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코의 경제학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 들어 유난히 가진 자들의 ‘갑질’ 행패가 우리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가진 자들의 천박한 유세 떨기는 그들이 가진 게 돈밖에 없다는 사실을 백일하에 드러내주는 짓거리다. 저들은 ‘근본 없는 것’들 콧대 꺾기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자기 근본을 돈에 둘 수밖에 없는 것들이야말로 천하에 ‘근본 없는 것’들이다. 적어도 인간이려면 이 사실부터 알아야 한다. 아마 끝 날까지 저들은 여기에 의도적 무지를 드러낼 것이다. 아는 순간 곧 파멸이라는 진실만큼은 짐승의 감각으로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여론이 휘몰아치고 언론이 떠들어 법의 손길이 다가오면 마지못해 저들은 콧대를 90도 가까이 꺾어서 위기를 넘긴다. 물론 이 또한 비즈니스, 정확히는 몽키 비즈니스, 그러니까 협잡monkey business니다. 나중에 더 높은 각도로 콧대를 쳐들기 위한 전술인 것이다. 콧대를 꺾는 그 순간에도 저들은 나중에 다시 더 높이 쳐들 쪽을 향해 눈은 치켜뜨고 있다. 매판자본의 힘이다. 약탈경제의 힘이다. 저들은 이렇게 하여 스위스 비밀금고에 980조, 조세피난처에 870조 이상을 쌓아 놓을 수 있었다. 이 돈은 2014년 기준 노인· 장애인 복지 본예산을 두 배로 늘여 100년 이상 집행할 수 있는 규모다.


저들에게 그 많은 돈을 털린 을들은 어찌 살아가고 있을까? 아무런 잘못도 없이 늘 콧대가 꺾인 채 살아가고 있다. 갑 앞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친구 앞에서도 그렇다. 가족 앞에서도 그렇다. 자기 자신의 인생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서울 변두리 가난한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재활용품 실은 유모차를 밀고 가는 허리 굽은 할머니 모습이다. 그들의 허리는 거의 90도로 굽어 있다. 따라서 정면을 보기 위해서는 반대로 90도 고개를 들어야만 한다.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자연스러운 콧대의 각도는 지면과 0도를 유지한다.


꽤 오래 전 세인의 논란꺼리가 되었던 ‘폴더 할머니’가 있다. 폴더라는 표현처럼 상체와 하체가 앞으로 거의 완전하게 접혀 있다. 그 상태로 지하철을 전전하며 재활용품을 모으고 있다. 집이 여러 채라는 둥, 아들이 자가용 몰고 와서 실어간다는 둥, 악의적 소문과는 달리 집은 옛날에 소유했던 기록뿐이고, 아들은 알코올중독인 일용직노동자라 한다. 그 분의 콧대는 당연히 지면과 거꾸로, 그러니까 갑들의 그것과는 반대방향으로 90도를 이룬다. 처지가 비슷한 을들의 언어폭력 때문에 그 분의 콧대는 더욱 무겁게 거꾸로 90도로 매달려 있다.


참으로 무서운 사회가 아닌가. 갑들의 갑질을 당한 을들이 더 못한 을들에게 갑질을 흉내 내어 저지르니 말이다. 갑들이야 처음부터 그렇다 치고, 갑들의 갑질을 내면화한 을들의 참담한 마음병이 사회 전반에 검푸르게 번져 있는 것이 문제다. 스톡홀름증후군이라는 서양식 표현도 있거니와 자기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자와 정체성을 공유하는 이 비극이 우리사회를 이 꼴로 만들었으며 앞으로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자본주의가 유일한 이데올로기이자 종교인 세계에서, 그것을 극단화한 식민지 괴뢰국가에서 을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움으로 콧대를 꺾지 않고도 살아가려면 경제 주체로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만 한다. 이것은 돈 앞에서 내리는 정치적 결단으로만 해결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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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코의 정치학


일본 교토에 있는 코 무덤鼻塚을 아는가? 물론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승전의 ‘인증 샷’으로 조선인의 코를 베어 가져다 만든 무덤이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12만이 넘는다 하니 당시 인구를 감안할 때, 실로 엄청난 숫자다. 물론 처음에는 수급首級, 그러니까 목을 베어 오라 했을 테. 현실적으로 어려우므로 그 일부로 코를 택한 것이다. 왜, 하필 코일까?


