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시인선 52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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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멀었다>

이문재

지하철 광고에서 보았다.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옵니다.
그 이유는, 인디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얼마나 높고
넓고 깊고 맑고 멀고 푸르른가.

땅 위에서
삶의 안팎에서
나의 기도는 얼마나 짧은가.

어림도 없다.
난 아직 멀었다.

*   *   *

 

어찌 생각해야 할까요?

기우제를 그렇게 곡진한 마음으로 지내서 비가 왔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비는 올 때 돼서 온 것이고 그저 그 때까지 기우제를 지낸 것뿐이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 전에 가만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두 생각은 과연 전혀 다른 생각일까요?

이 두 생각은 딱 한 지점에서 만납니다.

인간의 처지에서 품을 수 있는 생각과 할 수 있는 일이 오직 그 하나뿐이었다는 사실.

우리가 세상의 이치와 인연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다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채 곡진히 살아갈 뿐입니다.

자신의 삶이 장엄에 미치지 못 하여 비애에 젖어 있다면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아직 못 다한 숭고함이 남아 있으니, 자 이제부터 시작하자." 

 

 

저 또한 비애로 가득찬 삶의 길을 걸어, 아뿔싸, 오십대 끝자락에 섰습니다.

고백하건대, 늦어서 때 맞게 오늘 천명의 말 한 마디 비로소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의 뜻이 제게서 다 이루어질 그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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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윤동주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 * *

 

 

 

평론가 신형철은 이 시를 읽으며 서정시의 윤리학을 이야기하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정은 언제 아름다움에 도달하는가. 인식론적으로 혹은 윤리학적으로 겸허할 때다. 타자를 안다고 말하지 않고 타자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자신하지 않고, 타자와의 만남을 섣불리 도모하지 않는 시가 그렇지 않은 시보다 아름다움에 도달할 가능성이 더 높다. 서정시는 가장 왜소할 때 가장 거대하고, 가장 무력할 때 가장 위대하다. 우리는 그럴 때 ‘서정적으로 올바른(poetically correct)'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 서정적으로 올바른 시들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안다. 그곳은 ‘그가 누웠던 자리’다.”(「몰락의 에티카」512쪽)

 

서정시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는 의학에도 그대로 통합니다. 하지만 현대의학은 겸허하기는커녕 도리어 오만합니다. 기계 진단만으로 환자를 안다고 말합니다. 환자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환자와의 만남을 섣불리 도모합니다. 현대의학은 스스로 가장 거대하고 위대하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현대의학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알지 못 합니다.

 

현대의학은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자본주의의 핵심부에 있다는 외부조건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근본적으로 불가피한 면이 있습니다. 서구사상의 기저에 깔려 있는 형식논리, 거기에 터 잡은 합리적 인식론이 현대의학 이론과 의료 실천의 근간이기 때문입니다. 신형철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

 

아도르노의 말이다. “합리적 인식은 고통과 거리가 멀다. 그것은 고통을 총괄하여 규정하고 그것을 완화하는 수단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을 체험으로써 나타낼 수는 없다. 합리적 인식이 볼 때 고통은 비합리적인 것이다. 고통이 개념화되면 그것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되고 일관성도 없어질 것이다.” 요컨대 합리적 인식은 고통을 이해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은 있다.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의사의 매뉴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시에 있다.”(앞의 책 508-509쪽)

 

합리적 인식은 왜 그토록 고통과 먼 거리에 있을까요? 고통은 왜 합리적 인식으로는 포착되지 않을까요? 고통은 죽음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힘과 삶으로 밀어 올리는 힘이 맞부딪는 곳에서 일어나는 아프고 힘들고 불편한 소요騷擾입니다. 고통은 그러므로 역설입니다. 역설이기에 일방적으로 이해하고 처리할 문제가 아닙니다. 서구의학은 이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 했습니다. 고통을 무조건 없애야 할 무엇으로 판단하여 이론과 실천을 온통 그 쪽으로만 몰아갔습니다. 결국 현대 의사의 매뉴얼에는 고통의 진실이 담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시인의 시에 고통이 있다고 한 신형철의 말은 과연 옳습니다. 시는 언어의 요체입니다. 언어의 요체는 은유입니다. 은유의 요체는 역설입니다. 역설이 아니면 시가 아닙니다. 시가 아니면 고통을 담을 수 없습니다. 시인의 마음이 아니면 고통을 마주할 수 없습니다. 신형철의 정확한 표현 하나를 더 가져오겠습니다.

