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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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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다가오면, 그것을 반기는 만큼이나, 진짜 문제가 시작된다. 그것은 세계가 요구하는 대로 목적의식을 다시 만드는 문제다.(213쪽)


우리 모두 이런 어린 시절의 기억을 지니고 있습니다. 감기몸살로 몇 날 앓아누울라 치면 아파서 힘든 것, 쓰디쓴 약 먹어야 하는 것 빼놓고는 온갖 좋은 일이 생깁니다. 실컷 자도 누구 하나 잔소리 않지, 학교 안 가도 되지, 숙제도 없지, 엄마가 극진히 돌봐주지, 하루 종일 누워 뒹굴어도 되지, 평소 못 먹는 음식도 먹을 수 있지·······. 그러다 어느 날, 열이 내리고, 근육통이 사라지고, 기침이 멎고, 누런 콧물이 잡히면, 으레 엄마가 이마에 손 얹어보고는 “우리 아기, 인제 다 나았네.” 하십니다. 바로 이때 “네!” 하고 벌떡 일어나는 아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다들 이럽니다. “엄마, 아직도 많이 아파!”


해방이 다가오면” “진짜 문제가 시작”된다는 사실. 해방되기 이전의 “세계가 요구하는 대로 목적의식을 다시 만드는” 일이 더 맹렬한 과제로 들이닥친다는 사실. “해방”이란 더 활짝 열린 구속의 문 앞에 서는 것이란 사실.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해방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해방되고 나면 우울합니다.


여기서 생긴 복합적인 마음의 병리 상태를 저는 ‘성공’직후증후군이라 이름 합니다. 특히 청년기 이전 학생들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민사고·외고·과고 입학 직후, 서울대·카이스트와 그 대학원 입학 직후에 저를 찾아오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여태까지 왕으로 살았는데 가보니 황제, 심지어 신이 득시글거립니다. 목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만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시작일 뿐입니다. 당최 이 새로운 조건에 적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들이닥치는 전천후 허무감, 정체 모를 두려움, 아득한 절망감·······우울과 불안이 삽시간에 동맹을 맺어 심신을 옴짝달싹 못 하게 결박합니다. 그 이전 삶의 억압이 심할수록, 해방적 성취가 극적일수록 ‘성공’직후증후군은 엄중합니다.


성공이 종교가 된 세상에서 ‘성공’직증후군이 떠도는 것은 성공이 결코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외고 가면 성공일까요? 서울대 가면 성공일까요? 검사 되면 성공일까요? 국회의원 되면 성공일까요? 이른바 ‘성공’한 사람들이 우리사회를 어찌 만들었는지 돌아보면 ‘성공’은 ‘성공’한 개인에게든 공동체에게든 저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성공이 아닙니다. 성공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인간 성숙입니다. 인간 성숙이 수반되지 않는 성공은 성공이 아닙니다. 그 성공 아닌 성공을 이른바 ‘성공’이라 하는 것입니다. 인생 ‘성공’을 위해 인간 성숙을 말아먹는 ‘성공’시대의 희생양이 다름 아닌 ‘성공’직후증후군입니다.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은 ‘성공’직후증후군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고 있다.” 식으로 반응합니다. 나태하다고 꾸짖습니다. 여태까지 그들을 억압했던 바로 그 방식을 더욱 강화하여 다그칩니다. 서구의학은 우울이나 불안 증상을 완화하는 약물로 틀어막아 적응을 강요합니다. 성숙한 인간으로 살아갈 기회를 영구히 박탈하고 ‘성공’기계로 살아가도록 강제합니다. 우리사회가 ‘성공’ 한 자들의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성공’ 한 자들은 온갖 범죄와 패악을 통해 권력과 돈을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그 수탈체계를 영속화하기 위해 부정선거, 세월호사건, 국정교과서·······마침내 개헌으로 내달리고 있습니다. 성숙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각성과 행동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진정한 성공은 인간이 성숙해 나아가는 과정의 변곡점에서 맺어지는 결실의 불연속적 연속체입니다. 각 변곡점이 품은 불연속성은 기존 “세계가 요구하는 대로 목적의식을 다시 만드는 문제” 자체를 혁파해야 드러납니다. 혁파가 진정한 성공이며 “해방”입니다. 진정한 해방이 치유입니다. 치유는 양육입니다. 양육은 궁극적으로 성숙의 문제지 성공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공이 빛나는 면류관이려면 성숙한 인간의 기품 위에 얹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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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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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어느 초등학교 5학년 학급으로부터 내 책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학생들의 질문에 답변해달라는 초대를 받은 적이 있다. 반장인 듯 또록또록해 보이는 한 소년이 내게 예의 그 익숙한 질문을 했다. “왜 도망치지 않으셨어요?” 나는·······설명했다. 별로 납득이 되지 않은 소년은 내게 감시탑과 출입문들, 철조망과 발전소의 위치를 넣어서 수용소의 약도를 칠판에 그려달라고 했다.·······나는 최선을 다해 그려보였다. 소년은 몇 초간 약도를 찬찬히 살펴보고는 좀 더 구체적으로 몇 가지를 요구하더니 나에게 자신이 생각해낸 계획을 말했다. 여기서 밤중에 보초의 목을 친 다음, 그의 옷을 입고, 곧바로 발전소로 달려가서 전기를 차단한다. 그러면 탐조등이 꺼질 것이고 고압전류의 철조망에도 전기가 흐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걱정 없이 나가면 된다, 라는 것이었다. 소년은 진지하게 덧붙였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하세요. 꼭 성공하실 거예요.”(191-192쪽)


