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코의 인간학


  (1) 몸은 코다


남자사람의 몸에는 입· 눈· 귀· 코· 항문· 요도의 아홉 개의 큰 구멍이 있다. 물론 여자사람의 경우는 질이 있으므로 한 개가 더 많다. 이 구멍들은 각기 필요에 따라 제멋대로 뚫려 있는 게 아니다. 소화기관을 기축으로 해서 입· 눈· 귀· 코는 위쪽에, 항문· 요도· 질은 아래쪽에 배치되어 있다. 결국 몸은 하나의 커다란 대롱인 셈이다. 위쪽에 난 구멍은 외부에서 내부로 무엇인가 받아들이는 기능과 관련을 맺는다. 아래쪽에 난 구멍은 내부에서 외부로 내보내는 기능과 관련을 맺는다. 코와 질은 예외다.


코는 받아들이고 내보내는 일을 쌍방향으로 한다. 하여, 교대이긴 하지만, 항상 열려 있다. 여닫음이 가능하거나 차단 막· 근육을 지니고 있는 다른 구멍과 차이가 난다. 부단한 소통을 위해 늘 자신을 비우는 허령虛零한 존재가 바로 코인 것이다.


코는 입· 눈· 귀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이들과 모두 관계를 맺는다. 다만 관계를 맺는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제로 후각은 감정과 기억을 통해 미각· 시각· 청각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후각 없이는 몸의 제대로 된 소통이 어렵다. 늘 열려 있어 쌍방향 작용을 하는 코를 통해 외부세계와 끊임없이 소통함으로써만 몸은 살아 있는 몸이다. 코는 소통인 몸의 허브hub다. 코는 몸이다. 아니, 몸은 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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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비학 기치旗幟: 문제는 코다


코, 이것은 가장 처음부터, 가장 나중까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조건이다.

하지만 코는 그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 채 억눌려 있다가

인간이 파멸 위기로 내몰린 오늘의 상황과 홀연히 마주하게 되었다.

만일 이 순간 코의 코됨을 되살리지 못한다면

인간은 이대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

문제는 코다.


코는 호흡의 관문이다.

하면 몸-생명의 중심이 아닌가?

코는 냄새를 맡는다.

하면 감각-생명의 중심이 아닌가?

코는 대뇌의 기원이다.

하면 마음-생명의 중심이 아닌가?

코는 나와 남의 면역적합성을 알아차린다.

하면 코는 관계-생명의 중심이 아닌가?

그렇다.

문제는 코다.


코를 통해 느끼고

코를 통해 생각하고

코를 통해 실천하기 위하여, 우리는

비학의 깃발을 든다.


지금 여기서부터 코는 일부가 아니다.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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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각이 후진 대접을 받아온 까닭은 후미진 틈바구니까지 스며드는 소미한 감각이기 때문이다. 짐승의 것, 아니, 아니 그래서 ‘여자’의 감각으로 치부하여, 앞에서는 아득히 경원하지만, 뒤에서는 드잡이판 벌이는 남성 백색문명의 압제·수탈 대상이 다름 아닌 후각이다.

 

후각의 복원은 그 어떤 혁명보다 래디컬하다. 냄새를 맡는다는 것은 대체, 얼마나 반-문명이며, 비-교양이며, 몰-품위며, 탈-인류인가 말이다. 큼큼대다니. 그러나 그래서 큼큼대라. 큼큼대야 생명의 근원에는 냄새가 있다는 진리를 깨친다. 그 냄새가, 바로, 녹색 냄새다.

 

녹색 냄새는 비리꼬리하다.

 

녹색 냄새를 맡아 ‘들이는’ 비리꼬리 후각 감각은, 그러면 어디서 날까? 스스로 냄새의 장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맡아도 들이지 못한다. 녹색 후각은 공현이며 공감이다. 자신이 근원적으로 비리꼬리하지 않으면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녹색 후각을 지닌 인간은 녹색 체취를 풍긴다. 녹색 체취 풍기는 인간은 자신을 소미심심의 생태계로 유지한다. 소미심심의 생태계로 유지되는 인간에서만 후각은 진정한 해방을 맞는다.

