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강의
랜디 포시.제프리 재슬로 지음, 심은우 옮김 / 살림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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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하는 것을 위해 죽어라 노력해도 반드시 이룰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아주 어린 나이에 알았다. 그리고 그런 일을 몇번이나 겪으면서 '포기'와 자주 만났고, 어느 순간부터 더는 꿈을 꾸지 않았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주어지는 잔인한 결과는 어린 내가 감당하기 너무 힘겨웠고, 포기와 단념이라는 괴로움은 수없는 반복에도 닳아짐 없이 괴롭고 쓰디 썼다. 그 후 지금까지 꿈이라는 건 나와 무관한 남의 얘기일 뿐이었고, 어떤 것도 딱히 욕심내거나 바라지 않았다. 대충대충 건성으로 살지는 않았지만, 노력해도 안되는 일은 나의 일상에 불과하니 덤덤하게 넘겼고, 그 어떤 의미도 두지 않았다. 그래야 내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일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까. 무미건조할지라도 편안하고 안정적인 것이 꿈으로 인해 치뤄야 할 값비싼 대가보다 낫다고, 그렇게 자위하는데 익숙했다. 꿈이 없으면 어떤가, 열정이 없으면 어떤가. 이렇게 편안한데... 사람마다 각자에 어울리는 스타일이 있는 거라고, 적어도 나는 꿈을 꾸고 이루면서 살아가는 타입이 아니라고. 그렇게 확신해왔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 외면하려했지만 거듭 접하게 된 랜디 포시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한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지나온 세월동안 줄기차게 해온 어리석은 생각들, 그 시간들에 대한 반성의 값진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감사한다. 어쩌면 나는, 누구보다 꿈에 목마르고 굶주렸던가 보다. 꽤나 긴 세월 나름의 확고한 가치관으로 살아온 것이 무색하게도 그의 목소리는 나를 흔들어놓았다. 실패했을지언정 내가 기울인 노력은 그 자체로 빛나고 가치있는 것이구나...왜 좀 더 일찍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까, 꿈은 이루지 못해도 아름답다는 것을.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진부하지만 당연한 진리를 머리로는 수없이 되뇌이면서도, 정작은 부정하고 외면해왔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인정하고 직시할 수 있다. 꿈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정말 위대하고 의미있지만, 스스로가 기울인 노력과 시간에 결과를 떠나서 박수를 보내고 가치를 부여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걸. 그 어느 때보다 힘겨웠던 한해를 보내면서 깨달을 수 있어 다행이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분노와 체념의 시간을 거쳐서 자신의 삶과 주변을 정리하기만 해도 시간이 부족하고 모자랄텐데. 그 끝을 알 수 없는 제한된 시간을 이렇듯 값지고 의미있게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랜디 포시는 멋지게 보여줬다. 죽음을 앞두고도 한결같은 그의 열정과 성실하게 살아온 자이기에 가질 수 있는 여유가 담긴 마지막 강의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려고 했던 값진 가르침, 그리고 내가 느낀 이 생각과 감정들... 앞으로의 삶에서 늘 상기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감히 소망한다. 그리고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해준 그의 값진 선물에 감사한다.     

