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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 단비 청소년 문학 42.195 5
김선우 지음, 양세은 그림 / 단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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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휘여, 아프구나-“·······무장승이 이불을 끌어당겨 바리공주에게 덮어주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지붕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들리더니 순식간에 방 안 가득히 박쥐 떼가 소용돌이치듯 밀려들어·······바리공주를 향해 일제히 덤벼들기 시작했다.

“물러가! 내 손님이라니깐!”

손을 휘저어 박쥐들을 막으며 무장승이 소리쳤으나 약수 변에서와는 달리 박쥐 떼는 더욱 요동쳤다. 눈알이 모두 붉게 변한 박쥐 떼가 찌잇찌잇 그악스럽게 울며 바리공주를 할퀴고 물면서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무장승이 박쥐들을 떨쳐내며 다급히 바리공주를 품에 안았다·······”(146-147쪽)

 

황금 빛 박쥐가 무장승과 바리공주 사이에 두 번째 등장합니다. 첫 번째 등장은 무장승이 손을 내밀게 한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번 등장은 무장승이 바리공주를 품에 안게 한 사건을 일으킵니다. 상상력이 한계에 도달할 때 요즘 통속한 드라마 작가들은 우연한 교통사고를 집어넣어 매듭을 풀지만 김선우는 무장승의 무의식과 현실 세계의 에너지를 새 떼로 이미 연결시켜 놓고 유類적으로 문제를 풀어 나아갑니다. (어린 시절 애니메이션에 등장했던 황금박쥐의 추억과 이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1년 전 이 장면을 김선우는 이렇게 풀어낸 바 있습니다.

 

·······알 수 없이 마음을 일렁이게 하는 이 사람의 정체를 확인해보고 싶었다. 뒤척이다가, 무장승이 가만히 손을 뻗어 바리공주의 앞섶에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천천히 섶을 헤치며 가슴 안쪽까지 무장승의 손이 들어온 순간이었다.

여인이다·······.

무장승이 깊은 숨을 들이 쉬었고 순간 바리공주의 손이 무장승의 손을 저지하는가 싶더니 단번에 눈을 뜨며 일어나 앉았다.·······바리공주가·······말문을 열었다.·······목소리는 단호했다.·······

여인은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고 무장승은 여인을 범하려다가 들킨 꼴이 되고 말았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는 심사가 당연하였다.”(「바리공주」136-137쪽)

 

이런 풀어내기가 못내 마음에 걸렸나 봅니다. 청소년을 독자로 삼고 보니 더욱 민망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무장승 편에서나 바리공주 편에서나 께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바리공주는 알고 있고 무장승은 모르는 이 어긋남 또는 아이러니를 해결할 수단은 모르고 있는 무장승 쪽에 장치하는 게 이치에 맞습니다. 미상불 새 떼, 특히 박쥐 떼는 이렇게 탄생하였을 것입니다.

 

정반대의 어긋남 또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하늘이 바리공주를 무장승의 아내로 점지했다는 사실을 무장승은 알고 있고 바리공주는 모르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둘의 해결 방식이 다릅니다. 이 해결에는 새 떼 같은 장치가 없습니다. 사흘 동안 꼼짝 않고 앉아 약수藥水를 품은 신목과 묵언 대화함으로써 바리공주 스스로 답을 찾았습니다. 그 답, 그러니까 사랑을 들고 바리공주가 먼저 무장승에게 청혼하였습니다. '여자사람' 바리가 주체적, 능동적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아간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에는 한결 성性인지적 관점(여성주의라는 용어가 혹 김선우를 옭아매는 게 아닐까 싶어 이 용어를 택하였습니다.)이 돋을새김 되어 있습니다. 김선우가 11년 사이에 더 깊어졌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청소년을 독자로 상정했을 때 김선우의 마음결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입니다. 어른들을 대상으로 했을 때보다 좀 더 맑은 궁금증과 좀 더 뿌듯한 기대감을 지닐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세월호 참극을 통해 뼈저리게 경험하듯 이 나라의 어른 사람들, 특히 헤게모니블록에게는 성인지적 관점이나 성 평등에 관한 말을 들을 귀가 없습니다. 청소년의 말랑말랑한 영혼에 품은 김선우의 설렘이 무한히 번져가기를 삼가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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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만남-“.......마음이 놓여 갑자기 웃음이 배어 나오려는 찰나였다.

