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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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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이야기들과 함께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이야기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이야기들과 함께 생각하라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것을 내용으로 환원하고 그 내용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야기와 함께 생각하는 것은 그 이야기를 이미 완결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거기에는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다. 이야기와 함께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한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고, 그 효과 속에서 개인의 삶의 어떤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다.(74-75쪽)


상담하는 인간homo consiliaris.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여기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이야기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이야기들과 함께 생각하라”는 요청에 극진히 감응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경청傾聽합니다. “내용으로 환원하고 그 내용을 분석하는” 짓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전제와 분석틀을 내려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경청敬聽합니다. “이야기를 이미 완결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야기 자체를 공경한다는 것입니다. 경청하고 또 경청함으로써 이야기가 “한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경험”하고 “그 효과 속에서 개인의 삶의 어떤 진실을 발견”할 때, 상담하는 인간homo consiliaris 하나 탄생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아픈 이야기를. 그것도 슬픈 이야기를. 그 사이 제가 겪은 가장 근본적radical이고 급진적radical인 변화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는 순간 몸이 먼저 골똘히 듣는 자세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몸이 골똘히 듣는 자세를 취하면 감성은 활짝 펴지고 이성은 고요히 접힙니다. 이야기를 흠뻑 들을 수 있습니다. 감염이 스며들고 경험이 번져옵니다. 진실에 닿습니다. ‘사흘’ 뒤 이야기와 저 사이에 새로운 이야기가 꽃피기 시작합니다. ‘사흘’은 감응 발효를 기다리는 침묵의 시간을 상징합니다. ‘사흘’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제가 이야기로 아픔과 슬픔 전해온 사람을 치유한 적은 없습니다.


상담하는 인간homo consiliaris으로 살기 위해 애쓰는 동안 무슨 말이든 남의 말을 들을 때 무조건 무장해제하고 듣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이 습관이 때때로 제게 크고 작은 손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일상의 삶은 대부분 손익을 다투는 거래입니다. 그 거래에서 ‘사흘’이 필요한 상대방은 많지 않습니다. 상담실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이 물론 맞지만 저 같은 어수룩한 사람한테는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보는 손해가 그나마 돈 따위면 견딜만합니다. 더러 인격과 인연에 끼쳐오는 손해는 참으로 쓰디씁니다. 삶의 이런 조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 안고 살아가는 것을 운명이라 하면 너무 남루해집니다. 저는 이것을 천명이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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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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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진실성은 가변적이다.

  ·······이야기의 진실성은 무엇이 경험되었는가의 문제일 뿐 아니라 이야기와 그 수용의 과정에서 무엇이 경험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말하는 이야기들이 반드시 살아온 대로의 삶인 것은 아니다. 대신에 이 이야기들은 그러한 삶의 경험이 된다.·······신뢰성이라는 사회과학적 개념·······은 여기에 들어맞지 않는다. 삶은 지속된다. 이야기들은 그런 흐름과 함께 변화하고 경험도 변화한다. 이야기는 경험의 변화에 진실하며, 이야기는 변화의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

  ·······얼버무리는 듯이 한 개인적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 얼버무림은 그들의 진실이었다.(71-72쪽)


“그 어떤 시인도 자신이 쓴 시만큼 살아낼 수는 없다.”


어디서 읽은 것인지 기억나지 않는데 저는 이 말의 제 버전 때문에 늘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 어떤 상담의도 자신이 상담 중에 한 말만큼 살아낼 수는 없다.”


상담에서는 당연히 제 삶과 인격이 말로 표현되어 나타납니다. 제 진실에 터하여 말하는 것은 불퇴의 원칙입니다. 원칙을 지킨다고는 하지만 자책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때로는 덧붙이고 때로는 잘라내는가 하면 심지어 비틀기까지 하는 생각의 작패를 통제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살아내지 못한 이야기를 짐짓 체득한 표정으로 건네기도 합니다. 아마 죽는 날까지 이런 괴리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할 것입니다.