 이런 류의 책은 학을 떼고 기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걸 익히 알고 있다. (실은 나부터 그런 쪽이다) 게다가 떠들썩한 베스트셀러에, 작가는 아주 잘난 사람, 심지어 제목은 마지막 강의... 눈물콧물과 감동 쥐어짜내기의 불길함이 대놓고 느껴지지 않는가? 하지만 그런 기피할만한 요소를 넘치게 갖추었음에도 이 책을 읽은 것은 먼저 접한 강의 동영상의 영향이다. 누구나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하고 반응할 것 같은 죽음을 앞두고도 변함없는 그의 낙천성과 긍정적인 마음. 힘들고 괴로워도 아득바득 살아야 할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자세는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이 책을 두고 망설이고 있는 사람이라면, 부디 한번은 동영상과 더불어 접하길 바란다. 랜디의 메세지가 당신에게 끌어낼 생각은 어떤 것이든 의미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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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의 리더십 - 열린 대화로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미래형 문제해결법
아담 카헤인 지음, 류가미 옮김 / 에이지21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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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로 읽지 않는 책이 있다면, 그건 자기계발서이다. 별반 새로울 것 없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진부하고 뻔한 말들 혹은 절대 공감가지 않는 내용을 그것만이 진리인 양 강요해서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을 잘난 저자의 화려한 이력으로 말미암아 그럴 듯하게, 하지만 요란뻑적지근할 뿐 허접하기 그지없이 포장해서 기가 차는 사양과 과도한 마케팅을 무기로 황당한 판매량에 도달하는 지긋지긋한 경우를 다년간 수도 없이 목격했기 때문이다-_- 기본적으로 베스트셀러에 대한 냉정하고 싸늘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한 몫 단단히 하겠지만, 어쨌든 이런 이유로 인해 공짜로 들어오거나 선물받는다 해도 절대로 읽지 않고 패스한다. 다행스럽게도 지인 중에는 이런 겁 없는 사람이 없기도 하고, 세상에 얼마나 읽고 싶은 책들이 넘쳐나는데 죽도록 싫은 책을 굳이 읽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 책 역시, 그런 성향상 절대로 읽지 않았을 책이다. 어쩌다 보니 공짜로 수중에 들어오긴 했지만 일단 과하게 보이는 모양새(어째서 하드커버 양장본으로 만들어야 했을까?), 헐렁한 편집에도 개념없는 가격이 못마땅했고, 제목부터 대놓고 붙어있는 '리더십'이라는 단어에 또 그렇고 그런, 허접스러운 책이려니 했다. 그런데, 이런 모든 마이너스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어찌됐든 들어온 김에 한번은 읽어주자는 마음을 가지게 된 건 '리더십'이라는 거슬리는 단어 앞에 붙어있는 "통합"이란 두 글자였다. 일단 읽기 시작하면 어떻든 끝장을 보는 성격상 그 단어는 그저 낚시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다른 책을 읽어서 찝찝함 따위 없애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불안감과 달리, 낚시도 아니었고 아주, 아주 괜찮았다.

 무엇보다 책이 마음에 든 이유는, 뻔한 얘기를 설교조 혹은 강요라고 느껴지는 강압적이고 불쾌한 어조로 논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의 메시지 역시 많고 많은 이런 유의 책들에서 다루었던 것처럼 이미 우리가 알고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기가 힘든, 그런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바로 자신의 경험을 통해 보고 들은 것, 느낀 것들을 성공과 실패를 가리지 않고 적절히 활용해 독자로 하여금 거부감 없이 그의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아무리 당연한 얘기라 해도 뜬구름 잡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론으로만 무장한 채 블라블라 떠들어대면 설득력은 바닥으로 치닫고 만다. 거창한 문제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경험을 활용해서 대화를 풀어나가는 것은 언제나 효과적인 방법이다. 저자는 전문가답게, 자신의 경험을 참으로 적절하게 이용해서 효율적으로 말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게다가 충분히 잘나고 대단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글 전체에서 그 어떠한 '척'이나 자기 과시욕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는 겸손함 역시 이 책의 미덕이다. 대체 왜 그렇게 저 잘난 척을 못해서 안달 난 사람들이 넘쳐나는지 실생활에서만도 지긋지긋한데, 책에서까지 그런 사람을 마주하게 되면 극도의 정신적 피곤함과 인간에 대한 신물이 느껴진다. 그런데 저자는 조금도 그렇지 않다. 자신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열린 마음으로 말하고 들으며, 그것을 위한 훈련이 충실하게 되어있고, 끊임없이 그 능력을 갈고 닦으며, 희망적인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를 이 책을 읽으면서 만날 수 있다. 부디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저자가 자신의 위대한 능력을 사방에 두루 발휘할 수 있길 바란다.

