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싸리·버들 글숲  (bari_che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숙의의학으로 마음 치료하는 한의사가 숲(식물)과 팡이와 물에 진심 다해, 지구 위기를 몰고 온 제국주의에 범주적 주의를 기울여, 직접 쓰거나 인용한 글.</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un, 05 Apr 2026 17:31:48 +0900</lastBuildDate><image><title>bari_che</title><url>http://image.aladdin.co.kr/Community/myface/pt_7816061154840048.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bari_che</description></image><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가시 각성</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96117</link><pubDate>Sat, 04 Apr 2026 13:5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96117</guid><description><![CDATA[<br>  &nbsp;  지난 3월 청량산 안말골 들어가 길 잃고 헤매다가 손가락 몇 군데 가시에 찔린 적이 있다. 다른 데는 얼마 되지 않아 다 아물었으나 유독 가운뎃손가락 끄트머리 상처가 여태껏 남았었다. 검은색이니 부러진 가시가 박혀 있음이 분명한데 아프지도 성가시지도 않아서 그냥 내버려두었다. 오늘 아침 느닷없이 날카로운 통증이 들이닥치기에 처음으로 자세히 들여다봤다. 신기하게 가시가 염증 없는 상태로 살과 공존(!)하고 있다. 주위 살을 살짝 밀어 올리고 단침(短針)으로 파내주니 작디작은 구멍 하나 남기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손가락 생명체는 무감으로 돌아갔다. <br><br>&nbsp;‘나’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넘어가려 했는데 불쑥 의문이 든다. 어째서 염증을 일으키지 않았을까? “갑자기 달려든 가시를 검문한 결과 지닌 무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적은 아니라고 판단해 일단 내치지 않고 공생(!)을 시도한다. 얼마간 시간을 두고 좀 더 세심히 살핀바 무기만 없는 게 아니라 주고받을 생명 건더기조차 없다. 공생은커녕 공존할 존재도 아니라고 최종 결론 내린다.” 내 상상력은 여기까지다. 공생하는 통 생명체가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인간인 ‘나’는 무얼 하고 있었는가? ‘아프지도 성가시지도 않아서’라는 근거는 얼마나 아둔하고 덜퉁한가?  &nbsp;  그러하다. ‘나’라고 뻐기지만 본디 ‘나’란 존재하지 않는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나들’(김선우) 팡이시질(networking)이 가동하고 있을 따름이다. 여기에 삼가 참여하려면 ‘나들 속 나’는 끝 없이 조프린 얼(靈) 눈으로 ‘나들’ 통 생명 사건 틈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틈에서 빛이 나온다(레너드 코언). 그 틈 빛을 감지하지 못하는 피상성과 진부함, 그리고 엉성함에서 인간 또는 인류가 저지르는 온갖 악이 나온다(한나 아렌트). 찰나마다 깨어서 섬세 치밀하게 감응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련다. 거대 장엄은 얼핏 본 짝퉁이고, 미세 장엄이야말로 촘촘히 본 진품이기 때문이다.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404/pimg_7816061155081527.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96117</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임꺽정과 중랑천 사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90344</link><pubDate>Wed, 01 Apr 2026 13: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90344</guid><description><![CDATA[<br>  &nbsp;  신라 승 도선이 창건한 불곡사(佛谷寺)에서 이름을 딴 산이 양주 불곡산이다. 물론 거꾸로 된 서사다. 회양목이 무성해서 겨울이면 산 전체가 붉게 물들었으므로 이를 한자로 음차해 절 이름을 지었다. 곡(谷)이 붙은 까닭은 골짜기가 많아서일 테다. 북서-남동 방향 일직선으로 늘어선 바위 봉우리 셋과 그들을 이으며 늘어선 바위 등성이가 거느린 골짜기들이 얼마나 많은지 ‘천(千)골’이라는 이름까지 있다. 사패산보다 낮은 산인데 지도에 표기된 골짜기 이름만도 3배 이상이다.   &nbsp;  지난번에 걸은 사패산 인근을 살피다가 불곡산을 재발견했다. 경강(京江) 지천을 걷던 중 중랑천 발원지가 불곡산이라는 사실만 잠시 확인했는데 그땐 이렇게 다시 마주할 줄 몰랐다. 양주역에서 내려 바로 중랑천 산책로로 들어선다. 정북 방향으로 따라가다가 샘내고개 바로 앞에서 서쪽으로 꺾이는 물길로 접어든다. ‘중랑천 발원지 샘내’라는 홍보 겸 안내 기둥이 서 있다. 여기서 샘내라고 부르는 물이 흘러 중랑천이 되고 마침내 한강으로 흘러든다. 샘내 샘 찾기 출발이다. <br>  양주에서 처음 마주한 중랑천&nbsp;  <br>지도에 청량골이라고 되어 있는 부근에서 왼쪽으로 틀어 물소리를 들으며 더듬어간다. 자료에 따라서는 청량골 또는 청엽굴 고개를 발원지라 한 것이 있으나 확증 없이 쓴 듯하다. 내가 물 따라 들어가고 있는 이 골짜기는 임꺽정봉과 상투봉 사이 골짜기다. 이게 청량골인지, 청엽굴은 어딘지 확인이 안 된다. 나는 내 식으로 샘내골이라 부르기로 한다. 샘내골 물방울 처음 맺는 곳이 중랑천 발원지임은 분명하다. 이 깊은 골 끝에 닿을 때까지 나는 아무도 만나지 못한다.  <br>  샘내골 가장 높은 곳에서 본 물&nbsp;  등성이에 닿아 임꺽정봉을 향해 난 험한 길을 오른다. 정상 직전에서 멈춘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닌 한 나는 산 정상을 밟지 않는다. 등정(登頂) 또는 등반(登攀)은 정복자 위상 은유인 제국주의 alpinism에 복종하는 식민지 행태기 때문이다. 실제 우리 역사로 보아도 오늘날 무심코 즐기는 통속한 ‘등산’은 일제가 만들어낸 짝퉁 제국주의에 무릎 꿇는 부역 행위다. 나는 이내 되돌아와 지도에 없는 골짜기 길로 들어선다. 샘내골과 더불어 고개 이룬 여기 이름은 원심이골이다. <br>  임꺽정봉 오르기를 멈추고 돌아본 능선&nbsp;  원심이골도 인기 좋은 경로는 아니다. 인적이 바래져 길이 설다. 물 말린 긴 너덜겅 멈춘 곳에 임꺽정 생가터 가는 자락 길 안내판이 서 있다. 이리 반가울 수가! 자락 길 걸어 골짜기 둘을 가로지르니 임꺽정 생가(터) 보존비가 나타난다. 알다시피 임꺽정은 명종조에 뜨르르했던 백정 출신 의적이다. 지배자에게는 한낱 도적일 뿐이나 피지배자에게는 보존비 표현대로 “민중의 횃불”로 기억되는 영웅이다. 어쩌면 불곡산 붉은빛이란 임꺽정 횃불 빛을 가리키는지도 모른다.  &nbsp;  임꺽정 관련 자료를 읽다가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다. 백정은 직업에 따라 분류된 단순 천민 계층이 아니다. 고려시대 중앙아시아에서 흘러든 튀르키예 계통 유목민 타타르-달단 또는 달달-족이다. 세종조에 농경 생활로 이끌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다. 유목 생활을 고수하며 점차 고립되는 과정에서 불가촉천민 집단으로 내몰렸지, 싶다. 신분제 혁파로 역사에서 사라졌으나 그렇게 뿔뿔이 흩어지고 알알이 박혀 오늘 K-민주주의 불씨가 되지 않았을까.<br>  임꺽정 생가터 보존비<br>높지는 않으나 언틀먼틀한 골산인 불곡산&nbsp;  불곡산은 이렇게 해서 내게 지우지 못할 기억을 남긴다. 섬세하게 따지면 중랑천과 내가 맺은 인연은 60년도 넘었다. 1965년 서울로 와 중랑천 지천 성북천을 건너다니며 20년간 살았다. 2011년 다시 중랑천 3백여m 거리에 진료소를 차려 돌아와 16년째 살고 있다. 2023년 1월 중랑천 지천 회룡천에서 마침내 생애 정점에 달하는 깨달음을 얻고 그 연장선에서 반제국주의 전사로 살아가다가 민중의 횃불 임꺽정을 중랑천 발원지 불곡산에서 기린다. 억지 서사일 수 없다.   &nbsp;  지난 5년 동안 서울 안팎 해발 200m급 이상 산 30개를 걸었다. 히말라야는 언감생심이고 백두대간만 보더라도 내가 걸은 산들은 낮다. 등산이 아니니 욕심도 자부도 없다. 평일에 출퇴근하는 옷차림으로 보호 장구는 물론 상비약조차 없이 홀로 걷는다. 이렇게 하는 까닭은 내 걷기 자체가 반제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게 내 운명이기 때문이다. 운명을 천명으로 만들어주는 존재가 숲이고 물이고 땅이고 바람이고 볕이다. 연거푸 3번 20km 이상 걸었으니 좀 줄여도 될 테지.]]></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401/pimg_7816061155078414.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90344</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쓰레기봉투 사재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76642</link><pubDate>Fri, 27 Mar 2026 09: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76642</guid><description><![CDATA[<br>* 희일이송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br><br>쓰레기봉투 사재기가 일어난다고 한다. 세계에서 한국이 분리수거를 제일 잘한다더니, 이 정도면 전쟁이 일어나도 분리수거를 먼저 걱정하겠다. 무슨 식품 사재기를 하면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쓰레기봉투가 먼저라니 확실히 착한 시민 되기에 정박된 순응주의. 석유 봉쇄가 된 쿠바에선 지금 거리거리마다 쓰레기가 넘친다. 이걸 미국 유투버들이 찍어서 가난한 사회주의 국가는 이렇게 더럽다며 주접을 떨고 있다. 당연히 미국이 석유를 봉쇄해서 쓰레기 청소차가 멈춘 것이다.  한국은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비닐 원료인 나프타의 60%를 공급받는다고 한다. 이게 막혀서 한국 석유화학 산업에 난리가 났다고 언론이 호들갑을 떠니 이런 사태가 일어난다. 쓰레기봉투도 못 만들 정도면 석유와 가스에 기반한 모든 상품들도 생산하지 못한다. 당장 먹는 것들이 문제가 된다. 쓰레기봉투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상황이 그 정도로 악화되면 쓰레기 수거차의 연료도 제한되겠다. 정부가 3개월 정도 쓰레기봉투 보유하고 있다고 발표해도 이 난리. 만약 쓰레기봉투 못 만들 정도면 정부가 임시방편으로 그냥 비닐 봉지에 넣어도 된다고 하겠지. 아니면, 임시방편으로 종이로 봉지를 만들어 내겠지. 이도저도 아니면 예전처럼 일정의 수거료를 받고 받아가든지. 아니면 각자 장바구니에 쓰레기를 모아 특정 장소에 갖다 놓게 한다든지. 위기를 어떻게 공동체가 함께 극복할까 고민하기보다, 그저 각자도생과 착한 시민 되기에만 골몰하는 어떤 풍경.<br>]]></description></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몰염치와 부끄러움을 한눈에 보여주는 지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74787</link><pubDate>Thu, 26 Mar 2026 13:0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74787</guid><description><![CDATA[<br><br>* 희일이송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br><br><br><br>유엔 총회에서 노예무역을 "인류에 대한 가장 중대한 범죄"로 규정하는 결의안이 막 통과됐다. 123개국이 찬성표를 던졌다. 한국도 찬성표다. 그런데 반대한 나라가 셋. 미국, 이스라엘 ,아르헨티나. 파시즘 국가들답다.이 결의안은 가나와 팔레스타인 등이 공동으로 제안한 것이다. 대서양 노예무역과 노예매매를 규탄하고, 그에 대해 '식민 배상'을 하라는 요구다. 최근 아프리카를 필두로 식민 배상 요구 운동을 펼쳐 왔었다. 한편으로 이 결의안은 여기 글로벌 자본주의가 제국-식민주의의 불평등에 기초해 있다는 걸 공유하는 취지도 담겨 있다. 1500년에서 1800년 사이, 얼마나 많은 흑인노예들이 대서양을 건넜을까? 대략 1500만 명.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략 2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노예무역과 노예 플랜테이션이 없었다면 자본주의의 시초 축적이 가능하지 않았다. 그 수많은 노예들이 혹독한 채찍질 속에서 채굴하고 수확한 은, 목화, 설탕, 인디고 등이 유럽으로 실려가 자본 축적의 원천을 제공한 것이다. 파란색이 찬성한 국가들, 빨간색이 반대한 국가들, 살구색이 기권한 나라들. 결의안에 반대한 미국과 이스라엘, 이 두 나라가 오늘날 얼마나 악의 축인지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된다. 19세기 목화밭에서 노예를 부리며 부를 축적했고, 지금에 와서도 그 남부 이데올로기를 질료 삼아 백인우월주의를 확대재생산하는 미국답다. 물론 기권표를 던진 유럽도 한심하긴 마찬가지.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이 결의안에 기권표를 던졌다. 최근 가자와 이란 전쟁에 대한 소신 발언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스페인도 마찬가지다. 15세기 말부터 수백년 동안 가장 지독하게 인종학살과 노예무역을 주도했던 스페인이 가해의 역사에 대해서는 꾹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다. 유럽중심주의의 한계다. 피식민 국가였던 한국이 결의안에 찬성을 던진 건 당연한 일. 옆나라 일본이 염치 없이 기권표를 던진 것도 인상적이다. <br><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326/pimg_7816061155071333.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74787</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질서있는 패권퇴각의 기회를 상실하고 있는 미국</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71998</link><pubDate>Wed, 25 Mar 2026 11:3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71998</guid><description><![CDATA[<br><br>*한설(전 육군 군사연구소장)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br><br>모든 전쟁은 그 역사적 시대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전쟁이란 그 자체가 인간이 직면한 역사적 시대적 모순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통해 모순이 어떻게 해소되는가에 따라 새로운 시대의 성격도 또한 규정되는 법이다. 그래서 전쟁을 단순하게 군사적 충돌로만 보면 안된다. 전쟁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최근 전황, 특히 걸프지역과 이스라엘지역의 피해상황에 대한 보도에 접근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아주 강력한 보도통제가 시행되는 것같다.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정부가 허용하지 않는 보도를 할 경우 중범죄로 다스린다고 한다. 지금 이스라엘의 피해는 매우 심각하다고 하는데 그런 피해상황이 제대로 보도가 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간혹 소셜 미디어에 올라오는 텔아비브의 사진을 보면 매우 심각한 피해가 발생한 것을 알 수 있다. 워낙 강력한 보도통제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전쟁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관련 당사자의 발언과 보도를 통해 전쟁이 무슨 이유로 발생했으며, 그 본질이 무엇이고,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비교적 합리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정황과 근거들이 하나씩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필자는 이번 전쟁의 본질을 미국의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패권방어 전쟁으로 파악했다. 특히 미국은 중국의 패권도전을 방어하기 위해 중국의 외곽으로부터 압박을 해나가기로 하고 베네주엘라의 마두로 대통령을 전격적으로 제거하고, 그 뒤를 이어서 이란에 대한 압박과 공세를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이 미국을 부추겨서 전쟁을 시작했다고 하는 것은 전쟁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는 소음에 불과하다. 미국에서 유태인들의 영향력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서 미국의 자본이 국가의 운명을 이스라엘에 맡기지는 않는다. 게다가 미국 금융자본의 실질적인 주인은 유태계가 아니라 록펠러 가문이다. 현재 미국의 주인은 록펠러인 것이다. 유태인과 로스차일드는 록펠러의 하수인 정도로 보는 것이 현재 미국과 서구의 정치체제 그리고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번 전쟁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 금융자본의 강력한 지원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위시한 걸프국가들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간밤에 그런 구상을 가능하게 하는 두가지의 기사가 올라왔다. 하나는 JP 모건의 다이먼 회장이 트럼프의 전쟁수행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발언을 한 것이다. 조선일보가 25일자로 보도한 ‘월가 황제’ 다이먼 “이란, ‘당장의 위협’ 아닌 돌진하는 살인자들”이라는 기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다이먼은 이란을 제거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다이먼의 이런 발언은 미국 금융자본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발언을 통해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트럼프가 말한 것 같은 휴전과 같은 상황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의 금융자본이 이란을 결국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면 앞으로 어떤 상황이 전개될 것인가를 예상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다이먼이 왜  이런 발언을 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미국 금융자본은 이란이 승리한 서아시아와 걸프지역의 새로운 지정학적 상황변화를 수용할 수없다고 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미국 금융자본은 페트로달러체제가 붕괴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는 독자적인 정책수행을 하기 어렵다. 