는 부담스러운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Ps. 이 작품이랑 어울리는 노래 하나 추천해 본다.

넬 - 치유
https://youtu.be/kMH6vM6-WMA

나를 갈라 내 안에 너를 들여놓고 싶은데
그래서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건지 보여주고 싶은데
부탁해 부디 부서진 내 맘을 치유해 주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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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09-27 17: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권에서 질투에 대해 장황하게 써 놓았잖아요. 작가는 처음부터 사랑에 질투가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나봐요.
새파랑님, 별 다섯 주셨네요
기대됩니다^^

새파랑 2022-09-27 18:03   좋아요 4 | URL
질투의 화신 프루스트 입니다 ㅋ 이 책 정말 재미있습니다. 계속 꺼내읽고 싶은 책이에요~!!

거리의화가 2022-09-27 17:3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잃시찾 내년에 시작 전 이 책 먼저 읽어보면 좋을 것 같네요. 새파랑님 추천 감사해요!

새파랑 2022-09-27 18:03   좋아요 3 | URL
이 책 먼저 읽고 잃시찾 읽으면 더 잘 이해가 될거라 생각합니다~!!

coolcat329 2022-09-27 19:0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처음 보는 책인데 프루스트의 단편집이네요.
질투라는 감정은 눈 앞에 다가온 죽음도 능가할 정도로 강한 감정인가 봅니다.
프루스트가 질투의 화신이라니 참 프랑스다운 작가같아요.

새파랑 2022-09-27 20:15   좋아요 2 | URL
제가 그래서 프랑스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거 같아요 ^^

미미 2022-09-27 19: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대단히×3 좋았다고 하시니 반드시 읽어야겠네요. 사랑에 따르는 위험요소들, 감정들에 프루스트만한 전문가는 없는것같습니다^^*

새파랑 2022-09-27 20:16   좋아요 2 | URL
미미님 이 책 안읽으셨군요 ㅋ 완전 좋습니다~!! 프루스트 찐팬이라면 완전 소장각입니다~!!

얄라알라 2022-09-27 19: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플친님들 댓글만 읽어도, ;프루스트 특화 영역이 감정을 다루는 것인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새파랑 2022-09-27 20:16   좋아요 2 | URL
질투는 프루스트 특화 영역이 맞는거 같아요 ㅋ 전 너무 즐겁게 읽었습니다~!!

프레이야 2022-09-27 20: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사놓았어요 새파랑 님.^^
언제 읽으려나...

새파랑 2022-09-28 07:36   좋아요 1 | URL
요책 얇은데다가 재미있어서 금방 읽습니다~!!

햇살과함께 2022-09-27 21: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너무 좋죠~!
다 필사하고 싶은 문장입니다!!

새파랑 2022-09-28 07:36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전 문장이 다 필사 문장입니다 ㅋ 정말 좋더라구요 ^^

희선 2022-09-28 03: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루스트가 질투를 많이 했나 하는 생각이 들게도 합니다 실제로는 어땠을지... 그런 마음이 있어서 글도 썼겠지요 믿으면 좋을 텐데... <질투의 끝>에서는 다른 사람 말을 더 믿다니... 괴로움은 자신이 만드는 거네요


희선

새파랑 2022-09-28 07:37   좋아요 2 | URL
상대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그런거 아닐까요? 프루스트는 실제로도 그랬을거 같습니다 ㅋ 모든 원인은 결국 자신인거 같아요~!!

mini74 2022-09-29 13: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루스트가 쓰는 질투라니 궁금합니다. 잃시찾은 포기해도 이 책은 도전 !! ㅎㅎ 새파랑님이 책 소개하며 써 놓으신 질투에 대한 글들 👍좋아요

새파랑 2022-09-30 07:28   좋아요 2 | URL
제가 질투를 좀 해봐서 잘 압니다 ㅋ 이 책 초강추 입니다~!!

yamoo 2022-10-01 11: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첨 보는 책인데....프루스트의 잃어버린..9권을 재편집한 걸까요, 아님 새로운 단편집인가요?? 새로운 단편집이면 저도 구매해서 봐야 겠습니다요~!

새파랑 2022-10-01 20:39   좋아요 1 | URL
<잃어버린시간을 찾아서> 나오기 전에 프루스트가 쓴 단편집 <쾌락과 나날>에 실린 단편중 네편을 엄선한 작품입니다 ㅋ 이미 기존에 나온작품인데 전 첨읽었어요 ^^

그레이스 2022-10-04 11: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질투의 감정은 살아있는 동안 지속되는 부정적이기고 긍정적이기도 한 감정이라 생각됩니다^^
어떻게 처리하는가가 관건이라는 생각!

새파랑 2022-10-04 13:04   좋아요 2 | URL
질투라는 감정은 평생 따라다니는 거 같아요. 긍정적으로 다루는게 중요한거 같아요 ^^
 
제안들 1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배수아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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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2116

나는 꿈을 자주 꾼다. 꿈에서 깨어나면 어느정도 기억이 나지만 몇시간만 지나면 꿈은 더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실제 있었던 일은 인상깊었던 일이라면 몇일이 지나도 기억이 나지만, 인상싶었던 꿈은 바로 휘발되어버린다. 왜그런걸까? 원래 인간의 기억이란 그렇게 만들어진걸까? 아니면 기억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걸까?


<꿈>은 카프카의 꿈과 관련된 글을 모은 작품이다. 일기에 썼든, 누군가에게 편지를 썼든, 그가 꾼 꿈에 대한 모든 기록이 이 책안에 담겨있다. 처음에는 단편집인지 알았는데 단편집도 아니었다. 꿈에 대한 잡문이라고 보는게 더 정확할 것 같다.

[너무 교활한가요? 그렇다고 나에게 반감을 갖지는 말아주십시오. 나는 오직 꿈에서만 음침하니까요.] P.89.



카프카는 꿈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이렇게 꿈에 대한 기록을 남겨놨다. 그런데 이 꿈에 대한 기록이 대단히 기괴하면서도 평범하다. 특별한 이야기도 없고 정제되어 있지도 않고, 그다지 특별하지도 않다. 내가 꾸는 꿈이랑 그렇게 차이도 없다.(응?) 그래서 더 진실로 다가온다. 사실 꿈을 현실처럼 선명하게 그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이지 않을까?

[꿈과 같은 내면의 삶을 묘사하는 일이 운명이자 의미이고, 나머지는 전부 주변적인 사건이 되었다. 삶은 무서울 정도로 위축되었고, 점점 더 계속해서 위축되어간다. 그 어떤 일에서도 이처럼 큰 만족감을 얻지 못했다.] P.29.



누군가의 꿈을 엿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는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나도 오늘부터 꿈을 꾸면 다음날 기록이라도 남겨봐야 겠다. 요즘 악몽을 자주 꾸긴 하지만...

[창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나는 산산이 조각난 생각의 파편 속에서, 15분 동안 끊임없이 창문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러면 열차들이 나타났지요. 열차는 선로에 누운 내 몸 위로 한 대 한 대 차례로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목과 다리의 절단된 상처를 점점 더 크고 깊게 벌려 놓았습니다.] P.64




Ps. 해설을 보고 알게된 건데, 카프카의 작품은 자고 일어나보니 어? 뭐지? 이렇게 시작하는 작품이 많다. <변신>, <소송>이 대표적이다. 사실 난 이 두 작품만 제대로 읽어봤는데, 돌이켜보니 두 작품 모두 꿈인것처럼 느껴졌었다. 뭐 인생이 어차피 꿈의 일부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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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9-25 23:0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자기가 꾼 꿈 이야기를 다 솔직하게 털어놓기에는 좀 민망할텐데요? 위대한 작가쯤 되면 그것도 가능한가 봐요. 저는 꿈이 너무 유치찬란해서 그거 얘기하면 좀 없어보인달까?
아 정말 우아한 제 이미지를 와르르 무너지게 할거 같아 적나라하게 얘기할 수가 없어요. ㅎㅎ
오늘은 새파랑님 악몽 꾸지 마시고 편안한 밤 되세요.

