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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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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자본의 하수인이·······다.(18쪽)


2012년 방영된 드라마 <추적자>에서 한오그룹 총수인 서회장이 ‘로마로 치면 대통령은 서민이 뽑은 호민관에 지나지 않으며 그 위에 원로원과 집정관, 그리고 황제가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를테면 자기가 황제라는 것입니다. 이 소름 돋는 말의 단도직입적인 해석이 바로 “정치는 자본의 하수인이·······다.”입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우리 역사와 사회를 돌아보면 이 해석이 얼마나 리얼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신영복 선생이 ‘인조반정 이후 이 나라는 서인노론의 나라였다. 지금도 바뀐 것이 없다.’는 요지의 말씀을 했고, 이것이 한 동안 논란꺼리가 되었습니다. 서인노론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선생의 말씀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박정희를 비롯한 영남패권의 인맥 다수는 남인 계열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통치권자와 그 위요집단이 누구인가와 상관없이 매판적 본질을 통해 자본을 구축한 주류 지배층의 최근 맥락을 서인노론에서 잡는 것은 그리 문제 삼을 일이 아닙니다. 전체적 관점에서 보면 정권을 잡으려는 집단과 그 정점에 있는 통치권자에게 준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서인노론과 그들의 족보를 정신적으로 사들인 자들이 지닌 엄청난 돈입니다. 독재와 그에 준하는 통치를 구가했던 자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을 조종하는 최종의 배후는 교육·문화·종교계에 비정치의 탈을 쓰고 똬리 튼 매판자본입니다. 그들에게 계시가 내려오는 지성소는 ‘스위스’ 또는 ‘버진 아일랜드’입니다.


자본의 신성성 이야기가 나왔으니 신약성서(마 6:24)에 나오는 예수의 칼 같은 말씀을 다시 칼 같이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mammon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이 말씀대로라면 대한민국의 기독교, 특히 개신교인들이야말로 재물, 말하자면 자본과 대척점에 서 있어야 옳습니다. 물론 말과 달리 저들 대부분은 하나님 아닌 재물을 섬깁니다. 물론 착오와는 달리 그들이 일상에서 체험하는 기적은 돈의 역사役事일 뿐 하나님의 역사는 아닙니다. 재물을 섬기고 재물의 역사하심에 감사하는 그들인 만큼 당연히 정치로써도 그 하수인 노릇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미군정 이래 개신교는 대한민국의 정치적 부조리에 주도적으로 개입해왔습니다. 결국 대한민국 개신교의 내부적 진실은 ‘재물을 섬기는 정치집단’으로 요약됩니다. 물론 그들의 정치적 정체성은 매판식민세력과 독재세력, 그리고 분단고착세력에 부역하는 수구守舊입니다.


정치가 자본의 하수인인 상황에서 우리가 더 섬뜩하게 직접 마주치는 것은 자본의 신성성이 아니라 하수인으로서 정치의 비열함과 잔혹함입니다. 마치 국권상실기의 일본인보다 그 앞잡이 노릇 한 친일파 조선인이 그랬듯 말입니다. 정치의 권위와 물리력으로 죽이고 빼앗는 현실의 공포는 가차 없이 대중을 노예로 만들어버립니다. 인간의 존엄과 기본적 소득을 동시에 수탈당한 노예는 이내 자발적 예속상태로 빠져듭니다. 참혹함의 극치입니다. 오늘 여기 대한민국 99%가 바로 그 참혹함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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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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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체제가 초래하는 개개인의 전면적 고립 상태는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

개인적 자유는·······자본의 간계, 자본의 음모로 나타난다.·······자본은 개인적 자유를 수단으로 또 다른 자기 자신과 교접한다.·······

개인의 자유를 통해 실현되는 것은 자본의 자유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개인은 자본의 성기로 전락한다.


자유는 근본적으로 관계의 어휘다. 사람들은 좋은 관계 속에서, 타인과의 행복한 공존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타인과 함께 자아를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는 성공적인 공동체와 동의어다.(12-13쪽)



요즘 통속한 TV드라마에는 거물 정치인, 재벌 총수, 스타 연예인이 거의 빠짐없이 등장합니다. 거기서 드러나는 저들의 공통적 면모는 자기 자신(이나 그 연장인 일차집단)을 위해서라면 범죄조차 마다하지 않으며 심지어 자랑으로 삼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사회 최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이 오직 자기 자신(이나 그 연장인 일차집단)을 위해서만 야차같이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설마 저러랴 싶지만 현실 사회에서는 훨씬 더 심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각종 매체를 통해 전해지는 우리사회의 실제 거물 정치인, 재벌 총수, 스타 연예인들의 면면 일부만으로도 그 증거는 충분합니다.


