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 방문을 열면 거실 통창을 통해 관악산 푸르스름한 실루엣이 한눈에 들어온다. 허리 숙여 인사를 올린다. 이로써 내 하루가 시작된다. 관악산은 여기 사는 동안 내가 깃들 넉넉한 품이다. 시월 초하루 나는 관악산 스무 계곡 중 남은 셋을 걸음으로써 모든 계곡으로 들어갔다. 그 셋 중에서 지성소로 삼을만한 곳을 찾았다.

 

집에서 살피재를 가로지르는 능선을 타고 걸어 까치산으로 간 다음 서울 둘레길로 접어들어 갈래 진 소곡들을 더듬어 간다. 첫 계곡은 무당골이다. 입구에 등산로 폐쇄를 알리는 안내 표지가 덜렁대고 거의 사용되지 않는 듯한 화장실이 떡하니 버티고 있어 영 내키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성소 찾기를 포기할 수는 없다. 나뭇가지로 거미줄을 걷어내며 깊숙이 들어간다. 가까이에 무당 바위가 있어 그저 무당골이라 이름한 모양으로 영검한 기운은 없다. 인적 끊겼으니 고요히 제의를 수행할 호젓한 곳은 있다. 문제는 정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내 천명은 정화에 우선순위가 있으니 이 문제를 각별하게 신경 쓴다.

 

돌아 나와 산자락을 타고 다음 계곡으로 향한다. 들어서는 순간 느낌이 좋다. 이름도 없는 소곡이지만 나름 깊어 영롱한 물소리를 낸다. 이따금 사람들이 지나가지만 고요한 편이다. 무엇보다 정갈한 느낌을 준다. 몇 군데 눈길을 끄는 곳 가운데 나름 폭포 형상 풍경이 있어 살펴보니 길가긴 하지만 온욱하다. 그래 여기다.

 


올라온 길을 도로 내려가려던 계획을 바꾸어 더 올라간다. 정상 직전에서 우회해 능선을 타고 내려가다가 다음 계곡으로 넘어가는 자락 길로 접어든다. 샘방골이라는 이름을 지닌 계곡 입구에 도착해 보니 각종 편의 시설과 사방공사로 풍경이 사납다. 진입 자체를 단념한다. 다시 자락길을 걸어 다음 계곡으로 넘어간다. 소박한 소곡인데 나지막이 소리 내어 물이 흐른다. 그 물에 발을 담그고 중년 여자 사람 둘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가볍게 인사하고 계곡 이름을 물으니 모른단다. 다음 계곡으로 넘어가는 자락길이 있느냐고 다시 묻자,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킨다. 물론 지도에 없는 오솔길이다.

 

오솔길로 접어들어 조금 걸어가니 밤나무가 나타난다. 방금 떨어진 듯한 토실한 밤알이 있어 당을 보충한다. 저혈당 상태를 살포시 감지해서다. 감사 예를 표하고 더 깊이 숲으로 들어간다. 더 깊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 숲을 벗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잠시 뒤에 알아차린다. 갑자기 눈앞에 서울대 관악사 운동장이 나타나서다.

 

관악사 운동장에서 들어가는 계곡이 관악(산속) 지리()’ 계곡이다. 이렇게 해서 관악산 계곡 순례가 끝났다. 이제부터 걸어서 들어갔다가 걸어서 나오는 관악산 지성소를 또 한 축으로 삼아 내 삶과 제의, 인간과 숲을 잇는 일을 계속한다. 북쪽 주산 백악과 남쪽 객산 관악을 반제국주의 전선 공동 주체, 아니 으뜸 주체로 모시고 나, 그러니까 사람 나무가 살아가는 나날을 나는 천명 수행 과정으로 여긴다. 오늘 여기서 이웃해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이 이런 삶을 어찌 생각할지 나는 모른다. 나는 그저 깜냥대로 공부하고 사유하며 실천해 온 내 삶이 지닌 전체성에 터 잡아 순간을 살아 낼 따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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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사회 대가족 공동체에서 한가위는 참으로 대단한 날이었다. 그 한가위가 내 인생에서 사라진 지 제법 됐다. 60년 가까이 서울살이하면서 내가 도착한 종착역은 아내와 딸, 그리고 나, 이렇게 셋뿐인 도시 핵가족이었다. 자연스럽게 명절 개념이 증발했다. 설이 없어지니 세배가 없어지고, 한가위가 사라지니 송편이 사라졌다. 이제 가족에게 전혀 미안해하지 않으면서 한의원 문을 열 수 있다니 서늘하다.

