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있는 것은 먹지 않는다.” 어느 비건이 한 이 말을 <시사인> 기사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가 이 말을 하는 2초 정도 시간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남이 모르거나 가닿지 못하는 진실을 혼자 알거나 가닿을 때 짓는 표정과 자신이 모르는 줄 모르면서 남이 아는 얘기를 할 때 짓는 표정은 아마도 같거나 적어도 비슷하지 싶다.‘

 

저 말은 얼굴이 대체 뭘까를 화자가 진지하게 생각해본 뒤에 하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육식하는 사람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비범해 보이는 저 말도 피상적일 가능성이 작지 않다. 왜냐하면 동물에게는 얼굴이 있고, 식물 또는 그 이전 생명체에게는 얼굴이 없다는 통속한 상식만으로 비범해 보이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과연 식물 또는 그 이전 생명체에게는 얼굴이 없을까? 동물이 지니는 얼굴을 기준으로 삼으면 딱 잘라 그렇다고 대답하는 데 큰 고민이 필요하지 않다. 대체로 어떻게 생겼으며 무엇을 하며 무엇에 쓰이는지 상식으로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으나, 여기가 끝이 아니라고는 아무나 생각할 수 없어서 문제가 아연 어려워진다.

 

동물과 식물은 각각 다른 원리로 생존 전략을 구사한다. 동물은 기관 중심 시스템이다. 이동하는 생명체로서 선택하고 집중하는 데에 비교 우위를 지니기 때문이다. 얼굴도 그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식물은 모듈 분산 시스템이다. 이동하기 힘든 생명체로서 모든 조건을 견디며 생명을 보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얼굴뿐만 아니라 다른 기관도 지니지 않는다.

 

이런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얼굴 유무를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동물 중심주의, 곧 얼굴 제국주의에 해당한다. 얼핏 들어도, 정색하고 들어도 얼굴 없는 생명체를 낮게 평가하는 배음이 들려온다. 진실은 그 반대라고 생각할 수 없다면 이는 매우 심각한 무지 상태다. 전방위·전천후 생존 솔루션을 구축한 식물이 훨씬 더 고등한 생명체다. 모든 곳이 얼굴이니까.

 

여기에 반대할 수 있는 관용을 베푼다. 반박을 기대한다. 일단 다음 이야기를 더 하겠다. 얼굴이란 과연 무엇인가? 얼굴 전문가는 수없이 많다. 그 많은 전문가가 일제히 놓치고 있는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얼굴이 생식기라는 진실이다. 이 진실을 놓친 실패 또한 종 편견에서 발원한다. 좁은 의미 생식기가 얼굴에서 멀찌막이 따로 떨어져 존재하기 때문이다.

 

식물 생식기는 이와 다르다. 꽃은 인간 미감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식을 위해 아름답게 핀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꽃이라 부르는 부위는 꽃잎, 암술, 수술, 꽃가루, (변형된) 꽃받침 모두를 포함한다. 이 통칭하는 꽃은 생식기와 얼굴을 함께 품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식물은 좁은 의미 얼굴도 지니고 있다. 그 얼굴은 곰팡이 얼굴 버섯에서 왔다.

 

버섯이라면 인간은 우선 식품으로 표상할 뿐 별달리 생각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봐야 항암 효과 운운, 그리고 송로버섯 운운. 버섯은 곰팡이 생식기다. 곰팡이는 지구 생태계를 네트워크 시스템으로 설계한 창조자다. 이 창조자에게서 버섯이 왔고, 식물 꽃이 왔고, 동물 얼굴과 성기가 왔다. 인간은 버섯이 인간 성기를 닮았다며 무식하게 킥킥댄다.

