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 공선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양희진 옮김 / 문파랑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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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공선≫의 작가 고바야시는 이력 자체가 자본에 대한 저항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1933년 경찰의 가혹한 고문 때문에 스물아홉 살로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경찰의 가혹한 고문 때문이었다.  그는 죽기 전까지 정력적으로, 시대와 무산계급의  문제, 그리고 자신의 과제를 반영하면서 치열한 삶을 살았다. (183p)


 ≪게공선≫은 캄차카 반도의 게 잡이 어선에서 일어나는 감독자의 횡포를 다룬다.   노동자에 대한 감독자의 폭언과 폭력, 그리고 비인간적인 노동 조건과 대우를 고발한다.    특별한 주인공 없이 집단이 처참한 노동 환경에 점차 인식의 눈을 떠가면서,  종국에서 자본과 유산자의 계급에 항거하여 권리를 쟁취해 가는 과정이다.


  비록 20세기 초의 이야기지만 의미를 확장해 보면, 오늘날의 자본가의 무차별적 횡포에 항거하는 노동 소설로 볼 수 있다.    물론 고바야시는 당시의 신문에 보도된 실화를 배경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절해고도 먼 이국의 바다, 선상에서의 비인간적 노동 착취에 대항하는 방식이 눈여겨 볼만하다.    즉 거대 자본과 조직에 개인이 항거는 미약하지만 집단의  행동은 어느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는 평범하지만 쉽지 않은 진리를 보여준다.


   200쪽 안 되는 작고  얇은 책이지만,  읽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한 번이라도 불의와 조직의 횡포에 대항한 적이 있는가.  내면의  분노를 직접 상대자에게 발설하고 시정을 당당하게 요구해 본 적이 있는가.    마음속으로는 소리 없는 총으로 수 백 번을 난사하지만 실제로 행동화하지는 못하는 소시민적 근성을 이 ≪게공선≫은 질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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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 인문학의 눈으로 본 신자유주의의 맨 얼굴
엄기호 지음 / 낮은산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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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어제이며 또 다른 누군가의 오늘이거나 미래인, 이러한 괴물 같은 신자유주의는 도대체 언제 나타나서 어떻게 세상을 집어삼키기 시작했을까?


   저자에 의하면 70년대 영국과 미국이 경기 침체를 벗어나기 위해서 탄생한 괴물이라고 한다. 즉 시카고 대학을 중심으로 한 시카고학파가 그 자리의 중심에 서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구체적 내용을 요약하면, “1970년대 경제적으로 위기에 처하게 되자, 기존의 케인스주의(혹은 개입주의)에 반발하여, 시카고 대학을 중심으로 점차 학계에서부터 그 영향력을 확대했다.    신자유주의를 가정 먼저 펼친 나라는 ‘자유’와는 가장 거리가 먼 칠레의 군사독재 정권이다. 이렇듯 신자유주의는 오로지 시장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그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가장 반자유주의적인 체제와도 아주 쉽게 융합되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경제 성장률은 오히려 하락하였고, 다만 개인과 개인, 국가와 국가 간의 빈부의 격차만 더 심화시켰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는 못 가진 쪽에서 가진 쪽으로 소득을 이전하는 프로그램이다.  즉 “탈취에 의한 축적‘이라고 표현하였다.”( 32p)


   저자는 신자유주의에 의해 누가 탈락하며, 탈락한 사람은 어떤 존재로 취급되고 있는지 명쾌한 논리로 전개해 나간다.    그러면 독자에게 경고한다.     이 책을 읽은 독자가 만약에 여기에 나오는 완전한 탈락과 몰락은 극히 ‘주변부’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이고, 자신에게는 여전히 소시민적인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착각이라고.

