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면역 이야기에서 좌우 뇌를 언급했다. 큰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양자를 떠올리면 다소 뜬금없다고 느낄 수 있다. 녹색의학 이야기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아직 피부 문맥을 벗어나지 않았다. 오감 뒤에 바로 면역 이야기를 한 것은 면역이 본디 피부사건이기 때문이다. 순서로 따지면 면역 관련 피부질환, 장腸 이야기, 자기면역질환 심화론 등이 이어져야 하겠지만 일단 나온 김에 좌우 뇌 이야기를 잠시 하고 가련다. 하기야 대뇌가 후각세포에서 진화했으니 마냥 샛길은 아니지 싶다. 옳거니, 여기부터 짚으면서 이야기하면 되겠다.


후각이 다른 감각과 달리 직접 뇌로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이미 했다.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우뇌로 들어간다. 후각 소외·억압은 그러므로 우뇌 소외·억압과 같은 것이다. 좌뇌가 쿠데타를 일으켜 뇌 민주정치를 망가뜨린 사건이 바로 앞서 말한 스티브 테일러의 자아폭발이다. 본디 뇌는 좌우 비대칭의 대칭구조를 통해 온전히 균형 잡으며 생명 정치에 이바지해왔다. 자아폭발을 계기로 드러나기 시작했지만 이 대칭구조는 아직도 선명하게 지각되지 않고 있다. 좌뇌 기능 일극구조가 확고해질수록 우뇌 기능, 우뇌 기능 우위 인간은 소외·억압되었다. 좌뇌 독재는 6000년 동안 승승장구했다. 그간 두 차례에 걸쳐 극복운동이 일어났다. 칼 야스퍼스가 말한 제1, 제2 차축시대에 말이다. 유의미한 전승으로 남아 있지만 좌뇌 독재의 질주를 막지 못했다. 참 혁명이 우리 시대의 절대화두다. 좌뇌 독재의 폐해가 인류 존망이 문제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좌뇌 독재, 무엇이 문젠가? 음모론 같이 들리는 이야기로 풀어보자. 괴벨스의 440hz 음악을 앞에서 스치듯 언급했다. 무슨 말인가? 오늘날 우리가 듣고 있는 음악의 표준 주파수는 440hz다. 제3제국 제2인자 괴벨스가 주도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정확히 의도를 알 수는 없지만 무심코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테니 추적해봄직하다.


440hz는 좌뇌만 자극하여 그 반응을 증폭시킨다고 한다. 432hz가 좌우 뇌를 고루 자극하여 균형을 유도하는 것과 대조된다. 좌뇌는 언어와 분석을 제어하는데, 부분적 사실에 집중하도록 이끈다. 집중은 고양高揚을 낳는다. 고양의 과도가 바로 조증mania이다. 세계전쟁과 유대인 제노사이드를 일으키면서 나치가 치밀하게 계산한 심리전술 가운데 하나가 바로 440hz를 통한 조증, 그러니까 광기(mania)였다고 해석하는 게 무리일까.


나는 이런 추적을 하면서 440hz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과 듣는 사람들이 드러내는 정서 상태를 유심히 관찰했다. 전문 연주자들의 과도한 표정과 몸짓이 연출이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청중의 열광적 반응도 마찬가지다. 황홀경으로 몰아가는 힘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이는 연주자의 해석과 기량, 청중의 이해와 공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나는 음악뿐만 아니라 무엇에든 그토록 열광해본 적이 없어서 신기해할 따름이었는데 비로소 수긍이 가기 시작했다.


내가 또 한 가지 주의를 기울인 일은 432hz 음악 듣기였다. 나 또한 긴 세월 동안 440hz 음악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처음 들었을 때 432hz 음악은 다양한 측면에서 불편함을 자아냈다. 무엇보다 답답하다는 느낌이 확 달려들었다. 음색과 음조의 갈래가 명징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심지어 베토벤을 듣다가 중간에 끈 적도 있다. 다시 정색하고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440hz가 음악 포르노라는 사실이었다. 다시 432hz로 돌아와 모차르트 심포니40을 들었다. 고요와 평안으로 배어들 수 있었다.


