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에 다리가 놓인 재 건너 몽마르트르 공원 일대도 미도산이라면, 미도산 자락에는 또 다른 특권층 부역 집단 소굴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서남쪽 모퉁이 맞은편에 똬리 튼 대한민국 학술원과 예술원. 보통 시민은 여기 그 소굴이 있다는 사실조차 잘 모른다. 자신이 낸 세금에서 떼어내 종신직 회원에게 매달 180만 원씩 수당을 지급하는 곳이라는 사실은 더욱 모른다. 여기는 지킬 얼굴 뒤에 숨은 하이드가 희희낙락거리며 범죄를 저지르는 밤 세상이다.



피상적으로 생각할 때 학술·예술원 종신회원은 대한민국 학자와 예술가가 누리는 최고 명예다. 그러나 일제 문부성 1호 국비장학생이자 대한 총독 윤석열의 아버지인 윤기중이 학술원 회원이었으며, 특권층 부역 예술가의 대표 아이콘인 서정주가 예술원 회원이었다는 사실은 단박에 그 생각을 범주적으로 부숴버린다. 나아가 대한민국학술원과 예술원이 무엇을 위해 만들어지고 누구를 위해 존속하는가, 깊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한눈에 알 수 있게 한다.

 

두 얼굴 가진 도둑 떼가 입 모아 지절거리는 소리를 들어보시라. 먼저 <대한민국학술원 선언문>이다. 정말이지 기가 막힌다.

 

 

우리 民族原來 文化尊重하고 學問愛護하는 知性所有者이었다. 知性으로써 각 時代難局打開하여, 國家社會民族文化發展시켜 왔던 것도 事實이다. 그러나, 近世 以來 우리 社會跛行性과 밖으로부터 물결쳐 오는 新文明과의 渦中에서, 後進社會文化的 理想的 混亂을 면치 못한 채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民族文化的 思想的 危機克服하기 위하여 한 새롭고 참다운 文化建設특히, 科學的現代文明精粹集大成이란 커다란 精神的 指標確立과 그 實踐이 이때처럼 火急한 때는 다시없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民族的 現實要請에 의하여 科學者最高機關學術院誕生을 오늘에야 보게 되었지만, 意義야말로 深且大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學術院歷史的 發足하여, 우리 科學者들은 우리에게 負荷使命하여 새로운 認識覺悟를 거듭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다.

 

우리 民族이 이 땅위에 새롭고 참다운 文化再建하고, 그것을 發展시키는 에서 새로운 民族生理發見하게 될 것은 再言치 않거니와 그러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學問自由確保하고 獨創性發揮하여야 하며, 適時 適宜 文化政策에 관한 의견을 政府에 건의할 權利義務賦課된 것을 잊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學術院使命은 이 分明目標達成을 위하여 學問的 實踐行動活潑推進시킴에 있는 것으로 認識된다. 그러면, 우리는 아래와 같은 當面課題推進을 거듭 約束하여 둔다.

 

1.

우리는 過去文化傳統에 대하여 再批判 再檢討를 가하는 同時에 새롭고 健全民族文化 再建指標와 그 實踐具體案確立한다.

 

2.

學問自由確保하고 獨創性發揮하여 우리의 民族文化 뿐만 아니라 널리 人類文化에 있어서의 寄與 貢獻이 있기를 自期한다.

 

3.

先進諸國學術院緊密連絡하여 우리 學界後進性克服한다.

 

1954717

대한민국학술원

 

 

다음은 예술원 <宣言文- 藝術院創立에 즈음하여 ->이다. 참으로 참담하다.

 

 

學問藝術自由保障하고, 科學者藝術家地位向上시키기 하여 制定 公布文化保護法藝術院이 오늘 우리 나라에서 正式으로 發足됨을 宣言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創設되는 藝術院大韓民國憲法해서 保障藝術自由守護 發展시킬 義務法律해서 明示國內外藝術家代表機關이라는 名譽負荷한 것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榮光스러운 義務名譽를 깊이 自覺하고 이를 하여 우리의 最善을 다할 것을 嚴肅盟誓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古典的民族藝術傳統正確繼承하고 現代世界藝術精粹正當吸收하여 우리의 民族藝術正統形成 發展시키는 것이 우리의 基本的路線이며, 이를 해서는 藝術自律性嚴格保障되고 藝術家國家的處遇가 한改善되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것을 이에 闡明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偉大國家礎石偉大藝術創造에 있음을 깊이 認識하고 우리 民族不幸藝術해서 除去되고 우리 民族幸福藝術해서 造成될 것을 믿으며 우리는 藝術하여 靈魂理念榮光創造하는 偉大課業國內外의 모든 藝術家들과 協力 共進할 것을 이에 公約 宣言 하는 바입니다.