얄라알라 2022-09-26 00:39   좋아요 4 | URL
그럴수록 궁금해집니다. ㅎㅎ 바람돌이님. 도대체 어떤 꿈이기에, 와르르...^^?

새파랑 2022-09-26 06:03   좋아요 3 | URL
제 꿈은 악몽이라기 보다는 개꿈 같아요 ㅋ 이 글 쓰고 바로 잤는데 꿈에서 바둑을 두는 꿈을 꿨지만...일어난지 10분밖에 안지났는데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ㅋ

바람돌이님 우아한 이미지셨군요 ^^

바람돌이 2022-09-26 08:21   좋아요 4 | URL
얄라님 저는 그렇게 어딜 가야하는 꿈을 자주 꿔요. 그냥 집이라든가 직장이라든가.... 근데 거기까지 가는데 방해물이 너무 많아서 못가. 그래서 막 기어가는데 다리는 안 움직이고, 상한 악의 무리들 나타나고.... 하여튼 더 얘기하면 저 너무 유치한거 뽀롱나요. ㅠㅠ
새파랑님 저 우아한 이미지인거 모르셨단 말인가요? 앞으로 좀 더 틸 내도록 하겠습니다. ㅎㅎ

미미 2022-09-26 10:59   좋아요 2 | URL
바람돌이님 꿈이야기 저는 흥미진진한데요?^^*

새파랑 2022-09-26 11:50   좋아요 2 | URL
바람돌이님 아주 우아하실거 같아요 ^^ 저도 흥미진진합니다. 무슨 여행기 같아요~!!

햇살과함께 2022-09-25 23:1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 꿈을 거의 꾸지 않네요.
좋은 꿈 꾸세요~~

새파랑 2022-09-26 06:05   좋아요 3 | URL
꿈을 안꾸시는군요 ㅋ 전 꿈을 꾸는 날이 더 많은데 ㅎㅎ 키가 크려고 그런걸까요? 😅

페넬로페 2022-09-25 23: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소설집이 아니라 카프카 자신의 꿈에 대한 경험을 기록한 것이군요.
꿈을 잘 꾸지 않는데 저도 한 번씩 악몽을 꿔요. 그럴땐 힘들더라고요^^

얄라알라 2022-09-26 00:40   좋아요 5 | URL
저도 새파랑님 설명 아니었다면
추상으로서 꿈에 대한 소설인가...그랬을 거예요^^

이 책 읽어내려면 두뇌회전 핑핑...해야할 것 같아요. 자기가 꾼 꿈도 어려운데, 위대한 작가가 꾼 꿈이라면 더욱

새파랑 2022-09-26 06:06   좋아요 4 | URL
이 책 좀 황당하면서도 나름 재미있습니다. 꿈도 카프카적인 느낌? 뭔가 약간 지적입니다 ㅋ

프레이야 2022-09-26 00: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꿈을 시작으로 상상력을 덧입힌 이야기인가 봅니다. 읽어보고 싶네요. 우리의 꿈을 기록해 두면 재미있겠습니다. 적나라하기도 우습기도 하겠네요. 요즘은 눈 뜨면 꿈을 기억 못할 때가 많아요.

새파랑 2022-09-26 06:08   좋아요 3 | URL
전 꿈을 자주 꾸는데 일어나면 글을 쓸 정도로는 기억이 안나더라구요 ㅜㅜ 오늘부터 한번 기록해볼까 했는데 첫날부터 포기입니다 ㅋ

거리의화가 2022-09-26 09: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꿈을 꿀텐데 요즘은 예전처럼 꿈이 잘 기억이 안납니다. 흐리멍텅하고 심지어 누가 나왔는지도 기억이 안나요ㅠㅠ 늙어가는건가~ㅋㅋㅋ
꿈에 대한 것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합니다. 오히려 특별하지 않은 꿈 이야기라서 더 보편성을 지닐 것 같기도 하네요.

새파랑 2022-09-26 10:12   좋아요 3 | URL
나이가 들면 꿈이 잘 기억이 안나는걸까요? 가끔 방금전에 뭘 하려고 한것도 생각이 안나긴 하더라구요 ㅋ 왠지 슬프네요 ㅜㅜ

미미 2022-09-26 11: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소송> 읽다만 상태지만 저도 꿈같다고 느꼈어요ㅎㅎ
꿈을 기억하느냐 마느냐 깨기전에 본인이 결정한다는 설도 있더군요
새파랑님 꿈이야기도 궁금해요^^*

새파랑 2022-09-26 11:51   좋아요 3 | URL
저도 소송 읽으면서 뭔가 꿈속을 걷는 기분이 들었어요 ㅋ 소송 아주 재미있습니다 ㅋ 결말도 예술입니다~!! 언젠가 기억에 남는 꿈을 결정하면 한번 써보겠습니다~!!

독서괭 2022-09-26 12: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꿈 많이 꿉니다! 역시 금방 휘발되지만요 ㅎㅎ
내가 꾸는 꿈이랑 그렇게 차이도 없다, 고 말씀하시니 읽어보면 꿈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파랑 2022-09-26 12:54   좋아요 3 | URL
독서괭님은 이 책 읽으시면 뭐야 이거? 할수도 있습니다 ㅋㅋ

scott 2022-09-26 12: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이 책 읽으셨으니

하루키옹의
카프카
재독을 향행 ~@@@@@@

새파랑 2022-09-26 12:53   좋아요 3 | URL
앗 ㅋ 알겠습니다 카프카가 카프카를 부르는군요 ^^

alummii 2022-09-26 16: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카프카 작품들은 읽다보면 항상 악몽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아예 <꿈>이라는 작품도 있었군요! 배수아님 역이라 더 읽고싶어요 ~ 저도 꿈 기록 중인데 ㅎㅎㅎ 카프카님과 월매나 비교가 될지 😂 꼭 읽어보겠슴당 장바구니 고고

새파랑 2022-09-26 17:28   좋아요 2 | URL
와우 꿈을 기록하시는군요~!! 카프카와 동급 이십니다~!! 저도 카프카 작품에서 비슷한걸 느꼈었는데 ㅋ 그래서 더 신비하게 다가옵니다 ^^

mini74 2022-09-26 18: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달리도 잠자리에 수첩과 연필을 꼭 놔두고 잤다고 하더라고요. 깨어나는 즉시 꿈을 그리기위해. 꿈을 그리는 것과 꿈을 쓰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꿈을 잊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새파랑님 행복한 꿈 꾸세요 꿈은 기억나지 않더라도 그 행복한 기분은 오래오래 남기를 ㅎㅎ 저는 먹는 꿈은 잘 기억합니다. ~~

새파랑 2022-09-26 19:13   좋아요 1 | URL
전 행복한 꿈은 정말 기억하고 싶습니다 ㅜㅜ 근데 그게 잘 안되네요 ㅋ 점점 안되는거 같습니다 ㅎㅎ 전 먹는 꿈은 꾼적이 없는거 같은데 ^^

레삭매냐 2022-09-27 16: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카일 맥라클란 주연의
<소송>을 본 적이 있었는데...