해거름 어둠 속이 순식간에 날개 퍼덕이는 소리로 가득해지더니 바리공주의 시야가 검은 장막을 친 것처럼 돌연 컴컴해졌다.......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독수리들과 박쥐들이 날카롭게 우짖으며 날개를 퍼덕이면서 까마득한 공중까지 원기둥을 쌓아올린 채였다.......새들이.......바리를 노려보았고, 원기둥 높은 쪽에 있던 거대한 독수리가 바리공주의 두 눈을 쪼려고 급강하하는 순간이었다.

“내 손님이다. 돌아가!”

굵직한 무장승의 목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새들의 장벽이 사라졌다. 심장이 쥐여졌다 놓여나듯 바리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수천 마리 새들이 자신을 가두고 일제히 노려보는 사태는 지옥만큼이나 섬뜩하다고 생각하며 바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괜찮소?”

다시 무장승의 목소리가 들리며 거대한 그림자가 눈앞에 어른거리더니 구척 거구의 사내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바리에게 손을 내밀어왔다.......”(138쪽)

 

곡진과 절망이 뒤엉킨 기다림의 결과 치고 무장승과 바리의 만남은 그다지 극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밍밍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리가 남장을 했기 때문에 무장승이 뜨악한 반응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쌍방향 해결을 위해 김선우는 기다림 장면에 등장했던 검은 독수리 떼와 황금 빛 박쥐 떼를 다시 등장시킵니다.

 

한편으로는 무장승의 께름한 마음 상태를 반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좀 더 살갑게 다가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모순의 경계에 피는 꽃 문장 하나.

 

심장이 쥐여졌다 놓여나듯 바리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장승이 안부를 묻고 손을 내밀기 위해 조작한 ‘설정’처럼 보이는 나름 극적인 파동波動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신뢰가 형성되어 손을 잡게 되는 극적 장면을 연출한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마치 금시초문이라는 듯 생으로 나서는 말, 그렇지요, 털썩 주저앉았다!

바리의 털썩은 무장승의 털썩과 다른 털썩입니다. 놀라서 맥이 풀린 탓과 긴장이 풀려 안도한 탓이 한 찰나에 겹쳐 있습니다. 기다림의 털썩이 아닙니다. 기다림의 털썩에는 손 내밀어주는 이가 없습니다. 만남의 털썩입니다. 만남의 털썩에는 손 내밀어주는 이가 있습니다. 시절인연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한 오만 년쯤 걸어왔다며 내 앞에 우뚝 선 사람이 있다면 어쩔 테냐 그 사람 내 사람이 되어 한 만 년쯤 살자고 조른다면 어쩔 테냐 후다닥 짐 싸들고 큰 산 밑으로 가 아웅다웅 살 테냐 소리 소문 없이 만난 빈손의 인연으로 실개천 가에 뿌연 쌀뜨물 흘리며 남 몰라라 살 테냐 그렇게 살다 그 사람이 걸어왔다는 오만 년이, 오만 년 세월을 지켜온 지구의 나무와 무덤과 이파리와 별과 짐승의 꼬리로도 다 가릴 수 없는 넓이와 기럭지라면 그때 문득 죄지은 생각으로 오만 년을 거슬러 혼자 걸어갈 수 있겠느냐 아침에 눈뜨자마자 오만 개의 밥상을 차려 오만 년을 노래 부르고, 산 하나를 파내어 오만 개의 돌로 집을 짓자 애교 부리면 오만 년을 다 헤아려 빚을 갚겠느냐 미치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는 봄날, 마알간 얼굴을 들이밀면서 그늘지게 그늘지게 사랑하며 살자고 슬쩍슬쩍 건드려온다면 어쩔 테냐 지친 오만 년 끝에 몸 풀어헤친 그 사람 인기척이 코앞인데 살겠느냐, 말겠느냐 _이병률의 <인기척> 전문

 

바리가 무장승을 만나 이루는 사랑은 사람 모두에게 주어지는 그저 그러한 길입니다. 하지만 바리에게는 온전한 치유를 위한 특별한 길입니다. 상처 없앤 사람이 되는 향 맑은 길입니다. 하지만 무장승에게는 하늘사람으로 복귀하는 특별한 길입니다. 허물 없앤 사람이 되는 빛 부신 길입니다. 바리는 털썩 주저앉을 만큼 고된 건넘을, 무장승은 털썩 주저앉을 만큼 안타까운 기다림을 대가로 지불하고 얻은 지극한 사랑입니다.

 

그렇게 얻은 사랑은 어디로 흘러갈까요. 바리는 공주를 ‘버리고’, 무장승은 하늘사람을 ‘버리고’ 황천강으로 흘러갑니다. 거기서 무얼 할까요.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밉니다. 버림받은 사람이 사랑으로 거듭나 마침내 자신을 기꺼이 버림으로써 버림받은 상처 속에 갇힌 사람들을 구원하는 무한선순환을 일구어내는 것입니다.

