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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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을 세우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제자가 됩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내가 모르는 규칙을 지닌 게임을 하고 있다. 내게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 높은 지성을 감추고 있다.'는 식으로 두 사람 사이 관계를 규정할 때 사제구도가 형성됩니다.(63~64)


 

50대 초반 사람이 숙의치유 하러 왔다. 그와 숙의하는 일은 언제나 그가 그때그때 제기하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같은 내용이 단계적으로 진전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없었다. 숙의가 끝나갈 무렵,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신뢰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그래서 대답에 단 한 번도 불만인 적이 없었다고 밝혔다. 신뢰란 내게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 높은 지혜를 감추고” “내가 모르는 규칙을 지닌 게임을 하는 사람에게 취하는 감응 태도다. 내가 실제로 그런 사람이냐 아니냐는 객관적 기준보다 인연과 맥락에 따른다.

 

시절 인연과 적정 맥락에 따라 그는 매번 절대적이고 구조적인 패배를 배움으로써 절대적이고 구조적인 승리를 배워”(64)갔다. 여기서 패배란 전혀 알지 못했던 진실 앞에 느닷없이 세워지거나, 기존 생각이 사정없이 뒤집히는 경험을 말한다. 이 경험은 그를 전과 반대인 사람으로 만들지 않고 전보다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온전한 사람이 절대적이고 구조적인 승리를 할 수 있다. 그는 비교적 단기간에 숙의를 끝냈다. 나중에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그가 같은 패배를 되풀이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와는 너무나 다른 30대 후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질문하지 않았다. 질문거리가 없느냐고 물어도 침묵했다. 물음을 세우는 일이 왜 중요한지 소상히 말해주어도 변화가 없었다. 질문하지 않는 이유는 둘이다: 더 알아야 할 무엇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듣고 싶지 않은 답을 피하기 위해서거나. 요컨대 사제구도 안으로 들어올 의향이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그는 숙의치유 하는 나를 찾아왔다. 고난으로 가득한 삶을 굳건히 견디고 있는 자기 영웅서사에 증인 삼으려 함이었다. 그는 숙의를 할 생각도 그만 할 생각도 없었다. 내가 거둬들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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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신체가 최고로 이완되어 있고 가장 임기응변으로 대응할 수 있을 때는 가장 위기상태일 때입니다........(거꾸로 말하면-인용자) 가장 위기상태일 때, 신체 감도와 잠재적 운동 성능이 최고가 되어야 합니다. 그 상태를 경험하기 위해 수련을 반복합니다. 이는 제자가 스승의 주도권 아래 놓이는경험을 반복하는 일입니다.......심신 감수성을 최대한 민감하게 만들어 눈앞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미세한 차이로 뒤좇을 때 신체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사제관계에서 스승을 따라하게 하는 일은 스승을 롤 모델 삼아 흉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롤 모델을 뒤좇는 몸짓 자체가 목적이어서 그렇게 합니다. ‘뒤좇아 오도록 하는그 자체가 교육입니다.(60~61)

 

두 사람이 대결할 때, 누가 이기든 위기상태는 동시에 온다. 이기는 자도 지는 자도 신체가 최고 상태를 맞을 때 승부가 난다. 이기는 자만 최고 상태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자도 최고 상태에서 진다. 둘의 차이는 상대방 신체 상태를 누가 먼저 알아보느냐 하는 데 있다. 수련할 때라면 그 승자가 스승이다.

 

스승이 최고 상태 신체로 기술을 걸면 제자는 최고 상태 신체로 그 기술에 걸려 넘어간다. 제자는 반복해서 넘어가면서 넘어가는 자기 신체는 물론 넘기는 스승의 신체를 필연적으로 감각한다. 지는 신체에 이기는 신체가 닿아 있지 않다면 이김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기를 거듭하는 제자 신체에는 이기는 스승 신체가 녹아서 배어든다. 그 신체들은 둘임과 동시에 하나로 계승되고 재창조된다. “뒤좇는 몸짓 자체가 목적인 까닭이 여기 있다.

