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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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윤리 제1조는 생명을 빼앗으면 안 된다.’입니다. 생명을 빼앗기면 어떤 기분이 들 지알 수 없는데도 말이지요. 인간사회가 만든 모든 규범은 죽는 고통, 죽은 뒤 고통을 실감하는 일 없이는 어떤 무엇도 규정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죽은 자와 공감 또는 소통하거나 죽은 자 체험을 추체험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사회 도덕, 윤리는 그 결코 할 수 없는 죽은 자 체감에 공감하는 일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에게서 메시지를 받고.......그 메시지를 듣는다는 전제가 없으면 인간사회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윤리 기반은 최종적으로 죽은 자와도 소통하는 인간 본질적 능력과 유관하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218

 

우치다 타츠루가 내게 가장 건넨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죽은 자와 소통하는 능력 여하였다. 이 문제의식은 지난 8년 동안 줄곧 나를 사로잡아왔다. 물론 4·16에서 비롯했다. 최근에는 낭·풀 공부를 하면서 결국 인간 손에 버려진, 죽여진 존재 모두를 향한 문제의식으로 확산되었다. 이 문제의식은 동시성 이야기와 맞물리면서 서서히 어떤 실마리를 찾아 나아간다는 느낌으로 이어지고 있다.



오늘 아침 한의원에 제상을 차렸다. 나는 아침 식사를 구운 감자나 달걀, 두부들과 같이 간단한 음식으로 한다. 반찬도 김치와 생된장이면 훌륭하다. 여기에 막걸리 한 잔 부어 올려 여덟 번째 4·16제상이 됐다. 오늘도 아이들이 왔다는 사실을 마음으로만 아니라 몸으로도 안다. 가령 제주를 마실 때와 나머지 막걸리를 마실 때 몸 느낌이 전혀 다르다. 전자는 내가 마시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런 섬세한 알아차림도 소중하지만 내가 곡진히 마주하는 일은 아이들이 보내는 메시지를 어떻게 받고 듣는가 하는 문제다. 산 자가 산몸으로 죽은 자와 공감 또는 소통하거나 죽은 자 체험을 결코 추체험할 수 없음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칼날 위에 서는그런 문제다. 죽는 고통, 죽은 뒤 고통을 실감하는 일 없이 인간 윤리를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은 자와 소통하는 능력은 인간 본질이다. 이 본질에 도달한 산 자 그 누군가. 아무도 없음에도 인간은 거기 의거해 윤리를 구성한다. 어쩌면 아무도 없으므로 거기 의거해 윤리를 구성하는지도 모른다. 윤리 인간이 무한히 겸허해야 하는, 그러니까 어찌해도 모자란 윤리 함량을 지니고 살아갈 수밖에 없으므로 영혼 한가운데를 늘 비워놓아야 하는 까닭을 품은 영원미제 진실 아닐까. 그래도 우리는 그 길을 끊임없이 찾아야 한다. 본질은 자격이 아니고 당위다.

 

나는 이 문제와 생을 걸고 화쟁한다. 10대 후반에 시작해 60대 후반에 다다른 지금까지 법학, 신학, 의학 공부를 가로질러 추구해온 한 길이 결국은 여기로 향해 있었다. ·풀 공부가 이 화쟁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 탐색 이미지가 비대칭대칭 세계를 옹글게 살도록 하는 동시성synchronicité과 상응correspondance에 가 닿도록 이끌었다. 설렘으로 마주할 테고 마주하는 모든 풍경들을 그려 소통시킬 테다. 여덟 번째 4·16제상 앞에서 올린 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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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화중심주의는 자신과 다르면 배제하고 잘라버리는 문화다.”라고 흔히 말하는데, 엄밀히 말해서 잘라버리지는 않습니다. “필요 없어!”라고 하면 그나마 괜찮습니다. 이미 아는 영역으로 끌어와 열등하다, 유아적이다, 미개하다고 낙인찍어 자기 문화 서열 안에 배치합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라고 소리 높여 선언한 근대 휴머니즘은 그렇게 해서 자신과 다른 문화를 가진 인간을 평등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교화 훈육 대상으로 삼아버렸습니다.(200~201)

