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를 안다는 사람들조차 생소하게 여겨지던 '휴거'라는 단어가 한때 국내에 유행처럼 퍼지던 시절이 있었다. 기억으로는 1992년이다. 선택받은 이들이 하늘로 솟아오를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곳곳에 모여 하늘의 간택을 기다리며 외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1999년과 2000년 사이 대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의 시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전 세계적으로 뜨거운 관심을 나타낸 적도 있다. 그리고 또 다시 잊혀질 만하던 '지구 최후의 날'은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증거들과 함께 구체적인 날짜까지 제시하며 다가오고 있다. 바로 1년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2012년 12월말 예정된 또 하나의 지구종말의 위기이다. 아니나다를까, 헐리우드 영화계는 이런 전반적인 분위기에 고무된 듯 연신 비슷한 주제의 스펙터클 액션무비들이 쏟아지고 있다. 종말의 위기라는 주제를 통해 헐리우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는것일까? 최근에 개봉중인 <월드 인베이젼>과 <베니싱>, 그리고 몇년전 개봉했던 <2012>를 지구종말론이라는 주제로 묶어 살펴보려고 한다. 1. 그들이 경고한 마지막 날이 온다! <2012> 거대한 산맥마저도 집어삼키는 어마어마한 해일의 위력. 영화가 개봉할 즘엔 너무 과장된 포스터가 아닌가 생각도 했지만 바로 한달여쯤 일본을 공포로 몰아넣은 대지진과 쓰나미의 충격을 지켜본 후 이 영화의 포스터가 새롭게 보여지게 된다. 마야의 달력, 그리고 증시분석프로그램 웹봇의 예측 등 보다 구체적인 예시들로 인해 또다시 새로운 종말의 시점으로 보기 시작한 2012년. 이미 앞선 두차례 종말론의 실패에 대해 회의감을 갖게된 나로서는 이 영화에 대해서마저도 그다지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보긴 어려웠다. 극장에서 디지털도 아닌 보통화질로 2시간가까이 지켜보면서 생각한 것은 요즘 헐리우드 영화는 스토리보다는 특수효과에만 심혈을 기울인다는 것과 제법 알려진 배우들이 왜 이런 영화에 굳이 출연을 했을까 하는 의문뿐. 그나마 존 쿠색과 대니 글로버는 그렇다치더라도 우디 해럴슨은 왜 이런 비중으로 나오는 걸까. 다만 무너지는 건물 사이를 뚫고 날아오르는 비행기 씬이며 거대한 현대판 노아의 방주 등의 특수효과는 나름 괜찮았었다는 정도로 생각한 영화. 하지만 근래 일본대지진 현장을 전하는 뉴스를 보고 나서는 정말 저런 영화의 장면이 그저 허무맹랑하게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2. 지금 전세계가 공격받고 있다. <월드 인베이젼> 지구의 위기는 곧 외계의 침공으로부터 비롯된다? 사실 종말론 주제와는 조금 벗어나 있는 영화이긴 하지만 천재지변이 아닌 다른 세계로부터의 공격이 곧 종말을 야기시킨다는 해석으로 보는건 어떨까? 이미 80년대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최근 리메이크되면서 다시금 주목받았던 <V>의 외계 침공 시나리오나 신드롬을 몰고온 <X-File>시리즈를 접하면서 외계와의 전쟁이라는 설정도 그리 낯설게 느껴지진 않는다. 게다가 몇달전 먼 은하계에서 외계 우주비행체 3대가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루머 또한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주는 요소였다. 다만 역시나 부실한 스토리로 인해 정신없이 공격하는 강력한 액션 이외엔 남는게 없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2012>보다도 더 허무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현빈도 울고갈 미해병대의 활약상이 놀랍게 펼쳐지지만 이미 우리 관객들은 이런 류의 헐리우드 영웅주의에 익숙하다못해 살짝 질린터라 뭔가 새로움이 없다면 냉정한 혹평을 피할 길이 없다. <인디펜던스 데이>가 나왔을 시점에나 상영되었다면 크게 성공하지 않았을까. 3. 