 

텅 빈 지하철 타고 썰렁한 골목길을 지나 한의원에 앉아 환자를 기다린다. , 물론 기다린다는 표현에는 문제가 있다. 나는 그저 글 쓰고 틈틈이 일어나 걷고 뭐 있나 하고 TV 화면을 곁눈질한다. 정오가 조금 안 된 시각에 한의원 건물 입구에서 두런두런 얘기 소리가 들려온다. 직감으로 치매 앓으시는 어르신 모자임을 알아차린다. 어르신은 왜 간호사가 없냐고 물으신다. 한가위임을 모르시기 때문이다.

 

침 맞고 누워 계신 동안 아들이 깊은 고마움을 표한다. 한의원 와 침 맞고 상태가 잠시나마 호전되어 다리에 힘도 붙고 잠도 잘 주무시는 일이 어머니에게는 물론 자신에게도 커다란 해방감을 준단다. 그 아내가 시달리던 편두통도 내가 생전 처음 보는 접근법을 쓴 덕에 좋아졌다고도 한다. 그가 내게 이토록 많은 고마움을 털어놓았던 적이 없었던지라 적잖이 놀랍다. 장인 모시고 다시 오겠다고 약속한다.

 

명절날 진료소를 열어 놓고 있는 일이 의료인에게 결코 일반적인 일은 아니다. 오늘 같은 예상 밖 일이 내가 명절에도 나와 적요를 견디게 하는 힘이다. 내가 진료하지 않았을 경우를 생각해 보면 오후 내내 텅 비어도 행복할 듯하다. 그가 다시 돌아와 포도 한 상자를 건넨다. 어느 때보다 그 눈빛이 촉촉함으로 반짝인다. 이제부터 한의원 올 때 즐겁게 놀러 온다고 생각하겠다며 어린아이 표정으로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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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 그래왔듯

 

늘 먹는 아침 도시락으로 차린

 

416 차례상

 

오늘 더 아득하지만

 

내일 더 더 희망을 짓기 위해


큰절 크게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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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느질하는 사람이다. 직업이라는 말이 아니다. 요즘 사람, 더구나 남자 사람이 하지 않는 일을 한다는 말이다. 자주 쓰는 흑백 실 꿴 바늘 두 개를 아예 책상 위 컴퓨터 앞에 놓아두고 있다. 양말, 장갑, , 우산, 모자, 목도리, 그리고 단추···무엇이든 해지고 찢어지고 뜯어지고 떨어진 곳을 수선 전문가에게 맡길 정도가 아니라면 손수 바느질해서 쓴다.

 

구멍 난 양말 꿰매는 내 모습이 아내 눈에 그리 좋은 풍경으로 들어올 리 없다. 아내가 꼭 그리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냐고 말할 때, 내 처음 대답은 이랬다.

 

양말이라는 사물에 예의를 표하는 내 방식이다.”

 

요 몇 년 동안 식물을 공부하면서 대답이 달라졌다.

 

양말이라는 이 사물이 발원한 식물에 경의를 표하는 내 방식이다.”

 

최근 곰팡이와 제국주의를 공부하면서 대답이 다시 달라졌다.

 

바느질은 팡이실이며 제국주의 반대말이다.”

 

김선우의 사물들<바늘, 숨은 자의 글썽이는 꿈>에서 시인은 말했다.

 

바늘은 자기 몸에 실을 꿰고 온몸으로 옷감-현실을 관통한다. 그리고 숨는다. 바늘은 현실에 깊숙이 관여하면서도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바늘에게는 아상(我相)이 없다. 찢어지고 떨어지고 조각나고 해진 것들을 이어 붙이고 매달아 주고 기워주면서 자신의 존재를 타자 속에 스미게 한다. 바늘의 자아는 그 자신의 이름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이 이어 붙이고 부활하게 한 옷감으로 증명된다···

 

자기의 온몸으로 자기를 넘어가는 바늘의 흔적은 고요하다.”(86)

 

시인은 사물로서 바늘에 주의하면서 사유했고, 나는 사건으로서 바느질에 주의하며 사유한다. ‘온몸으로 옷감-현실을 관통자신의 존재를 타자 속에 스미게하면서도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일이 여태껏 불려 온 이름은 네트워킹이었다. 이 말이 심각하게 오염되었다고 판단해 내가 만든 순우리말이 팡이실이. 팡이실이로 우리는 현실에 깊숙이 관여할 수 있다. 우리가 처한 현실이 지닌 근원 범주가 제국주의다. 제국주의에 깊숙이 관여하는 일은 제국을 해체해 작은 생명 팡이실이들의 팡이실이를 무한히 결 지고 겹 지게 하는 일이다.