 

말이 나온 김에 끝까지 간다. 비건은 버섯을 먹는가? 버섯을 식물이라고 생각하고 생각 없이 먹고 있음이 틀림없다. 버섯은 식물이 아니다. 곰팡이가 식물이 아니니 당연하다. 구태여 따진다면 버섯은 본성에서 동물 쪽으로 기울어진다. 생김새와 질감이 그 증거다. 무엇보다 동물 본성이 여기서 발원한 진실에 무지해서 인간은 뒤집힌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마지막으로 먹는 행위를 도구화하고 있는 태도를 전복해야 한다. 먹는 행위는 자체로서 먹이가 되는 생명과 소통하는 제의이기도 하다. 제의란 인간 본성에 가닿는 행위다. 거룩하다. 거룩한 만큼 신난다. 얼굴 있네, 없네, 논의 따위가 얼마나 모욕적인지 알아야 한다. 먹는 행위를 도구화하는 주제에 감히 동물을 먹는다고 비난하는 우월감은 참으로 가소롭다.

 

비건이 동물을 먹지 않아서 뭐라는 거 아니다. 식물과 식물 이전 생명을 함부로먹기 때문에 시비한다. 동물권을 말하려면 식물권이라는 개념부터 알아야 한다고 다툰다. 동물 존중하는 일과 식물 성찰 없이 먹는 일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톺는다. 부분 지식은 오류다. 관통하는 지식이 지혜를 낳는다. 스러지는 순간까지 관통을 멈춰서는 안 된다.

 

정색하고 다시 말한다. 모든 생명에는 얼굴이 있다. 얼굴은 생식기니까. 생식은 생명 궁극 본성이니까. 궁극 본성을 펼쳐내는 지성소를 두고 동물 중심주의가 자랑스레 지절거리는 소리를 더 이상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다. 화급하다. 이렇게나마 외친다면 귀엽게 봐주기로 한다: 식물과 그 이전 생명을 위해 우리 동물 먹지 말아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나무 위에 가지와 잎이 많이 달린 부분을 수관(tree crown)이라고 한다. 포유류 중 이 수관이라는 서식지를 니치(niche)로 삼은 종이 나타났다. 우리 조상인 원숭이다.

 

나무 위를 니치로 선택한 원숭이류에는 여느 포유류와는 다른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눈 위치다···육식동물과 마찬가지로 눈이 정면을 향해 있다.

  두 번째는 손 변화다···엄지손가락이 다른 손가락과 마주 보고 있어 나뭇가지나 먹이를 잡을 수 있다···손톱을 납작한 모양인 편조(扁爪)로 바꾸었다. 그리고 손가락 끝 감각으로 가지를 잡게 되었다.”(이나가키 히데히로패자의 생명사203~204)

 

나는 이 대목에서 아주 긴박한 시간, 매우 날카로운 의식으로 머무른다. 어느 찰나 직립보행으로, 소뇌로, 신체 뇌 개념으로, 다중 기원 뇌 발생 가설로, 마침내 네트워킹 원리 재구축으로 단도직입 달려간다. 가만 앉아 있을 수 없어 벌떡 일어나 계속 걷는다.

 

무엇보다 먼저, 원숭이가 나뭇가지를 손으로 잡고 이동하며 살아가는 풍경부터 상상한다. 수관이 인간 진화 발원지라는 사실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나무란 인간에게 무엇인가, 정색하고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나무에 기댄 삶 덕분으로 인간은 특별한 눈, 특별한 손을 지니게 되었다. 그 눈, 그 손 덕분에 인간은 직립보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눈은 직립 시 균형감각에 필수적이다. 손을 자유롭게 쓰기 위해 직립은 필수적이다.

 

이 눈, 이 손 모두가 가장 중요하게 연결된 곳이 다름 아닌 소뇌다. 소뇌를 빼놓고 직립보행을 말할 수 없다. 직립보행을 빼놓고 인간을 말할 수 없다. 인간을 말하는 데에 그동안 소뇌가 너무 소외되어오지 않았던가. 대부분 운동과 균형, 뭐 이 정도 알고 넘어갔다. 소뇌 소외를 전복하지 않는 한 인류가 파멸을 피할 길은 없다.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 운명은 무엇이 갈랐을까. 작지만 호모사피엔스 뇌는 커뮤니케이션을 도모하기 위한 소뇌가 발달했다. 약한 자는 무리를 짓는다. 힘이 약한 호모사피엔스는 집단을 만들어 살았다. 그리고···자기 힘을 보충하기 위해 도구를 발달시켰다···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으면 즉각 공유했다.”(같은 책 222)

