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싸리·버들 글숲  (bari_che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숙의의학으로 마음 치료하는 한의사가 숲(식물)과 팡이와 물에 진심 다해, 지구 위기를 몰고 온 제국주의에 범주적 주의를 기울여, 직접 쓰거나 인용한 글.</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Wed, 07 Oct 2026 18:50:25 +0900</lastBuildDate><image><title>bari_che</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2844469_639192927187586697.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bari_che</description></image><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친미 기독교 청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58526</link><pubDate>Wed, 07 Oct 2026 08: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58526</guid><description><![CDATA[<br><br>* 백창욱(목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br><br><br>미군정이 우익 세력들을 포섭할 때, 기독교 집단도 포섭 대상이었다. 한국 기독교와 미국은 아삼육 관계였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인들 대개가 미국 기독교를 이식받았기 때문에 정서적으로도 거부감없이 장단이 잘 맞았다.그렇게 한국 기독교와 미국이 아삼육 관계가 된 것은 구한말 때 부터였다. 미국 입장에서 조선은 황금어장이었다. 황금어장은 선교용어이다. 어부가 다량의 물고기떼를 만나면 대박나는 것처럼, 선교붐이 일어나기 시작한 미국 선교사들에게 조선은 대박 현장이었다. 황금어장답게 선교사들은 조선에 많은 기여를 했다. 기울어져 가는 조선, 급기야 일제에 먹히고 마는 조선에서 유일한 기대처였다. 조선 민중들은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 병원, 교회를 통하여 야소교와 친숙해졌다. 그리고 자연히 선교사들의 고향인 미국도 동경하게 되었다.당시 조선에 미국 선교사들이 얼마나 많았냐면, 한 가지 정책이 증거한다. 1909년 미국 선교사들이 모여서 중대한 결정을 했다. 이른바 ‘선교지 분할정책’이다. 조선의 각 도 별로 미국의 각 교단이 분할 담당하기로 한 것이다. 예를 들자면, 미국 북장로교는 강계, 선천, 평양, 재령, 서울, 청주, 안동, 대구, 등 평안도 황해도와 충청북도 일부 지역과 경상북도 지방을 맡았고, 미국 남장로교는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 등 전라도와 대전 부여 등 충청남도 일부와 제주도를, 캐나다장로교는 함경도 지방을, 그리고 호주장로교 선교부는 부산, 진주, 마산, 거창, 통영 등 경남지방을 맡았다.이 정책에 따라 미국의 각 교단이 중복을 피해서 선교지를 맡은 것이다. 미국 선교사가 얼마나 많았으면 이런 정책을 세울까, 싶다.미국 선교사들에게 조선행은 선교사의 사명인,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라는 예수의 명령을 순종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미국 권력에게는 선교사들의 외국행이 선교사들과는 전혀 다른 이유가 존재했다.그것은 무엇일까? 1880-90년대, 미국은 아메리카 정복이 거의 끝나갈 시점이었다. 원주민 말살로 시작한 정복은 중미, 남미까지 확장했고 탐욕을 다 채웠다. 이제는 새로운 정복지가 필요했다. 그곳은 태평양 건너 아시아였다. 하지만 이미 아시아에서는 미국의 정복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었다. 정복을 순탄하게 하려면 이미지를 순화시켜야 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바로 선교였다. 미국 권력 입장에서는 선교사들이 미국의 나쁜 이미지를 세탁해 주는 너무도 반가운 존재였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타국에 나가기 좋게 전폭적으로 협조했다. 예를 들면 지금도 선교사들이 가장 큰 애로를 겪는 게 비자문제다. 일반 여행객 신분이기 때문에 기간이 다 차면, 옆나라 갔다가 다시 들어온다. 그렇게 체류를 연장하는 것이다.즉 당국이 본국증명서나 여권, 비자 등을 협조해 주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그런데 미국을 세탁해 주는 선교사들이 아시아로 가는 일을 막을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증명서는 극히 한 예일 뿐이다. 얼마나 많은 이해관계가 얼키고설켜 있겠는가. 조선에 미국선교사들이 득시글거릴 수 있었던 데는 미국 권력의 깊은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선교사들도 그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분야가 다르니 그냥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을 뿐이다. 그리고 헐버트 선교사같은 극소수의 선교사 빼고는 미국 선교사 대개는 미국 권력의 의도에 협조하면서 선교했다. 조선 입장에서는 미국 선교사들이 백프로 고마운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결국 미국의 속셈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1905년 가쓰라 태프트 밀약으로 나타났다. 미국은 고종을 보기 좋게 배신했다. 일제의 침략에 방패막으로 미국을 의지했던 고종은 그래서 미국에게 여러 가지 알짜배기 사업권을 줬던 고종은 보기 좋게 뒤통수를 맞았다. 어떡하든 국제사회에 조선의 처지를 알리고자 했던 고종특사 헐버트 선교사도 조국의 배신에 치를 떨었다. 미국선교사들은 이렇게 일치감치 조선에 깃발을 꽂을 수 있었다. 조선 교회에 대한 독점적 지위는 일제 강점기 내내 계속됐다. 교회 안에 조선인의 자생적인 모임이 생기면 선교사들은 저주까지 퍼부으면서 자신들의 지위를 고수했다. 그렇다고 자생적인 모임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선교사들의 추악한 면모만 드러날 뿐이었다. 그렇게 미국권력과 같은 모양인 것을 스스로 증명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흐름이 8.15 후 미군정 시기에 한국을 지배하기 위해 검은머리 미국인들을 포섭하는 단계까지 온 것이다. 이게 8.15 후 한국기독교의 모습이다. 미국의 시다바리 역할로 내전과 전쟁, 조국 분단에 가담한, 자랑스럽지 못한 부역의 역사다. 그 치부를  가리기 위해 더 반공에 광분한다.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그러므로 한국 기독교가 제대로 서려면, 미국과 얽힌 관계부터 청산해야 한다. 한국기독교 현실과 동떨어진 말인가. 그렇더라도 한국이 자주독립하려면 미국과 관계를 재정립해야 하듯이, 한국 기독교도 과거를 청산하고자 하면 반드시 이 길을 거쳐야 한다. 진실로.<br>]]></description></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암울한 미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55126</link><pubDate>Mon, 05 Oct 2026 10:2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55126</guid><description><![CDATA[<br>* 희일이송(영화감독)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br><br><br><br><br><br><br>남미의 지도. 수개월 전부터 SNS의 세계를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밈. 남미 전역이 도미노처럼 극우화됐고 이제 '거의' 브라질만 남았다는 불안감이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기우로 그치지 않았다. 오늘 브라질 대선 1차 선거에서 룰라가 패배했다. 룰라가 근소하게 이길 거라던 여론조사 결과가 모조리 빗나갔다. 자이르 보우소나루의 아들 플라비우 보우소나루가 이겼다. 2차 결선으로 가겠지만, 룰라가 승리할 가능성은 적다. 설령 기적적으로 이긴다고 해도 오늘 선거에서 브라질 상원과 하원을 보우소나루 정당이 휩쓸었기 때문에 팔다리가 묶인 식물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다. 자이르 보우소나루의 아내 미셸 보우소나루가 오늘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또 두 명의 다른 아들들도 각각 상원과 하원에 당선됐다. 그러니까 감옥에 있는 자이르 보우소나루를 제외하고, 온가족이 대통령에서부터 의회를 장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보우소나루주의의 완벽한 부활이다. 자이르 보우소나루는 쿠데타를 일으키다 감옥에 갔지만, 그의 가족과 지지 세력들이 뺨에 복수의 점을 찍고 훨씬 더 강력해진 모습으로 부활한 것이다. 이로써 미국의 극우들은 트럼프 독트린을 완성했다. 남미 대륙 전역에 극우 정권이 들어섰고, 미 극우들은 쇠퇴하는 제국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남미의 민중을 지독하게 쥐어짤 것이다. 한편으로 이스라엘은 자신의 파시즘을 지지하는 또 하나의 강력한 대국을 얻게 됐다. 한 동안 권위주의 괴물들이 남미를 휩쓸게 될 것이다. 소고기, 콩, 금, 회토류 등을 노리는 다국적 기업의 배부른 만찬 식탁으로 수탈될 것이다. 물론 룰라 정부에서 주춤해진 아마존 삼림 벌채율이 다시 치솟게 되면서 인류는 기후붕괴의 지평선을 향해 더욱 빠른 속도로 질주하게 될 것이다. 암울하다. 룰라는 왜 패배했을까? 실업률과 인플레이션도 낮췄고 경제 지표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고려할 수 있는 원인 중 하나로 다른 남미 국가들에서 그랬듯, 미국과 CIA의 선거 개입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선거 전부터 브라질 법무부가 미국의 선거 개입을 면밀히 조사하는 중이다. 아니면, 룰라 정부 인사들의 부패 스캔들을 지목할 수도 있겠다. 아마도 2차 결선을 앞두고 패배 원인이 다양하게 분석될 것이다. 하지만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은 룰라 정부가 보우소나루주의를 제압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자이르 보우소나루의 육신은 감옥에 있을지언정, 그로 대변되는 보우소나루주의가 브라질의 뼛속까지 잠식한 터다. 극우들이 장악한 상-하원에 팔다리가 묶여 룰라가 제대로 의정을 펼치지 못한 점도 있겠지만, 룰라는 기존보다 더 우경화된 정치적 기조를 유지했고 이것이 브라질 좌파의 분열을 가져오는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흔히 보우소나루주의는 성경, 소고기, 총알의 삼위일체로 설명된다. 성경은 복음주의를, 소고기는 농업 기업을, 총알은 군과 경찰을 의미한다. 보우소나루주의는 복음주의 세력, 농업 기업들, 군과 경찰력을 기둥 삼고 축조된 파시즘적 세계에 다름없다. 이러한 강력한 권력과 우경화 추세에 맞서기 위해서는 보다 진보적이고 담대한 정치 비전과 민중 동원이 필요했을 것이다. 파시스트를 축출한 직후 등장한 정부가 온건하고 우경화된 기조를 취했을 때 언제든 파시스트가 다시 귀환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을 필요가 있다. 트럼프를 쫓아내고 등장한 조 바이든 정부가 밍숭밍숭한 중도 정책으로 일관하면서 트럼프의 부활을 재촉했듯이, 또 보우소나루를 쫓아내고 등장한 룰라 정부가 주춤거리면서 다시 보우소나루주의가 복권되듯이.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윤석열은 감옥에 보냈지만, 윤석열주의는 외려 더 기승을 부리는 형국이다. 그 와중에도 이재명 정부의 우경화는 앞서 예시한 경로를 착실히 따라가는 중이다. 오늘 일어난 브라질의 실패는 우리의 내일이 될 수도 있다.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05/pimg_639267924256757181.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55126</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도시 나무 비가(悲歌) 2</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51984</link><pubDate>Sat, 03 Oct 2026 09:5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51984</guid><description><![CDATA[<br><br><br>한의원 뒷창 담쟁이덩굴. 얼핏 보면 깊게 물든 단풍처럼 보이지만, 세심히 살피면 앵글로아메리카 제국주의세(Imperiocene)를 살아가면서 제국 지배 집단이 벌인 기후 침략에 맞서 싸우다 입은 상처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03/pimg_639266173489201119.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51984</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회향, 잿빛 칼라하리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43478</link><pubDate>Tue, 29 Sep 2026 15:2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43478</guid><description><![CDATA[<br>  &nbsp;  칼라하리는 ‘사막과 초원, 그 경계 어디쯤인 반건조 모래 사바나’다. 이 queer 대지를 생명 방식으로 삼아 살아갔던 시원 인류가 이른바 부시먼이다. 부시먼이야말로 원조이자 전형 풍요를 누렸던 인간다운 인간이었으나 제국과 그 부역 문명에 쫓겨나 빈곤으로 내몰렸다(『호모 부시마니쿠스(정해종)』. 나는 멸칭인 부시먼을 버리고 그들을 호모 칼라하리쿠스라 부른다. 어제 그들 삶을 오늘 내 삶으로 번역하기 위해서다.   &nbsp;  문득 깨닫는다, 내가 살아가는 이 도시가 다름 아닌 잿빛 칼라하리라는 사실을. 하여 눈을 돌린 대상은 도시를 점점이, 그러나 맥맥히 흐르는 나무와 풀, 그리고 먼저 삶을 피워낸 태고 생명들이다. 커다란 숲 언저리부터 도심 화분과 그 골목 후미진 곳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이야말로 제국과 최전선에서 맞서고 있는 전사가 아닌가. 저들이 얼마나 장엄하며 또 얼마나 아프고 슬픈지 이제야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다니, 나는 얼마나 비루하며 또 얼마나 둔하고 어리석은가. 제국 생활 양식에 젖은 채 저들-이하, 나무를 대표 단수로 쓴다-을 배경으로조차 인식하지 않고 흘러가는 인간 사이 광화문 한 모퉁이에 서서 앙가슴을 두드린다.   &nbsp;  나무에 관심 기울이는 깨인 인간조차 나무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지에 초점 맞추어 접근한다. 나쁘지 않으나 모자란다. 여전히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태도다. 나무는 다만 인간 도구나 방편이지 않다. 나무는 인간과 동등하게 이 푸른 별에서 한껏 실컷 살아갈 권리를 지니므로 나무 관지에 서 보는 사유와 실천 수련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당면한 공통 문제의식으로서 제국주의세(Imperiocene)를 살아가며 제국주의 지배 집단에게 착취·살해당하는 피지배 존재 당사자성에 관해 나무와 식민지 인간 위치를 동일하게 놓을 줄 알아야 한다. 그 전제에 터 잡아 상리공생과 반제국주의 통일전선을 모색할 수 있다.  &nbsp;  이 전망에서 오늘 여기 호모 칼라하리쿠스인 나는 뭘 해야 하는가? 광화문 벤치에 주저앉아 질문을 포개간다. 어느 순간 나와 눈길을 주고받던 땅바닥 돌이 자기 문양으로 조형해 낸 표정 변화로 말을 건넨다. “고난받는 존재를···” 예? 바로 다음 순간, 마무리다. “응시하고 증언하라!” 구체 방법은 내 몫이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거리를 걸어서 나아간다. 도처에서 신음과 비명이 들려온다. 그 소리를 사진에 담는다. &lt;도시 나무 비가(悲歌)&gt;가 탄생한다.<br><br>돌의 표정1-“고난받는 존재를···”<br>돌의 표정2-“응시하고 증언하라!”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9/pimg_639262918710949487.