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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ㅣ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서사가 시간을 통해 서로 연결되는 일련의 사건들을 의미한다면, 혼돈의 이야기는 서사가 아니다.·······혼돈의 서사·······는 순서 없·······는 시간, 매개 없는 말하기, 자기 자신에 대해 충분히 성찰할 수 없는 상태로 자신에 대해 말하기라는 반反-서사anti-narrative·······다.·······
·······그 이야기는 서사적 순서가 전혀 없고, 기억할 만한 과거도 없고 예측할 만한 미래도 없는, 단지 끊임없는 현재만 있을 뿐이다.(198-199쪽)
2015년 11월 12일 아침, 언제나 그랬듯 250꽃별의 이름 하나하나와 마주함으로 하루를 열었습니다. 유난히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지금도 눈물 때문에 자판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수능 날입니다.
호피의 기도를 함께 나누고 아침식사를 함께 하면서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샘 혼자 진료할게. 너희들은 친구들 수능 시험장에 들렀다가 엄마 아빠한테 가거라. 하루 내내 함께 있어 드려라. 엄마 아빠한테는 576일이 흘러간 게 아니다. 언제나 오늘 아침이다. 얼마나 아프시겠니.”
시간은 변화의 어머니입니다. 그 어머니 품에서 모든 것이 태어나 자라고 영글며 스러져갑니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시간의 품을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시간의 품을 벗어났다는 것은 “단지 끊임없는 현재만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서구 정신의학의 이른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이론에서는 외상의 재연flashback현상을 말합니다. flashback은 기본적으로 회상의 의미가 있으므로, 과거의 경험에 대한 기억이 마치 현재 사건이 일어난 것처럼 되살아난다는 취지로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시간에 대한 통속적 이해에 터한 것입니다. 극단의 고통이 일으키는 혼돈 한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과거에서 현재로 흐르는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혼돈이 지속되는 한, 외상은 현재진행 상태에 있습니다. 과거의 객관적 외상이 심리적으로 재연된다고 말하는 것은 실재를 왜곡한 실패입니다.
혼돈의 서사는 “반反-서사anti-narrative”입니다. 아픈 사람한테 말주변이나 조리가 없어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흐름이 있고 조리도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중없는 에피소드의 파편들을 들었다 놓았다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외형을 취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비명, 신음, 욕설, 절규가 뒤엉킨 것입니다. 그것들은 몸부림의 음성적 표현입니다. 몸부림치는 혼돈의 사람에게, 과거에서 놓여나라, 일상으로 돌아가라, 미래로 나아가라, 말하는 것은 격려가 아닙니다. 따귀를 후려갈기는 짓입니다. 오직 그 비명, 신음, 욕설, 절규의 반-서사를 무방비로 들을 일입니다. 고요히 옆에 앉아 다음 서사에 귀 기울일 일입니다.
꽃별이 된 예은이(쌍둥이 동생) 아빠 유경근 씨가 수험생 하은이(쌍둥이 언니)를 위해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습니다.
예은이의 죽음으로 혼돈에 내몰린 아빠가 하은이의 삶 앞에서는 반-서사를 거둘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아빠이기에 말입니다. 피눈물의 이 격려 때문에 자판이 더 뿌예집니다. 오늘, 수능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