소설과 느낌이 많이 달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새파랑 2022-09-27 17:13   좋아요 2 | URL
소송이 영화도 있군요~! 카프카가 어렵긴 한데 소설 소송은 재미있더라구요ㅋ 뭔가 말이 안되는거 같으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ㅋ

희선 2022-09-28 03: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꿈이란 소설이 아닌 그야말로 꿈을 쓴 거군요 꿈은 적다보면 더 잘 기억난다고도 하던데... 저는 잘 때 꿈 기억해야지 하면 좀 기억하고 그러지 않으면 거의 잊어버려요 한번 깼을 때는 생각나는데 다시 자면 잊어버리는... 보르헤스는 꿈을 소설로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희선

새파랑 2022-09-28 07:39   좋아요 1 | URL
보르헤스가 궁금해지네요 ~! 기록 잘하는 희선님도 꿈을 글로 쓰시면 좋을거 같아요^^

그레이스 2022-10-04 1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러네요
꿈에 대한 이야기가 많네요.

새파랑 2022-10-04 13:03   좋아요 2 | URL
오늘부터 카프카의 <성>을 읽으려고 챙겨왔습니다 ^^
 

N22114

˝인생은, 내 생각에, 실수와 수치뿐.˝ 그래..… 실수와 수치뿐이었다.


(마틴 에덴 1 리뷰에 이어서...)


사랑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밑바닥에서 여기까지 쉬지않고 올라왔는데, 올라와보니 그 꿈이 사라진걸 알게 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좌절? 분노? 체념? 어쩌면 다시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싶을지도 모른다. 더이상 이룰 수 없는 꿈이란 악몽일 뿐이니까...




계속 실패하더라도 마틴 에덴은 루스의 사랑을 얻기 위해 작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몇날 몇일을 굶어가면서도 골방에 쳐박혀서 미친듯이 글을 쓴다. 나는 나를 믿기 때문에, 사랑의 힘을 믿기 때문에 힘들어도 계속 쓴다. 언젠가는 세상이 알아줄거라 의심하지 않는다.

[˝자기는 나를 사랑하지. 그런데 왜 사랑할까? 내 안에서 나로 하여금 글을 쓰지 않으면 견딜수 없게끔 하는 것이, 자기의 사랑을 내게로 끄는 바로 그것이야. 자기가 만났고 사랑할 수도 있었던 다른 남자들과 내가 다르기 때문에, 자기는 나를 사랑하는 거야.˝]  P.76



하지만 옆에서 이를 바라보는 루스는 불안하기만 하다. 마틴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그가 작가로서 성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잠시의 일탈로 치부하며, 그가 곧 작가의 자질이 없다고 깨닫기를, 그냥 평범한 직업을 갖길 바란다. 하지만 마틴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가 작가로서의 성공을 너무 확신했기에,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자기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자기 부모님의 적개심이 두렵지 않아 세상 모든 것이 길을 잃고 헤맬지라도, 사랑만은 그렇지 않아. 가다가 나약해져서 맥없이 머뭇대지 않는 한, 사랑은 잘못 갈 수가 없어.˝]  P.78



하지만 오해 때문이었을까, 아님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을까? 결국 루스는 마틴의 손을 놓아버린다. 그녀에게 있어서 마틴과 같은 하층민의 삶은 애초부터 어울릴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누가봐도 어울릴 수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어쩌면 현실적으로 헤어짐이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점을 기억해 줘. 우리의 관계는 단순히 실수였어. 부모님은 우리가 서로에게 맞지 않고, 너무 늦지 않게 알게 된 걸 둘 다 다행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말씀하셨어. 나를 만나려고 해 봐야 소용없어.]  P.155



하지만 마틴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글을 쓰고 새롭게 태어난 이유는 오직 루스 때문이었는데, 이렇게 떠나가 버린다면 마틴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가 믿었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던 걸까? 마틴은 그동안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았던 건지 방황하게 된다.


루스가 떠나간 이후 거짓말처럼 마틴이 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되고, 과거에 그가 쓴 작품들까지 높은 가격에 팔리게 되면서 마틴은 성공한 작가가 된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부자가 된다. 하지만 성공한 작가가 되고 싶게 했던 유일한 이유인 루스가 떠난 뒤에 찾아 온 이러한 성공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제 그는 예전의 하층민 시절로도 돌아갈 수 없었고, 그렇다고 상류층의 삶도 즐길 수 없는 어중간한 위치에 서게 된다. 돈이 많지만, 명성이 높지만 위안이 될 수 없었다. 그렇게 고귀하다고 믿었던 사랑이라는 가치는 그에게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왔다. 수천 권의 책들이 그들과 그 사이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가 그자신을 추방했던 것이다. 지식의 광대한 영토로 너무 깊숙이 들어온 나머지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그는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그는 어디에서도 새로운 고향을 찾을 수 없었다.]  P.191



이후 루스는 가족들의 사주를 받고 성공한 마틴을 다시 찾아오지만, 마틴은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마틴이 사랑했던건 루스가 아닌, 그가 관념적으로 창조해 낸 여성이었다는 것을. 그는 이제 사랑을 믿을 수 없었다.

[˝가장 나쁜 건, 사랑을, 성스러운 사랑을 내가 의심하게 되었다는 거야. 사랑이 출판과 대중의 주목을 먹여서 살려 내야 할 만큼 천한 것인가? 나는 앉아서 머리가 빙빙 돌 때까지 그 생각을 하곤 했어.˝]  P.228



그라고 마틴은 갑자기 모든 부와 명성을 놓아둔 채 타이티로 떠난다. 그곳에서 그가 찾으려고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삶을 너무나 사랑해서
희망도 공포도 놓고
우리는 짧은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어떤 신이시든
어느 생명도 영원히 살지 않게 하심을,
죽은 자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심을,
아무리 느리게 흐르는 강도
구불구불 바다에 꼭 닿게 하심을.]  P.249






이 책은 분명 잭 런던의 자전적 요소가 담겨있는 작품이 맞다. 그가 생각했던 사랑, 성공, 그리고 당시 출판업계에 대한 시각까지 모두 담겨있다. 그래서 더 재미있게 읽히고 진심으로 읽혔다. 역시 가장 와닿는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단언하건대, 편집자들 중 99퍼센트의 주된 자격은 실패한 경력이야. 그들은 작가로서 실패한 사람들이야. 그들이 글쓰기의 즐거움보다 고역스럽게 사무를 보고 발행 부수와 사장에게 얽매여 살기를 더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는 마. 그들은 글을 써 보려고 했으나 안 됐던 거야. 바로 거기에 저주받은 역설이 있지. 문학에 있어 성공으로 가는 길목을 문학에 실패한 그들 경비견이 지키고 있으니. 편집장, 편집 차장, 편집부원들 대부분, 그리고 잡지와 출판사들에 고용되어 원고를 사전 검토하는 독자들 대부분, 그들 거의 모두가 글을 쓰려 했으나 실패한 자들이야.˝]  P.68


(좀 싸한 느낌이 드는 문장이긴 하지만 뭐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





마틴 에덴이 그냥 성공을 즐겼더라면, 루스와의 재회를 받아들였더라면 어땠을까란 생각도 잠깐 해봤다. 아마 현실이라면 그렇게 했을것 같다. 실제로 잭 런던 역시 <마틴 에덴>의 결말처럼 살지는 않았고 현실적인 삶을 살았던 것처럼 보이는데... 뭐 현실은 현실이고, 소설은 소설이니까.


