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안산 숲으로 들며 산 무서워하는 아내와 와야겠다는 글을 썼는데 엊그제 뜬금없이 아내가 안산에 가보잔다. 물론 내 글을 읽어서거나 이심전심이어서가 아니다. 직장 동료 한 사람이 안산 근처에 사는데 그렇게 좋다고 하더란다. 버스를 갈아타고 이대 후문에서 내려 연대 교정으로 들어간다. 전에 들어갔던 소나무 숲길을 따라간다. 얼마쯤 갔을까. 오르막 오솔길이 시작되자 아내가 그만 가잔다. 오늘 운동량을 다 채웠단다. 나는 흔쾌히 돌아서 내려간다. 아내 생각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없다. 아내가 버스 타고 사무실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내 다음 숲길을 이리저리 살핀다.

 

지하철로 이동해 불광역에서 내린다. 지도에서 확인한 진흥로19길에서 들어가는 소곡으로 향한다. 아주 작은 계곡이 갈래 져 있고 길은 그 사이 둔덕으로 나 있다. 물이 말라 숲은 온통 풀벌레 소리로만 가득하다. 조금 더 들어가자 실낱같은 물소리가 들린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물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돌 틈 아래 또는 뒤에서 이를테면 복류하는 작은 물줄기가 내는 소리다. 반갑기도 하고 어쩐지 애잔하기도 한 풍경에 빙의돼 한참 서 있는다. 가파른 바윗길이 자주 나타나는 길을 오르다 옆 소곡으로 들어가는 비탈길로 들어선다. 세 번을 돌아 진흥로 325로 내려가는 소곡에 접어든다.



이 소곡은 지나온 소곡과 달리 물길이 깊이 파였고 폭포라고 해야 할 만큼 낙차 있는 물줄기가 군데군데 나타난다.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형이 거의 끝까지 계속된다. 지워지고 흐트러진 인적 때문에 길도 마치 사람을 외면하는 듯한 풍경이다. 끄트머리께 이르자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사람이 살고 있단 말인가. 인기척은 없다. 그런데 계곡 끝나고 도로가 시작되는 입구에 이르니 철망 문이 막아선다. 사유지라 할지라도 산 위에서 내려오게는 터놓고 나가지 못하게 잠그면 대체 어쩌란 말인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거침없어진다. 철망 문 옆 부분 철망 울타리를 밟아 낮추고 넘어간다.



시간이 그리 촉박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세 번째 계곡, 그러니까 녹번천이 발원한 골짜기로 향한다. 복개를 면한 계곡 입구 인근 녹번천 귀퉁이에 송사리가 살고 있다. 인간 문명 틈새에서 자연 생명은 이리도 강인하게 살아가고 있다. 내가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지나던 사람들도 덩달아 와서 그 생명들을 확인하고 간다. 계곡 입구에는 제법 큰 소리를 내는 폭포가 있다. 거기부터 전개되는 계곡 풍경이 사뭇 아름답다. 무엇보다 물 가까이 물길 따라 난 숲길이 좋다. 시간상 능선에 오를 때까지 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다. 같은 길 되돌아오기를 싫어하는데 이 길은 다르다. 별일이 아닌가.



조금 내려오다가 큰 바위들로 이루어져 상서로운 기운이 감도는 장소를 보고 가까이 간다. 상류인 이곳에도 송사리가 살고 있다. 처음처럼 가만히 들여다본다. 여기 저 생명을 키우는 녹번천 도시 구간은 30년 전 복개되어 지하 구정물로 흘러가고 있다. 복원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데 얼마나 어떻게 진행했는지 모른다. 또 다른 토건은 아닐는지 걱정스러운 생각이 든다. 나는 조용히 조그만 돌 하나를 집어 바위 위에 올려놓는다. 숲과 물과 인간을 마음에 담고 간절히 돌탑을 쌓는다. 무엇보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포악과 협잡 중심에 선 부역 과두를 축원한다. 내 축원이 참 축원임을 송사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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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9-26 0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학입시 삼수생 시절 사촌형의 집 별채에 빈방이 있어서 이곳에서 공부하다 합격하였고 1973년 여름 군대입 전까지 살았던 곳이 불광동이라 이글을 읽으니 옛생각이 납니다.

bari_che 2023-09-26 09:59   좋아요 1 | URL
아, 그러시군요~ 그 무렵 저도 불광동 친구 집에서 살다시피 했었습니다. 녹번천도 불광천도 복개되기 전이니 금석지감을 금할 길 없습니다. 불광천을 나무다리로 건넜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 착오로 누락된 반제국주의 의학 서사 <18. 녹색 시각으로 반제국주의 정도를 본다>를 게재한다.


