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걷는 인간homo ambultus이라는 진실을 아는 것만으로 생기는 의미란 없다. 거기에 마음을 두어야 비로소 의미가 생성되기 시작한다. 관심을 가지는 것. 주의를 기울이는 것. 유심히 대하는 것. 그리고 상상하는 것.


상상은 사랑의 기미다. 사랑의 기미는 엄두 낼 수 있게 한다. 엄두 내어 걷기 시작하면 사랑은 몸에 시시각각 각인된다. 몸에 각인된 사랑은 상상을 무한히 갈래지게 한다. 무한히 갈래진 상상 속에서 걷기의 탱맑은 느낌이 소소하게 미미하게 돋아난다.


느낌. 이것은 몸의 움직임, 그 놀림에 마음을 맡기는 상태다. 걸을 때 솟아나는 몸 느낌, 정서의 변화를 그저 감각으로 마주한다. 가벼운 근육통, 숨참, 촉촉한 땀, 싱그러운 바람이 일으키는 피부 감각, 상쾌함, 잡념이 사라지는 순간의 망아, 평화로움들.


알아차림. 이것은 자신이 걷고 있다는 사실을 찰나마다 의식하는 것이다. 무심코 잡념에 휘감겨 걷지 않고 유심히 걷는다. 몸의 움직임, 진행 방향, 주위 조건과 맞닥뜨림 전체를 주의 깊게 살핀다. 해석·평가, 의미 챙기기는 하지 않는다.


뜻 가름. 이것은 걷기를 내 삶에 정색하고 다시 들이기로 하는 다짐이다. 어떻게 얼마나 걸을까, 나름과 깜냥의 결 세움이다. 걷기가 이미 자연의 문제에서 역사의 문제로 바뀌었다는 각성을 구체적 실천으로 드러내는 행위다.


그리하여 마침내 걸어본다. 수단이든 목적이든 삶 그 자체든 살아 있는 날까지 걸어 가보는 것이다. 십인십색의 걷기에서 참다운 도가 일어나 인간이 우주에 여한 없이 배어들 수만 있다면야. 걷기는 그야말로 태고의 미래로서 인류 존망의 열쇠를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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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직립 보행할 수 있도록 진화하면서 뇌가 커져 미숙한 상태로 태어난다. 미성숙기가 오래토록 지속된다. 윤리 뇌가 다 자라는 것을 마지막이라고 보면 여성은 25년가량, 남성은 30년가량 자라야 한다. 전인격적 성숙까지 고려할 때, 사실 인간의 대부분은 평생토록 다 자라지 못하고 살다 죽는다. 직립보행이 인간에게 가져다준 축복의 이면이다. 비대칭의 대칭이란 진리는 여기서도 예외를 허하지 않는다.


인간이 태어나 자라가는 과정은 단계적인 몸짓 변화로 이루어진다. 몸짓이야말로 존재론이며 근원의학이다. 소미한 이야기는 다른 기회로 넘기고 큰 몸짓 이야기만 한다. 아기가 가장 먼저 하는 몸짓은 뒤집기다. 뒤집기는 눕혀진 상태에서 엎드린 상태로 바꾸는 몸짓이다. 이 몸짓은 살아 있는 생명체를 스스로 만드는 최초 행동이다. 배가 위로 향해 있으며 움직이지 못하는, 그러니까 죽어가는 물고기와 움직이지는 않지만 배를 아래로 향하고 잠든 물고기를 비교하면 그 이치를 금방 알 수 있다.


뒤집은 다음 아기가 하는 몸짓은 몸을 좌우로 흔들어 전진하는 배밀이다. 이것은 명백히 물고기, 그러니까 어류의 생명 운동이다. 그 다음에는 손발을 쓰면서 진행되는 엎드려 기기다. 배가 여전히 땅에 닿아 있는 양서류 단계부터 시작해 파충류 단계를 거쳐서 이윽고 배가 땅에서 완전히 떨어져 생활하는 포유류에 이르기까지 자라간다. 그러다가 주위 사물을 의지하면서 서고 발걸음을 떼면서 영장류로 변화해간다. 최후로 걷기가 시작되어 능숙해지고, 게다가 달리기로 나아가면 비로소 인간의 몸짓이 완성된다. 이 일련의 과정은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어류는 어류대로, 양서류는 양서류대로, 파충류는 파충류대로, 포유류는 포유류대로, 영장류는 영장류대로,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우주 이치에 맞는 생명을 살다 간다. 그들의 삶에는 심신 분열도 없고, 자아와 우주의 분리도 없다. 문제는 인간이다. 인간의 걷기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조건이다. 걷기의 진리를 미처 자각하기 전에 인간은 자아폭발(스티브 테일러)이란 분리를 겪으면서 걷기에서 스스로 소외되었다. 걷기에서 소외된 장구한 역사를 우리는 문명이라 부른다. 문명이 이제 인간을 인간이지 못하게 하는 조건이 되었다. 어찌할 것인가?


