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통제와 맥주 한잔의 자유 - 치유와 자유의 경계에서 쓴 불온한 질병 서사
김도미 지음 / 동아시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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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통제와 맥주 한잔의 자유』는 저자가 실제로 혈액암의 일종인 백혈병을 앓은 경험담이 녹아든 책이다. 환자로서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주위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고 그것이 환자인 자신에게 어떤 기분으로 다가왔는지, 또 환자이기 때문에 무엇을 할 수 있었고 무엇을 할 수 없었는지를 상세하게 적어냈다. 직접 환자가 되어보지 않는 이상 절대 감각할 수 없는 지점들을 구체적이면서도 연민 없이 써서 부담스럽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친구와 만나는 대신 메신저나 화상통화로 이야기를 나누는 식으로 일상이 재배열된다. 생존을 중심으로 매일의 구성이 바뀐 만큼, 혼자 끌어안거나 함께 나누는 기쁨과 슬픔의 성질도 조금은 달라진다. 이 새로움마저 몽땅 재앙이라고 하기에는 삶이 그보다 깊다. (11p)

암 경험자에게도 그런 순간은 필요하다. 맥주 한 모금이 목구멍을 찌르르 넘어가는 순간, 퇴근 후 카우치에 앉아 맥주를 마시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회복을 뭉클하게 실감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큰 병에 걸린 적이 있다는 이유로 유해하다고 여겨지는 행위를 일절 못하도록 막는 것이 온당할까. (40p)

감염 위험 때문에 가사노동을 직접 하면 안 된다는 병원 위생 관리 교육 내용은 지킬 수 없었다. 24시간 상주하는 보호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나 또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버거웠지만 생활감이 필요했다. (97p)

지금 와서 보험이 있어 다행이냐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려울 것 같다. 보험금을 받는 과정은 꽤 까다롭고 대체로 모욕적이었다. (241p)

그러나 이 책은 그런 ‘투병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저자가 환자로서 직접 겪었던, 아니 겪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나라 사회 보장 제도의 허점들을 낱낱이 고발한다.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 만큼이나 의료 보험 제도가 잘 짜여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한국의 의료 보험은 꽤 체계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와 달랐다. 특히 ‘간병’ 등과 같은 일상적 돌봄에 대한 제도는 거의 공백에 가깝고, 제도적 지원을 받고자 하더라도 본인이 절대적 빈곤에 처해있음을 증명해야만 한다고 했다. 그 외에도 한국 사회의 돌봄 현실이 얼마나 열악한지를 이 책은 끊임없이 설파했고, 이에 나는 아픈 마음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환자 가족에게 매일 발생하는 가사와 육아를 지역사회 안에서 나누어 할 수 있었다면, 환자를 돌보는 일이 가족에게만 떠맡겨지지 않았더라면 사정은 달랐을 수 있다. 노인과 장애인에게만, 그마저도 세세한 의심과 증명을 거쳐야만 적용되는 돌봄 제도가 아픈 사람에게도 폭넓게 적용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136p)

공공재원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분배정의를 실현하고 국민건강보험의 재정을 크게 확대한다고 한들, 약가 자체가 인하되지 않는 이상 면역항암제 치료를 시도하고자 하는 모든 환자에게 제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176p)

전남편으로부터 양육비를 받지 못한 채 풀빵을 구워 팔며 어린 남매와 함께 시한부 인생을 살아냈던 고 최정미 씨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풀빵엄마>(2009)는 피 끓는 모정으로 사람들의 눈물을 쏙 빼놓았지만, 사실 이 다큐멘터리가 폭로한 건 암 경험자에게 더 가혹한, 사회안전망이 부끄러운 수준으로 취약한 한국 사회다. (309p)