단순히 간편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코가 인간 존재 자체의 상징이라는 이미지와 관련되어 있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가령, “콧대를 세우다.”, “콧대가 꺾이다.” 따위의 표현에서 나타나는 바와 마찬가지로 코가 한 인간의 사회적 존재 의의를 좌우하는 표지標識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패망의 시그널로서 그 백성의 코를 베어 땅에 묻고, 그 영혼의 기운을 제압하기 위해 돌탑으로 찍어 누른 무덤을 만들었던 것이다. 인간 역사에서 가장 잔혹하고도 칼날 같은 사회정치적 퍼포먼스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이 짓을 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신의 대접을 받으며 금칠한 사당에 누워 있는데, 코 하나로 남은 조선 백성의 고혼孤魂은 조국으로 돌아가지도 못 하고 수백 년 동안 잡초 무성한 무덤 위를 떠돌고 있다. 지금이라도 미련 없이 그 “코” 버리고 제 나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는 안 되는 상황이다. 겉 이름만 대한민국이지 속 알맹이는 아직도 대일본제국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구천을 헤매는 동안 그들의 조국은 매판 귀족 서인 노론 손에 농락당하다가 결국 그들을 죽인 제국주의 일본에 팔려버렸다. 35년 동안 국권을 잃고, 그들의 동족은 살았으나 죽은 채 버텼다. 1945년 일제는 패망했다. 그러나 일제의 패망이 곧 우리의 독립은 아니었다. 점령군인 미군이 통치를 시작했다. 미군의 관심은 일제 부역자 처단, 우리의 진정한 독립이 아니었다. 자국의 이익과 편의에 맞추어 향후 대한민국의 통치 기조를 만들었다. 미국 식민지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단 한 번도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던, 권력과 돈만을 탐했던,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대한민국은 철저하게 왜곡되기 시작했다. 매판집단이 정권을 장악하고 자주민주 세력을 빨갱이로 몰아 죽임으로써 반공주의가 김춘추 세력이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동원했던 통일신라 내러티브를 재현하기 시작했다. 1960년 4·19민중혁명으로 이승만이 축출되었다. 그러나 박정희가 쿠데타로 매판을 극적으로 건져냈다. 독립군 잡는 만주군 장교였던 그가 극대화한 반공주의, 산업화, 그리고 경상도 패권으로 매판이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통일신라 내러티브의 완벽한 재현이었다.


박정희는 18년 독재 끝에 심복의 총탄을 맞고 죽었다. 자주민주의 꿈이 되살아나려는 순간 그가 키운 정치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전두환 노태우가 이어간 매판군부 통치는 이 땅을 더 지저분한 식민의 그늘 아래로 처박아버렸다. 천신만고 끝에 김대중과 노무현은 부족하나마 이 땅에 진정한 정치, 민주주의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그야말로 잠시 숨통만 튼 것일 뿐이었다. 매판독재집단의 강고한 기득권 체제를 깨뜨리지 못했다. 일천오백 년에 십 년은 금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뼛속까지 매판임을 자타가 공인하는 이명박은 단군 이래 최고의 수탈통치를 감행했다. 공적 권력을 철저히 사적 이익 추구 수단으로 악용했다. 매판 재벌의 마름에서 출발하여 매판독재 상속자의 마름으로 화려하게 끝을 맺었다. 그리고 마침내, 저 박정희의 딸이 일천오백 년 매판 역사의 정점에 등장했다. 대중의 공포, 탐욕, 무지를 극대화했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먹고 살아야 한다고 부추겼다. 매판이면 어떻고 독재면 어떠냐고 속삭였다. 콧대를 팔아 배를 두드리라고 꼬드겼다. 그렇게 협잡질을 하다가 쫓겨나 감옥에 갇혔다.