여름에 진료할 때 입었던 하얀 한복 저고리가 워낙 낡아 손 쓰기 힘들 정도가 됐다. 조심조심 손빨래해서 조심조심 바느질했다. 두 여름은 더 입을 수 있겠다. 이로써 제국주의 붕괴가 두 여름 앞당겨졌다고 나는 주()한다. 내 주는 영검하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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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안산 숲으로 들며 산 무서워하는 아내와 와야겠다는 글을 썼는데 엊그제 뜬금없이 아내가 안산에 가보잔다. 물론 내 글을 읽어서거나 이심전심이어서가 아니다. 직장 동료 한 사람이 안산 근처에 사는데 그렇게 좋다고 하더란다. 버스를 갈아타고 이대 후문에서 내려 연대 교정으로 들어간다. 전에 들어갔던 소나무 숲길을 따라간다. 얼마쯤 갔을까. 오르막 오솔길이 시작되자 아내가 그만 가잔다. 오늘 운동량을 다 채웠단다. 나는 흔쾌히 돌아서 내려간다. 아내 생각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없다. 아내가 버스 타고 사무실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내 다음 숲길을 이리저리 살핀다.

 

지하철로 이동해 불광역에서 내린다. 지도에서 확인한 진흥로19길에서 들어가는 소곡으로 향한다. 아주 작은 계곡이 갈래 져 있고 길은 그 사이 둔덕으로 나 있다. 물이 말라 숲은 온통 풀벌레 소리로만 가득하다. 조금 더 들어가자 실낱같은 물소리가 들린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물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돌 틈 아래 또는 뒤에서 이를테면 복류하는 작은 물줄기가 내는 소리다. 반갑기도 하고 어쩐지 애잔하기도 한 풍경에 빙의돼 한참 서 있는다. 가파른 바윗길이 자주 나타나는 길을 오르다 옆 소곡으로 들어가는 비탈길로 들어선다. 세 번을 돌아 진흥로 325로 내려가는 소곡에 접어든다.



이 소곡은 지나온 소곡과 달리 물길이 깊이 파였고 폭포라고 해야 할 만큼 낙차 있는 물줄기가 군데군데 나타난다.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형이 거의 끝까지 계속된다. 지워지고 흐트러진 인적 때문에 길도 마치 사람을 외면하는 듯한 풍경이다. 끄트머리께 이르자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사람이 살고 있단 말인가. 인기척은 없다. 그런데 계곡 끝나고 도로가 시작되는 입구에 이르니 철망 문이 막아선다. 사유지라 할지라도 산 위에서 내려오게는 터놓고 나가지 못하게 잠그면 대체 어쩌란 말인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거침없어진다. 철망 문 옆 부분 철망 울타리를 밟아 낮추고 넘어간다.



시간이 그리 촉박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세 번째 계곡, 그러니까 녹번천이 발원한 골짜기로 향한다. 복개를 면한 계곡 입구 인근 녹번천 귀퉁이에 송사리가 살고 있다. 인간 문명 틈새에서 자연 생명은 이리도 강인하게 살아가고 있다. 내가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지나던 사람들도 덩달아 와서 그 생명들을 확인하고 간다. 계곡 입구에는 제법 큰 소리를 내는 폭포가 있다. 거기부터 전개되는 계곡 풍경이 사뭇 아름답다. 무엇보다 물 가까이 물길 따라 난 숲길이 좋다. 시간상 능선에 오를 때까지 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다. 같은 길 되돌아오기를 싫어하는데 이 길은 다르다. 별일이 아닌가.



조금 내려오다가 큰 바위들로 이루어져 상서로운 기운이 감도는 장소를 보고 가까이 간다. 상류인 이곳에도 송사리가 살고 있다. 처음처럼 가만히 들여다본다. 여기 저 생명을 키우는 녹번천 도시 구간은 30년 전 복개되어 지하 구정물로 흘러가고 있다. 복원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데 얼마나 어떻게 진행했는지 모른다. 또 다른 토건은 아닐는지 걱정스러운 생각이 든다. 나는 조용히 조그만 돌 하나를 집어 바위 위에 올려놓는다. 숲과 물과 인간을 마음에 담고 간절히 돌탑을 쌓는다. 무엇보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포악과 협잡 중심에 선 부역 과두를 축원한다. 내 축원이 참 축원임을 송사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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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9-26 0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학입시 삼수생 시절 사촌형의 집 별채에 빈방이 있어서 이곳에서 공부하다 합격하였고 1973년 여름 군대입 전까지 살았던 곳이 불광동이라 이글을 읽으니 옛생각이 납니다.

bari_che 2023-09-26 09:59   좋아요 1 | URL
아, 그러시군요~ 그 무렵 저도 불광동 친구 집에서 살다시피 했었습니다. 녹번천도 불광천도 복개되기 전이니 금석지감을 금할 길 없습니다. 불광천을 나무다리로 건넜던 기억이 새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