 

西紀 1954717

藝 術 院

創立會員一同

 

 

당대 최고급 엘리트 대뇌에서 나온 허접한 개소리가 저들이 지닌 정체성을 웅변해 준다. 학술원 회원 중 친일 인명사전에 수록된 자만도 열다섯이다. 회원은 각종 상, 훈포장을 받아 영예와 이익을 챙겼다. 심지어 골수 부역자는 그 행적을 지워 역사를 왜곡했다. 그뿐만 아니라 회원 80%가량이 서울대(경성제대) 출신이다. 서울대 총장을 지낸 이장무는 이완용의 증손이자 이병도의 손자인데, 그가 바로 현임 학술원장이다.

 

예술원도 화려하다. 친일 인명사전에 오른 예술원 회원은 미술계: 김경승 김기창 김은호 김인승 노수현 윤효중 이상범 장우성, 음악계: 김동진 김생려 김성태 이흥렬 현제명, 문학계: 곽종원 모윤숙 백철 서정주 조연현 최정희, 연극계: 유치진이다. 이들이 일제에 어떻게 부역했는지, 해방 이후에 어떻게 표변해 예술계를 지배했는지 알려지지 않은, 아니 덮어버린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 그런 채 시간은 계속해서 쌓여만 간다.

 

나는 아프고 슬픈 마음을 끌어안고 저들 소굴 앞에서 한참을 서성인다. 학술과 예술이 문화에서 무엇인지 모를 수 없으므로 분함과 안타까움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인적 끊어진 고요한 틈으로 배어들어 버드나무 부()를 심는다. 간절한 팡이실이 기도를 올린다. 저들 소굴 주위를 육중하게 걸어 신령한 외끌이 저인망에 가둔다. 저들 소굴에 가라앉은 흑역사를 죽고 나서도 기억하기로 다짐하며 가슴 식혀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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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정상 진료하느라 미룬 대청소를 초이튿날 한다. 한 시간 반에 걸쳐 진공청소기로 해묵은 먼지와 냄새를 샅샅이 걷어낸다. 갑진년 맞이다. 느지막이 집을 나서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러 책 한 권 품고, 중학천 버드나무-수송동 소나무-조계사 안팎 회화나무-관훈동 이이 집터 회화나무로 이어지는 도심 나무 순례를 한다.


 

점심 먹고 나서 천천히 미도산으로 들어간다. 익숙한 자락길을 거쳐 바로 누에 다리로 향한다. 다리 위에서 서초경찰서를 사진에 담는다. 몽마르트르 공원 남쪽 끄트머리에서 대검찰청을 사진에 담는다. 공원을 나와 동광로와 서초대로로 돌면서 대법원을 사진에 담는다. 이어 반포대로로 들어가 소로를 따라가면서 서울중앙지방검찰청과 서울중앙지방법원을 사진에 담는다. 서초중앙로 고개로 올라가 29길로 돌아들며 서울회생법원을 사진에 담는다. 이는 사법 권력 기관을 보행으로 포위하고 사진으로 체포하는 의례 행위다. 마침내 미도산 출발 지점으로 다시 돌아와 외끌이 저인망에 저 눈먼 특권층 부역 떼거리를 가두어 버린다.


 

미도산 언저리를 떠돌며 살아온 내 삶이 머금은 서사와 오늘 비로소 본격 접속한다. 항일무장투쟁 전사인 내 증조부가 일제 군대에 생물학적으로 살해당했다면, 나는 부역 사법 권력에 사회경제적으로 살해당했다. 저들과 맞서 내가 싸우는 길은 법도 총도 아닌 팡이실이, 그 영적 네트워킹이다. 뼈아픈 경험과 뼈저린 깨달음 사건을 모두 함께한 미도산은 말한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자 그 돌부리를 짚고 일어선다. 나는 잔잔해서 격동에 찬 걸음걸이로 서초중앙로 건너 서초대로를 따라간다. 교대역 지나 조금만 더 걸어가면 15년 전 권력이 짓밟은 내 옛 진료소가 생때같은 기억으로 변함없이 서 있다. 저곳이 바로 내 빈 무덤이다.


 

한참을 서서 바라보다가 사진에 담는다. 애도다. 기림이다. 그대로인 것은 그대로 없어진 것은 없는 대로 보듬으며 옛길을 걸어 도로 미도산 초입에 닿는다. 오늘 팡이실이 표지를 참나무 둥치에 남겨 간절한 비원으로 심어둔다; 죽어서도 이 참담한 부역 역사와 서사를 잊지 않기로 새겨둔다. 일몰 타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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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걷기 심취가 몸에 새겨준 법인(法印)은 중둔근 극통 말고도 더 있다: 발가락, 특히 오른쪽 모든 발가락 끄트머리에 박힌 피멍과 굳은살. 전문가 조언을 따라 발 길이보다 2cm 더 큰 기능성 운동화를 신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은 이 심취가 얼마나 신랄했는지 웅변한다. 곡진하게 씻고 어루만지고 다독였다. 죽어 몸을 태워야 나오는 선객 사리를 나는 살아서 통렬하게 확인할 수 있으니 약동하는 표치(標幟). 표치로서 한 소식을 인정하고 다음 구비로 넘어간다. 그래서 오늘은 미도산(味到山)을 음미도달(吟味到達) 하기로 한다. !