  신자유주의는 시장을 맹신하는 ‘시장 근본주의’로, 사람의 삶이란 머릿속에서 발끝까지 모두 시장의 원리에 의해 작동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하기에, 국가는 개인의 자유에 대해 최소한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사회는 없으며, 개인의 활동이 모여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오케스트라만 있을 뿐이다. 이 오케스트라의 최고점에는 바로 시장이 있고,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자는 국가가 아니라 세계화된 금융자본이다.    돈 스스로가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지를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신자유주의라는 미친 롤러코스터에서 내리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팔짱을 낀 비판을 통해서는 오로지 냉소주의에만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26p)


“비정규직 해고의 경우에는 기업도, 국가도, 여론도, 심지어 정규직 노조도 무서울 정도로 냉담하기 짝이 없다.    비정규직이 되고, 해고가 된 책임은 모두 개인에게 있다고 한다. 개인이 공부를 제대로 안 했고, 무능했고, 게을렀고, 근무 성적이 안 좋았기 때문에 탈락했다는 말이다.” (83p)


“2000년 이후 내가 보아온 이들의 마음은 누구 할 것 없이, 몰락에 대한 공포와 타인에 대한 차가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많은 사람이 이제 우리는 탐욕스런 욕망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진단했던 모습과 정반대였다. 탐욕의 이면을 지배하고 있는 힘은 몰락에 대한 공포였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삶은 전혀 안정적이지 않았고, 미래는 애측하기도 통제하기도 쉽지 않았다. 누구나 자신이 인생에서 한 번은 망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그 두려움은 분명한 실체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태어날 때부터 발버둥 치고, 청년기를 지나면서는 시한부 사랑에 갇혀 버린, 신자유주의에 저당잡힌 삶의 밑바탕에는 바로 이 공포가 있었다. 언제라도 망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서 근근이 하루하루를 살아 나가는 이 삶은 쉽사리 바뀌지 않을 듯해 공포는 더 커 보인다.“(98p)

이명박 정부는 경제를 살리겠다는 기치 아래 승자독식의 사회를 완성하고 있다.    국제 중 설립은 교육을 통해 계급을 통해 계급을 굳건히 하는 화룡점정이 되고, 종부세 폐지와 감세 정책은 부자만을 위한 돈 자치에, 없는 이들을 위한 그나마 복지 정책도 축소시킬 터이다.    수도권에 대한 규제 완화는 지방을 서울 식민지로 전락시키고 지방에 사는 이들을 국민이라는 울타리로부터 추방하고 서울을 진정으로 ‘특별시’로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현재 온 나라가 난리이다.  정부에 대부분 온건적인 언론이 전체적인 맥락을 집어 주지 않아서 그렇지 노무현 때 이런 사태가 벌어졌으면 아마도 민란이라도 일어났을 것이다.   구제역에 조류독감,  계속되는 강취위에 물가는 천정부지로 오르고 신종 푸루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가히 전쟁 중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그런데 저자는 조류독감도 신자유주의 정책의 폐해로 설명하고 있디.

“조류독감이 한 번 발생할 때마다 살처분 당하는 닭과 오리 등 가금류가 수십만, 수백만 마리에 이른다. 인간에게 전염된다는 이유로 가금류 전체가 모조리 도륙당하고 있다.
이렇듯 닭 한 마리에 온 인류가 공포에 떨게 된 그 조건은 바로 신자유의 세계화이다. 식량의 전 지구적 교역은 대규모로 수출하는 공장형 사육식이 아니면 농장이 절대 살아나을 수 없도록 했고, 결국 닭과 오리 같은 가금류 사육 방식을 집약적인 형태로 바꾸었다.“(208p)

이것이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전제로 인간의 삶을 지구화한 근대화가 낳은 잘못이라면, 신자유주의는 이에 대처하는 가장 실패한 통치 방식이다.

결론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독재 정권에 맞서 온 한국의 역사에서 자유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체절명의 가치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제 그 자유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자유의 이름으로 시장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자본은 노동에 비해 절대 우위에 서 있다. 노동은 자본에 대한 협상력을 잃었을 뿐 아니라 아예 그 존립 근거 자체가 해체되고 있는 듯하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절대다수의 인간들은 시간과 공간의 피난민이 되어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떠다니는, 난민도 국민도 아닌 어중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자유의 이름으로 행해진 야만이다.”(235p)

그러면 이 무시무시한 신자유주의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저자는 “지금 우리에게 대안은 여전히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지금 우리에게 대안은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대안을 잘 알고 있지도 않다.”고 하면서도 “자유에 맞선 자유, 그것을 상상해 낼 수 있는 힘과 영감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세계의 변혁과는 무관한, 그저 세계를 해석하는 그런 사유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 머무르지 않으려는 치열한 급진화의 운동이다. 그것은 개인의 사변과 이념으로 고립되지 않고 세상으로 나오려는 치열한 협력적 운동이다. 이를 통해 ‘사우는 우리’가 만들어진다. 그들보다 더 급진적이 되고치밀해지기 위해 사유의 운동을 포기하지 않는 것, 오로지 이 협력적 운동만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특히 저자는 아도르노의 말을 인용해, 우리에게 부적한 것은 실천이 아니라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사유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실체는 구체적이고 분명한데,  이에 저항하고 타파해야 할 대안은 좀 모호한 감이 있고, 다분히 관념적이다.