그래도 마지막 결말은 너무 소름돋으면서도 완벽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도 올해 내가 읽은 최고의 책중 하나가 될거 같다.

(도대체 최고의 책은 몇권인건가...)




Ps 1.  <마틴 에덴> 완독 기념으로 그동안 모은 녹색광선 시리즈를 (일부만) 모아봤다. <패배의 신호>는 구매는 했었는데 친구 빌려주고 아직 못받았다... <마틴 에덴 1>은 분명 얼마전까지 책상에 있었는데 어디간건지...
나중에 완전한 모습으로 다시 찍어봐야 겠다.

Ps 2. 지금까지 녹색광선에서 나온 책들은 다 내 취향이었다. 안좋았던 작품이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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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9-19 22:5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출판사 녹색 광선은 새파랑님 같은 애독자가 필요 합니다 출판사는 다음번 신간 새파랑님에게 가장 먼저 보내 다오!^^

새파랑 2022-09-20 06:19   좋아요 3 | URL
저보다는 스콧님이 더 애독자 이신거 같아요~!! 전 처음에 스콧님 글 봤을때 이 책이 녹색광선에서 나온건지도 몰랐습니다 😅

햇살과함께 2022-09-19 23: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호~ 녹색광선 알흠다워요^^ 바닥의 구김있는 초록천이 더 책들을 도드라지게하네요!

새파랑 2022-09-20 06:20   좋아요 2 | URL
바닥이 지저분해서 그냥 옆에 있는 보자기 대충 깔아서 찍어봤습니다 ㅋ 전 사진을 정말 못찍는거 같아요 ㅎㅎ

잠자냥 2022-09-20 0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잭 런던은 마틴 에덴이 되기를 꿈꿨으나…?! ㅎㅎㅎㅎㅎ 그래도 그도 백 살까진 살지 못했군요~

새파랑 2022-09-20 06:23   좋아요 0 | URL
찾아보니 잭런던은 그렇게 장수하진 못했더라구요 ㅜㅜ 어린시절을 힘들게 보냈던 거랑 다작했던거랑 벼락부자 된게 책이랑 비슷했던거 같아요 ㅋ

blanca 2022-09-20 09: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다 읽었는데 너무 슬퍼서 저까지 다운돼요. 녹색광선 책 정말 너무 아름답죠. 가격에 수긍이 갑니다.^^

새파랑 2022-09-20 12:44   좋아요 0 | URL
다 읽으셨군요~! 읽고나서 좀 다운된다는데 공감합니다 ㅎㅎ 책만 좋다면야 가격이야 뭐 ^^ 저도 이 책 대만족입니다~!!

그레이스 2022-09-20 10: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녹색광선을 애정하시는 새파랑님 이 출판사에서 상 줘야된다고 봅니다. 나란히 꽂혀있는 책등이 멋있을듯요. 마틴에딘 너무 옛날책으로 갖고 있어서 막 사고 싶은 유혹을 누르고 있습니다. 그거 사면 강철군화나 다른 책들이 너무 초라해질 듯요^^

새파랑 2022-09-20 12:46   좋아요 2 | URL
제가 애정하는 출판사가 몇곳(?) 있습니다 ^^ 나란히 놓은거는 저번에 한번 찍었던거 같아서 이번에는 표지가 보이게 찍어봤습니다~!! 강철군화도 읽어봐야 하나요? 왠지 책 제목이 안끌린다는 ㅎㅎ

미미 2022-09-20 11: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최고의 책은 몇권인걸까?‘ㅋㅋㅋㅋㅋ
이 말 너무 공감되면서 괴롭고도 기쁘게 들립니다ㅋ
편집자에 대한 ‘저주받은 역설‘신날하네요
새파랑님께 지금 땡투갔을거예요(>.<)V

새파랑 2022-09-20 12:47   좋아요 1 | URL
역시 땡투의 달인 미미님~!! 미미님의 평가도 기대 됩니다~!!
올해 읽은 책중에 좋은 책이 많았던거 같아요 ㅋ 내일 최고의 책이 또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

페넬로페 2022-09-20 13: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녹색광선 출판사 애독자, 새파랑님!
마틴 에덴이라는 한 남자의 삶이 무척 궁긍 해집니다. 잭 런던의 문장도요.
최고의 책이 계속 쌓입니다^^

새파랑 2022-09-20 15:54   좋아요 2 | URL
제가 한번 애독하면 끝까지 애독합니다 ㅋ 완전 재미있어요~! 올해는 Best 30은 뽑아야 할거 같습니다 ^^

페크pek0501 2022-09-20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마틴 에덴을 그저께 집에서 영화로 봤어요. 마지막 장면은 소설과 달리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자살하려는 듯이.
옛 여인과도, 사랑하는 여인과도 어울릴 수 없는 자신을 깨달은 것 같았어요. 영화로도 안타까움이 느껴진답니다.^^

새파랑 2022-09-20 15:55   좋아요 1 | URL
영화로 먼저 접하셨군요. 마틴 에덴 정말 근육질에 잘생겼나요? ㅋ 역시 예감은 틀리지 않는거 같습니다 ㅜㅜ

프레이야 2022-09-20 1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흠다운 녹색광선, 저는 6권요 ㅎㅎ
3권 마저 사야지 담아두곤 미루었네요.
마틴 에덴 좋지요. ^^ 잭 런던이 좋은건지...
자전적 소설이라 막 겹쳐져서 상상되고요.
긴 소설을 영화적으로 잘 연출한 작품, 영화도 강추에요.
<마틴 에덴> 2권의 표지 사진은 아쉬워요.
여주인공의 얼굴이 이쁘게 나오지 않았거든요. 각도를 잘 잡아야하는데ㅠ
미워서 일부러 저 사진을 골랐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 정도로...ㅋ
페이퍼 써야되는데 이래저래 집중이 안 되네요. 가을탓인가.

새파랑 2022-09-20 18:21   좋아요 0 | URL
곧 9권이 되시겠네요. 영화도 좋고 책도 좋은 작품이군요~!! 2권 표지는 약간 낚시 아닌가요? ㅋ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날씨가 문제입니다~!!!

레삭매냐 2022-09-20 2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틴 에덴, 마저 빨랑 읽어야
하는데 다른 책에 빠져 정체
중이네요 ㅠㅠ 저도 속히 -

새파랑 2022-09-21 07:13   좋아요 1 | URL
레삭매냐님이라면 이 책 이틀이면 읽으실거 같아요~~!!

서니데이 2022-09-20 2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출판사의 일관성 있는 디자인, 실물로 보면 예쁘다고 하시니, 사진 한 번 더 봅니다.
양장본 책들은 표지 안쪽의 패브릭 느낌 나는 책들 있는데, 보관 잘 해야 해요.
잘 봤습니다. 새파랑님, 좋은하루되세요.^^

새파랑 2022-09-21 07:14   좋아요 1 | URL
역시 사람이든 출판사든 일관성이 최고인거 같아요~!! 실물이 더 멋집니다~!!

희선 2022-09-22 0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을 쓰려 했으나 실패한 자들... 슬픈 말이네요 그런 사람 많겠습니다 사랑은 떠나가면 가는 거고 앞으로도 글을 쓰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잭 런던은 그렇게 했겠지요


희선

새파랑 2022-09-22 08:43   좋아요 0 | URL
마틴에덴은 그렇게 안했지만 잭런던은 그렇게 한거 같아요 ㅋ 가는건 가는대로 둬야합니다~!!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
사바하틴 알리 지음, 이난아 옮김 / 학고재 / 2017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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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2113

"내가 느끼는 것을 그대로 전할 만한 언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기껏 찾아낸 모든 단어와 내가 뱉어내는 모든말이 감정을 빛바래게 만들고 이 행복을 앗아가지 않을까 두려웠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일지라도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적어도 한가지 이상의 이야기는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의 인생을 한권의 책으로 표현하기도 하기도 하며, 무심코 지나치는 사람들을 결코 무시하거나 속단힌면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가진 사람은 모두 아름답다.