트럼프도 미국 금융자본의 이해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런 상황을 통해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미국 금융자본의 전쟁수행은 철저하게 미국 대중의 이해관계와 상반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번째는 중앙일보가 오늘 25일자로 보도한 “사우디 왕세자, 트럼프에 ‘전쟁 지속해야…이란 정권 붕괴’ 촉구”이다. 사우디의 빈살만 왕세자는 이란을 제거하기 위한 전쟁을 계속하야 하며, 이로 인한 유가문제는 일시적일 뿐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사우디는 이런 보도를 부정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의 원인에 대한 여러 보도에서 사우디 아라비아가 이란을 타격할 것을 요청했다는 보도는 여러번 있었다. 아마도 트럼프가 이란 전쟁을 감행하게된 여러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사우디 아라비아의 입장이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전쟁의 원인이라기 보다는 미국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와 수단의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필자는 사우디 빈살만 왕세자가 했다는 이런 발언이 결국은 미국 금융자본의 입장을 상당히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우디는 원유를 수출한 대금을 거의 미국의 월스트리트에 투자하고 있다. 이로 인해 결국 사우디도 미국 금융자본의 인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더 심각하게 보아야 하는 것은 이번 전쟁이 이란이 요구하는대로 종결된다면 이는 사우디 아라비아를 위시한 걸프지역 왕정국가의 실존적인 위기를 초래한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미국이 이란의 요구를 수용하여 미군기지를 철수하고 위완화로 석유대금을 결재하고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제 관리하게 되면 걸프국가들은 이란의 지역패권에 모두 종속된다. 이런 상황이 되면 걸프국가의 왕정이 붕괴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런 존재론적 위기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아랍에미레이트 같은 국가들이 미국의 전쟁수행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사우디 아라비아는 처음에는 미군에게 자국내 기지의 사용을 허용하지 않았으나 얼마전부터는 모두 허용했다. 아랍에미레이트 같은 경우는 절박하다. 그들이 미국과 같이 전쟁을 수행하겠다고 나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란 전쟁은 이란의 핵무기능력을 제거하고 말고와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이란에게는 서아시아 지역패권을 차지하기 바로 직전의 상황이고, 미국에게는 이지역의 영향력 상실이 곧바로 전지구적 패권상실로 이어지는 도미노가 될 가능성이 높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걸프국가들은 왕정이 붕괴하는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트럼프가 말한 앞으로 5일간의 공세유예는 평화를 위한 시도가 미국이 어쩔수 없이 승리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을 알면서도 군사작전을 계속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미국이 진정 이 지역에서 영예로운 퇴진을 하려고 했다면 이란과 보다 진지한 대화를 했어야 한다. 이미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이 이란이라는 것이 다 드러나 있다. 미국이 실리는 양보하고 명분이라고 지킬 수 있어야 했는데 그런 기회도 상실하는 것 같다. 제국은 항상 이렇게 무너진다. 그러고 보면 영국이 제국의 자리에서 물러난 것은 그야 말로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질서있는 퇴각이었다. 미국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 같다.<br>]]></description></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모든 골짜기로 들어가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69930</link><pubDate>Tue, 24 Mar 2026 13:0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69930</guid><description><![CDATA[<br>  &nbsp;  사패(賜牌)는 조선 시대 임금이 궁가(宮家)나 공신에게 산림이나 토지를 하사하는 일이다. 경기도 양주와 의정부에 걸쳐 있는 산이 사패산인데, 선조가 6번째 공주인 정휘옹주에게 혼인 선물로 이 산을 주어서 생긴 이름이다. 해발 552m 화강암 덩어리 골산(骨山)이다. 그동안 마치 오봉산처럼 도봉산 일부로 여겨 따로 걸을 생각 내지 않다가 지도에서 골짜기들을 발견하고는 작심한다. 사패산은 골짜기 넷을 거느린다: 범골, 안골, 울띄골, 오야골. 오늘 이 넷 모두를 걷기로 한다. 20km가 넘을 듯하니 시간을 잘 조절하지 않으면 차질이 빚어질지도 모른다.   &nbsp;  회룡역에서 내려 호암사 가는 길을 따라 먼저 범골로 들어간다. 골짜기 이름이 왜 범일까? 다른 자료는 없고 호암사 호암(虎巖)이 범바위니까 아마도 이 골짜기에 범이 살았나보다 추측한다. 아닌 게 아니라 호암사 바로 뒤에 범이 살았을 만한 바위굴이 있다. 절에서 그랬는지 출입을 막아 놓았다. 굳이 들어갈 생각은 없다. 조금 가파르지만 그리 어렵지 않은 길을 걸어 범골 능선에 다다른다. 지도로 확인하니 사패산 정상을 오른쪽에 두고 오야골로 내려가 송추역 근처에서 점심 먹은 뒤 울띄골로 들어가는 일은 시간상 불가능하다고 판단된다. 길을 바꾼다.<br>  &nbsp;  사패 능선과 만나는 지점 1/3쯤 전에서 오른쪽 작은 능선을 타고 안골로 내려간다. 골바닥에 닿아 왼쪽으로 따라 올라가면 성불사가 나온다. 절을 구경 생각은 없으나 안골 깊이 들어갈 수 있는지 보려고 절집을 가로지른다. 더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 놓았다. 하릴없이 내려오다가 안골 폭포를 만난다. 신기하게 하얀 암반 위로 조그만 물줄기가 재잘거리며 흘러내린다. 철이 철이니만큼 아쉽지만 한참이나 눈에 담아두고 음식점을 찾아 내려간다. 혼자 먹을 음식이 없는 유원지 식당 몇을 지나 겨우 설렁탕집을 발견한다. 시장이 반찬이라던가, 역대급 맛이다.<br>  &nbsp;  식사를 마친 뒤 다시 안골로 되들어가다가 오른쪽 능선 산너미길을 따라간다. 바로 여기가 북한산 둘레길 14구간인데 풍경 좋다고 소문 자자한 길이다. 나는 능선길을 본능으로 싫어하나 이 길에서는 그런 마음이 피어오르지 않는다. 울띄골로 내려가는 지점부터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아직은 바싹 마른 겨울 모습이지만 물과 돌, 그리고 나무가 어울려 빚어내는 풍경이 참으로 정겹고 곱다. 다른 철에 꼭 다시 와야겠다고 다짐한다. 풍요롭지는 않으나 돌돌 흐르는 도랑물로 오랜만에 ‘물 모심’까지 한다. 물이 가는 길에서 멀어지는 인간 언덕길로 올라간다. <br>  &nbsp;  다시 숨 고르고 지도를 열어 살핀다. 오야골 가는 길을 살피기 위해서다. 어라?! 내 발밑에 굴 하나가 지나간다: 사패산 터널. 산 한가운데를 꿰뚫고 지나가는 광폭(편도 4차) 쌍굴 터널이다. 지역 주민은 물론 환경 단체, 불교계가 일제히 들고일어나 반대한 까닭이다. 과연 얼마나 중요한 도로인지는 모르지만, 특히 박정희 이후부터 사악한 제국 부역자 집단이 장악한 대한민국 토건 현실에서 볼 때 흑막은 없을 수 없다고 본다. 본디 길이 지니는 쌍방 소통은 가로막히고 효능과 권위만이 일방으로 질주하는 터널 위에서 나는 돌연 허공으로 둥둥 떠오른다. <br>  &nbsp;  정신을 다시 주워 담고 내려와 오야골로 들어간다. 자두 옛말인 ‘오얏’과 관련된 이름 아닐까, 짐작하나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잘 닦여진 길 왼쪽으로 내려다뵈는 제법 깊은 골짜기 내는 돌덩어리들로 이루어진 바닥이라 건천(乾川) 상태다. 한참 올라가니 원각사가 나온다. 흔히들 부르는 이 골짜기 이름이 기원한 절이다. 그냥 지나친다. 조금 뒤에 쏠 하나가 나타난다. 여기도 자질자질하나 물 많을 때 드러낼 모습과 소리를 상상하도록 이끄는 힘에 이끌려 이슥히 바라본다. 사패 능선 향해 더 올라갈 며리는 없다고 판단해 발길을 거둔다. 5시간 걸어 마무리다.  &nbsp;  오늘 골짜기 넷을 더하면 5년간 서울 안팎 계곡 60곳을 걸었다. 놓친 데가 없지는 않겠지만 “모든 골짜기로 들어가라”라는 말에 여정히 값하는 여정이었다. 왜 굳이 골짜기를 걸었나? 능선과 달리 계곡에서는 비인간 생명인 버섯(곰팡이)·돌꽃·풀·나무, 그리고 비생명 흙·물·볕·바람들을 섬세하고 치밀하게 마주하여 교감할 수 있어서다. 이런 내 행동은 제국주의 생활 양식 가운데 하나인 ‘등산’이 아니다; 내 몸에서 공생하는 섬세 생명과 더불어 더 널리 생명과 우주를 만나는 ‘잔치’며 ‘제의’다. 숲에 홀로 들 때, 함께 들 인간 벗을 그리는 며리가 여기에 있다.  <br>  <br>&nbsp;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324/pimg_7816061155068772.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69930</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스리랑카의 인도주의적 결단</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63669</link><pubDate>Sat, 21 Mar 2026 10: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63669</guid><description><![CDATA[<br><br>* 희일이송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br><br><br>역시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결국 미군의 영국 기지 사용을 허가했다. 아침저녁으로 말 바꾸는 게 간사하기가 이를 데 없다. 엡스타인 영국 정부라는 조롱에 부합하는 결정이겠다. 반면에 미국의 요청의 나라를 거절한 나라도 있다. 스리랑카. 오늘, 아누라 쿠마라 스리랑카 대통령은 전투기의 착륙을 허가해 달라는 미국의 요청을 거절했다고 밝혔다. 이 작은 나라의 용기를 상찬하는 말들이 쏟아지는 중이다. 스리랑카 정부는 이란 전쟁 초반에도 이미 그 용기를 국제 사회에 보여줬다. 트럼프가 순전히 '재미를 위해' 스리랑카 인근에 있던 이란의 군함을 격침시키고 수십 명의 목숨을 빼앗았을 때, 재빨리 200명이 넘는 이란 선원을 구출했었다. 중립을 표방하는 스리랑카지만 순전히 인도주의적 결단에 의한 행보였다. 스리랑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세계인들이 그 행보에 존중을 표했다. 세계 열강들이 미국 눈치를 보면서 주접을 떠는 동안, 작은 나라 스리랑카는 이렇게 인도주의적 실천을 단행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상황이 좋은 게 아니냐고 할 테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호르무즈 해협이 닫히면서 스리랑카는 현재 매주 수요일마다 휴일로 정한 상태다. 높은 유가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사정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제 언론들은 스리랑카의 '용기'만 부각하고 스리랑카의 이런 결단을 가능케 한 내막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가령, 이런 결정을 내린 아누라 쿠라마 대통령이 스리랑카 역사상 최초의 좌파 대통령이라는 사실 같은 것들. 2022년 봉기를 통해 부패한 대통령을 내쫓은 스리랑카 주권자들은 핑퐁게임하듯 수십 년 동안 정권을 나눠 가지던 양당 엘리트들에 넌더리를 내고 3%의 지지율을 보이던 한줌의 좌파 세력을 지지했다. 한때 무장혁명을 지향했던 JVP는 이제 다른 좌파들과 연합해 좌파연합 NPP로 대통령 선거에 승리하며 여당이 되는 기염을 토했다. 젊은 나이에 JVP 당원이었던 아누라 쿠라마는 늘 정부 암살단에 쫓기는 신세였다. 자기 때문에 부모집도 홀라당 불에 탈 정도였다. 온갖 역경을 딛고, 또 2022년 혁명에 힘입어 대통령까지 오른 인물이다. 역사상 처음 좌파가 정권을 잡았는지라 곧바로 주저앉을 거라는 세간의 예상과 달리, 무너지던 경제를 다시 세우고 있고 2026년 2월 기준으로 대통령 지지율이 65%에 육박한다. 요컨대 스리랑카의 인도주의적 결단은 이처럼 주권자들이 만들어낸 좌파 정부의 결단이었던 셈이다. 가난한 소국이지만, 지금 현재 그 품위와 자존심과 인류애를 드러내는 나라. 주식 걱정, 유가 걱정에 전쟁과 살육을 합리화하는 사람들에게 미덕을 보여준다 하겠다. 인간의 품위는 얼마나 인간다운가에 있지 돈이 많은가에 있지 않다.<br>]]></description></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전쟁을 하면서 동시에 기후-생태를 보호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61695</link><pubDate>Fri, 20 Mar 2026 11:2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61695</guid><description><![CDATA[<br><br>* 희일이송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br><br>이란 전쟁에 관한 포스팅을 여러 번 했더니 이란 전쟁에 대해 강의를 해달라는 연락이 연달아 온다. 정중이 고사했다. 내가 잘 모르는 이야기다. 더구나 전쟁과 생태를 분리해서 말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란 전쟁을 계속 지켜보는 이유는 이 정치적 재앙이 곧 생태적 재앙이기 때문이다. 이란 전쟁의 기저에 흐르는 석유 지정학이 곧 기후 지정학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둘은 한 몸이다. 미군과 이스라엘을 폭격하는 사이, 미국에는 대형 산불이 나고 40도가 넘는 3월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고작 3월인데도 40도가 넘는다. 그런데 이건 약과다. 올해 늦여름부터는 우리가 겪어보지 못할 폭염이 지구를 덮칠 개연성이 높다. 간단한 과학 이야기다. 2023, 2024, 2025년. 이렇게 3년의 기온은 인류 역사상 최정점을 찍었다. 2024년의 경우 12만 년 동안 중 가장 더운 해였다. 왜 이렇게 더운 것인가를 놓고 과학자들이 지금도 박터지게 싸우는 중이다. 정말 에어로졸 감소 때문인가? 알베도 감소의 충격 때문인가? 또는 우리가 모르는 복잡한 지구생태계가 온난화를 더욱 상승시키는 건가? 하지만 문제는 이 3년의 더위가 라니냐 기간에 펼쳐졌다는 점이다. 라니냐는 0.4~0.6도 가량 지구의 기온을 떨어뜨린다. 라니냐 기간이었기 때문에 기온이 떨어졌어야 정상이었다. 반면에 엘니뇨는 지구의 기온을 끌어올린다. 바로 올해 늦여름부터 엘니뇨가 온다. 말하자면 인류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3년 후에 엘니뇨가 오기 때문에, 막대한 폭염이 올 가능성이 높다는 게 과학계의 중론이다. 미국의 3월 폭염에서 보듯 벌써부터 조짐이 안 좋다. 한쪽에선 정유 시설과 가스전이 불타오른다. 또 한쪽에서는 지구가 불타오른다. 왼쪽 사진은 이란이고, 오른쪽 사진은 미국의 래브라스카다. 이 둘은 다른 이야기인가? 화석연료 제국주의가 19세기 말부터 중동의 모든 땅자락에 경계를 그어가며 지정학적 갈등과 제노사이드와 전쟁을 유발해 왔고, 그렇게 유혈의 쟁탈전을 경유하며 추출한 석유와 가스를 불태운 결과 지구가 점점 더 불타오르게 된 것이다. 호르무즈 해협은 결국 송유관이다. 세계 석유의 20%를 배출하는 송유관. 그곳이 막히니 줄지어 유조선도 늘어서고, 유가 상승 때문에 부유한 자본주의 국가들이 인질이 된 채 질질 끌려 다니고 있다. 말하자면 트럼프로 표상되는 화석연료 제국주의의 인질이 된 셈이다. 요즘 스페인이 가장 목소리 높여 미국과 이스라엘을 비판한다. 매일 비판이다. 전 세계에서 산체스 총리에게 팬레터가 쇄도하고 있단다. 스페인 내부의 정치적 지형에 따른 효과일 수도 있지만, 자세히 보면 스페인의 재생에너지 덕분이기도 하다. 산체스 정부는 지난 6년간 태양광과 풍력 발전 용량을 두 배로 늘렸다. 콜롬비아와 함께 요근래 가장 빠른 속도다. 재생에너지 확대는 전기 가격을 가스 시장과 구조적으로 분리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최근 조사 결과, 스페인에서 가스 가격이 전기 가격을 결정하는 시간은 전체 시간의 15%에 불과하다. 이는 이탈리아의 90%와 비교하면 매우 낮은 수치다. 즉, 재생에너지에 투자함으로써 화석연료 가격 변동에 훨씬 덜 취약하게 된 것이다. 가스의 90% 이상을 미국에 의존하는 독일이 트럼프에 꿈벅 죽는 것에 비해, 스페인이 지금 머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따질 수 있는 데는 이런 에너지 전환이 나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을 터다. 재생에너지는 어떻게 전환하고 어떤 속도로 전환하냐에 따라, 자립이 될 수 있고, 평화의 자원이 될 수 있으며, 정의와 평등의 밑천이 될 수 있고, 또 민주주의와 반권위의 밑천이 될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을 때 러시아에 가스를 의존하던 유럽 등 많은 나라에서 재생에너지 전환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됐지만 흐지부지됐다. 러시아산 가스가 아니라 미국산 가스를 구입했다. 미국 화석연료 기업들만 배가 터지도록 돈을 벌었다. 그리고 이란 전쟁이 나자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러시아산 가스 구입으로 선회하고 있다. 푸틴이 내적 어깨춤을 추고 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일부 국가에서 재생에너지 전환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나오고 있다. 이번에는 정말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들. 기회주의자인 프랑스 마크롱이 최근에 한 말은 그래도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 이란 전쟁을 계기로 재생에너지가 중요해졌다며 지금 받고 있는 피해가 "바로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의 대가"라고 공언했다.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은 (화석연료) 의존도를 줄이고 지정학적 위험에 대한 노출을 최소화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우리가 화석연료를 소비할 때마다 전쟁과 분쟁과 피로 점철된 비극들을 소비한다는 걸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반전평화를 외치는 것과 화석연료 근절은 전혀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다. 