이 인용문은 프리모 레비의「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일부분입니다. 「몸의 증언」 저자는 이 대목에 근거를 두고 다음 구절을 썼습니다.


어떤 혼돈의 바깥에 있는 우리 모두는 그 안에 빠졌을 때 우리가 빠져나올 수 있다고 안심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혼돈의 서사는 그러한 협상의 너머에 있다. 나올 방법은 없다.(205쪽)


우울과 불안이 단단히 얽혀 있는 한 젊은이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격정 상태에서 누구와 싸운 이야기부터 꺼냈습니다. 들어보니 그 이야기의 결정적 부분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포든 분노든 우울이든 혼돈의 절정에서 명료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기억에 앞서 주의, 집중, 판단, 절제·······모든 능력이 붕괴됩니다. 술에 만취되어 모든 정신 작용이 헝클어지고 그 기억마저 잃어버리는 blackout과 은유 이상의 일치 관계에 있을 것입니다.


그 젊은이에게 앞으로는 싸울 때 정신 똑바로 차리고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해내라고 말하는 것은 저 프리모 레비의 초등학교 5학년짜리 소년이 이렇게 말한 것과 100% 같은 수준입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하세요. 꼭 성공하실 거예요.”


혼돈의 바깥에 있는” 사람은 “빠져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장기판 훈수처럼 승부의 당사자는 보지 못하는 것을 제3자라면 하수라도 볼 수 있다는 사실의 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혼돈의 와중에 있는 사람이 휘말릴 수밖에 없는 격정 상태를 혼돈의 바깥에서는 전혀 감지할 수 없다는 사실의 측면입니다. 이 측면을 도외시하면 “나올 방법은 없다.”는 진실에 단 한 걸음도 다가설 수 없습니다. 도외시의 사람들은 언제나 빠져나오지 못했는가, 아니 않았는가, 그 나태함을 힐난합니다. 이 힐난은 혼돈에 빠진 사람에게 내면화됩니다. 스스로 꾸짖으며 죄책감을 더해갑니다. 혼돈은 증폭일로로 나아갑니다.


그 젊은이에게 그의 이야기에 결정적 부분이 누락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라 말해주었습니다. 그럴만했으며, 그 상태로 그 당시 100점이라 말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자인自認 감정, 자인 의식, 자인 의지를 디딤돌 삼아야 비로소 빠져나오는 방법을 스스로 찾을 수 있습니다. 바깥에서 대뜸 방법론부터 제시해준다고 해서 그 방법론이 혼돈에 빠진 사람의 실제 방법으로 제꺽 작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사도 바깥의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치료의 의욕보다 바깥의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예의부터 갖추어야 하기에 제 처방은 언제나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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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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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사가 시간을 통해 서로 연결되는 일련의 사건들을 의미한다면, 혼돈의 이야기는 서사가 아니다.·······혼돈의 서사·······는 순서 없·······는 시간, 매개 없는 말하기, 자기 자신에 대해 충분히 성찰할 수 없는 상태로 자신에 대해 말하기라는 반反-서사anti-narrative·······다.·······

  ·······그 이야기는 서사적 순서가 전혀 없고, 기억할 만한 과거도 없고 예측할 만한 미래도 없는, 단지 끊임없는 현재만 있을 뿐이다.(198-199쪽)


2015년 11월 12일 아침, 언제나 그랬듯 250꽃별의 이름 하나하나와 마주함으로 하루를 열었습니다. 유난히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지금도 눈물 때문에 자판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수능 날입니다.