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43478</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도시 나무 비가(悲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40992</link><pubDate>Mon, 28 Sep 2026 11:0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40992</guid><description><![CDATA[<br><br>멸칭<br><br>프로크루테스 침대<br><br>참수<br><br>편마비<br><br>환지통<br><br>강제이주촌<br><br>절해고도<br><br>유배<br><br>헤어질 결심<br><br>희생양<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8/pimg_639261895624667746.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40992</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쇠망하는 제국의 반격—미국의 ‘부담 공유’ 전략으로 동맹이 치러야 하는 값비싼 대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32804</link><pubDate>Wed, 23 Sep 2026 14: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32804</guid><description><![CDATA[<br>* 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br><br>오늘날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세기 넘게 지속되어 온 단극 체제가 해체되고, 다극화라는 거스를 수 없는 역사적 전환기를 통과하고 있다. 그러나 낡은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는 이행의 과정이 평화롭지만은 않다. 몰락해 가는 제국은 패권 연장을 위해 세계 곳곳에서 극단적인 폭력을 자행하고 있으며, 그 유지 비용을 타국에 전가하고 있다. 미 해병대 출신으로 타일랜드에서 활동하는 독립 지정학 분석가 브라이언 베를레틱(Brian Berletic)이 자신의 기고문과 텔레그램 채널(The New Atlas) 등에서 줄기차게 짚어내는 미국의 외교·안보 행태는 이른바 ‘부담 공유(burden sharing)’라는 미명으로 진행되는 제국의 동맹 수탈 구조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br>베를레틱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은 스스로 만들어낸 인위적인 혼란과 위협을 지렛대 삼아 동맹국과 속국들을 옥죄고 있다. 단적인 예가 사우디아라비아를 대상으로 한 미국의 무기 강매다. 최근에 미국은 한화 34조원에 달하는 최신 전투기 판매를 사우디와 계약한 것으로 전해진다. 알다시피 미국은 현재도 진행 중인 예멘 전쟁에서 사우디에 대한 지원을 거부하며 표면적으로는 갈등에서 한발 물러선 행보를 취했다. 하지만 미국이 서아시아 지역에서 물러서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것이 베를레틱의 진단이다. 미국은 직접 군사 작전에 개입하지 않더라도 무기 제공, 유지보수, 정보·감시·정찰(ISR), 특수부대(SOF) 지원 등을 통해 이름만 빼고 서아시아의 모든 전쟁을 주도하고 있다. 이로 인해 페르시아만 아랍국가들은 에너지 생산 시설과 수출망이 마비되는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다. 사우디를 비롯한 걸프협력회의(GCC) 국가들은 안보를 명목으로 자국 내에 미군 기지 주둔을 허용했지만, 정작 미국과 이스라엘이 촉발한 대이란 전쟁 국면에서 미국으로부터 어떠한 실질적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이란의 집중 타격에 노출되었다.<br>베를레틱은 여기서 핵심적인 질문을 던진다. “사우디가 이란을 적대시하는 미군을 자국에 주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이란이 사우디를 선제적으로 공격할 이유가 무엇인가?” 정답은 “아무것도 없다”다. 이란의 군사력은 서방의 압박에 맞선 방어적 성격이 짙으나, 그것을 인접국에 대한 ‘절대적 위협’으로 포장하고 부풀려 갈등을 조장하는 것은 철저히 미국의 고안물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우디는 이 가공된 위협 시나리오에 휘말려 천문학적인 비용을 치르며 미제 무기를 도입하기로 했다. 어디 사우디뿐이겠는가? 우크라이나에서도 미국은 서서히 발을 빼면서 나토의 유럽 국가들에 막대한 전비를 떠맡기고 있다. 어디서든 위기를 창출하고 방치한 뒤, 그 공포를 팔아 자국 군산복합체에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하는 것, 이것이 제국의 뼛속 깊은 본질이다.<br>이러한 행태는 2025년 미국 국가안보전략(NSS)에 명시된 ‘부담 공유 네트워크’ 확장의 일환이며, 이전 행정부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온 기조다. 미국은 유럽과 캐나다, 그리고 아시아 동맹국들에 러시아와 중국, 이란, 조선 등을 안보 위협 상품으로 포장하여 적극적으로 판매한다. 자국의 경제력과 군사력만으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세계 패권 유지 비용을 동맹국이라는 ‘하수인 국가’들에 전가하는 것이다. <br>이 수탈의 과정에서는 고도의 감정적 ‘정치 연극(political theater)’도 동원된다. 만약 미국이나 그 속국들의 지도부가 대중을 향해 “미국의 세계 패권을 되찾기 위해 당신들의 공공복지 프로그램을 삭감하고 경제적 파탄을 감수해야 한다”라며 정직하게 말한다면, 누가 이를 수용하겠는가. 따라서 미국은 대중을 공황 상태나 분노에 빠뜨릴 인위적인 위협을 끊임없이 생산해 낸다. 유럽, 캐나다, 서아시아의 속국 지도자들은 가끔 미국의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거나 ‘버림받은 척’ 분노를 표출하는 외교적 연극을 벌인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워싱턴의 지시에 따라 자국 인민의 공공 자금을 삭감하면서까지 미국의 대리전에 열광적으로 뛰어드는 충견 노릇을 지속하고 있다. 대중이 지배계급의 기만에 속아 가공의 적을 패퇴시키기 위한 무기 지출과 대결 구도를 열렬히 ‘요구’하도록 세뇌하는 것이다. <br>이러한 미국의 전략은 거시 경제학에서 비판받는 ‘근린 빈곤화 정책(beggar-thy-neighbor)’이 국제 안보 영역으로 이식된 최악의 형태다. 과거 전범인 헨리 키신저가 “미국의 적국이 되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미국의 우방이 되는 것은 치명적이다”라고 냉소했듯, 오늘날 미국의 우방치고 이 술수의 희생양이 되지 않은 나라는 없다.<br>유럽 국가들의 참상은 끔찍할 정도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이들은 미국의 압박에 따라 값싼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스스로 차단했다. 수년째 이어진 에너지 가격 급등은 유럽의 산업과 경제 전반을 급격하게 붕괴시키고 있으며, 역설적으로 유럽은 러시아산 가스 대신 미국의 값비싼 액화천연가스(LNG)와 미국산 무기에 천문학적인 돈을 갖다 바치고 있다. 아시아에서도 일본과 한국은 미국의 대러시아·대중국 봉쇄망에 강제로 편입되면서, 최대 교역국들과의 경제 교류 기회가 박탈당하고 중동 에너지 수입망이 교란되는 막대한 손실을 강요받고 있다. 미국의 적국은 미국과 직접적인 전쟁을 치러야 해서 고통받고, 미국의 우방은 미국의 입맛에 맞게 교역을 통제당하느라 막대한 경제적 피를 흘리는 것이다.<br>이 근린 빈곤화의 청구서가 지금 한국의 문 앞에도 당도해 있다. 미국의 불법적 개입으로 이란과의 분쟁이 격화되고 호르무즈 해협 봉쇄 위기가 고조되자, 이란의 미사일과 드론 비대칭 전력에 직면하여 단독으로는 더 이상 전선을 감당하기 어려워진 미국은 우방국들에 참전을 압박하고 나섰다. 전 세계가 이 무모한 확전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 거리를 두는 가운데, 오직 한국의 이재명 정부만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 파병 요구에 응할 태세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전쟁에 연루되는 파병”은 없을 것이라면서도 다른 명목의 파병 가능성을 열어둔 발언을 해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다. 자국의 안보와 직결되지도 않은 미국의 중동 패권 유지 전쟁에 참전하여 자국민을 분쟁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으려는 태도는 제국이 우방을 어떻게 소모품으로 동원하는지, 그리고 매판적 지배층이 어떻게 자국 인민의 이익을 배반하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징표다.<br>베를레틱의 진단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현상과 미국의 전술적 기만을 정확히 짚어냈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그것은 다극 질서를 논하는 논자들이 섣부른 낙관주의에 빠질 위험을 경고하는 효과도 있다. 지정학적 위기를 비판하는 논자들은 종종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의 성과, 브릭스의 경제적 굴기, 최근 대미 국면에서 이란이 보여준 선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의 확실한 승리 조짐 등을 거론하며, 미국의 패망이 이미 완성된 현실인 양 희망 섞인 진단을 내놓곤 한다. 베를레틱은 ‘제국의 반격’이 결코 만만찮다는 것을 끊임없이 환기함으로써 그런 섣부른 판단에 제동을 건다. 그러나 그의 분석에는 한 가지 중대한 지정학적 통찰이 결여되어 있다. 미국이 자행하는 무리한 착취와 수탈, 침략 행위가 결국 패권 유지에 부메랑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점은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 정세의 퍼즐을 완성하려면 베를레틱과 같은 전술적 분석뿐만 아니라, 지경학적 차원의 거시적 통찰이 결합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 이단적인 좌파 정치경제학자 마이클 허드슨(Michael Hudson)의 분석이 훌륭한 나침반이 된다. 그에 따르면, 미국의 ‘부담 공유’ 강요는 꼭 미국에 유리하게만 작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국이 세계 대다수 국가들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자해적 결과로 귀결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미국의 근린 빈곤화 전술은 건재한 패권의 증명이라기보다는, 쇠망해 가는 제국의 단말마적 발버둥이다.<br>허드슨은 내가 며칠 전(9월 19일) 페이스북에 번역해서 소개한 대담(&lt;붕괴하는 단극 체제와 다극화의 지정학: 미국 금융 패권의 자멸과 브릭스(BRICS)의 부상&gt;)에서, 미국의 헤게모니 유지 전략이 도리어 미국을 구조적으로 고립시키고 다극화 체제의 도래를 앞당기고 있다고 단언한다.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다투어 브릭스(BRICS)나 상하이협력기구(SCO) 등 비서방 국제조직의 품으로 쇄도하는 현상이 그 명백한 증거다. 허드슨은 “브릭스 전략의 전반적인 설계와 조율을 완성한 사람은 다름 아닌 도널드 트럼프”라는 역설적 진단을 내놓는다. 트럼프를 비롯한 미국의 역대 행정부가 동맹과 적국을 가리지 않고 달러 패권을 무기화하며, 이란산 및 러시아산 에너지 구매를 막기 위해 전 세계에 무차별적인 제재를 가한 결과, 오히려 중국과 러시아가 달러 중심의 국제은행간통신협정(SWIFT)을 대체할 실질적인 대안을 구축하도록 등 떠밀어 주었다는 것이다.<br>미국은 자신의 통제에 따르지 않으면 은행 간 메시징 시스템인 SWIFT에서 즉각 퇴출시키겠다고 끊임없이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그 오만한 협박의 결과로 중국은 자체적인 청산결제시스템(CIPS)을 만들어냈다. 9월 12∼13일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브릭스 정상회의 회의의 초반에 회원국들은 “우리는 결제액의 65%를 옮겼고, 가능한 모든 것을 중국 시스템으로 전환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만약 미국의 역대 행정부가 타국을 향해 경제적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달러 사용 강제 차단 등의 일방적 조치를 하지 않았더라면, 브릭스 국가들이 이토록 자발적이고 빠르게 달러 패권에 등을 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드슨의 분석은 동맹의 자원을 쥐어짜는 미국의 전략이 단기적으로는 방산업체나 월스트리트 금융자본의 배를 불릴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기축통화국으로서의 신뢰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제국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임을 명징하게 보여준다.<br>결국 베를레틱의 전술적 분석과 허드슨의 거시적 통찰을 종합하면, 오늘날 전 지구적 위기의 뇌관이 어디에 있는지 그 실체가 명확하다. 미국의 쇠망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필연적 대세이며, 세계는 다극 질서로 급속하게 진입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제국의 지위를 순순히 내려놓지 않으려 발악하며, 그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물리적 폭력을 세계 곳곳에 뿌리고 있다. 이름하여 ‘영구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br>이 영구전쟁은 기본적으로 미국 인민대중의 민생이나 진정한 의미의 ‘국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오직 군산복합체와 월스트리트 금융자본, 그리고 부패한 정치 엘리트들로 얽힌 ‘미국 지배 블록’만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극소수 지배층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미국 국내의 공공복지는 파탄 나고 있다. 아니 그뿐만 아니다. 세계의 무고한 인민들이 미국의 영구전쟁과 그에 동반된 ‘부담 공유’로 인해 학살과 경제적 궁핍이라는 가혹한 희생을 치르고 있다.<br>참담한 것은 쇠망하는 제국에 결박된 속국들의 처지다. 이들 국가의 매판적 지배층은 자국의 주권과 인민의 안녕을 지키는 대신, 제국의 요구에 부응하는 반자주적이고 반민중적인 정책을 서슴지 않으며 인민의 삶을 외세의 제단에 제물로 바치고 있다.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조세 수탈에 나선 트럼프의 강압적 요구에 굴복하여 이미 수백억 달러의 대미 투자를 약속한 뒤에도 이제 미국의 침략 전쟁 하수인으로 전락하여 호르무즈 해협에 한국군을 파병하려는 태세인 한국이 그 대표적인 징후다. <br>인류를 전쟁과 궁핍으로 내모는 제국의 야만적 영구전쟁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은 명확하다. 수명을 다한 제국이 억지로 쥐고 있는 일극 세계질서의 해체, 그리고 모든 국민국가가 대등한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다극 질서의 확립이 그 굳건한 첫걸음이 되어야 한다. 나아가 제국의 착취 구조와 이에 부역하는 각국 지배층의 기만을 꿰뚫어 보고, 세계의 인민이 각자의 국가에서 진정한 민주적 주권과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적 사회 질서가 수립되어야만 한다. 맹목적인 종속의 사슬을 끊어내고 인민의 정치적 각성을 이루어내는 것, 그것만이 닥쳐오는 지정학적 격변기 속에서 세계 인민이 공멸을 피하고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br>]]></description></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제국의 자가포식과 다극화의 진통: 반제국주의의 세 시선과 한국의 선택 </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19357</link><pubDate>Wed, 16 Sep 2026 09:0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19357</guid><description><![CDATA[<br>* 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br><br><br>동유럽과 서아시아라는 두 지정학적 단층선을 무대로 세계 역사를 뒤바꿀 군사적 충돌이 진행되는 대격변을 두고, 세계 주류 언론과 지배 계급은 지금 제국주의의 패퇴라는 전황의 현실과 이를 은폐하고 호도하는 기만적 서사 사이에서 분열적 증상을 계속 드러내고 있다. 갈수록 객관적 진실을 은폐하기 어려워지자, 서방의 열세를 인정하는 보도를 이따금 내놓는 서방 주류 매체들이 없지는 않다. 우크라이나군이 전선에서 회복 불능의 패색을 드러내고 있다는 서방 매체의 보도도 이제 자주 나오고 있고, 서아시아 정세에 관해서도 영국의 텔레그래프 같은 유력 보수 매체조차 패배를 자인할 정도인 것이다.