무한하게 작동하며 이윤을 축적하려는 이 전쟁 기계에 윤활유를 공급하지 않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전쟁을 하면서 동시에 기후-생태를 보호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가 상승과 방산주 잭팟 타령 좀 제발 그만했으면.<br>]]></description></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하버마스의 죽음과 ‘유럽 부족 철학’의 종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57266</link><pubDate>Wed, 18 Mar 2026 10: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57266</guid><description><![CDATA[<br>* 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br><br>위르겐 하버마스가 96세의 고령으로 며칠 전 사망한 뒤 국내 학계에서 그를 “기리는” 글들이 쏟아졌다. 내가 접해본 글들은 대체로 “냉정한 우호”에 가까운 내용이었던 것 같다. 호의적 애도 가운데는 “젊었을” 사회이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동기가 하버마스의 글을 읽은 것이었다는 내용이 더러 있었다. 나도 “젊었을” 때 그의 글들을 접했었고 상당 부분 공감한 적도 있으나, 포스트모더니즘에 관련된 그의 글을 읽고서는 부정적 평가로 돌아섰다고 기억된다. 그의 사후, 2023년 10월 가자의 하마스 세력이 벌인 ‘알 학사 홍수 작전’--이에 관해서는 시온주의가 기획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을 계기로 이스라엘이 종족 학살을 자행하는 것에 대해 그가 동료들과 발표한 친-이스라엘 입장문(「연대 원칙에 대하여(Grundsätze der Solidarität)」)을 환기하는 언급이 다수 나왔다. 하버마스는 거기서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옹호하고, 독일의 역사적 책임을 강조했으며, 반유대주의를 경계하고 인도적 가이드라인—이스라엘의 반격은 국제법과 인류애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면서 기본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그가 제시한 인도적 가이드라인은 빈말에 불과했고, 이스라엘을 두둔하는 데 주력한 입장문이었던 것이다. 국내에서 하버마스를 전적으로 옹호하는 지식인은 눈에 많이 띄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를 비판이론의 대가로 보는 데에는 대체로 공통적이다. ‘서구의 대표적 이론가’이며, 그런 정도의 대우는 받아야 한다는 것. 하지만 ‘서구의 대표적 이론가’란 무엇인가? 내가 페이스북 등에서 접한 글들에서 그 표현의 의미라고 느낀 것은 그래도 그는 ‘서구 이성’을 대표하는 발군의 이론가이며, 그만큼은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구의 대표적 이론가’의 의미는 그와는 정반대일 수도 있다. AI 도움을 받아 번역해서 올리는 아래의 글은 2년 전 하버마스의 입장문이 논란이 되었을 때 바로 나온 것이다. 필자 하미드 다바시(Hamid Dabashi)는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비교문학, 세계 영화사, 포스트식민주의 비평 이론을 가르치는 ‘이란학 및 비교문학 담당 하고프 케보르키안(Hagop Kevorkian) 석좌교수’다. 최신 저서로 『두 가지 환상의 미래: 서구 이후의 이슬람』(2022), 『마지막 무슬림 지식인: 잘랄 알레 아흐마드의 삶과 유산』(2021), 『식민지적 시선의 역전: 페르시아인들의 해외 여행기』(2020), 『벌거벗은 임금님: 민족국가의 필연적 종말에 관하여』(2020) 등이 있다. 다바시의 하버마스 비판은 국내에서 자주 접하는, 하버마스에 대해 비판적 우호의 태도와는 대조적이라고 여겨져서 그의 글을 공유한다. *****************&lt;가자 사태를 계기로 폭로된 유럽 철학의 도덕적 파산&gt;이란, 시리아, 레바논, 혹은 터키가—러시아와 중국의 전폭적인 지지와 무기 공급, 그리고 외교적 보호를 받으며—오늘날의 가자지구처럼 텔아비브를 세 달 동안 밤낮으로 폭격하고, 수만 명의 이스라엘인을 살해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을 불구로 만들며, 수백만 명을 노숙자로 전락시켜 도시를 살 수 없는 폐허 더미로 만들 의지와 수단을 가졌다고 상상해 보라.단 몇 초만이라도 그것을 상상해 보라. 이란과 그 동맹국들이 민간인 사상을 극대화하기 위해 텔아비브의 인구 밀집 지역, 병원, 유대교 회당, 학교, 대학교, 도서관—실제로 인구가 밀집된 그 어떤 장소라도—을 의도적으로 겨냥한다. 그러고는 세계를 향해 그저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와 그의 전쟁 내각을 찾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이러한 가상의 시나리오가 맹렬히 전개된 지 24시간 이내에 미국, 영국, EU, 캐나다, 호주, 그리고 특히 독일이 무엇을 할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이제 현실로 돌아와 보라. [2023년] 10월 7일 이후(그리고 그 이전 수십 년 동안), 텔아비브의 서구 동맹국들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저지른 일을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 장비와 폭탄, 탄약을 제공하고 외교적 비호까지 해주었으며, 그동안 미국 언론 매체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도륙과 제노사이드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제공해 왔다는 사실을 고려해 보라.앞서 언급한 가상의 시나리오는 현존하는 세계 질서 속에서 단 하루도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미국, 유럽, 호주, 캐나다의 군사적 폭압이 이스라엘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힘없는 세계의 민초들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는 단순히 정치적 현실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서구”라고 부르는 그 무엇의 도덕적 상상력 및 철학적 우주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유럽의 도덕적 상상력의 영역 밖에 있는 우리 같은 이들은 그들의 철학적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랍인, 이란인, 무슬림, 혹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우리는 유럽 철학자들에게 그 어떤 존재론적 실재성(ontological reality)도 갖지 못하며, 단지 정복되고 잠재워져야 할 형이상학적 위협으로만 존재할 뿐이다.임마누엘 칸트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에서 시작하여 에마뉘엘 레비나스와 슬라보예 지젝으로 이어지는 이 흐름 속에서, 우리는 기이한 것, 물건, 혹은 동양학자들이 해독해야 할 과업을 부여받았던 지식의 대상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이나 미국, 그리고 그 유럽 동맹국들에 의해 우리 중 수만 명이 살해당한다 해도 유럽 철학자들의 마음에는 추호의 망설임도 생기지 않는다.유럽의 부족적 청중들의구심이 든다면, 현대 유럽의 대표적 철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와 그의 동료 몇 명을 보라.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뻔뻔하게도, 잔인하고 저속한 행태를 보이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도륙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제 질문은 더 이상 현재 94세인 하버마스를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다. 질문은 그를 사회과학자이자 철학자, 그리고 비판적 사상가로서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다. 그의 생각이—과연 그랬던 적이 있는지조차 의문이지만—여전히 세계에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는가?세계는 나치즘과의 악독한 결탁에 비춰서 또 다른 주요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에 대해 유사한 질문들을 던져왔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이제 하버마스의 폭력적인 시온주의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것이 그의 철학적 기획 전체를 평가하는 데 미칠 중대한 결과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질문들을 던져야만 한다. 하버마스의 도덕적 상상력 안에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같은 이들을 위한 공간이 단 한 조각도 없다면, 과연 우리가 그의 철학적 기획 전체를 그의 부족적인 유럽 청중들을 넘어 인류의 나머지 부분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고 간주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하버마스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저명한 이란 사회학자 아세프 바야트는 가자 상황에 관해 그가 “자기 자신의 아이디어와 모순된다”고 말했다. 정중히 말하건대,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팔레스타인 생명을 무시하는 하버마스의 태도는 그의 시온주의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이는 비유럽인을 온전한 인간으로 보지 않거나,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장관이 공개적으로 선언했듯 그들을 “인간 짐승”으로 보는 세계관과 정확히 일치한다.팔레스타인에 대한 이러한 철저한 무시는 독일과 유럽의 철학적 상상력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통념상 독일인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이스라엘에 대한 확고한 헌신을 발전시켰다고 한다.그러나 이제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출한 그 웅장한 문건이 입증하듯, 나머지 세계가 보기에 나치 시대의 독일이 행했던 일과 그들이 지금 시오니즘 시대에 행하고 있는 일 사이에는 완벽한 일관성이 존재한다.필자는 하버마스의 입장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시오니즘적 도륙에 가담하는 독일의 국가 정책과 궤를 같이한다고 믿는다. 또한 아랍인과 무슬림에 대해 똑같이 인종차별적이고 이슬람 혐오적이며 외국인 혐오적인 증오를 품고 이스라엘 정착민 식민지의 집단학살 행위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이른바 “독일 좌파”의 입장과도 일치한다.오늘날 독일이 가진 것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죄책감이 아니라 ‘집단학살에 대한 향수’라고 생각한다 해도 우리는 용서받아야 할 것이다. 독일은 지난 100일뿐만 아니라 지난 한 세기 동안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도륙에 대리 만족하며 탐닉해 왔기 때문이다.도덕적 타락유럽 철학자들의 세계관에 대해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유럽 중심주의’라는 비판은 단순히 그들의 사고에 있는 인식론적 결함에만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타락의 일관된 징후다. 필자는 과거 여러 차례에 걸쳐 유럽 철학적 사고의 중심과 오늘날 그들의 가장 찬양받는 대표자들에게 깃든 치유 불가능한 인종차별을 지적해 왔다.이 도덕적 타락은 단순한 정치적 실수나 이데올로기적 맹점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치유되지 않는 부족주의로 남아 있는 그들의 철학적 상상력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여기서 우리는 마르티니크의 위대한 시인 에메 세제르의 유명한 선언을 되새겨야 한다.“그렇다, 히틀러와 히틀러주의가 밟아온 단계를 임상적으로 상세히 연구할 가치가 있다. 그리고 20세기의 아주 고결하고 인문주의적이며 기독교적인 부르주아들에게 그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에 히틀러가 살고 있으며, 히틀러가 그들의 악귀라는 사실을 폭로해야 한다. 그들이 히틀러를 비난한다 해도 그것은 모순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그들이 히틀러를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죄악이나 인간에 가해진 굴욕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백인’에 대한 죄악이며 백인에게 가해진 굴욕이기 때문이다. 즉, 그때까지 아랍인, 인도인, 아프리카인들에게만 전적으로 유보되었던 식민주의적 수법을 히틀러가 유럽에 적용했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오늘날 팔레스타인은 세제르가 이 구절에서 언급한 식민지 만행의 연장선에 있다. 하버마스는 팔레스타인 도륙을 승인하는 자신의 태도가, 자신의 조상이 나미비아에서 헤레로와 나마쿠아 집단학살을 저질렀던 것과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하다. 속담 속의 타조처럼, 독일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유럽적 망상 속에 머리를 처박고 세계가 그들의 본모습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궁극적으로 필자가 보기에 하버마스는 놀랍거나 모순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다. 그는 보편적인 자세를 거짓으로 취해왔던 자신의 철학적 계보가 지닌, 치유 불가능한 부족주의를 철저히 지켰을 뿐이다.이제 세계는 그 거짓된 보편성이라는 착각에서 깨어났다. 콩고민주공화국의 V.Y. 무딤베, 아르헨티나의 월터 미뇰로나 엔리케 두셀, 혹은 일본의 가라타니 고진과 같은 철학자들이 하버마스와 그 일당들보다 훨씬 더 정당한 보편성을 주장할 자격이 있다.필자의 의견으로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하버마스 성명서의 도덕적 파산은 유럽 철학과 나머지 세계 사이의 식민지적 관계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이다. 세계는 유럽의 ‘종족 철학(ethno-philosophy)’이라는 거짓 잠에서 깨어났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해방을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같은 이들이 겪는 세계적인 고통에 빚지고 있다. 그들의 장기적이고 역사적인 영웅주의와 희생은 마침내 “서구 문명”의 기초에 깔린 노골적인 야만성을 해체했다.<br>]]></description></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계곡이 스승이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55747</link><pubDate>Tue, 17 Mar 2026 14:2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55747</guid><description><![CDATA[<br>&nbsp;2024년 9월 1일 나는 성내천을 거슬러 걸었다. 청량산 허리께까지 닿아 그 발원지를 가늠만 한 뒤 시간에 쫓겨 되돌아왔다. 그 정도면 됐다고 여겨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길”을 내려왔다고 썼다. 오늘 그 길에 다시 선다. 제대로 들어가지 못한 계곡을 다 걷고 그 너머에 있는 고골 계곡까지 걸어 나올 참이다. 지하철 5호선은 강동역에서 갈라져 마천역과 하남 검단산역을 종점으로 하는 두 노선이 있다. 마천역에서 출발해 계곡 둘을 걸어 하남 검단산역으로 가는 경로다. &nbsp;  다시 성내천 계곡을 향한 며리가 있다. 지금은 연락이 안 되어 끊어진 인연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사람 하나 있다. ‘모든 인연은 배반으로 끝난다(김종철 선생)’니, 누구 잘잘못을 따지기는 어려우나 꼭 그러자면 내 잘못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인바 나는 미숙했고 투미했다. 못된 탐욕이 있지는 않았으나 숙의에 실패했다. 오늘 아침 홀연 그와 그가 살던 곳이 떠올랐다. 그가 내 생에 남긴 무늬를 기리며 내가 그 생에 남긴 얼룩을 뉘우치고자 하는 결심이 서늘 포근 들었다. &nbsp;  그가 건강하게 살아가길 삼가 빌면서 발걸음 기억 좇아 청량산 성내천 발원지로 가는 계곡에 든다. 쉽게 가는 능선길을 마다하고 계곡 물길을 따른다. 어느 순간 길은 능선으로 방향을 튼다. 물을 따라가서는 길이 안 된다고 먼저 간 이들이 판단한 결과일 테다. 나는 결연히 물소리를 따르기로 한다. 늘 그렇듯 이렇게 일부러 길 밖으로 나가는 찰나부터 두려움, 아뜩함, 그리고 기이한 설렘이 갈마든다. 비와 땀에 젖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 발원지를 향해 길을 만든다. &nbsp;  안말내(성내천) 습원<br>&nbsp;  얼마나 헤맸을까,&nbsp;깨진 기왓장 하나가 눈으로 와락 뛰어든다.&nbsp;얼른 고개를 들어보니 능선 이룬 남한산성이 저 멀리 어룽어룽 보인다.&nbsp;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주위를 찬찬히 살피니 뚜렷하지는 않으나 성내천 처음 물을 머금어 흘려보낼 만한 조그만 습원 있다.&nbsp;예를 표하자 편안한 심사가 되어서는 쉽게 에돌아가는 비탈길로 방향을 튼다.&nbsp;드디어 연주봉 옹성 암문 근처에 다다른다.&nbsp;이렇게 헤맨 탓으로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긴다.&nbsp;내쳐 고골 계곡으로 갈 수가 없는 상황이다.<br>전승문(남한산성 북문)&nbsp;  북문 아래 식당에서 산나물 없는&nbsp;‘산나물’&nbsp;비빔밥으로 점심을 먹는다.&nbsp;주인장은 손님에 별 관심이 없고 식당 한복판에 친구들과 앉아 낮술 판 벌이며 스페인 여행 이야기를 해댄다.&nbsp;이렇게 번 돈으로 그렇게 누리는가 보다.&nbsp;아무렴.&nbsp;남한산성이야 한낱 유원지지 역사는 무슨.&nbsp;무심히 일어나 북문으로 간다.&nbsp;정조대왕이 전승문(全勝門)이란 이름은 내렸으나 현액을 내리지 않아 나중에 채자(採字)로 달았다고 한다.&nbsp;역사는 종종 이렇게 아퀴를 나중에 맞추며 흘러가기도 하는가보다.<br><br>북문에서 내려가는 고골은 광주 옛 읍치(邑治)라는 뜻이다. 