이름도 낯선 터키 작가 '사바하틴 알리'의 작품인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는 이런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 '아름다운 이야기'가 항상 인생의 행복으로 연결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서 미약하게나마 살아가는 힘이 된다면 그것보다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을까?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는 액자식으로 구성된 소설이다. 정확하게 화자인 리심의 이야기가 1/4, 액자속 라이프 에펜디의 이야기가 3/4이지만 두 이야기 모두 대단히 흥미롭다.



1. 라심

화자인 라심은 은행에서 말단직원으로 일하다가 해고된다. 이전까지는 주변사람들과 어울리며 평범하게 지냈지만, 해고된 후에는 이전과 같이 지낼 수 없었다. 소심함과 부끄러움 때문에 점점 주변 사람들을 피하게 되고, 그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 커져갔다. 모두가 나를 불편해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라고 그들이 물으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럭저럭... 가끔 여기저기서 임시직으로 일해"라고 답하고는 서둘러 도망쳤다. 주위에 사람이 절실했지만 그럴수록 그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커졌다.] P.10



어느날 저녁 길을 걷던 중 라심은 학교 동창인 함디를 만나고, 그의 초대로 그의 집에 방문하게 된다. 그리고 라심의 해고를 알게된 함디는 그에게 자신이 책임자로 있는 직장에 일자리를 제안한다. 하지만 함디의 태도에서 라심은 그가 나를 진정한 친구로 대하는게 아니라 함부러 대하는 것처럼 느낀다. 나의 좁아진 마음이 문제인 걸까? 하지만 먹고 살아야하기에 다음날 어쩔수 없이 라심을 찾아가고 일과 사무실을 할당 받는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한동안 함께 지내던 사람에게 재앙이 닥치고 그들이 난관에 빠진 걸 보면 마치 그런 재앙을 이미 물리친 것 같은 안도감이 들고, 어쩌면 나에게도 닥칠 뻔한 재앙을 그들이 감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가련한 그들을 동정하고 싶어진다. 함디도 나에게 이런 느낌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P.14



그리고 그곳에서 운명적으로 라이프 에펜디를 만난다. 독일어 번역일을 하고 있었던 라이프 에펜디, 그러나 함디를 포함한 사무실 사람들은 그를 무시한다. 그는 다른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주변의 불편한 시선들에 신경쓰지도 않는다. 화내지도 않고, 바라는 것도 없이 오직 자신만의 일을 한다. 흔들림 없는 침묵과 조심성만을 가진 라이프 에펜디.

[주변을 이렇게 잘 꿰뚫고, 상대방의 깊은 내면을 이렇게 예리하고 명료하게 관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에게 화를 내고 흥분할 턱이 있단 말인가? 이런 사람이 옹졸함으로 몸부림치는 누군가의 앞에서 돌처럼 서 있는 것 외에 달리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모든 슬픔, 실망, 분노는 눈앞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이해할 수 없고 예기치 않은 부분들에서 비롯된다.] P.30



라심 역시 처음에는 그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를 조금씩 관찰해 나가면서 그가 결코 뒤떨어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의 내면에는 대단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라이프 에펜디는 자주 아파서 결근을 하는데, 라심은 그와 좀더 친해지고 싶어서, 그를 좀더 알고 싶어서 그의 집에 일감을 가지고 병문안을 간다. 라심은 라이프 에펜디가 집에서도 회사와 마찬가지로 핍박받고 무시당하면 살고 있는걸 알게된다. 가장임에도 전혀 없는 권위, 하지만 이 모든 걸 인내하며 참고 견디는 모습을 보면서 라심은 그가 집착이 없을 뿐이지 절대 텅빈 사람이 아님을 확신한다. 그런데 왜 저렇게 체념하며 사는걸까? 왜? 어떤 인생을 살았길래?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고 가장 단순해 보이는 사람도 경이로운 내면을 품고 있을 수 있고, 가장 어리석은 사람도 고뇌에 찬 영혼의 소유자일 수 있다. 왜 우리는 이 사실을 직시하지 않고 미적거리며,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라는 듯 사람이라는 피조물을 이해하고 판단 내리는 걸까?] P.57



라이프 에펜디의 병은 점점 심해지고 그는 자신이 오래 못살거라는 걸 알게된다. 그래서 라심에게 자기 사무실에 있는 짐을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라심은 사무실에서 라이프 에펜디가 쓴 노트를 발견하고, 다음날 그에게 노트를 가져다 준다. 노트를 받은 라이프 에펜디는 라심에게 그 노트를 태워달라고 부탁한다.

[아무것도 남기고 싶어하지 않고, 죽음을 향해 외로움조차 함께 끌어안고 가는 이 남자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음속에 끝없는 연민과 함께 그의 운명에 대해 한없이 관심이 일었다.] P.70



순간 라심은 그 노트에 흥미가 생겼고, 그에게 단 하루만 자신에게 그 노트를 맡겨달라고 말한다. 그의 인생이 궁금했기에, 그의 인생 소설이 궁금했기에. 삶의 마지막 순간이 얼마 안남은 라이프 에펜디는 노트에 대한 관심도 져버렸던 걸까? 그는 라심에게 노트를 빌려준다. 그리고 이후 라이프 에펜디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펼쳐진다.





2. 라이프 에펜디

그가 남긴 노트는 외롭기만했던 젊은 시절에 그가 사랑했던,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이별했던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홀로 간직할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거대한 세상에 나처럼 철저하게 외로운 누군가가 또 있을까? 누가 내 얘길 끝까지 들어준단 말인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지난 10년 동안 누구에게 뭔가를 말한 기억이 없다. 부질없이 사람들에게서 도망치고, 부질없이 사람들을 쫓아냈다. 이제 뭘 할 수 있을까? 돌아갈 수도 없고 그래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P.76



어린시절 라이프 에펜디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내보이길 꺼려했고, 다른 또래들과 달리 문학을 좋아하고 그림을 잘 그리는 수줍은 소년이었다. 당시 재력이 어느정도 있던 아버지는 라이프 에펜디를 독일로 유학을 보낸다. 아버지는 그가 독일에서 비누 제조업을 배워 오길 바랬다.

[조금이라도 나의 내면을 표현했거나 나의 어떤 특성을 드러내는 그림들은 꽁꽁 숨겼으며, 꺼내기가 부끄러웠다. 이런 그림들이 우연히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면 발가벗겨진 여인처럼 숨이 턱 막히고 새빨갛게 달아올라 도망쳤다.] P.83



하지만 예술적 호기심이 많던 라이프 에펜디는 아버지의 기대 보다는 베를린의 미술관에 그림을 관람하는 걸 즐겼다. 그러던 어느날 그를 강렬하게 끄는 그림 한점을 발견한다. 그 그림은 모피 코트를 입은 어떤 여인의 초상화였다.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 그는 그 초상화 앞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 강렬함은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느낌이었다.


이후 그는 매일 전시회를 가서 그림을 바라본다. 매일 가서 그런지 이제 전시회에 나오는 화가들은 라이프 에펜디를 알아본다. 도대체 어느정도 이길래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걸까?