<br>그럼에도 서방 주류 언론이나 지배 블록은 대중의 눈과 귀를 가리는 기만적 관행을 멈추지 못한다. 최근 우크라이나 측이 주도한 드론 공세가 러시아에 치명적 타격을 주며 전세를 뒤집었다는 가짜 뉴스가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고, 이런 와중에 서방 고위층의 거짓 발언도 이어지고 있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이 최근 “나토가 강자이고 러시아는 약자”라며 러시아가 서방이 지시하는 조건대로 휴전 협상에 응해야 한다는 황당한 발언을 내놓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서아시아 전선과 관련해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의 군사력을 초토화”했노라는 새빨간 거짓말을 하거나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이 “강력한 새로운 경제 제재가 이란을 완전히 무너뜨릴 것”이란 허언을 내놓으면, 서방 주류 언론은 그 진위를 가려내기보다 제국의 오만을 중계하기에만 바쁘다. 이런 체계적인 기만은 세계 인민대중의 눈을 가려 지정학적 현실 상황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게 막는다. 세계 정세의 실상을 파악하려면 제국의 이해관계에 복무하는 허위적 프로파간다를 걷어내는 작업이 선결되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br>물론 지정학적 흐름을 비판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다른 길도 있다. 서방의 선전전과는 거리를 두며 반제국주의 시각에서 우크라이나, 이란 사태를 제대로 다루는 국제정세 분석을 제공하는 흐름이 그 예다. 단, 여기서도 관점들이 다양해서 제출되는 분석을 선별하고 종합할 필요가 있다. 대안적 분석은 대략 세 갈래로 복잡하고 치열하게 나뉜다. 이들은 미국의 패권 전략과 그에 대한 서방 국가들의 동조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는 공통된 토대 위에 서 있으면서도, 다극화 질서의 현재와 한계를 평가하는 데서는 시각차가 뚜렷한 편이다.<br>첫째는 반제국주의 진영 내부에서 ‘주류’를 형성하는 관점으로, 오늘날의 미국을 이미 ‘쇠망의 길에 들어선 제국’으로 규정하며 일극 체제의 종말을 선언하는 목소리다. 이들은 미국이 동유럽(우크라이나)과 서아시아에서 벌이는 침략 행위가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이며, 오히려 그 무리한 개입이 미국의 쇠망을 가속하는 자멸적 악수가 되고 있다고 전망한다. 예컨대 전직 CIA 분석관인 래리 존슨(Larry Johnson)은 우크라이나, 이란 전선에서 미국의 재래식 군수 조달 체계가 회복 불가능한 고갈 상태에 직면했음을 군사 데이터로 입증하며 서방의 물리적 한계를 짚어낸다. 또한 페페 에스코바르(Pepe Escobar)를 위시한 지정학 분석가들은 동유럽에서 러시아가 굳힌 군사적 우세와 더불어, 브릭스(BRICS)의 확장 및 ‘저항의 축’이 일궈낸 서아시아의 전략적 목줄(호르무즈 및 바브엘만데브 해협) 장악을 다극화 질서의 불가역적 승리로 규정한다. 나아가 마이클 허드슨(Michael Hudson)과 리처드 울프(Richard Wolff) 같은 급진적 정치경제학자들은 금융화된 제국주의의 물적 토대 상실과 대러시아·대이란 경제 제재의 부메랑이 초래한 전 지구적 ‘탈달러화’의 흐름을 근거로 삼아, 미국의 구조적 내파(implosion)를 역사적 필연으로 짚어낸다.<br>둘째는 섣부른 낙관론을 경계하며, 여전히 유효한 제국의 군사적 파괴력과 지정학적 흔들기를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는 브라이언 베를레틱(Brian Berletic)의 ‘비관적’ 시각이다. 그는 미국이 동유럽에서는 우크라이나를 대리 소모품으로 동원해 러시아와 유럽의 연결을 영구히 절단하고, 서아시아에서는 시리아를 전복시켜 레바논 헤즈볼라의 후방을 차단하며 유라시아 공급망을 폭격과 교란으로 봉쇄하는 ‘통제된 혼란(managed chaos)’ 전략을 가동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동유럽과 서아시아 양면에서 전개되는 제국의 집요한 교란 작전 속에서, 다극화 진영과 저항의 축 역시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방어적 생존 국면에 들어섰다는 그의 지적은 다극 질서를 지지하는 진영이 자칫 빠질 수 있는 경솔한 승리주의에 경종을 울린다.<br>셋째는 서방 제국주의에 가장 급진적인 비판을 가하면서도, 다극 질서를 주도하는 국가들의 기회주의적 한계를 매섭게 타격하는 바네사 베일리(Vanessa Beeley)와 피오렐라 이사벨(Fiorella Isabel) 등의 시각이다. 베를레틱이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삼가는 반면, 이 두 여성 분석가의 ‘내부 비판’은 그야말로 신랄하다. 이들은 중·러가 다극 질서 구축의 선봉에 서 있다고 자처하면서도, 정작 서아시아에서 제국의 총알받이가 되어 피 흘리고 있는 팔레스타인, 레바논, 이란 등 ‘저항의 축’에 대해서는 철저히 자국 이기주의에 빠져 적극적인 군사적·물질적 지원을 방기하고 있다고 일갈한다. 냉정히 보면 이들의 비판은 과도한 면이 없지 않다. 러시아는 동유럽 전선에서 나토와의 직접적인 체제 대결에 국력을 집중하느라 전선을 확장하기 어려운 군사적 현실이 존재하며, 최근 서아시아 전쟁 국면에서 드러나듯 중·러의 대이란 군사적 지원은 미국의 침략 역량 억제에 실질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서아시아 현장의 참상을 고발하는 이들의 비판이 동유럽 전선에 묶인 러시아와 경제적 실리를 우선하는 중국의 계산 속에서 다극화 진영의 연대가 지닌 구조적 한계를 날카롭게 드러낸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br>이상 세 갈래의 관점들을 종합해 보면, 오늘날 지정학적 위기를 읽어내는 데 필요한 입체적인 시야가 열린다. 앞서 두 번째 시각에서 확인했듯, 미국이 동유럽과 서아시아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인 대리전을 강행하며 ‘통제된 혼란’을 무기화하고 있다는 베를레틱의 분석은 매우 유효한 현실 인식이다. 그것은 몰락하는 제국이 결코 평화롭게 물러나지 않으며, 오히려 다극화의 안착을 방해하기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끔찍한 군사적 파괴력을 뿜어낸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다시 말해 제국은 그동안 주도해온 ‘영구전쟁’을 중단하는 일이 절대 없을 것이며, 일부 전선에서 격퇴당하더라도 다른 전선을 펼치며 끊임없는 반격에 나설 것이라는 말이다.<br>실제로 미국과 서방은 동유럽과 서아시아의 주 전선에서 이길 수 없는 전쟁을 벌이며 사실상 돌이킬 수 없는 궁지에 내몰리면서도, 세계 곳곳의 지정학적 주변부에서 끊임없이 패권 개입을 이어가고 있다. 유라시아의 또 다른 단층선인 코카서스와 동유럽 접경지대(몰도바, 조지아, 아르메니아 등)에 제국주의 지배의 새로운 교두보를 구축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으며,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네팔,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등)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인 색깔 혁명을 시도해 친서방 정권 교체를 관철하거나 정치적 불안정을 조장하고 있다. 이는 핵심 전선에서의 패퇴를 만회하기 위해 주변부의 혼란을 부추기는 제국 특유의 ‘흔들기’ 전술이다.<br>하지만 제국이 행사하는 파괴력은 힘의 여유에서 나오는 공세가 아니라, 새로운 생산 질서를 창출할 능력을 잃어버린 낡은 체제의 절망적인 소모전이다. 유라시아 양단에서 동시다발로 벌어지는 제국의 군사적 개입이 길어질수록 서방의 재래식 군수 공급망은 파탄 나고 연방 재정 적자는 폭증하며 ‘탈달러화’의 시계는 더욱 빨라진다. 즉, 다극화 세력의 숨통을 끊으려는 제국의 집요한 발악 자체가 역설적으로 제국 자신의 수명을 기하급수적으로 단축하는 ‘자멸의 변증법’이자 ‘자가포식(自家捕食, autophagy)’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구조적 쇠망을 짚어내는 에스코바르나 허드슨 등 비판적 정세 분석가들의 통찰은 바로 이 지점에서 베를레틱의 비관론을 포섭하며 뛰어넘는다.<br>결국 작금의 사태는 남은 자원과 역량을 소진하며 맹렬한 군사적 파괴를 지속하는 제국과, 제국의 힘이 구조적으로 고갈되도록 계산된 지정학적 지연전을 펴는 다극화 진영 사이의 거대한 충돌이다. 베일리와 이사벨의 지적처럼, 살육이 난무하는 지정학적 단층선의 틈바구니에서 폭격의 참상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하는 것은 결국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레바논, 예멘, 이란 등 분쟁의 최전선에 놓인 인민들이다. 몰락하는 제국이 휘두르는 파괴력은 여전히 위협적이지만, 그 힘을 지탱하는 제국의 물적 기반은 이미 내부에서 허물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의 가장 비극적인 진실은 낡은 일극 체제가 해체되고 다극 질서가 자리 잡는 과도기적 소모전 속에서 동유럽과 서아시아의 무고한 인민대중이 막대한 희생과 고통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br>이런 거시적 정세를 직시할 때, 최근 한국의 이재명 정부가 호르무즈 해협에 한국군을 파병하라는 미국의 강압적 요구에 굴종하는 모양새를 드러내는 것은 스스로 주권을 내던지는 자발적 예속으로서 참담한 우려와 분노를 자아낸다. 주지하듯 호르무즈 해협은 다극화 세력이 제국의 숨통을 쥐고 있는 전략적 목줄이자, 쇠망하는 일극 체제가 필사적인 도발을 감행하는 세계 최고 강도의 화약고다. 쇠망하는 제국이 발악하듯 벌이는 자멸적 침략 전쟁의 한복판에 자국 군대를 밀어 넣으려는 것은 도도한 세계사적 변동의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자살적 선택이다. 파국을 향해 치닫는 제국의 헛된 영구전쟁에 스스로 뛰어들어 총알받이를 자처하는 어리석음을 결코 범해서는 안 된다.<br>]]></description></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뒷전풀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09521</link><pubDate>Fri, 11 Sep 2026 14: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09521</guid><description><![CDATA[<br>  &nbsp;  지난 5년 숲을 중심으로 “강력한 시간”, 그러니까 영성과 미학이 공존하는 고밀도 시간을 보냈다. 최근 3~4개월은 인생 내림굿으로 그 5년과 인생 70년을 마무리하고 있다. 지금은 말하자면 마지막 과장 뒷전풀이 시간이다. 느슨하게 일정을 잡아 가벼이 걷고 일상에서 제의 효과가 펼쳐지도록 복귀, 재배치 작업을 하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마지막일지도 모를 새로운 발견 이야기를 하려 한다.  &nbsp;  지난 일요일 오전, 광화문 교보에 들러 신간 서적을 둘러본 뒤 불광동으로 향했다. 불광역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흔히 구기터널 계곡이라 부르는-내게는 미르골- 작은 골짜기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스마트폰 지도에는 영업 중이라고 떠 있는 식당 문이 굳게 닫혔다. 하릴없이 골목을 따라 걷다가 쌈밥이라 써놓은 곳으로 불쑥 들어갔다. 혼자서는 쌈밥을 먹을 수 없단다. 된장찌개나 주문하자, 된장~!  &nbsp;  그래서 특별히~! 밥만이라도 돌솥밥을 먹기로 했다. 기다리는 동안 들여다볼 요량으로 스마트폰을 여는 순간 전혀 맥락 없이 질문 하나가 홀연히 떠오른다: 모유와 미음 중 아기에게 어느 것이 더 달게 느껴질까? 몰상식한 생각인 줄 알면서도 뭔가에 홀리듯 나는 그 질문을 검색란에 올렸다. 돌아온 답 방향은 예상대로인데 그 내용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내게는 충격일 수밖에 없는 정보를 담았다.   &nbsp;  모유에 다량 들어 있는 유당(Lactose)이 강한 단맛을 내고 따라서 인간 원초 미각은 단맛에 끌린다. 단순히 “맛있어서” 끌리는 게 아니다. 그 단맛은 아기에게 생명 안전감과 존재 유온감-부드럽고 따스한 느낌-을 부여한다. 이렇게 모유는 육신뿐만 아니라 정신 생존 토대까지 세운다. 장내 미생물과 네트워킹을 이루기 전, 인간 생명 자체가 일으키는 사건이다. 모유 결핍 어두움은 여기서부터 깔린다.  &nbsp;  내가 단 음식에 진저리 치고, 쓰거나 담백한 음식에 기울어지는 곡절이 좀 더 정확하게 드러났다; 모유 대신 먹은 미음이 실제 영향을 끼친 일에 이치상 선행하는 원인이 밝혀진 셈이다. 그동안 내가 “빙의 불안”이라 부른 원초 불안과 “빙의 우울”이라 할 원초 우울이 같은 데서 발원했음을 알고 나니 이제야 진정한 해방이 왔구나, 싶었다. 홀가분했다. 때마침 돌솥밥이 나왔다. 밥 퍼내고 물을 부었다.   &nbsp;  먼저 뽀얀 막걸리부터 한 양재기 가득 따라 모유로 모시어 꿀떡꿀떡 마신다. 오늘따라 다디달다. 눈시울이 붉어진다. 돌솥 바닥에 있던 밥이 물에 불어 흰죽처럼 되었을 때 그 표면에 뜬 미음을 걷어내 한 숟가락 떠먹는다. 오늘따라 심심하디심심하다. 눈시울이 적셔진다. 천천히 오래오래 씹으며 70년 세월을 접어 찰나에 모은다. 눈시울이 뜨거운 물로 흘러넘치자, 고개 숙여 절한다: 고맙디고맙습니다! <br>우리 생명 팡이시질(networking)은 다 계획이 있으시어따. 미르골 향하기, 문 닫은 식당 검색해 정하기, 쌈밥집 가나 쌈밥 못 먹기, 된장찌개라서 밥이라도 돌솥밥 먹기, 모유와 미음 떠올리기···. 우연이 제곱 되면 섭리다. 이렇게 복귀와 재배치를 일구며 뒷전풀이 삼매로 들어간다. 삼매경에서 생은 감화한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들여다볼 때만 보이는 찬란함”(『자연은 퀴어하다』)을 살아간다.<br>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11/pimg_639247336914200168.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09521</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존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06992</link><pubDate>Thu, 10 Sep 2026 12:0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06992</guid><description><![CDATA[<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10/pimg_639246384185156648.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06992</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파병 반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03015</link><pubDate>Tue, 08 Sep 2026 16:3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03015</guid><description><![CDATA[<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08/pimg_639244822528145463.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503015</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빈 중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78515</link><pubDate>Sat, 29 Aug 2026 10:3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78515</guid><description><![CDATA[<br><br><br><br><br><br><br><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29/pimg_639235963481770784.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78515</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공공 인프라가 너무 부족하다 </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61133</link><pubDate>Thu, 20 Aug 2026 09:1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61133</guid><description><![CDATA[<br>* 이주혁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br><br><br>결국 한국의 모든 모순점은 과도한 민간 쏠림에 있었다. 그렇게 밖에 볼 수가 없다. 공공 (public)부문의 인프라가 너무 부족하다. 