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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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사춘기를 어찌어찌 극복해서 어른 되는 길을 가기보다 아이로 퇴행하는 길에 사람들이 넘쳐나는 도착현상이 진행되고 있는 듯합니다. 병원에 우리 아이가 좀 이상해요.’ 하면서 자녀를 데리고 오는 부모 중에 아이보다 훨씬 더 정신적으로 이상한 부모가 드물지 않다고 합니다. 물론 본인은 모릅니다. 정말 미치면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겉모습은 어른인데 속은 아이인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가 아무 문제없이 사춘기를 통과할 리 없습니다. 단순하고 평평하고 그래서 강고한 정체성을 지닌 부모 슬하에 있는 아이가 그 영향을 뿌리치고 사춘기 정신·신체적 위기를 극복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120)

 

 


유형幼形성숙neoteny은 어른이 되어도 아이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현상을 말한다. 지금 우리가 우치다 타츠루를 따라 문제 삼는 상황은 겉모습은 어른인데 속은 아이인, 그러니까 신체는 어른인데 감정·정신·행동이 아이인 경우다. 문제의식 없이 보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대개 그냥 성격이나 기질이라 치부하고 넘어가버린다. 틈새를 파고든 병리, 또 그 너머 악이 실제 개인은 물론 가정과 사회를 망가뜨리고 있음을 직시할 때가 지금 막 지나간다.

 

숙의치유를 하는 내게 이 문제는 매우 절실하고 심각하다. 서구 정신의학 관지에서는 장애, 질병이라 명명하고 화학합성물질을 처방해 증상 완화하는 짓을 치료 이름으로 자행하면 그만이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치유는 아이인 사람을 어른으로 성장 또는 발달시키는 일이다. 화학합성물질로써는 그 일이 불가능하다. 숙의를 통해 감각을 깨우고, 감성을 키워, 자라가는 감화를 일으킴으로써 성숙한 감정·정신·행동을 구성해야 한다. 실로 지난하고 지루한 씨름이 반복되기 마련이다. 지치면 진다. 절망하면 절대 진다.

 

지치고 절망하게 만드는 현실적 이유가 있다. 이들이 처음 의료기관을 찾는 까닭은 대부분 다른 목적에서다.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같은 뜨르르한질병에 걸린 고통을 호소한다. 아프다는 사실과 어리다는 사실 사이가 본인에게는 엄청난 격절로 다가온다. 자신은 아픈 어른이지 자라지 못한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설혹 그렇다손 치더라도 아이인 상태가 왜 치료 대상인지 수긍할 수 없다. 아이인 상태 자체가 아니라, ‘성인이어야 하는데아이인 상태가 심각한 문제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더 엄중한 문제는 정말 미치면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데 있다. 여기 해당하는 사람은 단순하고 평평하고 그래서 강고한 정체성을 지닌다. 자신에게는 그 어떤 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 거의가 그렇다. 그러니 부러움, 심지어 존경 대상이기까지 하다. 이들은 스스로 도착倒錯에 휘말려 사회 전체를 도착으로 끌고 간다. 이들은 개인적으로도 사회정치적으로도 치료에 접근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전체가 삽시간에 아이 상태로 퇴행하고 만다. 요즘 우리가 똑똑히 목도하고 있는 바다.

 

어른과 아이는 어떻게 다른가? 노희경 어법으로 표현하면 아이는 자신을 피해자라고만 생각하고, 어른은 자신이 가해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치다 타츠루 어법으로 주해하면, 아이는 단순해야만 직성이 풀리고, 어른은 복잡한 상황에 자신을 걸어놓고 견딘다. 내 방식으로 주해하면, 아이는 일극집중에 매몰되어 있고, 어른은 비대칭대칭 모순을 역설로 달여 낸다. 아이가 길을 잃는 까닭은 뒤돌아볼 줄 모르기 때문이다. 사춘기가 아이에게 축복인 까닭은, 아프지만 뒤돌아보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애어른과 긴 씨름을 하고 있다. 그는 지쳤다 하면서도 집요하게, 절망한다 하면서도 적대적으로 몰두한다. 단말마 접신이 그를 주기적으로 접수한다. 생명에 깃든 모순을 받아 안고, 역설로 달여 내는 일을 아이가 얼마나 혐오하는지 그를 통해 여실히 본다. 혐오로써 대박 나는 삶을 그는 한사코 꿈꾼다. 그런 삶 사는 사람 몇이 나라를 통째로 먹어치운 광경 앞에서 그럴 수 있다 싶기도 하다. 그와 숙의할 시각이 다가온다. 나는 통곡으로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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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순간이라도 소란스러움은 소란스러움이고, 고요한 울림은 무명성이 있을 때 일어납니다. 말하는 개체와 개체를 다 같이 품은 우리 모두에게 흐르고 있는 어떤 커다란 언어 신체, 즉 우리 모두를 잇는 ()’일 때 일어납니다.......그래서 어떤 강한 말은 단순한 음성이나 문자기호라는 레벨에 머물지 않고, 간주관적 몸 안으로 배어듭니다. 이를 매개 삼아 말로 묶인 공동체 전체에 스며들 수 있습니다.(100~101)