지금 이 땅에는 힘 가진 무리 0.1%가 자신들만의 곳간을 채우기 위해 무한악순환구조를 돌리고 있습니다. 국가의 이름으로 날뛰는 강도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바리는 오늘의 황천강으로 나아가 저 무리가 해치고 버린 생명을 구해냅니다. 구원받은 바리데기들은 저 무리 잡아갈 저승사자의 길을 닦습니다. 할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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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무장승의 기다림-“.......무장승이 약수弱水 바닷가에서 가슴을 쾅쾅 두드리자 발밑이 쿠웅쿠웅 울리며 천지가 진동했다. 계속 수평선을 주시하던 그가 안타까운 듯 한쪽 발을 쿵, 구르자 서편 하늘을 빼곡하게 덮으며 검은 독수리 떼와 황금 빛 박쥐 떼가 몰려와 명령을 기다리듯 그의 머리 위에서 맴돌았다.

“휘이, 돌아들 가! 오늘 내 심사가 잠시 어지러운 것뿐이다.”

무장승의 말에 독수리 떼와 박쥐 떼가 순식간에 왔던 곳으로 다시 날아갔다.......수평선을 바라보며 무장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장승이 수평선 저편을 바라보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거대한 그림자가 주저앉자 갯가에 사는 생물들이 썰물 빠지듯 황급히 달아났다........

무장승의 깊은 한숨 소리가 약수 변을 괴이한 적막으로 뒤덮고 있었다.”(120-122쪽)

 

무장승은 바리가 가져가야 할 약수藥水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서천서역국에서 바리가 만날 마지막, 아니 오직 한 사람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하늘이 점지한 바리의 지아비이기도 합니다. 그를 만나 사랑으로 치유를 완성해야 여정이 끝나므로 무장승과 바리의 인연은 가히 화룡점정에 해당하는 중요성을 지닙니다. 청소년을 독자로 삼아 고쳐 쓰면서 김선우는 이 대목에 극적인 분위기가 더 번지도록 공을 들였습니다. 지어미를 기다리는 무장승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그럼에도 부질없음에 대한 절망감이 얼마나 깊은지, 그 역설의 상황을 절절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문득 이병률의 시 <화분>이 떠오릅니다.

그러기야 하겠습니까마는

약속한 그대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날을 잊었거나 심한 눈비로 길이 막히어

영 어긋났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봄날이 이렇습니다, 어지럽습니다

천지사방 마음 날리느라

봄날이 나비처럼 가볍습니다

그래도 먼저 손 내민 약속인지라

문단속에 잘 씻고 나가보지만

한 한 시간 동안 돌처럼 앉아 있다 돌아온다면

여한이 없겠다 싶은 날, 그런 날

제물처럼 놓였다가 재처럼 내려앉으리라

햇살에 목숨을 내놓습니다

부디 만나지 않고도 살 수 있게

오지 말고 거기 계십시오

 

무장승은 잘못을 저질러 하늘에서 쫓겨 내려왔으니 죄 값을 치루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야 할 존재입니다. 지어미를 만나 아들 셋을 낳으면 삼십년으로 탕감된다, 하니 얼마나 간절한 심정일 것입니까. 그러나 팔만사천 지옥을 건너고 날짐승의 깃털도 가라앉는 약수弱水까지 건널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싶으니 얼마나 절망적인 심정일 것입니까. 더군다나 바리를 만나 자신의 운명이 또 어찌 바뀔지 모르는 상태이므로 미상불 그 무의식은 모순으로 요동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김선우는 이 상황을 평범하되 역동적인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무장승이 수평선 저편을 바라보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정곡을 찔러 묘사할 말이 더는 없을 것입니다. 안타까움이 극에 달한 기다림의 끄트머리, 털썩.......그렇습니다, 털썩! 

 

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에 잠깁니다. 나는 누구를, 무엇을 기다리다 이렇게 털썩 주저앉았던가. 돌이켜보니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날카롭고도 질긴 순간 하나 있었습니다. 떠나간 엄마를 애타게 기다리던 유년의 어느 날, 그 기억이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에 꽂힙니다. 무장승에게 바리가 그렇듯, 제게 엄마가 그렇듯, 오늘 팽목 앞바다에서 기다리는 엄마에게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아이가 그렇게, 털썩 주저앉은 기다림의 대상입니다. 무장승에게 바리는 기어이 올 것입니다. 제게 엄마는 기어이 오지 않았습니다. 팽목 앞바다의 엄마에게 아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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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지옥을 건너다-11년 전 <바리공주>는 지옥을 ‘무사히’ 건넜습니다. 오늘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는 지옥을 ‘뒤흔들며’ 건넙니다. 염라대왕의 엄격한 통치 방식을 유연한 것으로 바꾸며 건넙니다. 