책을 읽으면서 (아직은) 환자가 아닌 내가, 한 개인에 불과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되뇌었고, (아직도) 명쾌한 답을 내리지를 못해 무력한 마음에 씁쓸하기만 할 뿐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글을 읽고, 깊은 진심으로 공감하고, 이러한 목소리를 내는 분들에 동의와 응원의 목소리를 더하는 것이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싶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 환자가 아닐지언정 우리 모두는 ‘잠재적 환자’인 것은 분명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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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정용준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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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어둡고 우울하고 비참했던 정용준의 첫 소설집 『가나』와 아픔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시선과 손길이 느껴졌던 가장 최근의 단편집 『선릉산책』, 같은 작가가 쓴 것이 정말 맞을까 싶을 정도로 두 책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는, 출간 순서만 보더라도 두 작품의 딱 중간에 있는 정용준의 두번째 단편집인 만큼, 그 두 작품의 분위기를 적절하게 섞어놓은 듯했다. 『가나』에서 『선릉산책』으로 가는 그 과정 중간에 쓰인 듯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일단,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에 수록된 소설들은 대부분 『가나』의 분위기처럼 대체적으로 어둡고, 우울하고, 불안하다. 표제작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에서는 부부싸움 중에 화를 이기지 못하고 엄마를 죽인 아빠를 둔 아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친척 가정으로 입양이 되었고 이후 성인으로 자랐을 때 간호조무사가 되어 병원에서 근무하게 되는데, 그 병원에 환자로 그의 아버지가 나타나며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다. 「개들」이라는 작품의 배경은 개를 사육 및 도살하는 농장(도축장)이다. 그곳의 주인은 개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종업원 등의 인간들도 너무나 험하게 다룬다. 「이국의 소년」 역시 베트남전 참전으로 인한 후유증을 심하게 앓는 주인공과 군대에서 총기 자살 시도를 한 그의 아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좀처럼 쉽게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겠는 암울함이 작품들의 주(主)를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작품을 추천하는 이유는, 작품 전반을 뒤덮고 있는 비참 속에서도 한줄기의 희망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부」라는 단편은 나를 가장 힘들게 했으면서도 이 소설집 속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인데 이 작품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싶다. 「안부」는 군대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이다. 군부대 측에서는 자살 사건으로 빠르게 종결짓고 마무리했지만, 어머니는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여러 개의 구타 및 폭행의 흔적들이 아들의 몸에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자그마치 6년이 넘는 시간을 바쳐서 주인공은 투쟁한다. 여러 곳에 나가 시위를 하고 판사와 대통령 등에게 편지를 쓰는 등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한다. 사람들은 사건을 점차 잊어가고 주위에서도 이제 그만 아들을 보내주라고 주인공을 말리지만, 그녀는 절대 물러날 수 없었다.

곧 사람들은 다 잊을 거예요. 그것에 대해 서운해하거나 화내면 힘들어져요.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아들을 믿으세요. (182p)

이 작품이 내게 너무나도 깊이 와닿았던 것은, 단순히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비애(悲哀)만을 보여주는 것에만 그치지는 않았다는 데에 있다. 만약 어머니가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포기해버리고, 물러나버리면 나는 이 소설을 절대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좋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부」는 그렇지 않다. 「안부」의 주인공은 마지막까지 이렇게 말한다.

내게 더는 안부를 묻지 말기를. 나는 아직 괜찮다. (184p)

결국 그녀는 이겨내지 않을까. 아들의 원통함을 풀어내고서 힘겹지만 후련하게 아들을 보내줄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이렇게 말해주는 듯했다.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주인공의 의지와 함께 아주 약한 희망의 가능성을 암시해주는 것 같아서, 그래서 더더욱 이 소설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부」 뿐만 아니라 다른 소설들에서도 미약하게나마 한 줄기의 빛이 느껴진다. 앞서 언급한 「개들」의 결말도 주인공이 누구에게 이끌려 하게 되는 행동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큰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기며 끝을 맺는다. 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설명을 생략하도록 하겠다만, 작품 속에서 온갖 고생을 마다 않는 인물들이 이제는 자유를 맞을 수 있을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고는 말하고 싶다. 오랜만에 정용준 작가의 단편집을 읽었는데, 역시나 정용준 작가님은 내게 ‘실망을 주지 않는 믿고 읽는 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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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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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파티」