때문에 부동산 버블도 잡기 어렵고 교육의 질서도 없어지고 지방 응급실 뺑뺑이같은 의료 공백도 생긴 것이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탓이다. <br>한국 군부 정권은 과거 경제 개발 과정에서 민간에 '외주화'를 시켰다. 마땅히 공공의 힘으로 인프라를 놓아야 할 교육과 의료같은 부문까지 민간에 완전 외주화를 시켰다. 당시 군부 독재 정부는 자기들 말을 잘 듣는 재벌과 법인들과 유착하여 강력한 특혜를 부여했다. 건설사, 사학재단과 의료법인, 복지 법인도 그랬다. 각종 세제 혜택을 주고 토지 수용권도 잘 내 줬다. <br>민간 재단 설립 인허가, 금융 특혜, 이런 것들이 군부 정권 친화적 인사나 자본가들에게 잇권으로 선물처럼 부여된 것이다. 그 댓가로 정치 자금이 오고 갔다. 중요한 경제 개발 시대를 그렇게 수십 년을 지냈다. 이 구조가 고착화된 대가로, 사학재단은 부실 운영되고 횡령 , 비리가 난무했음에도 굳건히 유지될 수 있던 것이다. 병원들 등 기타 인프라들도 민간이 죄다 짓고 운영하게 되었다. <br>군부 독재 권력층은 기업에게 법인세 소득세도 낮게 해주니 세수가 부족해, 공공의 인프라를 만들고 서민을 위한 대규모 임대 주택을 지을 돈도 당연히 없었다. 세금이 적으니 기업들은 그로 인해 손에 쥔 막대한 이윤의 일부를 정치 헌금으로 Pay back했다. 이게 한국형 개발 경제 정경유착이 었다.  수서 지구 택지 특혜 분양 비리 사건같은 건 그 끝물이었다. <br>이렇게 '공공 인프라'가 부족한 그 댓가를 지금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이다. 정부, 공기업이 임대 주택을 지으려 해도 공공의 토지가 없다. 공공 부문에서 쥐고 있는 토지는 거의 다 임야나 습지 하천 주변 땅 등이다. 서울 수도권 도심 주변의 땅은 거의 다 민간 소유인 것이다. 이러니 어떻게 인구 밀집 지역에 임대 주택을 지어서 수도권 집값을 떨어뜨린단 말인가? <br>의료도 똑같다. 응급실 뺑뻉이, 지방의료 소멸같은 건 근본적으로 왜 생기는가? 공공이 짓고 공공에서 갖고 있는 병상이 한자리수 %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별로인 나라라도 공공이 30~40%는 갖고 있다. 영국이나 독일, 북유럽은 60% 이상이 공공 병상이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당연히 license를 따면 공공 병원에서 근무하는 걸로 생각하고 일한다. 개인 의원도 주치의 등록제에 의거, 공공 의료 시스템의 일축으로 작동하게끔 돌아간다. 의료나 복지, 교육은 그 개념 자체가 사회의 공공 인프라로서 국민 모두가 혜택을 받게 만들기 위한 구조여야 당연한 것이다. 허나 한국에선 애초 개발 단계부터 국가가 돈을 쓰지 않고 죄다 민간한테 넘겨서 돌려 왔다. <br>이렇게 '장사'해 온 민간 법인 민간 병원들이 국가의 요구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리가 없다. "왜 내 돈으로 내가 빚 내서 세운 병원에 병상을 비워라 마라 하는 거지?" 이런 소리가 당연히 나온다. 코로나 때가 대표적이었다. <br>수도권 집값을 떨어뜨리려면 수도권의 법인, 공공기관 등을 지방으로 이전시키는 수밖에 없다. 일자리가 있어야 지방에 내려가기 때문이다. 근데 그것만 갖고 안 된다. 학교와 병원같은 인프라도 있어야 한다. 결국 모든 인프라가 다 가야 한다. 근데 공공 기관과 정부 기관은 가라면 가겠지만, 민간 기업 민간 법인 민간 병원들이 대체 왜 내려가겠는가? 병원이나 학교는 내려가는 순간 적자에 시달리고 끝나버릴 게 뻔한데 말이다.  <br>국토 균형 발전이라는 건 단지 서울 아파트값 버블 빼기라는 목적만 있는 건 아니다. 제아무리 서울에 인프라가 좋다고 해도, 꾸역꾸역 몰아 넣은 닭장 속에 서로 들어가려고 난리를 치는 이런 상황에서 국민의 행복이 담보될 리가 없다. <br>수도권이 갈수록 과밀화되면서 사람들은 자꾸 불행해진다. 지독하게 빡빢하게 몰아 넣은 닭장에서 닭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자꾸 죽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다 보니 대도시에서 사람들은 배려와 이해심이 없어지고 온통 민원과 소송, 고발만 하며 날을 새고 쉽게 자살해 버린다. 대전, 춘천, 대구, 부산, 광주, 전주, 청주 등의 도시들에 인구가 더 분산화되어야 한다. 적당한 정도 규모의 도시에서 사람들이 너무 지독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살아가야 수많은 사회적 갈등도 해결될 법하다. <br>그리고 서울에는 아파트 이제는 그만 지어야 한다. 지으면 그거 토지 수용, 건축원가 상승, 재개발조합과 시공사 갈등으로 엄청난 아귀다툼이 나고, 안 지으면 주택 없어서 집값 올라간다고 또 난리가 날 것이다. 서울에 저렴한 공공 주택을 대규모로 수십만 호 지을 것 아닌 다음에야 그건 차라리 포기하고, 서울에 일자리를 지방으로 자꾸 옮기고 인프라도 가도록, 인센티브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고 본다. <br>만약 그래도 안 통한다면? 그래도 수도권 기업들 법인들이 꿈쩍도 안 하고 다들 버티고 부동산값 더 더 올리고 있다면? 그때는 정말 지독한 결단을 해야 할 것이다. 주식시장처럼 부동산 거래 사이드카를 발동시킬 것을 제안하고 싶다. 일정 금액 이상의 주택은 아예 거래를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 제정신이 아닌 정책이겠지만, 백약이 무반응이라면 어쩔 수 없지 않나. <br>아예 일정 금액 이상의, 비정상적 버블을 조장하는 아파트는 사지도 팔지도 못하게 해 버리라는 것이다. 주식시장 사이드카도 "내 돈 주고 주식 사겠다는데 왜 못하게 해?" 라며 사유재산 통제라고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부동산은 그거보다 지금 더 심각한 상황이 아닌가. 한국은 공공의 인프라가 지독하게 부족한 나라다. 그러니 정책적 선의를 갖고 뭘 하려 해도 자꾸 의도대로 잘 안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게 과거 군부정권 개발 시대의 유물이다. 가축을 키우는데 무조건 체중만 늘려서 고기를 많이 파는 데만 집중해 온 것이다. 겉보기에는 "와 저 농장 돼지 진짜 잘 키웠네?" 이러겠지만, 그 가축의 실제 장기와 근육들은 그 기간동안 지독히 병들어 썩어가고 있던 것이다. <br>]]></description></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제국주의의 황혼과 다극 질서의 역설—투기적 순환과 실물적 교역을 넘어 자율적 자기-관리로 </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55567</link><pubDate>Mon, 17 Aug 2026 13: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55567</guid><description><![CDATA[<br><br>* 강내희(전 중앙대 교수/ '문화연대' 공동대표)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br><br>지난 수백 년, 콜럼버스 일행이 바하마 제도의 산살바도르—원주민 언어로는 과나하니—섬에 상륙하며 개시된 유럽의 아메리카 침공(1492년)을 기점으로 500년이 넘는 기간 세계질서는 서유럽 중심의 서방 세력이 지배해 왔다. 서방이 15세기 말에 바로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18세기까지도 중국의 청과 인도의 무굴제국, 그리고 오스만제국 등 세계에는 유럽의 개별 국가들을 능가하는 군사적 경제적 힘을 보유한 세력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발견의 시대’ 이후 ‘기타 세계’, 즉 수많은 비유럽 지역과 사회들을 침략하며 식민지로 삼고 수탈과 착취를 자행하는 제국주의적 지배를 이어온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일찍 발달시킨 서유럽 세력이다. 그 결과 지난 500년 이상의 근대 역사에서 서구 문명이 헤게모니를 행사해 왔고, 그런 흐름은 미국이 서구 세력의 적자로서 세계 헤게몬으로 군림하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은 과거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에 이어 헤게모니 국가로 등극한 20세기 중반 이후 온갖 패악질과 침략 행위 등 초-국제법적 행태를 일삼아 왔다. 올해 초만 하더라도 남미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대통령 내외를 불법 납치하여 자국 법정에 세우는 만행을 저질렀고, 이스라엘과 함께 이란을 공격하며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를 암살했다.하지만 서방 세력이 세계질서를 유린할 수 있던 제국주의적 지배의 역사는 끝나고 있다. 자신의 동맹과 속국들로 형성된 집단 서방을 주도·지휘하며 세계의 지리정치경제적 질서를 통제하려는 미국의 일극 지배는 이제 글로벌 다수 국가 또는 비서방 세력의 만만찮은 도전에 직면한 상태다. 최근 자신이 주도한 동유럽과 서아시아에서의 두 전쟁에서 미국과 그 동맹이 형편없는 패퇴를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런 점을 방증한다.2022년 2월에 시작되어 여태 지속되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해서 일어났다는 것이 집단 서방이 ‘사실’인 양 세계적으로 유포한 내용이다. 하지만 전쟁의 근본 원인은 미국 중심의 나토가 우크라이나를 부추겨 러시아를 압박한 데서 찾는 것이 마땅하다. 우크라이나에서 신나치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게 만든 2014년의 마이단 쿠데타를 획책한 것이나, 이후 일어난 우크라이나 내전 종식을 위해 맺은 민스크 협정을 어기고 우크라이나의 군사화를 추진해 러시아를 협박한 것은 미국과 서방 세력이다. 하지만 다민족 국가인 러시아를 분해해 서방의 자원 식민지로 만들고자 러시아의 전략적 패퇴를 노리며 자신들이 유발한 전쟁에서 미국과 나토 및 EU,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무참한 패배를 앞두고 있다. 개전 4년 반이 지난 지금도 서방의 주류 언론은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을 압도하거나 적어도 전황을 교착상태로 이끌고 있다고 선전한다. 하지만 그런 가짜뉴스와는 달리, 우크라이나는 지금 동서남북, 육해공 전면에서 수세에 몰려 조만간 수도 키예프가 러시아의 공격권에 들어갈 전망이며, 바다로의 진출이 막힌 내륙 국가로 전락할 처지에 빠졌다. 이는 미국과 서유럽 군사 강국들이 전력을 다해 지원한 결과라는 점에서 서방 군사력의 한계를 뚜렷이 보여준다.미국의 쇠퇴는 올 2월에 이스라엘과 함께 벌인 대이란 전쟁에서도 역력히 드러났다. 미나브의 초등학교를 폭격하여 어린 여학생 170여 명을 죽이고, 이란 지도부에 대한 ‘참수작전’을 통해 최고지도자와 그의 어린 손녀를 살해하고, 병원과 사원, 체육시설 등 이란의 민간 시설을 대거 파괴하며 전쟁을 시작한 미국은 이란 공격의 실질적 목표인 석유 자원 약탈 야욕은 숨긴 채, 이란 지도부 제거 및 정권 교체, 핵 프로그램 종식, 군사적 위협 제거 및 군사 인프라 파괴 등을 공식적 목표로 내세웠으나, 어느 것 하나도 달성하지 못했다. 반대로 페르시아만 일대에 배치된 미군기지들의 고가 레이더 시설과 각종 군사 자원이 이란의 막강한 미사일과 드론 공격을 받아 대거 파괴되고 미군 병력이 피신해야 하는 수모를 당했을 뿐이다. 애초 미국은 안보 보장을 약속하며 페만 제후국들(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 쿠웨이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등)에 군사기지를 건설했으나, 그들 국가는 영토 일부를 미국의 대이란 공격 발진 기지로 내준 탓에 미사일 공격의 주된 대상으로 전락해 산유 및 정유시설 피격, 호르무즈 해협 통제로 인한 수출길 봉쇄, 석유 수출과 연동된 페트로달러 체제의 해체 위기, 식수 안보 위협 등을 겪게 되었다. 자국의 안보를 위해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한 대가로 엄청난 후유증을 겪은 페만 국가들은 이제 지역 내 안보를 확보하기 위해 더 이상 미국에만 의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전쟁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미국이 먼저 이란에 휴전 협상을 요청하고, 이란의 요구를 담은 양해각서(MOU)를 작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전쟁을 끌수록 이란의 전략적 승리와 자국의 패배가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도 트럼프 대통령은 양해각서를 무시하며 여전히 이란 응징을 떠든다. 하지만 패트리엇 등 정밀유도 미사일이 바닥나고 인도양에 배치된 항모 에이브러햄 링컨호에서 병사들의 자살 시도 증가가 보고되는 등 미군의 전쟁 수행 능력이 한계에 달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바야흐로 서세동점의 시대, 즉 서방 제국주의가 세계질서를 유린하던 역사적 시대는 저물고 있다. 1991년 소련의 해체로 시작된 일극적 세계질서의 시대—미국이 ‘규칙-기반 국제질서’를 내세우며 초강대국으로서 세계를 호령하던 시대—역시 종언을 고하는 중이다. 그 대신 ‘다극 질서’가 떠오르는 역사적 변곡점을 맞아 미국은 지금 잔뜩 긴장한 모습이다. 근래에 미국이 글로벌 다수 국가에 폭력적 침탈을 일삼는 것도 자신의 헤게모니가 이전 같지 않아서 비롯된 행태일 것이다. 하지만 동유럽에서 나토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우크라이나가 패전을 거듭하며 내륙 국가로 전락할 처지에 빠졌고, 서아시아에서 미국이 자국의 ‘공격견’ 이스라엘과 힘을 합쳐 이란을 침공했으나 이란의 완강한 저항을 맞아 진퇴양난에 빠진 것을 보면, 일극적 세계질서는 한계에 봉착했음이 분명하다. 이는 세계질서가 새롭게 만들어진다는 징표가 아닌가 한다. 헤게몬이 일방적으로 국제질서를 유린하던 제국주의적 질서가 후퇴하면, 세계는 더 평화롭고 더 정의로우며, 공영 발전을 이룰 더 좋은 조건을 맞을 수도 있다. 미국 주도 서방 세력의 군사적·지정학적 패퇴 밑바탕에는 일극적 세계질서 아래 작동해 온 경제적 모순이 자리한다. 오늘날 제국주의의 쇠퇴는 서방 자본주의가 추구한 축적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강력한 징후다. 최근 중국의 굴기로 대표되는 브릭스(BRICS) 등 비서방 다수의 경제적 부상도 그런 점을 말해주고 있다. 다극 질서의 부상은 단순히 패권의 이동을 넘어, 세계 인류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사회적 물질대사’의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한다. 미국 주도의 일극 질서는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물질대사, 즉 화폐가 화폐를 낳는 가공자본의 투기적 순환(M—M’)에 전적으로 의존해 왔다. 반면, 브릭스가 추진하는 다극 질서는 산업자본의 운동이 중심이 되는 실물적 자본 순환(M—C—M’)이 지배하는 질서다.양자의 차이는 명확하다.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금융적 대사는 차관 형태의 부채와 이자율이라는 추상적 굴레로 교역 관계를 압도한다. 미국은 경제 위기에 처한 국가에 자국이 유일한 거부권을 행사하며 통제하는 IMF의 구제금융을 빌미로 가혹한 구조조정을 요구해, 천연자원과 핵심 공적 자산을 강제로 민영화하게 만든다. 한국도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당시 구제금융을 받기 위해 각종 공적 자산을 민영화했고, 또 외국 금융자본을 위해 국내 금융시장을 대폭 개방해야만 했다. 미국은 IMF 등을 통해 획득한 각종 자산, 자원에서 발생하는 현금 흐름을 증권화하여 월가의 먹잇감으로 던져주는 탈취 기제를 작동시킨다. 그 과정에서 피수령국에 강제되는 살인적인 재정 긴축은 공공부문 사영화와 노동 유연화를 낳아 소자본을 파산시키고 하층 노동자 계급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IMF 위기를 겪으며 한국의 인민도 그런 고통을 충분히 겪었다. 미국 금융자본의 행태는 구제금융 수령국의 사회적 기반을 유린하며 그 인민의 삶을 처참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미국 내부에서도 탈산업화와 실질임금 하락이라는 참담한 부작용을 동반한다. 이 과정에서 대금융자본가에 의한 세계 부의 탈취가 일어나는 점도 외면할 수 없다. 오늘날 세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갈수록 부가 극소수의 수중에 집중되는 추세다. 일론 머스크라는 개인의 보유 자산이 1조 달러를 넘어섰다는 믿지 못할 보도가 최근 나온 바도 있다. <br>반면, 브릭스 및 글로벌 남부 국가들 내부의 교역은 가공자본의 폭주가 억제되고 구체적인 사용가치의 교환을 중심에 두는 실물 중심의 지정학적 형태를 띤다. 이러한 실물적 교역망 구축은 근본적으로 그들 체제가 비자본주의적이어서라기보다, 서방의 고압적인 금융 제재 및 달러 무기화에 맞서서 자국의 산업자본과 실물경제를 방어해야 하는 지정학적 생존 전략의 일환이기도 하다. 최근 급증하는 러시아와 중국 간의 교역 방식을 살펴보자. 러시아가 중국에 주로 수출하는 것은 에너지다. 