 

뒤좇기 교육은 생사·승패가 정신 문제라는 점만 다를 뿐 숙의치유에도 적용된다. 모든 정신장애가 발달불균형증후군이라는 본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스승을 뒤좇는 제자교육 방식은 숙의치유 근간이 된다. 평등한 인격 간 상호작용이라는 치유 대원칙을 뭉그러뜨리지 않는 한, 자상하고 끈덕진 뒤좇기 인도가 필요하다.

 

숙의치유자로서 살아온 세월 동안 이루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사연이 많지만 역시 가장 기쁘고 즐거운 순간은 숙의하는 과정에서 아픈 사람이 건강한 제자로 탈바꿈해가는 모습을 확인할 때다. 그들이 아픔과 슬픔을 이기고 새롭게 태어나는 눈부신 광경은 대체불가 자랑이다. 이른바 잘나가는 동료들이 부럽지 않은 대체불가 자부다. 이 삶이 언제나 옹글게 나아가려면 스승이 언제나 옹글게 깨어 있어야 한다. 멈춰선 스승을 뒤좇는 제자란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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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복잡하다든가 단순하다는 말을 통상 쓰는 낱말 뜻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복잡함이란 단적으로 다른 것이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상황을 일컫는다. 크다와 작다가 같은 낱말로 표현되고, 그 경우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그때 식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전형적인 예다.......

  한편, 단순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잘 생각해보면 이 또한 서로 다른 것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상황이다. 9·11테러가 일어났을 때, 조지부시 대통령이 세계 각국을 향해 미국과 함께 할지, 테러리스트와 함께 할지 선택하라고 강요한 상황이 전형적인 예다.(47)

 

단순한 사람이나 복잡한 사람이나 서로 다른 것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거나, 서로 다른 것을 한 꾸러미 안에 집어넣어버리는 조작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다. 복잡한 사람은 서로 다른 것을 같은 꾸러미 안에 집어넣어두면서 서로 다른 것이 어쩌다 보니 같은 꾸러미 안에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점에서만 다르다. 결국 단순함이나 복잡함이란 동일한 조작 사이 작은 정도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48~49)

 

나는 <까매서 하얀 세계로>에서 저자로서는 최상 선택이나, 복잡하다 단순하다 하는 어휘가 명석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명석하지 못한 어휘 선택은 대개 오류로 흘러간다. 판단하건대 우치다 타츠루는 자기 철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논리학적 토대를 가볍게 여기는 듯하다. 강의 스타일을 보면 누명은 아니다.

 

복잡함은 진리 복수複數성을 인정하는 이른바 다치논리학 세계다. 단순함은 진리 단수單數성을 고집하는 형식논리학 세계다. 둘을 동일한 조작 사이 작은 정도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사람은 단순한 사람이다. 단순한 사람은 복잡한 사람은 서로 다른 것을 같은 꾸러미 안에 집어넣어두면서 서로 다른 것이 어쩌다 보니 같은 꾸러미 안에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점에서만 다르다.고 생각한다. 복잡한 사람은 서로 다른 것이 어쩌다 보니 같은 꾸러미 안에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서로 다른 것이 같은 꾸러미 안에 있는 비대칭대칭을 필연이라고 생각한다. 진정 복잡한 사람은 그 모호성이야말로 세계 구성 원리며 운동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사람은 단순한 사람이나 복잡한 사람이나 서로 다른 것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거나, 서로 다른 것을 한 꾸러미 안에 집어넣어버리는 조작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복잡한 사람에게 서로 다른 것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거나, 서로 다른 것을 한 꾸러미 안에 집어넣어버리는 조작은 관용이고, 단순한 사람에게 서로 다른 것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거나, 서로 다른 것을 한 꾸러미 안에 집어넣어버리는 조작은 폭력이다. 관용과 폭력을 과연 정도 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론상 복잡과 단순은 교차 또는 순환이 가능하다. 현실에서 복잡한 사람은 단순을 선택할 수 있지만 단순한 사람은 복잡을 선택할 수 없다. 인류역사가 웅변으로 증명하는 바다.