 

제국주의 포르노 사회에서 시각독재(tyrannis visifica)가 이루어지는 현상은 자연스럽다. 극한을 넘어 날조 이미지로까지 드러내고 마침내 환각으로까지 탐시(貪視)하느라 미쳐가는 세상에서 눈은 본의 아니게 자본 총아며 타락 상징이 된다. 눈은 잘못이 없다. 있다면 오징어 눈만도 못하게 불완전하다는 사실뿐이다. 문제는 제국주의 백색시각이다.

 

제국주의 백색시각은 보고 싶은 바만 본다. 보고 싶은 바만 보는 시각은 중심시각에서 형성된다. 중심시각은 선택한 개체에 시종일관 집중한다. 집중시각은 전체에 주의하지 않는다. 전체를 희생해서 개체를 비대하게 만들 때, 불평등 구조가 탄생한다. 불평등 구조 종착지가 바로 포르노다. 포르노는 거대하게 발기한 자아·지식··권력 잔치다.

 

제국주의백색 시각을 전복하는 시각 혁명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중심시각 타파다. -중심시각으로 전체성을 복원한다. 집중 일관성을 무너뜨리고 전 방위로 시선을 개방한다. 모두에게 주의하여 아무에게도 집중하지 않는다. 집중하지 않으면 크고 작다는 차별이 없어진다. 차별이 사라져 텅 빈, 텅 비어서 멍한 눈길에 무한한 자비가 배어든다. 시각 팡이실이 사건이다.

 

눈 모습에 주의하면 다음 길이 보인다. 눈은 왜 상하 아닌 좌우로 길쭉할까? 눈은 넓이 그러니까 수평의 감각을 기본으로 한다. 높이와 깊이 감각은 부차적이다. 수평 감각은 계층(rank) 아닌 연계(link), 그러니까 상하차별 아닌 평등연대, 고매·심오 아닌 수수·평범 감각이다. 끊임없이 좌우를 돌아보는 눈길에 따스한 사랑이 스며든다.

 

반제국주의 녹색시각 혁명은 시각독재 일극 구조를 무너뜨릴 뿐, 중심시각 자체를 폐하지 않는다. 중심시각과 비-중심시각이 비대칭 대칭을 이루어 개체와 전체 균형이 일렁고요사건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일이 목표다. ‘일렁고요는 그냥 거저 오지 않는다. 시중(時中) 특이점마다 비폐비개(非閉非開) 눈으로 성찰해야 한다. 중도(中道)가 정도(正道).

 

반제국주의 혁명 마지막 한순간에는 결연히 눈을 감기도 해야 한다. 실재 악 멱을 딸 때 그가 전시하는 포르노를 감상할 필요는 없으니까. 혁명 마지막 한순간이 오기 전에 정색하고 어떤 순간 결연히 눈을 감는 제의 또는 놀이를 실행할 필요도 있다. 필연이 우연이라는 옷을 입고 도둑같이 올 수 있으니까. 깨어 있는 일이 은총만은 아니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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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是山 水是水

山不是山 水不是水

山是水 水是山

山是山 水是水

 

청원 유신 선사 선화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같다. 겉보기만이 아니다. 익숙한 통속 논리에서 볼 때 부정을 부정하면 긍정이 되므로 함의 또한 같다고 할 법하다. 청원 유신이 어찌 통속 논리 따위를 구사했겠나. 부정을 부정하면 긍정이 되지 않는다. 부정(否定)을 부정(否定)하면 부정(不定:uncertainty)이 된다. 부정(不定)은 모순 너머 역설 품은 불확정·불확실 창발 네트워킹이다. 신성하고 신비한 실재다.

 

고대 인류 삶은 녹색이었다(山是山 水是水). 타락(스티브 테일러) 또는 분리(찰스 아이젠스타인) 이후 인류 삶은 백색이다(山不是山 水不是水 山是水 水是山). 제국 백색문명 폐해를 극복하는 일은 그 모두를 폐기하는 일이 아니다. 제국 백색문명이 저지른 실패는 세계 진실 극히 일부, 이를테면 1/5 이하에 전부를 환원한 짓이므로 애써 밝혀낸 지식과 지혜를 없애고 고대 녹색을 복원하는 일로 솔루션을 삼아서는 안 된다. 그럴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백색 지혜를 거룩하게 쓰는 녹색 삶을 살아야 한다. 백색 품은 녹색, 이 거룩한 삶은 연두색이다. 연두는 영롱한 장엄 녹색이다(山是山 水是水).