이유도, 경고도 없이 세상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베니싱> 파괴된 세상속에 나 혼자만 살아남는다? 이런 스토리의 설정을 좋아한다.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장르인 미스터리 스릴러 형식으로 접근한 것도 흥미를 끈다. 비슷한 배경의 영화 <나는 전설이다 >만큼의 선택적인 결말까지도 기대되었다. 자칭 미래에서 왔다고 하는 러시아 소년이 머지않아 인류의 90% 이상이 사라질 것이라는 예언을 듣다보니 그럼 내가 그 10%의 생존자가 된다면 어떻게 버텨나갈까하는 자못 진지한 상상도 해보게 된다. 그러나, 섣불리 줄거리와 영화 흐름을 잘못 파악하고 예매했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는 터. 아쉽게도 이 영화 또한 기대만큼의 흡인력을 갖고 접근해주진 못한 채 최근 계속해서 알맹이 없이 그저 비주얼에만 치중하는 헐리우드 영화의 아쉬움을 답습할 뿐이다. 사실 주제만 엇비슷했을뿐 결국 또다른 모양새의 헐리우드 액션영화라는 것은 별반 차이가 없는 영화들이다. 게다가 영화적 완성도보다는 액션이나 볼거리 위주의 흥행성만을 고려해서 만드는 킬링타임 무비가 대부분이다. 어쩌면 헐리우드에서도 조지 루카스를 제외하면 지구종말이 다가온다는 루머가 중대한 사안이라 여기고 있지는 않는듯도 하다. 만약 조지 루카스가 제작 또는 감독했다면 어떠했을까? 자신의 출세작 스타워즈와는 차원이 다른 심오하면서도 진지한 SF영화로 거듭나지 않았을까? 물론 이 3편만 통해서 결론을 단정짓는 것도 무리이고, 영화는 영화일 뿐 영화가 사회이슈에 대한 해결책을 모두 제시해줄 수도 없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지구의 멸망이 온다고 해도 우리에게 주어진 또는 남겨진 시간들을 소중하게 보내야한다는 점이겠다.
어려움을 겪던 수천 명의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을 보살펴 준다는 사실을 깨닫고 비로소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버돗은 아이에게 빵 한 조각도 사 줄 수 없을 정도의 무능력하고 무가치한 인간이라는 패배 의식을 지닌 사람들의 고민을 함께 짊어지고자 했다.그해 크리스마스에는 버돗에게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그의 선물로부터 작은 축복 이상의 것을 받았다.-17쪽
편지는 내게 세상을 바라보는 넓은 시야를 제공했고 생활에서 느끼는 불편과 삶의 비참함의 차이를 비로소 깨닫게 했다. 소비를 억누르며 투덜거리는 소비자들의 불평과 밤마다 자식들을 굶겨야 하는 부모들의 통곡의 차이를 상기시켰다. -40,41쪽
넉넉한 사람들이 자선 단체에 수표를 보내는 것으로 그친 반면, 샘 스톤은 그 이상의 뭔가에 뛰어들었다. 그는 무엇보다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재정적인 지원도 필요하지만 영혼의 위로가 더 필요하다고 여겼고, 그래서 보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접근했을 것이다. -77쪽
샘 스톤의 인생이 그가 밝힌 것 이상으로 복잡하다는 암시는 일찍부터 있었다. 내 어머니는 막 어른이 될 무렵 샘의 성이 ‘핀켈스타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빛나는 돌’이라는 뜻이었다. 그녀는 그 성이 싫었다.‘스톤’보다 덜 미국적이기도 했고, 그 성으로 인해 우리 집안이 안 좋은 일가와 연결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외할아버지는 20대 초반에 이름을 ‘새뮤얼 J. 스톤’으로 바뀌었다. 그는 새 이름에 들어 있는 돌의 이미지와 힘을 좋아했다. 조각가가 되어 그 돌에 새리름과 새로운 인생을 새기고 싶었을 것이다. ‘새뮤얼 J. 스톤’은 문자 그대로 자수성가한 고위직에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그 후 핀켈스타인이란 성은 입에 올리지 않았고, 입 밖에 내도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93쪽