 

공동체 소통에 소뇌라니? 나는 독서를 멈춘다. 대뜸 소뇌를 찾아 나선다. 나만 무식하지는 않구나. 소뇌 연구한 단행본 한 권이 없다. 조각 정보로 떠도는 숱한 이야기 가운데 대다수는 운동에 관한 내용이다. 틈새로 흘러 다니면서 중요한 이야기들을 발견한다. 이 이야기들을 되작거리고 집적거리고 끼적거리면서 이리저리 덤빈다. 변방 사람이 공부하는 기본 방식이다. 어디로 어디까지 갈지 나는 모른다.

 

2. 마음병을 치유하면서 내가 아픈 사람에게 빠짐없이 해온 얘기가 있다. “치유는 접히거나 구겨진 마음을 펴거나 펼치는 일이다.” 어디 마음에서 그치겠나. 마음에 병든 사람은 걷기도 접히거나 구겨져 있기 마련이다. 모진 우울증에 시달리며 스스로 그 진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이상한(!) 점 하나를 발견했다. 걸음을 펴거나 펼치려고 몸을 움직이다가 한쪽 발로 제법 오래 서 있는 동작을 취할 때였다. 우연히 잠깐 눈을 감았는데, 그 즉시 심하게 흔들리며 자세가 무너지고 말았다. 이치와 기전은 모른 채, 시각과 몸 평형감각은 직접적인 관계가 있구나, 깨달았다. 둘 사이에 소뇌가 있다는 사실을 요 며칠 사이 비로소 접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소뇌가 시각에도 관여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해야 맞다. 내 무식 행진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시각뿐이 아니다. 소뇌는 속귀에 있는 평형 조절기관에서 정보를 받는다. 청각과 평형감각은 어떤 이치로 결합하는가. 나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평형감각이 시각, 청각, 촉각 같은 감각 정보에 의존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그중에서도 청각 의존도가 가장 높다는 주장이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성은 작지 않다. 실제로 청각 기능 떨어진 노인들은 낙상 위험이 크고, 낙상하면 50% 정도가 1년 안에 사망한다. 이즈음에서 생각한다: 소뇌라는 이름 자체에 이미 무지와 편견이 담겨 있지 않은가.

 

3. 소뇌는 물론 대뇌보다 작다. 하지만 뉴런 80%가 소뇌에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 많은 뉴런이 쓰일 만한 곳에서 쓰일 수 있도록 거기 있지 않겠나. 대뇌가 명령하면 소뇌가 움직인다는 일방적 설명 역시 무지와 편견이 아닌지 의심한다. 이 의심은 뇌가 장내 미세 생명에게 보내는 정보와 그 반대 방향 정보가 1:9라는 전복적 사실을 연상시킨다. 이 전복이 마음을 뇌라 하는 망발의 종말이듯 두고 보면 머지않아 대뇌 제국주의 종말을 목도할 수 있으리라.

 

여기서 그 단서를 찾아본다. 소뇌 평형감각이 시각, 청각, 촉각 같은 감각 정보에 의존한다는 사실에서 다시 출발한다. 시각, 청각, 촉각 정보를 소뇌가 받아들여 오직 균형 잡기만을 위해서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일은 아무래도 이치에 닿지 않는다. 시각, 청각, 촉각 정보는 그 감각을 일으키는 대상에 감응하고 감수하고 감동함으로써 다른 감정을 일으켜 새로이 관계 맺는 변화 과정 전체와 연관 지어야 한다. 이 과정은 당연히 다양한 인지 작용을 수반할 수밖에 없고, 대상이 사람일 경우에는 사회적 차원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이치를 담은 진실이 커뮤니케이션을 도모하기 위한 소뇌”(같은 책 222).

 

그렇다. 소뇌는 인간 정서(두려움, 쾌락)와 인식(주의, 언어), 사회적 행동을 조절한다. 대뇌가 일방적으로 내리는 명령에 따르는 단순 하급 기관이 아니다. 둘은 일정 정도 상호작용한다. 향후 연구에 따라 기축이 역전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대뇌 제국이 무너지고 소뇌가 일으키는 팡이실이가 복권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문제와 각별하게 마주한다.