 "통합"은 언제 어디서나 중요하고 의미 깊은 단어이지만, 지금의 우리네 현실에서 이보다 절실하고 가슴을 치는 단어가 또 없을 것 같다. 아무리 올해 세리에서 선정한 CEO 추천도서라 해도 대체 몇 명이나 되는, 소위 윗대가리들이 이 책을 읽었을 지를 생각하면 그저 쓴웃음만 나온다. 제발 좀 읽고, 조금이라도 느끼는 것이 있어서 바뀌는 점이 있으면 좋으련만. 누구보다 이 책을 읽어야 할 몇몇의 불쾌한 얼굴과 이름이 떠오른다. 그 인간들은 이런 책이 있는 것도 모르겠지만-_- 아니, 과연 책을 읽기는 하려나? 아, 이러지 말아야하는데…….

+) 곳곳에 인상적인 구절들이 있었지만 가장 마음에 든 구절은 저자에게는 조금 미안하게도, 옮긴이의 주 부분이다. 저자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이주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범한 사교적인 실수를 다룬 부분에 나오는데, 오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과 넬슨 만델라 등의 인물, 몇 편의 영화를 통해 아는 것이 전부였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본격적인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줄루족이 흔히 사용하는 인사말은 '사우 보나'이다. 이 말은 '나는 당신을 본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줄루족은 '사우 보나'라고 인사하면 '시크 호나'라고 대답한다. 시크 호나는 '나는 여기 있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인사를 나누는 순서가 의미심장하다. 네가 나를 보기 전에는 나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옮긴이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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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정의의 조건] 서평단 알림
정의와 정의의 조건 問 라이브러리 1
김우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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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먼저 생각의 나무에서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問 라이브러리'라는 이름으로 퀄리티는 보장되나 판매고는 극도로 암울할 듯한 읽을 거리를  출간하기로 한 용단에 박수를 보낸다. 시리즈의 첫 출간본으로 선택된 책들은, 쟁쟁한 저자들의 이름만 봐도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다. 이렇게나 유명세를 떨치는 이들을 첫번째 출간본의 필진으로 선택한 것은 용감한 기획에 힘을 실어주는 방책이겠지만, 과연 어떨지 싶다. 문고본으로 인문학 서적을 출간한다는 점에서는 박수를 보내고 싶지만서도, 두려울 정도로 쟁쟁한 저자들의 이름을 보면서 뒤를 이를 필진들에 대한 (쓰잘데기 없는) 걱정과 함께 이렇게 신경쓸 필요가 있었나 갸우뚱하게 만드는 책의 외양에는 의문이 남는다. 모쪼록 좋은 결과를 거두길. 

 얼토당토 않은 말이겠지만, 본문의 내용은 기대에 다소 못미치는 것이었다. 내 주제에 감히 저자의 식견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거나 글의 퀄리티가 떨어진다는 그런 생각을 해서가 아니다. 이 책이 출간된 시기를 고려했을 때 집필한 시점은 비교적 최근일 것이고, 그렇다면 좀 더 현실적인 소리를 담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의 성격상, 그리고 저자의 직업과 위치상, 우리 실정에 대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언급은 없더라도 <정의와 정의의 조건>이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을 달고 나왔으니만큼 보다 신랄함을 담고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나친 생각이었을까? 좀 더 날카롭고 뾰족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욕심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 고로 감히 기대에 못미친다는 표현을 쓰게 된 것이고. 본문을 통해 처음으로 접하게 된 복수심이나 분개심같은 부정적인 심리나 감정이 정의의 동력이 된다는 학설은 새롭고 신선했다. 비록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끌어내기 위해 필요한 이야기에 불과했지만. 본문에 담긴 내용이나 그것을 통해 저자가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얄쌍한 책의 분량만큼 명확히 전달된다. 물론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술술 읽히고, 읽는 재미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잠깐만 생각해봐도 정의라는 것이, 정의의 조건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얘기할 수 있는 거리는 아니지 않은가?) 확실히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가독성을 고려해서 쓰인 글이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다. 부담없는 분량과 달리 읽는 시간보다 읽은 후에 필요한 시간이 월등히 길게 요구되고, 그 누구도 쉽사리 답할 수 없을 많은 질문들을 만들기는 하지만 그것이 인문학 서적을 읽으면서 독자가 기대하고 바라는 (또는 저자가 의도한) 묘미이니까. 