걷기의 진리를 복원해야 한다. 걷기를 되살려야 한다. 걸을 수 있음에도 걷지 않는 사람은 무조건 당장 걸어야 한다. 걷지 못하는 사람은 기어야 한다. 기지 못하는 사람은 배밀이해야 한다. 배밀이도 못하는 사람은 뒤집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시작해서 걷기를 복원하면, 구구한 설명 필요 없이 인간이 왜 인간인지 알 수 있다.


그러면 걷기란 무엇인가? 이미 <녹색의학은 여성이 남성과 다름을 인정하는 의학이다-『이브의 몸』(14)>에서 대강을 밝혔다. 걷기는 우주 진리를 몸 사건으로 일으키는 인간의 존재 양태다. 두 발과 다리는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며 움직인다.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미는 동작을 교차 반복한다. 찰나적으로만 땅에서 서로 연속되고, 나머지 모든 시간 동안은 서로 단절된다. 이것이 연속과 단절의 본령이다. 연속될 때는 단정하게, 단절될 때는 기우뚱하게 균형을 이룬다. 이것이 연속과 단절의 하모니다. 걷기는 정확하고 절묘하게 우주 운동을 담는 인간 행위다. 몸짓으로서 인간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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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앤 J. 리가토가 제창한 Gender-specific Medicine을 번역자는 ‘성 차이를 고려한 의학’이라 옮겼다. 내 생각에는 ‘성 특정 의학’이라 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지금처럼 남성 중심이면서 ‘보편’을 전유하는 의학 아래 여성의학 아닌 산부인과의학을 배속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학과 여성의학을 평등한 두 축, 엄밀하게 말하면 비대칭의 대칭으로 놓되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不二而不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진단과 치료 전반에 걸친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된다. 교육 내용과 과정도 개편해야 한다. 이런 대대적이 변화가 불가피한 까닭은 부분적인 손질에 그치면 반드시 여성의학은 ‘곁다리’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부가적 지식을 얹어놓는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게 하면 안 된다. 여성의학은 남성의학과 전혀 다른 생명감각으로 접근해야만 하는 지점과 영역이 명확히 존재한다.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결국 하나의 혁명이 필요하다.



이 책이 출간되고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현재 메리앤 J. 리가토가 새로운 땅 어디 쯤 도달했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내 나름대로 성 특정 의학을 실행하고 있다. 무엇보다 마음병 문제에 주의하여 공부하고 치유한다. 갈 길은 먼데 벌써 황혼이 깃들기 시작했다. 초조해할 것은 없다. 가는 꼭 그만큼이 내 천명 아니겠나. 삶에 둔 종자신뢰를 거두지 않는 한 갈 만큼 가게 될 것이다. 기댈랑은 않고 그저 어떤 궁금함으로 발맘발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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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암에 걸린 여성 흡연자에게는 특정 유전자(K-ras) 손상이 있는데, 남성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현상이다. 다시 말해 이 유전적 취약성에 의해 담배의 발암 물질을 중화시키는 신체 능력이 손상되어 암에 걸리기 쉽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여성이 간접흡연으로 암에 걸리기 쉬운 현상을 설명해준다.(371쪽)


담배회사들은·······니코틴의 엄청난 중독성을 숨겼을 뿐만 아니라,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담배의 중독성을 교묘하게 강화시켜 왔다. 건강과 목숨을 앗아가는 흡연 습관에서 흡연자들이 언제까지나 헤어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367쪽)


결국 메리앤 J. 리가토와 피터 C. 괴체는 여기서 만난다.


담배회사 경영자들은 1994년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니코틴에 중독성이 없다고 증언했지만, 실은 수십 년 전부터 그들은 그것이 거짓말임을 알고 있었다. 미국의 거대 담배회사인 필립모리스는 연구 업체를 설립해서 부류연sidestream 흡연의 위험성에 관한 증거를 확인했는데, 800편이 넘는 연구 보고서가 나왔지만 단 한 편도 발표하지 않았다.(『위험한 제약회사』 20쪽)


피터 C. 괴체의 고발은 본디 이렇게 시작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우리는 인간이 만든 두 가지 유행병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 바로 담배와 처방약이다.”( 『위험한 제약회사』 19쪽)


담배회사와 제약회사는 공통점이 많다. 도덕적인 관점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인명 경시가 이 회사들의 전형적인 행태다.”(『위험한 제약회사』 20쪽)


사실 담배회사와 제약회사의 공통점은 좀 더 근본적이고 실재적이다.