공무원시험 합격 보고서 - 어떻게 스스로를 관리하고자 자기를 다잡아야 하는지.

1. 가지고 있는 책은 무조건 30번씩 읽어라.
시간이 없다고 반복을 소홀히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처음엔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반복하면 할수록  점점 걸리는 시간은 줄어듭니다. 물론 대충 보라는 뜻은 아닙니다. 충분히 반복하는 것은 학습에 많은 효과를 가져옵니다.

2. 잡생각 하지 마라.
붙기 위한 시험입니다. 공무원 하나에 포커스를 맞추어 온 신경을 집중해야지 딴생각 할 겨를이 없습니다.

3. 규칙적인 생활을 해라.
사람은 규칙적인 사이클로 돌아갈 때 가장 좋은 컨디션을 발휘합니다.

4. 모의고사에 연연하지 마라.
모의고사에 일희일비하는 분들 많습니다. 모든 시험은 끝난 순간 잊어버리십시오. 계속 생각한다고 점수가 오르지 않습니다. 그래도 모의고사를 통해서 자신의 약점을 분석할 필요는 있습니다.

5. 운동 꼭 해라.
시간에 쫓기고 귀찮다 보니 대부분의 수험생이 운동에 소홀합니다. 운동을 통해 땀을 빼면 머리도 맑아지고 집중력도 향상됩니다.

6. 아는 사람을 만들지 마라.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든 시간이 듭니다.


이 학생은“혼자인 덕분에 점심을 먹으면서 입으로는 음식을 씹어 넘기고, 눈으로는 글자를 씹어 넘기면서 보냈고, 버스타고 도서관 오가는 중에는 단어를 녹음해서 들었고, 집에 가면 매일 40분 정도 조깅을 했다.” 혼자라고 가능했고, 이 가능성을 위해서 혼자가 되었다. 이 학생은 이 모든 것을 “철드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잠깐 감동하고 다짐하기보다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중요하고,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엄격한 자기 절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것이 철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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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제로 조직 - 건전한 기업문화의 핵심
로버트 서튼 지음, 서영준 옮김 / 이실MBA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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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눈 뜨면 대하게 되는 한 직장에서 다혈질, 또라이 기질을 가진 자와 같이 근무하는 자체는 고욕이다.     더구나 그 다혈질이 직장 상사라면 그 고통과 괴로움을 상상을 불허한다.  아울러 그 상사가 어떤 시스템의 객관적 테스트에 의해서 거기까지 오른 것이 아니라면, 그 또한 주위 사람들에게 엄청난 상처를 입히게 된다.    어떡하다가 좋은 줄을 잡았고, 조직의 급격한 변화로 관운이 따라 그 직위에 오른 것이라면  그의 막가파 행동은 조정할 수가 없고 제동이 어렵다.

  동생의 직장에는 이런 또라이가 하나 있다고 한다.   소위 팀장이라는 작자인데 아주 막무가내라고 한다. 머리 나쁜 놈이 몸만 부지런하면 주위 사람이 피곤하다고, 사소한 일도 상관하고 아주 천방지축으로 날 뛴다고 한다.    가장 기분 나쁜 그의 행위는 저 보다 한 살이라도 연령이 낮으면 마소를 부르듯 사무실 내에서 크게 이름 부르고,  거친 언사를 다반사로 한다니 그의 뇌구조가 의심스럽다.  

