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들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22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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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잎1기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에 대한 좋은 평들을 정말 많이 봐왔지만, 나는 그닥 즐기지 못했다. 단편보다 장편을 선호하는 나의 취향 탓이었다. 50명이 등장하는 대형 옴니버스 연작 소설이라니, 내게는 자꾸만 몰입하려다 끊기는 듯한 느낌이 여간 취향과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태고의 시간들』은 더하다. 자그마치 84개?!

‘태고’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84개의 짧은 이야기들이 같은 자리에 모여 하나의 거대한 서사를 완성시키는 소설이다. 가상의 공간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더불어 천사나 신화 등의 환상 문학적 요소를 더해 신비감을 조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1,2차 대전 시기를 시간적 배경으로 설정하여 역사적 사실감까지 놓치지 않는다.

1939년 여름, 신이 주위의 모든 곳에 있었기에 수상쩍고 예사롭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 처음에 신은 가능한 모든 것들을 창조했다. 하지만 실제로 신은 전혀 일어날 수 없거나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것들, 다시 말해 불가능한 것들의 신이었다. (194p)

쿠르트의 병사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쿠르트는 그들을 만류하지 않았다. 총을 쏜 건 그들이 아니었다. 낯선 나라에서 느끼는 공포와 고향을 향한 향수가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그들은 총을 쏘았다. (207p)

파베우는 자신이 길가의 한옆에 내던져진 돌멩이나 버려진 아이 같다고 느꼈다. 그는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이 거친 현재의 시간 속에서 바닥에 등을 대고 똑바로 누운 채 스스로가 매초 무(無)의 늪으로 가라앉고 있음을 생생히 감지했다. (314p)

하여 이 작품이 올가 토카르추크가 노벨상을 받을 수 있게 한 수작이라는 데에는 절대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장편을 좋아하는 내게는 조금 힘들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호흡이 긴 장편을 좋아한다면 쉽게 추천하지 못하겠지만, 짧은 이야기로 끊어 읽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꼭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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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3부작 - 그래픽노블
데이비드 마추켈리 외 그림, 황보석 외 옮김, 폴 오스터 원작, 폴 카라식 각색 / 미메시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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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작년에 『파리대왕 그래픽노블』을 정말 감명 깊게 읽은 후로, 나는 아무리 어려운 고전이라도 그래픽 노블로 읽으면 이야기를 쉽고도 깊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은 나의 그런 생각을 비웃는 듯했다. 지금까지 읽어온 탐정소설과는 아주 많이 다른 느낌일 것이라는 출판사 담당자님의 소개글을 읽고 호기심이 동해 받아든 이 책은, 탐정이 수사를 진행할수록 사건이 해결되기는 커녕 점점 더 미궁 속으로 깊이 빠져드는 듯한 기분에 내 머릿속도 점점 아득해져만 갔던 것이다…🤯


세 편의 중편 소설이 묶인 『뉴욕 3부작』을 두고 ‘카프카식 탐정 소설’이라 소개하는 문구가 종종 보이던데, 다 읽고 나니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너무도 잘 알 것 같다. 흔히들 카프카에 대해 ‘실존주의’, ‘포스트모던’, ‘부조리’ 등의 개념으로 알고 있을 텐데 이 작품 역시 그렇다. 사건이 벌어지고 탐정 역할을 하는 인물이 등장하여 그 사건을 파헤치고자 하는 서사가 펼쳐지지만, 그 끝은 사건의 종결이 아닌 미결, 미궁 그 자체였다. 이는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생과 죽음의 부조리, 삶의 예측 불가능성 등으로 설명하는 부조리와 비슷하지 않은가?


