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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평점 :
프로이트와 라캉은 시간 조작 능력을 인간 요건으로 본 듯합니다. 위기에 직면했을 때, 과거 통증이나 고통에 그 위기를 끼워 맞춰 ‘잘 알고 있는 아픔이니까 괜찮아’ 하는 식으로 속이는 짓은 동물이 쓰는 방식입니다. 무생물처럼 되어 위기를 회피하는 일은 말하자면 ‘죽임을 당하기 전에 죽은 척하는’ 일입니다.......‘이미 죽었으니 두 번 죽는 일은 없지’ 하는 식으로 위기관리를 하는 트라우마 기제입니다. 놀라면 가사상태로 되는 너구리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직 ‘인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무생물인 듯 죽은 척하는 대신 미래를 향해 비상합니다. 과거로 회귀하지 않고 미래로 몸을 던집니다. 프로이트와 라캉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듯합니다.(166쪽)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자크 라캉도 우치다 타츠루도 인과적 선형 시간관에 갇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인간 요건으로 시간 “조작” 능력을 거론하나. 조작은 인과 없이 성립할 수 없다. 과거로 “회귀”하든 미래로 “비상”하든 인과적 선형 아니면 등장할 수 없는 개념이다. 이는 그들 자존심을 훼손하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과거를 어둠으로, 미래를 빛으로 보는 기독교적 구원사관 변종이다; 창조론과 진화론이 야합해서 빚어 놓은 인간중심주의다.
너구리가 죽음 직전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사상태로 적응할 때 “죽은 척하는” “속이는 짓”이라고 표현하는 일은 갈데없는 인간중심주의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와 같은 상황에서 그런 적응행위를 되풀이하는 너구리에게 “트라우마 기제”를 뒤집어씌울 수 없다는 데 있다. 너구리는 정신장애에 빠져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인간만 그런다. 그런데 이를 “동물이 쓰는 방식”이라 호도하고, 심지어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직 ‘인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데까지 간다. 온전하지 않은, 그러니까 병에 걸린, 또는 성장불균형상태인 인간은 맞지만 왜 이를 동물 상태라고 말하는가.
그렇다 치자. 마침내 자가당착에 직면한다. 동물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이 무슨 자각 능력이 있어 스스로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겠나. 여기서 불가피하게 이 이야기가 나온다.
프로이트 치료는 무예에서 말하는 선 잡기와 근본에서 같습니다. 미래에 있는 인간과 과거에 있는 인간이 마주치면 미래에 있는 인간이 반드시 선을 잡기 마련입니다........
분석가는 미래에 있는 사람이고 트라우마에 고착돼 있는 사람은 과거에 있는 사람이어서 양자가 만나면 당연히 분석가가 선입니다. 선을 잡은 분석가는 환자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전능성을 분석가에게 부여해 환자 시간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166~167쪽)
“전능성”을 지닌 분석가, 그러니까 고수가 선을 잡아야 한다. 정신장애 치료와 무예 대결이 같은 본성을 지닌다고 말하고 있다. 절대적 차이로 구조적 승리를 지향하는 무예 본성으로 정신장애를 치료할 때, 과연 과거에 사로잡힌 동물 자아를 일방적으로 살육하고 미래를 향해 비상하는 참 인간을 일방적으로 살려낼 수 있을까. 여기서 나는 우치다 타츠루가 한 이 말을 소환한다.
우리는 어떤 말을 할 때, 그 말이 지닌 효력이 어떤 특정 조건에 국한되지는 않을까 하고 자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나요?”라는 물음은 비윤리적인 물음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 자체가 비윤리적임을 논하기에 앞서, 자기가 죽이는 쪽에 있는 국면만을 상상하면서, 죽임을 당하는 쪽이 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상상하지 않고 않다는 점 때문에 비윤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84~185쪽)
무예를 말할 때 죽이는 고수 쪽에서만 말한 연장선상에서 우치다 타츠루는 정신치료에서도 치료하는 분석가 쪽에서만 말한다. 윤리성 여부보다 먼저 무예와 정신치료가 지니는 진실을 온전하게 말했느냐를 따져야 한다. 고수 칼 아래 목을 들이미는 하수는 과연 무엇인가. 그는 다만 살육 대상일 뿐인가. 그가 지닌 내면 진실은 무의미한가. 분석가 앞에서 자기 시간을 조작당해야 하는 환자는 과연 무엇인가. 그는 다만 조작 대상일 뿐인가. 그가 지닌 내면 진실은 무의미한가.
