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무 위에 가지와 잎이 많이 달린 부분을 수관(tree crown)이라고 한다. 포유류 중 이 수관이라는 서식지를 니치(niche)로 삼은 종이 나타났다. 우리 조상인 원숭이다.
나무 위를 니치로 선택한 원숭이류에는 여느 포유류와는 다른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눈 위치다···육식동물과 마찬가지로 눈이 정면을 향해 있다.
두 번째는 손 변화다···엄지손가락이 다른 손가락과 마주 보고 있어 나뭇가지나 먹이를 잡을 수 있다···손톱을 납작한 모양인 편조(扁爪)로 바꾸었다. 그리고 손가락 끝 감각으로 가지를 잡게 되었다.”(이나가키 히데히로『패자의 생명사』 203~204쪽)
나는 이 대목에서 아주 긴박한 시간, 매우 날카로운 의식으로 머무른다. 어느 찰나 직립보행으로, 소뇌로, 신체 뇌 개념으로, 다중 기원 뇌 발생 가설로, 마침내 네트워킹 원리 재구축으로 단도직입 달려간다. 가만 앉아 있을 수 없어 벌떡 일어나 계속 걷는다.
무엇보다 먼저, 원숭이가 나뭇가지를 손으로 잡고 이동하며 살아가는 풍경부터 상상한다. 수관이 인간 진화 발원지라는 사실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나무란 인간에게 무엇인가, 정색하고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나무에 기댄 삶 덕분으로 인간은 특별한 눈, 특별한 손을 지니게 되었다. 그 눈, 그 손 덕분에 인간은 직립보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눈은 직립 시 균형감각에 필수적이다. 손을 자유롭게 쓰기 위해 직립은 필수적이다.
이 눈, 이 손 모두가 가장 중요하게 연결된 곳이 다름 아닌 소뇌다. 소뇌를 빼놓고 직립보행을 말할 수 없다. 직립보행을 빼놓고 인간을 말할 수 없다. 인간을 말하는 데에 그동안 소뇌가 너무 소외되어오지 않았던가. 대부분 운동과 균형, 뭐 이 정도 알고 넘어갔다. 소뇌 소외를 전복하지 않는 한 인류가 파멸을 피할 길은 없다.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 운명은 무엇이 갈랐을까. 작지만 호모사피엔스 뇌는 커뮤니케이션을 도모하기 위한 소뇌가 발달했다. 약한 자는 무리를 짓는다. 힘이 약한 호모사피엔스는 집단을 만들어 살았다. 그리고···자기 힘을 보충하기 위해 도구를 발달시켰다···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으면 즉각 공유했다.”(같은 책 222쪽)
공동체 소통에 소뇌라니? 나는 독서를 멈춘다. 대뜸 소뇌를 찾아 나선다. 나만 무식하지는 않구나. 소뇌 연구한 단행본 한 권이 없다. 조각 정보로 떠도는 숱한 이야기 가운데 대다수는 운동에 관한 내용이다. 틈새로 흘러 다니면서 중요한 이야기들을 발견한다. 이 이야기들을 되작거리고 집적거리고 끼적거리면서 이리저리 덤빈다. 변방 사람이 공부하는 기본 방식이다. 어디로 어디까지 갈지 나는 모른다.
2. 마음병을 치유하면서 내가 아픈 사람에게 빠짐없이 해온 얘기가 있다. “치유는 접히거나 구겨진 마음을 펴거나 펼치는 일이다.” 어디 마음에서 그치겠나. 마음에 병든 사람은 걷기도 접히거나 구겨져 있기 마련이다. 모진 우울증에 시달리며 스스로 그 진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이상한(!) 점 하나를 발견했다. 걸음을 펴거나 펼치려고 몸을 움직이다가 한쪽 발로 제법 오래 서 있는 동작을 취할 때였다. 우연히 잠깐 눈을 감았는데, 그 즉시 심하게 흔들리며 자세가 무너지고 말았다. 이치와 기전은 모른 채, 시각과 몸 평형감각은 직접적인 관계가 있구나, 깨달았다. 둘 사이에 소뇌가 있다는 사실을 요 며칠 사이 비로소 접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소뇌가 시각에도 관여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해야 맞다. 내 무식 행진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시각뿐이 아니다. 소뇌는 속귀에 있는 평형 조절기관에서 정보를 받는다. 청각과 평형감각은 어떤 이치로 결합하는가. 나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평형감각이 시각, 청각, 촉각 같은 감각 정보에 의존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그중에서도 청각 의존도가 가장 높다는 주장이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성은 작지 않다. 실제로 청각 기능 떨어진 노인들은 낙상 위험이 크고, 낙상하면 50% 정도가 1년 안에 사망한다. 이즈음에서 생각한다: 소뇌라는 이름 자체에 이미 무지와 편견이 담겨 있지 않은가.
3. 소뇌는 물론 대뇌보다 작다. 하지만 뉴런 80%가 소뇌에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 많은 뉴런이 쓰일 만한 곳에서 쓰일 수 있도록 거기 있지 않겠나. 대뇌가 명령하면 소뇌가 움직인다는 일방적 설명 역시 무지와 편견이 아닌지 의심한다. 이 의심은 뇌가 장내 미세 생명에게 보내는 정보와 그 반대 방향 정보가 1:9라는 전복적 사실을 연상시킨다. 이 전복이 마음을 뇌라 하는 망발의 종말이듯 두고 보면 머지않아 대뇌 제국주의 종말을 목도할 수 있으리라.