늘 흔들리면서도 이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연유를 저자가 차분하게 설명해줍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말하는 이야기들이 반드시 살아온 대로의 삶인 것은 아니다. 대신에 이 이야기들은 그러한 삶의 경험이 된다.·······신뢰성이라는 사회과학적 개념·······은 여기에 들어맞지 않는다. 삶은 지속된다. 이야기들은 그런 흐름과 함께 변화하고 경험도 변화한다. 이야기는 경험의 변화에 진실하며, 이야기는 변화의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을 요약하면 이렇게 됩니다.


이야기의 진실성은 무엇이 경험되었는가의 문제일 뿐 아니라 이야기와 그 수용의 과정에서 무엇이 경험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더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경험의 진실성은 가변적이다.


『중용』제6장에는 은악이양선隱惡而揚善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악은 감추고 선은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선을 드러낸다는 것은 얼른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악을 척결하지 않고 감추는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악을 너그럽게 묻어주어 언젠가 선으로 돌아설 수 있는 기회를 남겨두기 위함이 아닐까요? 여기 거짓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참과 거짓 여부는 말하는 순간에 최종적으로 가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 지속되는 한, 거짓이 참으로 바뀔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제가 자책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상담치료를 계속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상담하러 오시는 분들 또한 이 지평 안에 있습니다. 때로는 덧붙이고 때로는 잘라내는가 하면 심지어 비틀기까지 하는 생각의 작패를 통제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고통 때문에 훨씬 더 격렬하기까지 합니다. 예컨대 부부 상담의 경우, “이야기의 진실성” 문제는 첨예함의 극치에 이릅니다. 아내의 말을 들으면 아내의 말이 100% 참이고, 남편의 말을 들으면 남편의 말이 100% 참인 상황이 대부분입니다. 둘의 말이 모순된다고 해서 둘 중 하나가 참이고 다른 쪽은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각자 자기 처지를 최대한 반영하여 말하므로 자기 고통은 크고 뚜렷하게 표현하고 상대방의 고통은 “얼버무리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 과장과 “그 얼버무림은 그들의 진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각자 진실이 정면충돌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많은 것은 인생에서 불가피한 일입니다. 모순의 공존이 빚어내는 역설을 있는 그대로 받아 안고 서로 평등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비로소 대승적 진실성이 확보됩니다.


삶이 지속되는 동안 이야기도 지속됩니다. 이야기가 지속되는 흐름을 따라 진실이 형성되어갑니다. 진실은 불변적 실체로서 존재being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은 흔들리면서 결이 되어가는becoming 생명체입니다. 대한민국, 우리 공동체의 진실이 빠른 속도로 그 생명의 결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일방적인 거짓 이야기로 통치를 행사하는 권력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부정선거, 대량학살, 역사쿠데타와 같은 이 시대 “이야기의 진실성은 무엇이 경험되었는가의 문제일 뿐 아니라 이야기와 그 수용의 과정에서 무엇이 경험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책임은 권력이 져야 하되 삶은 우리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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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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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트모던적인 자아의 대안적 형태·······는 “타자를 위한 자아, 타자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자아”이다.·······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되는 것으로 이해되며, 자아는 타자를 위해 살아감으로써만 인간임을 지속할 수 있다.·······(60-61쪽)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세상에 대한 책임이라는 생각은 포스트모던의 핵심적인 도덕을 반영한다. 이야기하기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만큼이나 타자를 위한 것이다.·······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자기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시도일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이야기는 증언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65쪽)


몇 해 전 어느 교회에서 강연을 요청해왔습니다. 한의사가 마음의 병을 상담으로 치료한다 하니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정신과 양의사 두 사람이 앉아서 제 강연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제 이야기가 무척 낭만적이라고 했답니다. 그 이유는 제가 환우와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말을 전한 이에게 대답해주었습니다. 그것은 낭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존재의 문제라고.


물론 서양 정신의학은 의사를 치료의 단독 주체로 설정하므로 상담에서 평등이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의사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됩니다. 환우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분석과 처방을 위한 것일 뿐 의학 서사의 주체적·능동적 콘텐츠로 삼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이들 서양 정신의학의 경계 지음을 모두 인정하지 않습니다. 저의 이러한 태도는 제가 낭만주의자라서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제가 견지하고 있는 인간존재에 대한 이해와 의학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되는 것으로 이해되며, 자아는 타자를 위해 살아감으로써만 인간임을 지속할 수 있다.


