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꿈을 꾸었다. 뿌리 하나에 낭·풀 여러 종이 자라는 놀라운 생명체가 내 손에 들려 있다. 나는 하나아, 두울, 세엣.......꼽아 나아갔다. 다섯 했는데 바로 그 찰나 여섯이 되고, 일곱이 되나 찾는데 확인되지 않는 찰나 꿈에서 깼다. 화들짝 일어나 보니 558분이다.

 

한 해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늦잠이다. 더 지체하면 출근에 차질이 생긴다는 사실을 잠에 빠진 나 말고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깸 세계 불연속성을 뚫고 잠 세계 연속성을 통해 누군가 내 잠을 깨웠다. 그 누구는 과연, 대체, 누군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일과 지난 3년 동안 소통하는 신체를 거듭해서 되작인 일은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비인과 인연 속에서 나는 유한계급 명상과 신비주의 약물 모두를 물리치고 평범한 사람이 비대칭대칭 세계 진실에 가 닿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 뜻에서 이 책은 참 소중한 선물이다. 만남 자체도 뜻밖이고 너머 세계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노릇도 뜻밖이다. 저자가 지닌 통찰이 고맙지 않아서가 아니라, 저자도 나도 의도하지 않았는데 반야 장으로 쓱 들어서게 됐으니 놀라서다.

 

이 책을 허다히 되작이며 일으켰던 문제의식은 원만히 해소되었다. 다만, 죽은 자와 소통하는 문제는 여전히 육중하게 내 앞에 있다. 산 자 영혼을 치유하는 일과 비대칭대칭을 이루며 내 천명이 구동하는 기축인데 아직 옹근 기별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남은 날이 그다지 많지 않다. 생애 마지막 공부라며 심혈 기울인 낭·풀 공부가 이끌어온 변화를 톺아보면 내 천명 안에서 끌 수레 하나 살며시 벼락같이 만날 듯도 하다. 예감도 기대도 내려놓고 아이처럼 설렘만 한가득 품어보기로 한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게는 죽은 자 목소리가 들린다.”는 사람과 들리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다면 들린다고 주장하는 쪽이 정치적으로 강한 힘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유언집행인이나 증인을 자처하는 사람은 영령들 한을 풀어주자.” 하면서 여하튼 구체적 정책 제언으로 의미 축소에 골몰합니다. 이렇게 죽은 자 목소리 통역하는 사람을 믿지 못하게 하려면 죽는 자 목소리 따위는 내게 들리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죽은 자 목소리는 내게도 들리지만 뭘 말하는지 알 수 없으므로 통역해서는 안 된다. 죽은 자는 영령들 한을 풀어 달라.’ 따위처럼 뻔해서 무의미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말은, 자처한 유언집행인이 스스로 듣고 싶어서 스스로에게 보내는 메시지일 따름이다.”라고 말하는 일이 아마도 유일하게 유효한 영적반격 아닐까 싶습니다.(262~263: 인용자가 문맥을 고려해 의미 왜곡 없이 압축함.)

 

이 글 앞에서 4·16을 떠올리지 못한다면 오늘 눈 뜨고 사는 한국인이 아니다. 나는 이 책을 여러 번 읽었는데 내내 4·16과 낭·풀 공부에 잇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 책은 죽은 자와 소통이 어떠한 무엇인지 숙고하게 만들면서 끝난다.


치밀하게 의도했는가와 무관하게 우치다 타츠루는 레비나스나 라캉을 깊이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이런 결말에 분명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리라 짐작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양차대전을 겪으면서 서구 철학이 죽은 자가 지니는 본원적타자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부분에 그가 여러 번 강조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우치다 타츠루가 견지하는 복잡한 상태, 그러니까 모호함을 견디는 지성이 죽은 자가 지니는 복잡한 정체성, 그러니까 모호함을 웅숭깊게 포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산 자와 사물 사이에서 죽은 자 목소리가 영원한 시간을 뚫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 채 울려 퍼지는”(레비나스) 모호한 풍경은 우치다 타츠루 지성을 깨웠다. 그 덕에 통역하는 정치권력을 투사병리로 진단할 수 있었다.

 

권력이 자행하는 투사를 막아내려 들리지만 알 수 없다.’고 한 말은 실제로 알 수 없어서라기보다 아는 내용을 말하면 똑같이 죽임당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를 막기 위해 불가결하게 선택하는 능동 함구. 함구로 함성이 빅뱅. 함성은 죽은 자를 삶 한가운데 불멸로 세운다. 거기서 공생윤리학이 찰나마다 산 자를 새로이 생성한다.

