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선 감당이 되지 않는 너무도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루실이지만 또한 그래서 매력적인 인물이다. 나로선 도저히 그렇게 살아 낼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래서 동경하게 되는 삶을 루실이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남자버전으로 조르바가 있듯이.그녀의 두 남자, 샤를과 앙투안 그녀는 둘 사이에서 재거나 계산하지 않는다. 그녀가 누구를 선택하든 납득하게 되는 놀라운 글에 감탄하게 된다. 너무 뻔하고 통속적이 될 수 밖에 없는 사랑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사강의 전작에서 보였던 장면들, 침대에서 꾸물거리기, 아침을 오렌지 한 조각으로 떼우기, 자동차 드라이브 씬들이 사강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이 익숙해 읽는 동안 팬심이 절로 든다. 프랑스 사교계를 엿보는 즐거움도 있었고 닳고 닳은 중년들의 시선들, 허세와 가식이 가득한 세계에 순수하고 열정 가득한 젋은 남녀의 사랑이 반짝이고 사그라드는 것이 너무 뻔한 진부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내겐 가슴절절하게 다가왔던 것은 루실과 앙투안의 순수함이었을까. 순수함 사랑의 열정 그런것들을 우리모두 욕망하고 동경하기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장 루실이 샤를과 결혼했다는 문장을 본 순간 난 소름이 끼쳤다. 세상에 없는 크고 넓은 아량과 지고지순한 루실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었던 샤를이 애초에 이런 결말을 생각하고 마침내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었기때문이다. 루실은 발목 잡혔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퇴각의 북소리에 무감해지는 루실과 앙투안의 모습이 내겐 너무 짠한 것이다.
뇌사와 연명치료, 장기기증에 대한 사회문제를 주제로 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이다. 전에 읽은 작가의 책과는 결이 다르지만 문제의식이나 당사자와 가족, 친지 각종 관계자와 대중들의 시선들을 다각도로 담고 있어 여러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게하고 아무리 미친 짓을 해도 그 사람의 심정에서 헤아려 볼 수 있게 써 있어 독자의 몰입과 공감을 끌어내는 솜씨가 아주 뛰어난 작가이다. 이 책을 통해 장기기증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새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라면서 나도 가족들에게 사후 기증에 대한 의사를 밝히고 서로의 의견을 묻는 시간을 가져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보통 책 날개에 저자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바탕으로 책을 읽게 되는데 이 책은 겉표지가 벗겨져 도서관 대출을 해서인지 저자에 대한 아무 정보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막연히 20세기 이전의 사람일 것이라 생각을 했다. 장인 뮈사르를 제외한 부분에선 전혀 시대에 대한 묘사가 없었음에도 고전이라는 느낌이 있었는데 다 읽은 후 작가를 찾고 출생년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생존해 계신 분이 아닌가. 역사학을 전공했다고 나오긴 하지만 이 책에 나온 단편들과 짧은 에세이에선 인간의 심리에 대한 통찰이 대단한 작가로 여겨졌다. <승부>에서 뭔가 있어보이는 정체를 모를 젊은이가 동네 체스 챔피언인 노인과 두는 체스 경기장면은 앞서 내가 막연히 파트리크 쥐스킨트라는 작가를 19세기쯤 활동하던 작가로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냉철하고 신선한 관점을 전달해 주는 멋진 고전을 쓴 천재적인 작가라고 생각하고 글을 읽었다가 진상을 안 후 느낀 부끄러움과도 다르지 않았다. 승부의 노인은 체스를 그 일이 있은 이후 접기까지 했으니… 나름 그 지역, 구역에선 내노라 할 만한 탄탄한 실력의 노인이 체스를 그만둔 연유가 무엇이었을까 궁금하다. <장인 뮈사르의 유언>은 구두장인 아들이었던 그가 금세공장인으로 성공하여 당시 유명했던 지식인들과의 교류하며 비록 정규교육과정을 밟은 지식인들과는 다르지만 그들과 어울림에 손색없는 사람으로 은퇴생활을 할 교외 저택에서 우연히 화단을 파다 발견한 돌조개에서 출발한 이 모든 이야기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죽음을 앞두고 유언이라 말하는 그가 발견한 세상의 비밀.. 그의 입장에선 그럴듯하고 당시 17~18세기 과학지식이 지금처럼 공교육으로 습득할 수 없었다면 믿고 맹신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법하다. 유럽의 식수에 석회 성분이 많다는 사실과 그가 앓았던 병과도 영 관련이 앖진 않았을 것 같고 그가 발견한 아마도 폐총(조개무지)은 인류가 삶의 터전으로 삼은 곳곳에 흔히 발견되는 유적이니 또 얼마나 그럴싸한 것인가 싶기도 했고 한 두번 폐총 유적을 실제 발견한 사실이 있다면 그 사실에 사로잡혀 흥분하면 또 비슷한 석회질의 토양과 암석은 다 폐총 유적지로 보이는 착각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싶으면서 그가 금세공일도 않고 이 일에만 골몰하여 관련 서적들을 섭렵하기까지 했으니 그 착각과 착란의 순간들은 순식간에 그의 머릿속에서 사실적인 이론들로 정립되기 쉬웠을까 싶은 것이다. 뮈사르의 사고의 단계들을 보며 남 일 같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내게도 이런 비약의 우를 범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짧은 에세이에서 아주 제대로 공감을 불러일으켜 주었다. 그렇게 읽고 수없이 읽었지만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 제대로 인용할 수도 없는 나의 독서는 대체 뭐가 문제인가라는 생각을 작가도 하고 있다는 것이 반가웠다. 그 덕에 표절에 휘말리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이 새벽에 졸리운 눈을 부비며 독서후기를 쓰는 나 자신도 그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망각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이 마음 이 심정 이 느낌을 남기고픈 것이다. 그렇게 망각하여 남은 것이 없는 것 같아도 먼 훗날 작은 조각이든 얼기설기 다른 것과 엮여져 면면히 영향을 주더라는 것을 알기에 오늘도 앞으로도 계속 독서를 하는 것이라고 작가도 나도 공감하는 것이다.