 

 

다른 문화를 가진 인간을 다른인간으로 여겨 함부로 침범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기본자세는 문화인류에게 진즉부터 없었다. 서로 다른 인간 간 평등이 존재 자체가 아니라 문화 권력을 근거로 삼았기 때문이다. 자기 문화를 기준으로 보면 다른 문화는 죄다 열등하고, 유아적이며, 미개하다. 열등하고, 유아적이며, 미개한 인간을 교화 훈육하는 일이 신께 받은 사명이라고 굳게 믿는 선의가 선교사콤플렉스다. 선교사콤플렉스를 선두로 서구문화는 지구촌을 서구문화 단일경작농지로 갈아엎었다. 그 단일경작물은 바야흐로 멸종 국면을 맞고 있다.

 

서구 자문화중심주의 흉내 내서 일제가 19세기 후반에 내걸었던 아류 우월주의 슬로건이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떠나 서구로 진입하는 징표 삼아 일제는 조선을 열등하고 유아적이며 미개한 족속으로 낙인찍었다. 낙인은 교화 훈육을 위한 국권 갈취로 이어졌다. 물론 이 과정에는 자발적으로 부역하고 주구 노릇을 한 매판세력이 있었다. 저들은 식민지 시절은 물론 해방 이후에도 미군정을 발판 삼아 승승장구했다. 저들은 여전히 일본을 종주국으로 여기며 제 민족을 열등하고, 유아적이며, 미개해서 교화 훈육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 중 공부깨나 하는 자들은 종주국 국비장학금으로 공부해서 식민지지성을 형성한다. 식민지지성은 사회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황국신민 배양에 매진한다. 그렇게 배양된 황국신민 가운데 한 사람이 지난 39일 다시 이 나라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지금 자주시민이 일으킨 민주주의를 지우고 있다. 그가 처음 한 일은 황국군영이 있던 곳에 집무실을 만들겠다는 선언이었다. 황국 지배 영속화 의지를 대놓고 천명한 셈이다. 보다시피 자문화중심주의, 그러니까 제국주의는 제국주의로 진화하면서 이리도 초월적인 힘을 지니게 되었다. 배후에는 언제나 신이 있었다.

 

신을 거대인격신으로 투사한 이래 문화인간은 그 신을 앞세우고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는 죄악을 저질러왔다. 그 죄악이 형언 불가한 이유는 구원과 양육과 개화를 내건 자비로운 언행이었기 때문이다. 죄의식 없는 죄, 악의 없는 악이 웃으며 파고들 때, 당하는 사람은 피해의식도 악감정도 품지 못한 채 자발적으로 고통 받으며 죽어간다. 이 기막힌 죽음은 존재를 형해화하고 윤리를 희화화한다. 지금 나는 토실한 형해 생명이 엄숙한 희화 윤리를 존숭해마지 않는 세상을 살고 있다. 이런 세상에 태어난 감사에 잠겨 온 영혼이 퉁퉁 불어터져서 장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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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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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논리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사회이론보다 여기저기 모순이나 하자가 있는 사회이론을 신용합니다. 그런 모순은 현장에서만 나오는 말이니까요. 생활체험과 사회경험 속에서 인간이 지닌 어리석음을 숙지한 사람 입에서만 나올 수 있는 말이기 때문에 신용할 만합니다.(191)

 

우치다 타츠루가 일관되게 고수하는 시간 고수 이야기에 이의제기하던 차에 내가 꺼낸 말이 동시성이었다. 내친 김에 우치다 타츠루 쓰기를 멈추고 동시성, 양자역학, 불교: 영혼 만들기Synchronicity, Science, and Soul-making: Understanding Jungian Synchronicity Through Physics, Buddhism, and Philosophy를 읽었다. 번역 제목에서 세심 아닌 대충이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느낌이 아쉬우나 대수롭지 않다.