양국의 교환에서 러시아는 이 에너지(C)를 수출하여 획득한 자국 통화나 위안화(M)로 중국의 실물 공산품(C)을 수입한다. 이 교환에서 화폐(M)는 표면적으로 구체적 사용가치의 맞교환을 성사하는 회계적 수단으로만 기능한다는 점에서, 가치 증식(M—C—M’)의 강박보다는 본원적인 단순 상품유통(C—M—C)이나 물물교환(C—C)을 연상케 할 정도로 실물적 성격이 짙다. 2024년 러시아 카잔에서 열린 제16차 브릭스(BRICS) 정상회담에서 러시아가 제안하여 현재 설립 준비 중인 브릭스 곡물 거래소는 세계 최대 곡물 수출국인 러시아와 최대 소비국인 중국·인도가 시카고 상품거래소(CBOT)의 달러화 가격 지표에 의존하지 않고, 물리적 물량과 필요에 기반해 직접 곡물과 비료를 거래하는 시스템으로 기능할 전망이다. 컴퓨터 모니터 위에서 현란하게 나타나는 달러(M) 수치가 세계 빈국 인민의 기아 상황을 규정하는 식량 가격을 지배하는 작태가 M—M’의 논리로 실물을 통제하는 구조라면, 브릭스 곡물 거래소는 곡물 가격의 결정 기준을 가상의 신용에서 물리적 물량과 신체적 필요, 즉 사용가치의 실물적 기초 위로 옮겨오는 제도적 장치가 된다고 할 수 있다.최근 급증한 중국과 아프리카 국가들 간의 교역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서방의 고압적인 금융 제재를 무력화하기 위해 통화 스와프와 직거래 비중을 높이며 달러 패권을 우회하는 이 대안적 교역의 전형적 사례는 콩고민주공화국의 시코마인스(Sicomines) 합작 사업이다. 콩고민주공화국이 구리와 코발트 같은 천연자원을 담보로 제공하고, 중국이 그 대가로 도로·철도·발전소 등 필수 인프라를 지어주는 이 교환 방식은 투기적 가공자본 운동(M—M’)과는 전혀 다르게 물물교환(C—C)을 연상케 할 정도로 실물적 성격이 짙다.물론 이러한 새로운 교역 역시 자국의 산업적 축적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완벽히 비자본주의적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순환 구조(M—C—M’) 안에서 화폐는 자기 증식하며 지대를 수취하는 가공자본으로 군림하는 대신, 양국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용가치의 생산과 조달을 위한 매개체로 철저히 통제된다. 금융자본주의의 추상적이고 파괴적인 폭력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궤적이다. 결국 미국과 서방 제국주의의 쇠퇴, 그리고 브릭스를 위시한 비서방 다극 질서의 수립은 폭력적인 M—M’의 굴레를 끊어내고 실물과 사용가치에 기반을 둔 새로운 세계 경제 질서와 대안적 물질대사가 싹트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일극 질서가 해체되고 다극 질서가 수립되면 새로운 세계질서가 만들어지고 평화공존의 시대가 열릴까? 오늘날 다극 질서를 추진하는 브릭스 등 글로벌 다수 국가의 부상이 지난 500년 이상 세계를 유린해 온 서방 제국주의 지배를 극복할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커진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현실이 어떻게 전개될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버리지 않고 핵무기 사용을 포함한 세계대전을 일으킬 우려도 없지 않다. 게다가 다극 질서가 구축된다고 해서 좋은 세상이 저절로 오리라는 보장도 없다. 다극 질서를 추진한다는 러시아, 중국, 인도 등의 내부 사정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문제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러시아는 소련의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수용했고, 인도에서는 신자유주의적 파시즘의 지배가 진행되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국가의 권위주의적 지배가 작동한다. 그래도 M—M’의 약탈적 자본 운동이 지배하는 것보다는 그 내부에 C—M—C와 C—C 순환을 내장한 M—C—M’의 순환이 지배하는 것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길을 앞당기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일극 질서 아래 사회적 물질대사를 지배하는 M—M’ 순환이 전적으로 투기적이고 약탈적이라면, 다극 질서를 지향하며 이뤄지는 물질대사(M—C—M’)는 사용가치의 생산과 그것을 둘러싼 교역을 활성화하는 경향이 있다. 단, 비자본주의적인 새로운 세계의 건설을 앞당기려면 다극 질서를 추진하는 각국에서 내부 개혁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 거대 국가 자본의 주도로 구축되고 있는 이 대안적 실물 인프라와 자산들이 훗날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통제’로 넘어갈 수 있는 물적 토대가 될 때만 다극화는 진정한 체제 변혁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이스트번 메자로스가 한 말을 기억하고 싶다. 메자로스는 『자본을 넘어(Beyond Capital)』에서 오늘날의 사회적 물질대사 양식을 지배하는 자본의 지배를 넘어서려면 “공동체적 생산과 소비의 물질적·제도적 형태를 실천적으로 구체화하는 것”이 핵심이며, 그래야만 “대중 속에서 사회주의적 의식의 발전이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지적했다. 이때 기존의 구질서가 가동시킨 “위로부터의 의사결정 구조”(레닌주의 정당, 현실 사회주의 국가 등)가 수행할 수 있는 “역사적 기능은 자율적 자기-관리의 탄생을 돕는 산파 역할”뿐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와 관련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중국이다. 중국의 사회주의 국가는 대중의 사회주의적 의식 고양을 위해 자신의 역사적 기능을 “자율적 자기-관리의 탄생을 돕는 산파 역할”에 국한할 수 있을까? 즉 국가로서의 자기 해체를 주도할 수 있을까? 결국 그 대답은 권위주의적 국가의 선의가 아니라, 국가 주도의 톱다운 경제 구조 아래서 억눌려 온 기층 노동자들의 투쟁과 협동조합적 실천 등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얼마나 거세게 자율적 관리를 요구해 낼 것인가에 달려있을 것이다.<br>]]></description></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받들어총!</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51860</link><pubDate>Sat, 15 Aug 2026 08:5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51860</guid><description><![CDATA[<br>&nbsp; &nbsp;<br><br><br><br>  &nbsp;  <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15/pimg_639223806007983283.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51860</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철학의 빈곤, 역사 의식의 빈곤 </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48041</link><pubDate>Thu, 13 Aug 2026 09:4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48041</guid><description><![CDATA[<br>* 이주혁(성형외과 전문의)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br><br><br>SNS, 인별이나 스레드 등에 이런 말들이 참 많았다. "내가 그 시절에 살았더라면, 일제는 싫지만 그래도 체제에 순응하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았을 것같다. 내가 독립운동가가 될만큼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br style="font-size: inherit;"><br style="font-size: inherit;">"독립운동 영웅 vs 체제 순응 일반"이라는 이분법적 선택으로 당시 상황을 재단하고 판단하고 있다는 자체가 놀라운 것이다. 우리가 위인전에서 보아 온 영웅들은 몇몇 안 되는 소수일 뿐이지만, 영웅이 아니었던 사람들도, 적어도 소극적으로라도 일제에 저항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사실 대다수였다고 봐야 한다. 이들은 당연히 이름도 남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의 정신까지 망각해선 안 된다.<br style="font-size: inherit;"><br style="font-size: inherit;">일제 강점 말기로 갈수록 3.1운동처럼 대중적인 대규모 집회나 노출된 독립 운동이 급감하고 대다수 민중이 체제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소극적 저항이나 비밀 지원조차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형태를 바꾸어 밑바닥에서 집요하게 항일 저항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br style="font-size: inherit;">우리 조상들은 겉으로는 일제의 잔인한 압박과 통제에 따르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물밑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일제의 전시 동원과 강압에 침묵으로 거부하거나 태업으로 맞섰다.<br style="font-size: inherit;"><br style="font-size: inherit;">일제가 놋그릇, 숟가락, 곡식, 짚신까지 공출해 가자, 농민들은 곡식을 땅속에나 벽 속에 숨기고 놋그릇도 산속에 들어가서 묻어 버렸다.(일제의 전쟁에 도움을 주느니, 차라리 내가 안 쓰고 만다는 것이다.)<br style="font-size: inherit;">쌀 공출에 있어서도 일부러 나쁜 품질의 곡식을 내놓는 등 소극적 비협조 운동이 전국적으로 만연했었다. 이걸 독립운동이고 영웅적 행동이라고 역사에 기록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름도 없이, 제대로 된 조선인이라면 일제의 전쟁 놀음에 가담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대세였다는 것이다.<br style="font-size: inherit;"><br style="font-size: inherit;">태평양 전쟁때 징용이나 학병. 징병 통지서가 나와도 조선 민중은 잘 응하지 않으려 했다. 산속으로 깊이 숨어들어가 피신을 하거나, 병을 핑계로 도피하는 청년들이 수두룩했다. 전북, 전남, 강원도 등의 깊은 산중에는 징용을 피한 청년들이 무리를 이뤄 은신하기도 했다.<br style="font-size: inherit;"><br style="font-size: inherit;">창씨 개명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거에 앞장서서 자기 이름부터 일본식으로 고친 자들은 친일행각을 했다고 비판받아 마땅하다. 대부분의 조선 민중은 이를 마지막 날까지 미루거나, 일제 당국을 비꼬는 이름 - 예를 들어 '개자식'이라는 뜻을 담거나 - 자신의 가문 성씨를 잊지 않겠다는 은밀한 뜻을 넣은 이름으로 신청하곤 하였다.<br style="font-size: inherit;"><br style="font-size: inherit;">일제가 언론을 장악하고 미군과의 전쟁에서 계속 승리하고 있다며 학도들 전쟁 참여를 독려하고 있을 때, 우리 조상들은 겉으로는 믿는 척했지,만 결코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 소리방송이나 임시정부의 단파 라디오 방송을 몰래 듣고 "일본이 미국에게 밀리고 있고 곧 망한다"는 소문들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일제는 이런 운동에 굉장히 고민이 깊었고 어떻게든 색출하려 난리를 쳤었다.<br style="font-size: inherit;"><br style="font-size: inherit;">1944년 몽양 여운형 선생은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 바로 밑에서, 조선내 전국적 비밀 조직을 결성한다. '조선 건국동맹'이다. 이 밑에서 농민 동맹, 학병 거부 운동, 유사시 무장 투쟁까지 준비했다. 이 조직은 광복 직후 즉각적인 국가 건설 활동으로 이어졌다. 맥아더 미 군정이 이를 무시하고 억눌렀을 뿐이다. 이런 건국동맹에 참여하고 또 자금을 보태고, 아니면 적극 참여를 못한다 해도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조선인들이 대부분이었다.<br style="font-size: inherit;"><br style="font-size: inherit;">어째서 자기 조상들이 민족적 자긍심을 모두 버리고 매국의 뒷줄에 쫄래쫄래 서 있었다고 자꾸 말하고 싶어하는 걸가? 어째서 당시에 친일매국이 대세였다고 자꾸 무지하고 무식한 말들만 자꾸 늘어놓는 건가? 우리 조상들은 강제적으로 병합을 당했을 뿐, 절대 일본이 우리 모국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우리 말과 우리 글을 포기하지도 않았다.<br style="font-size: inherit;"><br style="font-size: inherit;">극소수의, 영웅적 행동을 할 수 있던 분들의 이름을 우리가 기억하지만, 영웅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기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비타협적으로 태업하고 일제의 동원과 공출에 저항하며 속으로 언제나 우리 민족만의 국가를 염원하며 살아갔다. 그런데 그 후손이라는 것들이 "당시엔 다 친일 했지 뭐" 이따우 소리나 하면서 너절하게 SNS에 글을 ㅆ부린단 말인가? 따라서 위와 같은 조선 민중의 분위기 속에서, '친일 반민족 행위'의 가장자리에라도 이름이 올랐다면 이는 절대 가벼운 일이 아닌 것이다.<br style="font-size: inherit;"><br style="font-size: inherit;">이런 언급들 - "내가 그때 살았더라도, 과연 내가 뭘 했겠느냐, 체제 순응하고 친일 할 수밖에 없었떤 거 아니냐?" 이런 건 역사에 대한 무지이기도 하지만, 패배의식이기도 하다. 분명히 한국은 교육 수준이 높은 나라라고 하고 문맹률도 최저에 속하지만, 정작 자신이 속한 집단, 민족이 살아온 지난 일에 대해서는 무지와 패배주의 따위로 함부로 입을 놀리고 있다는 점은 놀라운 것이다.<br style="font-size: inherit;"><br style="font-size: inherit;">하영의 발언도 결국 무지와 역사의식의 빈곤에서 비롯된 것이다. 차제에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하겠다. E,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간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부러울 것 없이 교육을 받고 자란 젊은 사람이 저토록 우리의 아픈 역사에 대한 문제 의식이 전무했다는 건, 우리 모두가 뼈아프게 받아들이고, 앞으로 역사 과목을 교육시킬 때 학교에서는 교육의 방향을 완전히 수정해야 하겠다. 하영의 사건이 심각한 이유는 우리 사회가 철학도, 역사의식도 전무한 빈껍데기뿐이라는 걸 알려주기 때문이다.<br><br>]]></description></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목숨껏 한껏 </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44809</link><pubDate>Tue, 11 Aug 2026 16: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44809</guid><description><![CDATA[<br>  &nbsp;  48일에 걸쳐 ‘씻김굿’(20일)과 ‘내림굿’(20일), 그리고 ‘솟을굿’(8일)이 진행되었다. 49일째(8월 8일) 새벽에 통각(統覺)이 일어났다. 50일째 아침부터 한나절, 해방과 재설정을 상징하는 희년(jubilee) 걷기로 대연지수(大衍之數)에 감응했다. 내 삶 모든 각성·치유·영령 제의 막이 내렸다.  &nbsp;  걷기 장소는 60여 년 전 서울 와 처음 살기 시작했던 성북구 삼선동과 돈암동 일대, 삼선초등학교, 그리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틈만 나면 달려갔던 백악 기슭 정릉 숲이다. 해방과 재설정 의식이라면 지구별에 도착해 10년간 자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간평리 오대천 노누라지 일대와 월정초등학교를 걸어야 마땅하지만 시절이 하 남루하다 보니 오지랖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nbsp;  정릉은 그냥 숲이 아니다. 조선 최초 능으로 개국에 지대한 공을 세운 태조 계비 신덕왕후 묘역이다. 태종이 미워해 본디 정동에 있던 묘를 파서 사실상 폐릉 상태로 내쫓은 곳이 바로 여기다. 