서양 정신의학에서 “관계”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타자를 위해 살아감으로써만 인간”인 의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말한다면 서양 정신의학에서 의사는 인간이 아닙니다.


의사가 자기 이야기를 하느냐 마느냐, 도 마찬가지 문제입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세상에 대한 의사의-인용자 부가- 책임이라는 생각”이 바로 제 생각입니다. 이는 비단 세상에 대한 책임 뿐만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자기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시도일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이야기는 증언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자기 앞에 앉은 환우는 물론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사가 자기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않는다면 그 자체로 수탈 행위입니다. 특정 병력이 있느냐와 상관없이 의사 또한 완전하지 않은 도상의 존재입니다. 의사 또한 죽는 날까지 자라가야 하는 과제를 지고 있습니다. 자라감으로서 치료는 상호작용입니다. 의사는 증언의 의무에서 벗어난 예외적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정교한 거짓말(허윤진 평론집 『5시 57분』44쪽)에 지나지 않는 이른바 ‘과학인 의학’ 위에 올라타 떠는 시건방을 의사는 즉각 내려놓아야 합니다. “타자를 위한 자아, 타자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자아”의 길로 내려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타자를 위해 살아감으로써만 인간임을 지속할” 길을 이탈한 자들은 의사뿐이 아닙니다. 부패한 사회의 지배층은 모두 이런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드디어 엊그제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세월호를 뒤집던 그 협잡으로 이번에는 역사를 뒤집겠다고 날뜁니다. 자기 삶을 변화시키지 않겠다고, 아니 자기만 살겠다고, 자기 이야기를 거부하려는 저 인간 아닌 종자들을 우리가 과연 어찌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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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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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식민주의가 지리적 영토를 탈취한 것과 마찬가지로, 모더니스트 의학은·······환자들을 자신의 영토로 선언하였다.·······(52쪽)

  나는 구강암 때문에 턱과 얼굴에 광범위한 재건 수술을 해야 했던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의 치료는 대단히 특별한 것이어서 그의 외과의는 그에 관한 의학 학술지 논문을·······출판했다.·······그 논문을 봤을 때, 나는 그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그 의사와 학술지는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설령 그의 사진이 실렸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하여 “그의” 논문에서 그는 단지 몸 이상이 아닌 어떤 사람으로, 아니, 사실은 어떤 것으로, 체계적으로 무시되었다. 의학적인 목적에서 보자면 그 논문은 전혀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외과의의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의학 학술논문이라는 주인텍스트master text가 고통 받는 개인을 필요로 하면서 그 고통의 개별성은 인정하지 않는 식민화이다.(55-56쪽)

  식민화는 모더니스트 의학의 성취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이다.·······

  ·······오랜 기간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포스트-식민적 아픈 사람은 자신의 고통이 그 개별적 특수성으로 인식되기를 원한다. “되찾기”reclaiming는 유효한 포스트모던 어구이다.(53-54쪽)

  ·······자신의 목소리를 표현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아의 구성에 있어서 포스트모던적일 뿐만 아니라보다 구체적으로는 포스트-식민적post-colonial이다.(52쪽)


의학은 의외로(!) 심히 정치적인 학문입니다. 진단과 치료를 구성하는 학문적 내용은 물론 현실 의료행위에서 근본적 정치성을 드러냅니다. 나아가 한 국민국가의 보건의료체계의 근간이 되어야 하니 더 그렇습니다. 다국적 제약회사의 로비에 조종당하는 세계보건의료체제에 편입되어 있으니 더더욱 그렇습니다. 과학과 그 중립성의 이름으로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지만 실은 그 정치적 위세에 편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사 자신이 모르거나 알고도 속을 따름입니다.


의학이 정치적인 것은 역사적인 측면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저자가 지적하듯,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식민주의가 지리적 영토를 탈취한 것과 마찬가지로, 모더니스트 의학은·······환자들을 자신의 영토로 선언하였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입니다. 정치경제학적 역사 진행과 의학적 역사 진행이 패럴렐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정치경제적 식민주의와 의학적 식민주의 패럴렐에는 저자가 파악하지 못한 진실이 있습니다. 정치경제적 식민주의는 본디 남의 나라를 침략·수탈하는 근대 제국주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본국민의 수탈을 일러 식민주의라 하지 않습니다. 의학적 식민주의라는 말을 쓸 때 저자는 이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단순화한 것이 사실입니다. 저자 자신이 제국의 본국민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 학문적 불철저성의 결과입니다.