박근혜를 벤 자리에 자주와 민주, 그리고 통일의 꽃이 피었나? 촛불정부라는 새 정권이 매판독재세력에게 조리돌림 당하는 현실은 참담하다. 여전히 코 무덤 위를 떠도는 백성이 돌아올 조국은 없다. 돌아오면 다시 한 번 그 코를 베일 것인데, 어찌 돌아올 것인가. 더더욱 수치스럽게 일제의 마름, 아니 개들의 손에 베일 것인데, 어찌 돌아올 것인가. 살아 있는 사람의 “콧대를 꺾어”버려 자살자가 OECD국가 가운데 1위인 식민지 조국에 돌아와 그 원한이 어찌 풀리겠는가.


코 무덤의 저 영령들이 시간을 가로질러 돌아올 수 있게 하는 단 하나의 열쇠는 오늘을 사는 우리의 각성이다. 역사 속에서 왜곡된 정치의 진실을 밝혀 이제라도 자주·민주·통일의 길을 열어갈 때, 산 자의 콧대와 죽은 자의 콧대가 하나의 시간, 하나의 공간에서 어울려 대동大同을 이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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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코의 교육학


최근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어린이·청소년은 세 명 중 한 명 이상이 각종 비염 증상에 시달리고 있다. 실제로는 아마도 절반가량이 그럴 것이다. 그리고 비염은 단순히 비염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많은 경우 틱 장애, 아토피 피부염, 천식, 과민성장증후군, 그리고 우울장애와 결합되어 나타난다. 무엇보다 흔히 전형적인 알레르기비염으로 오해받고 있는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이 문제인데, 이것은 우울장애와 직결되어 있다. 우울장애 또한 비염과 비슷하게, 아니 그 이상으로 어린이·청소년을 괴롭히고 있는 질병이다. 이런 역학疫學· 사회의학적 진실의 연장선에 어린이·청소년 자살률 1위 국가라는 비극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어린이·청소년의 비염 문제는 교육 문제, 아니 양육 전반에 걸친 부조리 문제다. 물론 환경오염이나 인스턴트식품 등의 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심리적·정신적 요인을 결정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오직 돈 잘 버는 기계-인간으로 ‘콧대’를 세우기 위해 어려서부터 학원·경시대회·연수·봉사를 돌며 점수와 스펙의 무한경쟁을 해야 하는 아이들의 인격-인간의 ‘콧대’는 무자비하게 꺾이고 만다. 이렇게 ‘콧대’ 꺾인 ‘코’가 온전할 리 없다. 아마도 염증은 저 심층의 자긍심에서부터 생겼을 것이다. 거기서 솟아올라 급기야 염증은 표층의 코에까지 번졌을 것이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이것은 결코 비유가 아니다.


아이들이 자라 어른 된다. 지금 무참히 꺾인 콧대를 지닌 채, 저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우리사회는 대체 어찌 될까? 이른바 대박 난 극소수 아이들과 당연히 그럴 수 없는 절대다수의 아이들이 주종관계에 놓이는 신노예제사회가 될 것이다. 이미 우리사회는 그런 단계로 진입하였다. 미래에는 더욱 확실해질 것이다. 확실해지는 만큼 참혹한 지옥이 될 것이다. 이 흐름을 누가 얼마나 어떻게 거부하느냐에 따라 희망과 절망이 갈릴 텐데, 전망이 그리 밝지 않다. 아이들의 교육, 아니 양육 전반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개판민국으로 끝날 것임에 틀림없다.