 

4. “분류해서 분리한다.”(같은 책 233)

 

인간 뇌 주특기다. 물론 대뇌 중심 사실이다. 대뇌 대극에 소뇌를 놓을 수 있다면, 소뇌는 종합과 통합을 주특기로 하는가? 현대 뇌 과학이 아직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으므로 내가 지닌 비대칭 대칭 사상에 터 잡아 연역추리를 한다. 뇌 구조·운동 또한 비대칭 대칭으로 이루어진다고 전제할 때, 소뇌 주특기는 종합과 통합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인간은 생명으로서 살아가지 못한다. 이 비대칭 대칭을 다시 다른 결로 표현한다: 소뇌는 몸 극, 대뇌는 마음 극. 몸 극으로 기울수록 종합·통합은 융해에 가까워지고, 마음 극 쪽으로 기울수록 분류·분리는 해체에 가까워진다. 후자를 문명이라 하고, 인류는 이 길을 맹렬히 좇아왔다. 마침내 대뇌 제국주의가 인류를 제6 대멸종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오늘,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명료하다: 반제국주의 소뇌 혁명.

 

5. 반제국주의 저항으로서 소뇌 혁명은 간단명료하다: 걷기.

 

La marche est spiritualité, elle nous connecte à l’univers.

 

걷기는 우주 진리를 몸 사건으로 일으키는 인간 존재 양태다. 두 발과 다리는 비대칭 대칭을 이루며 움직인다.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미는 동작을 교차 반복한다. 찰나적으로만 땅에서 서로 연속되고, 나머지 모든 시간 동안은 서로 단절된다. 연속과 단절, 역설적 본성이다. 연속될 때는 단정하게, 단절될 때는 기우뚱하게 균형을 이룬다. 연속과 단절, 역설적 조화다. 걷기는 정확하고 절묘하게 우주 운동을 담는 인간 행위다. 몸짓으로서 인간 그 자체다.

 

<몸짓 녹색의학-걷기를 종지 삼다>에서 말하는 걷기 존재론이다. 걷기가 존재론적 차원임을 셰인 오마라걷기의 세계도 인정한다.

 

걷기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경험이다.”(167)

 

걷는 인간(homo ambultus)이 걷는 인민(populus ambultus)을 경험할 때, 혁명이 된다. 사회가 문화가 뒤집힌다. 정치가 경제가 엎어진다.”

 

<몸짓 녹색의학-걷기를 자세히 말하다>에서 말하는 사회정치적 걷기다. 셰인 오마라도 <사회적 걷기>라는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걷기는 개인적 운동성보다 훨씬 더 많은 역할을 한다. 바로 사회적 상호작용 원동력이 되는 일이다···걷기가···뚜렷한 사회적 목적을 지니고 진화했다는 사실은 걷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이지만 쉽게 간과된다.”(232)

 

나나 그나 걷기가 지닌 누락 불가 진실에 닿아 있다. 그런데 둘 다 가 닿지 못한 지성소가 있다: 존재론적이며 사회정치적인 걷기 인텔리전트터미널은 소뇌다. 그런데 그가 지성소 소뇌에 가 닿지 못한 일은 아무래도 수상하다: 그는 뇌 과학자다. 걷기의 세계그 어디에도 소뇌는 언급되지 않는다. 결국 그래서 소뇌 혁명, 정확히 소뇌 인식 혁명이 필요하다. 기존 소뇌 인식을 혁파해야 걷기에 대한 인식 실재에 도달한다. 실재로서 걷기는 그 자체로 팡이실이다. 팡이실이는 몸을 통해 몸을 넘어선다. 몸을 통해 몸을 넘어서는 사건을 영이라 한다. 영은 공생을 무궁토록 일으키는 통렬한 운동이다. 이 통렬 운동으로만이 대뇌 제국주의 일극 집중 음모를 끌어안아 본디 비대칭 대칭 세계를 재건할 수 있다. 재건 본진이 다름 아닌 소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녹색 면역 큰 이야기에서 좌우뇌를 언급했다. 전체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양자를 떠올리면 다소 뜬금없다고 느낄 수 있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 이야기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아직 피부 문맥을 벗어나지 않았다. 오감 뒤에 바로 면역 이야기를 한 까닭은 면역이 본디 피부 사건이기 때문이다. 순서로 따지면 면역 관련 피부질환, () 이야기, 자가면역질환 심화론 등이 이어져야 하겠지만 일단 나온 김에 좌우뇌 이야기를 하고 가려 한다. 하기야 대뇌가 후각세포에서 진화했으니 마냥 샛길은 아니지 싶다. 옳거니, 여기부터 짚어서 이야기하면 되겠다.