다만 곳곳의 오타나 묘한 구성이 내용에의 몰입을 다소 방해하기도 하는데 서문을 보면, 본문은 인권재단에서 저자가 했던 강연을 수정 보완한 강연 원고( 이것이 <비평>에 실리고, 그것이 다시 이 시리즈 기획의 첫번째 결과물로 나오게 된 것)라고 되어 있다. 곳곳의 생뚱맞은 오타는 명백한 편집 과정중의 실수가 분명하다. 그런데 곳곳의 거슬리는 구성은 애초에 강연을 목적으로 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인지, 아니면 수정 보완을 거치는 중에 그런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것 역시 편집의 문제인지... 문고본이라고 부르기 미안할 정도로 힘을 준 장정만큼 편집에도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이런 오타나 이해에 해가 되는 구성은 바로잡을 수 있었을텐데. 1차 출간본 중에서 달랑 한권을 읽은 게 다인 상태에서 할 소리는 아니지만, 차후 출간본은 이런 '티' 없이 접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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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육에 이르는 병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시공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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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을 실감했다. 어떤 것이든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니까, 애초에 입소문이 좋다고 나 역시 좋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된다. 그런 기대가 없었는데도 영 개운치 않다. 충격적인 결말, 마지막 한 페이지로 모든 게 무너져 내린다는데... 이를 어쩌나. 미안하다, 안 속아서. 읽으면서 '설득력 없는 부분이 종종 보이지만 아무래도 범인 미노루가 ~가 아니고 ~ 것, 설마 그게 충격적인 결말이야?' 라고 예상한 게 그대로 맞았기 때문에 제대로 김이 새버렸다. 읽기 괴롭고, 혐오스러워서 그냥 책을 던져버리고 싶은 부분들을 그나마 결말에 대한 기대로 꾹 참고 견뎌왔는데 허탈한 기분이다. 서평이야 주관적이니 그렇다 치고, 과대광고는 믿으면 안된다는 절대진리를 다시 실감했다.

 범행이 워낙 악질적이고 끔찍한 것도 불쾌하게 만드는 데에 충분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소름끼치고 혐오스러운 건 등장인물 개개인이 드러내는 극심한 이기주의였다. 내 가족이 무고한 사람들을 끔찍하게 해치면서도 평온하게 살 수 있는, 정도가 심각한 미*놈이자 극악무도한 범죄자인데도, 내 가정만 풍지박산 나지 않게 지키면 장땡이란 말인가? (사실 지킬 수나 있나? 겉으로만 멀쩡하게 보일 뿐 이미 무너질대로 무너진 상태인데) 범인이야 정상 범주에서 100만광년은 벗어난 듯한 미*놈이니 아예 접어둔다고 해도, 마사코의 생각과 기이한 행각들은 정말 소름끼치고 역겨웠다. 가엾은 피해자와 그 유족들 역시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다. 적어도 양심을 가진 인간이라면, 그에 대한 죄스러움과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게 먼저 아닌가? 어떻게 이런 지경에서도 내가, 내 가정이 우선일 수 있을까? 게다가 애정이란 이름 아래 행한 행동이라도, 도를 지나친 자식에 대한 관심 역시 이 여자도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강하게 만들었다. 내 자식이라도 누군가의 자식이기 이전에 엄연히 독자적인 하나의 인격체이다. 매일같이 아들의 방안을 샅샅이 뒤지다 못해 쓰레기통까지 헤집는 이런 어머니라면, 애가 엇나가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무관심도 애를 망치지만, 도를 지나친 관심과 애정도 애를 망가뜨린다. 남편이 자식들에게, 아니 가정 자체에 아무리 무심하고 시큰둥해도 그렇지 어떻게... 남편이나 부인이나 부모 자격이 없는 사람이란 말이 적합한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되어서까지 언니 것이라면 뭐든 탐내고 빼앗았다가 막상 제 것이 되면 훌쩍 버리는 가오루의 이기심도 불쾌하긴 매한가지. 유아적인 잔인함이 성인이 된 이후까지 그대로 남아있는데, 왜 이런 성향이 나타나게 된 것인지는 소설에서 드러나지도 않는다. 비뚤어지더라도 언니쪽이 비뚤어지는 게 더 설득력 있는 상황인데, 제대로 다루지도 않을 그녀의 비틀림을 굳이 설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범인만으로도 뒤틀린 인간상은 충분한 것 같은데 그의 가족인 마사코는 설득력이 있어도, 가오루까지 이런 식으로 그릴 필요가 있었을까. 시대의 병리적 징후에 잠식된 가정을 발단으로 벌어진 끔찍한 비극을 다루려면, 범인과 그 가정에만 집중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인데. 도시코의 불행의 근원에 가오루의 비뚤어짐까지는 필요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편애와 잘 맞지 않는 남편과의 이혼으로 충분했을테니. 가오루의 이기심은 없어도 되는 과한 설정이라는 생각를 버릴 수가 없다.