아이들을 건강하고 바르고 아름답게 키우려면, 그 무엇보다도 한 인격으로 절대 존중해주어야 한다. 인간의 콧대를 세워주어야만 한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인격이 어른의 반만큼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인간의 콧대가 꺾일 때, 멀뚱멀뚱한 것이 아니다. 아이들도 온전한 인격체다. 아이들도 콧대가 꺾일 때, 인간성 파괴를 통렬하게 느낀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덩치 작은 어른이 아니다. 아이들의 몸과 마음이 자라 성숙한 생물학적·사회적 인간이 될 때까지 어른들은 자상하게 보살피고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에는 시간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의 삶이 다채로운 갈래로 펼쳐질 수 있도록 입체적인 가치, 풍요로운 장場을 열어놓아야 한다.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야 한다. 의로움을 위해 헌신하는 삶이 숭고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돈이 신이고, 권력이 종교인 자신의 삶을 그대로 물려주기 위해 혈안인 우리사회 어른들한테 이 말이 얼마나 물색없는 소리인지 결코 모르지 않는다. 알기 때문에 곡진히 말하는 것이다. 지금 괴물인 어른들이 아이들마저 그렇게 키운다면, 아이들은 악귀가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러므로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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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각 폄훼의 철학적 흐름 선두에, 정상에 섰던 사람이 바로 칸트다. 그는 시각, 청각, 촉각은 객관적 능동적 감각이고, 후각(따라서 미각)은 주관적 피동적 감각이라고 구분 지었다. 전자는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고, 후자는 강요되어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자는 혐오 대상이다. 주체로서 이성을 구축하고자 했던 그에게 이 구분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오류무아지경, 무지삼매경 맞다. 그러나 칸트는 절대군주였다. The King can do no wrong! 칸트의 이런 강박적 이성독재는 헤겔의 중립화와 포이어바흐의 복권을 거쳐, 니체의 돋을새김이 있기까지 전 유럽을 지배했다. 니체는 후각이야말로 진정한 쾌락의 전령이며 공감, 직관적 통찰, 자비심, 윤리의식, 자기성찰의 기원이라고 갈파했다. 그러나 아직도 니체의 칸트 해체는 비주류 딱지를 완전히 떼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사실 이것은 서양 철학사에서 특별히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다. 아폴론적 전통과 디오니소스적 전통 사이의 대칭성, 그 대칭성의 파괴를 둘러싼 오래된 에피소드의 근대 버전이다. 이성독재의 길고 긴 세월 동안 코는 그야말로 숨 쉬는 도구로, 그러니까 당연히 있는, 배경 같은 존재로, 더군다나 텅 빈 구멍으로 인식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후각, 그러니까 감성을 ‘쌍것’ 취급하는 전통의 결과다.


이런 관성은 진화론적 뇌 과학에 큰 빚을 지고 있다. 파충류 뇌에서 포유류 뇌로, 그리고 영장류 뇌로 진화하면서 본능-감성-이성·의지의 계층구조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진화론적 뇌 과학 이론이다. 전반적인 이야기 흐름을 이해하지 못 할 바 없다. 하지만 나중에 생긴 것이 고등한 것이라는 식의 발상은 동의할 수 없다. 진화라는 표현 자체에 이미 선형적 발전의 인식론이 전제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변화가 다 발전은 아니다. 달라진 삶의 조건에 다른 방식으로 적응하는 것일 따름인 변화를 모두 진화/발전으로 보는 것은 서구의 직선적 또는 종말론적 시간관의 투영이 아닐까 싶다.


이런 프레임을 내려놓으면 오히려 거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생명에서 가장본질적인 것이 생긴 뒤, 생명현상을 더욱 유연하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 비본질적, 부차적 기능들이 생겨났다고 말이다. 비본질적, 부차적인 것이 인간의 특징이기 때문에 특별하게 여기는 생각을 딱히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다. 그렇지만 본질적인 것을 혐오 대상으로 삼는 생각까지 용인할 수는 없다. 건강할 때든, 병들었을 때든, 치료할 때든, 감성, 곧 후각은 그 어떤 감각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이성과 감성이 극단적· 순간적으로 맞물릴 때, 감성이 이성을 제압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감성은 자연이고, 자연은 실재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당위이고, 당위는 요청이기 때문이다. 근대정신이 이성을 왕으로 옹립하려 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그러나 왕의 정체가 드러났다. 왕의 귀는 당나귀 귀였다!