한강을 끼고 있어 기원전부터 사람이 살았고 온조가 세운 백제 요지기도 하다. 고려 건국공신 왕규가 본거지로 삼았던 곳으로 추정된다. 조선 때는 남양주 둔지나루, 광주 창모루를 통해 모인 식량을 고골 사창(司倉)에 보관했다가 등짐으로 남한산성까지 날랐다. 그 길이 세미(稅米)길이다. 세미길을 내어준 골짜기가 바로 고골 골짜기다. 고골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내가 오늘날 덕풍천이다. 고골은 유구한 역사 그 자체다.<br>고골내(덕풍천) 물소리를 처음 들은곳<br>골짜기 아래 펼쳐진 벌은 둔전(屯田)이 있었을 만큼 넓다. 그런 역사와 지정학이 사라진 현대에 이르러서는 기형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다. 안정된 농촌도 아니고 가지런한 도시도 아니며 하다못해 무슨 공업단지도 아니다. 건성드뭇이 자리 잡은 각종 건물 탓에 어수선하고 너절하기까지 하다. 식민 통치와 부역 국가 난개발 과정에서 교통 주변부로 내몰리며 눈 밖으로 밀려난 듯하다. 최근 공공주택 지구로 지정되어 목하 폐허가 되고 있다. 덕풍천 중상류 살풍경도 똑같다.<br>이 폐허는 또 다른 폐허를 낳지 않을까?&nbsp;  <br>덕풍천을 따라 걷는 내내 심사가 편치 않다. 성내천에 이름 빼앗긴 “안말내”처럼 여기 “고골내”도 웅숭깊은 역사를 되살려 내기에는 너무도 살뜰히 더럽혀졌다. 공공주택 지구 토건이 끝난 다음 여기는 어찌 변해 있을까. 이 토건에 공공연히 침투했을 부역 자본 정체를 아는 나로서는 몹시도 비관할 수밖에 없다. 저들이 역사와 자연을 공경할 리 없다. 오히려 망가뜨려야 종주국에 바치는 충성이 되니 기를 쓰고 압살하리라. 각성한 시민이 굳세게 맞서 싸우기를 간절히 빈다. &nbsp;  다섯 시간 동안 안말내, 고골내 골짜기를 잇는 해발 500m 고개를 넘어 물경 20km를 걸었다. 천추 아래 모든 근육이 아프지만 내일 피곤을 걱정하지 않고 그저 이렇게 살아간다. 오히려 내가 숲과 더불어 반제 전선을 이루는 이 제의가 허사로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한다. 검찰개혁이 그런대로 방향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개혁 대상한테 개혁을 맡겨 놓고 휘청댄 개혁 주체는 아직도 저들이 혼을 제국에 판 악령 존재라는 진실에 귀 닫고 있다. 반성하고 책임져야 한다.&nbsp;  숲으로 떠날 때는 사사로운 계기가 작동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내게 숲은 사사로움 너머까지 번지는 지평이므로 서사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질문과 공부가 더해져 내 삶을 확장하고 증언하는 일이 빠져서는 안 된다. 당연히 돈 되는 일과 반대 방향이다. 아도르노가 말했듯 고결을 내려놓고 ‘각별한 수치심을 지닌 채 안절부절못하면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삶이 선한 사람을 만든다. 비록 순댓국에 소주 한 잔일 테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를 빛접게 그리며 지하철에 올랐다.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317/pimg_7816061155061724.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55747</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난데 없는 중국 위완화 지불조건의 의미와 미국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제할 수 없는 이유 </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53164</link><pubDate>Mon, 16 Mar 2026 08:1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53164</guid><description><![CDATA[<br>* 한설(전 육군 군사연구소장)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br><br>바둑에는 형세판단이 중요하다. 전쟁은 더욱 그렇다. 형세판단을 하지 못하면 전쟁의 향방을 제대로 읽을 수 없다. 지엽적인 문제에 빠지면 전체를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 지금 이란 전쟁을 파악하는데도 전체적인 형세판단이 우선되어야 한다. 여전히 국내의 여러 소셜 미디어를 보니 형세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필자는 이런 현상 뒤에는 인지전이란 의도가 작동하고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현대전의 가장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는 심리전이다. 전쟁은 상대방의 의지를 꺾는 것이기 때문에 우국의 대중으로부터 전쟁 지지를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당연히 한국의 대중을 미국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작업이 진행될 수밖에 없다. 상당수의 유투버와 언론인들이 그런 공작의 에셋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전쟁이 2주가 지나면서 이란은 점점 더 전쟁의 주도권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다. 이란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핵심적인 고리는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 통과의 조건을 몇가지 밝히고 있다. 이전에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사를 추방하는 조건이었다. 어제는 석유대금을 위완화로 지불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미국의 페트로 달러 체제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통과의 조건으로 위완화 지불방식을 요구한 것은 미국에게 있어서 뼈아픈 일격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이 가고 점점 더 유가가 상승하면 하나둘씩 위완화로 석유를 구매하게 될 가능성이 생긴다. 걸프지역 산유국이나 석유 수입국가나 일정한 시점이 지나면 견딜 수 없는 임계점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석유를 위완화로 결재하라는 이란의 요구가 현실화되면 미국의 패권적 지위는 한꺼번에 붕괴할수도 있다. 걸프지역 국가들은 석유를 판 위완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 중국 국채를 살것인가 아니면 달러로 바꾸어서 다시 미국 국채를 살것인가? 걸프 산유국들은 공산품을 수입해야 하기 때문에 우선 중국제 공산품을 수입할 것이고 남는 돈은 금을 사던 중국 국채를 사던 해야 할 것이다. 산유국의 자금이 월스트리트로 가지 않으면 미국은 심각한 금융위기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석유를 위환화로 결재하라고 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석유를 살 위완화를 구하는 일이 우선 어렵다. 중국이 수입국가로 변하지 않는한 위완화는 달러처럼 널리 퍼지기가 어렵다. 위완화를 달러와 같은 페트로 위완화로 만들려면 중국은 무역수지 적자를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중국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미국이 페트로 달러체제를 유지하려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 직면한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란의 위완화 지불 조건은 현재의 페트로 달러 체제에 심각한 일격을 가한 것은 분명하다. 이란의 위완화 지불 조건은 아마도 중국과의 상당한 논의가 있었을 가능성을 추정하게 한다. 중국도 미국의 현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방안으로 이란에게 위완화 지불조건을 제시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란의 이런 조건에서 우리는 중국과 이란이 전쟁수행과정에 전략적인 측면부터 전투현장에서까지 매우 긴밀한 협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전개될 전쟁의 핵심적인 문제는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통제가 될 것이다. 모든 작전과 전투행위는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하는 것이 미국의 목표가 될 것이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제하려면 공군과 해군으로는 불가능하다. 워낙 좁은 해협이기 때문에 해안의 주요지역을 장악하고 이란군을 그 지역에서 몰아내야 한다. 결국 지상전이 필수적이다. 언론에서 보니 오키나와에서 가는 미해병 25000명이 호르무즈 해협의 섬을 점령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섬을 통제해서 이란의 소형군함이 활동하는 것을 차단하겠다는 생각인 모양인데 해안의 주요지역을 통제하지 못하면 섬에 있는 미해병은 아주 좋은 표적에 불과하다. 호르무즈 해협은 섬을 장악한다고 통제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상당히 넓은 지역의 해안지역의 주요 고지군 일대를 장악하고 통제해야 한다. 그정도 지역을 장악하려면 상당한 규모의 지상군 부대가 필수적으로 상시 주둔해야 한다.  그러니 미국이 해병부대를 투입한다면 그것은 전면적인 지상전쟁으로 확대되는 전초전이 될뿐이다. 필자는 전면적인 전쟁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최근 들어 미국의 여론도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 같다. 처음보다 미국의 전쟁수행을 지지하는 여론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대중들도 이번 전쟁에서 패배하면 미국의 운명이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면 생각이 바뀔 가능성도 부정하기 어렵다. 한편, 중국은 지구 반대편에서 대만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중국 국방부는 대만을 무력통일할 수 있다고 공언을 했고 최근 군함을 대만해협에 보내기도 했다. 만일 미국이 이란에 전면적인 지상전을 시작하게 되면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가능성은 매우 높아질 것이다. 중국으로서는 미국의 힘이 분산된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더 지나서 일본이 평화헌법을 폐기하고 군사력을 강화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려고 할 가능성도 상존한다. 중국은 이런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전쟁수행여건을 보자면 미국은 점점 더 상황이 악화되어 가고 있다. 공격과 방어용 미사일은 거의 소진되어 가고 있으며, 걸프지역에서 공군작전도 쉽지 않다. 지금까지 6대의 공중급유가 파손되었다. 이란 공격을 위한 교두보인 이라크는 점점 시아파의 영향력하에 들어가고 있다. 걸프지역의 공군기지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공군기지도 안전하지 않다. 미국이 며칠전부터 B-2, B-52 같은 전략폭격기를 동원하여 폭격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반면 이란은 지속적으로 일정하게 미사일과 드론을 이용하여 미국 중부사령부의 작전지속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표적을 강타하고 있다. 이란 미사일과 드론은 요격을 피해서 표적을 효과적으로 타격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지금의 미국과 미군의 능력으로는 이란과 지금과 같은 전쟁을 계속 수행하기 어렵다. 미국이 전쟁을 하려면 전시징병제와 같은 전면적인 전시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지금의 이란은 과거의 베트남보다 더 강력하다. 그렇게 하더라도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장담은 하기 어렵고, 설사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패권은 중국에게 완전하게 상실하게 된다.<br>]]></description></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전황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전형적인 전쟁의 양상으로 진입하고 있는 이란 전쟁  </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49722</link><pubDate>Sat, 14 Mar 2026 13: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49722</guid><description><![CDATA[<br><br>* 한설(전 육군 군사연구소장)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br><br>전쟁이 시작된지 2주가 넘었다. 최근의 전쟁상황을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그동안 미국은 전쟁의 정치적 목표를 전혀 달성하지 못했다. 상황은 정반대로 되어서 이란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데 점점 더 가까이 가고 있다. 시간은 이란편이다. 전쟁이건 무슨 일이든 조급해지면 일을 그르치게 된다. 미국은 조급하고 이란은 느긋하다. 이란은 지금같은 상황을 계속 유지하면 된다. 전략적 여건뿐만 아니라 작전수행에 있어서도 이란은 미국보다 성공적이다. 미국이 공중과 화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예상했던 바다. 통상 생각했던 것은 미국이 강력하게 타격하면 이란이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하고 찌글어 들어가는 것이었을 것이다. 미국이 세계를 대상으로 수행한 전쟁이 그런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예외도 있었다. 미국은 약소국가를 상대로 강력한 힘을 휘두르는데 최적화된 군대를 가지고 있으며 그런 방식의 전쟁수행방식을 추구했다. 그것은 압도적인 군사력의 우위로 인해 가능했다. 그러나 상황이 변해 미국이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누릴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드론과 미사일의 발전 때문이었다. 이런 경향은 이미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분명했다. 미군의 실책은 우크라이나 전쟁부터 시작된 전쟁수행 방식의 변화를 도외시하고 자신들이 그동안 익숙해져 있던 과거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이다. 클라우제비츠는 항상 최근 전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군인의 전사연구는 항상 가장 최근에 일어난 전쟁을 살펴보는 것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쟁양상은 전략에서 작전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까지는 누가 전략적 우위를 주도하느냐의 문제가 중요했다면 앞으로는 군사작전의 수행양상에 따라서 전쟁의 양상이 달라질 것이라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작전상황을 보면 미국이 너무 불리하다. 미국이나 이란이나 지금 모두 나름대로 한계에 봉착해 있는 것 같다. 미국은 이란과 전면전을 수행할 정도로 준비를 하지 않고 전쟁에 뛰어 들었다. 앞으로 작전지속능력이 문제가 될 것이다. 사드와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부족은 작전지속능력의 한계를 의미한다. 지상전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지상전을 고려해야 할 때가 오고 있다. 미국은 일본에 있는 해병원정단의 병력을 중부사령부로 이동시키려고 하는 것 같다. 아마도 오까나와에 있는 해병원정단의 병력일 것인데 그 병력은 한반도 유사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상황이 어려워지면 전략예비로 투입될수도 있고 반격작전시 조선에 대한 상륙작전에 동원되는 병력이다. 게다가 대만유사시에도 투입될 것이다. 이런 병력이 빠진다는 것은 동북아 지역의 안보환경이 변화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럴때 중국이 대만을 침공해도 미국은 대응할 방법이 없다.간밤에 미중부사는 이란 석유수출의 핵심지역인 하르그 섬을 강력하게 폭격했다. 트럼프는 석유시설은 건드리지 않고 군사시설만 파괴했다고 한다. 이란은 즉각 미국과 걸프지역의 석유시설 파괴를 시사했다. 이번 미중부사의 하르그 섬 폭격은 미국의 전쟁수행이 체계적인 계획이 아니라 임기응변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우려를 하게 만든다. 미중부사가 어떤 개념과 목적 달성을 위해 하르그 섬을 폭격했는지 모르겠다. 하르그 섬을 폭격하는 이유는 이란의 석유수출을 차단하는 목적 이외에는 없다. 그런데 주변의 군사시설을 폭격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모르겠다. 오히려 이란에게 걸프지역의 석유시설 폭격의 빌미만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번 하르그 섬의 폭격은 미국의 전쟁목적이 아니라 이란의 전쟁목적에 기여하는 행동이었다. 미국이 하르그 섬의 석유시설을 파괴하지 못한 것은 이로 인한 유가상승으로 오히려 미국을 옥죌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미국 중부사가 이란의 제약회사, 담수화시설, 석유시설, 학교와 같은 시설을 표적으로 선정한 것은 그들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초보적인 계획조차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미국은 그냥 눈에 보이는대로 생각나는대로 언론이 말하는대로 표적을 선정하고 폭격을 하는 것 같다. 미중부사가 선정하고 파괴한 표적중에서 미국의 전쟁수행에 도움되는 것은 거의 없다. 오히려 이란이 무차별적 전쟁수행 빌리만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보도와 분석을 보면 이란은 여전히 강력한 대공방어기능을 유지하고 있고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걸프지역 국가에 대한 지속적인 드론 및 미사일 공격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의 피해는 심각한 것 같다. 네타냐후, 모사드 책임자 및 주요 각료들도 사망했다는 소식이 떠돌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에 대한 확인보도도 하지 않고 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이후 한번도 겪은적이 없는 가장 강력한 저항을 경험하고 있다. 