 

조지 부시를 예로 들면서도 이 격절을 쉽게 흘리는 까닭은 그가 무예인이기 때문이다. 무예는 근본적으로 살육 기술이다. 여기에는 관용이 존재할 수 없다. 철학 사유가 모호성을 인정하더라도 무예 신체는 모호성을 인정하지 못한다. 이 모순을 그 스스로가 실감하지 못하는가보다. 복잡과 단순은 정도 아닌 관지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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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꿈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바는.......현실적 바람이 아니라 오히려 꿈을 꾸는 그 자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꿈속에서는 인과관계가 뒤집히고 크다: 작다, 좋다: 나쁘다 같은 상반된 의미가 동일한 말로 말해진다.......시간조차 거꾸로 흐른다. 인간은 이러한 거꾸로 된 세계를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있는데, 꿈꾸는 일은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와 거꾸로 된 세계를 왕래하는 일 자체가 생존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 아닐까.......꿈속에서 인간은 일시적으로 인간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한다.

  .......인간은 혹시 인간 아닌 상태와 인간인 상태를 정기적으로 왕래하는 일을 통해 그때그때 자신을 인간으로 재창조하는 것이 아닐까.(39~40)


 

꿈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아직도 인간은 다 알지 못하고 있지만, 꿈이 단지 일 뿐이지 않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 장자 나비 이야기를 호사롭게 인용하지 않더라도 꿈속 현실이 지니는 실재성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 문제에 관해 우치다 타츠루가 통찰해낸 진실은 실로 예리하다: 꿈은 현실 욕망의 도구가 아니다. 현실 인간이 꿈 비인간을 넘나들면서 매순간 새로이 스스로를 창조하므로 꿈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에 따르면 꿈은 누락 불가한 커뮤니케이션이다. 꿈꾸는 몸도 꿈 서사도 모두 커뮤니케이션 당사자다. 꿈꾸지 않는 몸과 서사를 현실이라 표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둘 다 비대칭대칭을 이루는 현실 실재다. 꿈꾸는 동안 심지어 변온동물”(37)이 된다고 하지 않는가. 이 극명한 가로지름을 통해 인간은 하루 한 번씩 스스로를 거듭해서 창조하는 동사존재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 아니다. 인간이기 위한 도상에서 꿈 장인 잠은 존재론적 본성을 지닌다. 꿈이 잠 못 자게 하는 자극을 진정시켜서 계속 자도록 하는 이야기 기능”(37)을 지니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충분한 잠, 풍부한 꿈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다.

 

이 통찰을 더 핍진히 밀고 가본다. 꿈꾸는 동안 인간 아닌 상태가 되는 일은 변온동물 정도에서 멈출까? 나는 더 이전 상태로 소급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존스홉킨스의대 병원에서 환각버섯을 사용해 우울장애 치료를 했다는 사실은 이미 뉴스가 아니다. 버섯은 곰팡이다. 곰팡이 본성을 지닌 물질이 인간 뇌에 작용해 인간 의식에 고착된 편향인 정신장애를 풀어내 치료한다면 그 과정에 있는 뇌와 뇌가 변화시키는 생명 상태가 곰팡이하고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 없다. 가장 근본적인 곰팡이 네트워킹 본성과 상응함으로써만 편향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환각물질이 이끌어내는 환각 상태와 본성이 같은 인간 꿈은 생명역사를 관통하는 인간 이전 미소생명 상태 서사를 풀어낸다. 충분한 잠, 풍부한 꿈은 인간을 인간 너머 아득한 미소생명과 커뮤니케이션하게 한다. 그 커뮤니케이션은 공생을 환기하고 기리는 제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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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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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이 내포된 말을 적절하게 알아들음으로써.......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솟아오르는 순간을 만난다.......커뮤니케이션은 일의적이고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이해했다고 안심하는 사람보다 오해하지 않았을까 하고 불안해하는 사람이 커뮤니케이션에서 더 본질적인 경험을 한다.(34~36)


 

모순이 내포된 말을 적절하게 알아듣는 일은 생각보다 그리 적절하게’ 일어나지 않는다맹렬히 싸워 정밀히 녹여낸 모순이 불안으로 들끓는 카오스와 맞닿는 찰나 신음되어 일어난다신음 소리는 일의적이고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을수록 커진다큰 신음 소리만큼 커뮤니케이션 본성에 육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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