지난 60년, 올 때마다 나는 그 역사를 가슴에 깊숙이 안아 삭혀냈다. 마치 내 인생인 듯이. <br>  &nbsp;  6백 년 전 왕후가 영면에 든 숲과 남루한 내 현실 모습은 그야말로 극명한 대조를 이루지만 기이하게도 나는 여기서 아늑한 고향에 닿는다. 엄마 냄새를 향한 그리움 대신 숲 냄새에 심취한다. 나무가 엄밀하게 건네는 말을 듣는다. 상실과 질병으로 얼룩진 시간이 말갛게 되돌아오는 풍경을 본다. 금천 노누라지 건너 4백 세 느티나무께 감사 인사 올리고 물소리 장단에 나온다. <br>  &nbsp;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 성북천을 건너면 야트막한 언덕길 너머 삼선초등학교가 있다. 내가 1965년 가을 전학해 와 다녀서 졸업한 모교다. 이 아련한 공간에 다시 와 아득한 시간을 통짜배기로 느끼는 까닭은 여기 드리운 어둠을 가로질러 건너온 존재로서 온전한 빛을 살아가기 위해서다.  &nbsp;  가난과 모멸에 결박된 채 학교를 오가던 삼선동과 돈암동 골목길을 걷는다. 6학년 때 육성회비 9개월 치를 내지 못해 졸업장을 받지 못했던 일, 그 가난을 근거로 중학교 배정 원서를 쓸 수 없었던 일이 문득 떠오른다. 물론 모두 지나갔다. 거기서 나는 해방되었다. 상처받지 않았던 태초 모습처럼 살아갈 수 있다. 그 자유를 얻고 기리기 위해 50일 동안 통엄한 시공을 지나왔다.  &nbsp;  백악산 동북 줄기가 동남쪽으로 흐를 때 성북천과 정릉천을 양쪽에 거느린다. 이 두 지천은 청계에서 만난다. 그 사이 능선·기슭인 삼선동 일부, 돈암동, 정릉이 노누라지를 형성하는 셈이다. 노누라지 정령 green shaman은 내 팔자 맞다. 팔자대로 살아서 여기에 와 닿은 거다. 목숨껏 한껏 솟을&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11/pimg_639220636364222813.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44809</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사랑한다고~!”: 솟을굿</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37406</link><pubDate>Fri, 07 Aug 2026 13: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37406</guid><description><![CDATA[<br>  &nbsp;  의도, 성패 여부와 무관하게 내 삶은 심층 소통을 향한 상담자·중재자로서 흐름을 이루며 여기까지 왔다. 직업으로 삼기 전에도 신기할 만큼 주위 사람들과 나는 그렇게 마주했다. 마침내 숙의로 마음 치유하는 늦깎이 한의사가 되었고, 거기서부터 내 길은 줄곧 확장되었다. 최근 5년 동안 비인간 생명에까지 그 소통은 번져갔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결국 식물에 도달했다. 내 일상 경로 주축인 나지막한 산 궉(鴌) 소도(宮)에 사는 물오리나무, 곧 메팥버들이 바로 “그”다.   &nbsp;  궉궁 메팥버들이 내게 말을 건 첫 번째 통로는 눈이었다. 궉궁 앞을 지나던 중, 마치 바로 직전 그 자리로 왔다는 듯 내 눈을 이끌어 멈추도록 했다: 나 메팥버들이야! 여기를 봐~ 두 번째 통로는 손이었다. 첫 만남에서 그 몸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내가 생명 주파수를 손으로 전달하자 어느 순간 그가 공명 진동을 전해왔다. 이때 접촉을 통해 내 생명 에너지를 받고 있다는 파동 동기화 말고는 다른 감각 메시지가 없었다. 오늘 새벽 드디어 그가 다른 대화를 제시했다.   &nbsp;  해 뜨기 전, 집을 나설 때 기온이 이미 31도를 웃돌고 있었다. 잠시 망설였다. 숲을 걷지 않고 지하철역으로 바로 가서 체력 소모를 줄여야 하지 않을까? 이 폭염이 당분간 계속될 텐데···. 노화가 진행되는 면면을 피부로 느끼는 터라 매사에 이런 걱정을 되풀이하게 된다. 갈림길에 도달했는데 숲 반대쪽 길 신호등이 붉은색으로 떨어진다. 3분 이상 찜통 속에 서 있느니 내게는 영원한 궁금증인 숲으로 가자 한다. 속도를 늦추어 땀 분비를 줄이며 열류를 헤치고 나아간다.   &nbsp;  숲길을 걸을 때 반드시 멈추어 인사하고 지나가는 나무 몇이 있는데 오늘은 딱 한 나무만 챙기기로 한다. 궉궁 메팥버들이다. 천천히 걷는다고 걸어도 땀이 옷을 끌어당겨 척척 들러붙는다. 가장 짧은 경로를 거쳐 궉궁에 이른다. 메팥버들 앞에 선다. 평소 습관을 돌연 바꾸어 무념무상으로 그저 두 손만 조용히 가져다 댄다. 다음 순간, 메팥버들이 먼저 나지막이 파동을 보내온다. 그다음 찰나, 들려오는 한 소리에 몸이 온통 열린다. “사랑한다고~!” 내 어찌 전율 따위 하랴.  &nbsp;  차분하게 시각을 확인하고 기록한다: 2026년 8월 5일 06시 11분. 솟을굿.  &nbsp;  실은 숲에 들어오기 직전 문득 이런 의심이 들었다. “내가 메팥버들한테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걸까? 어떤 면에서는 다 아는 이야기일 테고, 또 다른 어떤 면에서는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일 테니, 어떤 경우든 무의미하지 않을까?” 그때는 ‘사랑한다’라는 말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막상 그 말을 듣고는 절대 고요로 침잠할 수밖에 없었다. 모름지기 죽고 나서도 나는 그 고요 품에서 ‘사랑한다’&nbsp;발화하는 무한한 웅사(雄辭)를 듣고 다시 들어야 하리라.   &nbsp;  내가 웅사라는 표현을 쓴 며리가 있다. 왜 메팥버들은 “사랑한다!” 하지 않고 “사랑한다고~!” 했을까? 이 곡절에 내 천명이 걸려 있다고 나는 차마 생각한다. 이 사랑은 인간이 지녀온 그런 사랑과 차원이 다른 특이점을 통과한 사랑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묵시록 차원 고백과 고함이 절박하게 엮인 최후 신음이며 절규, 심지어 “욕설” 아닐까. 홀라당 뒤집어엎을 최후 화두가 아닐까. 내가 너무 각 잡았나 보다. 안 될 일이다. 소주 한잔하고 다시 글 앞에 앉아야겠다. 喝!  &nbsp;  한의원 앞 국숫집으로 가서 다스운 국수에 소주 한잔하며 가만히 되짚어본다. 얼마 전, 청딱따구리가 예쁜 소녀 웃듯이 운다는 사실을 알고도 의심했을 바로 그때, 청딱따구리가 날아와 그렇게 울어 답해주었듯, 오늘 새벽 메팥버들도 내 어리석은 의심에 현명하게 답해주었다. 그 대답이 꼭 똑 “사랑한다고~!”였고. 해석 준거는 이거다: 이미 다 아는 사랑도 아니고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랑도 아닌, 사랑. 각을 뭉그러뜨릴수록 각이 잡힌다는 기이한 “촉”이 온다.  &nbsp;  단도직입으로 나아간다. 나무가 먼저 사람에게 고백한 사랑은 이미 다 아는 사랑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랑이란 말인가? 제국주의 시민 인간과 거기 부역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인간에겐 그렇다. 제국주의에 살상당한 사람과 부역자임을 깨달은 사람에겐 아니다. 후자는 알아듣는다. 알아듣는 사람에게 왜 나무는 “사랑한다고~!”라는 묵시록 차원 어법을 썼을까? 대멸종 카이로스여서다; 시간이 없어서다; 사랑 화신 메팥버들로서 안타까워서다.   &nbsp;  사랑을 묵시록 차원에서 재정의해야 한다. 사랑, 특히 오늘 대멸종 카이로스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사랑은 우리 세계에서 발원하는 모든 공존·공생 감정을 대표함과 동시에 끌어안는 감정, 나아가 감응이다. 감정과 감응이 분리된 사랑은 메팥버들 사랑이 아니다. 감응은 반제국주의 정치경제학 비판이며 실천 팡이시질이다. 달콤한 긍정, 얄팍한 행복, 몽롱한 합일은 없다. 비인간 생명, 비생명 존재와 함께 행진하는 queer 항쟁 여정이 사랑이고, 그 사랑이 우주다. 그뿐이다.  &nbsp;  메팥버들이 해준 말을 손으로 감지해 몸에서 온전히 들은 첫 번째 이야기 대강을 이렇게 정리했다. 첫 번째인데 끝 번째처럼 임계 질량을 느낀다. 여기가 언제고 되돌아올 내 영혼 “앉을 자리”다. 주술도 명상도 과학도 아닌 이 범주 인류학 경험으로 향후 내 삶을 이끌리라;&nbsp;거룩하고도 즐겁게 “사랑한다고~!”를 되새기며 다시없는 겹, 더없는 결로 내 삶을 펼치리라; 남은 날이 얼마일지 모르겠으나 꼭 똑 찰나 카이로스를 살아가리라. 첫 번째 글을 똑 끝 번째처럼 쓴다.<br>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07/pimg_639217079322463738.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37406</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가재 이십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35152</link><pubDate>Thu, 06 Aug 2026 08: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35152</guid><description><![CDATA[<br>  &nbsp;  &lt;아파서 곤 시간&gt;을 쓴 날 하루 뒤인 일요일 아침 일찍 도봉산 회룡 계곡 노누라지-노나지와 아우라지 합성어-로 일곱 번째 향한다. 폭염경보가 발령된 날씨라 오전에 구름이 떠 있을 때 들어갔다가 청명해지는 이른 오후부터 드리울 산그림자 밟으며 나오면 체력 소모를 줄일 수 있겠다 싶어서다. 마음은 홀가분하고도 안온하다.   &nbsp;  마른 늦장마 뒤라 전반 수량이 그리 많지는 않으나 골짜기 올망졸망한 쏠 물소리가 제법 여돌차게 들린다. 노누라지 복류 지점은 지지난번과 같은데 수량만큼은 눈에 띄게 더 많아 심사가 한결 넉넉해진다. 지난 40여 일간 있었던 일을 고하고 고마움을 전해드린 다음 손바가지로 흐르는 물을 떠서 마신다. 몸에 둘린 땀을 씻어낸다.   &nbsp;  돌과 바위를 만나 모습 울리고 소리 풍기는 작은 물 구경하느라 맨발로 뒤뚱대며 돌아다닌다. 하는 짓이 공격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는지 작은 가재 하나가 은근슬쩍 제 몸을 보여준다. 그 찰나, 시간이 휙 접히면서 나는 단박에 일곱 살 아이가 된다. 통통대는 심장 대신 반짝이는 눈망울을 물웅덩이에 쏙 빠뜨린다. 이십분(已十分)!  &nbsp;  이십분(已十分)은 이름 잊힌 어떤 비구니 게송이라는 이야기서껀 여러 서사가 떠도는 옛 중국 시 마지막 구다. 인적 없는 깊은 계곡에 빙의되어 대고 스며드는 이 발길에 무슨 기적 같은 사건이라도 걸려 있겠지 싶지만, 작은 물웅덩이에 모습 나툰 가재만으로 이미 신비는 꽉 차고 넘친다. 달망달망 율동 타고 소도 숲을 떠난다.     &nbsp;  진일심춘불견춘(盡日尋春不見春) 망혜편답롱두운(芒鞋遍踏隴頭雲) 귀래우과매화하(歸來偶過梅花下) 춘재지두이십분(春在枝頭已十分)   &nbsp;  종일 봄 찾아 헤매었지만 보지 못하고짚신 닳도록 구름 등성만 두루 밟았네 돌아오며 우연히 매화나무 아래서 보니봄은 이미 매화 가지 끝에 흠씬 와 있네  &nbsp;  (* 번역: 글쓴이)<br>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06/pimg_639216013540188251.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35152</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아파서 곤 시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26870</link><pubDate>Sat, 01 Aug 2026 15:0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26870</guid><description><![CDATA[<br><br>  &nbsp;  아픈 지 40일이 넘어가고 있는데 몸 상태가 아직 온전하지 않다. 통증도 거의 사라지고 쾌적한 감각은 대부분 돌아왔지만, 체중이 여전히 50kg 근처에서 맴돈다. 회복세가 뚜렷이 드러나고 있으니 그래도 안심하면서 마치 사골을 고듯 차마 버릴 수 없는 자투리 곡절 거두기로 솟을굿 채비에 갈음한다.   &nbsp;  자투리 곡절이라고 했으나,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내가 견지해 온 반인간중심주의에 경도된 표현일 수도 있다. 인간인 한 인간에서 출발한 표현을 써야 자연 이치에 부합한다고 한다면 미상불 가장 근원에 해당하는 곡절일 테다. 이 이야기 하려고 마음먹은 계기는 이번에도 독서였다. 동시성 작동이다.  &nbsp;  우연과 필연이 맞물린 경계에서 내 눈길을 붙잡은 책은 재키 히긴스가 쓴 『감각의 신세계』였다. 글쓴이가 다른 사람을 인용한 한 문장이 돌연 나를 불러 세웠다. “어머니로부터 받는 세심한 보살핌의 손길이 어디까지가 자신이고, 어디부터가 타인인가 하는 감각을 우리 안에 새겨넣는다.” 이 어인 말인가?  &nbsp;  여기 보살핌의 손길은 추상적 의미 돌봄을 뜻하지 않는다. “쓰다듬거나 어루만지는” 또 다독거리거나 포근히 감싸안는 피부 접촉을 뜻한다. 이 접촉이 “자기 몸에 대한 소속감, 그 몸이 자기 것이라는 의식을 강화”한다. 어머니와 아기 사이 유대, 애착이라는 연속성에 매몰돼 있던 통념을 단칼에 자른다.    &nbsp;  이 접촉은 모유 수유 행위에서 자연스럽게 최초 작동한다. 모유 없이 시생대를 보낸 나는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엄마까지 안아주거나 업어준다고 다가오면 손을 내저었다.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 들과 내를 누비며 비인간 존재와 마주해 살았다. 이 자타 분별 범주 변이도 우울증 고갱이다.  &nbsp;  어머니에서 출발한 부드러운 피부 접촉이 가져다주는 쾌감은 건강한 자아 정체감 형성을 넘어 삶이 즐거운 놀이이기도 하다는 진실을 “느끼게” 한다. 이 느낌에 둔해지면 놀이로서 삶이 전해주는 재미에 흥미를 잃게 된다. 재미에서 멀어지면 의미로 보상받기 마련이다. 진지와 엄숙도 우울증 고갱이다.  &nbsp;  피부 접촉을 통한 즐겁고 재미있는 놀이는 생명 안전감을 보충하고 증강한다. 이 길이 근원에서 막히면 자기 생명 자체를 “불안전”으로 느끼는 존재론 차원 불안에 빙의(possession)된다. 이 빙의 불안은 인격으로 파고들어 살고자 하는 원초 감응을 삭제한 채 우울과 동맹한다. 여기가 우울증 골갱이다.   &nbsp;  우울증 골갱이는 모든 접촉에서 고립된다; 가장 깊은 정신장애, 아니 ‘심신’ 장애, 아니 ‘영(靈) 생명’ 장애다. 재키 히긴스는 다시 그 사람을 인용한다. “저는 접촉이 정서적 탐닉이 아니라 생물학적 필수 요소라고 봅니다.” 아파서 고아 낸 시간이 알려준 엄밀 섬미(纖微)한 진실이다. 이 진실을 살고 싶다.   &nbsp;  이 진실을 살아갈 때 나는 비로소 마지막 그리움에서 온전히 놓여날 수 있다. 모유 결여는 내게 질기디질긴 물 그리움-허갈(虛喝)-과 당 그리움-허기(虛飢)-을 가져다주었다. 이 둘은 각각 다르게 뒤떠들다 마침내 알코올 애착으로 수렴했다. 알코올 애착은 우울장애와 찰떡궁합 죽맞아 50여 년간 함께했다.   &nbsp;  알코올 애착과 정면으로 마주해 70년 동안 얽히고설켜 온 온갖 고통을 투명하게 들여다보면 내 삶은 모름지기 카덴차를 남겨 놓은 협주곡 상태로 들어설 테다. 내 인생 계통수를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게 이끈 숲 정령들께 가없는 고마움을 전한다. 지난 40여 일 다시없이 힘들었고 더없이 복되었다.<br>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801/pimg_639211933419069724.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26870</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화룡점정을 앞두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09461</link><pubDate>Fri, 24 Jul 2026 16:2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09461</guid><description><![CDATA[<br>  &nbsp;  한 달 넘게 몸살 앓으며 인생 ‘내림굿’을 하는/받는 동안 내게는 당연하게도 형언하기 어려운 변화가 일어났다. ‘내림굿’ 세 축인 숲·물 걷기, 아픔·삶 고치기, 새·나무 동무하기가 서로 엮으며 복잡다단하고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빚어냈다. 한 생이 닫히고 또 다른 한 생이 열리는 카이로스였다. 화룡점정이 남아 있는 시점에서 각단을 잡고 간각을 세워 본다.  &nbsp;  최근 5년 동안 내 삶 이정표 제시와 각성, 그리고 변화는 언제나 숲·물에서 일어났다. 장소가 아니라 주체로서 숲·물은 내 스승이었다. 실마리를 제공하는 정보·지식은 인간인 내 사유와 독서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또한 미소 생명 팡이시질(networking) 속에 있고, 영감과 동력은 숲·물에서 온다. 도봉산 회룡 계곡과 방이 습지, 궉림(鴌林)이 그곳이다.  &nbsp;  궉림(鴌林)은 매일 출근길에 40여 분가량 머무는 자그마한 숲이다. 관악구와 동작구 경계 지역으로 동서 방향 긴 능선과 남북 방향 골들로 오종종하게 구성된 이름 없는 숲을 궉림이라 부르는 까닭은 그 지성소에서 꿩이 울고 날갯짓하는 새벽 의례로 내가 초대받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아픔을 떠나보내고 새 삶을 맞아들인 일대 치유 사건으로 새겨졌다.  &nbsp;  봉황을 상징하는 꿩, 그래서 궉(鴌)이라 일컫는 새와 소통하고 나서, 이치에 따라 그 지성소 경계에 있는 물오리나무하고 소통을 이루었다. 