 

연두 의학을 상상한다. 제국 백색문명을 극복하는 과업 본성은 치유다. 기왕 펼쳐진 의료독재 사회에서 문어발을 거둬들이는 일보다 더 근원적인 일은 치유 개념, 주체, 대상을 바로잡는 일이다. 제국 백색문명 탓에 병든 존재는 백색 인간에 국한하지 않는다. 수많은 비인간 생명, 비생명이 왜곡되고 변형되었다. 인간 치료 너머 치유로 번져가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인간이 결국은 치유자라는 우월의식에서가 아니라 결자해지 이치를 따라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자연을 치유 주체로 인식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인간적 방식으로 뭘 더하려 하지 말고 다시는 손대지 말아야 할 일이 분명히 있다. 숲에’, 숲인 바다에믿고 맡겨야 하는 일이 훨씬 많을 수 있음을 겸허히 인정해야 한다. 숲이, 숲인 바다가 제국의 반대말이다. 반제국주의 통일전선에서 주축은 인간이 아니라 누룩곰팡이며 버드나무며 미역이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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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 걸을 때 돌탑을 보지 못하는 일은 거의 없다. 비단 절집 인근이 아니더라도 있을 만한 곳에는 어김없이 돌탑이 있다. 돌탑을 보며 종교적 의미를 떠올리지 않기란 힘들다. 자그만 돌 하나를 올리며 의식적으로 무슨 소원을 빌지 않더라도 무심코나마 어떤 바람을 싣기 마련이다. 물론 그 바람이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하는 사람도 있을 리 없다. 그러고 보면 인간에게 주술은 본성에 새겨진 무엇인 듯하다.

 

한 걸음 물러나서 생각해본다. 돌탑 쌓는 목적이 종교성에 국한될까? 합리적으로 추정하면 길에 널린 돌들을 치움으로써 보행에 안전과 편의를 더하려 함이 기본적이고 실질적인 동기라고 할 수 있다. 그다음에 종교적으로 의미가 부여돼 제의 위상으로 굳어졌다고 이해하면 더욱 그럴듯하다. 이성 환원 냄새가 나지만 태초부터 기획한 제의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진실에 부합하는 면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숲에서 길 잃는 일을 자주 겪으면서 한 가지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인적이 지워진 숲을 헤매다 작은 돌탑 또는 그 흔적을 발견하면 바로 그 순간 인적을 복원하는 육감이 생긴다는 사실에서 비롯한 변화다. 돌탑은 사람이 지나갔다는, 또는 지나가고 있다는, 또는 지나가도 된다는 표지로 작용한다. 길은 길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더하면 돌탑에는 이정표 의미까지도 얹을 수 있다. 돌 위에 놓인 돌은 비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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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듣는 소리다. 불가 큰 선지식들이라며 나와 한결같이 떠들어대는 저 뜨르르한 참 나말이다. 그 소리 하도 듣기 가소롭기에 나는 십 년 전 이렇게 적었다.

 

대승의 큰 지식이

참 나를 찾으라니

땡초는 나를 보고

중생은 남을 본다

 

얼마 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대승의 큰 지식은 참 나를 찾으라네

찾아서 찾아지는 참 나가 어디 있나

 

본디 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선객 아닌 사람을 향해 나는 이런 소식을 전해준다. 멀린 셸드레이크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165쪽에 있는 말이다.

 

생명을 공생 관점에서 본 어느 독창적 논문 저자들은 이 점에 대해 분명한 견해를 밝혔다. 그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개체는 존재했던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의류(地衣類)입니다.”(<A symbiotic view of life: we have never been individuals>(Gilbert et al. 2012)>

 

지의류는 광합성을 하지 못하는 대신 유기 영양 섭취에 능한 곰팡이(자낭균+담자균)가 그 반대인 말(조류) 또는 시아노박테리아를 세포 외 공생 관계로 이끌어 형성된 팡이실이 생명체다. 이 이치는 그대로 인간에게 적용된다. 인간 장 점막 바깥에서 살아가는 미소 생명과 인간이 더불어 이루어가는 생명 체계는 말 그대로 지의류다. 이 열린 체계를 여실히 말하면 인간도 미소 생명도 가능 차원이 아니라 긍부(肯否) 차원에서 개체일 수 없다. 나는 없다. 참 나도 없다.

 

인간이 나라는 의식을 지닐 수는 있다. 물론 그런지 이미 오래다. 그 나 개념은 내 뇌가 독자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 개념 열 중 아홉은 장 점막 바깥에서 공생하고 있는 미소 생명들이 만들어주었다. 나라는 개념 자체가 나 아닌 존재에 대부분 힘입고 있는 주제에 무슨 참 나를 운운하는가. 끝내 그 말을 버리지 못하겠다면 를 복수 명사라고 규정해야 한다.

 

가 복수 명사면 제국이 무너진다. 제국이 무너지면 그 폐허에서 팡이실이 사건을 복원할 수 있다. 이 복원 운동이 녹색 나운동이다. 녹색 나는 아름다운 둘이다. 그 둘이 비인간 생명들로 이루어질 수는 있지만 인간들로만 이루어질 수는 없다. 인간이 위대하다 제아무리 유세 떨어도 유체 이탈 화법에 지나지 않는다. 이 깨침으로 백색 자아를 관통해야 겸손히 엎드려 녹색 세계에서 더불어 살아갈 자격을 얻는다. 부디 해탈하시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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