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모든 것의 시작 - 우리 시대에 인문교양은 왜 필요한가?
서경식.노마 필드.가토 슈이치 지음, 이목 옮김 / 노마드북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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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시절, 이름뿐인 지도교수와의 형식적인 면담에서 생전 처음인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리석게도 내가 전공과 무관할 뿐 아니라 앞으로의 밥벌이에 도움될 리가 없는 “교양”과목에 2학점이라는 학점과 시간을 낭비했기 때문이었다. 국내에 “교양교육 무용론”이 대두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었지만, 아무리 공대 교수라고 해도 그런 소리가 나올 줄이야...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그 교수와의 면담은 최악으로 끝났고, 나는 졸업 때까지 남은 2년간 그 교수의 과목은 하나도 듣지 않았다.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것이 교양이라고 생각하며 살았고, 전공에서 벗어나 숨 좀 돌리고 부족한 교양 좀 쌓으려고 교양과목 하나 수강한 것이 그런 취급을 당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교수의 강의가 취직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내가 인간답게 사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 공대생들은 기본적인 교양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수강을 삼가달라고, 첫 수업에서 경고 아닌 경고를 하던 교양과 교수님들의 말이 이래서 나오는 건가... 뒤늦게 곱씹게 만든 지도교수의 문제 발언은 지금도 불쾌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 책은 내 지도교수였던 사람의 시각에서 보자면. 택도 없는 소리를 늘어놓을 뿐이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남을 밟고 올라가는 것이 당연하고, 그러기 위해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고학력과 대기업으로의 취업 혹은 국가고시 패스를 발판으로 사회적 신분 상승을 꾀하는 일. 그것만 해결되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무심한 사회에서 ‘교양‘은 발붙일 곳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관념에 불과한 것 아니었나? 그런데 모든 것의 시작이라니, 제목부터 설득력이 없지 않은가.


 교양은 소위 밥 먹여주는 것도,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각박하고 살기 힘든 이 세상에서 풍부한 교양으로 먹고 살기 편한 사람은 아마 지극히 소수인 특권층에 불과할 것이다. 참된 의미의 교양이란, 자신을 자유로운 인간으로 키워내기 위하여 이루어지는 교육. 정신적인 면에서는 인간을 풍요롭게 해줄지라도 현실적인 힘은 지극히 미비한, 이 시대에는 그 의미를 상실한 듯 보이는 관념이다.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약화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저자들은 세계의 곳곳에서 광기어린 전쟁과 끔찍한 테러, 인종과 성별, 빈부를 비롯한 각종 차별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이 무자비한 시대의 원인을 교양의 쇠퇴로 본다. 자연과학의 진보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그리고 이것은 물질문명의 눈부신 번영을 이루었다. 정신과 물질이 균형을 이루어야 사람도, 사회도 제대로 중심을 잡고 바로 설 수 있는 법. 지나친 물질문명의 팽배는 정신의 가치를 약화시키고 말았다. 모든 것의 주체가 되어야 할 자유로운 인간조차 수단으로 기능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높이‘만을 중시하는 가운데 어떻게 정신의 가치가 인정받을 수 있겠는가. 물질만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인간은 급속도로 기계화, 야만화 되어가고, 자율성과 주체성을 잃어버린 이들의 세상은 끝도 없이 파멸로 나아갈 뿐이다. 그런데 당장의 효용을 입증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교양이 계속 쇠퇴하다 소멸되어버린다면, 세상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비인간적인 모습의 사회는 단기적으로 보면 번영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멸망만이 기다린다는 것을, 인류의 지나온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카토 슈이치 박사는 말한다. 교양의 재생이 필요한 이유는 개인이건 사회건 간에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 가장 중요하고 절실하기 때문이며, 교양이 없으면 아무런 목적도 없는 능률지상주의 사회로 전락하고 만다고. 이미 능률지상주의의 패단을 목도하고 있는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개인에게도, 사회에 있어서도 궁극적인 목적은 더 나은 사회,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에 있으며 그것을 위해 요구되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 개개인의 교양이다. 교양은 모든 것의 시작이자 토대가 되어야 한다.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던 제목의 의도를, 책을 완독한 이제는 알 수 있다. 나는 부디 세 명의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일깨우고자 한 취지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기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한명으로 감히 바란다. 