그래픽노블이었기에 다행이지 그냥 줄글로 되어있는 원작 ‘소설’을 읽었더라면, 나의 머리는 혼란과 혼돈으로 뒤덮여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래픽노블이 모든 ‘난해’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이번 독서를 통해 새롭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별로였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래픽노블로 읽었기에 완독할 수 있었고, 그 기이함과 묘한 우연성이 그림으로 구체화되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카프카를 비롯한 부조리 문학을 어려워했던 사람들은 분명 원작 『뉴욕 3부작』도 어렵다고 느낄 것이기에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뉴욕 3부작 그래픽노블』을 강력하게 권하는 바다. 폴 오스터가 만든 광기와 파국의 혼돈을 제대로 느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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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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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제목이 곧 정체를 말해주는 작품들이 있다. 『바움가트너』 역시 그런 책이다.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인 바움가트너는 소설 내내 아내 안나를 상실한 채, 그 상실의 그림자 안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처음엔 그저 중년 남성의 슬픔을 조용히 따라가는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내면은 단단하고도 연약하게 균열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이토록 단순하게 시작해서이토록 깊숙이 파고들  있다니. 나는 그 사실에 조금 놀랐다.


『바움가트너』는 큰 사건 없이 흘러간다. 오히려 그 고요함 속에서 바움가트너라는 인물의 고통이 더 생생하게 와닿는다. 그는 사랑을 잃었고, 그 사랑이 사라진 자리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다. 소설은 그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그리움과 회상, 그리고 마침내 인정으로 이어지는 감정의 흐름을 따라간다. 나는 이 흐름을 읽으며 무언가를 애써 붙잡으려다 놓치는 사람의 손끝을 자꾸 떠올렸다. 그는 잊으려 애쓰지 않는다. 오히려 잊지 않겠다는 태도로 그녀를 품는다. 그래서 그리움이 아름답고 또, 서글펐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삶과 죽음, 사랑과 상실 사이의 미세한 떨림을 건드린다. 바움가트너는 철학 교수로서 이론과 사유 속에서 살아온 사람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본능적인 감정 앞에서는 서툴고 무력하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바움가트너가 ‘감정’을 배워나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는 글을 읽고, 떠올리고, 기억하고, 그러다 눈물을 흘린다.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갈 수 있는 장면들에서 나는 자주 멈춰 섰다. 그 정지된 순간들이 마치 나의 고요한 상실들까지 되짚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이 소설이 폴 오스터의 유작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가 남긴 마지막 소설이 사랑을 잃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니. 어쩌면 그는 삶의 끝자락에서 인간에게 남는 것이 결국 사랑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죽음이 모든 걸 데려가 버린 듯 보여도, 사랑은 끝내 남는 것이라고.


책을 덮고 나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바움가트너』는 단순한 애도의 서사가 아니라, 사랑의 지속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그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독자인 내게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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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 미 모어 마마 네오픽션 ON시리즈 34
김준녕 지음 / 네오픽션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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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을 정말 인상깊게 읽고 내 머릿속에 깊이 각인해둔 김준녕 작가님의 신작 『텔 미 모어 마마』를 읽었다. 이 작품으로 아마 김준녕 작가님은 장르소설 계의 한 획을 긋는 분이 되시지 않을까 감히 짐작해본다. 400페이지가 무색하게 책장을 술술 넘기는 필력과 과학적 상상력이 가미된 신박한 소재, 그리고 뒷통수 시원하게 후려갈기는(?) 반전까지. 앞으로 출간될 작가님의 작품들에 큰 기대를 품게 한다.


『텔 미 모어 마마』는 정말 강력한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엄마를 죽였다.” 

소설의 주인공인 딸은 엄마를 미치도록 증오한다.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엄마는 딸을 가두고, 정신적 신체적 학대를 일삼기 때문이다. 주인공 딸은 엄마에게 벗어나려 혹은 복수하려 온갖 방법을 동원하지만, 엄마는 딸의 수를 다 알고 있는 듯 딸의 노력은 전부 수포로 돌아간다. 대체 어째서일까. 그러다 결국 딸은 엄마를 죽이는데 성공하지만, 이후의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생략한다.