 

“내가 지옥을 둘러보니 지옥불 죄인 가운데는 좋은 말씀과 마음으로 보살피면 선한 영혼으로 거듭날 혼귀들이 꽤 있더이다. 형벌로만 다스린다고 죄가 씻기지는 않을 것이오. 불쌍한 혼귀들을 내 식대로 한번 구제해보고 싶소. 염라대왕님의 하락을 받아주오.”

수문장이 곰곰 따져보니, 필요하긴 하나 아무도 할 생각을 못 하던 지옥 일을 이 자가 자처하고 있지 않은가. 그 길로 염라대왕께 전령을 보내 여쭈었더니 흔쾌한 수락의 답변이 돌아왔다.”(133쪽)

죄지은 ‘사실’에 터 잡아 가차 없는 형벌로 다스려지던 지옥의 법도에 죄지을 수밖에 없었던 ‘진실’이 들어갈 틈을 낸 것입니다. 구제의 길을 열어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리의 방식입니다. 이것이 바리의 길입니다. 바야흐로 지옥에 인간의 입김이 쐬어지기 시작합니다.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가 제시하는 세계는 이렇게 다릅니다. 다른 어떤 종교사상에도 없는 지옥의 풍경을 바리의 지옥에서는 볼 수 있습니다. 지옥의 한가운데 산 사람 하나가 들어가 죽은 사람을 구제하고 있는 경이롭고 장엄한 풍경 말입니다. 삶과 죽음의 이분법적 격절이 바리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진실의 꽃을 피워내는 바리에게 지옥이든 천국이든 인간세계든 걸릴 바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원효의 일심-화쟁-무애 사상입니다. 바로 이것이 한(본디 아래아를 써서 표현해야 함) 사상입니다. 포개지되 하나가 아니고 쪼개지되 둘이 아닌 묘법의 이치가 구현되는 누리가 바리의 시공간입니다. 지구상의 그 어떤 사상으로도 감당이 안 되는 가로-세로-높이를 지녔습니다.

 

이 옹골차게 말랑말랑하며 탱맑은 세계는 바리가 버림받은 존재지만, 아니 버림받은 존재라서 자신을 극진히 사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빚어낸 세계입니다. 쌍방향 생명작용의 비밀은 바로 버려짐, 그 절대 아픔에 있습니다. 절대 아픔에 대한 도저한 마음 씀은 개인의 경계를 넘어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넘어섬이 지옥의 통치 질서까지도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지옥을 건너오면서 눈물을 속으로 삼킨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수척하게 깊었다. 그간 무쇠 옷은 옷소매며 앞섶이 많이 닳아 있었다. 손등이며 손가락 끝이 죄다 갈라터지고 얼굴의 살결도 거칠게 터서 외형은 남루하기 짝이 없었으나, 바리공주의 얼굴에선 단단하고 투명한 빛이 그윽하게 배어나오고 있었다. 강하고 고독한 바리의 눈빛은 첫새벽 이슬을 그대로 얼려놓은 듯한 영롱함으로 가득했다. 목표를 향해 두려움 없이 나아가고자 매 순간 자기 자신과 맨얼굴로 만나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당당하고 환한 빛이 바리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서천서역국으로 출발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고 강인한 얼굴로 바리가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134-135쪽)

 

바뀐 것은 지옥만이 아닙니다. 바리도 바뀌었습니다. 바뀌고 있습니다. “단단하고 투명한 빛이 그윽하게 배어나오”는 얼굴, “첫새벽 이슬을 그대로 얼려놓은 듯한 영롱함으로 가득”한 눈은 물론 “당당하고 환한 빛”이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이 바뀜이 곧 치유입니다. 바리는 곡진한 변화과정을 거쳐 완벽한 치유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본디 마음의 아픔은 배움과 자람에 문제가 생긴 것이니 치유로서 변화는 배움과 자람의 흐름으로 나타납니다. 바리는 여자 사람으로 배우고 자라납니다. 바리는 여자 너머 사람으로 배우고 자라납니다.