 

+)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이고,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해 새삼 고심케 만든 의미있는 시간을 주어 고맙게 여기고 있다. 지극히 당연하지만 현재로서 설득력을 얻기 어려운 주장에 대한 저자들의 견해는 그들 각각의 적절한 예시와 비유로 독자들에게 효과적인 전달을 가능케 했다.  다만 조금 아쉬운 것이, 저자가 세 사람이고, 처음부터 출판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글쓰기가 아니라서 그런지 부분적으로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저자가 앞서 논한 것에 이어서, 혹은 더해서 진행해나갈 때, 더 자연스럽고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다듬었더라면 가독성이 보다 높아지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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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2-13 14:04   좋아요 0 | URL


서경식선생을 좋아라 해서 이 책 읽었어요 반갑네요 ^^
 
사라진 이틀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 들녘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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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인 '한오치(半落ち) '는 경찰용어로 용의자가 범행의 일부에 대해서는 자백하지 않은, 미완의 자백을 말한다. 적절한 제목인 것은 분명하지만, 따로 설명이 없다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국내에서 '사라진 이틀'이라고 제목을 바꿔붙인 것은 탁월한 선택이다 싶다. 한오치라는 용어만큼이나 '사라진 이틀'은 이 소설의 핵심적인 부분을  나타내고 있으니까.

 온화한 성품의 모범적인 경찰 간부, 가지 경감이 아내를 목졸라 죽였다. 알츠하이머로 투병중이던 아내가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가는 자신에게 절망해 더이상은 싫다며, 죽여달라고 애원하자 가엾은 마음에 이를 거절하지 못한 것이다. 제 발로 찾아와 자수했고, 범행 동기와 과정 일체를 자백했다. 그런데, 그가 자수를 위해 온 날은 아내를 죽이고 이틀이 지난 시점. 그리고 그는 그 이틀간의 행적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않고, 침묵을 고수한다. 그 이틀간,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라진 이틀을 미스테리 소설이라고 놓기는 적절치 않아 보인다. 역자가 후기에 썼듯이, 미스테리 형식을 빌린 사회소설이라고 해야 적당할 것이다. 소설 전반적으로 사건과 사건의 해결보다 사건 이후와 관련자들 각각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소설이라는 장르의 작품들이 비교적 딱딱하고 건조한 것과 달리, 따뜻하고 인간적이다. 경찰과 검찰, 변호사, 기자 등으로 소속된 사회에서 겪을 수 밖에 없는 일들을 비롯해서 알츠하이머로 인해 고통받는 환자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까지, 시종일관 그들 각자의 입장에 공감할 수 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따뜻한 사회소설이라는 어색하게 느껴지는 조합처럼 이 책이 안겨주는 감동의 무게는 낯설고 묵직하다.