 

찰나마다 새로이 생성되는 산 자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과 알아차림, 그리고 받아들임은 언어적이든 비언어적이든 죽은 자가 영으로 깃들인 목소리를 포함한다. 동시성이나 상응을 통해 산 자가 각성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다.

 

대통령 당선자와 국무총리 내정자가 영매에게 공공연히 의존한다는 뉴스를 듣는다. 저들이 사적 욕망을 채우는데 동원되는 영매는 모시는 신이 정말 있다면 신벌을 받아 마땅하다. 신벌을 내리지 않는 신이라면 잡신이 틀림없다. 잡신들은 준동하는데 어찌해 성신은 꼼짝하지 않는지 참으로 귀신 곡할 노릇이다. 이렇게 질문해보면 답이 나온다. 성신을 모신 참 영매가 있어서 4·16 ‘목소리를 전해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영매가 하는 말을 사람들이 신뢰할까? 그 계시를 내린 신을 성신이라 인정할까? 그럴 리 없다. 누구보다 먼저 성신 신앙 지닌 기독교도가 난리 떨며 이단으로 몰 터. 이 이치를 알아야 성신인데 그 성신이 목소리를 전해줄 리 또한 없다. 당최 길이 아니다. 죽은 자와 소통하는 길을 이런 차원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생명네트워킹 반야 장을 여는 참 과학에 참여해야 한다. 진짜 영적인 영적반격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은 교환하는 존재’.......가장 오래된 교환행위 형식으로 침묵교환이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는 곳에 어떤 부족 사람이 뭔가를 가지고 가서 놓아두고 달아납니다. 그러면 다른 부족 사람이 와서는 상대가 사라진 사실을 확인한 뒤 그 물건을 가져가면서 대신 다른 뭔가를 놓아두고 또 달아납니다.......침묵교역이야말로 교환이 지닌 순수 본질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248~249)

 

교환은 이 책이 줄곧 견지하는 주제 소통을 달리 부른 이름이다. 그 소통이 지닌 순수 본질을 보여주는 침묵교역이야말로 우리를 근원지점으로 불러들인다. 그런데 침묵이라니.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가장 오래된 교환인데 무슨 규범이. 말이 필요 없는가? 그 정도라면 달아날 리가. 단서는 둘이다: 서로 다른 부족 사람. 비대면.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 각자 필요를 모르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마주치지 않고 무조건 교환한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다른 사람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면 이종생명체가 된다. 각자 필요를 모르는 상태에서 주고받는 무언가를 극한으로 밀어붙이면 목숨이 된다. 마주치지 않은 무조건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면 절대수용이 된다.

 

교환이 지닌 순수 본질은 서로 살해할 기회를 제거한 전쟁이라는 역설 자체다. 이 역설을 인간이 창조함으로써 위대한 존재가 되었는가? 무슨 되도 않는. 거꾸로 이 역설이 인간을 거룩한 생명공동체 일원에 참여해 번영하도록 기회를 주었다. 그러므로 이 역설을 본질로 지니지 않는 한,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이 역설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

 

태초에 단세포생명체, 그러니까 박테리아 둘이 생사를 걸고 더불어 살게 될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을 공생이라 이름 한 쾌거는 20세기 린 마굴리스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박테리아 공생에서 시작해 곰팡이는 네트워킹을 창조했다. 네트워킹은 모든 생명체 존재 기축이 되었다. 이 네트워킹 역사에서 인간 버전 침묵교역은 아주 최근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네트워킹 큰 틀에 풀어놓으면 침묵교역은 아연 그 긴장감을 잃고 말지만, 오늘날 인류 상황에서 긴절하게 다시 소환할 필요가 있다. 코로나 사태를 지구 전체적으로 겪으면서 우리가 목도했듯 서로 살해할 기회를 제거하는지구적 합의가 도출되어야 할 때다. 지구적 합의에는 의당 동물, 식물, 지의류, 균류, 조류, 박테리아, 바이러스도 당사자로 참여해서 교환이 지닌 순수 본질을 복원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이 살아 있는 세계와 절대 다가가거나 만질 수 없는 세계 사이, 인간세계에 속하지 않지만 인간세계에 가까운, ‘인간이 다가갈 수 있을 듯도 하고 없을 듯도 한 모호한 영역에 죽은 자가 있습니다. 그런 중간상태 그 자체를 주제로 삼아 의식화하기 위한 장치로서 장례가 존재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장례는 미디엄medium’, 중간’, ‘매개’, ‘미디어가 아닐까요? 무엇과 무엇에 중간이 있어 그 둘을 매개하는 일이 장례가 지닌 인류학적 기능 아닐까요? 매개가 없으면 커뮤니케이션은 성립할 수 없으니까요.