의학적 식민주의가 말 그대로 일어나는 현장은 우리처럼 실제 식민지를 경험한, 식민지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시공간입니다. 영화나 TV드라마에서 나오듯 의사들이 주고받는 본국어를 한글자막으로 깔아주어야 겨우 알아먹는 식민지 신민이야말로 의학의 “영토”입니다. 만일 식민주의라는 말을 본국에도 적용할 것이라면 실제 식민지에는 식민의 식민주의, 그러니까 중첩식민주의라는 말을 써야 할 것입니다. 이래야 실제 식민지가 이중적 수탈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한국인 환자가 영어로 된 의학 서사에서 당하는 수탈은 미국인 환자가 영어로 된 의학 서사에서 당하는 수탈과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모던 시대 의학, 식민지주의 의학이 앗아간 영토 “되찾기reclaiming”, 그러니까 포스트모던 의학, “포스트-식민적post-colonial”인 서사의 구성 또한 중첩적인 과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국 본국의 의학이 식민지 의사를 통해 수탈하기 때문입니다. 식민지 신민의 “고통의 개별성”이 이중적으로 수탈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더 깊은 수렁입니다. 그만큼 더 힘든 싸움입니다.


우리사회의 의학적 식민주의 문제에는 또 다른 국면이 있습니다. 전통의학인 한의학의 위상 문제입니다. 장구한 세월 동안 동아시아문명, 그 안의 조선 문명을 떠받쳐온 독자적 패러다임의 의학인 한의학이 분명히 현존하나 식민주의 양의학은 이를 사실상 부정하고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한의학을 말살하기 위해 한의사를 의생이라 폄하하고 양의사를 의사라는 보편 명칭을 부여한 연장선상에서 해방 70년이 흘러갔습니다. 해방 직후 조헌영 등 극소수 지사들의 노력으로 한의학은 제도 밖으로 쫓겨나는 것을 면해 오늘에 이르렀지만 갈수록 신식민지 전략의 식민지적 수탈은 강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진실을 아는 의료민중은 많지 않습니다. 식민지 신민 교육과 프로파간다에 현혹되어 그들도 한의학을 부차적·부가적 의술 또는 보약 팔아먹는 잡술 정도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서사가 이중적으로 수탈당하고 있는 진실에서 아스라이 멀어지고 있습니다.


제국 텍스트, 그러니까 환자를 “체계적으로 무시”하는 “주인텍스트master text”를 몰아내고 “자신의 목소리를 표현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이끄는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의학 서사를 쓰기 위해 우리는, 나지막이 두런거리기 시작해야 합니다. 멀찌막이 내다보고 꿈을 꾸어야 합니다. 큼지막이 그림 그려 대동의 치유세상을 터야 합니다. 느지막이 떠나는 만큼 결코 물러서지 않을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 싸움을 위해 오늘 여기서, 한의학의 한 주체인 한의사들은 서로주체인 이 땅의 의료민중에게 무릎 꿇고 고백과 사죄의 말씀을 올려야 합니다. 한의학도 어려운 의학 용어로 의료민중을 수탈해온 것이 일반적 사실입니다. 필요를 넘는 비싼 한약으로 의료민중을 수탈해온 것도 수긍할만한 사실입니다. 의학 아닌 미용술로 의료민중을 수탈해온 것도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일부 한의사들 짓이라고 변명하지 않고 대승적으로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렇게 엎드려야 비로소 의학적 식민주의에 대항한 전선에 참여할 자격을 얻습니다.