민나는 샘이 여인들의 부탁을 못 본 체하려 했다면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샘은 그러지 않았다. 그의 집안에는 강인하고 독립적인 여인들밖에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소홀한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고, 누이 셋 중 둘은 빈곤과 사투를 벌인 적이 있었다. 민나는 통렬한 사회의식을 가진 페미니스트였고, 샘에게 그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쇄도하는 편지를 다 일고 도와주어야 할 편지들을 뽑는 것을 거들면서 여성들의 편지를 추천했을 것이다. 그녀는 여성들이 당한 현실이 어떤지 정확히 알았다. -123쪽
좋은 집안 출신인 체하면서 으스대거나 근근이 먹고사는 사람들을 비하하는 말을 한 적도 없었다. 그는 종교나 인종, 성별을 막론하고 어렵게 사는 이들과 약점들을 공유했다. 그가 특권층에 끼었다면 그들이 그에게서 진솔함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지 샘이 그런 계층인 체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버돗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가명이긴 했지만 그 이름은 그가 진정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본래 모습이 되고 싶으면 먼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게 샘 스톤의 유일한 모순이었다. -141쪽
그는 젊은 시절을 국가과 아버지라는 두 독재자 휘하에서 보냈다. 어릴 때와 사춘기에는 끔찍한 결핍과 불의에 휩싸여 무기력했다. 마침내 남을 도울 위치가 되었다는 것은 그의 삶에서 큰 변화를 의미했다. 그가 갈구한 것은 바깥의 인정이 아니라, 그런 베풂이 주는 내적인 확인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가치에 대한 선언이었다. 또 다른 세상에 살지만 많은 것을 공유한 이들의 가치에 대한 선언이기도 했다. -147쪽
버돗은 1933년 크리스마스 주에 갑자기 등장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수십 년간 샘 스톤이라는 사람 안에서, 그 전에는 난민 샘 핀켈스타인 안에서 만들어졌다. 그는 동정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마음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어릴 때 가족들은 그에게 특별히 애정을 보인다거나 그를 돌봐 주지 않았다. 심지어 다리가 부러져도 가여워해 주지 않았다. -203쪽
샘 스톤이 가장 바라는 것은 귀화한 나라의 일부가 되는 일이었다. 미국은 법과 절차의 나라였다. 귀화 역시 분명한 절차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국가의 변덕에 따라 시민권이 주어지거나 박탈될 수 있는 곳 출신이었다. 대대로 같은 곳에 살았는데 어느 시점에 포고령이 내려지면 불법 거주자와 이방인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가짜 인생사를 만들기로 결심했는지는 확실하게 모른다. 위법 행위인 것은 분명하지만, 어릴 때의 불안감에 뿌리를 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1921년 샘 스톤은 의심하는 정부 관료를 설득해 여권을 발부 받았다. 당시 그것은 승리 같았다. 시민권 문제가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해결되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20년간 시민권 문제는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았다. 샘은 미국적인 삶의 모범 답안이었다. 착하고 사랑 많은 아버지이자 남편, 전역 군인, 가족의 든든한 부양자, 큰 존경을 받는 지역 사회의 구성원, 애국심 같은 사람. -227,228쪽
왠지 역사소설은 선뜻 손이 안가는데..
괜찮나요??
소설은 독고원이 일기를 다시 읽는 형식으로 흘러간다. 독고원은 그 일기들에 레즈비언으로 살아가는 스스로의 삶과 소수종파 기독교인 엄마, 이혼한 남자의 후처가 된 여동생 등의 소재를 겹쳐 나간다. 고씨는 “‘회색인’과 서유기‘를 젊은 시절 읽었을 때, 나는 독고준의 미래가 궁금했다”며 “이 소설은 독고준이 살 수도 있었을 한 삶의 스케치”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