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성, 양자역학, 불교 영혼 만들기
빅터 맨스필드 지음, 이세형 옮김 / 달을긷는우물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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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실체를 어떤 식으로든 다른 원칙으로 대체하지 않고 부정한다. 현상에 대한 지고한 진리는 상호의존, 상호연관뿐이다. 이 외에 더 말해질 수 없고, 말해져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을 윤회에 더욱 확고하게 고정하는, 본래 존재하는 또 다른 우상을 세우게 되기 때문이다.(274)

 

 

중도불교 귀류 논증은 서구와 다르다. 상대 주장이 오류임을 부정으로 증명한 뒤,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 대안은 어떤 식으로든 부정될 테고, 그러면 부정을 부정하는 꼴이 되어 결국은 긍정으로 되돌아가고 말기 때문이다. 매우 현명해 보이지만 반 똑똑이고, 그래서 오류다. 그들도 맨스필드도 알아차리지 못하니 따끔하게 톺아주자.

 

우선 논리 문제. 부정을 부정하면 긍정이 되는가? 무슨. 아리안 전승 깨달음은 여기까지다. 부정을 부정하면 긍정이 되는 일은 형식논리 안에서만 일어난다. 형식논리를 넘어선 세계에서 부정을 부정하면 불확정-원효 어법으로 하면 무애-이 된다. 불확정은 물질 실체론을 부정하기만 했을 때 불가피하게 떨어지는 정신 실체론도 부정함으로써 물질과 정신 이원론, 실체 비실체 이원론을 관통한다. 실체 비실체 이원론이란 말이 이상하게 들릴는지 모르지만, 물질 실체 부정은 정신 실체로 나아가기 위함이 아님에도 논리력 부족으로 그렇게 되었으므로 아리안 전승이 자초한 결과다. 부정을 부정하는 일은 딱 한 번 거듭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무한히 다음 부정을 열어 놓음으로써 이원론과 그 쌍생아인 일원론을 타파하고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여여 세계에 참여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 이치를 모르므로 저들은 끝내 실패한다.

 

다음 실천 문제. 중도불교 승려라면 예외 없이 참선·명상 같은 집중 수련을 통해야만 대극 합일에 도달한다. 이 실천은 물론 정신 수련이다. 정신 수련으로 도달하는 대극 합일이 참 대극 합일일 수 있는가? 저들이 도달한 대극 합일이 뇌 현상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이 깨달음이 하는 실천, 즉 자비행은 무엇인가? 생불이라 일컫는 중도불교 높은 승려가 행하는 자비행은 실제로 도탄에 빠진 인간, 인간 탐욕에 희생당하는 동물, 동물의 먹잇감에 지나지 않아 무차별로 살육되는 낭·, 그리고 돌꽃, 팡이, , 버금바리, 으뜸바리를 어떻게 살리고 있는가? 대극 합일에 도달한 저들의 정신이 정신주의가 아니라는 증거를 나는 도무지 찾을 수 없다. 맨스필드가 아는 중도불교 생불들은 모르니 우리나라 생불들을 떠올려본 결과, 그렇다. 참선해서 공 진리에 이르고 그 다음 자비행으로 가는 길은 사도다. 원효 길은 그 반대다.

 

원효는 흔히 일심화쟁무애 사상을 펼쳤다고 하지만 실행은 거꾸로다. 통속한 중도를 깨뜨린 원효 반야는 거듭 부정이 지닌 묘리를 현실 삶에서 깨친 덕에 체득되었다. 물질로 발현하지 않는 정신은 정신이 아니다. 정신 아닌 정신으로 공, 대극 합일을 말하는 일은 후원 근처에도 가지 않고 창덕궁 진경 봤다고 말하는 일보다 더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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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불교에서 공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특정한 존재인 실체에 대한 부정이다.......너무 광범위하게 실체를 정의하면 허무주의가 따라오게 되고, 다음에는 무가 존재하게 된다. 반면에, 너무 좁게 정의하면 엘리트주의가 따라오게 되고, 그러면 무상 종지가 강하게 부정하는바 사람과 대상이 영원한 본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이 두 극단을 조심스럽게 피해야 한다. 중도는 양극단 혼합이 아니라 철저한 반박이다.(234)

 

저자는 귀류 논증 전통에 따르는 티베트 불교를 중도불교라 일컫는다. ‘중도라는 번역이 정확한지 의문이 든다. 중도는 불교 최상 범주 언어로서 곧 정도를 말한다. 정도는 삼법인 또는 삼특상으로 집약되는 불교 보편 종지이므로 특정 전통에 국한할 수 없다. 공을 일관되게 말하는 사실로 보아 이른바 북방 대승 가운데 한 흐름을 따르는 듯하다.

 

그가 어디에 서 있는가, 자체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내리는 최종 결론은 그 전승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 진경을 보기 전, 일단 여기 이 진술은 정확하다. 붓다는 인식론적 절대주의와 회의주의, 존재론적 영원론과 허무론 양극단을 반박한다. 이 반박이 중도다. 중도는 중간이 아니다. 패권을 쥔 정통사상과 맞서는 힘에 따라 요동하기 마련이다. 붓다는 아리안-힌두 전통이 지닌 유적 제압을 거부하는 무적 기조에 극진히 서 있다. 이 기조를 유지하는 일이야말로 중도, 곧 정도를 지키는 일이다.