 

미국 콜게이트 대학 물리학·천문학과 교수인 빅터 맨스필드가 썼다. 녹록치 않은 책이다. 내가 원하는 통찰을 얻기 위해 질문과 사색을 거듭하며 읽었다. 저자 입에서 내가 원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동시성 문제를 발원시킨 카를 구스타프 융과 그가 어떻게 같으면서도 다른지, 왜 그런지, 그러면 삶은 어디를 향하는지, 게다가 인과, 시공, 정신, , 꿈 문제에서 무엇이 핍진한지 촘촘히 따져볼 수 있었다. 더없는 선물이다.

 

선물이라면 동시성을 따를 무엇은 없다. 동시성은 세계 네트워킹이 전체 차원에서 지혜를 개체에게 선물하는 비인과적 과정이다. 인과율, 형식논리, 선형수학에 터한 분열·불연속 문명 이후 인간 지혜는 여기서 가뭇없이 멀어졌다. 인과 상품 유통에 환원되어 사는 인간에게 사이비과학, 기껏해야 우연으로나 읽히지만 본디 동시성은 세계 운동 기축이다. 이 기축 운동이 잠정적·부가적 구조 실재를 창조해 비대칭대칭세계가 이뤄진다.

 

우리는 과학적 몰상식으로, 독립존재가 있어 그들이 관계를 맺고, 신체가 있어 정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관계가 독립존재를 구성해 기대고, 정신이 신체를 창조해 의지한다. 구태여 따지자면 독립존재·신체가 잠정적·부가적이지만 비인과 상호의존은 불가결하고 불가피하다. 이 비대칭대칭을 해소하는 대극합일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따라 각자 삶이 지닌 맥락이 드러난다. 빅터 맨스필드가 놓친 진실이다.

 

맨스필드는 융이 오만해 지반 묵타jivan mukta, 그러니까 살아서 해탈한 사람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해탈, 그러니까 대극합일을 추구해 나아가는 길에서 더 높은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도불교를 말하지만, 그에게는 명상 또는 참선으로 도달한 아라한이 사실상 이상적 경지인 듯하다. 아라한 대극합일은 뇌 현상이다. 뇌 현상인 한, 고도한 극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이 사실을 알까. 모르면, 중도가 아니다.

 

중도는 정도다. 정도는 대극 분열을 합일하는 길이 아니다. 합일은 해체다. 해체는 또 다른 일극이다. 일극과 대극의 극단을 버린 중도는 합일과 분열 사이를 요동한다. 요동에서 고요를 감각, 감응, 감수, 감동, 감화, 감정, 감행, 감사한다. 감사를 형해로 만드는 해탈은 융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융은 치유자다. 치유 목적이 해탈이라면 구태여 융일 이유가 뭐겠는가. 명상과 참선으로 해탈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융을 찾아오겠는가.

 

융이 제시한 동시성은 평범한 사람을 위한 복음이다. 평범한 사람, 그러니까 우리 거의 모두는 수련을 통한 대극합일 경지에 언감생심 가 닿지 못한다. “생활체험과 사회경험, 그러니까 현장속에서 인간이 지닌 어리석음을 숙지할 정도면 감지덕지다. 현장에서 숙지되는 모순이나 하자논리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사회이론으로 없애면 삶이 평화로워지는가? 그런 평화는 폭력이 가져온 적료다. 적료는 생명 풍경이 아니다.

 

생명 풍경에서는 비대칭대칭 운동이 옹글고 탱탱한 요동고요를 창발한다. 요동고요는 대극을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절묘중도에 놓아둔다. 절묘중도를 감각하기 위해 낭·풀에서 으뜸바리(바이러스)까지 공부하는 일은 맨스필드에게 필수다. 세계 존재가 사는 동안 세계 이전으로 돌아가는 일이 필요하다면 찰나에 국한한다. 이를 경지라 하고 상시 유지하는 짓은 권력놀음이다. 뜨르르한 생불, 구루들이 여태껏 저지른 협잡질이었다.