2022년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처음 접했던 작품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별 감흥 없이 읽고 넘겼던 것 같은데, 다시 읽으니 내가 그때 왜 그리 큰 감동이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적지 않은 등장인물들이 한 장소에서 계속 대화를 해대니, 빡-집중 하지 않으면 누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놓치기 쉽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번엔 독서모임을 준비하며 개-빡집중 하며 읽었고, 다행히 여러 생각할 지점들과 전에는 얻지 못한 울림을 얻을 수 있었다.

다시 읽으며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다름 아닌 ‘결말’이었다. ‘묘한 만족감’ 내지는 ‘승리감’(41p)을 느끼던 ‘오대표’라는 인물에게 주인공이 오묘하고도 적확한 복수를 한 것이 확 와닿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오대표가 ‘여왕벌’ 같은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 모임을 주최한 사람이자 자신의 언행에 다른 사람들이 (주인공처럼) 동조하지 않으면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는 인물,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에 보였던 주인공의 ‘사랑에 빠진 사람’(43p)을 연기한 것은 여왕벌의 날개를 꺾는 듯한 효과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기에 나는 얼마간의 통쾌함과 후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숲속 작은 집」

이 소설은 초반이 무척 흥미로웠다. 여행을 떠나 외진 숙소에서 머물고 있는 부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인데, 그들이 머물고 있는 방에 있는 물건들이 묘하게 위치가 달라지는 등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무언가를 훔쳐간 것이라면 차라리 이해라도 되겠는데, 없어진 물건은 없고 오히려 ‘왠지 의도한 것처럼’(62p) 느껴져 더욱 호기심이 자극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소 뻔한 이유로 밝혀진다.) 아무튼 앞선 「홈파티」와는 다르게 서사 진행 자체가 대단히 흥미롭고 재밌게 읽었던 작품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분명하게 느껴졌다. 일단 인물들에게 공감 내지는 감정이입을 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는데, 이들의 생각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던 것이다. 먼저 ‘메이드’라는 단어를 두고 두 부부가 약간의 언쟁을 벌이는 장면이 있는데, ‘직원’이라는 쉽고 친절한 단어를 왜 생각하지 못하고 싸우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작가가 의도하여 일부러 페미니즘적 주제의식을 넣으려고 한 걸까 싶은데,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부모님이 돈을 보내줘서 ‘고맙고 미안하다’고 한 문자를 보고 주인공은 뿌듯함이 아닌 ‘오랜 시간 상대가 내게 주었다 생각한 무언가를 도로 빼앗은 기분’을 느끼는데… 이 무슨 배은망덕인가??

「좋은 이웃」

가장 현실적으로 읽혔던 소설이다.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적인 민낯을 낱낱이 고발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달까? 신형철 평론가가 ‘나는 김애란이 오랫동안 사회학자였’다고 말한 이유를 납득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좋은 이웃」에서는 부동산 대란 사태를 맞은 일반 서민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소설 속 주인공은 현재 살고 있는 집을 계약할 때 대출을 낀 매매가 아닌 ‘전세’로 했고, 이를 지금에 와서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가’를 가진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넘어서는 열등감, 자격지심을 느끼기도 한다.