 

서울 성모병원과 미도아파트 사이 소로를 따라가다가 급경사를 이루는 작은 산마루에 오르면 이내 평평한 산책로가 나타난다. 남북 방향으로 난 이 길을 곧장 걸어 올라 정상에 이르면 동서 방향으로 난 능선길로 갈라져 내려간다. 더 나아갈 수 없는 정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이 있다. 동쪽 길은 서울법원종합청사, 서쪽 길은 대검찰청과 대법원으로 가는 서초동 누에 다리에 이른다. 누에 다리 건너서 몽마르트르 공원에서 효령대군 묘, 그리고 매봉재산까지 이으면 우면산을 타고 관악산과 맞닿으니 크게 보아 그 줄기에 속한다.


 

간선에 해당하는 이 T자형 길 말고 걷는 맛 좋은 길이 둘 더 있다. 동쪽 미도아파트 가까이에는 오종종한 소나무 숲을 돌아 완만히 올라가는 비탈길이 있다. 서쪽 서울 성모병원 별관 가까이에는 백양나무, 물오리나무들이 어우러진 부드러운 자락길이 있다. 양쪽 다 날카로운 골로 갈라지지 않아서 물기를 고루 나누어 머금는데 서쪽이 훨씬 더 그렇다. 버섯이 놀랄 만큼 많은 까닭에 내가 오래 머물곤 하는 곳이다. 작은 산이라 이런 면모를 유지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다른 산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던 풍경이다. 음미해서 도달한 진실이다.


 

미도산을 이렇게 걷기는 처음이다. 그동안 아주 여러 번 걸었지만, 숲 전체와 버섯 개체를 동시에 챙기지 못했다. 인연은 그때그때 깜냥대로 이루어지고, 그 인연이 제의도 전선도 품으니 아마도 제대로 된 제의와 전선은 이제부터일 테다. 깨달음은 이치상 언제나 나중에 오는 법. 이렇게 느지막이 나지막이 미도산에 도착하는 일은 처음부터 팡이실이 발 음모가 개입돼 있었음이 틀림없다. 음모는 진리의 본성이다.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역사는 짝퉁 음모에 걸려 살해당한 기록으로 영락했다. 기록 이름이 제국주의다. 이제 나는 그 이름과 싸운다.

 

숲에서 나와 건너편 강남고속버스터미널로 간다. 여행이 아니라 식사를 위해 자주 가족이 모이는 곳이다. 우리가 거기서 찾는 음식은 김치찜, 해물 순두부찌개, 순댓국이 거의 전부다. 따끈한 해물 순두부찌개를 떠먹으며 딸아이가 걷기를 줄여야 하지 않느냐 묻는다. 걷기 목적을 두고는 서로 다른 생각일지라도 어떤 변화를 주어야 할 시점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생각이니 토 달 이유란 없다. 고개 끄덕일 때 음성 하나 들려온다. “제국 거대 부역 도시 한복판, 점처럼 작아서 깊은 숲인 미도산에 작아서 깊은 팡이실이 본진 쌓는 일을 똑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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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여고생 시절부터 노후 걱정하는 환갑 나이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넘도록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제자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젊어서 미국으로 이민 가 여러 풍파를 겪었지만 딸 아들 다 출가시키고 이제 안온한 여생을 모색하고 있다. 최근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며 어째야 할지 묻는다. 나는 한의원에 살고 있는 나무 이야기를 해주었다.

 

처음 왔을 때 그는 천정에 닿고도 남아서 가지 끝이 휘어져 내릴 만큼 컸다. 일조량과 영양이 부족한 상태로 살아가는 동안에 그는 점차 키를 줄였다. 지금은 나보다 조금 더 클 뿐이다. 큰 줄기 셋 가운데 하나는 7년여 전부터 더 이상 가지와 잎을 내지 않았다. 그렇게 13년을 살았다. 내가 해준 일이라고는 물 주기와 잎 닦아주기뿐이었다.

 

지난해 어느 날 도봉산 길 없는 깊은 골짜기를 헤매던 와중 찰나적 집중으로 담아온 흙 한 줌을 그에게 주었다. 몇 주 뒤, 놀랍게도 7년 넘게 가지와 잎을 내지 않던 줄기가 연두색 점 하나를 피워올렸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번져 여러 가지와 잎으로 자라갔다. 나는 매일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그렇게 올해로 14년째 함께 살고 있다.”

 

제자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얼른 알아들었다.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해결책이 있기보다 없는 경우가 더 많으며, 그럴 때는 해소책을 찾아야 한다고 덧붙여 주었다. 그가 어떻게 변화된 삶을 일으킬지 알 수 없다. 아니 어쩌면 특별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특별하지 않을지라도 계기 하나 각별하게 품어 제 의례로 만들어 가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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