  ‘배제하다라는 말을 우리가 쉽게 쓰지만 잘 음미해보면 상당히 난해한 말입니다. 배제할 때 사실상 배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뭔가를 배제하는 일은 배제함으로써 도리어 거기에 있도록 한다는 이중 조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배제하는 무엇은 실은 있기를 바라는 무엇입니다. 밖으로 쫓겨났다는 자격으로 거기 있는 무엇이 필요합니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형식으로 존재합니다. 부정당하는 형식으로 거기 머무릅니다.(235~236)

 

1928년 폴 디랙은 반물질이 존재하는 세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얼마 뒤 양전자 존재가 증명되었다. 반물질은 물질세계에 존재하는 우리로서는 볼 수 없다. 볼 수 있다 해도 물질과 만나는 찰나 쌍소멸이 일어나므로 끝내 볼 수 없다. 볼 수 없다는 말과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다르다. 죽음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 죽음이 존재하는 세계를 반세계라 한다면 우리 인식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있을 뿐이지 엄존한다. 비대칭대칭 진리에 예외는 없다.

 

인간은 왜 죽음을 배제하는가. 삶이 지속되기를 염원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죽지만 지금과 바로 다음 순간은 아니라고 믿으려면 죽음을 배제해야 한다. 존재를 부정하고, 쫓아내어 배제했지만 배제된 죽음은 반드시 거기 머무른다는 진실을 모르지 않는다. 아니 반드시 거기 머무르기 때문에 한껏 실컷 배제한다. 어느 카이로스에 죽음이 찾아오기를 염원하기 때문이다. 삶은 합일을 전제한 분리며, 죽음은 분리를 전제한 합일이다. 분리인 삶은 우렁찬 장엄이며, 합일인 죽음은 엄숙한 장엄이다. 삶은 죽음에 의존하지 않은 채 단 한 찰나도 견딜 수 없으므로 죽음을 그렇게 배제한다.

 

죽음을 절묘하게 배제하는 데 장례만큼 절묘한 장치는 없다. 죽은 자를 잠시 산 자 세계에서 기림으로써 반세계와 세계에 교집합이 만들어지도록 한다. 한편으로는 죽은 자로 하여금 그를 구성해온 인간들 사이에서 산 자로 마지막 향수되도록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산 자로 하여금 더 이상 죽은 자를 볼 수 없는 반세계를 구성해보도록 한다. 이렇게 삶과 죽음을 동시에 조명함으로써 산 자와 죽은 자가 소통하도록 매개하는 장치가 바로 장례인 셈이다.

 

3년 전 오늘, 그러니까 2019419일에 엄중한 우울장애로 오랫동안 고통 받던 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 그는 처음 격심한 위기를 맞았을 때 내게 와 치료를 받았다. 죽음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 쉽지는 않았지만 사회로 복귀했다. 맹렬한 우울 상태가 이따금 그를 엄습해오곤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세계를 놓았다. 그 반세계 앞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십여 년 전 살인사건과 수형에 휘말린 극심한 우울장애로 생사의 기로에 서 있던 청년과 상담했다. 선문답 같은 대화 끝에 그는 나를 백그라운드 삼아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나는 부단히 벗으로, 증인으로 곁을 지키려 애썼지만 힘든 현실 삶을 울며불며 견디던 그가 기어이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 나와 만나기로 약속한 날 꼭 일주일 전에. 나는 부모상을 당했을 때보다 더 비통하게 울었다. 약속한 인사동에 흰옷 입고 나와 그를 맞는다. 국수 한 그릇, 그리고 그가 좋아했던 소주 한 잔 놓아준다. 무슨 말을 하랴. 그의 모진 운명, 그리고 거기 잠시 깃들었던 못난 의자의 운명을 가만 들여다볼 뿐이다.”