<깊이에의 강요>지금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언론 보도의 만행이 이 짧은 단편에서 너무나 똑같이 묘사되어 있다. 젊은 미모의 장래가 촉망되는 여성 예술가의 죽음이라는 질시와 안타까움, 복합적인 감정의 대중의 구미에 맞게 드라마틱하고 포르노그라픽하게 그 죽음을 전시하는 것이 동서고금을 불문한 그런 것이었나보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원인제공자였던 비평가는 과연 이 여성 예술가를 죽이려는 의도였을까? 첫 비평이 죽일 의도가 아닌 지극히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직업적 비평이었고 이 이 후 여성의 비극적 결말을 알게 되었을때 죄책감 같은 것이 없었을까… 왜냐하면 그녀의 피조물에서 깊이에의 강요 같은 것이 읽혔다고 고백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도치 않았으나 나의 언행이 결국 병주고 약주는 경우에 처한다면 나의 도의는 어떠해야하는 것일까… 이 단편에서와 같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도덕적 책임, 사죄 같은 것이 소용이 없어지더라도 사회에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양심고백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 여인의 죽음은 개인의 문제인가? 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거리가 있다. 애석하게도 이 경우 분명 개인의 문제도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고뇌를 함께 고민하거나 해결해 볼 생각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에 대한 인식도 필요하고 비평가의 태도는 분명 지탄 받아 마땅하다. 스스로 자신의 비평이 불러온 참사에 대해 고백하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일깨우고 스스로도 반성하는 삶을 살아 이해받도록 해야하지 않나 생각한다.
삼십오년째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하는 한탸는 힘들고 지저분하고 건강에도 해로울 것 같은 그의 일을 자신만의 즐거움과 만족을 곁들여 보람찬 하루 일로 만드는 사람이다. 맥주를 몇 리터씩 들이키며 매번 압축 꾸러미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한 책을 펼쳐 얹어 만들거나 화보나 그림으로 치장하는 것을 보며 극심한 업무환경에서 최상의 적응력을 발휘한 엄청난 직업인 정도로 생각을 하면서 보았는데 그는 폐지에 들어오는 책에 매료된 인간이었다. 35년간 전쟁과 사상이나 체제 변화로 버려지는 책들을 주워 모아 집안 가득 쌓아놓고 그 속에서 위태로운 잠을 잘 정도로 책을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뒤에 이 직업을 택한 이유라고도 말하는 것을 보고 그의 마지막은 어쩌면 정해진 길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에게도 은퇴 후 삶에 대한 설계가 있었으니 그걸 이루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사랑했던 만차는 두 차례 똥으로 불명예를 얻어 떠나 있다가 한탸가 자신의 일을 잃게 되어 방황할때 조각가의 뮤즈가 되어 천사의 형상처럼 보인다고 한 부분이 있다. 자신의 죽음을 암시한 것일까… 맨 마지막엔 그의 환상인지 실제인지 헷갈리던 터키색 치마의 집시여인의 이름을 부르며 끝을 맺고 있다. 사회노동당 청년들과 새로 도입될 대규모 폐지압축기가 그의 일터를 빼앗고 백지를 다루는 업무를 맞게된 한탸는 세상을 잃은 충격과도 같은 일이었던 것 같다. 업무 후에 집에 돌아와 책을 읽고 도서관도 가고 서점에도 가는 삶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는 한탸의 고지식함이 앞서 그의 행위들을 보면 이해 안 가는 바는 아니지만 그의 곁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가 좋아하던 외삼촌, 만차, 집시여인 그 누구와도 자신을 터 놓으며 대화하던 상대가 아니었던 것 같다. 철처히 고독한 자기만의 세상을 살다 시대의 흐름대로 종말을 맞이한 그의 세계에서 같이 마감을 한 것이다. 고독이란 내면을 풍요롭게 하여 어떤 악조건도 무시할 만큼 대단한 것일 수도 있지만 바깥 세상과 단절되어 이리 위험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을 통해 세상만사 철학과 진리를 통달했단 한탸는 새로운 세상의 이꼴저꼴 볼 필요도 없이 그런 자신의 종말이 가장 만족스런 것이라 판단한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