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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가는 식당이라도 주인과 안면 트는 집이 있고 그렇지 못한 집이 있기 마련이다. 뒤 경우인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고 계산하려고 카드를 주니 느닷없이 이런다: 현금 없으신가 봐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어서 순간 당황했다. 잠시 뒤에 한 내 대답은 이렇다: , 비용 증빙 때문에요.

 

식당 문을 막 나서는데 등 뒤에서 주인이 들으라는 듯 말한다: 세금 얼마나 내길래. ‘세금 많이 내나 보네!’ 하고 놀라는 말투가 아니다. ‘대체 세금 얼마나 낸다고···.’ 하고 비아냥거리는 말투다. 순간, 또 당황했다. 잠시 뒤에 한 내 생각은 이렇다: 다음에는 민망해서 이 집 못 오겠구나.

 

사실 한의사는 세금 관련해서 비용 증빙이 쉽지 않은 직업군에 속한다. 관내 식당에서 밥 먹은 영수증만 인정하다가 최근 들어 관외 것도 인정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영수증을 챙긴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경우를 당하면 내 가난을 일부러 드러내는 듯해 시선이 가리산지리산한다.

 

필경 그 식당 주인도 세금을 문제 삼아서 현금 결제를 요구했을 테다. 아무리 줄 서서 먹는 집이라 해도 세금, 뭐 얼마나 된다고 신경 쓰냐?’ 하지 못할 상황이라면 결국 나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다른 처지에 섬으로써 이런 일이 일어난 셈이다. 그런데 왜 그는 내게 비아냥거리는가?

 

세금 문제로 신경 쓰는 같은 상황에서 탈세를 대놓고 시도하는 쪽이 도리어 그렇게나마 증빙을 시도해 비용 처리하려는 쪽을 나무랍게 대하는 행동은 아무래도 괴이쩍다. 자기기만이거나 변형된 자기혐오쯤 되지 싶다. 식민지 그늘에서 뒤틀어진 어떤 부류 자화상 같아서 영판 속 쓰리다.

 

그나저나 가성비 좋은 단골 식당 하나 잃었다 싶으니 이 또한 심사 보깨는 일이다. 도시 식당이 얄팍한 음식으로 사람을 모욕하는 풍조가 갈수록 가파르게 가속해 가는 마당이라 허탈감이 뜻밖에 옴팡지다. 사람 사이 쓰렁쓰렁해질 때면 늘 하던 대로 나는 허영허영 휘적휘적 숲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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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니는 왜 신실을 범했을까?>

 

망묘루뿐이 아니었다. 명시니는 신실(神室)을 범했다. ‘구경이라는 보도는 취재 없이 받아쓴 표현이다. 참으로 형언 불가한 호로쌍년이다. 신실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가 초미 관심사다. 단언컨대 조선 신령들을 왜() 악귀, 무엇보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에 무릎 꿇리는 주술 의식 따위를 행했다고 본다. 저들 패거리가 집권을 도모한 이후 벌여 온 해괴한 협잡질을 종합하면 이 간주는 음모일 수가 없다. 그보다 더한 짓을 했으면 했지, 더 이상 합리는 불가하다. 거기서도 CCTV를 껐을 테니 먼지 한 톨까지 뒤져서 흔적이나마 찾아내야 한다. 그 짓을 하도록 허락한 최고위직 공무원이 누군지도 밝혀 단죄해야 한다. 이 나라 역사와 전통을 어디까지 모욕했는지 도통 알 수 없으니 분하기 짝이 없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 사회 모든 분야 꼭대기에는 저 호로쌍년 같은 토착 왜구 매국노가 똬리 틀고 앉아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이번 반란 세력은 아마도 온전히 척결되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일천오백 년을 yuji해 온 힘이 어디 그리 호락호락하겠나. 안간힘 쓰는 개돼지들을 향해 저들은 썩은 웃음을 날리고 있다. 모르지 않으니 이번 깨달음으로 빛의 혁명은 비로소 저들과 맞짱 뜰 수 있는 세력으로 자라났다. 더는 질 줄 알면서 싸우는 싸움이 아니다. 지치지 말고 다 함께 웃으며 간다. 끝장낼 때까지!”

 

신문 보도를 읽고 분노가 치밀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나중에 글을 되작거리며 다시 읽던 중 문득 특별한 한 생각에 가 닿는다. 촉촉이 비 오는 일요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나는 종묘행을 결정한다. 명시니 범행을 속죄하기 위함이다. 어떤 곡절에서였든 이 나라 인민이 뽑아 놓은 대통령 배우자, 아니 실질 대통령이 저지른 범죄니까 인민 가운데 속죄 필요성을 깨달은 사람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 판단해서다. 물론 죄지은 당사자가 스스로 엎드려야 마땅하지만, 그럴 리 없으므로 대속(代贖)한다는 말이다. 대속은 명시니를 은총으로 극형에 처할 묘수다. 남이 짐을 져주었으니 은총이고, 빌 기회가 날아갔으니 극형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방법이 그런 인간 부류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다.

