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 - 균이 만드는 지구 생태계의 경이로움
멀린 셸드레이크 지음, 김은영 옮김, 홍승범 감수 / 아날로그(글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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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체는 존재했던 적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의류입니다.(165)


 

어제 사목하는 벗이 아내와 함께 찾아왔다. 그 아내는 우리사회 개신교 풍경이 그려내는 전형적 어둠 한가운데 있었다. 사목 현장 한 축을 지탱하는 동안 입은 깊은 상처를 견디느라 극도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정신건강과 양의사한테서 받은 알약을 먹으면 알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이 든다는 말을 듣고 정신병리, 양약 본질, 숙의치료, 수면·음식·운동요법을 초군초군 일러주었다. 한편, 내 벗에게는, 설교할 때 풀·나무·돌꽃(지의곰팡이·버금바리(박테리아으뜸바리(바이러스) 소식을 전하도록 당부했다. 개신교 도시 영성이 소미생명소외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내 말을 그가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을지 알 수 없다. 근본주의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한국 개신교 걱정을 내 할 바 아니되, 벗이 몸담고 있어 건넨 충고 한마디였다. 신앙·구원 실재를 한사코 외면하는 집단에게 소미생명, 설마.

 

인간이 원초적으로 지니고 있는 공포·불안, 탐욕, 무지가 없어지지 않는 한 종교는 영속한다. 생리와 병리를 오가며 끝 날까지 인간 본성을 파고든다. 종교는 신앙을 조건으로 성립한다. 신앙은 믿음을 조건으로 성립한다. 보통은 구분하지 않지만 신앙faith과 믿음belief은 다르다. 믿음은 인식 문제고, 신앙은 윤리 문제다.

 

엄밀히 말하면 본디 둘은 하나다. 예컨대 고대 헤브라이어에는 영어 식 ‘I believe in God.’ 같은 표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자아 또는 개체인 주체가 있어 그가 인식 행위를 한다는 사고방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식행위 자체가 주체를 포함한다. 나아가 인식과 실천, 곧 윤리 또한 하나다. 이를 신앙이라 한다. 결국 믿음은 자아 또는 개체 개념이 팽창 또는 폭발하면서 실천에서 떨어져 나온 근대적개념인 셈이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개신교 일부 교리는 이런 역사 과정에서 생겨났다. 그 개신교가 거대한 표리부동을 낳은 일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자본주의, 제국주의, 신자유주의에 바친 헌정은 개체적 이신득구以信得救 망상이 자초한 저주다. 고립된 자아가 독립적인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서사는 관념에 갇힌 실재다. 관념적 믿음이 낳는 구원은 당연히 관념적 구원일 테고, 관념적 구원은 관념 주체가 관념을 멈추는 순간 소멸된다. 그뿐이다.

 

그뿐이면 허구다. 개체는, 개체 믿음은, 믿음에서 비롯하는 구원은 당최 존재한 적이 없다. 우리 모두는 신앙 네트워킹으로서, 으로써 관념 너머 구원실재를 찰나마다 일으킨다. 구원은 공생 창발과정을 달리 일컬은 이름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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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 - 균이 만드는 지구 생태계의 경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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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생명체라고 해서 유토피아일 수는 없다. 공생에는 경쟁과 협력이 뒤섞여 있기 마련이다. 모든 공생 주체 요구가 다 잘 조율되지는 않는다.(164)

 

진리 진술은 진리에 관해말한다는 점에서 모두 옳다皆是. 진리 자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모두 그르다皆非. 화쟁, 그러니까 경쟁과 협력이 필수인 소이다. 쉽사리 다 잘 조율되지는 않는까닭에 화쟁은 무궁무진무량한 도정이다. 도정이므로 유토피아일 수는 없다.유토피아가 아니기 때문에 '통'생명체”, 그러니까 일심一心세계는 아름답다. 아름다운 ᄒᆞᆫ 풍경이어서 애달프고도 즐겁다. 애달프지 않다면 무슨 의미며, 즐겁지 않다면 무슨 재민가.

 

의미도 재미도 다 잘 조율되지 않는 어긋남에서 일어난다. 완전하지 못한 틈새 누리에서 울고 웃는다. 울음과 웃음을 초월한 유토피아라면 나는 꿈꾸지 않겠다. 가보지 않아서 그런다고 할지라도 나는 끝내 가보지 않을 테다. 불완전한 채로, 미완성인 채로, 한껏 펼치는 삶을 실컷 살지조차 못하면서 그리는 유토피아란 한갓 허욕 아니겠나.