 

후각이 다른 감각과 달리 직접 뇌로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이미 했다.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우뇌로 들어간다. 후각 소외·억압은 그러므로 우뇌 소외·억압과 같다. 좌뇌가 제국을 일으켜 뇌 팡이실이 정치를 망가뜨린 사건이 바로 앞서 말한 스티브 테일러 자아 폭발이다. 본디 뇌는 좌우 비대칭 대칭구조를 통해 온전히 균형 잡으며 생명 정치에 이바지해왔다. ‘자아 폭발을 계기로 드러나기 시작했지만, 이 비대칭 대칭구조는 아직도 선명하게 지각되지 않고 있다. 좌뇌 제국주의 구조가 확고해질수록 우뇌 기능, 우뇌 기능 우위 인간은 착취·살해당했다. 좌뇌 제국주의는 6000년 동안 승승장구했다. 그간 두 차례에 걸쳐 반제국주의 저항이 일어났다. 칼 야스퍼스가 말한 제1, 2 차축 시대에 말이다. 유의미한 전승으로 남아 있지만 좌뇌 제국주의 질주를 막지 못했다. 최후 혁명이 우리 시대 천명이다. 좌뇌 제국주의 폐해가 인류 존망이 문제 되는 지경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좌뇌 제국주의, 무엇이 문젠가? 음모론 같이 들리는 이야기로 풀어보자. 괴벨스 440hz 음악을 앞에서 스치듯 언급했다. 무슨 말인가? 오늘날 우리가 듣고 있는 음악 표준 주파수는 440hz. 3제국 제2인자 괴벨스가 주도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정확히 의도를 알 수는 없지만 무심코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테니 추적해 봄 직하다.

 

440hz는 좌뇌만 자극하여 그 반응을 증폭시킨다고 한다. 432hz가 좌우뇌를 고루 자극하여 균형을 유도하는 점과 대조된다. 좌뇌는 언어와 분석을 제어하는데, 부분적 사실에 집중하도록 이끈다. 집중은 고양(高揚)을 낳는다. 고양 과도가 바로 조증(mania)이다. 세계전쟁과 유대인 제노사이드를 일으키면서 나치가 치밀하게 계산한 심리 전술 가운데 하나가 바로 440hz를 통한 조증, 그러니까 광기(mania)였다고 해석하는 게 무리일까.

 

나는 이런 이야기를 추적하면서 440hz로 연주하는 사람들과 듣는 사람들이 드러내는 정서 상태를 유심히 관찰했다. 전문 연주자가 빚어내는 과도한 표정과 몸짓이 연출이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청중이 보이는 열광적 반응도 마찬가지다. 황홀경으로 몰아가는 힘이 분명히 있다. 이는 연주자의 해석과 기량, 청중의 이해와 공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나는 음악뿐만 아니라 무엇에든 그토록 열광해본 적이 없어서 신기해할 따름이었는데 비로소 수긍이 가기 시작했다.

 

내가 또 한 가지 주의를 기울인 일은 432hz 음악 듣기였다. 나 또한 긴 세월 동안 440hz 음악에 길들어 있었기 때문에 처음 들었을 때 432hz 음악은 다양한 측면에서 불편함을 자아냈다. 무엇보다 답답하다는 느낌이 확 달려들었다. 음색과 음조 갈래가 명징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심지어 베토벤을 듣다가 중간에 끈 적도 있다. 다시 정색하고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깨달은 바는 440hz가 음악 포르노라는 사실이었다. 다시 432hz로 돌아와 모차르트 심포니 40번을 들었다. 고요와 평안으로 배어들 수 있었다.

