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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빌리 브란트 ㅣ Who 세계인물 9
Team.신화 지음, 경기초등사회과교육연구회 감수 / 다산어린이 / 2025년 1월
평점 :
who? 세계인물
16.빌리 브란트
🇩🇪 독일의 통일과 유럽의 평화를 이끈 총리
👦🏼 1913년 12월 18일,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이 독일 뤼베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없는 헤르베르트는 5살 때 외할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함께 살게 된다.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게 된 그는 사회주의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에서 발간하는 < 뤼베크 인민의 소식 >에 기사를 투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은 정식 기자로 채용되었으며, 그의 나이 고작 17세 였다.
글을 쓰면서 사회주의에 더 관심을 가지며, 정식 당원으로 입당한다.
1931년 10월, 헤르베르트는 사회민주당을 탈퇴하고 신문 기자직도 그만 두게 되어 학비 지원도 끊기게 된다.
🇳🇴 사회주의노동자당에 가입한 헤르베르트.
1933년 4월 2일 새벽, 헤르베르트는 작은 고깃배를 타고 독일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는 고작 스무 살이었다.
노르웨이 오슬로에 도착한 그는 빌리 브란트라는 가명을 쓰게 된다.
오슬로에서 당의 지원으로 대학교에 입학을 하고, 역사와 철학 강의를 들으며 지식을 쌓았다.
< 노동자 신문 >에 고정적으로 기사를 쓰게 되었으여, 유럽의 상황과 외교 정책, 노동 운동에 대해 많은 글을 썼고 훗날 여러 권의 책으로 출판된다.
🇩🇪 평화로운 유럽에 대한 빌리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 히틀러와 나치당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그것은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정부가 1936년에 열린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기 때문이다.
1937년 2월, 빌리는 당과 노르웨이의 여러 신문을 대표해 기자 자격으로 에스파냐로 떠났다.
그 곳에서 같은 사회주의자였던 마르크와 친구와 되고 서로에게 큰 힘이 되는 동료가 된다.
그러나 그의 신념이 흔들리는 사건이 발생하니, 마르크가 같은 민족인 소련군에 의해 납치된 것이다.
빌리는 슬픔을 뒤로한 채 에스파냐로 떠나게 된다.
🇵🇱 1939년 9월 1일, 나치 정권 아래에 있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 2차 세계 대전이 벌어졌다.
1940년 4월 9일, 약 900여 대의 독일 전투기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공격한다.
노르웨이 군인으로 위장한 빌리는 겨우 살아남게 되었으며, 다양한 방법으로 나치에 저항했다.
자신의 조국인 독일 나치에 대해 투쟁하고 있는 것이었다.
🇷🇺 1945년 4월 30일, 소련군이 독일군을 물리치고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을 점령했다.
은신처에 숨어 있던 히틀러는 자살했으며, 빌리는 스웨덴 여성과 결혼해 가정도 꾸리고 안정적이나 독일은 여전히 난국이다.
미국과 소련이 나눠 지배한다는 소식에 빌리는 정치계로 입문한다.
🇭🇺 1956년 10월 23일, 헝가리에서 소련의 무자비한 통치에 저항해 봉기가 일어났고 소련은 잔인하게 시민들을 진압했다.
서베를린 사람은 소련에게 동독을 돌려달라 시위를 하기
시작했고, 미국과 소련의 개입으로 큰 전쟁이 날 뻔한 것을 중재한 게 빌리였다.
🇩🇪 빌리의 이름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1957년 10월 3일 서베를린의 시장이 되었다.
시장으로 일을 잘 해낸 그는 1969년 10월 21일 독일 연방 공화국의 제4대 수상이 되었다.
동방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그는 폴란드 방문을 추진한다.
🇵🇱 폴란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에 의해 전 인구의 20퍼센트가 희생된 나라로, 당시 폴란드 사람들은 독일을 여전히 증오하고 있었다.
1970년 12월 7일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도착하고 그는 추모비 앞에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 빌리는 무릎을 꿇었다.
그의 진심된 행동에 전 세계 사람들은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 이후 빌리의 동방 정책은 큰 성과를 거두어 유럽에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71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몇 년 뒤 수상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가난한 개발 도상국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국제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고, 1979년 유럽 의회 의원으로 선출돼 유럽 통합을 위해 힘쓰기고 했다.
🎖️ 1989년 서독과 동독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다음해 하나의 나라도 통일이 되었다.
그는 진심 어린 사과의 힘이 얼마나 큰지 보여 준 사람으로, 조국을 위해 조국을 등졌던 세상 멋진 분으로 오늘날 많은 이에게 귀감되고 있다.
👧🏻 하을이의 한줄평
일본은 우리에게 사과도 안 했는 데, 독일은 폴란드에게 무릎 꿇은 사과가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