 

중도가 지니는 역동적 실상을 모른 채 도식적 논리만 좇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쪽 극단에 치우치고 만다. 현실에서는 패권 정통사상에 휩쓸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는 마치 결곡한 양비론이 권력 편을 들게 되는 이치와 같다. 자연과학, 심지어 물리학에서도 형편은 마찬가지다. 해석 아닌 학문, 선택 아닌 진리는 없다. 내남없이 허물어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반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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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빛은 파동성이나 입자성을 띠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측정할지 결정하기 전에 파동이다’ ‘입자다가정하는 일은 오류다. 우리가 선택하기 전에 그들은 확정되어 있지 않다. 과거가 현재에 이미 충분히, 상세하게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일이야말로 오류다.......우리는 우주를 정의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우리가 묻는 질문이 부분적으로 우리가 구하는 답을 결정한다. 우리는 자연을 자극해서 독백하게 할 수 없다. 대신 우리는 자연과 대화에 참여해야 한다.(186~187)

 

 

사실, 인간은 정신-마음-성이나 신체-물질-성을 띠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측정할지 결정하기 전에 정신이다’ ‘신체다가정하는 일은 오류다. 우리가 선택하기 전에 그들은 확정되어 있지 않다. 과거가 현재에 이미 충분히, 상세하게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일이야말로 오류다.”

 

어떤가. 범주 오류인가. 여기 우리가 인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인간 아닌 존재는 인간을 측정할 수 있는가. 그 여부를 인간이 무슨 수로 아는가.

 

If people would only talk about what they understood, Earth would be a very quiet place._Albert Einstein

 

인간이 인간 관지에서 다른 존재를 측정하고 정의하는 일은 인간 이해 한계 안에서만 일어난다. 인간이 오기 전 까마득한 옛날에 곰팡이는 네트워킹을 통해 발현했다. 측정 능력 없는 네트워킹이 가능한가. 이 네트워킹에서 인간, 당연히 그 정신도 발현했다. 이 인간 정신이 시간은 정신적이다.’라고 할 때, 바로 그 정신 맞나. 맞으면 틀린다.

 

융이나 맨스필드가 말하는 정신과 동시적·비국소적 생명 네트워킹은 다르다. 본성이 달라서가 아니라 융이나 맨스필드가 달리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른 한, 정신이 물질을 측정하고 정의하는 참여, 아니 창조는 허구다. 아니라면 그 실재는 인간 인식에 국한된다.

 

물질이 실체가 아니라는 진리는 당연한 귀결로 정신이 실체라는 진리를 낳는가. 무슨. 물질이 실체가 아니라면 정신도 실체가 아니다가 진리다. 물질과 정신은 상호 비인과 의존 과정[동사]에 잠정적으로 붙인 이름[명사]일 따름이다. 물질은 부단히 정신으로 파동화하고, 정신은 부단히 물질로 입자화하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장이 우주다. 우주 이전·이후, 내부·외부는 당최 없다. 대극 합일 유심론은 신화 유제다: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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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빛은 파동성이나 입자성을 띠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측정할지 결정하기 전에 파동이다’ ‘입자다가정하는 일은 오류다. 우리가 선택하기 전에 그들은 확정되어 있지 않다. 과거가 현재에 이미 충분히, 상세하게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일이야말로 오류다.......우리는 우주를 정의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우리가 묻는 질문이 부분적으로 우리가 구하는 답을 결정한다. 우리는 자연을 자극해서 독백하게 할 수 없다. 대신 우리는 자연과 대화에 참여해야 한다.(186~187)

 

초등학교 때 기억 한 장면이다. 매섭게 추운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 할머니께서 먼 길(!) 떠나는 형 옷매무새를 고쳐주신다. 전에 없이 무슨 목도리 같은 천으로 귀를 포함한 머리까지 감싸면서 추우니까 조심해라.”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형이 떠난 뒤 내가 할머니께 여쭌다. “할머니, 바깥이 엄청 추운 줄 어떻게 아세요?” 할머니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말씀하신다. “이름 있는 날은 그 값을 하는 법이거든.” 그날은 121일이었다.

 

121일은 그 당시 중학교 입학시험일로 정해져 있었다. 자연법칙이나 현상과 무관하게 인간이 정한 제도다. 그런데 어떻게 그 이름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추울까. 소한·대한에 춥다면 그는 그래도 수긍할 만하다. 유구한 자연 경험에 바탕을 둔 절기니까 말이다. 하지만 자연과 인과적 연결 없는 중학교 입학시험일에 인간이 겪는 심리적 추위와 자연이 상응한 셈인데 이게 말이 되는가. 그 후로도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나는 의문을 심화하지도 온전히 무시하지도 못한 채 여기까지 흘러왔다.