여기서 그 단서를 찾아본다. 소뇌 평형감각이 시각, 청각, 촉각 같은 감각 정보에 의존한다는 사실에서 다시 출발한다. 시각, 청각, 촉각 정보를 소뇌가 받아들여 오직 균형 잡기만을 위해서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일은 아무래도 이치에 닿지 않는다. 시각, 청각, 촉각 정보는 그 감각을 일으키는 대상에 감응하고 감수하고 감동함으로써 다른 감정을 일으켜 새로이 관계 맺는 변화 과정 전체와 연관 지어야 한다. 이 과정은 당연히 다양한 인지 작용을 수반할 수밖에 없고, 대상이 사람일 경우에는 사회적 차원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이치를 담은 진실이 “커뮤니케이션을 도모하기 위한 소뇌”(같은 책 222쪽)다.
그렇다. 소뇌는 인간 정서(두려움, 쾌락)와 인식(주의, 언어), 사회적 행동을 조절한다. 대뇌가 일방적으로 내리는 명령에 따르는 단순 하급 기관이 아니다. 둘은 일정 정도 상호작용한다. 향후 연구에 따라 기축이 역전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대뇌 제국이 무너지고 소뇌가 일으키는 팡이실이가 복권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문제와 각별하게 마주한다.
4. “분류해서 분리한다.”(같은 책 233쪽)
인간 뇌 주특기다. 물론 대뇌 중심 사실이다. 대뇌 대극에 소뇌를 놓을 수 있다면, 소뇌는 종합과 통합을 주특기로 하는가? 현대 뇌 과학이 아직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으므로 내가 지닌 비대칭 대칭 사상에 터 잡아 연역추리를 한다. 뇌 구조·운동 또한 비대칭 대칭으로 이루어진다고 전제할 때, 소뇌 주특기는 종합과 통합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인간은 생명으로서 살아가지 못한다. 이 비대칭 대칭을 다시 다른 결로 표현한다: 소뇌는 몸 극, 대뇌는 마음 극. 몸 극으로 기울수록 종합·통합은 융해에 가까워지고, 마음 극 쪽으로 기울수록 분류·분리는 해체에 가까워진다. 후자를 문명이라 하고, 인류는 이 길을 맹렬히 좇아왔다. 마침내 대뇌 제국주의가 인류를 제6 대멸종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오늘,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명료하다: 반제국주의 소뇌 혁명.
5. 반제국주의 저항으로서 소뇌 혁명은 간단명료하다: 걷기.
La marche est spiritualité, elle nous connecte à l’univers.
“걷기는 우주 진리를 몸 사건으로 일으키는 인간 존재 양태다. 두 발과 다리는 비대칭 대칭을 이루며 움직인다.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미는 동작을 교차 반복한다. 찰나적으로만 땅에서 서로 연속되고, 나머지 모든 시간 동안은 서로 단절된다. 연속과 단절, 역설적 본성이다. 연속될 때는 단정하게, 단절될 때는 기우뚱하게 균형을 이룬다. 연속과 단절, 역설적 조화다. 걷기는 정확하고 절묘하게 우주 운동을 담는 인간 행위다. 몸짓으로서 인간 그 자체다.”
<몸짓 녹색의학-걷기를 종지 삼다>에서 말하는 걷기 존재론이다. 걷기가 존재론적 차원임을 셰인 오마라『걷기의 세계』도 인정한다.
“걷기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경험이다.”(167쪽)
“걷는 인간(homo ambultus)이 걷는 인민(populus ambultus)을 경험할 때, 혁명이 된다. 사회가 문화가 뒤집힌다. 정치가 경제가 엎어진다.”
<몸짓 녹색의학-걷기를 자세히 말하다>에서 말하는 사회정치적 걷기다. 셰인 오마라도 <사회적 걷기>라는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걷기는 개인적 운동성보다 훨씬 더 많은 역할을 한다. 바로 사회적 상호작용 원동력이 되는 일이다···걷기가···뚜렷한 사회적 목적을 지니고 진화했다는 사실은 걷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이지만 쉽게 간과된다.”(232쪽)
나나 그나 걷기가 지닌 누락 불가 진실에 닿아 있다. 그런데 둘 다 가 닿지 못한 지성소가 있다: 존재론적이며 사회정치적인 걷기 인텔리전트터미널은 소뇌다. 그런데 그가 지성소 소뇌에 가 닿지 못한 일은 아무래도 수상하다: 그는 뇌 과학자다. 『걷기의 세계』 그 어디에도 소뇌는 언급되지 않는다. 결국 그래서 소뇌 혁명, 정확히 소뇌 인식 혁명이 필요하다. 기존 소뇌 인식을 혁파해야 걷기에 대한 인식 실재에 도달한다. 실재로서 걷기는 그 자체로 팡이실이다. 팡이실이는 몸을 통해 몸을 넘어선다. 몸을 통해 몸을 넘어서는 사건을 영이라 한다. 영은 공생을 무궁토록 일으키는 통렬한 운동이다. 이 통렬 운동으로만이 대뇌 제국주의 일극 집중 음모를 끌어안아 본디 비대칭 대칭 세계를 재건할 수 있다. 재건 본진이 다름 아닌 소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