 

시인은 병 없이 앓는 자다.”(앞의 책 509쪽)

 

그렇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고통의 치료자인 의자醫者는 근본적으로 시인의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시인의 마음으로 진단하고 치료해야 합니다. 시인의 언어로, 그러니까 역설로 빚어내는 새로운 의학·의료체계를 세워야 합니다. 결국 여기서도 답은 인문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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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나무와 나

 

오규원

 

뜰 앞의 잣나무로 한 무리의 새가​

날아와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래도 잣나무는 잣나무로 서 있고

잣나무 앞에서 나는 피가 붉다​

발가락이 간지럽다

뒷짐 진 손에 단추가 들어 있다

내 앞에서 눈이 눈이 온다

잣나무 앞에서 나는 몸이 따뜻하다

잣나무 앞에서 나는 입이 있다​

​*    *    *

​山是山水是水

​山不是山水不是水

​山是水水是山

​山是山水是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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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 단비 청소년 문학 42.195 5
김선우 지음, 양세은 그림 / 단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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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작가의 말-“우리들의 바리는·······기성의 질서에 짓눌려 자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자아 찾기의 계기로 역전시키는 존재입니다. 선언하는 방식이 아니라 보드라운 바람이 온 몸을 휘감아 오듯이 이 경계를 넘어가지요. 체제 내부에 안주하길 거부하며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바리는 낯선 세상에 자신을 던지는 모험을 통해 성장합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버려져야 했던 바리공주가 험난한 여정 끝에 무조신이 되는 과정은 그대로 이 땅에 존재했던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질서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저항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바리는 ‘버려진 존재’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자신의 운명과 싸워 스스로를 구해냅니다. 버려진 딸이 바로 문제해결의 주인공이 되는 거지요.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운명을 개척하여 새로운 운명을 자신에게 부여한 전사 바리. 수처작주隨處作主 하는 그녀는 가장 능동적인 의미에서 아모르파티의 구현자입니다. 자기 자신을 지키는 한 우리는 패배하지 않습니다.

·······현실세계의 부와 권력이 자신의 진짜 행복이 아님을 알아챈 바리의 선택은 자기 자신에게 고유하게 내재하는 행복의 감각에 예민하게 깨어 있으라고 우리를 자극합니다. 권력자가 주는 보상을 받아들임으로써 얻어지는 수동적인 성공을 거부하고 스스로가 원하는 일을 선택하는 바리는 기성 체계가 만든 어떤 제도도 규칙도 여러분을 옭아매게 하지 말라고 전하는 듯합니다. 스스로 자유롭고 스스로에게 가장 적합한 행복을 찾아내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지, 성공이라고 일괄 제시되는 외부의 가치에 물음표를 던져야 한다고 말이지요.

·······기성의 질서는 솔직히 말해 희망적이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더욱더 바리의 이야기를 청소년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현실이 암담할수록 더욱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가지자고 손 내밀며 우리 내면을 깨우는 바리. 버려진 존재에서 여신이 되는 바리가 온 몸으로 보여주듯이 사랑하는 자, 자신의 행복에 깨어 있는 자, 자신이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충만한지 깨닫고 자신의 목소리를 따라가는 자, 두려움 없이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감행하는 자,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 희망은 자연스럽게 우리 내부에 스며들게 될 것입니다. 무한한 응원과 사랑을 보냅니다.”(206-209쪽)

 