나는 무예를 모르므로 사람을 살육할 때 신체 감각도 당연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본성상 살육에서 일치하는 먹는 행위로 핍진한 접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먹는 행위는 살아 있는 생명을 살육하는 행위다. 동물과 식물이 근본적으로 다른 생명본성을 지니므로 구체적인 데서는 차이가 있지만 설혹 살아 있는 채로 먹는다 하더라도 궁극 살육은 불가피하다. 이때 살육하는 인간이 살육당하는 생명에 대해 지녀야 할 마음가짐을 곡진하게 대면해야만 한다. 특히 나처럼 인간중심주의에 날 세워 반대하는 사람에게 먹는 행위는 제의에 해당한다. 일방적으로 살육한다고 하지만 살육당하는 생명에게 표해마지 않는 외경과 감사는 도구적 차원을 썩 넘어선다. 말하자면 살육당하는 그 생명이 거룩하고 흔쾌한 마음으로 목, 아니 몸 전체를 “들이밀고 있다”면 먹는 순간 인간은 신성함에 깃들어 있어야 한다. 살육당하는 존재 없는 살육자란 있을 수 없다. 진정한 고수가 살육한다면 살육당하는 존재도 진정한 고수여야 한다. 진정한 고수는 진정한 고수를 창조하는 자다. 그 창조는 공동행위다. 공동행위로서 살육사건은 동시에 공생사건이다. 공생사건이라면 당연히 더불어 사는 생명 쪽 관지를 묻고 상상하고 껴안지 않을 수 없다. 무예라고 해서 왜 이 이치가 통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정신치료임에랴.
우치다 타츠루는 살육하는 고수 관지에서만 생각한다. 그가 그렇게 생각해서 프로이트와 라캉을 그리 이해했을까? 아니다. 프로이트도 라캉도 근본적으로 남성가부장적 일극집중구조에 사로잡혀 있다. 내 책 『안녕, 우울증』에 대한 주해리뷰59 <모국어 치유(3)-허사적으로 치유한다>(2016. 4. 21.)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현대 프랑스적 사유의 대표 가운데 하나인 자크 라캉과 그 추종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심각하게 맞닥뜨린 것은 그 집요한 천착穿鑿, 천착주의라고 할만한, 아니 천착증이라 해야 할 지나친 후벼 파기와 뒤집기였습니다. 도저함 너머 철저함, 철저함 너머 허망함으로까지 질주하는 ‘근성과 투지’가 저 같은 범박한 독자에게는 휴먼스케일human scale을 가뭇없이 벗어난 것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휴먼스케일을 벗어난 사유는 휴먼스킬human skill로 구체화될 수 없습니다. 정말 그랬는가 알지 못하지만 이런 정도라면 자크 라캉은 자신의 사유로써 정신장애 환자를 실제로 치료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 ‘근성과 투지’는 임상적 관심을 사소한 것쯤으로 여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디디에 앙지외 이야기를 해보면 이 추정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디디에 앙지외의 『피부자아』를 번역한 사람이 권두에 쓴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 후 유명한 프랑스 여배우인 위게트 뒤플로가 자신을 박해한다는 망상에 시달린 끝에 그녀를 살해하려다 실패하고,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피해망상증 진단을 받고는 파리 생트-안느(Saint-Anne) 대학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여기서 그녀는 그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을 만난다. 자크 라캉과 디디에 앙지외, 정신분석학의 두 거목 사이의 기묘한 인연이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라캉은 그녀를 치료하기보다 그녀의 사례를 자기 논문에 이용하기 위해서 그녀로부터 정보를 수집하는 데 골몰했고, 그 결과 앙지외의 어머니에게 갈등과 적대감만을 남긴 채 1년간의 치료를 마치게 된다. 라캉이 ‘에메(Aimée)사례’로 이름붙인 이 사례는 그의 유명한 박사학위 논문인 「인격과의 관계 속에서 편집증적 정신증에 관하여」(1932)의 기초가 된다.