 ≪또라이 제로 조직≫에서는 이런 작자들이 끼치는 해악은 매우 크다고 한다.   주변을 위축시키고 심지어 생산력까지 떨어지게 만든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또라이 인간들을 알리려는 의도가 이 책에 숨어져 있다.  “이 책에서 이런 또라이 인간들의 파괴적인 성격이 동료들에게 얼마나 많은 피해를 주고 조직의 성과를 갉아먹는지 말하려고 한다.     또한 그런 놈들이 회사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고, 만일 어쩔 수 없이 함께 일해야 한다면 어떻게 그들의 말과 행동을 고칠 수 있는지, 도저히 고칠 수 없다면 어떻게 쫓아내야 하는지, 그리고 이런 또라이들이 가져오는 손해를 어떻게 줄일 수 있는지 이야기하려고 한다.”(4p)

 

   또한 ≪또라이 제로 조직≫은 또라이 구별 테스트를 항목화 했는데, 또라이가 안되려면 이와 반대로 하면 된다.
 또라이 구별 테스트
1. 또라이라고 생각되는 사람과 이야기하고 나면 우울해지고 비참해지고 기운 빠지고 초라해진 느낌이 드는가?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어버리는가?2. 또라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자기보다 힘 있는 사람보다 힘없어 보이는 사람을 대상으로 그 추악한 성질을 부리지 않는가?
‘일시적 또라이’가 아니라 ‘공인 또라이’로 규정하려면 그 사람이 일관되고 지속적인 행동 양식을 보여야 하고, 한 사람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그에게 모욕당하고, 무시당하고, 차별받고, 기운 빠지고, 기분 상한 사례들이 있어야 한다. (20p)

또라이를 찾아내는 두 가지 단계
첫째, 다른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수치심을 주거나 기를 꺽는 사람
둘째,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낮은지를 늘 확인한다.(39p)

   동생 직장의 상사는 스토커 기질도 있다고 한다.    부하 직원 중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무너질 때까지 끝까지 무시하고 닦달 한다고 한다.    당하는 사람의 마음의 상처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으리라. 한 편으로는 설상가상으로 그는 교활함도 가져닸니 온갖 나쁜 것은 다 가춘 셈이다. 같이 부정적으로 애기를 윤색하고 과장해서 더 높은 상사에게 상대의 인물 평하는데 써 먹어 당사자는 배신감으로 그와의 대화를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든다니 이 자를 되도록 빨리 끌어내려야 한다.     “다른 사람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용납했지만, 성격을 비난하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테일러는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특히 그 제안자의 경력이나 직급에 관계없이 공평하게 그 집단 내의 학문적 분석과 조명을 받을 수 있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121p)


  그러나 또라이를 판별하는데 주의도 필요하다고 ≪또라이 제로 조직≫에서는 강조한다.     “당신을 짜증나게 하거나 한 번 정도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또라이 딱지를 붙이려는 충동은 자제해야 한다.    둘째, 단지 가끔 일시적으로 또라이처럼 행동하거나 겉보기에 퉁명스럽다는 이유로 공인(자타가 인정하는) 또라이로 낙인찍으려 한다면, 충분히 알고 나서 그렇게 하라. 겉보기에는 거칠기 그지없는 사람이라도 실제로 그 사람을 잘 알게 되면 의외로 마음이 따뜻한 사람일 수 있다.”(129p)


 그런데, 내가 직장에서 상사나 후배로부터 또라이라고 평가 받고 있지 않은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동물원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배설물을 던지는 원숭이들을 보고 있는 것 같다.”(145p) 나는 어느 모임에 참여하든지, 모임 내내 우리의 지식을 뽐내고, 성공담을 떠벌리고, 남의 말을 중단시키거나 속사포처럼 말해서 말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지는 않았는가 반성해 본다.    특히 술자리에서 말이다. 이제는 위에 구멍이 나서 술을 끊은지 한 달이 지나 그런 실수는 줄어들겠지만 나에게는 현시욕이 좀 있기는 하다.  이제는 많이 들어야 한다.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오십이 넘으면 입은 다물고 지갑을 열라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나는 모임이 끝날 때마다 또라이가 된 것 같지는 않았는가? 묻고 반성해 본다.

이 ≪또라이 제로 조직≫에서는  <애플>의 CEO 브 잡스를 또라이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미래의 아이콘을 꿈꾸는 세계 청소년의 롤모델 스티브 잡스. 그의 책 한권 정도는 누구나 읽었을 정도로 요즈음 뜨는 인물이 아닌가. 그가 또라이라니 의외다.