["그래요, 내가 찾으려는 걸 끝내 못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요?"] P.93



꿈인 걸까? 어느날 거리에서 마주오는 여성에게 눈길이 멈췄다. 그 여성은 그가 그토록 동경하던 그림속의 여인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 였던 것이다. 그는 그 짧은 순간 그녀의 미소를 보게 된다. 그녀는 나를 아는걸까? 아니면 나의 착각인가? 그렇게 첫 만남은 찰나에 끝나버린다.

[어릴 때부터 내게 찾아든 행복을 낭비하는 게 두려웠고, 나중을 위해 행복을 아껴두고 싶어했다. 그래서 기회를 놓친적도 많았다. 하지만 너무 많은 걸 탐내고 욕심부리면 그나마 찾아온 행운도 겁먹고 도망치지 않을까 싶어 항상 망설이곤 했다.] P.127



하지만 그녀를 이대로 보낼 수 없었던 그는 그녀를 마주쳤던 그 곳으로 간다. 그리고 또한번 거짓말처럼 그녀를 본다. 그리고 그녀가 술집으로 들어간걸 알게 된다. 술집? 그는 따라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노래를 부르는 그녀를 본다. 노래가 끝난 후 그녀는 나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나에게 인사를 한다. 나를 알고 있었던 거다. 착각이 아니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난 이런 사람이에요! 이상한 여자예요. 나와 친구로 지낼 거라면 여러 가지에 익숙해져야 할 거예요. 변덕이 심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을 할 때도 있어요…. 미리 일러두는데, 친구들은 그래, 나 때문에 불안하고 짜증난다고요."] P.141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그런데 그녀는 그와 만나자마자 그에게 친구로 지내자고 선을 긋고, 나에게 뭔가를 바라는 순간 모든게 끝날거라고, 어떤것도 요구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라이프 에펜디에겐 그녀의 요구는 중요한게 아니었다. 그는 그녀와 이렇게 가까워진 것 만으로도 꿈속을 걷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존재조차 몰랐던 사람을 어느 날 갑자기 갈망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항상 이렇지 않은가? 사람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필요했다는 걸 알게된다. 나 역시 그때까지 내 삶이 공허하고 아무 쓸모없어 보이던 이유가 바로 그녀가 내 삶에 들어오지 않았었기 때문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P.151



두 사람은 이후 자주 만났고 점점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마리아가 더 가까워 지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거기까지였다. 그래도 라이프 에펜디는 좋았다. 어떻게든 헤어지지 않는게, 그녀와 함께 있는게 그의 목표었으니까...그런데 이 울적한 기분은 왜그런걸까?

[현기증이 났다. 그녀에 대해 마지막 판단을 내리는 일은 결코 없으면 좋겠고, 내가 어떤 판단을 내리든 정확하지 않을 거라고 직감했다. 오직 한 가지 욕심뿐이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녀 가까이에 있는 것, 그녀와 헤어지지 않는 것…. 다른 건 상관없었다…. 난 어느 누구에게도 그가 주려는 것보다 더 많은 걸 달라고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 것에는 익숙하지 않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울적했다.] P.175



하지만 결국 마리아 역시 상처받기 싫어서, 사람을 믿을수 없어서 그랬던 것일 뿐, 결국 라이프 에펜디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밤을 보낸다. 그리고 둘의 사랑은 깊어만 간다. 라이프 에펜디는 혹시나 그 하룻밤이 지나면 이 사랑의 환상이 깨질까봐 두려워 했지만, 실제로 그럴 위기도 겪지만 두 사라의 사이는 깨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애뜻해진다.

["내가 기대하는 사랑은 완전히 다른 거야. 모든 논리 밖에 있어서 설명할 수 없고 본질을 알 수 없는 것이지.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과 그 사람을 온 영혼과 몸으로, 모든 것을 바쳐 원하는 건 다른 거잖아? 사랑은 온 영혼과 온 몸으로 모든 걸 다 바쳐 강렬히 원하는 거야. 저항할수없는 욕망!"] P.191



그런데 새로운 상황이 전개된다. 라이프 에펜디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고, 그는 어쩔수 없이터키로 떠나야만 했다. 두 사람은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사랑을 유지하기로, 그리고 다시 재회하기로 약속한다. 처음에는 편지를 주고 받는다. 하지만 서서히 그 횟수가 줄어들더니 어느순간 연락이 끊긴다. 그녀는 나를 잊은걸까? 멀리있는 사랑은 그렇게 유지되는게 어려웠던걸까?

[어떤 여자가 모든 것을 줬다고 여기는 순간 사실은 아무것도 주지 않았음을 깨닫는 것,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까마득하게 멀리 있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건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다.] P.219



모든걸 걸었던, 모든것 이었던 사랑이 끝난 후 그는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냥 그렇게 살면서 그냥 그렇게 결혼하고 평범하게 산다. 그러면서도 왜 헤어질 수 밖에 없었는지 후회와 후회를 한다. 그렇게 10년이 흐른다. 그리고 다소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녀와의 추억이 담긴 이 노트를 쓰게 된다. '모피를 입은 마돈나'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나의 시간은 마리아 푸데르와 만나기 전으로 되돌아갔다. 그때처럼 공허하고 무의미한 나날이 되풀이됐다. 하나 다른 점은 여기에 지독한 고통이 덧씌워졌다는 것뿐이다. 과거의 내가 삶이 별거 아니라는 무지에 갇혀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다르게 사는 길도 있다는 걸 알게 되어 고통에 사로잡힌 것, 이것이 달라진 점이었다. 나는 더 이상 세상과 교감할 수 없었다. 이제 세상 어떤 기쁨도 나의 것이 될 수 없었다.] P.266







쓰다보니 줄거리가 너무 길어졌다.... 어떻게 보면 뻔하고 흔한 이야기 일 수도 있지만 특별하게 읽혔다. 이는 아마 '사바하틴 알리'의 필력 때문일 것이다. 사랑을 느끼고 한걸음씩 다가가는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섬세하게 쓸 수 있는 작가가 과연 얼마나 될까? 인간의 외로움과 오해, 그리고 체념을 이토록 공감있게 써내려간 작품이 얼마나 있을까?

[세속적인 행복이든 물질적인 재산이든,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고통은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 하지만 놓쳐버린 기회들은 뇌리에서 절대 떠나지 않고 불쑥불쑥 떠올라 쓰라리게 마음을 헤집는다. 어쩌면 우리가 놓지 못하는 건 떠나간 기회가 아니라 '이렇게 되지 않을 수 있었는데!'라고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대는 미련일 것이다.] P.273




라심의 이야기는 실패했다고 여겨지는 사람이라도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연민에 대한 것이었다면, 라이프 에펜디의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사랑과 그 후에 찾아오는 회한에 대한 것이었다. 분명 후자의 이야기가 이 책의 핵심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두 이야기 모두 좋았다. 두 이야기 모두 내 경험담 처럼 느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시작은 순간에서 비롯되지만 사랑의 끝은 오해에서 끝나는게 대부분일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의 모든 환경과 생각을 알 수 있다면 사랑이란 안끝날수도 있는걸까? 잘 모르겠다. 답은 없다. 그래서 시대가 아무리 흐르더라도 어떤 곳에서라도 이런 사랑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 것 같다. 답을 알고 있는 뻔한 이야기를 이렇게 계속 쓸 필요는 없을 테니까.