 

저 협잡질이 오랫동안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타락한 인간이 지닌 높이와 깊이에 대한 갈애 때문이다. 고매함과 심오함으로 인간이 지닌 어리석음을 치유하지 못한다. 길은 동시성이 열어주는 넓은 네트워킹이다. 네트워킹만이 현장 모순과 하자를 보듬고 어루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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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와 라캉은 시간 조작 능력을 인간 요건으로 본 듯합니다. 위기에 직면했을 때, 과거 통증이나 고통에 그 위기를 끼워 맞춰 잘 알고 있는 아픔이니까 괜찮아하는 식으로 속이는 짓은 동물이 쓰는 방식입니다. 무생물처럼 되어 위기를 회피하는 일은 말하자면 죽임을 당하기 전에 죽은 척하는일입니다.......‘이미 죽었으니 두 번 죽는 일은 없지하는 식으로 위기관리를 하는 트라우마 기제입니다. 놀라면 가사상태로 되는 너구리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직 인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무생물인 듯 죽은 척하는 대신 미래를 향해 비상합니다. 과거로 회귀하지 않고 미래로 몸을 던집니다. 프로이트와 라캉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듯합니다.(166)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자크 라캉도 우치다 타츠루도 인과적 선형 시간관에 갇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인간 요건으로 시간 조작능력을 거론하나. 조작은 인과 없이 성립할 수 없다. 과거로 회귀하든 미래로 비상하든 인과적 선형 아니면 등장할 수 없는 개념이다. 이는 그들 자존심을 훼손하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과거를 어둠으로, 미래를 빛으로 보는 기독교적 구원사관 변종이다; 창조론과 진화론이 야합해서 빚어 놓은 인간중심주의다.

 

너구리가 죽음 직전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사상태로 적응할 때 죽은 척하는” “속이는 짓이라고 표현하는 일은 갈데없는 인간중심주의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와 같은 상황에서 그런 적응행위를 되풀이하는 너구리에게 트라우마 기제를 뒤집어씌울 수 없다는 데 있다. 너구리는 정신장애에 빠져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인간만 그런다. 그런데 이를 동물이 쓰는 방식이라 호도하고, 심지어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직 인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데까지 간다. 온전하지 않은, 그러니까 병에 걸린, 또는 성장불균형상태인 인간은 맞지만 왜 이를 동물 상태라고 말하는가.

 

그렇다 치자. 마침내 자가당착에 직면한다. 동물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이 무슨 자각 능력이 있어 스스로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겠나. 여기서 불가피하게 이 이야기가 나온다.


프로이트 치료는 무예에서 말하는 선 잡기와 근본에서 같습니다. 미래에 있는 인간과 과거에 있는 인간이 마주치면 미래에 있는 인간이 반드시 선을 잡기 마련입니다........

  분석가는 미래에 있는 사람이고 트라우마에 고착돼 있는 사람은 과거에 있는 사람이어서 양자가 만나면 당연히 분석가가 선입니다. 선을 잡은 분석가는 환자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전능성을 분석가에게 부여해 환자 시간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166~167)

 

전능성을 지닌 분석가, 그러니까 고수가 선을 잡아야 한다. 정신장애 치료와 무예 대결이 같은 본성을 지닌다고 말하고 있다. 절대적 차이로 구조적 승리를 지향하는 무예 본성으로 정신장애를 치료할 때, 과연 과거에 사로잡힌 동물 자아를 일방적으로 살육하고 미래를 향해 비상하는 참 인간을 일방적으로 살려낼 수 있을까. 여기서 나는 우치다 타츠루가 한 이 말을 소환한다.