·······앙지외는, 1949년에 정신분석가가 되기 위해 파리정신분석협회에 소속되어 라캉의 분석 수련생이 된다. 라캉과 자신의 어머니와의 관계는 전혀 모른 채 말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게 되기 전부터 앙지외는 라캉과의 분석에 깊은 불만을 품었고, 라캉은 앙지외에게 자기와의 분석에서 일어난 일들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며, 불편했던 4년간의 분석을 마치게 된다. 앙지외는 라캉과의 분석이 끝나고 나서야 자기 어머니가 라캉의 환자였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 그리고·······반 라캉 운동에 몸담게 된다. 비록 앙지외의 반 라캉 운동은 정신분석에 대한 이론적, 임상적 견해의 차이로 비롯된 것이지만 둘 사이의 이런 악연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지 않았겠느냐는·······말들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어쨌든 앙지외는 구조주의, 언어학, 철학 등의 영역을 정신분석에 도입한 라캉주의 흐름과는 달리, 분석 받는 사람들 각각의 독특한 필요에 따라 해석의 기법과 분석 기법들을 변형하는, 실용적인 영미권의 정신분석이론들을 프랑스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앙지외는 심각한 내적 상처들로 고통 받는 그의 내담자들을 감싸주고, 공감하고,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탁월한 정신분석가였고, 임상심리학과 정신분석학에서 중대한 이론적 공헌을 남긴 사상가였다.·······그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훌륭하게 대신한 아버지와의 친밀하고도 따뜻한 관계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그의 개인적인 아픔을 승화시켜, 보다 환자의 입장에서 치료하는 적극적인 정신 분석가가 될 수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은 앙지외가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어린 시절의 피부자아 형성의 중요성을 본인 스스로 실증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11-13쪽)
삶의 단순한 삽화가 아닌 중대한 서사로 얽혀들어 있는 자크 라캉의 핵심적 면모와 대비되면서 디디에 앙지외의 삶의 맥락이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 글입니다. 디디에 앙지외의 삶의 맥락은 ‘실용’의 흐름 안에 있습니다. 그 실용의 흐름은 ‘구조주의, 언어학, 철학 등의 영역을 정신분석에 도입한 라캉주의 흐름’을 반대한 것입니다. 라캉주의 흐름을 반대한 이유는 실용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용적이지 않다는 것은 휴먼스케일을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휴먼스케일을 벗어난 까닭이 바로 자크 라캉의 천착증에 있습니다. 천착증은 프랑스 사유의 ‘중심의식’이 빚어낸 집착이며 강박입니다. 이 집착과 강박은 타인을 향한 공격과 지배로 번져갑니다. 자크 라캉이 디디에 앙지외와 그 어머니에게 그랬듯.
휴먼스케일을 벗어난 사유, 천착증을 불교적으로 번역하면 아라한입니다. 아라한은 소승적 깨달음의 극단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 깨달음의 극단이 주는 쾌락에 늘 머물러 있는 것을 지복으로 삼습니다. 그들은 중생의 고통에 관심이 없습니다. 있다 해도 구제의 실천을 하지 못합니다. 휴먼스킬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크 라캉이 그랬듯. 소승적 깨달음의 극단을 내려놓고 회향을 단행, 그러니까 휴먼스케일로 복귀하는 것이 보살입니다. 보살의 길은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한 대승적 되 깨달음의 길입니다. 대승적 되 깨달음이 바로 붓다입니다. 붓다는 휴먼스킬을 지니고 있습니다. 디디에 앙지외가 그랬듯.
여기서 내가 말한 천착증에 빠진 아라한이 바로 살육자 관점에서만 세상을 보는 고수다. 고수는 세상을 구원하지 못한다. 디디에 앙지외와 그 어머니에게 한 짓을 보면 자크 라캉은 결코 붓다 지향 임상의가 아니다; 이론 고수가 되기 위해 그들을 이용한 아라한이다. 이 똑똑한 고수가 수많은 똑똑한 지식인을 호도하고 있는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 주위에도 라캉 팔고 다니는 지식장사꾼 한둘이 아니다. 그 장사꾼들을 채찍으로 때려 거룩한 성전에서 내쫓을 예수, 기다릴 틈이 없다. 그 예수는 바로 너, 그리고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