이 소설이 좋았던 점도 바로 이런 데에 있다. 현실의 민낯을 밝히는 것뿐만 아니라,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는 데에 있다. 쉽게 말해 어떤 인물의 선/악을 구분케 하지 않고 강점과 약점을 모두 묘사하여 이것을 주제의식으로 끌어낸다는 것이다. 작품의 제목이 ‘좋은 이웃’인 것도 바로 이 소설의 주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그 주제의식이 문학의 근본적 탐구 주제인 ‘연대’와도 이어지기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마음 깊이 공감하고 감탄하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정말 상실한 건 결국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고, 또 될지 몰랐던 우리 자신이었다는 뼈아픈 자각 때문이었다.(142p)

「이물감」

김애란 작가는 못 쓰는 게 뭘까? 「숲속 작은 집」의 도입부에서는 스릴러 소설만의 음산한 분위기를 구현해내더니 「이물감」에서는 찌질한 중년 남성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심리 묘사를 선보인다. 소설 속 주인공 ‘기태’는 자신의 주변 인물들에게 여러 가지의 찌질한 행보를 보인다. 전부인의 SNS 계정을 염탐한다던가, 전부인의 썸남으로 추정되는 훈훈한 남성이 운영하는 식당에 가서 음식을 냅다 남기고 오는 소심한 복수를 한다던가, 부하 직원들에게 쓴소리 격인 충고를 하다가 되려 역공당하고 후회한다던가 등등… 하지만 이런 주인공의 행동을 욕하기만 하기엔, 우리도 남몰래 어디선가 해봄직한, 아주 ‘현실적인 찌질함’이었다. 그래서 주인공을 보며 혀를 쯧쯧 차면서도 왠지 모르게 미운정이 간다.

그러나 만일 기태의 가슴에 어떤 그리움이 남았다면 그건 희주가 아니라 그녀와 함께한 시절들 때문이었다. (155p)

「레몬케이크」

솔직히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들 중 가장 아쉬웠던 작품이 바로 「레몬케이크」다. 개인적으로 취향에 맞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몇 가지 있는데,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날카로운가’ 아니었다. ‘마음에 와닿는 문장이 많았는가’ 아니었다. 딱 하나 있었다. ‘주인공이 매력적인 인물인가’ 이 또한 아니었다. 특색 없이 너무도 무난한 인물이었다. ‘해피엔딩이나 구원의 서사인가’ 절대 아니었다. 물론 이 소설이 절대 ‘혹평’을 남길 만한 안 좋은 작품이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내가 그리 느낀 바가 크지 않아서 할 말이 없을 뿐이다. 어차피 여러 편의 소설이 수록된 단편집에서 모든 소설이 좋은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런 소설 하나 쯤이야 눈감아줄 수 있다. (나 뭐 돼?)

「안녕이라 그랬어」

이 작품이 표제작이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번 단편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바로 「안녕이라 그랬어」였다. 씁쓸하고도 뭉클한 여운이 일품이었고, 소설 속 등장인물 모두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따뜻한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그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했던 이 소설의 주제의식 또한 내 마음에 와닿는 것이었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이 소설에는 세 명의 주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은미’와 그의 전남친 ‘헌수’, 그리고 은미의 화상영어 선생님 ‘로버트’까지. 앞서 언급했듯이 세 인물은 모두 성품이 따뜻한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은미와 헌수는 이미 이별하였고, 로버트와 은미의 수업도 결국 끝나게 된다. 어째서일까. 좋은 사람임에도, 그것을 알면서도 왜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이것이었다. 아무리 좋은 사람임을 알더라도 헤어져야 하는 때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때의 마음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헤어질 때, 헤어져야할 때 우리는 ‘안녕’이라 말할 것이다. ‘안녕’이라는 표현에는 단순한 인사말 의미 외에도, ‘아무 탈 없이 편안함’이라는 뜻도 있으니 말이다.