소녀들이 담배를 피우는 이유는 단지 멋있고 세련된 이미지 때문만은 아니다.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면 곧 담배가 체형을 날씬하게 유지시키는 효과가 있음을 (또한 담배를 끊을 때 체중이 엄청나게 늘어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그리고 흡연은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완화시켜준다. 이들이 어른이 되어서 담배를 끊고 싶어 할 때, 비슷한 흡연 경력을 가진 같은 연령의 남성보다 훨씬 끊기 어려워진다.”(369쪽)


그러니까 담배도 일종의 약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유사 마약 효과를 지닌 백색화학합성물질이다. 기본 재료가 자연식물이어도 거기에 “담배의 중독성을 교묘하게 강화”하는 첨가물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담배회사는 극력 부인하지만 그들의 전반적 행태로 보아 거짓말임에 틀림없다. 이름이 다를 뿐 담배회사와 제약회사는 동체다. 여기에 의사집단을 보태면 죽음을 팔아먹는 삼위일체 메두사가 완성된다.


담배는 더 이상 기호품이 아니다. 개인 취향 문제로 치부할 단계를 진즉 지났다. 사회정치적 어젠다로 하루빨리 설정해야 한다. 담뱃값 올려 13조원 수탈하는 한편 공포감 조장하는 이른바 공익광고 때리는 식의 얄팍한 전술로는 어림없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20대 여성 흡연율이 상대적으로 높고, 10대 여성 흡연율도 높아지는 추세이기 때문에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다.


백색의학이 담배회사와 제약회사의 주구 노릇을 하면서 인류에게 뿌린 독은 여성에게 더욱 심각하다. 무엇보다 젊고 어린 여성에게 뿌려진 독은 다음 세대로 이어질 것이니 실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녹색의사를 천명 삼은 자로서 고민은 하염없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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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학대를 경험한 여성의 84.5%는 그 경험의 부정적인 영향이 평생 지속되며, 자신의 몸과 자아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는 경향이 크다. 그들은 성적 학대를 경험하지 않은 여성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거나 유지하지 못하며, 자신의 연인이나 배우자와 있을 때도 옷을 벗거나 불을 켠 채로 사랑을 나누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351쪽)


‘여성의 적은 여성이다’라는 말을 페미니스트는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보편명제로 올리기에 하자 있는 말임이 분명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비수 같은 말임 또한 분명하다.


성적 학대를 경험한 한 여성이 어떤 인문학공부 모임에서 그 사실과 그로 말미암은 고통에서 쉽사리 해방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하여 이야기하자 들은 사람들의 한결같은 반응은 ‘왜, 그걸 내려놓지 않느냐?’였다. 자기 연민에 빠져 징징거리는 것은 인문적 삶에 반한다는 비판이 날아들었다. 놀랍지도 않게, 그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놀랍지도 않게, 그들의 리더, 아니 스승은 뜨르르한 철학자였다. 스승은 공개적 질타가 치유라며 가차 없이 그 여성을 공격했다. 그 여성은 다음부터 그들을 무서워했다.


이게 그들한테만 특수하게 일어나는 일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태도는 성폭행 당했다고 울부짖는 여고생 딸의 따귀를 후려갈기며 ‘몸 간수를 어떻게 했기에’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는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여주인공의 엄마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놀랍지도 않게 이 태도는 남성을 내면화한 것이다. 놀랍지도 않게 정서적 공감에 터한 평등한 소통을 내던진 채 이성적 분석에 터한 일방적 훈계를 집어든 남성을 인문학이랍시고 뻐기는 것이다. 놀랍지도 않기만 한 이 풍경에서 쪼끔 놀라운 상상을 한 번 해보자.


그들 가운데 동성애자가 있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자기 연인이나 배우자가 성적 학대의 “부정적인 영향이 평생 지속되며, 자신의 몸과 자아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으며, 자신과 함께 “있을 때도 옷을 벗거나 불을 켠 채로 사랑을 나누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면 어찌 반응했을까?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성애자 남성이고 비-학습 양성평등주의자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상상할 수 없다. 다만 여성 동성애자라도 자신이 남성을 내면화한 채 살아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한, 태도는 달라질 것이 없으리라 볼 뿐이다.


성적 학대에서 인식과 삶 전체의 왜곡까지 여성은 중첩적으로 수탈당한다. 피해자인 여성이 수탈에 부역하면 중첩은 더욱 교묘해진다. 이 질곡에서 벗어나는 길은 수탈당한 여성을 치유하는 사후 방책에 있지 않다. 수탈의 원천을 봉쇄해야 한다. 수탈의 원천을 봉쇄하려면 이 남성문명, 그러니까 백색문명의 멱을 따야 한다. 백색문명의 멱은 일극집중의 거대구조다. 일극집중의 거대구조는 소미심심의 네트워크로써만 무너진다. 소미심심의 네트워크는 아픔과 슬픔으로 나지막이 직조된다.


아픔·슬픔의 네트워크에 트인 남성이 한 축이 될 필요는 있다. 남성이 아픔·슬픔의 네트워크를 주도해서는 안 된다. 두 번 겪을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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