이들이 지닌 권력과 돈, 그리고 명예의 자유에 놓여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것이 자기 자신(이나 그 연장인 일차집단)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사회적 지위를 고려한다면 어떤 형태로든 공적 차원으로 이들의 삶이 번져가야 함에도 철저히 사적 논리에 갇혀 있습니다. 이렇게 고립된 상태에서 무한히 자기 증식만을 거듭하는 것이 다름 아닌 암입니다. 이들이 구가하는 자유란 결국 자기 자신을 사회의 암적 존재로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사회 전체를 죽이고 종당 자기 자신도 죽이는 이것을 자유라고 말할 수는 결코 없는 노릇입니다. 이것은 치명적 중독일 뿐입니다.


자유가 인간의 개념인 한 자유는 사회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적이라는 것은 각자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기, 두 사람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만 자유롭고 한 사람은 자유롭지 못하다면 자유로운 사람의 자유를 자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유는 자유롭지 못한 사람의 자유롭지 못한 것의 대가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타인과의 행복한 공존” 상태가 아닙니다. 이런 사회에서 자유는 당최 거론할 수조차 없습니다. 오직 “타인과 함께 자아를 실현”하는 “성공적인 공동체”에서만 자유를 말할 수 있습니다. 자유는 필경 공공公共 운동입니다.


오늘 여기 대한민국은 매판자본과 독재권력, 그리고 세속종교가 야합하여 세운 저들만의 패거리 정치위원회입니다. 저들은 이른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외치지만 그 ‘자유’란 참 자유를 질곡으로 몰아넣은 가짜입니다. 그 ‘자유’는 “자본의 성기” 노릇으로 대박 난 자들이 환각으로 느끼는 가짜입니다. 세월호를 바다에 빠뜨려 250명의 꽃 같은 아이들을 죽인 '자유'입니다. 메르스를 방치하고 전쟁 위험을 조장해 온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한 ‘자유’입니다. 그 ‘자유’로 참 자유를 구축驅逐한 이 사회는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닙니다. 공동체성이 붕괴된 사회에 무슨 자유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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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발적 자기착취


  스스로 자유롭다고 여기는 성과주체는 실제로는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성과주체는 주인에 묶여 있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한다는 점에서 절대적 노예라고 할 수 있다.·······(10-11쪽)

  자본주의의 변이체인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를 경영자로 만든다.·······모두가 자기 자신의 기업에 고용되어 스스로를 착취하는 노동자다.·······(15쪽)


누구도 누구든 착취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하물며 자기 자신을, 더군다나 자발적으로 착취한다는 것은 “절대적” 도착倒錯입니다. 도착은 신자유주의의가 살포한 아편입니다. 자기 자신을 우선순위에 놓지도 않고 중심에 두지도 않게 함으로써 웃으며 제 허벅지를 베어내도록 하는 마약효과입니다. 오직 인간세상에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존재론적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풍경입니다.

  

  (2) 고립


  ·······홀로 고립되어 스스로와 싸우고 스스로를 착취하는 경영자의 고독이 오늘날의 생산양식을 특징짓는다.·······(15쪽)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성과주체는 고립화되고, 이로 인하여 공동체의 행위를 할 수 있는 정치적 우리 자체가 형성되지 못한다.(17쪽)


자발적으로 자기착취를 하는 노예는 당최 다른 누구와 손잡고 “공동체의 행위를 할 수 있는 정치적 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자발적이므로 불만 있을 리 없습니다. 자기착취이므로 서로 도울 일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시작해서 자기 자신이 끝맺을 따름입니다. 자본의 분할통치 중심부에 바로 “고립”이 있습니다.


  (3) 우울증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에서 실패하는 사람은 사회나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실패의 책임을 돌리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바로 여기에 신자유주의적 지배 질서의 특별한 영리함이 있다. 신자유주의 질서는 시스템에 대한 저항 자체가 일어나지 않게 만든다.·······신자유주의의 자기 착취적 질서 속에서 사람들의 공격성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겨냥한다. 이러한 자기 공격성으로 인해 피착취자는 혁명가가 아니라 우울증 환자가 된다.(17쪽)


신노예제사회 저주는 모든 노예들을 우울증 환자가 되게 함으로써 완성됩니다. 2020년 이른바 선진국에서 가장 중대한 건강 문제가 우울증이 될 것이라는 세계보건기구 발표는 의미심장합니다. 우울증은 자발적 자기착취가 극에 달했을 때 나타나는 준엄한 병리입니다. 자기착취의 종착역은 자기살해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들이 스러지면 주인도 스러집니다. 절대 유일신도 스러집니다. 그 “특별한 영리함”도 스러집니다. 여섯 번째 대멸절이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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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유 자체가 강제를 생성하는 특수한 역사적 시기를 살고 있다. 할 수 있음의 자유는 심지어 명령과 금지를 만들어내는 해야 함의 규율보다 더 큰 강제를 낳는다. 해야 함에는 제한이 있지만, 할 수 있음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할 수 있음에서 유래하는 강제는 한계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역설적 상황에 빠진다. 자유는 본래 강제의 반대 형상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강제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처럼 강제의 반대여야 할 자유가 강제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10쪽)

 

모순 관계에 있는 두 사태 또는 가치가 공존할 때 그것을 역설이라 하므로 여기 “반대 형상”이라는 표현은 다소 모호한 채로 모순을 지시한다고 봅니다. 자유와 강제가 모순 관계임이 맞는다면 둘의 공존은 분명코 역설입니다.