 

그와 만나기로 약속했으나 끝내 만나지 못한 그 곳으로가 삼년상을 마치려고 한다. 지난 3년 죽은 자로서 그와 산 자로서 내가 서로 어떻게 배제되어 있었는지, 소통하고 있었는지 생각해본다. 지금 내 공부가 답을 줄지, 주면 무엇일지 몹시 궁금하지만 기대는 삼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령 이야기를 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궁극적 정의입니다.(228)

 

최근 들어 가끔 가기 시작한 음식점 주인이 어느 날 와서 인사를 하며 아는 체를 한다. 아침 출근길에 어디어디를 지나는 내 모습을 보고 참 단정하고 기품 있는 분이다 했는데, 손님으로 와 계셔서 놀랐다.’고 말한다. 전 같았으면 참 비슷한 사람도 있군!’ 하고 말 텐데, 한동안 생각이 거기 머물고 있다. 아침에 보고 저녁에 다시 본 사람이 같은 사람인지 비슷한 사람인지 구별하지 못할 수 있을까. 한두 번도 아니고. 더군다나 내 외양은 쉽게 헷갈리지 않는다. 헌팅캡을 쓰고 수염을 기르고 꽁지머리를 하고 목도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늘 똑같은 검은 가방을 왼쪽 어깨에 메고 서두르지 않지만 범상치 않게 빠른 속도로 걸어가는 노인이 어디 그리 흔할까. 나는 그 사람이 나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우리가 드물지 않게 우스개 삼아 들어온 말 중 도플갱어가 있다. 다양한 버전을 지닌 독일 미신에서 시작되어 문학에도 나타나고 정신질환으로까지 규정되는 100% 닮은 사람을 말한다. 확률적으로는 1/104(1자는 1024제곱)로 존재 가능하다는 연구까지 있다. 서구 중심으로 부정적 맥락에서 언급되는데 이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서구 전통에서 가장 용납하기 어려운 진실이 모순이 공존하는 이른바 이율배반이다. 100% 똑같은 두 사람을 말하지만 그런 존재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에서 나온 발상이기 때문에 도플갱어 또한 이율배반 범주에 속한다. 진리 값 1인 진리는 하나밖에 존재할 수 없는 형식논리로 문명과 과학을 구성해온 이상 도플갱어 파국은 어떤 형태든 불가피하다. 서구적 불안과 억압 양식 중 하나다.

 

이율배반을 품을 수 있는 양자물리학, 중관불교, 동시성, 상응 담론에 의지하면 도플갱어는 기괴하거나 악마적인 무엇이 아니다. 물질적 실재든 꿈이든, 심지어 환각이든 자기 자신과 비대칭대칭을 이루는 존재를 만나는 일은 과학 바깥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사건이 아니다. 그들 사이에도 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존재하는 사건과도 본질적 차이가 없다. 가령 정신질환인 환각에서 오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만한 곡절이 있으며, 그 곡절에 의거해 판단하면 그 환각이 현실보다 훨씬 더 중요할 가능성이 높다. 사건이나 사태가 지니는 실재성을 물질적 사실성 여부만으로 판단하는 행위도 형식논리 편향 일종에 지나지 않는다. 여태껏 목도하고 환호해온 논리와 과학은 세계 진리 20% 이하만으로 한 왕 노릇이었다.

 

도플갱어를 유령으로 바꾸면 어떤가. 유령을 죽은 자로 바꾸면 어떤가. 죽은 자를 신으로 바꾸면 어떤가. 신을 네트워크로 바꾸면 어떤가. 네트워크가 창발하는 풍경은 상상 불가 영역이다. 상상이 불가할 때 기적이라 하든 신비라 하든, 기존 환원주의 과학 너머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외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면 음식점 주인이 본 또 다른 나는 내 유령이라 해도 상관없고, 내 분신이라 해도 상관없다. 심지어 하느님이라 하면 또 무슨 상관이랴. 그 존재가 지금 여기 우리 삶에 어떤 소식으로 영향으로 구조로 작동하는가가 관심사 아니겠는가. 그 존재가 도구라서가 아니다. 그 존재와 그 존재를 이야기하는 일이 일으키는 창발 사건 그 자체가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고 이끌기 때문이다. 그 이전과 이후, 또 그 바깥은 없다.

 

내 유령 이야기가 궁금하니 그 음식점으로 가서 둘 중 누가 유령인지 알아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