 

말이 지닌 근원 기능은 주문에 있다(_시라카와 시즈카)고 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여러 영적 존재에게 축복을 보내고 주술을 거는 일이 말이 지닌 본래 힘이라는 뜻입니다.......

  문학비평이 문학에서 주제·방법·전위성 따위를 논하지만 사실 문학은 그들과 무관합니다. 우리는 텍스트 신체를 읽습니다. 텍스트를 신체적으로 읽을 따름입니다. 좋은 텍스트를 읽으면 병이 낫습니다. 그런 힘이 문학에 있습니다.......뇌가 지어내는 이야기로는 결코 가닿을 수 없는 곳까지 자기 울림을 가닿게 하는 커뮤니케이션 수준이 확실히 존재합니다.(102)

 


우리가 가왕이라고 부르는 조용필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온힘을 쏟아 부어 노래해야 감동 일어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70% 정도로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100%는 듣는 사람 공간을 없애버리므로 도리어 억압으로 작용한다.” 과연 조용필이다.

 

하고 싶은 말을 다하면 소음이 된다. 소음은 입자다. 입자는 신체와 신체를 관통해 흐르지 못하고 튕겨져 나간다. 입자를 녹여내 파동, 그러니까 무명성에 도달해야 고요한 울림이 일어난다. 무명은 익명이 아니다; 모두를 공명共鳴으로 잇는, 모두의 이름이다. 무명은 그러므로 무한無限명이다. 무한명이어서 간주관적 몸 안으로 배어든다. 마침내 공동체 전체에 스며드는 무한명인 말은 강하다. ‘강하다강력하다가 아니다; ‘강인하다. ‘강인하다는 섬세함을 경계로 강력하다와 갈라선다. 섬세함은 소통, 그러니까 커다란 언어 신체를 만드는 데 필수다. ‘커다랗다는 외적·양적으로 거대한 상태가 아니다; 네트워킹이 내적·질적으로 풍요로운 상태다.

 

네트워킹이 내적·질적으로 풍요롭다를 전통적 언어로 표현하면 ()이다. () 상태로 우리를 매혹하고 이끌어가는 주문이 바로 말이다. 말다운 말은 치유 능력이 있다. 치유하는 말을 우리는 문학이라 이름 한다. 문학은 오늘 날 그 본성에 충실한가?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말했다. “비평가 김종철은 문학이 정치적인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문학을 했고,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었기 때문에 문학을 그만두었다. 그가 온갖 것이라고 말할 때, 그 말은 거대한 두 팔을 벌려 모든 것을 끌어안는 어떤 거인을 연상하게 만든다. 아마도 그것은 총체성이라는 거인일 것이다. 그러나 거인으로서의 문학이 죽었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본디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을는지도 모른다. 본래 난쟁이였고, 더 작게는 짱돌이었으며, 더욱더 작게는 바이러스일지도 모른다. 가장 협소한 영역 안에서 가장 깊게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 문학이라 하면 어떨까. 이것은 체념도 합리화도 아니다. 총체성이라는 거인이 연상케 하는 수평적 포괄의 뉘앙스 대신 바이러스로서의 문학이 관여하는 수직적 예리가 또 다른 총체성에 가 닿을 수는 없는 것일까를 묻고 있는 것이다. 넓은 총체성이 아니라 깊은 총체성 말이다. 그러나 그 총체성은 이제 망원경이 아니라 내시경에 가까울 것이다. 전망이 아니라 심연을 보여줄 것이다.”(몰락의 에티카17) 그 다음 쪽에서 그는 이를 파편으로서의 총체성이라 말했다.