 가지 경감으로 인해, 누구를 혹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느냐는 질문에 마주하게된 등장인물들은 혼란스러워 하고, 가지경감의 답을 알고자 한다. 경찰 지도관 시키, 담당 검사 사세, 기자 나카오, 변호사 우에무라, 재판관 후지바야시, 그리고 교도소 담당관 고가. 대체 무슨 이유로 존경받는 경찰에서 졸지에 범죄자가 된 가지 경감이 아내를 죽이고 뒤따라 자살하려다 죽지 않은 것인가? 그가 자수 직전에 쓴 의미심장한 人間五十年의 의미는 무엇인지, 어째서 1년만 더 살고자 했는지, 자신을 지탱해 온 모든 것을 잃고도 죽을 수 없었던 그 가슴 아픈 이유는 책의 말미에 가서야 밝혀진다. 그리고 바라던 1년의 시간이 지난 후... 살고자 했던 그 이유는 없어졌지만, 자신이 세상에 남겨둔 하나의 끈으로 인해서 가지 경감은 다시금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그가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적어도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암시하면서.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은 사건이나 시건의 해결과정에 집중하지 않는다. 사건에 있어서도 사람이 중심이고, 사건 이후 관련자들의 이야기와 범인의 행적을 밝히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느 미스테리 소설로 생각하고 읽는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찬찬히 작가가 보여주는사회의 면면과 사람들의 아픔을 들여다본다면 슬프지만 사람이 있어서 아프지만은 않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쌀쌀해진 날씨에 잘 어울리는, 기대하지 않았던 아릿함이 가슴 한 켠에서 차오르는 걸 알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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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치는 강가에서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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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다 리쿠를 처음 만난 건, '밤의 피크닉'이었다. 나도 이런 추억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면서 등장인물들을 부러워했다. 이틀에 걸쳐 전학년이 완주하는 보행제라. 이거라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자랑스러운 학창시절의 기억으로 남을 수 있을텐데. 걷는 것을 좋아하는 습성때문에 더욱 그런지도 모르지만, 이런 행사가 있다면 다시 고등학생이, 수험생이 되어도 좋겠다 생각했다. 쓰잘데기 없이 매년 가서 사람 진이나 빼는 극기훈련이나 수학여행 말고 왜 이런 뜻깊은 행사를 기획하는 사람은 내 학창시절에 없었던 걸까 공연한 생각을 했을 정도였으니.

'삼월은 붉은 구렁을'은 '밤의 피크닉'으로 가졌던 호감을 조금 더 키웠다. 쏟아진다는 말에 걸맞을 정도로 작가의 책이 쉴 새 없이 출간되는 것은 거슬리고 마뜩찮았지만, 자국에서의 주목도에 비해서 국내 소개가 늦은 탓이려니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호의를 가질만큼 책이 마음에 들었다. 바깥 삼월도, 안의 삼월도. 대단한 이야기꾼을 또 하나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삼월 연작이라고 묶인 책들도, 작가의 다른 책들도 하나하나 읽어봐야지 싶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기까지였다. 온다 리쿠에 대한 호의가 가득했던 것은......

 삼월...에서 파생되어 나온 '흑과 다의 환상', (미즈노 리세 시리즈라고도 볼 수 있는)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와 '황혼녘 백합의 뼈'부터는 조금씩 마이너스 감정이 자라기 시작했다. 지극히 소녀스러운 감성의 순정만화 같구나 싶은 것이... 지극히 소녀스럽다는 것이 문제였다. 작가의 장점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고, 분명 그에 열광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전혀 소녀스럽지 않은 감성의 인간으로서는 심히 부담스럽고 거북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읽은 '네버랜드'에서는 마이너스 감정이 더 많이 자랐다. 10대 미소녀를 상당히 사랑하는 것 같은 작가가 이번에는 미소년으로 성별만 바꿨구나. 유서깊은 명문교의 오래된 기숙사라는, 만화스러운 배경부터 등장인물들은 죄다 우등생의 미소년. 그동안의 미소녀 예찬만으로는 부족한가? 왜 계속....하다가 절실하게 깨달았다. 이게 온다 리쿠 스타일이라는 걸. 그리고 '굽이치는 강가에서'는 그런 확신에 결정타를 날렸다...