강력한 공군에 바탕한 미국의 군사능력은 이란을 굴복시키는데 그리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전략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작전적으로도 불리한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다. 이란의 미사일 타격 능력은 미국도 따라오기 어려울 정도인 것 같다. 미국은 이번 전쟁으로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 전략레이다와 사드체제 그리고 공중급유기와 3대의 전투기를 상실했다. 고가의 무인항공기는 상당수 손실을 보았다. 미국이 이정도의 피해를 본 적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중재와 협상으로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는 시점은 지나버렸다. 미국은 성공했다고 하지만 하메이니를 사망하게 한 것이 가장 큰 실책이었다. 서방에서는 하메이니를 독재자라고 보았을지 모르겠으나, 내가 보기에 그는 매우 온건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미국은 이란의 진짜 강경파와 상대를 해야 한다. 미국이 군사적으로 지금의 상황을 뒤집을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이 점점 지상군부대 투입에 가까이 가는 것도 현재의 작전양상으로는 전황을 뒤집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러시아가 아니면 중재할 국가도 없다. 그런데 중국과 러시아는 지금 미국이 이란과 전쟁을 하는 것이 너무나 고맙기만 할 뿐이다. 전쟁을 중단하라고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직 여전히 한국에서는 미국이 이란을 이기고 있으며 혼내주고 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정신을 차리기 바란다.전쟁은 이제 전형적인 군사작전의 양상으로 진입하고 있다. 전황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전형적인 전쟁의 양상이다.<br>]]></description></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이란의 무조건 항복 요구와 미국 내부의 붕괴로 인한 전쟁종결 가능성</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45837</link><pubDate>Thu, 12 Mar 2026 13: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45837</guid><description><![CDATA[<br>* 한설(전 육군 군사연구소장)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br><br>패권국은 전쟁으로 무너지고 또 새로 생겨난다. 필자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미국의 패권이 붕괴할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이란전쟁이 미국패권 붕괴의 결정타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이란이 미국의 가장 핵심적인 이익인 전략적 중심(center of gravity)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전략적 중심은 금융을 기반으로 한 전세계적인 경제체제이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고 걸프지역 국가들을 압박함으로써 미국 경제체제의 중요한 한축을 붕괴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란은 레바논 친 헤즈볼라 방송을 통해 미국과 협상을 위한 다음 세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번째, 향후 전쟁이 재발하지 않을 것이란 보장두번째, 이란 핵시설에서 완전한 핵연료 순환을 보장할 것이라는 합의세번째, 전쟁배상이란이 미국에 제시한 조건은 사실상 무조건 항복이다. 첫번째 전쟁이 재발하지 않을 것이란 보장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갈 것인가를 생각해보자. 그것은 크게 두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인데 첫째는 걸프지역에서 미군기지의 철수이고 둘째는 이스라엘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전쟁을 일으키니 그것을 못하게 하라는 것인데 사실상 그것은 이스라엘군의 무장해제를 의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란은 걸프지역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것이다. 두번째 핵연료 순환보장 요구는 이란이 사실상 핵무기 보유를 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란은 미국이 자신의 핵무기 보유를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이란은 이 전쟁이 어떻게 끝나는가와 상관없이 핵무장의 길로 갈 것이라고 전망된다. 이란이 이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주장은 여러번 있었다.세번째 배상문제다. 배상은 패전국이 승전국에게 하는 것이다. 이란이 미국에게 배상을 요구한 것은 패전국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배상이란 강화조약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이란이 요구하는 배상은 단순하게 돈을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한 새로운 질서의 공식적인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란은 미국과 휴전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종전을 하자는 것이다. 미국이 이란의 이런 요구를 수용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 이란을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놀랍다. 이미 걸프지역에서 군사적인 균형은 무너지고 있다. 기존의 미사일과 드론으로 하는 군사작전은 이란이 압도적인 우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란은 점점 더 강력한 미사일을 발사하고 있다. 반면 미국과 이스라엘 방공망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최근의 전쟁상황을 보면서 잘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다. 방공미사일의 기능적 한계다. 방공미사일은 항공기와 탄도미사일에는 효과적이지만 드론과 같은 체계에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앞으로 기술적 발달로 레이다가 드론과 항공기 그리고 탄도미사일을 구분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러지 못하는 것 같다. 이는 미국의 국방전략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이 엄청난 비용을 들여 만든 고가의 방공무기들이 무기체계의 발달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도 여기에도 적용할 수 있는 것 같다. 수적인 우세가 질적인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란의 미사일과 드론 고갈을 주장하는데 필자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그럴 상황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이란은 깊숙한 지하갱도에서 미사일과 드론을 만들어내고 있을 것이고 그 생산량은 미국과 이스라엘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게다가 이란은 부족하면 받아올 국가라고 있지만, 미국은 자체적으로 급속하게 생산을 늘릴 능력도 없고 어디서 받아올 국가도 마땅치 않다. 이란의 내부 혼란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처럼 이란 혁명수비대가 확고하게 전쟁을 하겠다고 나서면 내부혼란이란 별 의미가 없다. 어떤 사회적 동요도 군대가 확고하게 대응하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사회적 동요가 체제를 흔드는 것은 군대의 태도와 입장이 어정쩡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권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으면 그 어떤 사회변혁도 불가능한 것이다. 이란은 대중소요를 적대행위로 규정했다. 앞으로 이란에서 대중소요는 당분간 불가능하다. 반면 미국과 이스라엘은 지금 내부가 위태위태하다. 강력하던 이스라엘 대중의 결속력도 흐트러지고 있는 것 같다. 전쟁이 생각처럼 진행되지 않자 네타냐후에 대한 불만이 늘어나고 있다. 미국도 내부 단속하기 어렵다. 지금 미국 경제는 점점 더 위기 상황으로 진입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조금만 더 지속되면 미국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전쟁에서 승패가 결정나는 것이 아니라 미국 내부에서 전쟁의 승패가 결정될 수도 있다. 이란 전쟁이 끝나는 경우의 하나가 미국내부에서 경제적 붕괴가 발생하여 전쟁에서 물러나는 것도 될 수가 있을것이다. 이번 전쟁이 어떻게 끝나던 그 후과는 예상하던 것보다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소련이 붕괴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제는 미국이 붕괴하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br>]]></description></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아이와 교육 사이에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39435</link><pubDate>Mon, 09 Mar 2026 09: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39435</guid><description><![CDATA[<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309/pimg_7816061155053460.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39435</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파멸하는 제국</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35271</link><pubDate>Sat, 07 Mar 2026 09:3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35271</guid><description><![CDATA[<br><br><br><br>서방 언론이 보여주지 않는 항공모함 아브라함 링컨.제국 파멸을 상징하는 듯 처참하다.<br><br>&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307/pimg_7816061155051059.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35271</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3·1혁명 순례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29291</link><pubDate>Wed, 04 Mar 2026 10: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29291</guid><description><![CDATA[&nbsp;107번째 3·1혁명일 아침, 길 위의 인문학 운동을 펼치고 있는 지승룡 님이 페이스북에 쓴 글 한 편을 우연히 접한다. 날이 날이라 백용성 스님과 대각사, 그리고 3·1혁명 이야기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글을 읽고 즉시 오늘 걷기 경로를 정한다: 충무공 생가터-&gt; 대각사-&gt; 종묘-&gt; 창경궁-&gt; 창덕궁-&gt; 탑골공원. 이만하면 오후 나절 걷기로 팽하다고 여긴다.   &nbsp;  한양 풍수상 남산이 안산(案山)이다. 안산 북쪽 줄기를 안산룡(案山龍)이라 한다. 안산룡 기슭과 이 기슭 끼고 흐르는 건천(乾川)을 따라 명당이 형성된다고 한다. 진위를 떠나 정인지, 양성지, 김수온, 노수신, 허균, 유성룡같이 뜨르르한 인물을 배출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오늘날 필동 중북부와 인현동1가인데 바로 이 인현동1가 31-2가 충무공 탄생지다.   <br>  &nbsp;  민중이 자발로 탑을 세워 보존한 인헌공 낙성대에 비하면 안내판 하나로 남은 충무공 탄생지는 못내 아쉽다. 물론 생가터 아니어도 충무공은 우리 영혼에 각인돼 있지만 오늘 같은 날은 안내판만 달랑 보고 마는 심사가 여간 씁쓸한 게 아니다. 토착 왜구와 잔류 왜구가 여전히 왜장독장치는 현실이라 3·1혁명은 여태도 계속된다고 느끼니 그저 울가망하다.  &nbsp;  연휴 즐기는 표정 일색인 사람 사이를 걸어 대각사에 다다른다. 오래전에 스치고 지나간 기억이 있다. 겉모양만 보고 껄렁한 신흥 불교 절집이려니 했음에 틀림없다. 백용성 스님과 3·1혁명, 그밖에 독립운동, 불교개혁에 얽힌 사실을 알고 나니 내 행망쩍음이 점직하기만 하다. 3·1혁명 그림으로 올린 특별한 단청에 삼가 예를 표해서 새 순례지로 새겨 둔다. <br>  &nbsp;  대각사와 종묘는 지척 간이라 도리어 새삼스럽다. 3·1혁명 기리는 날 종묘 걷는 일은 각별하다. 곧장 정전·영녕전으로 들어가 3·1혁명이 이 두 신성 공간과 만나 어떤 서사를 구성할지 곰곰이 생각한다. 조선과 대한민국, 그 사이 3·1혁명은 연속과 불연속 역설을 창조하는 카이로스다. 어쩌면 우리 통념보다 3·1혁명은 훨씬 더 중대한 사건일는지도 모른다.   &nbsp;  3·1혁명 직전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많지 않다. 관련 기록이 없어 역사 맥락과 사회 지평을 정확히 알지 못하나 당시 여성이 남성을 능가하는 정치 각성을 이루었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3·1혁명이란 사건은 이런 변화 모두를 아우르는 새 이름으로 우리 역사에서 다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본다. 기회가 왔으니 말이다. <br>  &nbsp;  창경궁으로 건너가기 직전 나무 한 그루를 유심히 살피는데 누군가 관심을 보인다. 상가롭게 설명하자 그가 갑자기 관심사를 넓힌다. 이야기는 궁·능과 숲으로 번져간다. 날이 날인지라 나는 문맥을 자연스럽게 이끌며 왜놈 제국이 궁·능과 숲을 어떻게 약탈했는지 자분자분 말해준다; 언제 어디서든 사소한 인연에서조차 반제 전사로서 증언하며 살아간다.   &nbsp;  창경궁과 창덕궁 거쳐 탑골공원으로 향한다. 익히 아는바 이 신성한 공간은 언제부턴가 남루하거나 너절한 인간들 볼모가 되었다. 밖은 뜻 모를 왜자김에 들뜬 술판으로 어수선하고, 안은 정체 모를 3·1절 기념행사로 게저분하다. 소음일랑 귓등 송가 삼고 나는 3·1혁명 새 기상을 발원한다. 3·1혁명 당시도 세상 한가운데에 물색없는 분대질은 있었으리라. <br>3·1혁명 순례 회두리로 삼일문 앞에 선다. 어라? 현판 글씨가 달라졌다. 오래 전이지만 내 기억은 꽹하다. 박정희 졸필임을 알아보고 쌍욕을 퍼부었으니까. 즉시 검색한다. 2001년 민족 단체 회원이 낫으로 뜯어내 버린 뒤 2003년 독립선언서에서 채자(採字), 다시 걸었단다. 속이 확 풀린다. 내친김에 뜨끈한 국밥에다 소주 한잔으로 몸을 마저 풀어야겠다.<br>  <br>&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304/pimg_7816061155048262.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29291</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불완전한 채로 완전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15404</link><pubDate>Thu, 26 Feb 2026 14:5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15404</guid><description><![CDATA[<br>  &nbsp;  『나무를 읽는 법』(트리스탄 굴리), 이 책은 읽고 나서 숲으로 가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든다. 지식을 지혜로 이끄는 힘은 마음이 아니라 몸에서 나온다는 진실을 깨닫게 하기에 팽한 책이다. 오늘은 쉽게 접근해 크게 체력 소모하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서울 둘레길 열째 마디(우면산)를 이 책과 더불어 걷는다.   &nbsp;  내가 숲에 드는 목적은 공부와 연동돼 바뀌어 왔다: 숲 자체에 깃들기, 비인간 식물 생명 우러르기, 지의류와 버섯(균류 자실체) 기리기, 숲속 물 모시기, 그리고 이제 나무가 건네는 말 듣기. 이렇듯 목적이 남과 달라서 숲에 들 때는 늘 혼자다. 겉보기론 등산이지만 속보기론 윤림(淪林)이다: 숲에/~서 스미기.   &nbsp;  숲에 스며든 들머리,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는 소리 쪽으로 다가간다. 두 줄기가 접합한(inosculate) 나무다. 우리는 연리목(連理木)이라고 부른다. 오른쪽 나무줄기가 분기해 자라면서 왼쪽 나무줄기와 만나 비비다가 마침내 서로 부둥켜안으며 잘리고(오른쪽) 파인(왼쪽) 상처를 아물려 한 생명을 이룬 듯하다.  <br>&nbsp;동물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생명 현상이다. 이런 면에서 보더라도 식물이 동물보다 훨씬 풍요로운 생명력을 지녔다 할 수 있다. 종 편견을 깨닫지 못하고 식물 함부로 대하는 인간이란 동물이야말로 편향된 양성 되먹임 진화가 빚어낸 오만에 휘감긴 괴물 생명체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고요히 절한 뒤 물러난다.  &nbsp;  어느 순간 누가 나를 응시한다는 육감이 파고든다. 느낌 따라 본 건너편에 내 몸을 빨아들일 것만 같은 기이한 눈 하나가 있다. 나무는 생애 중에 빛을 수확하는 데 도움 되지 않는 가지와 스스로 작별한다. 진이나 액으로 헤어진 자리 밀봉해 방독하고 사람 눈 모양 표지를 남긴다. 이 눈으로 남쪽을 알려준다.  &nbsp;  빛이 들어오므로 남쪽에는 가지가 많다. 그 많은 가지가 다 유용하지는 않으므로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눈으로들 남는다. 더 아득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인간은 이 눈을 인식하고 지남력을 이용할 줄 알게 됐다. 눈 모양 표지가 아니었다면 인간이 훨씬 더 일찍 알아챘으려나. 나무가 무심하니 인간만 덕 본다. <br>  &nbsp;  둘이었다 하나 되든, 하나였다 둘이 되든 나무는 좋고 나쁨을 따지지 않는다. 불완전한 채로 완전하다. 오늘 숲에서 겪은 일만으로도 내 영혼은 거늑하고 말고다. 인간으로 살면서 인간사 바깥으로 떠도는 일이 배회일 수만은 없다. 이렇다 할 표지 없이 아뜩하게 떠내려왔으나 결국은 인간도 거기서 왔으니까.