 

그야말로 똑 부러지게 깔끔하고 예리한 말이다. 심지어 파편으로서의 총체성이라는 말은 찰나적 취기를 부르는 표현이다. 사실은 그래서 이 취기가 뇌 현상이다. 당연히 내게 이 말은 신체적으로 읽히지 않는다. 위 글 전체,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텍스트 신체는 다만 비유가 아니다; 실재다. 신체라면 비대칭대칭 역설이 구동되고 있어야 한다. 이 글은 그렇지 않다. 이것 아니니까 저것이다, 라는 말이므로 형식논리를 넘어설 수 없다. 무슨 심오한 비밀이 숨어 있어서가 아니라 딱 질문 하나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거인과 바이러스 사이에는 정말 아무런 관계도 없는가?” 다른 버전: “바이러스와 바이러스 사이에는 정말 아무런 관계가 없는가?” 이 질문을 하지 못한 까닭은 우치다 타츠루 식으로 표현하면 복잡함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수줍음이 문학평론가에게 가당키나 한가.

 

접어준다. 그러고 나서 톺아보자. 우선, 깊이 문제. 거인과 바이러스를 대비할 때, 왜 넓이와 깊이를 마주 세울까? 신형철 자신이 말했듯 바이러스는 거인에 대해 협소한존재로 등장하지 않았나? 협소에서 깊이로 바로 넘어가는 이치적 논리적 근거가 없다.

 

다시 접어준다. 깊이를 문학에 넘겨주면 문학이 과연 그 깊이를 감당할 수 있는가? 아니, 그보다 먼저 대체 깊이란 무엇일까? 신형철은 수직적 예리란 표현을 쓴다. 예리와 깊이가 같은 말이라면 모르되 어떻게 예리가 깊이를 드러낼 수 있는지 나로서는 알지 못한다.

 

또 다시 접어준다. 예리로써 드러낼 깊이란 과연 실재인가?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수직적 깊이는 수평적 넓이의 은유다. 은유일 뿐이므로 실재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깊은 곳은 피부다.”(_발레리)라는 말이야말로 진리다. 깊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디 대비대로 작게, 세밀하게로 갈 수밖에 없다. 내시경이 아니라 현미경이다. 광학 너머 전자현미경이 밝히는 세계 진실은 비대칭대칭 네트워킹이다. 비대칭대칭 네트워킹에서 치유가 나온다. 문학이 비대칭대칭 네트워킹 진리에 가 닿지 못한 채, 넓이가 아니고 깊이라면서 파편의 총체성 운운하는 일은 가소롭다. 파편의 총체성은 없다. 작아서가 아니라 작아야 일으키는 네트워킹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인을 부정한다고 해서 바로 파편 바이러스로 달려가는 일은 거대유일신을 부정한답시고 무신론으로 달려가는 일과 같은 본성을 지닌다. 소미 존재 간 무한 네트워킹, 그러니까 참으로 큰 파동운동이 가짜 거대구조를 부수는 치유다. 이 진리를 모른다면 문학은 그 이름을 반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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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을 때는 너무 난해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거기 대단히 중요한 무엇이 써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몇 쪽씩 읽었습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로 2주 정도 읽으니까 이상하게도 다음에 어떤 문장이 이어질지 알 수 있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다음에는 이런 말이 나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을 때, 그 예상이 딱 맞아떨어지면, “, 역시 그렇군!” 하며 감동하게 됩니다.......저자 사고회로에 순간적으로 동조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다음에 무슨 말이 이어질지 감이 잡힌다는 이야기는 놀랍습니다. 경험한 사람이 아니고는 결코 할 수 없는 말입니다.......글쓴이와 호흡이 일치하고 심장 고동이 같이 울리며 다음 말이 자기 입에서 튀어나오는 일입니다. 여기서 이해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합니다.(91~92)

 

훌륭한 문장은 그 속에 신체를 담그고 있으면 속으로 파고들어옵니다.