 

한가위 연휴 무료입장이라 관람객이 많다. 저들과 다른 목적으로 온 나는 저들 행락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준비한 정수를 따른다. 통렬한 가슴으로 속죄한다. 비장한 넋얼로 이 나라를 중첩 식민지에서 해방해 주십사 기원한다. 전혀 다르게 열린 눈길로 정전을 바라본다. 사뭇 다른 발길로 숲을 걷는다. 죽음에서 비롯한 삶인 버섯들이 오늘따라 한껏 고요한 함성으로 나를 맞는다. 그들 앞에서 숨 멎기를 거듭하며 세 시간여 제를 올린다. 더는 견딜 수 없이 묵직해진 천추 통증을 달래며 돌아선다. 밥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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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인용하는 일 넘어서서 남이 쓴 책에 길게 입대는 일 접은 지 벌써 3년이 훌쩍 지났다. 특히 제국 지식인이 쓴 책은 앞으로도 그렇게 할 작정이다. 오늘은 그 적조 딛고 부득불 이야기해야 할 시집 한 권을 꺼내 든다. 김선우 제7 시집 축 생일이다.

 

김선우는 내게 각별한 시인이다. 나는 그를 천하 시인이라 부른다. 그는 나를 도반 선생이라 부른다. 내가 그에게 어떤 도반(道伴)인지 나는 모르지만, 내게 그는 시로써 내 삶 결과 겹을 되작거려 없는 틈을 내고, 있는 새를 메우도록 하는 도반 시인이다.

 

김선우 시는 나를 시 바깥에서 불러낸다. 그 부름은 문학이나 언어 본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시 이전 얼 결, 넋 살이 비인과(非因果)로 이어질 때 시공간이 특정되면서 엄밀한 냄새를 피워올린다. 엄밀해서 그 냄새를 아무나 언제 어디서나 맡을 수는 없다.

 

냄새가 온몸을 돌고 시에 되스며들어 그 거점을 지우고야 세계로 번져간다. 나는 다른 시에서는 이렇게 경험하지 못했다. 이 경험이 축 생일에서 또다시 일어났다. 시를 읽어서 내 인생을 한층 더 깊게 알아차렸다고 말했더니 시인은 신비롭다고 답했다.

 

그 신비로운 알아차림은 다정함”, 그러니까 살가움에 관한 내 인생과 생각에 없는 틈을 내고, 있는 새를 메우도록해주었다. 살갑지 못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나무와 물 본성인 살가움에 끊임없이 다가가야겠다고 한 결론이 온전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러면 뭐가 온전하지 못했는가? 여전히 인간중심주의에 몸 담그고 있어서 그렇다. 나무와 물로서 살가움이 인간 살가움과 같지 않다고 했을 때, 나는 인간 살가움을 따랐다. 나무와 물 살가움이면 족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인간은 왜 특별해야 하는가?

 

결국 내가 좀 더 살가워져야 한다고 한 각오는 내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다짐이다. 아니다. 나는 잘못하지 못했다. 나는 나무와 물 방식으로 살가웠을 뿐이다. 그게 나다. 왜냐하면 나는 태어나 처음 먹은 음식이 모유 아닌 미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동물성 모유보다 식물성 쌀, 그리고 바깥 물을 먼저 만나서 시생대 식이, 냄새 감각이 형성되었다. 그 감각을 따라 70년을 살았다. 70년 감각에 공명하는 냄새가 김선우 시에서 나는데 어찌 그가 내게 천하 시인이 아닐 수 있겠는가. 가히 숙명이다.

 

축 생일을 받아 한 호흡으로 읽어 내렸다. 하루 내내 그 영성과 기운에 깃들어 있었다. 마침내 시의 마음이어야 닿을 수 있는 어떤 있음이 세상에 스미고 번져 세상을 아름답게 지킬 수 있도록”(김선우) 널리 알려야겠다고 다짐해 이 기묘한 글을 쓴다.

 

개천절 아침이다. 내 인생 들마, 이제 분명하고도 모호한 새 길 열기 카이로스에 당도했음을 직감한다. 필경 천하 시인 김선우도 그런 특이점에 서 있을 테다. 하늘 열린 날 나지막이 내려앉은 잿빛 하늘 보며, 폴짝폴짝 뛰어 平平 세상 여는 백일몽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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