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와 산과의사 - 개정판
미셀 오당 지음, 김태언 옮김 / 녹색평론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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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책에 길이 있다고 하지만 본디 책에 있는 것은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지도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이 책, 『농부와 산과의사』. 그 제목을 접하는 순간 저는 선명히 선명한 길 하나를 보았습니다.


번역본마저도 10년이 넘은 책을 두고 뒤늦게 호들갑을 떠는 것일 수 있으나 마치 오랫동안 사랑해온 사람에게서 ‘사랑한다.’는 고백의 말을 듣는 것과 같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식물적 생명 감수성을 지닌 데다 그 감수성으로 사람의 죽은 마음을 어루만져 되살리는 의사인 만큼 ‘선명히 선명한 길’을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저자는 산업적 출산으로 야기된 인류의 위기를 누구보다 생생히 경험한 산과의사입니다. 산업적 개입을 최소화하고 출산생리 본연의 이치를 구현하는 혁명이 필요하다 생각하고 실천에 옮긴 장본인입니다. 자신의 일이 산업적 영농으로 야기된 인류와 자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농업혁명과 본질이 같다는 사실에 터하여 그는 이 책을 썼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백척간두에 선 인류와 자연을 살리기 위한 근본적인 급진성radical radicality, 그 천명天命의 길은 농업혁명과 출산혁명의 연대뿐입니다. 더 근본적인 것은 없습니다. 더 급진적인 것도 없습니다. 이 근본적 급진성에는 공통된 속성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치유”입니다. 이미 깊이 병든 인간과 자연을 치유하는 데서 참 혁명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혁명이되 이전까지의 남성가부장적 파시즘적 혁명은 안 됩니다. 대大모성적 영성적 혁명이어야 합니다.


특히 산업적 영농과 산업적 출산의 폐해가 자심한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에게 이 치유혁명은 그 어떤 공동체보다 끽긴한 과제입니다. 매판독재를 대놓고 표방하는 이 나라 불의한 권력과 자본, 그리고 종교의 삼각동맹을 깨뜨릴 근본적 급진성은 선거나 총구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농투성이’와 ‘어미’의 손, 그 극진한 사랑의 손에서 나옵니다. 제가 본 ‘선명히 선명한’ 길이 이제 떠오르시는지요?


150쪽이 채 안 되는 작은, 그래서 큰 이 책을 꼼꼼히 챙겨보려 합니다. 요지부동으로 매판독재 정당만 찍어대는 비율과 제왕절개 하는 비율이 정확히 일치하는 이 땅에서 마음병 치유한답시고 주절대는 의사인 제게 각고의 순간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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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의사議師이며 의사義士이며 의사儀司이어야 한다. 






1. 議師란 단지 병만을 고치는 기술자가 아니라 건강한 삶 전체를 함께 의논 또는 숙의하는 스승이어야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2. 義士란 개인의 문제는 언제나 정치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아 공동체 전체의 의로움을 위해 싸우는 올곧은 선비여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3. 儀司란 생멸의 벼랑 끝에 몰린 인류와 자연을 보듬어 안고 영성적 치유를 행하는 숭고한 사제여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의 여명기에 개인 건강의 지도자와 사회의 정치 지도자, 그리고 영성의 지도자는 하나였습니다. 타락으로서 분리를 겪으면서 개인 건강의 지도자인 의사는 단지 질병을 고치는 기술자가 되어버렸습니다. 21세기 인류는 파멸과 개벽의 기로에 섰습니다. 개벽으로 가는 길에 서려면 의사는 議師이며 義士이며 儀司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議師이며 義士이며 儀司인 의사일까요? 생각이 맑고 바른 사람 모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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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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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 한의학, 치료로 만나다』출간 직후 시사인의 고재열 기자와 잠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원효의 화쟁사상 쪽으로 화제가 옮겨졌습니다. 그는 자녀에게 용서·화해에 앞서 제대로 싸우는 법을 가르친다고 했습니다. 저 또한 원효는 대부분 오독되고 있으며 옹골차게 입쟁立諍하는 것이 포인트라고 강조했습니다.


통속종교는 더할 나위조차 없거니와 통속만이 대박 나는 한국사회가 범죄 수준으로 억압하는 것이 다름 아닌 옹골찬 의심, 옹골찬 질문, 옹골찬 싸움입니다. 그것을 신앙이라 하든 국론통일이라 하든 사실은 극소수 권력층의 안위를 위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제제기立諍를 철저히 해야 철저히 싸울 수 있고, 철저히 싸워야 후회 없이 싸움을 끝낼破諍 수 있습니다. 후회 없이 끝난 싸움을 전제하지 않은 화和는 야합입니다.