 

우리는 어떤 말을 할 때, 그 말이 지닌 효력이 어떤 특정 조건에 국한되지는 않을까 하고 자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나요?”라는 물음은 비윤리적인 물음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 자체가 비윤리적임을 논하기에 앞서, 자기가 죽이는 쪽에 있는 국면만을 상상하면서, 죽임을 당하는 쪽이 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상상하지 않고 않다는 점 때문에 비윤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84~185)

 

무예를 말할 때 죽이는 고수 쪽에서만 말한 연장선상에서 우치다 타츠루는 정신치료에서도 치료하는 분석가 쪽에서만 말한다. 윤리성 여부보다 먼저 무예와 정신치료가 지니는 진실을 온전하게 말했느냐를 따져야 한다. 고수 칼 아래 목을 들이미는 하수는 과연 무엇인가. 그는 다만 살육 대상일 뿐인가. 그가 지닌 내면 진실은 무의미한가. 분석가 앞에서 자기 시간을 조작당해야 하는 환자는 과연 무엇인가. 그는 다만 조작 대상일 뿐인가. 그가 지닌 내면 진실은 무의미한가.

 

나는 무예를 모르므로 사람을 살육할 때 신체 감각도 당연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본성상 살육에서 일치하는 먹는 행위로 핍진한 접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먹는 행위는 살아 있는 생명을 살육하는 행위다. 동물과 식물이 근본적으로 다른 생명본성을 지니므로 구체적인 데서는 차이가 있지만 설혹 살아 있는 채로 먹는다 하더라도 궁극 살육은 불가피하다. 이때 살육하는 인간이 살육당하는 생명에 대해 지녀야 할 마음가짐을 곡진하게 대면해야만 한다. 특히 나처럼 인간중심주의에 날 세워 반대하는 사람에게 먹는 행위는 제의에 해당한다. 일방적으로 살육한다고 하지만 살육당하는 생명에게 표해마지 않는 외경과 감사는 도구적 차원을 썩 넘어선다. 말하자면 살육당하는 그 생명이 거룩하고 흔쾌한 마음으로 목, 아니 몸 전체를 들이밀고 있다면 먹는 순간 인간은 신성함에 깃들어 있어야 한다. 살육당하는 존재 없는 살육자란 있을 수 없다. 진정한 고수가 살육한다면 살육당하는 존재도 진정한 고수여야 한다. 진정한 고수는 진정한 고수를 창조하는 자다. 그 창조는 공동행위다. 공동행위로서 살육사건은 동시에 공생사건이다. 공생사건이라면 당연히 더불어 사는 생명 쪽 관지를 묻고 상상하고 껴안지 않을 수 없다. 무예라고 해서 왜 이 이치가 통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정신치료임에랴.

 

우치다 타츠루는 살육하는 고수 관지에서만 생각한다. 그가 그렇게 생각해서 프로이트와 라캉을 그리 이해했을까? 아니다. 프로이트도 라캉도 근본적으로 남성가부장적 일극집중구조에 사로잡혀 있다. 내 책 안녕, 우울증에 대한 주해리뷰59 <모국어 치유(3)-허사적으로 치유한다>(2016. 4. 21.)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현대 프랑스적 사유의 대표 가운데 하나인 자크 라캉과 그 추종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심각하게 맞닥뜨린 것은 그 집요한 천착穿鑿, 천착주의라고 할만한, 아니 천착증이라 해야 할 지나친 후벼 파기와 뒤집기였습니다. 도저함 너머 철저함, 철저함 너머 허망함으로까지 질주하는 근성과 투지가 저 같은 범박한 독자에게는 휴먼스케일human scale을 가뭇없이 벗어난 것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휴먼스케일을 벗어난 사유는 휴먼스킬human skill로 구체화될 수 없습니다. 정말 그랬는가 알지 못하지만 이런 정도라면 자크 라캉은 자신의 사유로써 정신장애 환자를 실제로 치료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 근성과 투지는 임상적 관심을 사소한 것쯤으로 여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디디에 앙지외 이야기를 해보면 이 추정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디디에 앙지외의 피부자아를 번역한 사람이 권두에 쓴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 후 유명한 프랑스 여배우인 위게트 뒤플로가 자신을 박해한다는 망상에 시달린 끝에 그녀를 살해하려다 실패하고,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피해망상증 진단을 받고는 파리 생트-안느(Saint-Anne) 대학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여기서 그녀는 그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을 만난다. 자크 라캉과 디디에 앙지외, 정신분석학의 두 거목 사이의 기묘한 인연이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라캉은 그녀를 치료하기보다 그녀의 사례를 자기 논문에 이용하기 위해서 그녀로부터 정보를 수집하는 데 골몰했고, 그 결과 앙지외의 어머니에게 갈등과 적대감만을 남긴 채 1년간의 치료를 마치게 된다. 라캉이 에메(Aimée)사례로 이름붙인 이 사례는 그의 유명한 박사학위 논문인 인격과의 관계 속에서 편집증적 정신증에 관하여(1932)의 기초가 된다.