OECD국가 가운데 청소년 자살률 1위인 나라, 청소년 10명 가운데 6명이 우울정서에 시달리는 나라,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교과목을 가장 많은 수업 시간을 통해 주입식으로 청소년을 가르치는 나라, 청소년이 삶의 가치 가운데 돈을 1위로 꼽을 만큼 뒤틀린 나라, 이게 대한민국입니다.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은 아이들을 ‘통째로 내다버린’ 나라 맞습니다. 아무리 ‘잘나가는’ 아이라도 이 나라에서 바리데기 아닌 아니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지난 지선 무렵 ‘미개인’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그 아이도 철저히 버림 받은 아이입니다. 심지어 인간다운 삶을 찾아 제도 밖으로 나가서 대안교육을 받는 아이들조차도 부조리한 국가가 아니었다면 구태여 ‘힘든 결단’을 내리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 버림받은 것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2014년 4월 16일, 급기야 국가가 3백 명의 아이들을 세월호라는 유령선에 가두어 수장시키는 일대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파란만장한 역사나 복잡한 사회제도의 틈바구니에서 일어난 익명적 ‘버림 사건’이 아닙니다.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특정한 집단이 기획한 ‘버림 사건’입니다.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이 주장하는바 교통사고는 더더욱 아닙니다. 단박에 3백 명의 바리데기를 생산해낸 정치공작입니다. 바로 지금 이 시각에도 기획·공작은 진행 중입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자, <작가의 말> 표제 문장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버려지는 존재의 슬픔이 있는 한 오늘도 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긍정할 수는 없으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진실, 인간의 역사는 극소수의 권력집단이 절대다수의 바리데기를 만들어온 발자취입니다. 앞으로도 역사는 그렇게 전개될 것입니다. 바리데기 이야기는 영원히 끝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영원한 이야기가 던져주는 영원한 과제는 영원의 찰나마다 바리데기들이 스스로 깨치는 것입니다. 스스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버려졌으므로 더욱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힘이 철저하므로 내 경계를 뚫고 나가 남에게로 번져가는 삶, 그 삶, 그 살림의 따스하고도 탱탱한 감각으로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도 더는 버려지지 않는 세상, 물론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니까 꿈꿉니다. 그 꿈으로 우리 바리데기들은 무장승을 만날 때까지 나아갈 것입니다. 무장승과 나누는 사랑으로 우리 바리데기들은 치유가족을 이룰 것입니다. 우리 치유가족은 언제일지 모르는 세상 끝 날까지 황천강 가에서 함께 삶과 죽음을 보듬어 갈 것입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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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 단비 청소년 문학 42.195 5
김선우 지음, 양세은 그림 / 단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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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씻김-“·······버려진 존재라는 고독감이 소녀의 마음 밑바닥에 똬리를 틀고 소녀를 괴롭게 한 것이 사실이나 저는 이제 과거의 그 바리가 아닙니다. 버려져서 원한을 품게 되면 재앙신이 되어 스스로를 심화지옥에 가둘 것이로되, 버려졌더라도 끝끝내 사랑을 품으면 자유에 이를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먼저 깨달은 자의 소명으로 소녀는 버려져서 아파하는 여리고 어린 목숨들을 보살피는 이가 되고자 하오니 다만 그뿐이로소이다.·······죽음은 삶과 한 쌍이더이다. 죽음이 죽음으로만 방치되면 재앙일 것이로되 사랑을 얻으면 삶이 되더이다.·······버려진 존재라는 덫에 걸려 내가 누구인지 찾지 못한 채 헤매던 저를 약수지킴이 무장승의 사랑이 살렸습니다. 인생에는 매번 죽음의 순간이 닥치나 사랑이 없으면 죽음 앞에 엎어질 것이요 사랑이 존재한다면 삶이 되는 것이 생사의 이침임을 알았나이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이 될 수 있도록 이끌고 인도하는 일이야말로 제가 세상에서 하고픈 일임을 생명수를 구해오는 여정을 통해 깨달았사오니·······”(195-196쪽)

「바리공주」가「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로 거듭나는 과정을 주도한 것은 사랑, 이 한 마디입니다. 무엇보다 무장승과 바리가 사랑을 열어가는 과정과 의미의 갈피를 세세히 보살펴서 독자들의 감성을 다독거리고 있습니다.