흔히 좌뇌는 긍정 판단을 우뇌는 부정 판단을 관장한다고 한다. 피상적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좌뇌는 부분적 사실에 집중하기 때문에 긍정, 나아가 조증 상태를 유발하기 쉽고, 우뇌는 전체적 진실에 터하여 성찰하기 때문에 조증 상태를 제어한다고 해야 맞다. 전체적 맥락을 살피려면 반대 관점에 유의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 하므로 부정적·비판적이라는 누명을 쓰는 것이다. 좌뇌적 성향은 형식논리, 우뇌적 성향은 화쟁논리에 터한다. 형식논리는 자아단일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타자를 정복하고, 화쟁논리는 자타일심의 자비를 가지고 공존을 꾀한다. 자아단일의 일극집중구조가 당연히 압도적으로 강한 물리력을 가진다. 좌뇌 문명이 역사를 지배한 까닭이 여기 있다. 그들이 지배한 인류가, 지구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린 소이가 여기 있다. 우뇌 혁명이 간절히 요청되는 상황이다.


우뇌는 좌뇌와 1:1의 대립항이 아니다. 이는 여성이 남성과 1:1의 대립항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이 점은 매우 강조되어야 할 진실이다. 서구적 사유로는 이 말을 알아듣기 힘들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좌우 뇌는 해부학적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는 한의학의 폐肺가 서구의학의 폐lung하고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이 점은 매우 강조되어야 할 진실이다. 서구적 사유로는 이 말을 알아듣기 힘들다. 이 공부에서부터 우리 시대는 녹색 뇌 혁명을 시작해야 한다. 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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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장애를 자기면역질환이라 했더니 질문하는 이가 드물지 않기에 조금 더, 기왕이면 큰 맥락에서 이야기하겠다.


우울장애는 기분의 차원을 넘어 존재 자체에 가 닿는 질병이다. 기분이 꿀꿀한 정도가 심하다, 슬픔이 일상을 지속적으로 뒤흔든다, 사는 게 재미없다, 뭐 이런 것들은 증상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현실 존재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관심, 흥미, 가치, 의미, 목적, 계획 따위가 죄다 부질없어지는, 그래서 몸도 아프고, 잠도 오지 않고, 무기력해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심신증후군이다. 단도직입으로 말해 우울장애란 전천후 자기부정증후군이다.


자기부정이 다름 아닌 자기면역이다. 정신적 차원에서 그리 표현했을 따름이다. 자기부정은 타인긍정을 수반한다. 자기를 죽인 시공에 타인을 채워 넣음으로써 자타의 동화를 꾀한다. 우울장애의 또 다른 이름은 그러니까 동화同化증후군인 셈이다. 이는 흔히 ‘우뇌’라고 부르는 뇌 기능이 항진된 병리다. 동화증후군은 이화異化증후군의 희생양이자 대칭이다.


이화증후군은 이화문명을 낳은 질병이자 이화문명이 낳은 질병이다. 이화증후군은 스티브 테일러가 말한바, 사하라시아 지역에서 기원전 4천년 경 일어난 인도-유럽어족·셈족의 자아 폭발, 그러니까 타락과 사회역사적으로 결부된다. 이 자아폭발은 자기를 제외한 모든 존재를 적이나 수탈 대상으로 여기는 극단적 이화 병리다. 이 병에 걸린罹患 집단은 자아 정체성 인식·유지에 민감하고, 논리 일관성에 집착하므로 모순되는 상황에 직면할 경우, 공격성을 드러낸다. 베르니케코르사코프 증후군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작화증후군의 자기기만, 인지 부조화, 확증편향, 조증, 신체망상, 정신분열 등의 일련의 분열 스펙트럼의 병리적 경향을 지닌다. 이는 흔히 ‘좌뇌’라고 부르는 뇌 기능이 항진된 병리다.


이화증후군에 걸린 자들이 한 사회의 지배집단이 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역사가 이를 증명해준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대한민국을 보면 이내 수긍할 수 있다. 이화증후군에 걸린 자들이 만들어내는 억압수탈체제에 속절없이 당한 피지배자가 동화증후군을 앓는 것 또한 지극히 자연스럽다. 자기면역질환으로서 우울장애를 포함한 동화증후군이 일어나는 변방, 바로 그 자리가 동화혁명의 출발점이다. 동화혁명은 자기부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 아프고 슬픈 각성에서 비롯한 연대의 힘으로 이화문명, 이화정치경제학에 저항한다. 저항은 앓는 생명의 피눈물 값이다. 피눈물로 내 경계를 허물어 남을 맞아들이는 내림굿이 녹색면역혁명이다; 민주주의혁명이다; 바리데기혁명이다.