 

·······앙지외는, 1949년에 정신분석가가 되기 위해 파리정신분석협회에 소속되어 라캉의 분석 수련생이 된다. 라캉과 자신의 어머니와의 관계는 전혀 모른 채 말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게 되기 전부터 앙지외는 라캉과의 분석에 깊은 불만을 품었고, 라캉은 앙지외에게 자기와의 분석에서 일어난 일들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며, 불편했던 4년간의 분석을 마치게 된다. 앙지외는 라캉과의 분석이 끝나고 나서야 자기 어머니가 라캉의 환자였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 그리고·······반 라캉 운동에 몸담게 된다. 비록 앙지외의 반 라캉 운동은 정신분석에 대한 이론적, 임상적 견해의 차이로 비롯된 것이지만 둘 사이의 이런 악연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지 않았겠느냐는·······말들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어쨌든 앙지외는 구조주의, 언어학, 철학 등의 영역을 정신분석에 도입한 라캉주의 흐름과는 달리, 분석 받는 사람들 각각의 독특한 필요에 따라 해석의 기법과 분석 기법들을 변형하는, 실용적인 영미권의 정신분석이론들을 프랑스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앙지외는 심각한 내적 상처들로 고통 받는 그의 내담자들을 감싸주고, 공감하고,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탁월한 정신분석가였고, 임상심리학과 정신분석학에서 중대한 이론적 공헌을 남긴 사상가였다.·······그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훌륭하게 대신한 아버지와의 친밀하고도 따뜻한 관계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그의 개인적인 아픔을 승화시켜, 보다 환자의 입장에서 치료하는 적극적인 정신 분석가가 될 수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은 앙지외가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어린 시절의 피부자아 형성의 중요성을 본인 스스로 실증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11-13)

 

삶의 단순한 삽화가 아닌 중대한 서사로 얽혀들어 있는 자크 라캉의 핵심적 면모와 대비되면서 디디에 앙지외의 삶의 맥락이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 글입니다. 디디에 앙지외의 삶의 맥락은 실용의 흐름 안에 있습니다. 그 실용의 흐름은 구조주의, 언어학, 철학 등의 영역을 정신분석에 도입한 라캉주의 흐름을 반대한 것입니다. 라캉주의 흐름을 반대한 이유는 실용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용적이지 않다는 것은 휴먼스케일을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휴먼스케일을 벗어난 까닭이 바로 자크 라캉의 천착증에 있습니다. 천착증은 프랑스 사유의 중심의식이 빚어낸 집착이며 강박입니다. 이 집착과 강박은 타인을 향한 공격과 지배로 번져갑니다. 자크 라캉이 디디에 앙지외와 그 어머니에게 그랬듯.