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226/pimg_7816061155042609.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15404</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케데헌 이드거니-나무가 건네는 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10826</link><pubDate>Tue, 24 Feb 2026 12:1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10826</guid><description><![CDATA[<br>  &nbsp;  맹세컨대 내가 한 영화를 작정하고 다시 본 적은 단연코 없다. 오늘 케데헌을&nbsp;두 번째&nbsp;본다. 세 번째 보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싶으니 다따가 앉는 자세부터 달라진다. 바다 같은 원효 이야기로 끝낼 참이었다. 어디에선가 도랑물 졸졸거리는 소리를 여돌차게 들은 듯 옴나위없이 영화에 끌려든다. 에나, 머선129?  &nbsp;  먼저, 루미가 무당이라는 설정은 내게 각별하다. 40대 중반에 수능 다시 쳐 한의대 입학하고 50대 초반에 정신장애를 숙의 치료하는 한의사가 되면서 나는 자신을 무당으로 여기며 여태까지 살았다. 나무 풀, 그러니까 숲 공부할 땐 풀빛 무당(Green shaman)이었다. 그 다음엔 달·물 무당이었다. 이젠 먼지 무당이다.  &nbsp;  무당은 마주 가장자리에 선 중재자다. 이렇듯 쉽게, 편하게만 보고 말면 원효에 범한 오류를 답습하고 만다. 루미는 악령 정체성도 지닌다. 그는 단순한 무당이라기보다 신화 속 Trickster며, Maleficent다; 거북섬(북아메리카) 토착민 설화 속 나나보조/마나보조다. 루미가 품은 고뇌와 긴장은 “순혈” 선이 뭔지 묻는다.  &nbsp;  순혈주의 선한 영혼이 혼혈 세계를 구해 순혈 세계로 만드는가? 순혈주의 선한 영혼만이 순혈주의 악한 ‘귀마’를 이기는가? 그렇다고 한다면 이 독선, 그러니까 절대 선은 절대 악과 무엇이 다른가? 질문이 여기에 닿는 찰나 허/무로 떨어지고 말지 않는가? 고결을 전유하는 독선은 세계를 사랑도 구원도 하지 못한다.   &nbsp;  눈 덮인 도봉산 회룡계곡에서 길을 잃고 생사를 넘나들며 헤매다가, 나 또한 제국주의에 잠겨 악한 삶을 살았다는 진실, 그러니까 부역자 본성과 홀연히 마주쳤다. 그전까지 나는 순혈 반제 전사로 자처하고 왜미(倭米) 제국에 부역한 매국노를 향한 “선한” 증오와 적개(敵愾)만으로 일관해 살아왔다. 틀렸다. 잘못됐다.  &nbsp;  폭포 물 떨어지는 벼랑 위 소나무 아래 주저앉아 통곡했다. 비록 무지렁이에 지나지 않지만 나 또한 엄연한 부역자라는 깨달음 뒤에야 비로소 내 삶은 원효를 참으로 닮아갔다. 케데헌이 내 영혼을 붙잡은 지점이 바로 여기다. 도봉산과 벼랑 위 소나무가 강용원 소도듯 남산과 서낭나무는 루미 소도다. K-무의식이다.<br>  &nbsp;  케데헌 본 뒤 나는 숲에 든다. 전과 달리, 나무가 건네는 말을 들으며 걷다가 이드거니 서 있기를 거듭한다. 상처 입은 나무가 분기하며 남긴 지피융기선 화살표 방향을 살펴 운명을 예측한다. 아래로 향하면 위험하고 위로 향하면 안전하다. 내 인생 분기는 어떤 융기선을 남겼을까? 내가 그것을 알아볼 수 있을까?<br>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224/pimg_7816061155040253.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10826</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산불이 징조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00403</link><pubDate>Thu, 19 Feb 2026 10:0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00403</guid><description><![CDATA[&nbsp;지구가 생물학적으로 퇴화하고 인류의 목적이 사라지는 때가 언제인지 내다보는 예언을 한 오가논다족 추장 오렌 라이언스는 그 징조 중 하나로 “아이들이 버려지고 무시될 것”을 꼽았다.(폴 호컨 『탄소라는 세계』 316쪽) &lt;엡스타인 아이들이 징조다&gt;라는 글 들머리에서 한 말이다. 하나가 더 있다. “바람이 유례없이 세차게 불면서 울부짖을 것이다.” 나는 처음 읽을 때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아서다. 바로 다음 순간 나는 산불을 떠올렸다.   &nbsp;  강릉원주대학교 생물학과 이규송 교수에 따르면 대형 산불이 일어나 중심부 온도가 1천도 이상 치솟으면 공기가 급격히 팽창해 강력한 상승기류가 형성되고, 공기가 빠져나간 지표면이 급속하고 강력한 국지 저기압 상태에 놓인다. 이때 주변 차가운 공기가 맹렬하게 빨려들어 예측 불가능한 돌풍을 일으킨다. 이로 말미암아 진화가 더 어려워져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상황은 악순환으로 치달린다. 오렌 라이언스가 영성으로 떠올린 바가 바로 이 장면 아니었을까?     <br> 산불은 이미 지구 차원 문제가 돼버렸다. 단순히 산림 피해에서 그치지 않고 생태계 전반을 심각하게 타격하는 거대 악조건이다. 인류가 자초한 기후 위기 결과요 원인이다. 이는 분명히 ‘지구가 생물학적으로 퇴화하고 인류의 목적이 사라지는 때’임을 알리는 ‘울부짖음’이다. 숲이 살해당하면서 토하는 피 울음이다. 이 피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니 않는 일이 죄다. 누구보다 이 문제를 통감한 천하 시인 김선우는 시 &lt;지구라는 크라잉 룸&gt;에서 이렇게 울었다.   &nbsp;  ...오늘도 어김없이 지구 어디선가죄없이 아이들이 죽고...죄없이 숲이 벌목되고죄없이 작은 것들의 노래가 짓이겨져 파묻힌다...한때 아름다웠던 별어디에 무릎 꿇어야 죄를 덜 수 있나?...지구라는 크라잉 룸당신 안에서 우느라 당신의 울음을 미처 듣지 못했다  &nbsp;  지구를 크라잉 룸으로 만든 범인은 인류다. 인류세(Athropocene)라는 이름이 그래서 붙었다. 틀렸다. ‘죄없이 죽은 아이들’은 죄 없다. 죄없이 죽임당한 거북섬(아메리카) 선주민은 죄 없다. 인류세가 아니라 제국세(Imperialicene)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제국-헤게모니-블록-세”다. 더더욱 엄밀하게 말하자면 “트럼프-머스크-엡스타인-세”다. 인류세란 말은 죄 없는 사람들에게 자기 죄를 투사, 그러니까 뒤집어씌우는 앵글로아메리카 제국 자본가 범죄를 은폐한다.   &nbsp;  현실에서는 제국에 머리 조아린 식민지 특권층 부역 세력이 더 야비하게 악랄하다. 최병성 초록별생명평화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산불은 산림청 소행이다;&nbsp;산림청을 둘러싸고 있는 수백 개 산하·이익단체와 야합해 활엽수를 살해하고 소나무를 강제로 심어 산불을 유도한다. 온 국민에게 산불 예방을 계몽하며 자기 죄를 투사한다. 이 ‘귀마’가 숲이, 지구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리 만무다. 귀 밝은 자는 여기서도 풀 사람뿐일 터이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219/pimg_7816061155033886.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100403</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느지거니 케데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98483</link><pubDate>Wed, 18 Feb 2026 10:0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98483</guid><description><![CDATA[&nbsp;나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관 가는 일은 말할 나위조차 없고 아이팟이나 스마트폰으로 보는 일도 전혀 없다. 한의원 TV가 없어진 뒤부터는 지나치면서 드문드문 눈에 들여놓던 영화도 없어졌다. SNS 셀럽이 이따금 올리는 영화 이야기도 더러는 읽지만, 감상할 생각은 않는다.   &nbsp;  왜 그런지 생각해 본 적은 여태 없다. 이제 와서 이드거니 돌이켜보며 기억 몇을 떠올린다. 그 기억, 열 살에서 스무 살 무렵까지 띄엄띄엄 박혀 있는 에피소드들이 지니는 연속성을 찾아낸다: 영화 속 서사 또는 연기(자) 세계와 내 현실 세계 사이 격절(감)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점.  &nbsp;  영화 속 타자 세계와 내 세계 사이 경계를 명확히 짓지 못해 그 극단으로 극화된 타자 세계로 빨려들어 허우적거리거나 그냥 내 세계를 송두리째 허무 속에 놓아버리거나 한다. 작위와 부작위가 다를 뿐, 이들은 전형 우울증세다. 진실을 모른 채 쌓인 습관이 망연히 오늘까지 이어졌다.  &nbsp;  이 습관에서 케데헌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케데헌 서사 일부를 귀담아들었을 뿐 영화 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누군가 원효 사상까지 내세우며 케데헌 담론을 구성한 뒤에야 ‘워메, 뭔 일이다냐?’하고 관심이 느지거니 움직였다. 때마침 딸이 아이팟에 담아 놓았으니 보라 해 봤다.   &nbsp;  ‘오만 년만’에 보는 영화다. 워메, 참말로 뭔 일이다냐? 눈을 떼지 못한다. 내 어휘로 “곱촘하게”, 한자 어휘로 섬세치밀하게 만들었음을 한눈에 알아본다. studium:punctum, pheno:geno가 서로 관통하고 흡수하며 유장하게 흘러간다. 세계가 주목하는 데는 그만한 며리가 있으렷다.   &nbsp;  이 글에는 케데헌 이야기를 자세히 하려는 의도가 없다. 내가 50년 넘게 화두 삼아 온 원효를 잘못 읽는 사람이 많아 오해를 풀 생각에서 출발했다. 앞서 ‘누군가’로 표현했는데, 실은 김범진이라는 명상가다. 그가 쓴 『케데헌에서 발견하는 한국의 사유들』을 읽고 든 의문이 발단이었다. <br><br><br><br>엄밀히 따지면 그만이 아니라 대부분 원효를 ‘매끄럽게’ 이해한다. 전형이 일심(一心)을 그냥 ‘한 마음’으로, 화쟁(和諍) 목표를 ‘화해’로 이해하는 일이다. 지난 시절 권위주의 정권이 내세운 “국론통일” “국민 화합”과 뭐가 다르나. 그 정도라면 구태여 원효를 내걸고 얻는 날찍이 뭐 있나.  &nbsp;  일심은 한 마음이 아니다; 대칭 운동하는 이문(二門) 사건을 같은 시공에서 경험하여 진실 전경으로 무한히 나아가는 삶이다. 화쟁 목표는 화해가 아니다; 일심을 향해 걸림 없이 살아가는 날카롭고도 동그란, 단단하고도 말랑한 역설 창조다. 하나든 화해든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nbsp;  “대립으로 보지 않고 더 높은 차원에서 하나로 바라보는”(위 책 128쪽) 일을 사람들은 너무 쉽고 편하게 말한다. 더 높은 차원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심리 상태가 아닌 한 이는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에서 일(一)을 뜻할 수밖에 없다. 그 일은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nbsp;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무엇을 입에 담는 찰나 그 무엇은 이 세계 속에 도로 갇히고 만다. 결국 그 하나는 하나가 아니게 된다. 원효가 밝힌 일심이문(一心二門) 사상은 통속한 오해와 달리 하나를 지향하거나 결론으로 움켜쥐지 않는다. 이 또한 일원론이라는 극단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nbsp;  둘이 아니라고 해서 하나로 몰아버리는 짓은 인도유럽어를 구사하는 서구 단치(單値) 논리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진실 전경은 “둘이 아니므로 하나도 아니다.”다. 흔히 “둘도 아니고/지만 하나도 아니다”라고 읽는다. 아니다. 속 보깨는 이 진실에 닿지 못하면 원효는 영원히 오독된다.  &nbsp;  케데헌은 그런 점에서 다른 모든 통속 담론을 뛰어넘는다. 루미가 진실 전경으로 들어오고 난 뒤에도 문양은 없어지지 않는다! 진실은 순수 투명한 일관(一貫)이 아니라는 뜻이다. 제작자가 다른 의도를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나, 적어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원효 실제 삶이 그랬으니까.<br><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218/pimg_7816061155032977.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98483</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엡스타인 아이들이 징조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91303</link><pubDate>Sat, 14 Feb 2026 08:4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91303</guid><description><![CDATA[<br>  &nbsp;  지구가 생물학적으로 퇴화하고 인류의 목적이 사라지는 때가 언제인지 내다보는 예언을 한 오가논다족 추장 오렌 라이언스는 그 징조 중 하나로 “아이들이 버려지고 무시될 것”을 꼽았다.(폴 호컨 『탄소라는 세계』 316쪽) 내가 이른바 엡스타인 파일을 처음 접했을 때 대뜸 떠올린 말이다. 나는 이 정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침묵과 음모론 경계에서 주의 기울이며 살피고 있다.   &nbsp;  트위터, 특히 외국인 계정은 난리가 났다. 묘하게도 우리나라 극우 애들 트위터 계정 여럿이 매우 흥분해서 이 이야기를 계속 떠든다. 페이스북은 특별한 한두 경우를 빼곤 괴괴하다. 사실관계에 유념하면서도 세계 돌아가는 이야기 기민하게 전해주던 지식인 대부분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 재래식 언론도 대부분 무관심한 척한다. 희한한 일이다. 입대면 안 될 무슨 흑막이 있는지.   &nbsp;  어제(2월 13일) 치 경향신문이 워싱턴 특파원 발로 비교적 긴 보도를 했으나 뭐 새로울 게 없다. 미성년자 성 착취라고 평평하게 언급됐을 뿐, 어떻게 얼마나 “아이들이 버려지고 무시”당했는지 더 깊은 내용은 암시된 바도 없다. 알려진 정보에 음모론도 섞였을 테고, 엡스타인 일방 계략에 당한 사례도 있을 테지만, 어떤 경우에든 아이들 문제를 이렇게 다루고 말아선 안 된다.<br>&nbsp;사실 저 예언에서 쓴 “무시”란 표현은 어떤 단어를 그렇게 번역했는지 모르나, 정확히 번역했다면 오늘날 지구에서 아이들이 당하는 탈취와 살해 상황을 미루어 볼 때 매우 미지근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라면 무시되는 일은 버려지는 일에 이미 낮은 단계로 포함되지 않나. 문맥을 고려해 의미와 표현을 고쳐 아이들 문제를 인류 생멸이 걸린 현안으로 삼아야 한다.  &nbsp;  아이들이 우리 미래다, 뭐 이런 차원이 아니다. 탈취와 살해를 당하는 모든 인간 부류 가운데 아이들만큼 참혹하고 참담한 경우란 없다. 그들에게는 목소리가 “존재론적으로”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상식으로 보더라도 여성이 그들 목소리가 되어주어야 할 텐데, 내 경험상 여성 자신보다 “먼저, 또 위에”-당연히 이래야 한다- 아이들을 두는 페미니스트를 본 적이 없다.   &nbsp;  여성으로서 남성에게 탈취와 살해를 당하는 일이 범주적 중요성을 지닌다는 사고를 벗어나야 대승 페미니즘을 일궈낸다. 어른으로 사는 일은 자신과 같거나 더 높은 우선순위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실천하는 일이다. 그 어른 삶은 여성만 가능하다. 남성이 그럴 수 있었다면 세상을 지금처럼 망치지 않았을 거다. 남성과 싸우느라 여성이 아이들을 놓은 결과가 여기 닥쳤다.   &nbsp;  이제 카이로스에 다다랐다. 여성, 그리고 여성 심장을 지닌 극소수 남성 어른이 아이들을 담론과 실천 고스락에 올려야 할 때다. 인간이 인간 아이들 그느르지도 못하면서 동물권 어쩌고 숲 어쩌고 바다 어쩌고 심지어 지구 어쩌고 하는 짓은 얼마나 신둥부러진가. 피눈물 흘리며 울부짖는 아이들 앞에 “어미”로 서 있어야 인간 최소한이나마 되지 않겠는가. 내일이면 이미 늦는다.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214/pimg_7816061155030120.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91303</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느지막이 마무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82971</link><pubDate>Tue, 10 Feb 2026 11:1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82971</guid><description><![CDATA[<br>  &nbsp;  알라딘 통계에 따르면 2021년부터 2023년 사이 내가 단행본 100권 가까운 분량 글을 서재에 올렸다고 한다. 이 기간에 나는 식물, 미생물, 제국주의를 한무릎공부 하면서 진심 다 해 증언했다. 제국주의 글을 올리니 초반부터 독자와 그 반응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거의 문이 닫힌 서재가 돼버리자 나도 글을 거의 올리지 않았다. 브런치로 무게 중심을 옮겼다. 그렇게 따지면 100권 훨씬 넘게 글을 썼다. 그 글에는 당연히 내가 걸은 숲과 물 이야기가 포함된다. 숲 이야기 가운데 서울 경계에 걸쳐 있는 600m 이상 높은 산 계곡 50개를 걸은 내용이 있다. 실은 계곡 둘이 거기서 빠졌다. 오늘 그 이야기를 씀으로써 지난 3년 “강력한 시간”대 마무리에 갈음한다.   &nbsp;  이번에 걸은 북한산 마지막 골짜기 둘은 흔히 구기터널 계곡, 불광사 계곡이라 부르는 곳이다. 둘 다 깊고 크지 않으며 교통도 그리 편하지 않아 많이 찾지는 않는다. 구기터널 계곡으로 들어가 불광사 계곡으로 나오는 동안 만난 사람은 서넛에 지나지 않았다. 그 한적함 몇 제곱 반비례로 나는 두 계곡에 흠씬 매혹되었다. 사실 구기터널 계곡은 ’23년 9월에 들어갔다가 도로 내려온 적이 있다. 그때 보고 반해 언제 다시 온다, 온다, 하다가 오늘에서야 왔다. 푸른빛이 거둬지고, 얼어서 물소리도 거의 나지 않으나 여전히 탱맑은 기운을 자아올려 준다. 굽이진 흐름 따라 올라가다가 홀연히 용이 승천하는 환상에 빙의된다. 이 골짜기 이름은 내게 이제부터 ‘미르’다. <br><br>&nbsp;골짜기 노루막이에 이르러 앞뒤로 펼쳐진 풍경을 잠시 살핀다. 남으로는 가까이 백악산, 인왕산, 그리고 저 멀리 관악산까지. 북으로는 앵봉산, 노고산, 그리고 저 멀리 개명산까지. 따스한 물 한 모금 마시고 불광사 계곡으로 내려간다. 미르 골짜기와는 달리 너럭바위가 많고 그 위로 난 비탈진 길이 내 고소공포증을 초든다. 내려갈수록 선림봉 바위 절벽이 시선을 압도한다. 그 바위 절벽이 너무 잘생겨서 연거푸 탄성을 발한다. 마침내 그 잘생긴 바위 절벽이 낳은 잘생긴 폭포 향림이다. 통째로 얼어 붙어서 고요히 드러내는 희고도 파리우리한 빛이 신비하기까지 하다. 여름에 그 소리를 듣기 위하여 꼭 다시 와야겠다. 이 골짜기 이름은 내게 이제부터 ‘향림’이다.  &nbsp;  이렇게 해서 52개 골짜기를 걸었다. 마음 문에 걸어두었던 두 골짜기를 안으로 모셨으니 서울 산 모두에게 예를 다한 듯하다. 빛접은 발걸음으로 20년 전 드나들던 음식점에 든다. 뜨끈한 국물에 차끈한 소주가 찰떡궁합으로 어울려 몸·맘을 풀어준다. 한껏 흐벅진 심사에 싱겅싱겅한 실내 공기조차 느끼지 못한다. 알알한 상태로 나와 거리에 서서 하늘을 우러른다. 반쯤 이운 낯빛으로 달님이 물으신다. “그대 삶은 웬만한가?” 