그런데 “왜 또라이는 스스로 속아 넘어 가는가”(257p) 아무도 지적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미친개에게 물리지 않기 위해서다.
“당신의 적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당신이 저지른 또라이 짓의 목록만 하루가 다르게 길어질 뿐이다.    매일 마음을 상하게 만들기 때문에 당신에게 등을 돌리는 사람들은 날이 새기 무섭게 늘어만 간다. 단지 당신이 모르고 있을 뿐이다.    당장 당신을 몰아내고 싶지만 힘이 없어 참고 있던 사람들은, 당신이 넘어지는 그 순간 벌떼같이 달려들 것이다.”(258p)


 직장 내에서 다혈질의 동료 때문에 고민이 많은 자나,  본인 자신이 좀 남다른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꼭 한 번 읽어 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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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가스의 탄생 - 튀김옷을 입은 일본근대사
오카다 데쓰 지음, 정순분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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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명치(明治) 시대(1868-1912)>이전에 일본과 서양은 음식 문화에 있어서 얼마나 달랐을까. 당시에는 일부에서 조류 등을 먹는 것 외에 육식을 금했다고 한다.  육식을 하면, 피가 부정해 지고 신에게도 불경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1,800여 년이나 육식을 금해 왔던 것이다.
  “일본인은 덴무 천황이 <살생과 육식을 금지하는 칙서>를 발표한 675년 이래 1,200여 년 동안을 육식에서 멀어져 있었다. 이 기나긴 전통을 스물한 살의 메이지 천황이 하루아침에 대신과 참의들을 궁주의 학문소로 불렀다.”(23p)

“일본인의 육식기피 현상은, 들짐승과 날짐승의 고기는 별개였지만 가축류의 고기를 먹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또 우유를 마시는 것은 생피를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해 굳이 마시지 않으며, 소와 말이 아주 많지만 소는 농사에 쓰고 말은 전쟁에 사용할 뿐이다.” (36p)
  
 코페니크루스의 전회가 일어났다. 메이지 천황이 전격적으로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육식 섭취를 할 수 있도록 ‘육식 해금’이 이루어졌다. 지금이나 그때나 극심하게 반대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라 극단적인 사건도 일어났다.
“육식이 해금된 지 한 달쯤 뒤인 1872년 2월 18일, 흰 천으로 온몸을 휘감은 자객 열 명이 천황의 거처에 난입 사건이 발생했다.  진술서에는‘현재 이방인이 들어온 이후 일본인이 오로지 육식을 하는 고로 땅이 모두 더러워지고 신이 있을 곳이 없음에 즈음하여, 이방인을 몰아내고 신불과 제후의 영토를 예전과 같이 지켜내야만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되어 있다.”(28p)

  메이지 천황이 육식 해금을 한 이유가 뜻밖이다. 서양인에 비해서 일본인의 체형이 왜소한 게 그 이유라니, 당시의 우리나라 관료들의 마인드가 발전적인 것인가?
그런 면에서는 우리보다 앞섰다고 본다.  대원군처럼 일본도 외세 배격에 한 참 열을 올리다가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외국인을 받아들여 요코하마에 외국인 거류지를 만들지 않았는가.   전에 읽은 대하소설 ≪료마가 간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 많이 볼 수 있었던 애기이다.


정리해 본다면, 메이지 천황의 육식 해금은, 한창 개방에 열을 올릴 때 체형이 서양인에 비해 턱없이 왜소한 터라, 일본인의 체형을 완성 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한다. 즉 메이지 신정부는 일본을 근대국가로 탈바꿈시켜 선진세계의 대열에 끼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는데, 그 목표를 위해 정부는 육식을 장려하고 서양요리 보급에 힘쓰며 이와 관련된 정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등 일종의 작전을 폈다는 것이다.


  아무리 나라에서 강제로 시행을 독려한다 해도 문화는 하루아침에 모두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양력설을 그렇게 나라에서 독려 했음에도 실패하여, 결국에는 음력설로 돌아 선 거와 마찬가지로 메이지 시대에 육식이 해금 되었지만 서민들은 육식을 저어했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 육식이 공식적으로 해금되었지만 서민에게는 그림에 떡이었다. 그 이유로는 첫째 1,200년 동안 기피해온 냄새나는 육고기를   그리 간단히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둘째 값비싼 서양요리는 그림의 떡이었다. 셋째 육고기의 조리법을 전혀 몰랐다. 넷째 육고기를 먹음으로써 몸과 마음이 부정 타는 것을 두려워했다. 예나 지금이나 서민에게는 육고기이 접근이 쉽지 않았나 보다. 물론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는 면에서 현재와 공통점이 있다. 48p
어쨌거나 상당한 기간을 육고기를 접하지 못한 서민들이 육식에 대한 저항을 완화시키는 방법은 조리법에 있었다. 즉 일본식 전골에 쇠고기를 넣고 끊이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멧돼지전골에 멧돼지 고기 대신 쇠고기를 넣어 된장으로 양념해서 끊이는 것이다.“(48p)