바리데기가 앓는 자기면역질환이 우울장애다. 바리데기가 알아차린 자기부정이 혁명의 고통 조건이다. 바리데기가 알알이 영글게 할 오고 올 오늘 꿈은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갈 녹색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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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은 그 정의 여하와 상관없이 오늘날 삼척동자도 입에 올리는 쉽고 흔한 말이다. 가령 면역력이 약해서 병에 걸렸다는 말을 누구나 한다. 면역력이 약하다는 말은 당연히 외부 조건을 비-자기, 그러니까 적으로 인식해서 격퇴하는 힘이 약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과민한 면역반응을 보이는 알레르기질환의 경우도 본질적으로는 면역력이 약해서 생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균형의 상실로 풀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문제는 이른바 자기 면역에서 일어난다. 자기를 적으로 인식하여 공격하는 것을 일종의 면역 과잉으로 이해하면 당연히 그 치료는 면역 억제로 방향을 잡는다. 실제로 백색의학 치료는 그 시스템으로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았다. 이종의학인 백색의학으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과연 타당한가? 면역 억제의 끝이 무엇인지 안다면 이 짓을 치료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찌 할 것인가? 물론 백색의학에게 달리 쓸 방법은 없다.


이 막다른 골목은 논리적 필연이다. 면역 또한 이종 면역 일극구조니까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의 면역학자 아보 도루의 주장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면역은 본디 자기 면역이었다. 생명체가 바다에서 뭍으로 올라오면서 새로운, 그러니까 이종 면역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이 변화는 비가역적인 것이 아니다. 스트레스 등으로 생명 유지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면 낡은 면역, 그러니까 자기 면역 체계가 복귀한다. 이 낡은 면역은 주로 소화기관, 소화기관에서 진화한 간, 외분비선, 생식기관 주위에 포진한다. 이 상황을 사실로 전제하고 진화 역사의 집장태로 해석하면, 면역은 이종과 동종의 비대칭적 대칭구조가 된다. 난치성 자기 면역질환에 이환된 몸은 모순이 공존하는 상태에 놓인다는 말이다. 이 상태를 백색의학 방식으로 풀어낼 수 없음은 당연하다. 형식논리에 터한 백색의학이 쌍방향치료를 상상이나 하겠는가. 이 상황을 돌파할 단 하나의 길은 쌍방향치료다. 쌍방향치료를 가능하게 하는 의학이 바로 녹색의학이다.


녹색의학의 면역은 형식논리를 넘어선다. 이율배반을 품는 전체 진실에 터한다. 녹색 면역의 빛으로 보면 악성종양도 전혀 달리 해석하고 치료해야 한다. 아직은 아무도 수긍하지 못하겠지만 혈관운동신경성비염도 본질에서 자기면역질환이라 할 수 있다. 더더구나 도리질을 치겠지만 나는 우울장애 또한 자기면역질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홀로 이 길을 가고 있다. 적적하나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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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 사회에서 시각독재tyrannis visifica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자연스럽다. 극한을 넘어 날조 이미지로까지 드러내고 극한을 넘어 환각으로까지 탐시貪視하느라 미쳐가는 세상에서 눈은 본의 아니게 자본의 총아며 타락의 상징이 된다. 눈은 잘못이 없다. 있다면 오징어 눈만도 못한 불완전성을 지닌다는 것뿐이다. 문제는 백색 시각이다.


백색시각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시각은 중심시각에서 형성된다. 중심시각은 선택한 개체에 시종일관 집중한다. 집중시각은 전체에 주의하지 않는다. 전체를 희생해서 개체를 비대하게 만들 때, 불평등 구조가 탄생한다. 불평등 구조의 종착지가 바로 포르노다. 포르노는 거대하게 발기한 자아, 지식, 돈, 권력 잔치다.