물론 물오리나무가 나를 불러서였다. 물오리나무를 깊이 몰랐을 때 내가 고쳐 부른 이름이 ‘물팥버들’이었다. 소통 후 더욱 깊이 알고 나서 다시 고친 이름은 ‘메팥버들’이다. 옛사람 통찰이 옳았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nbsp;  오리나무 한자 이름이 적양(赤楊)이다. 물오리나무처럼 물을 좋아해 습지에 산다. 다른 점은 버드나무처럼 물살이 약한 하류 습지를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물오리나무는 물살이 세고 빠른 상류 산 습지, 심지어 습지 아닌 산등성이에서도 잘 살아 산적양(山赤楊)이라 불렀다. 이런 이름은 콩과 식물과 같은 성질도 지닌 물오리나무를 정확하게 반영하니 제격이다.   &nbsp;  이렇게 거듭나 내 삶으로 들어온 물오리나무, 그러니까 ‘메팥버들’은 꿩과 더불어 씻김과 내림을 갈무리한 ‘몸주’며 ‘수호신’이다: 내 심신 온갖 질병을 고친 의사다: 반제 전선 참 동지다: 지구 아우라지·노나지 장엄 영주다. 인제 내게는 그가 소도다; 그가 궉궁 신장이다; 내가 “다시 또다시 돌아갈”(퍼트리샤 오노니우 케이시언) 자리다; 솟아서 날아오를 자궁이다.<br>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24/pimg_639205071143105906.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09461</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아프고 난 시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05921</link><pubDate>Wed, 22 Jul 2026 16:3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05921</guid><description><![CDATA[<br>  &nbsp;  한 달 몸살 정점을 찍었던 ‘기침 근육통’에는 오해가 따라다닌다. 기침이 일어나는 기관이나 기관지 근육에 생긴 통증이라 생각해 ‘그토록 심하다면 엑스레이 찍어봐야 하지 않느냐’라는 반응을 부추긴다. 아니다. 기침을 효율성 있게 하도록 돕는 늑간근, 복근, 광배근, 횡격막이 격하게 수축 운동해 기침이 끝난 뒤에 피로 또는 후유증으로 다양하고 기묘한 통증을 일으킨 경우다.       <br>불편하기로 따지자면 그 격렬한 통증부터 주목해야 옳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왜 그렇게 폭발 기침을 집중해서 일으켰는가다. 아침 일찍 한의원 도착해 원장실에 들어서는 순간 날카롭고 매운 공기가 목구멍을 찌른다. 그럴만한 원인을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최근 5년 동안 변한 일이 없는 한적한 장소다. 장마철임을 고려해서 찬찬히 다시 톺아본다. 그렇다. 마른 식물!  &nbsp;  동물 식으로 말하면 식물 시체(!)가 원장실 전체에 즐비하다. 그동안 숲에 드나들면서 거둬온 나무줄기와 가지, 그 껍질, 풀잎, 꽃, 열매, 거기다 다양한 버섯까지 기억과 기림을 버무려 이곳저곳에서 웅얼거리고 있다. 식물 본성이 상실과 고통으로 들어왔다는 진실과 마주한 찰나부터 내 몸이 달리 반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돌연 감각 구멍이 열린 거다. 아파!  &nbsp;  어, 하는 어떤 시점부터 맹렬한 구토 같은 기침이 쏟아져 나온다. 멈추기는커녕 잠시 쉴 틈도 주지 않고 가슴을 두드릴 새도 남기지 않고 쇄도하듯 목 터져라, 컹컹거린다. 눈물, 콧물 범벅에 나중에는 정신까지 혼미해지더니, 급기야 기억 끈이 뚝 하고 끊어져 버린다. 언제 어떻게 기침이 멈췄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 와중에 만들어 목을 헹군 죽염수 일부와 젖은 수건이 뒹군다.  &nbsp;  넋 빼고 우두커니 앉아서 생각에 잠긴다: 식물 본성을 연속성에서만 생각해 왔던 지난 70년을 뒤집어엎은 일대 사건이었구나! 식물 본성을 나쁘게 생각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으나 그렇게만 내 본성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진실 앞에서 통렬히 무릎 꿇은 사건이었구나! 그날 밤부터 기침 근육들이 눈물을 쏟으며 몸부림치는데 차마 신음을 아낄 수가 없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nbsp;  꼬박 닷새가 지나 걷기를 완전히 멈추고 휴식을 취하니 비로소 통증이 물러난다. 이 근육 통증이 물러남으로써 한 달 전 따끔거리는 위 증상에서 비롯되어 장 증상, 천장관절 증상, 우울 증상-웃자란 어른 증후군, 틈새 엄마 증후군-, 그리고 기침에 동반해 다시 찾아왔던 혈관운동 신경성 비염까지 도파니 사라진다. 70년 인생을 휘감았던 ‘귀마’가 스러진다. 참삶 동살이 든다!     <br>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새벽, 나는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나 정성 다해 집 안에 있는 기억·기림 식물이며 버섯을 거둬들인다. 어제 가지고 온 한의원 식물, 버섯과 함께 간동그려 집을 나선다. 내 자신이자 내 아픔이었던 이들을 내게 말을 걸어온 물오리나무 아래 모신다. 거듭난 생명으로 재회할 날 설레니, 섭섭함 넘어 서그러워진다. 비 젖은 영이 보송보송한 김을 피워올린다.<br>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22/pimg_639203346891392877.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05921</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아파야 할 시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03983</link><pubDate>Tue, 21 Jul 2026 16:1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03983</guid><description><![CDATA[<br>  &nbsp;  몸살이 한 달을 넘기고 있다. 체중은 50kg 아래로 내려간다. 은근히 기분 갉아먹는 신열, 시난고난한 호흡기 증상, 무엇보다 기이한 폭발 기침이 신묘하게 기습 종료된 이후부터 대상포진처럼 바람만 스쳐도 아픈 근육통으로 영일 없다. 몇 날 며칠씩이나 잠에서 깨어 병이 건네는 이야기 듣다가 날 밤을 새우곤 한다. 허리가 아리고 다리는 파근하며 활동 감각이 휘주근하다. ‘은화처럼 맑은’ 영 줄 하나 겨우 부여잡고 진실을 뒤좇는다.   &nbsp;  모른 채 알아차리고 알아도 모른 채 한 달이 흐르고 보니, 이 시간 전체가 신병 속에서 씻김굿과 내림굿이 갈마든 커다란 굿판이었다. 내게 결핍과 상실 틈새로 때 이르게 주입된 식물성·여성성·성숙성을 씻어 내보내고(씻김굿), 늦게나마 건강한 그러나 낯선 동물성·남성성·유아성을 맞아들이는(내림굿) 의례·몸짓 또는 자세·언어가 재현되고 변주되는 시간이었다. 아프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의학이 개입해서는 안 될 시간이었다.  &nbsp;  급격하게 살이 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주위 사람들이 알아보고 놀란다. 아무리 백세시대라지만 일흔 살 먹은 남자 사람이 50kg 미만 체중이라면, 게다가 술까지 주야장천 마셔댔다면, 더럭 암 걱정을 들먹여도 호들갑은 아닐 테다. 뾰족한 설명 방법이 없으니 그냥 빙그레 웃고 만다. 웃고 말 일이 아니다. 오늘은 오만 년 만에 숲 걷기 중단이다! 문이란 문은 죄다 열고 하루 종일 바람 길목에 오도카니 앉아 멍때림으로 휴식을 취한다.   &nbsp;   생색 없는 평온이 잠시 내려앉는다. 이 간이역에서 내릴 여행이 아니니 다음 행로에 유념한다. 어디인지 모르는 ‘솟을굿’ 역을 향해 다시 일어선다. 거기 또한 아플 만큼 아프고 나서야 닿을 곳인지 나는 모른다. 천명 받는 일이 무슨 상 받는 일은 아니니 전보다 더 깊은 신음 속으로 나를 던져야 하는 일은 아닐까, 오히려 두렵다. 통증이 깊이 가라앉는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나는 사부자기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한다. 밥을 먹어야겠다.<br>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21/pimg_639202471404124238.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403983</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살려주세요!</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394944</link><pubDate>Thu, 16 Jul 2026 12:0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394944</guid><description><![CDATA[<br>  &nbsp;  “살려주세요!” 내가 아니라 장점막 밖에서 나와 공생하는 미세 생명들이 이 다급한 말을 듣는다. 미세 생명들은 내게 이렇게 통역해 준다. “오늘은 지하철 갈아타고 걸어가지 말자. 그냥 쭉 가서 마을버스 갈아타고 가자.” 어르신 카드로 절약되는 교통비를 &lt;전쟁 없는 세상&gt; 단체에 기부하기 때문에 나는 마을버스를 타지 않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가자고 결정한다.   &nbsp;  숭실대입구역에서 내려 승강장을 너덧 걸음 걸어가다가 시선이 갑자기 발치로 뚝 떨어진다. 거기 매미 한 개체가 힘겹게 버둥거리고 있다. 내가 거기로 얼른 다가서자, 덩치가 집채만 한 젊은 남자 사람이 으악 소리를 지르며 도망간다. 나는 조심조심 매미를 들어 올린다. 발버둥 칠 수밖에 없는 그에게 말한다. “괜찮아~ 조금만 참아. 나무한테 보내줄게.” 서둘러 역사를 빠져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이팝나무 줄기에 살짝 붙여준다. 천천히 힘들게 그가 나무를 타고 오른다.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어떤 미래가 닥칠지라도 지하철역 콘크리트 바닥에서 생을 마감하는 일만은 면할 테니 그 구원 요청은 일단 유효했다. <br>&nbsp;사실 이런 일은 내게 일상이다. 땅강아지, 지렁이, 나방, 무당벌레, 벌, 거미, 심지어 파리까지 수없이 살길을 찾아주었다. 오늘 일을 특별히 거론하는 며리는 내가 느닷없이 귀가 경로를 바꿨다, 즉 다른 경우와는 달리 급격한 변화를 일으킨 데서 결과했다는 사실에 있다. 이 변화는 그만한 연유를 담고 있어야 한다. 사실 우연히 일어난 일조차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팡이시질(hyphaeing), 그러니까 네트워킹 작용에 따르지만 요즘 내가 깊이 관심 두는 내밀하고도 정확한 감지 능력 문제의식에 맞춘 과정 배치가 아니었을까?  &nbsp;  서구 과학 인과율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내 인식 방법은 ‘소설’에 가깝다. 기껏해야 유사 과학 정도로 폄하될 줄 모르지 않는다. 소설이든 유사 과학이든 서구 과학과 다르다는 이유로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소설이다. 인간 지성을 수학에 외주하여 만들어낸 서구 과학 이전 인류 고대 과학에서는 지식과 지혜가 분리되지 않았다. 지혜는 몸 알아차림에서 나오는 적응과 창조 능력이다. 이를 제거한 서구 과학은 일직선으로 제국주의 지식을 향해 질주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다. 시간이 없다. 고대 과학 지혜를 복원해야 인류가 살 수 있다. 내가 주창하는 “범주 인류학”이 바로 그런 자각에서 발원한 지성 운동이다. 범주 인류학은 서구 과학을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서구 과학주의자보다 더 깊이 알고 있다. 범주 인류학은 서구 과학을 가로질러 간다. 최근 내가 경험한 놀라운 일 하나를 소개한다.    &nbsp;  책깨나 읽는 사람이라면 로빈 월 키머러가 쓴 『향모를 땋으며』를 모를 수 없다. 그가 지닌 사상과 글쓰기가 얼마나 탁월한지를 지나 나는 그 향모 자체에 지극한 관심이 갔다. 자료는 그리 충분하지도 깊지도 않았다. 볏과 식물로 향이 뛰어나고 북미 대륙 선주민은 지구 최초 식물로 여기며 그 향을 매우 귀하게 대한다는 정도였다. 접할 수 있는 길도 찾지 못했다. 외곽 관련 자료를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레몬그라스라는 아로마에 가 닿았다. 볏과 식물에서 추출한 아로마로 향이 레몬 비슷해서 이름을 그렇게 붙였을 뿐 레몬과는 전혀 무관하단다. 볏과 식물이라는 데에 희망을 걸고 옆지기한테 부탁해 그 아로마를 구했다. 적어도 내가 맡은 그 향은 레몬과 전혀 비슷하지도 않았다. 그 향은 벼 줄기나 잎에서 나는 향과 거의 똑같았다!   &nbsp;  열 살 이전 고향 논두렁 경험, 그 아득함 속에 묻혔던 벼 향이 시간 벽을 찰나에 부수고 기억을 불러냈다. 더 놀랍게도 나는 단박에 이 벼 향이 원시 형태 바닐라 향이라고 직감했다! 사실 벼 향에서 바닐라를 떠올리긴 불가능하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해낸 데는 밥에서 나는 향에 평소 깊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밥심으로 살아간다는 한국인도 밥 향을 골똘히 생각하는 경우는 없지만 나는 밥 향으로 훌륭한 아로마를 만들 수도 있다고 평소 생각해 왔다. 벼 향과 밥 향을 같은 선상에 올리자마자 직관이 발동했다.   &nbsp;  <br>어쭙잖은 내 서구 과학 지식이 반기를 들었다. “바닐라는 난초과 식물일 뿐 아니라 바닐라 향도 여러 복잡한 과정, 심지어 발효까지 거쳐야 추출할 수 있다는데 어떻게 벼 줄기나 잎에서 나오겠는가?” 제법 오랫동안 나는 이 고대 지혜를 발설하지 못했다. 마음에 확신은 드는데 증명할 길이 없어서다. 매미 구조 사건 직후 내게 기이한(!) 용기가 피어올랐다. 두 단계를 거쳐 내 고대 지혜를 서구 과학이 증명한다는 진실을 밝혀냈다.   &nbsp;  내 가설 하나: 볏과 식물과 난초과 식물은 한 조상에 갈라져 나온 자손이다. 서구 과학이 사실임을 증명해 주었다. 내 가설 둘: 벼 줄기나 잎에는 바닐라 향을 내도록 하는 성분이나 물질이 있다. 이 또한 서구 과학이 사실임을 증명해 주었다. 좀 더 복잡한 세부 이야기가 존재할 테지만 내가 이 진실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확인” 말고는 서구 과학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 홀연한 카이로스 경험이 매미 구조 사건과 연동된다는 진실도 부정하지 못한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런 경로를 좇아 진실에 가 닿고 “살려주세요!” 소리에 귀 기울이려 한다. “반대한다면 그대가 옳다^^”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16/pimg_639198000338503827.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394944</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아기와 사나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393196</link><pubDate>Wed, 15 Jul 2026 15: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393196</guid><description><![CDATA[<br>  &nbsp;  70년 비밀을 통짜로 풀고 나니 아연 정적이 찾아든다. 모두 가만 내려놓고 나갈 생각 접은 채 양말 속옷 바느질로 오전을 다 보낸다. 살짝 이르게 국수 삶아 점심 먹고 60년 정든 정릉으로 향한다. 거기서는 무슨 목표나 목적 헤아림이 없어지고 무심히 풍경 속으로 배어들 수 있으니 내겐 수평 신성 공간으로 딱 적소다.   &nbsp;  소나무와 참나무 사이로 천천히 걸으며 세월과 빛살을 촘촘히 헤아린다. 세월이 빚은 버섯을 아껴 보고, 빛살이 빚은 눈부신 경계를 기려 본다. 마르고 짧은 늦장마라 금천 물소리가 올 고운 바람결에도 휘어지며 뭉그러진다. 작디작은 쏠을 찾아 그 앞에 쪼그려 앉는다. 제 나름 여돌차서 고마움 증표 삼아 영상에 모신다.   &nbsp;  출입구 언저리를 수백 년째 지키고 계신 느티나무께 새삼 인사하고 염천 망토를 둘러쓴 채 숲을 나온다. 지하철 갈아타며 이동해 조용한 음식점에 든다. 그 집 김치는 휘뚜루마뚜루 후려 섞지 않아 밥 한 숟가락 뜨고 그 위에 직사각형 배추 조각을 얹어 먹기 좋다. 습관대로 먹던 어느 순간 나는 그 김치 조각을 물에 넣는다!  &nbsp;  빨간 양념을 헹궈낸 뒤, 다시 김치 조각을 입으로 가져간다. 남은 양념을 마지막으로 고이 빨아내고, 밥 위에 착 얹는다. 지그시 눈 감고 오물오물 먹는다. 포한(抱恨)이 사라지는 강력한 시간이다. 내가 신어미도 신딸도 되어 뛰노는 내림굿 아기 과장이다. 눈물이 흘러내린다. 온몸과 혼에 소름이 돋는다. 웃자란 어른 없다.<br>  &nbsp;  홀가분하게 집으로 향한다. 전과 달리 미세 의식 오솔길을 따라 “불연속”으로 기우는 마음 풍경을 느낀다.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 특히 고통은 다 연속돼 있다는 느낌에 잠겼던 뿌연 시야가 아침 안개 걷히듯 맑아지는 중이다; 결핍과 상처로 들어온 여성성에 출구가 빼꼼히 열리는 중이다. 