Ps. 올해 내가 읽은 최고의 책 중 하나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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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2-09-19 18: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오 새파랑님 올해의 책이 될 거라니! 줄거리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잘 기억해둬야겠습니다^^

새파랑 2022-09-19 20:04   좋아요 4 | URL
책이 그냥 술술 읽힙니다. 독서괭님이 읽으시기에는 좀 뻔한(?)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데 저는 이런 뻔하면서도 특별하게 다가오는 책이 좋더라구요 ^^

mini74 2022-09-19 18: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새파랑님 리뷰도 넘 멋지고 거기다 올해 최고의 책 중 하나일거라니 ㅎㅎㅎ 읽으시오 하시는거 맞지요 ㅎㅎ 저 새파랑님따라 마틴책 사서 읽고있습니다 ㅎㅎ 새파랑님 필력도 👍특히 사랑의 시작은 ~ 이 문단 넘 좋습니다 *^^*

새파랑 2022-09-19 20:09   좋아요 2 | URL
저에겐 ‘최고‘가 꼭 하나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어서...😅
요책도 좋은데 마틴 에덴도 만만치 않습니다 ㅋ 마틴 에덴도 나름 충격적이었습니다~!!
제가 사랑이야기를 좋아해서 ^^

건수하 2022-09-19 18: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내용을 자세히 쓰는 걸 좀 꺼리는 편인데 (귀찮아서-라는 이유도 약간 있습니다 ㅎㅎ)
새파랑님의 리뷰를 보면 어떤 책에 관심을 갖게하고 싶다면 좀더 자세히 쓰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궁금하고 읽어보고 싶네요 ^^

새파랑 2022-09-19 20:11   좋아요 3 | URL
저렇게 자세히(?) 썼지만 중요한 결말 부분은 안썼습니다 ㅋ 저도 줄거리보다는 감상을 많이 쓰고 싶은데 그게 더 어렵더라구요 😅 궁금하시다니 뿌듯합니다~!!

coolcat329 2022-09-19 19:0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에펜디의 이야기가 소설 속에 있는 액자소설이군요. 사랑 이야기랑 안 친하지만 저도 읽고 싶어 졌어요. 제목만 보고 좀 야한 소설일 거라 생각했는데 사랑의 마음을 섬세하게 그려낸 감성적인 작품이었군요. 찜합니다!

새파랑 2022-09-19 20:12   좋아요 3 | URL
야한 소설은 저 책 제목이랑 비슷한 <모피를 입은 비너스>라고 있습니다 ㅋ 극과극의 작품입니다 ㅎㅎ 전 작년에 읽고 별 세개 줬습니다 ㅋㅋ

페넬로페 2022-09-19 19: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바하틴 알리‘
터키 작가이군요.
아름다운 이야기이고 새파랑님께서 좋다고 하시니 저도 급관심 갑니다.
우리 인생을 돌아볼 때 누구나 아름다운 이야기 한 두편쯤은 있을것 같은데 그것들이 서로 비슷하면서도 특별한 것 같기도 하고요^^

새파랑 2022-09-19 20:14   좋아요 3 | URL
터키작가지만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해설을 보니까 터키에서는 이 책이 국민 소설이라고 하더라구요. 페넬로페님은 이 책 무조건 좋아하실거란 생각이 듭니다 ^^ 페넬로페님의 이야기가 궁금하네요~!!

미미 2022-09-19 19: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말씀 넘 좋은데요?!! 이렇게 소설 한 편을 읽으면서도
세대를 관통하는 질문에 닿는 새파랑님의 진지함이
소설 천재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ㅎㅎ
저도 꼭 읽어볼래요!!*^^*

새파랑 2022-09-19 20:16   좋아요 2 | URL
소설천재는...미미님 아니신가요? ^^ 저는 그냥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일반독자입니다 ㅋ 마지막 문장은 다시보니 뭔가 어색하고 리뷰랑도 안맞는 문장 같아요 😅

레삭매냐 2022-09-19 19: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기록을 뒤져 보니 3년 전에
읽은 책인데 기억이...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지네요.

새파랑 2022-09-19 20:18   좋아요 3 | URL
역시 레삭매냐님은 벌써 읽으셨군요~!! 다시 한번 읽으셔도 좋을거라 생각합니다 ㅋ 책 제목이랑 표지가 좀 달랐다면(?) 어땠을까란 생각이 드네요. 그럼 더 인기가 많았을텐데 ㅎㅎ

잠자냥 2022-09-19 21: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별 다섯을 줬던 작품입니다. 뻔한 이야기인데도 참 심금을 울리던… ㅎㅎ 새파랑 님도 별 다섯을 주시니 기분 좋네요.

새파랑 2022-09-19 22:12   좋아요 2 | URL
잠자냥님 별 다섯이면 확실히 좋은 작품이 맞네요~!! 뻔하지만 뻔하지 않게 느껴져서 너무 좋더라구요~!!

바람돌이 2022-09-19 21: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모든 이야기는 다 뻔하지 않을까요? 그 뻔함을 특별함으로 만드는게 바로 작가와 일반인을 가르는..... 관심없던 책도 읽어보고싶게 만드는 새파랑님도 특별한 분이에요. ^^

새파랑 2022-09-19 22:14   좋아요 2 | URL
간혹가다 정말 뻔하지 않은 이야기도 있긴 하더라구요 ㅋ 역시 작가는 다른게 맞습니다. 결말이 대락 예측됨에도 너무 좋았습니다~!!

다락방 2022-09-20 06: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올해 읽은 최고의 책중 하나라니. 저도 읽어봐애겠어요. 물론,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엣헴-

새파랑 2022-09-20 08:22   좋아요 1 | URL
이작가님 집은 혹시 서점이신가요? ^^ 없는 책은 없고 두권있는 책은 있는? ㅎㅎ

다락방 2022-09-20 11:19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레이스 2022-09-20 23: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바하틴 알리 체크!
오랜만에 들어왔더니 자석에 철가루 붙듯이 책들이 붙어오는군요
ㅋㅋ

새파랑 2022-09-21 07:26   좋아요 1 | URL
북플 오랜만에 들어오면 정신없습니다 ㅋ 저도 그렇더라구요 ^^
 
태평양을 막는 제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7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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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2111

"이 땅에서 무언가를 자라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요…"


꿈은 컸다. 하지만 뒤늦게 불가능한 꿈인 걸 알았다. 하지만 중간에서 포기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내가 살아온 모든 걸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조그마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어떻게든 해봐야 한다. 혹시 가능할지도 모르니까,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지난 세월이 너무 안타까우니까.


뒤라스의 <태평양을 막는 제방>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이라고 믿는 어머니와, 이런 어머니의 믿음 때문에 갈팡질팡하는 쉬잔과 조제프의 젊은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식민지라는 달콤한 꿈을 이루기 위해 프랑스에서 캄보디아로 넘어온 아버지와 어머니는 캄보디아로 넘어오게 되고 이곳에서 오빠 조제프와 주인공인 쉬잔을 낳는다. 이주 초반에는 안정적이고 풍족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죽게 되고, 가족의 삶은 점점 힘들어진다. 어떻게든 가족을 먹여살려야 하는 어머니는 이일 저일을 다해서 돈을 모으고 식민지 은행 토지국으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땅을 산다. 어머니는 이 땅을 경작하여 많은 돈을 벌수 있을거라는 꿈을 꾼다.


하지만 토지국에서 판 땅은 매번 태평양 바닷물이 유입되어 경작이 불가능한 땅이라는게 밝혀진다. 어머니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방을 쌓으려는 계획을 세운다. 제방을 쌓아 바닷물을 막는다면 불모의 땅은 더이상 불모의 땅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태평양을 막는게 이성적으로 가능할까? 처음부터 막는게 가능했다면 토지국에서 어머니에게 땅을 그렇게 팔았을까?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막을 수있을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제방을 쌓는다. 하지만 모든 돈을 들여 쌓은 제방은 태평양에 쓸려 내려간다. 그리고 그 땅은 그렇게 불모지로 남는다.