 

자유가 강제를 가져오는 오늘의 상황이 과연 모순의 공존일까요? 아닙니다. 강제는 실재이고 자유는 환상입니다. 자유는 강제의 가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순처럼 보이고 공존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바로 자본의 음모입니다.

 

진실의 전경全景을 품고 다시 위 본문을 보면 첫 문장을 아래와 같이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강제 자체가 자유를 생성하는 특수한 역사적 시기를 살고 있다.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둘 경우, 우리는 자본의 음모에 이중으로 착취당하게 됩니다. 무제한의 강제는 결국 우리가 구가하는 무제한의 자유 탓이라는 죄책감마저 떠안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은 이와 같은 악무한까지 계산에 넣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자유란 인간 생명이 지니는 각성 상태의 지향으로 강제의 견고함을 깨뜨리는 상태 또는 행위입니다. 참 자유이려면 영속적인 강제를 위해 사이비 자유를 만들어 우리를 농락하는 자본에 대한 최후의 사유를 시작해야 합니다.

 

자본은 인간이 탐욕과 공포, 그리고 무지의 주문으로 불러낸 영물靈物입니다. 수단으로 시작했으나 목적이 되었습니다. 종으로 시작했으나 주인이 되었습니다. 하급 영으로 시작했으나 유일신이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의 생사여탈은 자본의 권한입니다.

 

자본의 이 절대적 ‘영성’은 무수한 단위의 공동체를 지배하는 극소수 헤게모니 집단이 시공으로 얽히며 비고의적 고의를 가지고 기획한 작품입니다. 고대노예제사회의 황금기를 부활시키기 위한 ‘신노예제사회’ 건설 프로젝트가 목하 절정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신노예제사회는 1% 지배집단이 99% 피지배집단을 명목상 자유 주체로 만들어줌으로써 수탈당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더 잔혹한 노예체제입니다. 신노예제사회에서 노예인 줄 모르는 노예가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어찌 해야 할까요?

 

오늘 여기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는 그야말로 생사를 걸고 이 질문부터 해야 합니다.

 

“나는 매판독재분단세력의 노예가 정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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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결국 에피소드로 끝날 것이다. 에피소드란 막간극을 의미한다. 자유의 감정은 일정한 삶의 형태에서 다른 삶의 형태로 넘어가는 이행기에 나타나 이 새로운 삶의 형태 자체가 강제의 형식임이 밝혀지기 전까지만 지속될 뿐이다. 그리하여 해방 뒤에 예속이 온다.”(9쪽)


본디 생명 자체가 에피소드입니다. 장구한 죽음과 죽음 사이에 잠깐 일어났다 스러지는 드라마입니다. 죽음의 구조에 균열을 일으키는 사건입니다. 자유는 그 생명이 지니는 각성 상태의 지향으로 강제의 견고함을 깨뜨리는 상태 또는 행위입니다.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강제의 구조를 뚫고 올라오거나 맞서 싸워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죽음과 강제의 구조를 깨뜨리는 생명과 자유 사건은 세계를 세계이게 하는 기축axis입니다. 생명과 자유라는 기축이 없으면 세계는 다만 적료寂廖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계는 생명과 자유가 죽음과 강제를 마주하여 함께 구성하는 비대칭의 대칭 운동구조 또는 구조운동입니다. 진실의 이러한 전체상에서 본다면 위 문단을 아래와 같이 바꾸는 것은 등가等價의 타당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는 끝내 액시스로 작용할 것이다. 액시스란 변화의 경계 축을 의미한다. 자유의 감정은 일정한 삶의 형태에서 다른 삶의 형태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나타나 이 새로운 삶의 형태 자체가 강제의 형식으로 굳어지지 못하도록 뒤흔든다. 그리하여 해방 뒤에 예속이 떤다.


자유가 에피소드로 끝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과 자유가 끝내 변화의 액시스로 작용할 것이라는 신뢰감은 모순에 가깝지만 분리 불가능한 실재입니다. 위기가 아니면 변화를 말하지 않습니다. 자유의 위기는 강제의 위기입니다. 문제는 자유를 문제 삼아야 하는 대다수 민중의 사유 현실입니다. 부정성을 향해 열려 있다면 해방의 역사를 쓸 수 있습니다. 중독으로 닫혀 있다면 예속뿐입니다.


오늘 여기 대한민국 민중의 자유는 결국 에피소드로 끝날 것입니까? 변화의 액시스로 작용할 것입니까? 500일 전 우리는 대한민국 역사가 세월호사건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500일 후 우리는 대부분 이 말을 잊어버렸습니다. 팽목도 안산도 광화문도 적료에 휩싸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라면 우리의 자유는 결국 에피소드로 끝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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