 소설작품으로서 시대성이나 사회성과 긴장된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본격 작품으로서도 탁월하다고 아무리 작품 해설에서 칭송해도 미안하다, 그 역시 별로 공감 못하겠다. 범행이 극악으로 잔인하고 끔찍해서도, 등장인물들이 불쾌하고 거부감이 들어서도 아니다. 도를 약간 넘어서긴 했지만, (하드고어물은 보지 않음에도) 대충은 예상치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내용이 내용인지라 술술 읽힌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 소설로서의 재미는 있다. 극찬은 못해도 잘 쓰여졌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만 작가가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 넣었음이 분명한 설정들이 도를 넘어선 전개로 충분한 설득력을 얻지 못해서 억지스럽게 느껴진다. 너무 일을 크게 벌여서 수습을 못했구나 싶다고 할까. 좀 더 치밀하게 구성해서 설득력을 확보하거나 판을 적절히 벌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드하다는 걸 감수할 수 있다면, 읽어볼만은 하지만 강추를 날릴만큼은 아니다. 뒤늦게 확인한 무수한 호평들을 보니 이런 평을 올려도 될지 (나름 소심한지라) 걱정스럽긴 하지만, 이런 의견도 있다는 것이 아직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 아무리 동안에, 미남이어도 마흔 넘은 아저씨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일 리가 없다. 죽어라 의학적인 관리를 했다 해도 이 정도까지 나이를 속일 수가 없다. 그런데 작가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도 안되는 얘기는 집어넣었을까, 독자를 확실히 낚기 위해서? 낚이지 않은 나같은 독자는 그저 실소만 나온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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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 청소년문학 보물창고 17
한스 페터 리히터 지음, 배정희 옮김 / 보물창고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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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로 겪어야 했던 그들의 민족사에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쏟아지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지금과 달리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책들 가운데 관련 내용을 담은 것이라고는 ’안네의 일기’정도가 다였지만, 그 일기와 관련 자료들을 통해서 히틀러와 나치의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발상과 처사에 소름끼쳐 했던 기억이 난다. 그들에게 지지를 보낸 독일국민들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떻게 사람으로서 그런 무리에 지지와 동조를 보낼 수가 있을까, 생각하면서. 그런 생각들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주는 영화와 책들은 크면서 더욱 쉽게 접할 수 있었고,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세계의 각 분야에서 대단한 인재들을 끊임없이 배출하는 유대인들에게 일종의 경외심마저 얼마쯤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중학교 무렵, 팔레스타인에 대해 알기 전까지는... 그 이후, 더는 유대인에 대해 이전과 같은 호의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막대한 부와 힘을 바탕으로 그들은 더 이상 가련한 피해자가 아닌 잔인한 가해자가 되어버렸으니. 한참 전 전국을 강타했던 오래된 유행가 가사처럼, 세상은 요지경이다. 아니, 인간사가 요지경인 건가.