호피의 기도를 함께 나누고 아침식사를 함께 하면서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샘 혼자 진료할게. 너희들은 친구들 수능 시험장에 들렀다가 엄마 아빠한테 가거라. 하루 내내 함께 있어 드려라. 엄마 아빠한테는 576일이 흘러간 게 아니다. 언제나 오늘 아침이다. 얼마나 아프시겠니.”


시간은 변화의 어머니입니다. 그 어머니 품에서 모든 것이 태어나 자라고 영글며 스러져갑니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시간의 품을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시간의 품을 벗어났다는 것은 “단지 끊임없는 현재만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서구 정신의학의 이른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이론에서는 외상의 재연flashback현상을 말합니다. flashback은 기본적으로 회상의 의미가 있으므로, 과거의 경험에 대한 기억이 마치 현재 사건이 일어난 것처럼 되살아난다는 취지로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시간에 대한 통속적 이해에 터한 것입니다. 극단의 고통이 일으키는 혼돈 한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과거에서 현재로 흐르는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혼돈이 지속되는 한, 외상은 현재진행 상태에 있습니다. 과거의 객관적 외상이 심리적으로 재연된다고 말하는 것은 실재를 왜곡한 실패입니다.


혼돈의 서사는 “반反-서사anti-narrative”입니다. 아픈 사람한테 말주변이나 조리가 없어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흐름이 있고 조리도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중없는 에피소드의 파편들을 들었다 놓았다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외형을 취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비명, 신음, 욕설, 절규가 뒤엉킨 것입니다. 그것들은 몸부림의 음성적 표현입니다. 몸부림치는 혼돈의 사람에게, 과거에서 놓여나라, 일상으로 돌아가라, 미래로 나아가라, 말하는 것은 격려가 아닙니다. 따귀를 후려갈기는 짓입니다. 오직 그 비명, 신음, 욕설, 절규의 반-서사를 무방비로 들을 일입니다. 고요히 옆에 앉아 다음 서사에 귀 기울일 일입니다.


꽃별이 된 예은이(쌍둥이 동생) 아빠 유경근 씨가 수험생 하은이(쌍둥이 언니)를 위해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습니다. 



예은이의 죽음으로 혼돈에 내몰린 아빠가 하은이의 삶 앞에서는 반-서사를 거둘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아빠이기에 말입니다. 피눈물의 이 격려 때문에 자판이 더 뿌예집니다. 오늘, 수능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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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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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증인들은 우리 생존자가 아니다.·······바닥을 친 사람들·······은 증언하러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가라앉은 자들, 완전한 증인들이고, 자신들의 증언이 일반적인 의미를 지녔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원칙이고 우리는 예외다.·······

  ········최후의 말살, 그 완결된 작업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하기 위해 돌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가라앉은 사람들은 설령 종이와 펜이 있었다 하더라도 증언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죽음은 육신의 죽음에 앞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98-99쪽)

 

이 인용문은 프리모 레비의「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일부분입니다. 「몸의 증언」 저자는 프리모 레비를 떠올리며 다음 구절을 썼을 것입니다.

 

홀로코스트 목격자들이 말하는 이야기들 속에·······채워지지 않는·······봉합될 수 없는 서사의 구멍이 있(인용자가 더함)다. 이야기는 주위를 맴돌면서 말해질 수(밖에-인용자가 뺌) 없는 상처의 가장자리를 추적한다. 그 이야기의 언어는 생생함을 말해주지만, 상처는 언어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몸의 상처이자 모욕, 고통, 상실이다.

  ·······이야기의 화자는 분명히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다. 그러나 진정으로 혼돈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어로 말을 할 수 없다. 혼돈을 구술 이야기로 전환하는 것은 그 이야기를 어느 정도 성찰적으로 부여잡은 것이다.(197-198쪽)

 

프리모 레비가 말한 “바닥을 친 사람들”, “최후의 말살”을 당한 사람들은 여기 “진정으로 혼돈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같은 존재입니다. 이들의 “상처는 언어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몸의 상처이자 모욕, 고통, 상실”입니다. 이들 앞에 “설령 종이와 펜이 있었다 하더라도 증언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죽음은 육신의 죽음에 앞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완전한 증인들”은 “말해질 수 없는 상처” 자체입니다. “채워지지 않는·······봉합될 수 없는 서사의 구멍”입니다. “성찰적으로 부여잡은” 모든 이야기들은 “가장자리를 추적”하는 노력일 뿐입니다.