 주요 등장인물은 총 여섯으로 10대 여자 넷, 남자 둘. 당연하게도 여자 넷 중에 셋은 모두가 인정하는 각기 다른 타입의 미소녀, 나머지 하나도 본인만 모르는 미소녀인 듯. 남자 역시 하나는 성별이 모호할 정도로 예쁜 미소년, 나머지 하나도 그런 타입은 아니지만 어쨌든 준수한 인물. 과거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어떻게든 관련있는 아이들이, 어른들은 모두 부재중인 여름방학 중의, 오래된 사연있는 집에서 합숙을 하며 일어나는 이야기. 핑계는 있지만, 모이게 된 것이 과거의 그 사건 때문이라는 건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알 수 있는 설정.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소녀층을 겨냥한 순정만화스러운지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 그리고 역시나 그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하나도 읽지 않았거나 작가 특유의 설정이나 구성을 좋아하는 독자가 읽는다면 매력적인 책일지도 모르지만, 접한 순서의 잘못일까? 그동안 읽은 전작들을 통해 느낀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과 설마 비슷한 설정을 언제까지 써먹으랴 하면서 조금은 믿고 있던, 한때는 아꼈던 작가에 대한 최종판단 보류 상태에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확신하는데, 앞으로 더 이상 아직 읽지 않은 온다 리쿠의 책을 집어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작가의 장기라고 해도 비슷한 설정을 매번 반복하면서 울궈먹는 것이 지겹고, 연작이나 시리즈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렇게 쌍둥이 같은 이야기들을 계속 읽고 싶지는 않다. 너무 다작을 하는 걸까? 아니면 자신이 선호하는 스타일이 너무나 확고한걸까? 아니, 그저 나와 작가의 궁합이 영 좋지 않은 탓인지도 모른다. '밤의 피크닉'과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읽고 느꼈던 감정은, 그녀의 다른 작품들에서는 느낄 수 없었으니까 오직 그 두 작품만 나와 상성이 맞았던 건지도.

 온다 리쿠의 책은 여전히 끊임없이 나오는 중이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이제 내 손을 떠난(?) 작가인지라 신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어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돈과 시간이 문제가 될 뿐, 세상에 재미있는 책과 멋진 작가는 넘쳐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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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0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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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엉뚱한 제목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작가를 찾아본 거였다. 혹시 전에 읽었던 책의 저자인가 싶어서. 모리미 토미히코라... 작가의 이전 작품 중에 읽은 것은 커녕, 아는 것도 전무했다. 부지기수로 쏟아지는 일본 소설들의 영향으로 그래도 꽤 많은 이름을 들어온 것 같은데 국내에서 아직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인가 싶어 흥미가 생겼다. 더군다나 이 독특한 제목, 구미가 당기지 않는가. 그저 그런 청춘연애물은 아닌 것 같은데... 일상적이고 소소한 것에서 이야기를 잘 풀어나가는 것이나 잔잔하고 담백한 서술이 좋아서 일본 소설을 좋아하지만, 종종 한없이 가볍기만 하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그래서 한동안, 미스테리 계열을 제외한 일본소설은 피해왔는데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났다.
 
 최대한 간단하게 내용을 간추리자면 ’변함없는 청춘의 테마 중 하나인 짝사랑, 그것도 소심한 남자의 짝사랑 이야기’ 라고 한방에 정리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묘한 매력은 그렇게 달랑 정리해버리기 미안하다. 기본적인 뼈대는 흔할지언정, 그것을 기반으로 다져나가는 이야기들이 색다르고 괴상한 탓이다. 소심한 짝사랑 남인 그가 좋아하는 그녀는, 눈치라고는 전혀 없지만 미워할 수 없는 경쾌함과 발랄함을 가진 4차원 아가씨이고, 책의 전반에 걸쳐 그와 그녀 주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 아가씨 못지 않게 기묘한 캐릭터뿐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소심남 그와는 달리, 그녀를 비롯한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외계인 같다. 게다가 안그래도 답이 없는 짝사랑에 괴로운 그에게는 어쩌면 시련만 찾아오는지... 그녀가 청춘의 밤을 즐기고, 잃어버렸던 소중한 옛 추억을 되찾고, 대학축제를 만끽하고, 사방의 지인들 병문안으로 하루하루 바쁜 동안에 여지없이 그녀곁을 뱅뱅 맴돌며 고생만 한다. 목에서 피가 날 정도로 "뭐, 어쩌다 지나가던 길이었어"를 반복하면서 그렇게 자주 ’우연히’ 마주치는데, 돌아오는 반응이라고는 늘 천진난만한 "아, 선배 또 만났네요!" 라니... 과연 그는 그녀에게 무사히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아름다운 한쌍의 바퀴벌레로 탄생할 수 있을까?