 그러므로 우여곡절 끝에 육식 해금을 이루었지만, 정착 과정은 웃음을 짓게 만든다.  쇠고기 먹는 행위를, 조폭이 온몸 문신으로 자신을 과시하듯이 ‘나 쇠고기 먹는 놈이야, 까불지마.’라고 했다. 즉 메이지 시대에 호리코시 도키치라는 사람이 쇠고기 집을 열었는데,  처음에 장사가 거의 안 되었다.  사람들은 그 가게 앞을 지나갈 때는 못 견디겠다는 듯 코를 막고 지나갔다. 가게를 열고 한 사람의 손님도 없다가 문 닫을 때 쯤 되어 술에 취한 두사람이 뛰어들어  ‘자 쇠고기 내놔! 우리는 괴상한 것만 먹는 놈들이야!’라고 거들먹거리며 먹고 갔다. 그래서 쇠고기 먹는 것이 큰 모험이나 하는 것처럼 온다는 손님이 하인이나, 불량배가 와서 ‘나 쇠고기 먹은 사람이야, 까불지마, 하는 이런 식이었다.

쇠고기 요리는 두 가지가 있었다. 쇠고기를 조리는 ‘간토의 쇠고기 전골’과 쇠고기를 굽는 것이다. 70년대에 어른들을 따라 아주 가끔 일명‘시오야끼’를 먹으러 간 기억이 난다. 지금으로 말하면 삼겹살이 아니라 목살을 쇠 적쇠에 올려놓고 구워 먹는 행위이다.  그 때는 어려웠던 때라 육식이 지금처럼 대중화 되어 있지 않아서 이런 고기도 특별한 행사였다.  아무튼 연기가 엄청나고 고기가 거의 탈 정도로 구워서 먹었다. 아마도 이것이 일본식 돼지구이였나 보다. 좀 더 진화를 한 것이 소위 오늘날 삼겹살인데, 일본도 서양식에서 그들 특유의 방식대로 육고기 문화를 발전시켰다. 
“일본에서는 얇게 썰어 샤브샤브용으로 가게에 진열하고 하는데, 외국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육고기가 공기에 노출되면 신선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일본에서만 유독 얇게 썬 고기가 생겨난 것일까. 일설에 따르면, 육식을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생선 먹는 식으로 변형한 것인데, 거기에는 얇게 썬 고기만이 갖는 독특한 맛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60p)

 
 담배가 유럽에서 일본으로 ‘타바코’로 받아들여져 우리나라에 ‘담바고’로 발전하여 담배가 되었듯이,  일본은 외식 문화에서 우리보다 한 발 앞서간 것이 분명하다.  크게 세 가지 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그것은 카레, 고로케, 돈가스이다. 개인적으로는,  돈가스는 오랫동안 육식을 금해 온 일본에서 갑작스럽게 직접적으로 육식을 할 수 없어 밀가루와 육식을 섞어 완화시켜 발전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해 왔다.

 어떤 사람이 일본 여행 중 맛본 돈가스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은 글을 본적이 있다. 정말로 입에 침이 고일 정도로 바삭바삭 묘사해 놓았다.  내가 다시 일본에 간다면 초밥 먹으러 헤매지 않고 돈가스를 먹고 싶다. 아무튼 육식이 일본문화의 하나로 정착하면서 나온 것이 바로 ‘돈가스’다. 이 일양절충형 ‘양식’인 ‘단팥빵’과 ‘돈가스’는 일본 음식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제 돈가스 시대가 되자, 어중이떠중이 할 것 없이 다 돈가스, 돈가스 한다, 돈가스가 아니면 죽고 못 살 정도다. 정말 대단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마을 어디를 다녀도 돈가스 간파이 안 보이는 곳이 없다. 이렇게 돈 가스 집만 생기다 보면 도쿄는 기름 냄새 때문에 걸어 다니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167p)