 

흔히 좌뇌는 긍정 판단을 우뇌는 부정 판단을 관장한다고 한다. 피상적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좌뇌는 부분적 사실에 집중하기 때문에 긍정, 나아가 조증 상태를 유발하기 쉽고, 우뇌는 전체적 진실에 터 하여 성찰하기 때문에 조증 상태를 제어한다고 해야 맞다. 전체적 맥락을 살피려면 반대 관점에 유의하고 받아들일 점은 받아들여야 하므로 부정적·비판적이라는 누명을 쓸 뿐이다. 좌뇌적 성향은 형식논리, 우뇌적 성향은 화쟁논리에 터 한다. 형식논리는 자아 단일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타자를 정복하고, 화쟁논리는 자타 일심 자비를 가지고 공존을 꾀한다. 자아 단일 일극 집중구조가 당연히 압도적으로 강한 물리력을 가진다. 좌뇌 문명, 그러니까 제국주의 백색문명이 역사를 지배한 까닭이 여기 있다. 그들이 지배한 인류가, 지구 생태계가 풍전등화 위기에 몰린 소이가 여기 있다. 우뇌 혁명이 긴절하게 요청되는 상황이다.

 

우뇌는 좌뇌와 1:1의 대립 항이 아니다. 이는 여성이 남성과 1:1의 대립 항이 아닌 이치와 같다. 이 점은 매우 강조되어야 할 진실이다. 제국주의 백색 사유로는 이 말을 알아듣기 힘들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좌우뇌는 해부학적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는 한의학의 폐()가 서구의학의 폐(lung)와 다른 이치와 같다. 이 점은 매우 강조되어야 할 진실이다. 제국주의 백색 사유 사유로는 이 말을 알아듣기 힘들다. 이 공부에서부터 우리 시대는 반제국주의 녹색 뇌 혁명을 시작해야 한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우울장애를 자가면역질환이라 했더니 질문하는 이가 드물지 않기에 큰 맥락에서 다시 논의한다.

 

우울장애는 기분 차원을 넘어 존재 자체에 가 닿는 질병이다. 기분이 꿀꿀한 정도가 심하다, 슬픔이 일상을 계속해서 뒤흔든다, 사는 게 재미없다, 뭐 이런 표현은 증상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 현실 존재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관심, 흥미, 가치, 의미, 목적, 계획 따위가 죄다 부질없어지는, 그래서 몸도 아프고, 잠도 오지 않고, 무기력해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심신증후군이다. 단도직입으로 말해 우울장애란 전천후 자기부정 증후군이다.

 

자기부정이 다름 아닌 자가면역이다. 정신적 차원에서 그리 표현했을 따름이다. 자기부정은 타인 긍정을 수반한다. 자기를 죽인 시공에 타인을 채워 넣음으로써 자타 동화(同化)를 꾀한다. 우울장애 또 다른 이름은 그러니까 동화 증후군인 셈이다. 이는 흔히 우뇌라고 부르는 뇌 기능이 항진된 병리다. 동화 증후군은 이화(異化) 증후군의 희생양이자 그 비대칭 대칭이다.

 

이화 증후군은 이화 문명을 낳은 질병이자 이화 문명이 낳은 질병이다. 이화 증후군은 스티브 테일러가 말한바, ‘사하라시아지역에서 기원전 4천 년경 일어난 인도-유럽어족·셈족 자아 폭발, 그러니까 타락과 사회·역사적으로 결부된다. 이 자아 폭발은 자기를 제외한 모든 존재를 적이나 수탈 대상으로 여기는 극단적 이화 병리다. 이 병에 걸린 집단은 자아 정체성 인식·유지에 민감하고, 논리 일관성에 집착하므로 모순되는 상황에 직면할 경우, 공격성을 드러낸다. 자기기만, 인지 부조화, 확증편향, 조증, 신체망상, 사이코패스, 정신 분열 같은 일련의 분열 스펙트럼 병리를 지닌다. 흔히 좌뇌라고 부르는 뇌 기능이 항진된 병리다. 이 병리 위에 세워진 통치체제가 다름 아닌 제국주의다.