선입견을 내려놓고 생각해보면 인간 생명은 감성에서 시작하여 감성으로 끝난다. 인간의 모든 정신 현상의 중심과 경계에는 감성이 자리 잡고 있다. 흔히 말하는 감정은 감지感知 감성이다. 흔히 말하는 이성은 이지理智 감성이다. 흔히 말하는 의지는 지향志向 감성이다. 새로운 왕의 탄생이다. 아니 참된 왕의 귀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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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코의 문화철학


인간의 사유는 언어적 표현 안에서 가능하다. 언어적 표현을 통해 사유가 이끌려 나오기도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반 현상은 사유의 결과가 언어적 표현을 통해 나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쓰는 언어적 표현들을 보면 주의하고자 하는 대상에 관한 그 시대의 사유를 알아차릴 수 있다.


코에 대한 언어적 표현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은 아마도 ‘개 코’일 것이다. 냄새를 아주 잘 맡는다는 뜻으로 쓰는데 이 말이 주는 어감은 애당초 그리 좋지 않다. 나중에는 욕설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만다. 코에 대한 부정 언어학은 비단 이뿐이 아니다. 코 묻은 돈. 코 빠뜨리다. 코 꿰이다. 코가 석 자다. 코 떼어 주머니에 넣는다. 코 아니 흘리고 유복하랴. 콧구멍 같은 집에 밑구멍 같은 나그네 온다.······ 다른 감각기관에 비해서 긍정적인 표현이 현저하게 적은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코에 대한 이런 인식은 아마도 냄새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냄새, 또는 냄새 맡는 기능이나 행위에 대한 평가가 그대로 코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냄새란 말 자체가 이미 좋지 않은 느낌을 간직한 채 사회문화적으로 유통되고 있다. “향기”라는 한자어와 기능이 수직 분화되어 정착된 것을 보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냄새난다.”는 표현도 당연히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른다. “향기롭다.”와 대조하면 대뜸 알 수 있다. “냄새 맡다.”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범죄자들의 직감을 표현하는 비유로 동원한다. 이처럼 냄새는 좋은 수식어, 예컨대 “엄마”가 붙지 않으면 좀처럼 좋은 뜻으로 읽히지 않는다.


이것은 순 우리말에 대한 우리사회 특유의 자학현상만으로 해석하기 어렵다. 냄새 자체에 대한 사회문화적 태도가 반영된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말을 보면 들어보다, 맛보다, 만져보다, 맡아보다, 와 같이 모든 다른 감각 위에 시각이 있다. 시각만은 못하지만 청각 역시 매우 중요한 감각으로 인식해온 것이 우리의 사회문화적 전통이다. 경청傾聽/敬聽이란 표현도 그렇고, “귀가 보배다.”라는 속담도 그렇다.


물론 우리보다 서구사회가, 근대 이전보다 이후가 훨씬 더 치우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성독재”의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18세기 이후 이성은 감성(감성은 감정을 퍼텐셜의 측면에서 이해한 것으로 여기서는 감정과 동의어로 씀)을 계몽 대상으로 발아래 둔다. 감성은 동물적, 원시적, 여성적 본능의 영역으로 비하된다. 여기서 이성에 속하는 것은 시각, 청각, 촉각이다. 감성에 속하는 것은, 당연히 후각과 미각이다. 그런데 미각의 80% 이상이 후각이므로, 결국 이성독재의 시공간에서 희생양이 된 것은, 실질적으로 오직 후각, 그러니까 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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