  이어령씨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책을 보면,  일본인은 남의 것을 조그만하게 모방하는 데 귀재이라고 한다. 돈가스도 하나의 모방문화라고 이 책에서는 언급하고 있다. 모방이라도 돈가스를 탄생시킨 지혜는  그들의 선진적 사고를 감탄할만 하다. “돈가스를 탄생시킨 지혜- 일본문화는 모방문화라고도 한다. 확실히 메이지 시대에 빠른 속도로 근대화를 이뤄가는 과정에서는 서구세계를 모방하기에 급급한 분야도 있었을 것이다. 서양에서 들어온 상품과 풍조를 숭배하는 분위기는 오랫동안 지속 되었다. 하지만 ‘돈가스’는 서양문물을 그저 흉내만 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일양절충요리, 즉 양식으로서 독창적인 지혜가 축적된 것이었다.”(212p)

그런데 위에 언급한 어떤 사람의 돈가스 예찬론 뒷받침하는 이야기가 이 책의 뒷면에 나와 있었다.  즉 돈가스는 왜 맛있을까. “ 독특한 먹는 맛과 풍미로 포만감을 주는 튀김요리다. 일본의 된장국 맛과 잘 어울리고, 젓가락으로 먹을 수 있어서 밥맛을 돋우며, 다 먹고 나면 뿌듯한 만족감이 여운을 남긴다.”(213p)  먹어보고 싶다. 일본 돈가스.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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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바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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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물의 대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마리 앙투네트≫를 알게 되었다. ≪마리 앙투네트≫는 나에게 전기물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같게 했다.    대부분의 전기물이 우선 재미없고,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말도 안 되는 업적 위주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 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렇지 않았다.  어느 소설보다도 스릴 있고 박진감이 넘치며 세밀한 묘사는 대상 인물에 대한 믿음이 가게 했다.    그래서 그의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고, 새로 나온 책을 모았다.  ≪조 셉 푸세≫, ≪발자크 평전≫은 이미 읽었고,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는 절반 정도 진도가 나아갔다.  ≪어제의 세계≫는 나의 책무더기 속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아무튼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는 16세기 중반의 인물을 다시 20세기에서 되 살려 놓았다.    생명을 불러 일으켜 세워 나에게 다가오게 하고 있다.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는 전체적으로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광신도 칼뱅, 그리고 그에 어설프게 저항하다 화염 속으로 사라진 세르베투스, 관용주의자 카스텔리오이다.     엄격한 광신도 칼뱅에게 점잖게  충고하다 결국에는 죽게 되는 카스텔리오에게 저자는 많은 호감을 보낸다. 카스텔리오는 이 책의 제목과 부합되는 내용을 증언한다. 결국 집과 직장을 잃고 떠돌다가 객사하고 만다.   “ 당신의 제자들조차도 나의 엄격한 생활 태도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을 품을 수 없다고 여러 번 인정했다. 그들은 나의 학설이 당신의 학설과 다르기 때문에 내가 잘못이라고 주장했을 뿐이다. 그  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나에 대해서 그런 소문을 퍼뜨리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오직 증오와 분노에서만 생겨난 고발을 위해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르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칼뱅 당신은 정녕 모르는가?”(250p)

  박정희 시대를 연상하게 하는 부분도 나온다.   지나치게 억압하고 굴욕적인 숭배를 원하는 칼뱅의 엄격한 요구는 이해하기 힘들게 만든다.   “도덕 경찰관은 여자들의 옷을 살펴보고 너무 길거나 짧지는 않은지, 지나치게 주름을 많이 잡지는 않았는지, 위험스럽게 파이지는 않았는지를 검사했다.  또 여자들이 머리를 너무 인공적으로 틀어 올리지는 않았는지 검사하고, 손가락에는 반지를 몇개를 꼈는지, 신발장에는 구두가 몇 컬레나 있는지 세어보았다.”(79p)

또한 서로 고발하고 감시하며, 칼뱅의 절대성에 다른 의견을 말하면 가차 없이 처벌하고 말았다.    이 책의 소제목도 ‘금지, 금지, 금지’이다“국가가 시민들은 테러 상태에 잡어두면, 자발적인 밀고라는 역겨운 식물이 번성하기 마련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명예에 위반되는 일을 했다’는 혐의를 받지 않기 위해 모든 시민이 다른 시민을 감시하고 홀겨 보았다. ‘두려움에서 나온 열성’이 모든 고발자들을 초조하게 몰아갔다.” (80p)