 표지 앞날개 부분을 보면, 작가의 특징이 ’매직 리얼리즘’ 기법으로 현실과 가상을 교묘하게 배열하는 독특한 세계관과 문체라고 되어있는데 과연, 이 책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와 그녀, 주변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는 전개되는 배경부터 시작해서 요소요소 지브리 애니에서나 가능할 법한 것들로 가득하다. (마시고 있는 동안 속에서부터 행복해지는, 뱃속이 꽃밭이 되어가는 기분이 드는 가짜 전기부랑이나 토토로에 나오는 고양이 버스를 연상시키는 이백씨의 3층전차, 축지법 고타츠라니... )그리고 그것은 한없이 가볍고, 진부하기만 할 수도 있었을 청춘연애물을 독특한 색채로 차별화하는데 성공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망상인지, 애써 구별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이렇게나 유쾌하고 기빌한 이야기인데,  만끽하면서 그저 기분좋게 즐기면 족하지 않겠는가. 밤은 짧으니 아가씨는 걸어야 하고, 우리는 그 뒤를 조용히 따르며 구경할 수 밖에.

  때때로 한권의 책은 예상치 못했던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이 책이 그렇다. 생소하기만 하던 모리미 토미히코라는 생소한 이름의 작가를 뚜렷하게 각인시키고, 그의 다른 작품들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를 불러 일으켰다. 앞으로 그의 행보를 주목해야겠다. 그가 펼치는 또다른 이야기들도 이렇게,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만큼 기발하고 사랑스러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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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말하지 못한 진실] 서평단 알림
티베트 말하지 못한 진실
폴 인그램 지음, 홍성녕 옮김 / 알마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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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서평단 선정 도서입니다)

 달라이 라마와 불교로 대표되는 유구한 문화의 나라, 순박한 미소와 맑은 미소의 사람들, 슬픈 역사를 가진 아름다운 땅... 부끄럽지만 그정도가 이제껏 알고 있는 티베트의 전부였다. 그래서 이 심상치 않은 제목의 두꺼운 책에 겁도 없이 덤벼들었다. 한줄씩 읽어내려가기가 버거웠고, 한장을 넘길 때마다 그냥 덮어버리고 싶었다. 유달리 사람들이 지루하고 재미없어 하는 책이라도 버겁지 않게 즐기면서 읽어낼 수 있지만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하고 잔인한 현실 앞에서 비겁하게도 도망치고만 싶었다. 나치가, 일제가 저질렀던 만행이라도 이보다 끔찍할 수 있을까... 엄연히 자행되었던, 그것도 몇십년간 그리 멀지 않은 땅에서 자행되었고 지금도 자행되고 있을 처절한 기록이 눈을, 마음을, 머리를 괴롭혔다. 이 책에 담긴 내용은 1989년까지. 그 이후로 근 20여년이 흘렀다. 나아진 면도 조금은 있을지 모르나, 과연 얼마나... 2008년 현재도 티베트는 여전히 중국의 강점하에 폭압을 견뎌내고 있다. 20년 전에도 절멸되기 직전이었던 그들의 빛나는 문화가 현재, 얼마나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까? 수십년에 걸친 비인간적인 처사와 박해로 수없이 죽어간, 그리고 죽어가고 있던 티베탄들은 얼마나 남아있을까? 감히 상상하기도 두렵다.

