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미각, 그 여러 겹의 아우라
인류 역사상 맛味이란 말에 가장 웅혼한 미학을 부여한 사람은 단연 원효다. 원효 사상의 결정판인 『금강삼매경』은 일미관행一味觀行으로 요약된다. 일미一味는 일심一心을 실천적·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심은 장엄을 향해 가는 삶의 내용, 방향, 동기, 가치, 효력 모두를 포괄한다. 이 모두를 소미한 것에서 소미하게 감각할 수 있도록 일미라 표현했다. 일심 사상이 거대 관념론으로 흐르는 것을 원천 차단한 셈이다. 요컨대 가장 광활하면서도 가장 소미한 영성, 그 비대칭의 대칭을 맛, 그러니까 미각에 담은 묘미가 일미에 있다.
원효의 일미와 비할 바 아니거니와, 우리에게 제법 낯설지 않은 장 앙텔름 브리야 사바랭의 ‘네가 무엇을 먹었는지 말하라. 네가 무엇인지 말해주겠다.’를 거론함직하다. 먹는 음식에서 신분이 드러난다는 취지의 말이 번역 과정에서 ‘네가 먹는 것이 곧 너다.’로 왜곡되었다고 비판하는 견해가 있다. 뭐 왜곡이랄 일만은 아니다. 한 사람이 즐겨 먹는 음식, 그러니까 추구하는 맛을 통해 그의 상황이나 성향을 짐작하는 것에는 분명한 일리가 존재한다. 아니 어쩌면 그가 하는 말, 사회적 행동보다 훨씬 더 신뢰할만한 정보를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미각에 착오는 있을지언정 고의적 위선은 거의 불가능하니까 말이다.
하마 아득히 잊힌 작년 여름 일 하나가 떠오른다. 이정현이 새누리당 대표에 선출되자 축하파티를 열어 샥스핀과 송로버섯 먹인 박근혜의 미각학예회다. 얼마 뒤 국민 손에 쫓겨날 줄 모른 채, 제 속살을 함부로 대놓고 드러낸 천박한 미각적 커밍아웃이랄까. 선거 때 재래시장 가서 어묵 쇼했던 이명박도 실은 뒤에서 저희들끼리는 뭘 처먹는지 역으로 드러낸 것이니 미각의 천박함에서는 도 긴 개 긴이다. 비싸고 맛있는 음식 먹으면 기품 있는 인간이라는 생각은 돈 있으면 근본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과 동일하다. 한마디로 개 웃기는 얘기다.
미각의 사유와 실천이 한 사람의 상황이나 성향을 결정한다 하면, 보통 서둘러 무엇을 먹을까 궁리부터 한다. 이 또한 본말 전도다. 무엇보다 여태까지 자신의 미각이 어떻게 형성·지속·왜곡되어왔는지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현실에는 태아 때 어머니의 식성에서 시작하여 지구 기후변화 문제에 이르기까지 중층의 요인이 개입한다. 자기 삶을 돌아보면서 어떤 미각, 어떤 음식에 원근·호오의 반응을 하게 되었는지 면밀히 살피고 감응하는 치유부터 해야 한다. 미각의 쏠림을 조절하고 대칭성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음식을 새로 선택하고 교감하는 일이 흐름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다른 이들과 달리 어렸을 때부터 단 맛에 끌리지 않았다. 도리어 쌉싸래한 맛을 좋아했다. 시생대 모유의 절대 결핍이 유발요인이었을 법하고, 강원도 산골의 산나물이 강화요인이었음직하다. 양념 맛이 강한 음식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도리어 원재료의 맛에 예의를 갖추는 한에서 양념을 쓴 담담한 음식을 좋아한다. 시생대 모유 대신 먹은 미음이 유발요인이었을 법하고, 할머니의 백김치가 강화요인이었음직하다. 이런 미각을 삶의 소중한 일부로 받아 안는 과정이 우울증을 깨닫고 치유하는 과정과 겹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뜨르르한 셰프와 장인들이 시전하는 저 맛의 향연에 나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렇게 높은 맛의 높은 경지에 이르고 싶은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 경지를 포르노라고 부른다. 포르노를 상락아정으로 구가하는 미각 아라한이야말로 아우라 극단에서 어슬렁거리는 비렁뱅이다. 미각이 거느리는 아우라 스펙트럼에도 중도와 회향의 진리가 통한다. 개인적 상처와 지구의 기후변화를 가로지르는 삶의 통찰과 몸과 맘 전체를 가로지르는 미각의 조절은 중후하면서도 경쾌한, 의미심장하면서도 재미무인지경인 경계 시공을 탄다. 그 경계 시공에서 원효의 일미와 나의 담담 쌉싸래한 미각은 둘이자 하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