바뀐 지옥이 바리를 바꾼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일과 개인을 바꾸는 일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현대 여성운동의 명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타당합니다. ​바리공주가 지옥을 바꾸듯 세월호의 바리들이 지옥 같은 이 나라를 바꾸고야 말 것입니다. 나라를 바꾸지 않으면 결코 아이들 생령의 치유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에. 이제 점점 운명의 웅숭깊은 산 그늘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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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금주령과 낭화 세 가지-바리가 유리산을 꿰뚫고 나온 것은 트라우마로서의 공포, 버려진 운명, 삶의 천명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일어서 내달리는 일련의 깨침, 그러니까 치유 체험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만난 것은 청태산 마고할미입니다.

 

마고할미는 “두 눈 사이에 청옥을 박아 넣은 것 같은”(109쪽) 제3의 눈을 지닌 욕쟁이 할미입니다. 제3의 눈을 지닌 것과 욕쟁이인 것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깊은 일치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3의 눈은 통속적 관점으로는 볼 수 없는 차원 높은 진실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욕은 인간이 지닌 언어 가운데 가장 곡진한 것입니다. 거칠고 딱딱한 표현을 통해 돌연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진면목을 드러내는 선禪적 언어입니다. 말하자면, 둘 다, 세계를 구성하는 비대칭의 대칭이라는 진실에 이르게 하는 탁월한 방편인 셈입니다.

 

마고할미가 제시한 과제는 빨래하기입니다. 빨래의 통속한 의미는 때나 얼룩을 제거해 깨끗하게 하는 작업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어려워도 언젠가는 완수할 수 있는, 실현 가능한 차원에 있는 작업입니다. 검은 빨래 희게 하기지요. 그러나 흰 빨래 검게 하기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통속한 빨래 의미로는 실현이 불가능한 과제입니다. 제3의 눈이 없으면, 마고할미의 욕이란 자극이 없으면 도달할 수 없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흰 빨래 더미의 빨래를 방망이질하면서 또 몇 밤이 지나간 어느 아침이었다. 바리공주의 표정이 일순 환해지더니 빨래 더미를 들고 개울가 흙바닥으로 나가 앉아 흙에다 빨래를 비벼대기 시작했다.......

물에다가만 빨래를 하란 법 있나. 세상이 처음 날 적에 지수화풍이 그 모체였으니 흙 묻은 옷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사람살이의 생각 한끝 차이지.......

그렇지. 생각 한끝 차이지. 연꽃이 꽃잎을 여는 것도 진흙탕을 통과한 다음부터지.

흙빨래를 해서 걷어진 빨래를 다시 빨래 방망이로 두드리며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지는가 싶었다. 그러더니 거무튀튀해진 빨래들이 감탕 같은 검은 빛을 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바리공주의 숱 많은 머리칼 색을 꼭 닮아 있었다.”(110-111쪽)

 

그렇습니다. 빨래는 다만 때나 얼룩을 제거해 깨끗하게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빨래는 “감탕 같은 검은 빛을 내기” 위한 능동적·창조적 작업이기도 한 것입니다. “생각 한끝 차이”로 이런 발상을 한다면 세상은 더 이상 고통도, 악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생각 한끝 차이”를 실행하기 지난하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바리가 이런 깨침에 이른 것은 마고할미의 깨우침에 힘입은 바 크지만 그 전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일어서 내달린 유리산 체험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바리는 이제 확연히 깨달았습니다. 부분은 오류라는 것. 세계의 진실은 비대칭의 대칭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이 깨달음의 끝에 바리가 다다른 곳은

 

기이한 곳이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바리는 자신이 물위를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색 물고기들이 가득 노니는 물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는데 바리는 그 위를 걷고 있었다. 물에 빠지지도 젖지도 않은 채 마치 얼음판 위를 걷듯이 가다 보니 눈앞에 불쑥 검은 섬이 나타났다.”(113쪽)

 

진실을 온 몸에 지닌 사람은 “물에 빠지지도 젖지도 않은 채 마치 얼음판 위를 걷듯이” 물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기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치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 또한 어린 시절 버림받은 상처 때문에 길디긴 세월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한창 아플 때 자주 꾼 물 꿈은 시퍼런 물에 빨려 들어가거나 무서워 도망치는 꿈이었습니다. 치유가 익어갈 무렵에 더 자주 꾼 꿈은 물에 빠지지 않고 달리거나 나는 꿈이었습니다.

 

 

이 순간 문득 저 어둡고 차가운 물속에서 숨져간 아이들, 우리 시대의 바리들을 생각합니다. 하루 빨리 치유해서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이 땅의 어른들이 끝내 잊지 않고 정치경제적·사회역사적 처결을 관철해내야 할 것입니다. 치유와 자유는 단지 부분적 뒤치다꺼리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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