 

휴먼스케일을 벗어난 사유, 천착증을 불교적으로 번역하면 아라한입니다. 아라한은 소승적 깨달음의 극단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 깨달음의 극단이 주는 쾌락에 늘 머물러 있는 것을 지복으로 삼습니다. 그들은 중생의 고통에 관심이 없습니다. 있다 해도 구제의 실천을 하지 못합니다. 휴먼스킬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크 라캉이 그랬듯. 소승적 깨달음의 극단을 내려놓고 회향을 단행, 그러니까 휴먼스케일로 복귀하는 것이 보살입니다. 보살의 길은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한 대승적 되 깨달음의 길입니다. 대승적 되 깨달음이 바로 붓다입니다. 붓다는 휴먼스킬을 지니고 있습니다. 디디에 앙지외가 그랬듯.

 

여기서 내가 말한 천착증에 빠진 아라한이 바로 살육자 관점에서만 세상을 보는 고수다. 고수는 세상을 구원하지 못한다. 디디에 앙지외와 그 어머니에게 한 짓을 보면 자크 라캉은 결코 붓다 지향 임상의가 아니다; 이론 고수가 되기 위해 그들을 이용한 아라한이다. 이 똑똑한 고수가 수많은 똑똑한 지식인을 호도하고 있는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 주위에도 라캉 팔고 다니는 지식장사꾼 한둘이 아니다. 그 장사꾼들을 채찍으로 때려 거룩한 성전에서 내쫓을 예수, 기다릴 틈이 없다. 그 예수는 바로 너, 그리고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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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둘러싼 야쿠자들을 차례로 베고 나서 자토이치가 칼을 거둬들이는 바로 그때 지잉하는 소리가 나면서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야쿠자들이 두두둑 쓰러집니다.......야쿠자들과는 다른 시간 속을 움직이며 모두를 베어버린 뒤에 지잉하는 소리와 함께 비로소 자토이치가 시간적으로 선행하고 있었던 부분, 다시 말해 모두가 절대적으로 지체되고 있던 만큼 시간이 다시 원래 시간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때 소거되었던 현실음이 돌아와 다시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그 무음과 지잉하는 소리는 휘어진 시간 보정을 의미하지 않나 생각합니다.(157~158)

 

<자토이치座頭市>는 전설적 검객 안마사(座頭) 이치()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로서 1962년 이후 시리즈 26편이 제작되었다. 나도 그 중, 아마도 가장 유명한 한 편을 보았다. 화제 장면은 우치다 타츠루가 말한 그대로다. 나는 이 문제에서도 우치다 타츠루와 생각이 다르다.

 

우치다 타츠루가 계속 문제 삼는 시간적 선후는 자토이치와 야쿠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자토이치 동작과 소리 사이 시간 선후와는 무관한 일이다. 이를테면 범주오류다. 무예에서 이른바 잔심殘心을 거론하는 일 또한 본인 감각 문제다. 이치는 의외로 단순하다. “신체가 뇌보다 이르게 움직이고 먼저 감각한다.” 이는 시간적 문제만이 아니다. 칼을 직접 쥐고 있는 주체는 신체지 뇌가 아니다. 뇌가 감각하는 경계보다 더 넓은, 그러니까 전체인 경계를 신체가 지니고 있으므로 둘 사이 격차는 절대적이며 당연하다. 구태여 시간을 가지고 복잡하게 설명할 이유가 없다.

 

참된 지성이 지닌 복잡함, 그러니까 모호함을 견디는 능력은 단순함도 복잡하게 이해하는 능력과 다르다. 무예인으로 오랜 삶을 사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그 눈으로 모든 현상을 해석하는 관성이 그에게 생긴 듯하다. 이 문제는 내게도 마찬가지다. 의자 또는 치유인 눈으로 세상을 읽으면 죄다 아파 보인다. 보통사람이 보지 못하는 소미한 데까지 본다는 자긍심이 한 순간에 환원주의 함정으로 변해버린다. 범죄자 만드는 일만 하던 검사가 하루아침에 대통령이 된 나라 걱정보다 내 앞가림부터 해야 소시민 도리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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