 

가장자리 추적은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결코 돌파할 수 없는 한계이자 지상의 책임입니다. 끝내 도달하지 못할 줄 알면서도 끝까지 가야 하는 여정입니다. 혼돈과 죽음이라는 고통의 실체를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혼돈과 죽음을 야기한 조건을 추적함으로써 혼돈과 죽음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기억하려는 공동체적 제의입니다.

 

지금 우리 공동체는 무도함의 무저갱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현실정치란 것이 본디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일인데 어떻게 이런 지경으로까지 사악하고 파렴치할 수 있는지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국가보호장비로 등록된 배에 아이들 250명을 가두어 죽음으로 몰아넣더니, 이제는 국정국사교과서로 아이들을 혼돈으로 몰아넣으려고 광분하고 있습니다. 문득 깊은 의문이 하나 솟아오릅니다.

 

“저들은 왜 이토록 아이들을 공격하는가?”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 소름끼치는 글 하나를 목도합니다.

 

“수험생 여러분,

우리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여러분은

통일시대를 이끌어 갈 미래의 기둥입니다.

 

새로운 미래는 여러분이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꿈과 희망이 이뤄지길 응원합니다.”

 

수능 이틀 전 최고 통치자가 친필로 페이스북에 올린 응원 글입니다. 대체 이 응원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이 응원이 시험 칠 수조차 없는 250명 아이들과 그 부모들 가슴에 무슨 의미일까요? 친구 250명을 잃은 단원고등학교 3학년 아이들에게 어떤 힘을 줄까요? 고3 수험생임에도 국정국사교과서 반대하기 위해 일인시위에 나선 아이에게 어떤 힘을 줄까요? 우주의 기운이 와서 혼을 정상화시키면 정말 시험을 잘 칠 수 있을까요?

 

오늘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어른들은 준열하게 자문해야 합니다. 매판독재 권력이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르는 동안 우리 어른들은 과연 무엇을 한 것인지. 오늘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어른들은 준엄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눈앞에서 죽음과 혼돈으로 내몰리는 아이들,

 

그들이 원칙이고 우리는 예외다.

 

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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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죽음이 아니다. 비극은 자아-이야기가 삶을 마치기 전에 끝나는 것이다.(193-194쪽)


먼저 사랑해서 먼저 청혼하고 결국 결혼했지만 결혼생활 내내 감응 없는 남편 때문에 우울의 나날을 보내는 여성이 찾아왔습니다. 늘 운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숨죽여 흐느낀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살아 있으나 사실상 죽은 것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아-이야기가 삶을 마치기 전에 끝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이야기함으로써,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야기로서 존재하는 생명인 인간에게 이야기 길이 막혀 있다면, 이 말고 다른 비극은 비극도 아닙니다.


저는 그에게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하라 일러주었습니다. 울음소리가 이야기 길을 다시 여는 최초의 언어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집에 돌아가 그는 제 말대로 했습니다. 기적이 시작되었습니다! 남편이 처음으로 문을 열고 들여다보더랍니다. 왜 그러느냐고 묻더랍니다. 우는 동안 옆에 앉아 있더랍니다.


부부가 무엇이겠습니까. 순도 99.99% 타인으로 만나 “자아-이야기”를 통해 공동체적 삶을 살기로 쌍무계약을 체결한 사이입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통약 불가능한 측면이 있습니다. 동시에 경이로움을 찰나마다 경험할 수 있는 축복인 측면도 있습니다. 이 대칭성 사이에서 노닐고 지지고 볶고 하면서 ‘따로 또 같이-이야기’를 빚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부 이야기에서 인간의 모든 이야기가 잉태되고 출산되며 양육됩니다.


역사는 이 모든 이야기가 잉태되고 출산되며 양육되는 시간 과정입니다. 사회는 이 모든 이야기가 잉태되고 출산되며 양육되는 공간 구조입니다. 정치는 이 시공에서 어느 누구도 “자아-이야기가 삶을 마치기 전에 끝나는 것”이 강요되지 않도록 하는 임무입니다. 오늘 여기 그 역사가 훼절되고 있습니다. 사회가 결딴나고 있습니다. 정치가 도리어 “자아-이야기가 삶을 마치기 전에 끝나는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250꽃별의 이야기를 영구 봉인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매판독재 이야기만 지절거릴 수 있도록 협잡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해야 할 때입니다. 통곡은 격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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