백색시각을 전복하는 시각 혁명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중심시각의 타파다. 비-중심시각으로 전체성을 복원한다. 집중의 일관성을 무너뜨리고 전 방위로 시선을 개방한다. 모든 것에 주의하여 아무것에도 집중하지 않는다. 집중하지 않으면 크고 작음의 차별이 없어진다. 차별이 사라져 텅 빈, 텅 비어서 멍한 눈길에 무한한 자비가 배어든다.


눈의 모습에 주의하면 다음 길이 보인다. 눈은 왜 상하 아닌 좌우로 길쭉할까? 눈은 넓이의, 그러니까 수평의 감각을 기본으로 한다. 높이와 깊이의 감각은 부차적이다. 수평 감각은 랭크rank 아닌 링크link, 그러니까 상하차별 아닌 평등연대, 고매·심오 아닌 수수·평범의 감각이다. 끊임없이 좌우를 돌아보는 눈길에 따스한 사랑이 스며든다.


녹색시각의 혁명은 시각독재의 일극구조를 무너뜨릴 뿐, 중심시각 자체를 폐하지 않는다. 중심시각과 비-중심시각이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어 개체와 전체의 균형이 ‘일렁고요’ 사건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일렁고요’는 그냥 오지 않는다. 시중時中의 특이점마다 비폐비개非閉非開의 눈으로 성찰해야 한다. 중도中道의 정도正道다.


혁명의 마지막 한 순간에는 결연히 눈을 감기도 해야 한다. 실재 악의 멱을 딸 때 그것이 전시하는 포르노를 감상할 필요는 없으니까. 혁명의 마지막 한 순간이 오기 전에 정색하고 어떤 순간 결연히 눈을 감는 제의 또는 놀이를 할 필요도 있다. 필연이 우연의 옷을 입고 도둑 같이 올 수 있으니까. 깨어 있는 일이 은총만은 아니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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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하라 요시토시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인간은 포유류 가운데 청각우위뇌형이라고 한다. 듣는 인간homo auditus인 것이다. 말하는 인간homo narrans과 대칭을 이루고 있는 진실이다. 들어 소통하지 못하면 아무리 정교하고 현란한 말인들 무슨 소용이랴. 언어 진화 자체도 구강을 포함한 발성 기관에서만 비롯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말을 정확히 듣는 청각기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듣기 사건은 말하기 사건에 선행한다. 아기는 엄마에게서 들려오는 모(국)어를 듣고 그때로 따라 함으로써 말의 세계에 들어선다. 듣지 않으면 말할 수 없다. 이런 차서의 이치는 비단 생애 초기에만 통하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까지 인간은 먼저 듣고 나중 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많이 듣고 적게 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귀는 두 개고 입은 하나다. 남은 다수고 나는 단수다. 나는 남 속에 있다.


인간이 말을 발달시켜온 까닭도 남들이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말을 잘 하는 사람이냐 아니냐는 말하기 자체의 능력에서 판가름 나는 게 아니다. 듣는 사람이 못 알아들으면 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말하는 사람으로서는 젬병이다. 남들이 잘 알아듣도록 말하려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부터 잘 들어야 한다. 듣는 능력 뛰어난 사람이 말 못 하는 법은 없다. 말은 귀 사건이다.


청각은 기능을 넘어 자세다. 청각 기능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상 유무를 살피는 일은 개인 건강 차원을 넘어 공동체 소통과 공존을 향한 열린 자세의 표지다. 백색문명은 청각에서 자세를 누락시켰다. 백색 학문과 문학은 알아들을 수 없는 난해 포르노를 쏟아낸다. 백색 음악은 8hz 지구 조화 장場과 불화하는 괴벨스의 440hz를 연주한다. 백색청각은 소통 아닌 소비만을 향해 속절없이 열린다.


수탈적 소비를 향해 열린 청각은 막무가내 확증 편향으로 진실의 문을 닫는다. 듣고자 하는 것만 듣는다. 그리 들은 것만 진리라 우긴다. 우기는 것을 우월의 증표로 삼는다. 증표 받고 떡고물 떨어뜨려주는 백색언어세력이 1500년 동안 떠들어온 나라가 여기 있다. 떠드는 소리를 듣지 않고 백성이 기어이 그 수괴의 멱을 딴 나라가 또 여기 있다. 이 나라 백성으로서 가만히 녹색 귀를 만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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