  그렇게 파고들어오는 실재는 의미가 아닙니다.......‘텍스트 신체입니다. 텍스트 신체에 내 신체가 반응해 일어나는 일입니다. 읽는 행위는 진실로 거기에서 시작합니다. 호흡, 리듬, 촉감 같은 텍스트 신체를 경유해 이윽고 의미에 다다릅니다.(94)


 

20대 후반 나는 처음으로 어떤 책을 읽다가 다음 내용을 예측해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유난히 그 글은 처음부터 문맥이탈digression이 심했다; 끝까지 그랬다. 그럼에도 모름지기 존재하는 어떤 파동이 감지되었다. 어딘가 길목을 돌다가, 다음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면 이 책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내용이 우당탕 들이닥쳐서 감동했었다.

 

거의 40년이 지난 어느 날 이번에는 노래를 들으며 그런 일이 일어났다. 물론 그 노래를 그때 처음 들었다. 그런데 노래가 끝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다음 멜로디가 마치 이른바 ‘18처럼 친근하게 떠올랐다.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 결코 아니다. ABBA가 부른 <The Way Old Friends Do>라는 노래다. ABBA가 지구촌을 들었다 놨다 할 때도 나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도 유명해서 오며가며 귀에 들어와 있는 몇 곡 일부 멜로디를 기억할 뿐, 전곡을 다 부를 수 있는 노래는 단 한 곡도 없다. 그 중에서도 <The Way.......>는 아예 제목조차도 들어본 적이 없다. 멜로디가 너무도 착착 감겨와 그 노래를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검색을 통해 가사를 알게 되었고, 서너 번 되풀이해서 부르자 그대로 기억 속으로 들어와 앉았다. 커닝하지 않고 온전히 부를 줄 아는 유일한 팝송이다.

 

더 감동적인 경험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찾아왔다. 원효에 심취해 그와 관련된 허다한 글들을 읽으며 몇 년을 지냈다.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원효 연구 수준이 형편없이 낮아서였다. 마침내 작심하고 그 어렵다는 금강삼매경본문을 백문으로 마주했다. 무엇보다 먼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자가 무차별로 쏟아져 나오는 데 앞이 캄캄했다. 그 다음은 글자 하나하나 찾아도 단어, 숙어, 문장, 나아가 문맥 전반을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불가피하게 그런 뇌 작업을 포기했다. 다시 정좌하고, 모른 채 그림(!)에 낱낱이 눈 도끼를 찍으며 막무가내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절망이다 싶은 어느 순간, 갑자기 문단 전체를 한 눈으로 찍는 일이 일어났다. 정작 온몸에 소름 돋는 일은 바로 그 다음 순간 일어났다. 그 뜻이 몸속으로 술술 흘러들어온다!

 

지금 다시 금강삼매경본문을 백문으로 마주하면 처음 상황과 비슷할 터. 그러나 그때 내 속을 파고 들어온 텍스트 신체는 향후 내 인생 전체를 밝히고 지탱하고 성장하게 했다. 내게 새겨진 의미가 다른 해석·실천과 대비해 수준이 낮다거나 심지어 오류라는 근거는 아직 어디서도 찾지 못했으니 이만하면 내 독서는 뇌 독서가 아니고 신체 독서라 신뢰해도 되지 않을까. 자랑이 자만 턱밑까지 왔다 싶은 바로 이때 내 안와전두엽을 두드린다.

 

뇌로 읽으면 독서가 아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뇌 독서로도 새로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뇌 독서는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바를 재확인할 따름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재확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뇌가 소화하는 진리는 형식논리고 형식논리는 동어반복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동어반복도 즐거움을 준다. 그 즐거움에 빠진 상태가 바로 중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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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입으로 하는 말과 신체가 발신하는 메시지가 다른 경우를 종종 마주합니다. 그때 어느 쪽을 신뢰할까.......대부분 사람은 말을 좇아갑니다.(89~90)

 

이중구속을 언급한 <2. 작아서 높다>에서 미세한 징후가 지닌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그 미세한 징후가 바로 여기 신체가 발신하는 메시지다. 신체가 발신하는 메시지는 왜 미세, 또는 미세하다 할까? 이 또한 비대칭대칭이다: ‘말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소통해온 인습이 신체 메시지를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문명·사회적 근거와 말은 중추신경 영역이므로 macro하고, 신체 메시지는 말에 직접 수반되는 변화를 제외하면 모두 자율신경과 장신경 영역이므로 micro하다.’라는 자연·생리적 근거 사이.