  그렇게 감시와 고발 처벌의 능사라도 인간의 사고와 감정을 어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칼뱅은 이 야만적인 사형집행을 통해 제네바 사람들의 자유로운 감정을 파괴하지는 못했다.”(86p)
“칼뱅은 평범한 것을 위해 평범하지 않은 것을 희생시키고, 모순 없는 노예근성을 위해 창조적인 자율을 희생시킨 것이다.” (91p)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만 국면 타개라는 것이 있다.   즉 어떤 우연적 계기로 자기의 의도한 바를 치고 나가는 것이다. “독재자의 개인적인 후광을 털어버리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분명한 계기가 필요한 법이다.    마침내 그런 계기가 찾아왔다. 바로 페스트의 창궐이다.  성직자들은 그들 환자들을 위로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칼뱅도 마찬가지다. “그 목사들이 스스로는 가장 작은 희생마저 치를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분노와 조소가 섞인 기분으로 주시하면서 비웃었다.”(97p)


  마침내 자유로운 양심, 저자가 심도 있게 그리고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 카스텔리오가 등장한다. 폭력에 대한 양심, 칼뱅에 맞선 카스텔리오.
“서로 적대자인 칼뱅과 카스테리오의 초상화를 나란히 놓고 보면, 훗날 정신적인 영역에서 그 토록 첨예하게 부딪치게 될 대립을 분명히 찾아볼 수 있다. 칼벵의 얼굴은 긴장 그 자체다. 초조하고 고집스럽게 분출을 노리고 있는, 경련적인고 병적인 응집된 에너지를 보여주는 반면 카스테리오의 얼굴은 온화하고 침착하게 기다리는 얼굴이다.”(100p)
“카스텔리오의 성격은 자만하거나 자신감에 넘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한 번도 칼벵처럼 자신의 의견을 유일하게 올바른 것으로 여기고, 어떤 일에 대해서나 자신의 견해를 완벽하고도 논쟁의 여지가 없는 여지로 여긴 적이 없었다.”(  107p)
 

 물론 카스텔리오 이전에 신학의 돈키호테라 불리는 세르베투스가 등장한다.
저자는 세르베투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 명은 자주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주 우연한 이름을 골라서 후세의 기억에 뚜렷하게 새겨놓곤 했다. 미겔 세르베투스도 특별한 재능 덕이 아니라, 오직 끔찍 말로 인해 기억할 만한 인물이 되었다.”(123p)
그런데 단 한 번도, 어느 누구도 용서한 적이 없었던 칼뱅은 이를 화염 속으로 밀어 넣었다. 칼뱅의 증오는 그의 성격의 다른 면들처럼 완고하고도 조직적이어서 곰 사냥꾼 같은 루터나 거칠고 촌스러운 파렐의 분노처럼 사납게 솟구쳤다가 다시 가라앉는 불꼿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증오는 냉혹하고 날카롭고, 예리한 광석 같은 원한이었다.  (135p)

 이 책은 독일권의 유명한 번역자인 안인희로 1998년도 판을 재판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아주 작은 흠이라면, 너무 한 문장에 명사형이 반복적으로 나타나 어설프고 건조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떤 마사지 없이 단어 하나하나를 그대로 의역이 아닌 직역을 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상하게 번역한 문장도 보였다. 그리고 책 본문을 한글판에 옮겨 적으면 붉은 밑줄을 긋는 단어가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투르농의 추경과 오리 재판관은, 불구대천의 원수이고 모든 이단자 중에서도 최고의 이단자인 칼벵의 사랑스런 열성 덕분에 이단자 세르베투스에 대한 이 결정적인 증거물을 손에 쥐게 되자, 우선 큰 웃음부터 터뜨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친 것-  “투르노의 추경과 오리 재판관은, 불구대천의 원수이고 모든 이단자 중에서도 최고의 이단자인 세르베투스에 대한 이결정적인 증거물을 손에 쥐게 되자, 우선 큰 웃음부터 터뜨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칼벵의 사랑스런 열성 덕분이었다.”(144p)

아무튼 누가는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탄압하는 행위는 있어서는 안 된다.  결국에는 세르베투스는 칼뱅과 다른 신학적 의견 차이가 있었다고 처형되었고, 칼뱅은 카스텔리오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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