「빗방울처럼」

‘전세사기’라는 소재를 전면으로 끌어올린… 독자로서 읽는 내내 너무나도 마음이 무겁고 아팠던 소설이었다. 이번 단편집에 수록된 소설들 중에서 읽는 게 가장 힘들었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힘들었다’는 거지 ‘어려웠다’는 것이 아니다. 작가님의 문체가 전세사기 당한 인물들의 불행과 비참함을 예리하게 그려내어 마치 내가 전세사기를 당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다시 말해 과몰입이 되었기 때문에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작품이 별로였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절대 그건 아니다, 라고 단언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 소설의 결말, 즉 주제의식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빗방울처럼」은 낙숫물 사이에 들리던 ‘해, 할 수 있어, 그럼 끝나’(281p)라는 목소리가 ‘안 돼, 하지 마, (스포일러 방지 위해 생략)’(293p)으로 바뀌며 끝난다. 이는 결국 모든 걸 다 잃었다고 생각하고 삶을 끝내려는 주인공이 사실은 그 누구보다 절실하게 살려는 의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져 너무나도 뭉클했다. 그런 마무리가 아니었으면 나는 이 소설에 대해 좋은 평을 하지 않았을 것 같으나, 이런 여운을 주는 결말이라면… 그 무엇보다 두 팔 벌려 대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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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눈이 내리다
김보영 지음 / 래빗홀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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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동안 문학을 즐겨 읽어오면서, 그리고 같은 몇 년 동안 북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하며 끊임없이 독후감을 작성해오면서, 내게는 문학에 대한 두 가지 명제가 머릿속에 자리했다.

1) 나는 SF와 판타지 장르랑 잘 맞지 않는다.

2) 나는 단편 분량보다 장편 분량을 더 선호한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된 ’SF 단편’은 어떻겠는가. 당연하게도 나는 SF 단편집을 단 한번도 만족스럽게 읽은 적이 없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테드창이나 켄 리우의 소설집은 물론이거니와, 그 유명한 김초엽, 천선란의 단편집도 모두 중도 하차했다. 상상력이 부족한 편인 나로서는 완전히 비일상적인 SF(혹은 판타지)의 세계관에 몰입하는 데에 시간이 꽤 걸리는 편이고, 그런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는 단편 분량의 SF 소설들은 즐겁게 읽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내게, 올해 처음으로 별 다섯개를 준 소설이자, 난생 처음으로 별 다섯개를 준 SF 단편집이 생겼다. 바로 김보영 작가님의 『고래눈이 내리다』이다. 단편집의 특성상 수록된 모든 단편이 좋은 경우는 너무나도 극히 드물다. 일반적인 순수문학을 읽을 때에도 모든 단편이 좋았던 단편집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나는 건… 김병운 작가님의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정도?) 근데 『고래눈이 내리다』가 그 어려운 걸 해냈다. 그것도 SF 장르로 말이다.

수록된 아홉 편의 단편을 비좁은 이곳에다가 소개하기에는 너무나도 역부족일 것 같고, 그렇다고 해도 이 아홉 편의 훌륭한 소설들 중에서 어느 것 하나 제외하기도 너무나 힘들다. 보통 단편집의 리뷰를 쓸 때에는 좋았던 몇 편의 소설들에 대해서만 쓰게 되는 반면, 『고래눈이 내리다』는 ‘좋았다’는 감상이 기본으로 깔려있기에 ‘무엇이 더 좋았는가’를 따져야 해서 무척이나 힘든 것이다. 다만 수록된 모든 단편들을 관통하는 몇 개의 주제의식이 있다. 그건 바로 기후위기나 인간 존엄성 등과 같은 것이고, 그에 대한 저자의 사유가 너무나도 깊이 와닿았으므로 구구절절 공감해가며 읽을 수 있었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아홉 편의 소설 중 딱 하나만 골라보라면, 나는 「까마귀가 날아들다」를 꼽을 것이다. 작년 12월 3일 말도 안되는 일을 현실로 겪어서 그런지 소설 속 내용을 더더욱 절실히 통감했던 것 같다. 워낙 짧은 단편이기에 내용 소개는 하지 않겠지만, 작품 속의 한 문장 정도만 남기고 싶다. (제발…. 이 책 읽지 않은 사람 없게 해주세요…🙏)

“어…… 그렇구나. 너 죽을 결심을 했구나. 죽을 마음은 조금도 없으면서 말이지. 그렇지?” (17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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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소설, 향
김이설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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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남자와 이별하는 장면으로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은 시작된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아직 마음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왜 헤어지는 걸까. 둘의 대화를 보면 대강 짐작할 수 있는데, 남자는 “내 마음은 그대로예요.”라고 하는 반면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여자는 “내 상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라 한다. 즉, 두 사람이 이별하게 된 원인은 여자가 처한 ‘상황’ 때문인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상황이길래 사랑하는 연인을 갈라놓게 하는 것인가.