 중국의 비열한 일면을 모르지 않았다. 문화혁명이나 천안문 사태같이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공산주의 정권 아래 자행된 수많은 사건들에 대해서 속속들이 모를 지라도 문외한은 아니었다. 소수민족에 대한 박해도  마찬가지. 하지만 자신들의 나라에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은 평화롭고 자비로운 이들에게 어떻게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 일일이 거론할 수 조차 없는 비열하고 더러운 방법으로 티베트인들과 그들의 문화와 정신, 그들의 터전을 짓밟고 유린한 중국인들의 처사는 세계사에 그 유래가 없을 정도로 추악하다. 나치가 유대인들을 (비롯한 거슬리는 부류 모두를) 지구상에서 말살시키려 했듯이,  중국도 티베트인들을 멸족시키려 한다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니, 중국은 나치보다 더욱 악질적이다. 겉으로는 티베트인들을 비롯한 소수민족을 포용하여 대 중화인민공화국의 일원으로 끌어안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또한 그 위장을 뻔히 알면서도 묵인하고, 심지어 적극적으로 옹호와 지지를 표명한 나라들까지 존재하는 실정이니. 자국의 이익이란 이름 앞에서는 전 세계 모든 인류에게 기본적으로 보장된 인권조차 깡그리 무시하고 외면할 수 있는 인간들의 실체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고 수치스럽다. 그 기원을 따지고 올라가면 고대에 이르고, 합리적이기를 자부하는 서구에서는 17~8세기에 이미 확립된 천부인권 사상이 어째서 20세기 티베트인들(현재는 21세기가 시작된지도 10여년이 지났지만)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단 말인가.

 옮긴이가 후기에 거론하고 있듯이, (일부 의식이 깨어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국내에 티베트는 관광지로서 알려져 있는 게 보통이었을 것이다. 올해 들어서는 지난 8월에 베이징에서 열린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일어난 일련의 사태로 좀 다른 양상이지만. 그래서 1989년 개정판본으로나마, 그것도 10년 전에 국내에 들어온 이 책이 뒤늦게나마 출판될 수 있었으리라는 사정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이제라도 이런 책이 나온 것이,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라도 티베트의 현실과 중국의 비열한 폭정을 알게된 것은 분명 다행스러운 일. 하지만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시점에서 20여년이, 국내에 들어온 시점에서도 10년이 훌쩍 흘렀다. 우리는 최소한 그만큼의 세월을 티베트에 빚지고 살고 있는 셈. 이 책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모두 가능하면 모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끔찍하고 잔혹한 기록이다, 하지만 과거 우리 민족이 감내해야했던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많은 이들의 무관심과 무지, 비협조 속에 한 선량한 민족이 절멸될 위기에서 겪고 있는,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자행된 해외 열강의 가혹한 제국주의 식민지배를 직접 겪기도 했고, 질리도록 듣고 배워왔다. 바로 끔찍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것을 하루 빨리 종식시키기 위해서이다. 중국이 긴 세월 그래온 것처럼 결코 인정하지 않더라도, 중국의 대 티베트 지배는 20세기의 (혹은 21세기) 가장 악명높은 식민지배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지금, 적어도 그것부터 뼈저리게 인식해야하지 않을까? 그래야 이제부터라도 그동안의 기나긴 무지에 대한 빚을 조금씩이나마 갚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 이제야 국내에 출판될 수 있었던 현실을 고려하더라도, 1989년까지의 사실만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다는 것이 안타깝다. 지금은 2008년, 시간의 격차가 너무 크지 않은가... 물론 이 책을 통해서 더 깊이 있게 알고 싶어진 사람이라면 다른 경로를 통해서라도 갈증을 해갈할 테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20여년 전까지만 다룬 판본이라는 것을 알고 꽤나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내용을 파악하는데 무리가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시간에 쫓겨서 충분한 작업시간을 확보하지 못했는지 본문이 매끄럽지 않게 연결되는 부분이 종종 보인다. 그래서 별 3개...를 생각했다가 이제라도, 이렇게나마 지난날의 무지를 일깨워준 보고서의 꼼꼼함과 충실함에 1개를 추가해서 4개로 결정. 출간된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책에 가혹한 말인지도 모르지만 멀지 않은 시일내에 꼼꼼한 편집의, 최근 실정까지 업데이트 된 개정판을 만나볼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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