 

후각 해방을 위해 코를 우뚝 깃발로 세운다. 코는 대체 인간에게 무엇인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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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문명에서는 의학도 상식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근원적 경계 사건이 혀에서 일어난다. 정확히는 혀와 항문에서 일어난다. 비대칭의 대칭 원리는 여기부터다. 혀의 감각(미각 제외)은 증폭된 상태로 일어난다. 항문의 감각은 응축된 상태로 일어난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먹고 소화·흡수가 끝나면 싸는 것은 자연이자 당위다. 먹을 때는 주의를 기울여 조금만 먹어야 한다. 쌀 때는 놓아버리듯 한껏 많이 싸야 한다. 밖에서 들어오는 것은 최소한으로 한다. 밖으로 나가는 것은 최대한으로 한다.


이 근원적 비대칭의 대칭은 인간의 윤리를 단도직입으로 제시한다. 남에게서 받는 것은 너무 많다고 느껴 최소한으로 하라. 남에게 주는 것은 너무 적다고 느껴 최대한으로 하라. 황금률은 공자, 예수 말씀 이전부터 인간의 몸에 깃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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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필드W. G. Penfield의 호문쿨루스homunculus에 따르면 가히 촉각의 ‘중추’라 할 만한 것은 손과 입술(과 혀를 포함한 입 주위)이다. 그중 단연 손이다.



피부 접촉 가운데 대부분을 손으로 한다. 닿기(대기), 만지기, 쥐기, 쓰다듬기, 다독이기, 도닥이기, 문지르기, 비비기, 잡기, 닦기, 씻기, 두드리기, 때리기, 긁기, 간질이기, 누르기, 받치기(받들기), 주무르기, 접기, 펴기, 벌리기, 찌르기, 짜기, 조르기·······.


여기서 생사가 나뉘고, 애증이 교차한다. 여기서 성장과 퇴행이 엇갈리고, 상처와 치유가 자맥질한다. 여기서 웃음과 울음의 쌍곡선이 그려지고, 이별과 상봉의 운명이 결정된다. 여기서 한 생이 시작되고 한 생이 끝난다. 여기서 문명이 일어나고 문명이 스러진다. 여기서 지구가 안식하고 지구가 요동친다.


백색 손은 소외와 격리를 극단화한다. 백색 손은 기술과 돈을 극대화한다. 하여, 죽음과 증오, 퇴행과 상처, 울음과 이별이 비즈니스 전략으로 둔갑한다.


백색의학은 더 이상 손으로 진단하고 치료하지 않는다. 기구·기계·화학합성물질이 모든 것을 한다. 백색의학에게 아픈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고장 난 기계다.


녹색의학은 손 의학이다. 손으로 진단하고 손으로 치료한다. 녹색의학에서는 코도 손이다. 녹색의학에서는 입도 손이다. 녹색의학에서는 귀도 손이다. 녹색의학에서는 눈도 손이다. 녹색의학에서는 약도 손이다. 의자와 환자가 서로 마주 닿고(대고), 만지고, 쥐고, 쓰다듬고, 다독이고, 도닥이고, 문지르고, 비비고, 잡고, 닦고, 씻고, 두드리고, 긁고, 간질이고, 누르고, 받치고(받들고), 주무르고, 접고, 펴고, 벌리고, 찌르고, 짜면서 생명을 지켜간다.


나는 신학의 길을 가다 의학으로 돌아섰다. 말의 사람에서 손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이 손의 사람을 근원에서 요청하는 의학이 녹색의학이다. 이런 손의 사람을 근원에서 요청하는 곳이 둘 더 있다. 농업, 그리고 출산. 이 둘을, 나는 인연이 짓는 길 따라 내 손 닿는 곳 안에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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