내가 대답한다. “제풀로 욕된 삶에 들었으니 열없지만 어숭그러하다 여깁니다.” 오늘 내 성공을 응그리진 못했지만 내일 우리 성취를 그느르고 있으니, 그저 째마리 삶만은 아닌 듯하다. 남은 날도 제국 생활양식 밀막으며 발맘발맘 가본다.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210/pimg_7816061155025591.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82971</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언제나 다시 올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74704</link><pubDate>Fri, 06 Feb 2026 09:0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74704</guid><description><![CDATA[<br>  &nbsp;  동소문동 616번지. 이제는 영구히 없어진 지번이다. 내가 10대 10년을 산 곳인데 봉천동, 삼양동과 함께 서울에서 손꼽히던 산동네였다. 대학 졸업 직후 잠시 다시 들어가 재개발에 밀려 부서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폐허로 변할 때까지 버티다 하릴없이 떠나온 애증 어린 빈민가다. 오늘은 어찌어찌 흘러 여기를 걷는다.   &nbsp;  대형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옛 모습은 전혀 없고 돈암초등학교와 북악산로를 기준 삼아 기억을 떠올리면 살던 곳이 대강 그려질 뿐이다. 거기서도 여섯 번이나 이사를 하였으나 고만고만한 데를 뱅뱅 돌았을 뿐이어서 그 동선만큼은 또렷이 기억한다. 기억은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들을 뚫지 못하고 나비물처럼 민틋이 흩어진다.   &nbsp;  언틀먼틀한 산골짝 골목길 비탈과 계단 풍경이 맘에 새겨져 있지만 몸은 아스팔트 길 위에 있으니 알 수 없는 상실감으로 홀연 무참해진다. 갑자기 눈물방울이 열 지어 뛰어내린다. 얼른 하늘 한 번 쳐다보고 콘크리트 숲을 벗어나 진짜 숲으로 간다. 이 숲은 고향을 떠올리며 어린 시절 수시로 들고 났던 나지막한 산기슭이다.<br>산동네 올라가는 입구로, 막걸리집과 문구점 있던 곳이 이렇게 변했다<br>어린 날 소도였던 너럭바위<br>  <br>공동수도가 있고 장이 서던 너른마당을 지나 언덕을 올라가면 백악, 삼각산 마루가 우뚝 보이는 등성이가 나타난다. 백악산 줄기 가운데 하나로 서울 시내 풍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너럭바위 위에서 백일몽도 꾸고 설움도 달래고는 했다. 강원도 깊은 산과 달라 머루 다래 한 알 따 먹을 수조차 없었지만 쏠쏠한 위로였다.   &nbsp;  어렸을 때 무서워 더는 들어가지 못한 건너편 숲으로 들어간다. 성북동 쪽으로 산책로를 다듬어 놓아 세월까지 쉬이 밟힌다. 끄트머리께를 돌아 나오던 어느 순간 입에서 느닷없이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언제나 다시 올지···.”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임을 알아차리자 아까 뛰어내렸던 그 눈물 후발대가 쏟아져 내려온다.  &nbsp;  아, 내가 늙는구나. 한 모라기 회한이 소슬하게 불어온다. 눈물을 훔치며 정색하고 숲을 응시한다; 늙어가는 소리를 강구어 들으며, 지난 5년 소롯이 바쳐 숲과 물, 그리고 제국을 공부한 나날에 이드거니 마음 둔다. 그러고 보니 그 공부가, 실은 여기서 출발했구나. 숱한 산모퉁이와 물굽이 돌아왔지만, 예가 바로 60년 소도구나.   &nbsp;  “언제나 다시 올지···.” 하지 않는다. “언제고 다시 오지.” 한다. 이름 하나 지니지 못한 나지막한 등성이 비탈이어서 이 숲은 내 장엄 지성소다. 내 인생을 똑 닮은 가장자리 골막한 숲으로 나는 언제고 다시 올 테다. 반제 전사 60년 동지와 건성드뭇한 머리숱 서로 쓰다듬으며 여생을 암차게 살아가련다. 지는&nbsp;노을이 찬란하다.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206/pimg_7816061155020750.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74704</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아주 사소한 것들의 은하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70525</link><pubDate>Wed, 04 Feb 2026 10:2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70525</guid><description><![CDATA[<br><br>  &nbsp;  나는 소설이나 수필 같은 산문 문학 작품을 좀처럼 읽지 않는다. 특별한 의도는 없다. 어쩌면 운문에 더 매혹되기 때문이란 말이 그런대로 적합하다. 시집은 수백 권 샀어도 소설책은 몇 권밖에 사지 않았다. 심지어 노벨상에 빛나는 한강 책도 사지 않았다. 하물며 수필집이랴. 그런 내가 『아주 사소한 것들의 은하』라는 수필집을 사서 한 호흡에 읽었다. 이&nbsp;무슨 일인가?  &nbsp;  지난 10년간 내 공부는 작고 적은 또는 작고 적다고 여기는 존재와 사건에 잠겨 흘러왔다. “사소해서 위대하다.”에서 출발해, “소미심심(少微沁心)”, “소소심심(小少沁心)”, “섬밀(纖密)”, “곱촘하게”, “미미섬섬(微微纖纖)”, “미섬장엄(微纖莊嚴)”처럼 대부분 내가 새로이 만든 용어를 고갱이 삼아 깊어지고 번져갔다; 작고 적다 못해 없다고 몰아버린 것들에게까지 다다랐다.   &nbsp;  이 공부 길과 『아주 사소한 것들의 은하』를 쓴 백윤경 작가가 한 말은 본성상 겹친다. “나는 거대한 우주의 근원인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 주목했다.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먼지들조차 ‘아주 잠시, 빛나는’ 소중한 존재임을 기억하고 싶었다. 나의 시간을 통과한 모든 존재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지 않으면 안 되는 며리가 바로 거기 있었다.    &nbsp;  시인이자 수필가인 백윤경은 일상에서 맺고 빚는 인연과 사건을 곱고 촘촘하게 톺아서 맑고 따스한 서사를 구성한다. 모퉁이 돌아갈 때마다 빛나는 문장 미학이 있어 잠시 숨을 고르고 소리 내어 읽어보고 간다. 내가 학문 차원에서 접근하고 숲이나 물 경험으로 나아간 풍경과 퍽 다르다. 내 글은 비문학이고 백윤경 글은 문학이다. 이 비대칭 대칭에서 낯섦은 눈부시다.  &nbsp;  다 읽고 나면 거기 담겨 있지 않은 이야기가 꽹하니 떠오른다. 그 부재와 상실, 그리고 결핍이 그를 아주 사소한 것들에 대한 주목으로 이끌었다. 그 글에 담긴 어머니와 이모, 그리고 벗들만이라면 이야기는 따스함과 그리움, 그리고 아픔을 넘어서지 못했으리라. 거기에 없으나 엄연히 존재하는 것들이 건네는 말 없는 말을 들었기에 그는 이문일심경(二門一心境)에 들었다.   &nbsp;  나는 그에게 ‘없으나 엄연히 존재하는 것들’에 속한다. 김선우 운문 읽을 때는 ‘내 영혼과 포개 겹쳐 앉아 썼구나!’하고 느끼는데, 백윤경 산문 읽을 때는 ‘내 영혼과 쪼개 겹쳐 앉아 썼구나!’하고 느낀다. 같아서 다른 도반과 달라서 같은 도반은 현실 문성에서 같지 않으나 내게는 같다. 아주 사소한 것들의 은하에 푹 잠기려 나는 다시 『아주 사소한 것들의 은하』를 읽는다.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204/pimg_7816061155018819.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70525</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촘스키와 엡스타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70382</link><pubDate>Wed, 04 Feb 2026 09:0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70382</guid><description><![CDATA[ <br>* 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글을 그대로 싣는다<br><br><br>아동 성매매 협의로 실형을 받아 감옥에 있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은 제프리 엡스타인과 관련된 엄청난 양의 문건이 공개되면서 세계 특히 서방 국가의 사회 지도층이 발칵 뒤집혔다. 미국은 물론이고 영국, 스웨덴,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등에서 엡스타인과 연루된 인사들의 행각이 드러나면서 서방 엘리트의 도덕적 타락의 정도가 밝혀지고 있다. 엡스타인이 어떻게 엄청난 부를 소유하게 되었는지, 그가 어떻게 세계 유수 국가의 지도층과 끈끈한 교분을 쌓을 수 있었는지 앞으로 규명해야 할 의문점이 한두 가지는 아녀 보인다. 그 가운데 꾸준히 나오는 의혹 하나가 그와 이스라엘의 연관성이다. 그는 모사드 요원이라는 말도 계속 나오고 있다.그런 엡스타인의 마당발을 피하지 못한 인물 가운데 하나가 “세계의 양심”이요 세계 비판적 지식인의 “표상”으로 알려진 놈 촘스키다. 촘스키와 엡스타인의 교분이 알려진 것은 물론 상당히 오래되었다. 하지만 최근에 엡스타인 문건이 또 대량으로 공개되자 촘스키-엡스타인의 친분도 재조명되고 있다. 아래는 자신의 텔레그램 채널에서 피오렐라 이사벨이 촘스키를 신랄하게 비판한 글이다. 이사벨은 바네사 빌리와 함께 내가 아는 국제 분석가들 가운데 서방 제국주의에 대해 가장 신랄하게 비판적인 축에 속한다. 촘스키로 향한 그녀의 독설이 매섭다. -----------------놈 촘스키는 기껏해야 시온주의자이자 리버럴 앞잡이(Liberal Creep)에 불과하다. 아니, 사실 그는 오만하게 지성화된 리버럴 좌파(liberal left)가 낳은 역겨운 산물이다. 그가 혁명가이기는커녕 그의 일관된 본모습이 기회주의적이고 통제된 반대파 지식인이라는 사실은 진즉에 폭로되어야 했다. 그의 역할은 혁명적 저항 운동이나 투쟁을 진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즉, 진정한 반제국주의 저항의 물길을 자유주의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으로 돌려놓는 역할 말이다.그는 매 순간 소련에서 쿠바 혁명에 이르기까지 실제 혁명 운동들을 공격했다. 시온주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극도로 우유부단했으며, 최악의 시온주의자들과 어울렸다. 그리고 이 전략은 먹혀들었다. 특히 시리아나 이란처럼 (우연이 아니게도) 시온주의의 표적이 된 곳에서 벌어지는 ‘정권 교체’ 서사에 쉽게 낚이는, 서구 이데올로기에 물든 채 사회주의 흉내 내는 자유주의자들에게 말이다. 정치를 넘어, 그의 이력은 악명 높은 모사드 요원이자 소아성애자, 성 매매범인 제프리 엡스타인과의 돈독한 우정으로 더욱 더럽혀졌다. 그는 2019년까지도 이 관계를 옹호해 왔다. 이 모든 역사를 종합해 볼 때, 그는 단순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 실체가 폭로되었고, 오염되었으며, 실추된 인물이다. 이것이 누군가에게 ‘레드라인’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204/pimg_7816061155018742.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70382</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쌈보 생태학</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57150</link><pubDate>Fri, 30 Jan 2026 12: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57150</guid><description><![CDATA[<br>  &nbsp;  “나는 쌈보다.” 이렇게 말하면 이구동성으로 사람들은 말한다.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쌈보 아닌가요?” 심하게 쌈 좋아하는 정도 사람을 쌈보라고 하지 않는다. 쌈보는 쌈을 짓는 사람이다. 아무리 심하게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돌미나리, 쑥갓, 무청, 부추, 대파, 쪽파, 양파로 쌈을 싸지는 않는다. 나는 심지어 양파 막-양파에 막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으로도 쌈을 싼다.<br>내가 쌈보가 된 데는 긴 내력이 있다.&nbsp;초등학교 가기 전부터 형성된 습관과 기억이다. 1950년대 중반 강원도 평창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내 식습관 또는 취향은 그냥 초식동물에 가깝다.&nbsp;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놀다가 끼니때가 되면 씀바귀,&nbsp;야생 돌미나리 꺾고,&nbsp;텃밭에 있는 상춧잎을 따서 집으로 들어온다.&nbsp;뭐 씻을 필요조차 없으니 그대로 쌈 싸고 고추장,&nbsp;막장 올리면 된다.<br>대파 쌈<br>양파 쌈<br>양파막 쌈-막 모습 살리기 위해 밥을 넣지 않음-<br><br>  뇌리에 아주 깊이 박힌 다른 기억 하나가 있다. 열 살까지 나는 복잡한 집안 사정으로 종조부와 함께 살았다. 1965년인가 우리나라 전역에 엄청난 홍수가 밀어닥친 적이 있었는데, 집을 둘러싼 오대천 지류 두 줄기 물 수위가 높아지자 걱정하시던 할아버지께서 살피러 나가셨다. 돌아오시는 할아버지 품에는 거의 작은 항아리만 한 배추 한 포기가 안겨 있었다. 눈으로 웬 거냐 여쭙자,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오냐, 오늘 점심 반찬은 배추 쌈이다.” 할아버지와 나는 그 커다란 배추 한 포기를 점심 한 끼 쌈 싸서 남김없이 뱃구레 속으로 모셨다. 꽹한 추억이다.  &nbsp;  내 쌈보 내력에는 정신 또는 심리 측면이 존재한다. &lt;목도리 찾기&gt;에서 말한바, “어린 시절 거의 방치된 상태로 양육되면서 겪은 마음 스산함과 실제 추위에 대한 두려움에” 반응해 목도리로 목을 둘러“싸는” 행동과 남들은 상상조차 하지 않는 온갖 푸성귀로 밥을 둘러“싸는” 행동은 본성이 같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목도리로 둘러싸면 실제로 따스하지만, 쌈 싸서 먹으면 더 맛있다는 헨둥한 근거는 없다는 사실. 그러니 그럼에도 진심 다 해 쌈 싸는 걸 보면 둘러싸는 또는 둘러싸이는 자체가 어떤 상징 에너지로 작용하는 듯하다. 오냐, 오늘 저녁엔 뭐로 쌈 쌀까?<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130/pimg_7816061155013732.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57150</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틱톡에서 업스크롤드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52295</link><pubDate>Wed, 28 Jan 2026 13:3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52295</guid><description><![CDATA[<br><br>* 희일이송(영화감독)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br><br><br>결국 억만장자 랠리 엘리슨이 틱톡을 인수했다. 그 직후, 미국 틱톡의 경우 '엡스타인' 단어를 치면 전송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자 사람들이 반격한다. 틱톡 앱을 삭제하는 것이다. 틱톡 앱 삭제율이 150% 이상으로 치솟고 있단다. 그러면 어디로 가는가? 업스크롤드(UpScrolled)라는 새로운 플랫폼이다. 팔레스타인계 호주인인 이삼 히자지가 만든 앱이다. 그는 이 앱에 '억만장자도 없고 검열도 없다'고 공언했는데, 지난 2년 동안 가자지구에서 친인척 60여 명을 잃었다고 밝혔다. 왜 사람들은 래리 엘리슨이 인수한 틱톡을 버리고 업스크롤드로 간 걸까? 시오니즘 때문이다. 오라클의 공동 창업자인 랠리 엘리슨은 유대인이자 유명한 시오니스트다. 그리고 네타냐후의 절친이다. 또 이스라엘 방위군 IDF에 1,660만 달러를 기부했는데, 이는 역대 최고 기부액이다. 말하자면 시오니스트 억만장자가 인수한 틱톡을 버리고 팔레스타인계가 만든 앱으로 떠난 것이다. 그 정도로 미국 젊은층이 시오니즘과 이스라엘에 진저리를 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또 래리 엘리슨은 트럼프의 절친이다. 틱톡 인수 과정에서 트럼프의 손길이 작용했고, 지금도 CNN을 인수해 트럼프 마음에 들지 않는 직원들을 해고하고 뉴스 알고리즘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뜯어 고치려고 시도한다. 가뜩이나 반트럼프 정서가 일고 있는데 래리 엘리슨의 틱톡 인수에 대해 사람들이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래리 앨리슨은 데이터 과두주의자다. 실로콘벨리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고, CIA에 데이터 기술을 제공하면서 돈을 벌었다. 디지털 신분증, 데이터 중앙집중화, 감시 확대 등을 꾸준히 주창해 온 인물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자신의 아들을 매개로 미디어 제국주의를 건설하는 중이다. CBS, 파라마운트를 비롯한 여러 영화 스튜디오, 니켈로디언, MTV, 코미디 센트럴, 쇼타임 같은 유료 TV 채널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는 파라마운트를 통해 워너 브라더스 인수 과정에 끊임없이 군침을 삼키고 촉수를 드리웠다. 워너 스튜디오, HBO Max, CNN 같은 황금 매물이 얼마나 탐이 났겠는가. 오늘날 빅테크 봉건 자본주의는 데이터를 추출함으로써 무한하게 부를 축적하고 또 알고리즘을 통제함으로써 부의 축적에 방해가 되는 정치적 목소리를 제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러니 AI에 대한 통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또 데이터 기술의 무분별한 확장을 경계해야 한다는 경고음이 계속 전송되고 있다. 가령, 현재 한국의 공기업-사기업 할 것 없이 물고 빠는 팔란티어를 보자. 팔란티어가 처음에 덩치를 키운 건 국경 통제 시스템이었다. 이민자를 차단하고 검열하고 통제하는 기술들을 제공함으로써 돈을 벌어 들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이 가자 사람들을 학살하는 데 기술적 장치들을 제공했고, 지금 현재 미국 내에서 이민자들을 추적하고 체포하는 ICE의 장치들도 팔란티어가 제공했다. 요컨대 팔란티어는 전쟁, 추방, 그리고 시민 감시-통제 시스템이다. 이러니 미국 시민들 사이에 팔란티어를 통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상황이 이런 데도 못 먹어도 고를 외치며 한국 정부와 정치인들은 그 어떤 민주적 통제에 대한 고민도 없이 인공지능과 데이터센터와 팔란티어 같은 감시 기술을 찬양하는데 여념이 없다. 시민들도 부자와 자본가 찬양에 정신줄을 놓고 있다. 삶이 먼저이지 기술이 먼저가 아니다. 삶이 먼저이지 돈이 먼저가 아니다. 게다가 실제로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소수가 독점하는 세계에서는 소수만 돈을 벌 뿐이다. 지난 번 책에 래리 엘리슨이 소유한 하와이 섬에 대해 잠깐 소개한 바 있다. 래리 엘리슨이 2012년경에 3억 달러를 주고 하와이 라나이 섬을 통째로 사들였다. 