어찌 하면 옹골차게 입쟁立諍할 수 있을까요? 물론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토대는 인문정신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우리가 함께 읽어온 『인간의 위대한 질문』을 통해 이 인문정신이 제기하는 질문을 결결히 겹겹이 목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6.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에서 이미 말씀드린 대로 좀 더 구체적으로 좀 더 현실적으로 질문하려면 사회과학적 상상력이 보태져야 합니다. 정치경제학비판의 안목이 없으면 질문에 역동성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역동성이 실천을 머금습니다.


우리는 이 책의 에필로그를 음미하면서 마지막에 신을 소중히 여기며 대접한다는 말의 내용이 과연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인문정신의 밋밋한 보편을 넘어 울퉁불퉁한 개체의 답을 하려 할 때 단도직입으로 육박할 수 있는 길은 예수 삶의 구체적 맥락입니다. 예수는 우리 옆에 동행하는 낯선 사람임과 동시에 그 낯선 자를 소중히 여기며 대접한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를 본뜨는 삶을 통해 우리는 우리 안에 깃든 신성을 드러낼 수 있으며 신성이 내주하는 인간의 숭고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다시 귀 기울여야 할 말은 이것입니다.


“예수를 본뜬다는 것은 예수의 삶만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모방한다는 뜻이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며, 예수의 자기희생에 담긴 궁극적 의미가 드러나는 곳이다.

이처럼 격렬하게 사랑하는 하느님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형상은 고문 받고 처형당한 정치범이다.·······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과 연대한 까닭에 죽음을 맞는 정치범 말이다.”(테리 이글턴의 『신을 옹호하다』 38쪽)


테리 이글턴이 과격하다고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둘 중 하나입니다. 예수, 그러니까 신의 길을 아직 모른다가 하나입니다. 알아도 그런 길은 가지 못하겠다가 둘입니다. 물론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을 강요당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적어도 배철현을 함께 읽어온 독자라면 자신의 인연과 선택 자체에 옹골찬 의문 하나쯤은 품어야 할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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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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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바로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매일매일 만나는 ‘낯선 자’라·······우리와 생각이 다른 낯선 자를 회피하거나 차별하고 우리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신을 만날 수 없다. 우리는 ‘자아’라는 무식에서 벗어나 ‘무아’로 신을 대면하기 위해 ‘다름’을 수용하고 우리의 삶을 적극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어떤 존재를 우리는 신이라 부른다. 신의 특징은 바로 ‘낯섦’과 ‘다름’이다.·······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자신에게 주어진 제한된 경험을 통해 형성된 파편적이고 편견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신과 완벽하게 다른 존재와 만나는 것이 바로 종교다.

  나와 다른 이데올로기와 종교, 세계관을 가진 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들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신을 만날 수 없다. 그 낯섦과 다름을 수용하고, 그 다름을 참아주는 것이 아니라 소중히 여기며 대접할 때 신은 비로소 우리에게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낼 것이다.(341쪽)


『인간의 위대한 질문』이라는 제목을 단 책의 에필로그가 <16. 너의 옆에 동행하는 낯선 자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을 단 글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필연이기도 하고 진부한 동어반복의 우연이기도 합니다. 그 질문에 신이라는 답을 내놓으면 일상 속에 스며든 장엄을 알아차리는 경이를 향하게 되므로 의미심장한 필연입니다. 그 신이 결국은 이웃이라는 미만함으로 번져가므로 진부한 동어반복의 우연입니다. 그러니까 신을 묻는 질문과 이웃을 묻는 질문이 매끈하게 하나로 연결되는 순간 “항상 옳은데 늘 무력한” 말의 전형으로 떨어져버린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처한 정확한 상황입니다. 기독교인 그 누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이라는 사실을 모를 것이며, 내 옆에 동행하는 낯선 이웃이 다름 아닌 하나님임을 부인할 것입니까. 기독교인의 이 당연한 지식이 지금 망해가는 대한민국 사회에 대체 무슨 힘으로 작동하고 있습니까. 아무런 저지 능력이 없다는 표현은 도리어 부족합니다. 광적으로 부추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대체 왜 이런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우리가 <4.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장한 일이냐?>에서 살펴보았듯 질문을 거꾸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웃’ 문제에서 질문 받는 사람을 중심에 놓고 누가 이웃이냐를 물어서는 안 되고 고통 받는 사람을 중심에 놓고 무엇이 이웃이냐를 물어야 한다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누구’는 정체성의 문제이고 ‘무엇’은 실천의 문제라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정체성은 명사의 문제이며 실천은 동사의 문제입니다. 내 옆에 동행하는 낯선 자가 신이라는 사실은 명사적 문제입니다.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신에게 내가 무엇을 실천하느냐는 동사적 문제입니다. 절대 중요합니다. 나의 주체적 실천이 없고서는 옆에 동행하는 자가 신이라는 사실은 아무런 의미도 흥미도 지니지 못합니다. 신을 보거나 믿어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 신을 “소중히 여기며 대접할 때” 구원을 스스로 빚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히(!) 신을 소중히 여기며 대접한다는 말의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요? 아쉽게도 이 책의 답은 밋밋합니다.


왜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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