[갑작스러운 광적인 희망으로 마침내 오랜 마비 상태에서 깨어난 평야의 농부 수백 명이 온힘을 쏟아부어 제방을 쌓았는데, 그 제방이 태평양 파도의 단순하고 가차 없는 공격으로 단 하룻밤 사이에, 마치 카드로쌓은 성처럼 그대로 무너져 버린 광경을 어느 누가 비탄과 분노 없이 떠올릴 수 있겠는가? 또 어느 누가 도대체 그런 어처구니없는 희망이 왜 생겨났는지 밝히기보다는 그냥 모든 것을, 그 평야를 지배해 온 비참한 가난부터 어머니의 발작까지 모든 것을 운명적인 그날 밤의 사건 하나로 설명하고 싶은, 천재지변이라는 간략한, 하지만 매력적인 설명으로 만족하고 싶은 유혹을 이겨낼 수 있겠는가?] P.28



이제 어머니에게 남은 돈은 없고, 은행으로부터 대출 역시 거부된다. 이러한 가난은 자식은 쉬잔과 조제프 에게도 영향을 준다. 매일매일을 힘겹게 살아간다. 식민지에서 살아가는 프랑스인이라는 우월감만 남아있을 뿐 그들에게 실질적으로 남아있는 건 없다.

[어머니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어머니는 늙었고, 너무 많은 불행을 겪었고, 웃을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웃음이 터지면 그 웃음은 어머니를 휘어잡아 위험할 정도로 흔들어 댔다. 어머니가 웃어도 그 웃음의 힘이 어머니에게서 나오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보고 있기 거북하고 어머니가 제정신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P.52



그러던 어느날 조씨라는 엄청나게 돈이 많은 부르주아가 등장한다. 그는 쉬잔에게 한눈에 반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물질적으로 엄청난 구애를 한다. 어머니는 조씨가 딸과 결혼한다면 엄청난 돈이 생길 것이고, 그래서 다시 제방을 쌓을 수 있을거라는 새로운 꿈을 꾼다. 어떻게든 딸에게 조씨가 청혼할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든다.

[조 씨와의 결혼은 그들이 평야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이 결혼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방조제방의 실패와 다름없는 또 한 번의 실패였다. 어머니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조제프가 결론을 맺었다. "절대 안 될거예요. 안 되는 편이 쉬잔한테도 낫고요." ] P.126



하지만 쉬잔은 조씨에 대해 어떠한 애정도 느끼지 않는다. 그녀 역시 조씨의 돈에 대해서는 욕심이 있으나, 어느정도 수준의 벽을 친다. 더이상 가까워지지 않도록 그를 밀어낸다. 오히려 조씨와 가까워 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오빠인 조제프의 눈치를 본다.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돈에 굴복하기 보다는 자존심을 선택하는 쉬잔과 조제프였고, 두 사람은 자신들의 불행을 야기하는 어머니의 욕심, 어머니의 죽음을 기다릴 뿐이었다.

["어머니의 불행은, 결국, 뿌리칠 수 없는 마법 같은 거야." 카르멘이 다시 말했다. "마법을 잊어버리듯이 어머니의 불행을 잊어야 해. 그러려면 어머니가 죽든지 아니면 네가 남자를 만나야 해."] P.205



과연 태평양을 막는 제방을 다시 쌓을 수 있을까???




워낙 <태평양을 막는 제방>에 대한 극찬도 많고, 리뷰도 많아서 그런지 책을 구매해 놓고도 쉽게 손이 안갔다. 그래서 뒤늦게 읽었는데,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일단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고, 인물과 상황에 대한 묘사가 구체적이어서 이해하기 쉬웠다. 몇달전에 읽은 뒤라스의 <죽음의 병>은 함축적이고 다 생략되어 있고 상당히 모호했는데 <태평양을 막는 제방>은 <죽음의 병>과는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비판이 기본 소재로 깔려 있지만, 그것보다는 불가능한 꿈을 버릴 수 없는 어머니와, 가난하더라도 비굴해지지 않고 자신들만의 신념을 지키려는 쉬잔과 조제프의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다. 가난이 인간을 절망케 하더라도 소중한 것을 버리게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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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9-13 11: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목 그대로 <태평양을 막는...> 제방은 무너지더라도, 쉬잔과 조제프가 신념을 지키며 산다 평해주시니 호감 급 상승입니다. 새파랑님의 멋진 리뷰를 시작으로, 화요일 독서 웜업 시작합니다^^

새파랑 2022-09-13 13:21   좋아요 1 | URL
리뷰를 쓰려다보니 갑자기 출근할 시간이 되어서 중간에 끈었습니다 ㅋ 화요일 독서 화이팅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미미 2022-09-13 12: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음...연인과 비슷한 구도도 조금 보이는것 같아요.*^^* 저도 읽어보고 어떤 면에서 새파랑님이 별 하나를 빼신건지 알아보고 싶네요ㅋㅋㅋ

새파랑 2022-09-13 13:22   좋아요 1 | URL
연인을 읽은지 좀되서 그런지 가물가물하지만 비슷한 느낌이면서도 다른느낌? 전 이책 보다는 연인이 더 좋더라구요~!!

mini74 2022-09-13 12: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헉 매몰비용의 법칙이 생각납니다 ~ 지난 비용과 세월을 자식들에게 전가할 순 없다는 생각도 들고 ~ 저도 새파랑님 글 읽고나니 궁금해집니다 ~

새파랑 2022-09-13 13:25   좋아요 2 | URL
매몰비용! 역시 해박하신 미니님~!! 어머니의 행위는 마지막 오기(?)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어떻게든 끝을 봐야 된다는? 그만큼 절박했겠죠? 자전적 내용이다보니 더 공감이 되었습니다~!!

페크pek0501 2022-09-13 13: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뒤라스의 <연인>을 읽기고 했고 내용이 산만하여 영화도 봤지요. 그 시대에 충격적인 소설이었을 것 같아요.
연인의 표지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새파랑 2022-09-13 13:54   좋아요 2 | URL
동일인물 표지인걸까요? ^^ 전 연인 표지가 더 좋더라구요~! 제가 영화는 안봤지만 책만 읽어도 좋더라구요 ㅋ

햇살과함께 2022-09-13 15:01   좋아요 3 | URL
연인 표지는 영화 주인공 제인 마치 포스터이고, 태평양은 뒤라스 젊은 시절 사진 이래요^^ 두 소설이 자전적 소설로 비슷한 내용이고 다만 연인은 어머니 사후에 쓴 소설이고, 태평양은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쓴 소설이라고 합니다~ 저도 태평양은 아직 못읽었네요~

새파랑 2022-09-14 09:56   좋아요 2 | URL
역시 배우의 포스(?)가 다르긴 다르군요~! 비슷하면서도 좀 다릅니다 많이 ㅋ

페넬로페 2022-09-14 14: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랑스인이 식민지 땅에 이주해도 거기에서 또 차별받는 모습을 보니 참 아이러니 했어요. 태평양에 나무로 제방을 쌓는다는 생각들과 그 무모함에 뒤라스 작가의 글 맛이 있더라고요^^

새파랑 2022-09-14 17:26   좋아요 1 | URL
뭔가 경험을 바탕으로해서 인지 엄청 리얼했습니다 ㅋ 인물들도 다 특이하고 읽는 재미가 있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