 

흘러가다가 우주에 참여한다는 말 앞에 아연 멈춰 서서 사색 깃을 여민다. 인간이 우주에 참여한다, 자연과 대화에 참여한다는 말은 과연 무슨 뜻인가? 그 뜻이 선뜻 들어오지 않을 때 반대 경우를 생각해보면 쉽다. 우주가 저기 바깥(out there)에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상하다. 이 말속에 이미 인간인 우리가 여기 안에 있는 우주와 독립·분리되지 않는데, 왜 구태여 참여한다고 하는가?

 

참여는 측정하고 정의하는 인식, 그러니까 정신 요건을 수반한다. 정신 요건을 충족시키는 찰나가 반환점이다. 되돌아 묻는다: 측정하고 정의하는 행위를 참여라고 할 수 있는가? 측정을 통해 태초로 정의되는 우주라면 참여가 아니고 구성, 그보다 (/2) 창조라 해야 한다. 창조인 찰나가 반환점이다. 되돌아 묻는다: 물질에 실체를 투사하면 오류이고, 정신에 실체를 투사하면 진리인가? 어찌 보면 말장난 같은 이 점검을 굳이 하는 까닭은 서양사상이 어떤 경로를 찾든 여전히 이원론 안에서 헤매고 있음을 환기하기 위해서다.

 

헤매지 않을 수 있다. 인간 정신이 세계정신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리, 인간 측정과 정의가 세계 측정과 정의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리 앞에 엎드리면 된다. 인간 정신이든 측정·정의든 전체 속 개체를 구동·구현할 따름이다. 정신을 거대 보편으로 확장할 수 있다는 아리안-힌두 오만은 남성 가부장 강력 이데올로기에 침륜된 소치다. 정신 거점을 지우고 우주에 흔연히 배어들어 갈 때 비로소 참으로 참여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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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에 대한 탄력적 개념을 가진 특수상대성이론이 동시성을 지지하는가? 직접은 아니다. 그럼에도 상대성이론에서 나타나는 시공간 개념은 확실히 더 탄력적이고 관계적이며 덜 고정돼 있고 따라서 동시성에서 흔히 보이는 면들을 초월하는 시공간에 더 적합하다.


이 점을 심리학으로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 시공간에 고정성과 절대성을 투사한다. 여기에 투사를 걸만한 고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속도가 광속보다 훨씬 낮은 대부분 비상대적 조건에서 이 실수는 문제 되지 않지만, 원칙적으로 시공간은 특정 관찰자에게 특정한 기준 틀에 상대적이다. 그런 점에서 시공간은 본질상 정신적이다.(165~166)

 

나도 마지못해 쓰기는 하지만 본질이라는 말을 들으면 저 깊은 곳에서 거부 웅얼거림이 일어나 올라온다. 본질이 있기는 한가? 본질이라는 말 자체가 실체주의 프레임을 반영하지 않는가? 이런 질문이 불가피하다. 우선 비본질을 톺아본다.

 

시공간에 고정성 절대성을 투사하는 행위는 실수. 이 실수는 광속보다 낮은 거의 모든 속도 조건에서 문제 되지 않는다. 문제 되지 않는 실수 차원에서 시공간은 정신적이지 않다. 이는 비본질이다. 비본질이 아날로그적으로 펼쳐지는 세계에서 우리 일상은 영위된다. 본질은 디지털적으로 일상 경계를 부수고 메워서전체성을 향해 간다. 여기에 동시성이 개입한다.

 

크로노스 수평은 비본질이고 카이로스 수직이 본질이라면 대체 인간은 왜 이런 비효율적인 삶을 사는가? 말하자면 주야장천 실수로 일관하다가 예측 불허 어떤 순간에 본질과 맞닥뜨림으로써 화들짝 보정되는 삶이 과연 목적 지닌 삶이라 할 수 있는가? 무엇이 본질인지 묻기 전에 본질이 무엇인지 물으면 본질:비본질 구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시간 본질을 묻고 그 본질을 정신적이라고 규정하는 일은 저자가 의지하는 중도불교 사상과 일치하는가? 이 실체 아닌 실재 사이 상호의존을 뜻한다면 본질도 실체가 아니다. 실체가 아니면 끊임없이 변할 테고 끊임없이 변하는 무엇에게 본질이 있을 리 없다.

 

정신과 물질 사이 상호의존으로 논점을 한정한다. 정신과 물질은 마치 빛에서 파동과 입자처럼 상태함수 차이로 드러나는 차이일 뿐 본질적 경계를 지니지 않는다. 본질적 경계가 아닌 경계를 절대화한 터 위에 상대성을 근거로 시간 본질을 정신적이라 규정한다면 이는 궁극에서 대극 합일로 향하는 저자 취지와 어긋난다. 대극 합일과 일극 집중이 동의어가 돼버린다.

 

저자는 아리안-힌두 전통과 붓다 원음이 다르다는 엄밀 진실을 모르기 때문에, 잘못된 대극 합일에 터 하고 있다. 마지막 다다를 지점은 서로 다르지만 융도 맨스필드도 유구한 사하라시아(스티브 테일러)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거인이 되었다. 본질적 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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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1 13: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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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2 10: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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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9 08: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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