거기에 살던 사람들은 임대료 상승 때문에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래리 엘리슨은 그 섬을 부자들의 천국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기후위기와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완벽한 자급자족 생태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 부자들의 파라다이스에 가려면 최소한 헬기가 있어야 한다. 누가 놀러가냐면 일론 머스크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네타냐후다. 억만장자들과 스타들이다. 이게 불공평한 세계에서 벌어지는 역겨운 풍경이고 부의 독점이다. 아무튼 래리 엘리슨이 인수한 만큼 미국 틱톡이 망하기를 바란다.<br><br>]]></description></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하나와 둘 사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49910</link><pubDate>Tue, 27 Jan 2026 16:0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49910</guid><description><![CDATA[<br>  &nbsp;  북한산 백운천이 빚어낸 우이구곡(牛耳九曲)에 들어갔다가 집으로 가려고 지하철을 탄다. 노약자석에 자리 하나 비었기에 앉는다. 맞은편 자리에 앉은 남자 사람이 내 옆자리에 앉은 두 사람에게 내가 앉기 전부터 뭔가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다. 관심 두지 않아 잘 모르지만 ‘나이 들어서 그렇게 함께 다니는 게 보기 좋다’는 내용인 듯하다. 엄지척하면서 뭐라 되풀이해서 말하는데 ‘행복’ ‘최고’라는 낱말이 들린다.   &nbsp;  두 사람 반응이 시큰둥해지자 그는 양쪽 출입문 가운데쯤 서 있는 30대 남녀에게 눈길을 준다. 여자 사람이 뭔가 조언하는 풍경을 보고 두 사람이 부부라고 단정했는지 ‘마누라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라고 말한다. 두 사람이 황급히 손을 저으며 남매라고 하자 ‘오촌 남매냐’라며 농담으로 치부한다. 둘은 친남매고 누나와 남동생 사이이라고 정색하며 말하자 갑자기 흥미를 잃었는지 눈길을 다시 돌린다.   &nbsp;  이번에는 한 정류장 지나 새로 들어온 20대 남녀를 훑어본다. 뭔가 옥신각신하는 듯한 분위기를 간파한 듯 ‘이럴 땐 남자가 먼저 양보하고 좋게 말해야지’라며 훈계한다.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은 자신들 대화를 이어가다가 바로 다음 정류장에서 여자 사람이 먼저 내린다. ‘거봐 삐져서 내리잖아’라며 나무란다. 남자 사람이 집이 여기라 내렸다 하니 하릴없이 눈길을 거둔다. 그가 다음 시선을 고정한 대상이 나다.   &nbsp;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나는 내 할 일 때문에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모름지기 여러 번 눈총을 발사했을 테지만 내가 꿈쩍하지 않자, 그는 드디어 혼잣말을 꺼내 든다. “수염만 아니면 10년은 젊어 보이겠구먼, 쯧쯧!” 침묵이 잠시 흐른다. 내가 가방에서 충전기를 꺼내 스마트폰에 연결하는 모습을 보더니 말한다. “마나님하고 함께 다니면 이것저것 챙겨줬을 텐데, 혼자니 얼마나 불쌍해, 그래···.” (ㅍㅎㅎ!)<br>속웃음 크게 웃다가 문득 그 남자 사람 얼굴에 눈길 보낸다. 80대 초중반으로 보인다. 얼굴에 술기운이 자란자란하다. 물론 술기운 탓이기도 하려니와 뭔가 다른 며리를 품지 않았을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실은 그 자신이 혼자 앉아 있으니 말이다. 의식이 남한테 좋은 말 해주고 싶었다고 자부하는 사이 무의식은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진실에 차마 도달하지 못했으리라. 나도 그 물창 지나는 중 아닐까.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127/pimg_7816061155010325.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49910</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장갑 찾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47509</link><pubDate>Mon, 26 Jan 2026 17:1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47509</guid><description><![CDATA[<br>  <br><br>&nbsp;  장갑 한 짝을 잃어버렸다. 한동안 남은 한 짝만 끼고 다녔다. 추운 날이면 그 손으로 스마트폰을 들고 맨손은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뭐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으나 맨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지 못할 사정이 생길 때는 ‘새 장갑 사야겠구나’ 한다. 며칠 뒤, 잃어버려도 아쉬워하지 않을 만큼 값싼 것으로 재래시장 양말 가게에서 샀다. 잃어버린 장갑보다 싸면서도 더 따뜻해 잘 끼고 다니던 어느 날, 오래전에 잃어버리고 남은 한 짝만 보관된 장갑을 홀연히 찾아낸다. 더욱이나 이번에 잃어버린 짝과 같은 쪽이다. 아니, 심지어 같은 회사 제품이기까지 하다!  &nbsp;  장갑 한 켤레 새로 산 것보다 쩍말없이 하무뭇하다. 더 추울 땐 값싸지만 더 따뜻한 장갑으로, 덜 추울 땐 비싸서 더 맵시 나는 장갑으로 손을 감싸니 창졸간에 장갑 부자가 된 느낌이다. 물론 이럴 경우를 예상하고 보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무리 하잘것없어 보이는 물건이라도 잘 버리지 않는 습관이 빚은 매우 예외적인 사건이다. 사실 이런 내 습관을 옆지기는 실뚱머룩해 한다. 필경 궁상맞아 보이기 때문일 테다. 지나치면 병이지만, 내 경우는 미미한 일에 고마워하는 마음과 섬섬한 것을 건사해두는 마음이 서로 맞물린다. 미미섬섬 장엄이랄까.   &nbsp;  거대광활에서 장엄을 느끼는 일은 쉽다. 쉬운 만큼 헤실바실한다. 거대광활은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미섬섬에서 장엄을 느끼는 일은 어렵다. 어려운 만큼 사람을 올차게 흔들어 돋되게 한다. 미미섬섬 사이 팡이실이, 그 엄밀한 상호 관통만이 실재기 때문이다. 바이러스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지구생태계에서 태양계에 이르기까지, 은하에서 우주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하는 진리다. 제짝이라고도 짝짝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장갑 한 켤레 놓고 까짜올리는 말이 아니다. 오달진 깨침으로 나는 한껏 해낙낙하다. 미미섬섬 무지렁이로 살아서 복되다.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126/pimg_7816061155009271.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47509</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북아메리카 선주민들의 하우데노사우니 서클과 민주주의 </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37428</link><pubDate>Thu, 22 Jan 2026 09:5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037428</guid><description><![CDATA[<br>* 박성용(비폭력평화물결 대표)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 일부를 그대로 싣는다<br><br><br>오늘날 우리가 실천하는 서클 프로세스와 민주적 의사결정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북아메리카 선주민인 하우데노사우니(Haudenosaunee)의 지혜를 만나게 된다. '긴 집의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진 하우데노사우니는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수백 년 전부터 놀라운 민주적 체계를 발전시켜왔다. 이들의 '위대한 평화의 법(Great Law of Peace)'은 단순한 정치 체계를 넘어서, 모든 목소리를 존중하고 합의를 통해 결정하며 평화를 유지하는 공동체의 삶의 방식이었다.<br>하우데노사우니의 역사와 형성하우데노사우니 연맹은 12세기 또는 13세기경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뉴욕주 북부 지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던 다섯 부족, 즉 모호크(Mohawk), 오네이다(Oneida), 오논다가(Onondaga), 카유가(Cayuga), 세네카(Seneca)가 오랜 전쟁과 갈등을 끝내고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연맹을 결성했다. 1722년에는 투스카로라(Tuscarora) 부족이 합류하여 여섯 부족 연맹이 되었다.  연맹 형성의 중심에는 '위대한 평화주의자(Great Peacemaker)'라 불리는 전설적 인물 데카나위다(Dekanawidah)와 그의 대변인 하이아와사(Hiawatha)가 있었다.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고통받던 하이아와사는 평화주의자의 메시지를 받아들였고, 함께 부족들을 설득하며 다녔다. 평화주의자는 다섯 개의 화살을 묶어 보여주며 단결의 힘을 시연했다. 하나의 화살은 쉽게 부러지지만, 다섯 개를 함께 묶으면 부러뜨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가장 어려운 과제는 사악하고 폭력적인 것으로 알려진 오논다가의 지도자 타다다호(Tadadaho)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머리카락은 꿈틀거리는 뱀들로 이루어져 있어 왜곡된 마음을 상징했다고 한다. 하지만 평화주의자와 하이아와사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설득했고, 결국 타다다호는 평화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평화가 확립되자 사람들은 함께 모여 백송나무 한 그루를 뽑아내고 그 구멍에 무기를 던져 넣었다. 그리고 무기 위에 나무를 다시 심고 '평화의 나무(Tree of Peace)'라고 이름 지었다. 이 나무의 네 뿌리는 네 방향을 향하고 있으며, 평화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이 하우데노사우니의 땅으로 오는 평화의 길을 상징한다. 나무 꼭대기에는 독수리가 앉아 있는데, 이는 하우데노사우니의 수호자이자 창조주에게 보내는 전령이다.<br>위대한 평화의 법: 살아있는 헌법위대한 평화의 법은 117개 조항으로 구성된 구술 헌법이다. 이 법은 왐펌(wampum) 벨트에 상징적으로 기록되었는데, 왐펌은 조개껍질로 만든 구슬로, 기억을 돕는 장치이자 이야기꾼을 위한 도구였다.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영어와 다른 언어로 번역되었지만, 하우데노사우니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살아있는 헌법으로서 세대를 거쳐 전해지고 있다.  이 법의 핵심은 단결, 집단적 의사결정, 그리고 모든 개인에 대한 존중이다. 정치 체계는 대의회(Grand Council)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는데, 각 부족에서 선출된 50명의 추장(sachems 또는 hoyaneh)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오늘날의 의회와 유사하지만, 의사결정 방식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br>합의 중심의 서클 프로세스하우데노사우니의 가장 혁신적인 특징은 바로 합의 중심의 의사결정 방식이었다. 모든 중요한 결정은 전원 합의를 통해 이루어져야 했다. 이는 단순히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참여자가 동의할 때까지 논의를 계속하는 것을 의미했다.  의사결정 과정은 정교하게 구조화되어 있었다. 먼저 모호크와 세네카 추장들이 안건을 논의하고 결정을 내린다. 그 다음 오네이다와 카유가 추장들이 논의하고 결정한다. 이 두 그룹의 결정은 오논다가 추장들, 즉 '불의 수호자(Fire Keepers)'에게 전달되어 최종 판단을 받는다. 오논다가는 연맹의 수도 역할을 했으며, 평화주의자가 약속한 대로 연맹의 불이 오논다가 부족의 땅에서 타올랐다.  이 과정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는 그룹이 있었다. 모호크 의회는 세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그룹이 논의하는 동안 세 번째 그룹은 듣기만 한다. 만약 오류가 있거나 절차가 부적절하면 세 번째 그룹이 이를 지적한다. 이는 오늘날의 '체크 앤 밸런스(견제와 균형)' 체계의 초기 형태였다.  합의 과정은 시간이 걸렸지만, 이를 통해 모든 목소리가 들리고 모든 관점이 고려되었다. 결정에 이르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공개 토론이 필요했으며,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과정은 계속되었다. 이는 단결을 촉진하고 모든 목소리가 존중받도록 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이해에 기반했다.<br>여성의 역할: 클랜 어머니의 권한하우데노사우니 사회의 또 다른 혁명적 특징은 여성의 중심적 역할이었다. 사회는 모계 혈통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여성만이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 지도권 역시 모계를 통해 세습되었다.  '클랜 어머니(Clan Mothers)'라 불리는 여성 지도자들은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추장을 선출하고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남성들이 정치를 수행했지만, 탄핵권과 거부권은 여성들의 모임이 가지고 있었다. 이는 18세기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여성 참정권의 형태였다.  정주 지역의 땅과 자원에 대한 책임은 여성에게 있었고, '숲'에 대한 책임은 남성에게 있었다. 이러한 명확한 책임 구분은 공유 자원을 관리하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br>민주주의에 미친 영향하우데노사우니의 통치 체계가 미국 민주주의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1988년 미국 의회는 하우데노사우니 헌법이 미국 헌법과 권리장전에 미친 영향을 인정하는 결의안 331호를 통과시켰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존 러틀리지는 헌법 제정 회의에서 다양한 이로쿼이 조약의 발췌문을 낭독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두 체계 사이의 차이점도 지적한다. 하우데노사우니에서는 모든 결정이 합의를 통해 이루어졌지만, 미국 헌법은 다수결을 채택했다. 하우데노사우니는 처음부터 여성에게 정치적 권한을 부여했지만, 원래의 미국 헌법은 여성과 노예에게 투표권을 부정했다. 하우데노사우니의 대표는 씨족 수를 기반으로 했지만, 미국은 인구를 기반으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방제, 대의 민주주의, 견제와 균형, 개인의 권리 존중, 평화를 향한 헌신과 같은 핵심 원칙들은 분명히 공명한다. 하우데노사우니의 위대한 평화의 법은 실천적 민주주의의 초기 사례로서, 민주주의가 서양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br>평화와 환경을 위한 철학위대한 평화의 법은 단순히 정치 체계가 아니라 삶의 철학이었다. 이는 평화, 사랑, 정의를 중심으로 한 가치 체계를 제공했다. 하우데노사우니는 폭력의 순환을 끝내고 평화와 단결의 문화를 조성했다. 배경이나 출신에 관계없이 모든 개인이 공동선을 위해 함께 일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하고 관련성이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일곱 세대 원칙(Seventh Generation Principle)'이다. 위대한 평화의 법은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인간은 환경을 보호하고 미래 세대를 위해 지속 가능성을 보장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자신의 결정이 자연 세계에 미칠 장기적 영향을 고려해야 하며, 모든 생명체의 상호연결성을 인식해야 한다.  하우데노사우니 환경 태스크포스는 이 원칙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세 가지 질문을 제안한다. "우리의 결정이 평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우리의 결정이 자연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우리의 결정이 미래 세대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br>감사의 의식하우데노사우니의 모든 회의와 중요한 행사는 '감사의 말씀(Thanksgiving Address)'으로 시작한다. 이는 창조의 각 요소가 자신의 의무를 계속 수행하여 생명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의식적 연설이다. 이러한 감사의 표현은 공동체 의식과 책임감을 강화하는 강력한 방법이었다.  감사의 의식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우리가 건강한 생태계, 공기, 물, 햇빛, 그리고 창조의 나머지 부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도구였다. 이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강조하는 서구 전통과 대조를 이루며, 공동체적 책임과 상호의존성을 중심에 둔다.<br>개방적 경계와 포용성위대한 평화의 법은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원칙을 담고 있었다. 평화의 나무의 네 뿌리는 네 방향을 향하며, 위대한 평화의 법을 따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을 환영했다. 사람들은 어느 부족에서나 완전한 권리를 가졌으며, 높은 직위를 맡을 권리를 제외하고는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권한도 지정된 절차를 통해 개인에게 부여될 수 있었다.  하우데노사우니 외부의 부족이나 개인이 씨족으로 입양되기를 원하면, 일정 길이의 조개 구슬 끈을 서약으로 제공했다. 그러면 부족의 추장들이 제안을 고려하고 결정을 제출했다. 입양이 확정되면, 추장들은 국민에게 "이제 우리 국민은 그러한 사람, 그러한 가족 또는 그러한 가족들이 영원히 출생 국가의 이름을 버리고 땅의 깊은 곳에 묻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완전한 통합과 새로운 정체성의 수용을 의미했다.<br>]]></description></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