먼저 저부터 무릎 꿇고 엎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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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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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시대에 다른 모든 종류의 이야기를 압도하는 것은 의학적 서사이다.·······아픈 상태에 부여되는 핵심적인 사회적 기대가 아픈 사람 스스로·······자신을 의사의 치료에 양도해야 하는 것·······서사적 양도narrative surrender·······처방된 물리적 치료법을 따르기로 동의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의학적 용어로 말하기로·······동의한 것이기도 하다.·······

  ·······의학은·······알지 못하는 언어로·······공격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로 남게 한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는 능력이 복원되는 때이다.·······아픈-인용자 첨가-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이상 이차적인 것이 아니라 각자 일차적인 중요성을 갖게 될 때 포스트모던 경계를 건널 수 있다.(45-48쪽)


느지막이 들어간 한의대에서 공부할 때 가장 힘들었던 것 가운데 하나가 해부학이었습니다. 한의대가 웬 해부학이냐 하실지 모르지만 양의대가 한의학을 의학으로 인정하지 않아 일절 배우지 않는 것과 달리 6년 동안 서양의학 각과를 기본적인 것은 모두 배웁니다. 양의사는 한의사가 자신을 흉내 낸다고 하지만 흉내가 아니라 하나의 패러다임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해부학도 1년 동안 배우는데 아주 내실 있다고 하기는 어려우나 여기서 유급자가 몇 명씩 나올 정도로 문제적인 과목임에 틀림없습니다. 제 경우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라틴어나 영어로 되어 있는 용어를 무조건 빨리 암기해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결국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말로 암기하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아마 해부학 교수는 매우 난감했을 것입니다. 틀렸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놓고 인정할 수도 없고·······. 자기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만학도의 궁여지책을 마지못해 묵인하여 적절한 학점을 주었습니다. 덕분에 유급을 면하고 본과 2학년에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해부학 공부 때문에 낑낑거리던 어느 날 문득, 고등학교 막 졸업한 한의대 학생들은 아마 갑자기 맞닥뜨린 한의학 한자 용어를 제가 맞닥뜨린 해부학의 외국어 용어와 거의 동일하게 어려워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에게 한자는 그림에 가까웠을 테니 말입니다. 중견 한의사가 된 지금도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획순 틀린 채 그림 그리는 상태로 한자 용어를 적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 대부분 그냥 한글 음으로 표기할 것입니다. 양의학이든 한의학이든 전공한 의료인한테도 이럴진대 의학과 전혀 상관이 없는 환자들한테 의학 용어와 의학 이야기는 그야말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지나지 않겠지요. 자기 자신의 질병과 고통과 삶에 관한 이야기와 전혀 소통할 수 없는 환자의 자기소외를 저자는 “서사적 양도narrative surrender”라 표현했습니다. 저는 surrender를 양도라 번역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양도란 법률행위의 당사자가 자신의 권리나 법률상의 지위 따위를 남에게 넘겨주는 자발적·능동적 행위입니다. 환자는 자기 질병에 관한 서사의 권리를 의사에게 자발적·능동적으로 넘겨주는 것이 아닙니다. 빼앗기는 것입니다. surrender는 항복입니다! “의학은·······알지 못하는 언어로·······공격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로 남게 한다.”는 말이 정확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환자가 의학적 진단과 치료로 “공격” 받고 의학적 서사로 거듭 “공격” 받는 시대를 모던 시대라 합니다. 환자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는 능력이 복원되는 때”를 “포스트모던 시대”라 합니다. 포스트모던은 이 책이 나올 무렵 일세를 풍미했던 논쟁적 용어입니다. 오늘 날 이 말 자체를 새삼스럽게 쟁점 삼을 이유는 없습니다. 의학적 서사의 “압도”적 “공격”에서 환자를 해방할 당위성에 맞추어 “복원”의 상징으로 재소환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환자가 자기 목소리로 자기 이야기를 “일차적인 중요성”의 호위를 받으며 해낼 때 “포스트모던 경계”가 뚫립니다. 포스트모던의 바다에서는 의학적 서사가 하나의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환자의 사회인문적 서사에 감싸인 ‘중요하지만 작은’ 특이점일 따름입니다. 의사가 의사이기 전에 인간이듯 의학적 서사는 의학적 서사이기 전에 인간의 서사여야 합니다. 인간의 서사로 귀환하려면 환자의 살아 있는 목소리를 경청傾聽하고 또 경청敬聽해야 합니다. 의사의 참 지위post는 필경 환자의 ‘포스트-post-’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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