 

사랑은 인간 존재에게 필연으로 다가드는 상처와 치유, 삶과 죽음 문제를 푸는 열쇠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랑은 ‘목숨 얻은 것들’의 처음과 끝, 앞과 뒤를 꿰뚫고 이어붙이는 무한 선순환의 감각이며 정보이며 지향 에너지입니다.

 

사랑은 삶의 모든 구비에서 중요하거니와 무엇보다 청소년기에 결정적crucial 중요성을 지닙니다. 청소년기는 아이와 어른 사이 변곡점이자 경계선입니다. 통시적diachronic 맥락에서 보면 아이에서 어른으로 변화하는 시점입니다. 공시적synchronic 지평에서 보면 아이와 어른이 마주한 가장자리입니다. 청소년, 이 때, 이 자리에서 결정적 사건이 대부분 발생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가장 결정적인, 그러니까 치명적인 사건은 인생의 시생대始生代에 일어납니다. 바리가 버려진 바로 그 때입니다. 이때는 버려진 아기에게 거의 모든 지각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봉인된 채 세월이 흐릅니다. 그 봉인이 뜯어지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청소년기입니다. 버려진 바리가 부모의 존재를 묻고, 아파하고, 원망하고, 수용하고, 몸부림치며 헤매는 격동의 시간 바로 그 때입니다.

그 때 방치당하면, 그러니까 다시 버려지면 재앙이 되고 죽음이 됩니다. 사랑이 닿으면 축복이 되고 삶이 됩니다. 축복과 삶을 불러오는 사랑이란 과연 어떤 사랑일까요? 상처의 인과와 무관한 새로운 인연이 피워내는 사랑입니다. 책임도 의무도 없는 타인입니다. 대가도 보상도 없는 제삼자입니다. 이런 사랑에서만이 창조인 치유, 치유인 창조가 일어납니다. 바리와 무장승이 그러하듯 말입니다. 바로 이 진실을 ‘밑줄 긋고’ 전해주기 위해 김선우는 11년의 세월 동안 「바리공주」를 품고 있다가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로 낳은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바리는 상처를 넘은 치유, 죽음을 건넌 삶의 시공에 도달하였습니다. 싯다르타의 열반보다, 예수의 부활승천보다 설레고 짜릿하고 향기롭고 아뜩하고 신나는 세계입니다. 물론 바리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돌아옵니다. 상처와 치유가 만나는 어름으로. 삶과 죽음이 마주하는 가장자리로. 죽은 사람들, 버려진 것들의 혼을 이끌어 쓰다듬고 씻기는 황천강 가로. 실은 바리가 돌아온 여기가 더 설레고 짜릿하고 향기롭고 아뜩하고 신나는 세계입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바리는 여자사람으로서 삶과 죽음을 함께 보듬는 신이 되었습니다. 다른 어떤 신 이야기에도 나오지 않는 어미 구원신입니다. 더군다나 그가 사는 이 경이로운 삶에는 늘 그의 가족이 함께 합니다. 다른 어떤 신 이야기에도 나오지 않는 가족 구원신입니다.

 

우리 가슴 깊숙한 공간, 우리 내력 기나긴 시간에는 이처럼 독특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자리 잡아 흐르는데 이제 우리가 사는 이 나라는 왜 이렇게 상처와 죽음에 휘감겨 있을까요. 누가 이 백성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입히며 죽음을 강요하고 있을까요. 세월호에 아이들을 가두어 죽인 세력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 상처를 넘게 하고 죽음을 건너게 하는 바리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그 바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요, 기다리는 것이 맞을까요. 무엇보다 먼저 이 질문들 앞에 결곡히 마주서야 합니다. 바로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단 하나의 결기-칼 날 위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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