 

오늘 1130일 탄생화가 낙엽이란다. 게다가 꽃말도 있단다, 기다림. 자기 삶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느낄 때 대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막연히 기다리게 된다. 그 막연한 기다림이 각자 유토피아다. 불만인 오늘 생활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유토피아 기다리는 상태가 다름 아닌 중독이다. 기다림이란 마약에 의존하지 않고 사소할지라도 새로운 경쟁과 협력을 일굴 때 재미로우며 의미롭게 생명체를 살아갈 수 있다.

 

결곡히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아니라고 하면서 나는 아직도 유토피아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협력 뒤에 숨어 경쟁을 피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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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생물인 바위 속 미네랄 덩어리는 지의류 덕분에 생명체 대사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우리 몸속 미네랄 일부는 어느 시점엔가 지의류를 거쳤다.(139)

 

미국인 몸을 구성하는 탄소 70% 가까이가 옥수수에서 왔다고 한다. 한 걸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지의류에 가 닿는다. “우리 몸속 미네랄 일부는 어느 시점엔가 지의류를 거쳤다.아질한 연결감과 묘연한 그리움이 배어나온다. 거슬러가는 도정은 당연히 바위에 가 닿을 테니 인간과 무생물 사이 구분선은 어떤 지점에서 홀연히 뭉그러진다. 경계가 가뭇없이 사라지는 신비로 배어든다.

 

거대가 허구라는 진리는 세계와 신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당연히 그리 향하는 인간 영성에도 미친다. 명상, 참선, 단학, LSD, 실로시빈.......기타 등등 방편을 써서 가 닿는 일치와 황홀은 거대를 전제하고 거대를 목적하는 순환논법, 동어반복이다. 간절한 탐욕으로 잉태된 거대 영성은 폭력을 출산한다. 거대와 합일했다면서 쪼잔한 쌈박질에 중독된 종교집단, 그들이 선동하는 정복국가, 이들을 못 본 척하고 well being에 빠진 수많은 아라한 집단이 삼각동맹을 이루어 거대 영성은 더욱 거대한 허구세계와 신을 토건하고 또 한다.

 

거대 영성주의와 영성을 부정하는 과학주의 두 극단을 떠난 중도, 곧 정도만이 참 영성을 일으킨다. 참 영성은 진리 지식에 섬세히 주의하고 집중할 때 일어나는 비이탈적 몸 감응감각이 녹아 배어나온 소미 지혜다. 소미 지혜 깨친 사람은 게송 읊조리는 대신 소리 나는 춤춘다. 춤은 편 삶 시그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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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의류는 각각 파트너가 혼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너무나 혹독한 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해 '속도위반'으로 결혼하게 된 연인과 비슷하다.......극한에서도 살아남는 지의류 생존력은 지의류 자체만큼이나 오래됐으며, 공생이 만들어낸 직접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157)

 

지의선사는 실로 초 절정고수 내공을 지녔다. 지구에서 가장 뜨겁고 건조한 사막에서도 두텁게 살아간다. 섭씨 영하 195도 액체 질소에 담갔다 꺼내도 금방 되살아난다. 지구에서 가장 깊은 마리아나 해구 압력보다 100~500배 높은 압력도 견뎌낸다. 심지어 지구 바깥 우주에서 지구 행성대기권을 통과하는 동안 맞닥뜨리는 온갖 악조건도 통과한다.

 

지의선사 내공은 출생의 비밀에서 비롯했다. 그 비밀은 바로 공생이다. 지의선사 내공은 공생이 만들어낸 직접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그런데 이 공생이 문제적이다. 저자는 이를 '속도위반'으로 결혼하게 된 연인과 비슷하다고 표현한다. 번역 문제인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속도위반을 향한 통념적 시선은 그리 좋지 않다. 그럼에도 이 표현을 쓴 연유가 있을 터. “각각 파트너가 혼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너무나 혹독한 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해라는 석명이 연유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다.

 

젊은 시절 구로공단 근처 동네 벌집, 정확히는 벌방에서 산 적이 있었다. 벌집은 겉으로는 멀쩡한 양옥집인데 적게는 여남은 개에서 많게는 백 개도 넘는 한 평 미만짜리 벌방으로 쪼개놓고 공단 노동자나 도시빈민에게 세 놓는 가옥이다. 그 비좁은 공간에 둘 이상 사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그들 대부분은 사실상 혼인관계에 있는 지방에서 상경한 젊은, 아니 어린 연인이었다. 혼자 힘으로는 월세를 감당할 수 없는데다 외로우니까 눈만 맞으면”, 그러니까 '속도위반'으로기민하게(!) 동거에 들어갔다. 연탄 둘 곳이 없어 창틀에 쌓아놓고 살망정 그들은 그야말로 벌처럼 굳세게 부지런히 살아갔다. 주말이면 가리봉오거리로 쏟아지듯 나와서 생존력을 드날리기라도 하듯 흘러 다니곤 했다. 노동자 사목을 지향하며 고뇌하던 내게 그 풍경은 아득한 불가사의였다.