 

이화 증후군에 걸린 자들이 제국주의 지배집단이 되는 일은 필연이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대한민국을 보면 이내 수긍할 수 있다. 이화 증후군에 걸린 특권층 부역 집단이 만들어내는 수탈·살해체제에 속절없이 당한 피지배자가 동화 증후군을 앓는 일 또한 지극히 당연하다. 자가면역질환으로서 우울장애를 포함한 동화 증후군이 일어나는 변방, 바로 그 자리가 동화혁명의 출발점이다. 동화혁명은 자기부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 아프고 슬픈 각성에서 비롯한 연대로 이화 문명, 이화 정치경제학에 저항한다. 저항은 아픈 생명 피눈물 값이다. 피눈물로 내 경계를 허물어 남을 맞아들이는 내림굿이 녹색 면역 혁명이다; 민주주의 혁명이다; 바리데기 혁명이다.

 

바리데기가 앓는 자가면역질환이 우울장애다. 바리데기가 알아차린 자기부정이 혁명을 추동하는 고통 조건이다. 바리데기들이 더불어 엮어갈 팡이실이로 여는 세상이 제국을 넘어선 녹색나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면역 개념은 그 정확성과 무관하게 오늘날 삼척동자도 입에 올리는 쉽고 흔한 말이다. 가령 면역력이 약해서 병에 걸렸다는 말을 누구나 한다. 면역력이 약하다는 말은 당연히 외부 조건을 비-자기, 그러니까 적으로 인식해서 격퇴하는 힘이 약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과민한 면역반응을 보이는 알레르기질환 경우도 본질적으로는 면역력이 약해서 생긴다고 할 수 있다. 균형 상실로 풀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문제는 이른바 자가면역에서 일어난다. 자기를 적으로 인식하여 공격하는 현상을 면역 과잉으로 이해하면 당연히 그 치료는 면역 억제로 방향을 잡는다. 실제로 제국주의 백색의학 치료는 그 시스템으로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았다. 이종의학인 제국주의 백색의학으로서는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다. 과연 타당한가? 면역 억제 끝이 무엇인지 안다면 이 짓을 치료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찌할까? 물론 제국주의 백색의학에게 달리 쓸 방법은 없다.

 

이 막다른 골목은 논리적 필연이다. 면역 또한 이종 면역 일극 구조니까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 면역학자 아보 도루 주장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면역은 본디 자가면역이었다. 생명체가 바다에서 뭍으로 올라오면서 새로운, 그러니까 이종 면역으로 진화했다는 말이다. 이 변화는 비가역적이지 않다. 생명 유지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면 옛 면역, 그러니까 자가면역 체계가 귀환한다. 이 옛 면역은 주로 소화기관, 소화기관에서 진화한 간, 외분비선, 생식기관 주위에 포진한다. 이 상황을 사실로 전제하고 진화 역사 집장태로 해석하면, 면역은 이종과 동종 사이 비대칭 대칭구조가 된다. 난치성 자가면역질환에 걸린 몸은 모순이 공존하는 상태에 놓인다는 말이다. 이 상태를 제국주의 백색의학 방식으로 풀어낼 수 없음은 당연하다. 형식논리에 터 한 제국주의 백색의학이 쌍방향 치료를 상상이나 하겠는가. 이 상황을 돌파할 오직 한 길은 쌍방향 치료다. 쌍방향 치료를 가능하게 하는 의학이 바로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 면역은 형식논리를 넘어선다. 이율배반을 품는 전체 진실에 터 한다. 녹색 면역 빛으로 보면 악성종양도 전혀 달리 해석하고 치료해야 한다. 아직은 아무도 수긍하지 못하겠지만 혈관운동신경성비염도 본질에서 자가면역질환이라 할 수 있다. 더더구나 도리질을 치겠지만 나는 우울장애 또한 자가면역질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홀로 이 길을 가고 있다. 적적하나 두렵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