남성, 자아, 이성, 형식논리가 지배해온 인류 역사는 곧 말이 지배해온 역사다. 말이 거대하고 강력한 이유는 통치 집단이 말을 그런 도구로 악용했기 때문이다; 문자를 전유하고 의미를 독점했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민주주의 시대에도 본질은 불변이다. 이런 광풍에서 비껴난 소수 민족, 예컨대 북미대륙 선주민은 신체 메시지를 미세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중추신경은 human-biont인간이 통어하므로 직접 지각이 쉽다. 자율신경과 장신경은 인간이 통어하지 못하고, 특히 장신경은 micro-biont인 곰팡이나 박테리아, 심지어 바이러스가 통어하므로 직접 지각이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하다. 그나마 심장 박동 정도는 훈련된 사람이 맥을 짚어야 어느 정도 다양한 신호를 감지하고, 나머지 경우는 크게 병들지 않으면 대개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지만 어쩌면 장구한 시간 동안 우리 무지로 방치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이제부터 유념하고 극진히 두드려야 할 문이 아닐까.

 

입에서는 행복하다는 말이 흘러나오는데 신체가 숲으로 들어가 흙을 가만가만 만지고 있을 때, 거기서 우울증 읽어내는 감각이라면 연마하지 않아도 지녀야 할 시기가 박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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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는 수줍음 타는 아이를 자기표현 잘 하고 자기결정 할 수 있고, 자기의견 척척 말할 줄 아는 아이로 교육하고 있습니다. “자기의견을 말하세요. 자기가 좋아하는 바를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표현하세요. 자유와 권리를 찾으세요.”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자기정체성, 자유, 욕망 따위는 모두 뇌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뇌는 어딘가에서 남 이야기를 가져와 다만 출력할 뿐입니다. 아이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의견을 말해보라 하면 지겨울 정도로 틀에 박힌 이야기만 합니다.......본인은 자유롭다고 생각하는데 자유를 구사하는 방식이 무서울 정도로 똑같습니다.......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하거나 머뭇거림은 신체가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신체가 뇌 폭주를 저지하고 있는 상태입니다.(86~87)


 

흔히 성격처럼 인식되지만 수줍음은 사회 감응이다. 경험에서 나왔다면 더욱 그렇다. 남 앞에서 말이나 행동하는 일은 물론, 남과 마주하는 일 자체를 어려워하는 일은 바탕에 사회 공포·불안을 깔고 있다. 사회 공포·불안은 사회가 본성상 Anon-A 비대칭대칭이 전방위·전천후로 뒤엉키는 현장이기 때문에 불가피하다. 불가피한 공포·불안을 불가결한 삶의 요소로 받아들이고 가꾸면서 살아야 인간은 인간다워진다. 인간다울 때 비로소 풍요가 선물로 찾아든다. 풍요로운 인간은 지겨울 정도로 틀에 박힌 이야기, 무서울 정도로 똑같은 방식으로 구사하는 자유, 어딘가에서 남 이야기를 가져와 다만 출력할 뿐인 뇌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뇌가 폭주하려 할 때, 신체를 활발히 작동시켜 저지한다. 신체가 활발히 작동하면 Anon-A 비대칭대칭이 전방위·전천후로 뒤엉키게 된다. 뒤엉킴이 일으키는 complex system networking에서는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하거나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뇌 독재를 불허하기 때문이다.

 

뇌 독재를 불허해서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하거나 머뭇거리는 감응을 수줍음이라고 표현하는 일이 현재로는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수줍음이라는 말 자체 좋은 어감과 달리 미덕으로 인식하는 사회 분위기가 사라져버렸다. 왜곡 오염된 수줍음은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지고 몸이 배배 꼬이는 계집아이를 연상시키는 경계 안에 갇혀 있다. 다른 표현으로 대체하지 않고, 수줍음으로써 이 경계를 넘어가려면 정의를 바꿔야 한다. 정의를 바꾸는 일은 사전 문제가 아니다. 언어공동체 공유 인식 문제다. 공유 인식은 공유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공유 경험은 뇌 독재를 벗어나 신체감성을 회복하는 사건이다. complex system networking이 일으키는 생명 연방 민주주의 사건을 겪으면 수줍음은 자연스럽게 미덕을 되찾으리라. 수줍음 미덕은 아름다운 인간학이지만 그 길은 낭·풀로 돌꽃으로 말로 곰팡이로 뻗어 있다. 섬세하고 강인하게 그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수줍음 신성으로 배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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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17 18: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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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18 08: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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