 히틀러와 나치의 극악무도한 학살은 어떤 말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그에 지지를 표한 당시의 독일국민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괴벨스의 지능적인 책략에 우매한 민중이 휩쓸렸을 뿐이라 해도 면죄부는 주어지지 않는다. 제 아무리 히틀러라 해도 민중의 지지가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일을 벌이지 못했으리라는 건 자명한 일. 유럽 타지역과 달리 역사적으로 당당히 제 목소리를 내며 살아보지 못했다는, 아니 언제나 변방의 들러리에 불과했던 것에 대한 국민적인 열등감과  피해의식이 그런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을 것이다. 딱히 유난스럽지는 않았을지라도 전 유럽에 걸쳐 반유대정서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도 부가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을테고. 안타깝지만 잔혹한 진실이다.

 아이러니 한 것은 그렇게 비인간적이고 끔찍한 경험을 가진 유대인들이 힘없고, 가련한 처지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히틀러와 나치가 자행했던 것과 다를 바 없어보이는 처사를 감행했다는 사실이다. 절대자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사상을 가진 ’특별한’ 그들로서는 애초에 자신들의 것이었던 약속된 땅을 되찾았을 뿐이니, 오랜 세월 그 땅을 터전으로 살아온 민족의 역사와 삶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일까?-_- 자국 내에서 유대인들의 입지를 줄여야 할 필요가 있었고, 무엇보다 돈이 필요했던 영국을 비롯한 선진국에 준 게 있으니 마땅히 받아야만 하는 대가인 것인가? 그렇다면 당사자임에도 황당하게 문제에서 배제된 채 쫓겨나버린 팔레스타인 민족과 그들의 삶은 누가, 어떻게 해결해준다는 것인가?  

 아이들부터 시작해서 전 세대가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주섬주섬 보고 들은 게 많아져버린 어른의 시각으로서는 예전처럼 순수하게, 프리드리히 가족의 아픔에만 가슴 아파할 수가 없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이 이야기와는 관계도 없는데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그들의 이야기에 가슴이 아프면서도 머리 속으로는 오만가지 잡생각들이 동시에 펼쳐진다. 올 상반기를 강타했던(?) 책도둑과 마찬가지로 이 책은 독일인의, 그것도 아이의 시점에서 그 시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독일인들의 죄책감과 속죄 의식이 반영되면서, 이런 책에서는 유대인들의 비극이 -실제로도 그랬지만- 더욱 극적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나치에 동조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가족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만 했던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동정심도 유발하고. 큰 관점에서 보자면, 유대인도 독일인도 모두 피해자이다. 그들 모두가 결코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괴롭지 않을 수 없으니까. 다만 유대인도, 독일인도 아닌 변방국가의 아는 게 부족한 사람의 생각으로서는... 2차 세계대전보다 현 시점과 훨씬 가까운 시대의 팔레스타인에서 자행된, 지금도 진행중인 비극은 문화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힘의 논리에 밀려 중심 화두가 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씁쓸하다. 돈에서 비롯된 힘으로 지배되는 세계에서 약자는 언제나 피해자일 수 밖에 없다. 주체할 수 없는 우울에 눌릴 걸 알면서도 굳이 읽은 게 어리석었는지도...... 

 

+) 요즘은 워낙에 관련 책도 많고, 인터넷 검색으로도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으니 아이에게 이 책을 읽게 한 부모님이라면, 잊지 않고 팔레스타인 분쟁과 그들의 비극적인 역사 또한 알려주셨으면 좋겠다. 유대인들의 비극은 반드시 주지해야하는 역사적 진실이지만 팔레스타인 문제 또한 다를 바 없다. 혼자서 그게 가능한 나이라면 스스로 찾아서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고. 한살이라도 어릴수록; 아니, 어릴 때부터 균형잡힌 시각에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라면서도, 성인이 되어서도  어떤 문제든 그렇게 바라볼 수 있고, 편협함을 떨쳐낼 수 있다. 슈퍼맘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괜한 오지랖인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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