 

196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10대 나이부터 시작해 벌집을 거쳐 간 40대에서 70대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리고 그들이 그 시절 삶을 어찌 기억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혼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너무나 혹독한 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해택한 공생가운데 상당수가 이 땅에 뿌리내려 생물권 행성 세계를 이루었음은 모름지기 알 수 있다.

 

지의류 본성을 숙고하고 있기에 나는 정색하고 돌아볼 수밖에 없다. 오늘 우리사회는 그 시대와 그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하며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권력을 빼앗기 위해 살육을 자행한 군인이 천수를 누리다 사죄도 없이 세상 버린 사건이 엊그제 일어난 이 나라는 지의류처럼 살아온 저 벌집 풀뿌리 사람들에게 과연 무엇일까. 혹 그 사람들의 속도위반과 정반대 속도위반을 하고 있는 사회는 아닐까. 지의류 공생 본성에서 지금 당장 우리가 기민하게 배우고 실천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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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합치면서 곰팡이는 부분적 광합성공생체가 되고 광합성공생체는 부분적 곰팡이가 된다. 그러나 지의류는 곰팡이와도 광합성공생체와도 비슷하지 않다.......창발 현상, 즉 개체 합 이상이 된다.(150)

 

지의류는 유기체가 생태계로 녹아들고 생태계가 유기체로 굳어가는 자리다. 그러면서 전체부분의 합사이를 흔들리며 오간다. 그 두 가능성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일은 혼란스러운 경험이다.......지의류는 각 개체 합이라기보다는 그 개체 사이 교환이다. 지의류는 안정적 관계의 네트워크이면서도 지의류 되기를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명사일 뿐만 아니라 동사이기도 하다.(158~159)

 

지의류보다 지구 생명체 특징을 더 잘 요약한 생물학적 시스템은 상상하기 힘들다. 지의류는 광합성 유기체와 비 광합성 유기체를 모두 포함하는 아주 작은 생물권이고, 따라서 지구 주요 대사과정을 결합하고 있다. 어찌 보면 지의류는 미세행성, 극소형으로 축소된 세계다.(151)


 

지의류는 조류를 싸서 보호하고 수분을 공급하는 균류(곰팡이무리)와 광합성으로 양분을 균류에 공급하는 조류(말무리)가 공생하는 유기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다. 사전적 의미 너머에는 창발 현상, 즉 개체 합 이상” “개체 사이 교환” “명사일 뿐만 아니라 동사같은 명시적 의미 다발에서 생물권” “행성” “세계같은 암시적 의미 다발까지 스펙트럼이 펼쳐져 있다.

 

지의류는 그 정체를 들여다보기 어렵다. 유연하고 자유로운 상호작용이 멈추지 않는 과정실재다. ‘창발은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이고, ‘개체 합 이상은 분석으로 알지 못한다는 말이고, ‘교환은 복잡한 쌍무관계라는 말이고, ‘동사는 늘 진행 중이라는 말이다. 이 난관들이 얽히고설킨 생물권 행성 세계인 지의류보다 지구 생명체 특징을 더 잘 요약한 생물학적 시스템은 상상하기 힘들다.고 할 만하다. “정해진 답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162)이라 한 표현을 보니 헌법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인간의 존엄에 관해 누군가 정의할 수는 없지만 묘사할 수는 있다.”고 한 말이 떠오른다.

 

정의는 존재론이고 묘사는 윤리학이다. 존재론은 원리 문제고 윤리학은 참여 문제다. 오늘 우리가 식물을 공부하고 연장선에서 바이러스, 세균, 조류, 균류, 그리고 여기 지의류를 숙의하는 까닭은 자본인류가 사물화한 이들 실재를 직시함으로써 파국으로 치닫는 문명행진을 멈출 새로운 윤리를 세우기 위해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지의류가 사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그 경이로운 풍경을 펼쳐내는 예찬이 아니다; 사물이 아님은 물론이지만 역시 인간도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전언을 듣지 못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완전한 번역을 유보한 채 지의류 생명 몸결 속으로 들어가 겸허히 참여하는 일이다.

 

겸허히 참여하는 자는 문제의식을 계속 유지한다. 인류가 존속하는 한, 공생이 위기로 내몰리는 한, 언제든 같은 문제 앞에 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완전한 사물과 사자死者도 없고 완결된 해원과 애도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의류는 우리에게 거의 불멸선사船師. 무엇이 목숨인지 무엇이 삶인지 무엇이 죽음인지 천 결 만 겹으로 웅얼거린다. 귀를 베고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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