지금 교생 실습도 나와있고, 이래저래 현생이 바쁜 관계로 틈틈이 짬날 때마다 책을 읽었지만, 여건만 된다면,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앉은 자리에서 한번에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정도로 이 작품은 훌륭한 가독성과 핍진성, 반전의 결말까지 장르소설의 삼박자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 처음에 엄마를 죽였다는 문장을 보고 정유정 작가의 『종의 기원』을 떠올렸는데, 조금 더 읽어보니 그 작품과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그 작품이 아들에게 문제가 있는 거라면 『텔 미 모어 마마』는 엄마에게 문제가 있달까…? 무튼 정말 재밌게 읽었다는 말밖에 못하겠으므로 꼭 읽어보길 바란다. 재밌는 한국 장르소설을 찾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선택지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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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문학과지성 시인선 442
나희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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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주의자』, 『시와 물질』 등의 시집으로 나에게 ‘믿고 읽는 시인’이라는 키워드가 붙은 나희덕 시인의 또다른 시집을 읽었다. 이전 두 시집과 비교하였을 때, 뭔가 전하고자 하는 사회적 메세지는 덜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점이 나희덕 시인의 매력이라 생각해서 조금 아쉬운 감상이 없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나희덕 시인 만의 시적 표현은 참 묵직하고도 아름다웠다. 어떤 시인이 그랬다. 시집 한 권 중에 한 문장이라도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다면 성공한 독서라고. 그렇다면 내게 나희덕 시인은 성공만을 안겨주는 시인일 터이다.



호모 파베르이기 전에

호모 루아, 입김을 가진 인간


라스코 동굴이 폐쇄된 것은

사람들이 내뿜은 입김 때문이었다고 해요

부드러운 입김 속에

얼마나 많은 미생물과 세균과 독소가 들어 있는지

거대한 석벽도 버텨낼 수 없었지요


오래전 모산 동굴에서 밤을 지낸 적이 있어요

우리는 하얀 입김을 피워 올리며

밤새 노래를 불렀지요

노래의 투명성을 믿던 시절이었어요

노래의 온기가

곰팡이를 피우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몸이 투명한 동굴옆새우들이

우리가 흘린 쌀뜨물에 죽었을지 모르겠어요


입김을 가진 자로서 입김으로 할 수 있는 일들

허공에 대한 예의 같은 것


얼어붙은 손을 녹일 수도

유리창의 성에를 흘러내리게 할 수도

후욱, 촛불을 끌 수도 있지만

목숨 하나 끄는 것도 입김으로 가능해요

참을 수 없는 악취

몇 마디 말로

영혼을 만신창이로 만들 수 있지요


분노가 고인 침으로

쥐 80마리를 죽일 수 있다니,

신의 입김으로 지어진 존재답게 힘이 세군요

그러니 날숨을 조심하세요

입김이 닿는 순간 부패는 시작되니까요


<호모 루아> 전문




그들은 더 이상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

연극이 끝났으므로


분장 인물을 자신보다 더 사랑한 사람들


다리 저는 여자, 순정한 매춘부,

사랑에 빠진 남자, 잔인한 살인청부업자,

교활한 상점 주인에서 천진한 소년에 이르기까지


누구라도 될 수 있고

비로소 아무도 아니게 될 수 있는 곳


무대에서는 널빤지와 걸레도 소품이 된다

그러나 무대 밖에서는

다시 널빤지와 걸레로 돌아가야 한다


연극보다 더 극적인 삶이 벌어지는 뒷골목에서

운명이 흘리고 간 빵가루를 주워 먹으며

때로는 우두커니 서 있는 그들

포충망 속의 나비처럼 파닥거리는 그들


모든 게 연극에 불과하다면

삶은 지퍼백처럼 얼마나 간편할 것인가

하지만 막이 언제 열리고 닫힐지

다음에 누가 등장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투명한 비닐 속에서

여전히 진지하게 대사를 읊조리는 등장인물들


그러나 그들의 말은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는다

연극 같은 삶이 끝났으므로


<등장인물들> 전문




그러나 그녀의 발은 알고 있다

삶은 도약이 아니라 회전이라는 것을

구멍을 만들며 도는 팽이처럼

결국 돌아오고 또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러나 그녀의 손은 알고 있다

삶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에 가깝다는 것을

가슴에 손을 얹고 몇 시간째 서 있으면

어떤 움직임이 문득 손끝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동작의 발견>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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