사나이 과장이다. 틈새 엄마 없다.   &nbsp;  마지막 모퉁이를 돌았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든다. 아니다. 갑자기 삭신이 쑤시고 신열이 오른다. 처음 이 문제와 정면으로 맞닥뜨렸을 때와 같은 증상이다. 신음을 흘리며 그저 뒹굴던 한 찰나 내 입에서 나온 말: “그래 아가야, 이 아픔 지나면 이쁜 짓 한단다~” 나비 포옹해 주고 다독다독···. 아기가 웃으며 손 흔든다.   &nbsp;   다음 날 아침. 신열, 근육통, 밭은기침, 그리고 불면 때문에, 몸이 물먹인 솜 같다. 3km 훨씬 넘는 숲 걷기를 생략할까, 지난밤에 연속된 망설임이 들어서는 순간 듬직한 사나이가 야젓하게 앞으로 나선다. “이럴 때 숲에 들면 몸이 가벼워져~” 그래도 현실 몸은 일흔 늙은이라 천천히 걸어 숲을 향한다. 는개가 화답한다.<br>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15/pimg_639197251681244673.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393196</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해어화뎐(解語花傳)</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391132</link><pubDate>Tue, 14 Jul 2026 13: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391132</guid><description><![CDATA[<br>  &nbsp;  한의원 탕전실 바깥쪽 긴 다용도실 창문에는 담쟁이덩굴이 흡착근(吸着根) 내리고 무성하게 살아간다. 그들 모습 지켜보면서 틈새로 하늘까지 우러를 수 있는 거기가 내겐 참 정겹다. 16년째 서 온 자리인데 올봄 어느 날 아연 그들에게 말 건넬 마음이 들었다. 낭풀을 바라보는 시각 변화가 쌓여 시간 중력이 강해지면서 감지하기 전에 카이로스로 들이닥친 듯하다.   &nbsp;  내가 말을 건넨 까닭이 있다. 담쟁이덩굴 본성상 흡착면이 형성되는 공간을 우듬지가 자연스럽게 따라가면서 덩굴이 번져가기 마련이다. 창문틀인 경우는 여닫으므로 문제가 된다. 닫을 때 잘릴 수밖에 없다. 여태까지 나는 손으로 걷어내고 창문을 닫았는데 귀찮아선지 간호사가 잘라내곤 했다. 내 제지로 다시 그러지는 않으나 근본 대책이 없어 변화가 필요했다.     &nbsp;  한창 자라던 덩굴 하나가 창문틀 모서리 돌아 흡착근을 붙이려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상하지 않게 들어내고 덩굴을 손으로 받쳐 든 채 사람에게 하는 말과 똑같이 이야기한다. “여기로 넘어오시면 창문을 닫을 때 잘립니다. 더 안쪽으로 들어오지 마시고 이렇게 바깥을 향해 올라가세요.” 덧붙여 말한다. “저기 위쪽에 계신 분들한테도 이 말씀을 전해주세요.”   &nbsp;  나는 우듬지가 향해야 할 곳을 가리켜 잡아주고 다른 줄기와 잎을 이용해 임시 고정 상태로 만들어준다. 매일 살펴본다.&nbsp;두세 덩굴이 고개를 살짝 들이미는 기척을 보여서 똑같이 말하고 방향을 잡아준다. 일주일쯤 되자 변화된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능히 들어올 수 있음에도 더는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행렬이 멈춰 섰다. 손댈 수 없이 높은 곳도 마찬가지다.<br>  아래쪽-내가 말하고 손댔던 곳&nbsp;<br>위쪽-말 전해 달랬던 곳&nbsp;마른 늦장마긴 해도 창문 닫을 일이 조금 더 잦은 요즘 창가에는 그들과 나 사이 평화가 낭자하다. 낭풀들은 인간 말을 알아듣는다. 인간이 그들 말을 알아듣지 못할 따름이다. 알아듣지 못하는 일은 당연하지 않다; 그 곡절이 타락과 범죄로 뒤엉켜 있다. 어떤 정치 현안보다도 끽긴한 과제가 바로 이 타락과 범죄를 자각하는 일이다. 진심으로 참회하며 낭풀 아래로!<br>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14/pimg_639196331942593514.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391132</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우울증, 그 또 다른 변주(하): 틈새 엄마 증후군 </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385818</link><pubDate>Sat, 11 Jul 2026 14: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385818</guid><description><![CDATA[<br>  &nbsp;  모유를 상실한 영아가 홀로 힘으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슬기(!)는 장내 미생물 네트워킹에서 왔다. 인간 진화 정보에서는 홀로 힘으로 살 수 있으려면 두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지식이 왔고. 요건 하나: 어른일 것. 그 이야기는 했다. 인제는 남은 한 요건을 이야기해 마무리 지을 차례다: 여성일 것. 우리 속담은 이렇게 표현한다. “홀어미 삼 년이면 쌀이 서 말, 홀아비 삼 년이면 이가 서 말.” 속담 다른 판본은 홀어미 대신 과부를 넣는다. 둘은 같은 말이 아니다. 홀아비와 맞추려면 홀어미를 넣는 게 옳다. 자식 키우는 위치를 부가했을 때 그 차이가 한껏 더 선명하게 드러나니까.   &nbsp;  내게는 40년 가까이 인연을 이어온 제자가 한 움큼 있다. 제법 오래전 집에서 식사 모임을 한 적이 있다. 그 가운데 결혼한 여제자가 제 남편을 초대해 나중에 도착했다. 그가 들어서자마자 느낀 이상한 광경을 보고 한마디한다. “어? 왜 선생님이 주방에 계시죠? 제자들은 앉아서 먹기만 하고···.” 대뜸 대답이 돌아온다. “어! 선생님 우리 엄마거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 는 식이다. 내가 남선생이고 제자 모두가 여제자이지도 않은데 이상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모임은 마치 ‘모녀 동맹’과 흡사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자타공인으로.     &nbsp;  나는 그들에게 오랫동안 엄마 노릇을 해왔다. 세상을 가르치고 삶을 의논하는 일에 더해 먹이고 재우는 일까지 했으니 일테면 “틈새” 엄마였다. 그들에게 한 엄마 노릇은 나 자신에게 한 엄마 노릇 연장선에 있다. 사실상 한평생 모성 결핍 상태에서 웃자란 어른으로 살아왔기에 나는 나 자신에게 엄마 노릇을 하면서 살 수밖에 없었고, 나아가 그런 빈자리가 보이는 아이들에게 스며드는 감수성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결혼한 뒤에 내 옆지기에게도 딸에게도 엄마 같은 남편, 엄마 같은 아버지로 살아왔다. 인정한다, 결코 자랑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프고 또 슬픈 일이라는 사실을.  &nbsp;  그 모순 역시 인정한다, 다른 선택 여지가 없는 불가피한 일이라는 사실을; 내밀 영웅이 벌인 장한 항쟁이라는 사실을. 질병 방어기제임과 동시에 영성 치유인,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역설 사건 보이지 않는 마주 가장자리에는 이 통렬한 각성이 요동한다. 짐승 과장(科場), 아기 과장, 사내(아비) 과장을 정색하고 들여놓은 내림굿을 통해 70년 모순을 달여내니 바야흐로 후천개벽(後天開闢) 시대가 도래한다. 그 들머리에 죽을 만큼 희생한 결과 쌀 서 말 하야니 놓인 대신, 뼈아프게 깨친 결과 아우라지 노나지 물이 변한 젖 서 말이 뽀야니 놓여 있다. 그 젖 먹고 참 건강으로 살아간다.<br>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11/pimg_639193754186456554.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385818</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우울증, 그 또 다른 변주(상): 웃자란 어른 증후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384289</link><pubDate>Fri, 10 Jul 2026 15:0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384289</guid><description><![CDATA[<br>  &nbsp;  &lt;또 또 또다시, 인생 아우라지 혹은 노나지&gt;에서 ‘모유 먹는 아기 장내 점유율 1위 미생물인 비피도박테리움이 필수아미노산 트립토판을 이용해 나와 남/적을 구별하는 면역 교사 인돌-3-젖산을 만들어낸다. 모유를 먹지 못하고 자란 사람이 나와 남/적을 구별하는 일에 실패해 자가면역을 포함한 여러 면역 질환으로 미끄러지는 이치다. 그 대표 질병이 다름 아닌 우울장애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진실에는 또 다른 진실 하나가 결합한다.   &nbsp;  모유에는 모유올리고당(HMO) 성분이 풍부하다. 이 성분을 먹는 생명체는 오직 비피도박테리움뿐이다. 그래서 장내 점유율 1위가 되고 훌륭한 면역 교사로 활동할 수 있다. 모유를 먹지 못하는 영아는 이 기전을 상실하였으므로 비피도박테리움 우위가 깨져 성인 장내 상태와 같아진다. 나와 남/적을 구별하기도 전에 때 이른 어른이 되어버린다는 뜻이다. &lt;꿩이 나를 초대했다!&gt;에서 ‘6개월도 채 안 된 무렵부터 걸었다’라고 한 말과 직결된다.   &nbsp;  아기인 적 없이 어른이 된 삶은 전방위 혼잣손이 된다. 태초부터 모든 고민과 결정을 혼자하고 감당도 혼자 한다. 결정 전에는 망설이고 망설이며, 결정 후에는 자책하고 자책한다. 그럼에도 남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한다. 아기가 자라 어른 되는 연착륙 과정을 통해 도움 청하는 일이 불가결한 사회 행동이라는 진리를 배울 수 없어서다. 사회관계망에서 소외되어 두름손도 내밀손도 점점 허약해진다. 남 손 안 타는 착한 삶은 슬프게 사위어 간다.   &nbsp;  웃자란 어른이 그렇게 우울장애 주요 축으로 자리 잡아 소리 없이 희생되는 풍경 건너편에 늦깎이 어른이 존재한다. 어른이라 자처하지만, 제국 자본이 요구하는 고급 지식·기술을 지닌 가짜 어른, 실제로는 ‘사특한 아이’라고 표현해야 옳은 종자다. 이 사특한 아이들 패악과 욕설, 그리고 야비한 조롱으로 뒤덮인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2024년 12월 3일 이후 대한민국엔 대놓고 함부로 커밍아웃한 저들이 싸지르는 배설물이 넘쳐난다.  &nbsp;  중첩 식민지 허울 대한민국에서 우울장애, 곧 ‘웃자란 어른 증후군’을 앓으며 70년 살아온 나는 내가 처한 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 오늘 각성을 죽은 다음에서라도 기억하고 증언하련다. 그래야 내 과거가 귀환하지 않을 테니까("La seule façon d'éviter le retour du passé est de ne pas l'oublier." _Simone Veil); 그렇게 성찰과 치유를 거친 건강한 내 식물성, 여성성, 성숙성이 물팥버들과 대화할 테니까.     <br><br>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10/pimg_639192925413541210.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384289</link></image></item><item><author>bari_ch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물팥버들이 나를 불렀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380714</link><pubDate>Wed, 08 Jul 2026 16: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380714</guid><description><![CDATA[<br>  &nbsp;  5년째 걷는 출근길 숲으로 일요일 아침에 들어가기는 처음이다. 먼 데 있는 산이나 강으로 향했던 습관을 깨뜨리면서 생기는 낯섦과 적어도 천 번 이상 걸었던 낯익음이 얽혀 묘하게 설렌다. 더군다나 최근에 만난 물팥버들(물오리나무) 상태를 빛이 충분한 조건에서 자세히 살피려는 목적으로 가는 길이라 두근거리기까지 한다. 과연 어떨까?   &nbsp;  이 물팥버들과는 꿩이 나를 초대했던 그 사건 직후 출근길에서 처음 만났다. 그것도 그 사건이 일어난 곳, 바로 앞에서였다. 그동안 그렇게 여러 번 그 앞을 지나면서도 거기에 그 물팥버들이 살고 있는 줄 전혀 몰랐다. 예외 중에서도 별난 예외다. 이 숲에서 내가 지나는 길 양옆 나무나 풀을 모르고 무심코 지나는 경우가 거의 전혀 없어서다.   &nbsp;  내가 그 숲을 걷는 시각쯤 해가 떠 있긴 하지만 북쪽 사면이라 아직 컴컴하다. 꿩 사건이 일어났던 내 지성소를 향해 걸어가는 중 문득 한 나무가 어둠 속에서 나를 멈춰 세웠다. 얼굴을 바짝 대고 스마트폰 전등을 켰다. 아뿔싸, 그는 물팥버들이었다! 왜 여태 몰랐을까. 물팥버들이 내 탐색 이미지에 없지도 않은데. 뭔가 특별한 곡절이 있다.  &nbsp;  <br>그나저나 나무 건강 상태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수피 빛깔이 어둡고 들떠 있다. 도장지(徒長枝·웃자람가지)가 군데군데 있고 그나마 거기 새잎도 부실하다. 수관 쪽은 무성한 다른 나뭇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밝은 날 꼼꼼히 봐야겠다. 우선 내 생명 에너지 파동으로 응급 처방한다. 풀리지 않는 의문과 더불어 가슴이 더욱 저려 온다.   &nbsp;  나무 높이나 부피, 그리고 서 있는 위치로 보아 이 숲에 있는 물팥버들을 낳은 엄마 나무가 틀림없다. 나는 다시 문득, 몇 년 전부터 알고 있던 숲 동쪽 물팥버들 가족 반대편으로 향한다. 거기도 물팥버들 가족이 혹 있을까 기대해서다. 먼저 귀에 들어온 생명은 덤불 속에 모습 감춘 붉은머리오목눈이들이 도란대는 소리다. “미우미우 배배~”  &nbsp;  갑자기, 그중 하나가 튀어나와 포르르 날아오른다. 내 눈길이 닿는 순간, 그가 한 나뭇가지 위에 올라앉는다. 아뿔싸, 물팥버들이다! 이 작은 길 또한 그동안 수백 번 걸었고 한때 내 신성 공간이었음에도 물팥버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이럴 수는 없는데 이런 일이 또 일어난다. 배치가 똑같다: 사건을 새가 열고, 나무가 닫는다. <br>  &nbsp;  나는 물팥버들 앞에 우뚝 서서, 엄밀한 깨침 마주 가장자리 틈새를 응시한다. 도봉산 회룡 계곡 노나지에서 여기까지 흘러온 과정을 되돌아본다. 인과 관계에 있지 않은 숲 걷기와 글 읽기가 동시성을 거치며 인과 관계로 엮여 드는 내력을 톺아본다. 여러 결이 서로 맞물려 복잡해 보이는 서사를 되작거린다. queer 변곡점 윤곽이 드러난다.  &nbsp;  숲과 물을 걸으며 낭풀을 공부하는 동안 최후 초미 관심사는 낭풀과 소통-합일하는 일이었다. 좀 더 분명히 말하면 호주 생물학자 모니카 갈리아노처럼 낭풀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 일이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지점에서 나는 늘 아득한 심정으로 서성거렸다. 이런 경우 무슨 ‘방법’ 따위를 찾지 않는 나이기에 그냥 묻고 기다릴 뿐이었다.  &nbsp;  문제 한가운데서 도봉산 회룡 계곡 아우라지로 향했는데 노나지 인식으로 번져가자 새로운 서사가 빚어졌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내 정체성, 좀 더 정확히는 경향성이 결핍·상처·질병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총체로 깨달았다; 치유와 경계 지음이 수행되어야 열릴 길임을 알아차렸다. 걷기·독서·질병·새가 어울려 인생 내림굿 한바탕을 짰다.  &nbsp;  70년 내 경향성은 모유 결여 또는 상실이라는 태초 사건에서 발원했다. 여기서 온 만성 소화기 장애, 천장관절 증후군, 우울장애가 생을 관통했다. 우울장애는 피학 본성을 지닌 식물성, 여성성, 성숙성으로 분화했다: 저항할 수 없는 영아가 받아들인 전천후 수용성, 자기를 파괴하는 희생, 전방위 혼잣손. 모든 문제가 몰아 터진 스무날이었다.  &nbsp;  만성 소화기 장애와 천장관절 증후군은 이 스무날 들머리 사흘에 앓은 독한 몸살, 신열로 사라졌다. 우울장애 첫 부분인 식물성 문제를 해결한 사건이 방이 습지 물까치, 소악산(素岳山) 꿩, 붉은머리오목눈이가 열어젖혀 내 본성인 동물성을 분명히 하고 피학 치유, 가학 참회에 가 닿도록 물팥버들이 마무리 지어놓은 옴니버스 이야기들이다.   &nbsp;  이 이야기에서 물팥버들은 새를 거치기는 했지만 내게 말을 건넸다; 자기 존재를 드러냈다. 이는 필수 과정이므로 다음 소통이 어떨지는 온전히 열린 결말 앞에 있다. 그 전개가 내 몫임이 더 분명해짐과 동시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더 분명해졌다; 아득함이 엷어졌다. 남은 문제를 일상에서 투명하게 맞이할수록 숲은 가까워질 테다. 똑!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708/pimg_639191257619979165.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81606115/17380714</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