뒤로 이어지는 내용은 여자 주인공이 아닌 그녀의 여동생 이야기가 등장한다. 동생은 그녀의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고 두 아이와 함께 도망치듯 본가로 내려왔고, 그렇게 갑자기 스무 평 조금 넘는 집 안에 어른 넷과 아이 둘이 함께 살게 되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동생은 바깥일을 하며 육아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했지만 부모님은 이미 노쇠하신 몸이었고, 결국 아직 등단하지 못한 습작생 신분인 주인공이 두 아이의 육아를 맡게 된다. 바쁜 동생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선한 마음도 분명 있었겠으나, 서른이 넘어서도 제대로 된 돈벌이를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채감을 지우기 위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렇게 여자는 자신의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그녀에게 남자는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쓰는 시가 무엇인지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었고, 그녀가 읽어주는 구절을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살면서 단 한 번도 주체적으로 살아본 적 없던 주인공은 이러한 사랑이 늘 불안하게 느껴졌다.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 내가 이렇게 좋은 걸 누리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언제나 품고 있었다. 결국 자신이 처한 상황이 그 사람에게 짐이 될 것을 걱정하여 이별을 통보하고 만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남자는 당신의 감정보다 동생분 살길이 더 중요하냐고, 자기가 짐을 나눠 짊어지는 것도 싫냐고 물어보며 그녀를 붙잡아보지만, 덜덜 떨면서도 단호한 그녀의 태도에 결국 둘은 이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스포일러를 위해 입틀막🫢)

이 소설이 유달리 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글을 쓰면서도 곰곰이 생각해본다. 이 소설의 문체가 부드럽고 서정적이어서 작품의 분위기와 너무도 잘 어울린다는 점도 분명 한 몫을 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여성과 남성을 적대적 관계로 몰아붙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요즘 쉽게 접할 수 있는 페미니즘 소설들을 읽노라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남성들을 싸그리 없애버려야 하는 것마냥 절멸시켜야 될 존재로 여기는 작품들이 있어 심히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은 그렇지 않다.

분명히 작품 속 ‘동생의 남편’은 아내에게 (성)폭력을 행사하면서도 전처를 만나는 (죽어 마땅한) 악인이지만, 주인공의 연인은 그렇지 않다. 작품 끝까지 그녀를 믿어주고 보듬어주고 그녀에게 안식처가 되어주는 인물로 묘사된다. 또한 여성을 ‘피해자’로만 그려내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이 소설이 난 너무나 좋다. 주인공의 동생은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쳐온 ‘피해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후에는 주인공에게 육아를 떠맡기고 자유로운 연애를 하기도 하는 모습에서 주인공을 힘들게 하는 악인의 모습도 선연히 보인다. 다시 말해 ‘성별’이라는 기준으로 인물들의 성격과 위치를 평면적으로 그리지 않고, 소설 속 인물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조망할 수 있도록 입체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위에서 간추린 줄거리만 보면 주인공이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주인공의 삶의 궤적을 요약한 장면을 읽으면 그녀의 모습이 분명 납득될 것이고, 또 결말에 가서는 주인공이 주체적으로 독립적인 선택을 하는 것으로 소설이 끝난다. 하여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가장 완벽한 결말이 아니었나 싶다. 어쩌면 그녀를 힘들게 하는 것은 키워야했던 두 아이도 아니고 그들을 떠맡긴 동생도 아닌, 바로 그녀 자신이었을 것이다. 스스로를 이겨낼 주인공을 응원하면서 뭉클한 마음으로 책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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