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생각 끼어들 여지 없는 아침, 나는 육상궁으로 향한다. 눈에 한껏 진심을 담아 초군초군 살피고 조용히 서서 역사 속 숙빈을 현실로 모셔 온다. 정중하게 고한다: 신덕왕후께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비원 머금어서 다시 한번 궁을 향해 묵념하고 나온다.


 

육상궁을 끼고 백악정으로 가는 가장 서쪽 길에 들어선다. 이 경로는 처음이다. 60대 초반 대여섯이 왁자지껄 떠들며 내려온다. 신라 사투리를 장전한 울대 하나가 소음들을 압도적으로 거느리고 있다. 그 개소리 때문에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청와대 전망대 근처도 고요에 금이 가 있다. 연방 셔터를 눌러대는 사람과 멀찌막이 떨어져서 나지막이 축원 주()를 낭송하고 표표히 떠난다. 오늘따라 무리를 이룬 사람들이 길목 길목 둘러앉아 숲을 흔들어 댄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나는 숲에 사과한다.

 

숲에서 나와 성북동 골목을 더듬으며 나아간다. 지도를 보고 등성이 작은 골목 골목을 살핀다. 빈곤의 고고학이 여러 층위를 이루어 쌓여 있는 지붕이며 담벼락이며 널린 빨래며 깨진 화분이 초겨울 햇살에 바래고 있다. 건너편 저택들과는 돌아앉아서.


 

해가 제법 기울어진 시각 정릉에 들어선다. 능침 진입을 막아 놓았으므로 금천 건너편 언덕에 서서 고한다: 숙빈을 모셔 왔습니다. 나는 두 분을 현실에서 이어드린다. 두 분께서 일제 부역 정권 암괴가 빙의한 사령을 거두어 주십사 간곡하게 빌어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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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하순 풍경이다.




2023년 같은 시기 풍경이다.



다른 나무들도 거의 비슷하다. 단순히 작년과 올해 기후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기후 위기 증거인지 아직 단언할 수는 없지만 느낌이 좋지 않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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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월 마지막 일요일 아침, 아무런 계획 없이 집을 나선다. 버스 타지 않고 걸어서 관악에 들어가기로 정한다. 수많이 걸었던 그 길을 천천히 따라가며 어제 인연 짓기와 오늘 인연 짓기를 엮고 얽는다. 어제와 오늘 이야기가 맞물면서 역사는 현실로 부활하고 현실은 더욱 중후해진다. 여기서 미래가 창발한다.

 

보고 듣고 맡고 만지는 일이 서로 넘나들며 걸음 속도를 갈래 지게 한다. 가을 끄트머리라 갈래는 비교적 단출하다. 까치산길을 조금 걷다가 인헌공 강감찬 길 안내판에 눈길이 가닿는다. 그 길을 걸어 강감찬 장군 사당인 안국사로 가 볼 생각이 불현듯 든다.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 인헌공을 잠깐 본 탓이리라.


 

원작자 의도를 정확히는 모른다. 드라마 의도는 더욱 모른다. 중국과 한껏 척지고 있는 현 상황, 정치 문외한 대통령, 그리고 아버지 놀이하는 법사를 떠올리면 딱 맞아떨어지는 알레고리가 대뜸 들이닥치니 아연 심사가 날카로워진다. 묵념하면서 간절히 빈다: 장군이시여, 당신께서 그리 소비되는 일을 막아주소서!

 

묵직한 의구심을 떨치지 못한 채 백악 남서쪽 끄트머리 칠궁으로 향한다. 후궁이면서 임금을 낳은 일곱 분을 모신 사당이다. 흩어져 있던 궁을 여기로 모았는데 그 본궁이 육상궁이다. 육상궁은 우리가 다 아는 최숙빈을 모신 사당이다. 그런데 도리어 그 현액이 연호궁 현액 뒤에 숨겨져 있다. 언제 누가 이래 놨을까.


 

다시 정치적 알레고리가 들이닥친다. 서인 최숙빈: 남인 박정희. 현재 내 능력으로는 안국사 서사도 육상궁 서사도 내막을 알 방법이 없다. 내 음모론적 상상력은 나 하나 인생에 영향을 미칠 따름이지만 권력이 알게 모르게 꾸미는 음모 실재는 사회 전체를 뒤틀어 버린다. 이런 일을 무수히 겪으면서도 설마한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 설마 했던 이승만이, 설마 했던 박정희가, 설마 했던 전두환이, 설마 했던 이명박이, 설마 했던 박근혜가, 설마 했던 윤석열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잡았는가. 관악 발치에서도, 백악 발치에서도 나는 죽임당한 자들 목소리를 듣는다. 그 목소리는 숲이 품고 있다가 들려주는 명징한 웅얼거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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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지하철. 오늘따라 무슨 일인지 일찌감치 듬성듬성 자리가 빈다. 임산부 배려석 옆에 앉는다. 잠시 뒤 장년 여자 사람이 그 앞에 선다. 머뭇머뭇하더니 이내 앉기를 포기하고 옆 기둥을 붙잡고 선다. 다음 정류장에서 비슷한 연배 여자 사람이 탄다.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그는 임산부 배려석에 앉는다. 그 자리 앉기를 포기한 여성이 옆에 서 있는 사실도, 임산부 배려석인 사실도 전혀 모른다는 표정이다.

 

내가 내리려고 일어서 한 걸음 채 옮겨 디디기도 전에 그는 내가 앉았던 자리로 이동한다. 두 사실 모두 알고 있음을 증명한 셈이다. 서 있던 여자 사람은 그 자리에 앉으려 몸을 움직이다가 또다시 포기하고 선 자세로 되돌아간다. 어찌 보면 그는 같은 사람한테 두 번씩이나 양보하기를 당한(!) 꼴이다. 이들이 기울어진 까닭은 견지한 명분이 아니라 명분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서다. 명분을 사유화하면 앉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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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제자들과 너무 유쾌한 술자리를 가진 탓에 심신이 찌뿌듯하다. 35년째 이어오는 인연인지라 이 모임에서는 심취와 숙취가 동의어다. 해정을 위해 조금 일찍 집을 나선다. 백악산 남쪽 사면을 남서에서 북동으로 관통하는 청와대 전망대-법흥사 터 골짜기-숙정문-성북동-정릉 길로 향한다. 지난 5일 처음 걸었던 길인데 낯익음과 낯섦이 교차하면서 묘한 제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유념하고 살피러 간다.

 

청와대 전망대에는 너덧 사람 모여 왁자하게 떠들며 사진을 찍고 있다. 그들을 지나쳐 조금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간다. 8자 진언으로 축원 올리고 숙정문을 향해 가면서 찬찬히 살펴보니 법흥사 터 골짜기는 물을 제법 품은 실한 소곡이다. 이 물이 내를 이루어 경복궁 동쪽을 거쳐 광화문 교보 뒤로 흘러 청계천과 합류한다. 중학천이다. 이런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땅과 숲으로 향하는 눈길은 더 깊어진다.

 

이미 걸어 본 숲길이라고 해서 데면데면해진다면 등산이다. 나는 등산하지 않는다. 등산이 아니어야 걸을 때마다 달라지는 풍경으로 말미암아 숲이 지닌 매혹은 결결이 펼쳐지고 겹겹이 쌓인다. 소곡들 갈피를 감아 돌며 숙정문에 다다르기까지 백악산 아리잠직한 숲은 싱그러운 내음으로 그때그때 가득 찬다. 수시로 멈춰 서서 바람 소리, 나뭇잎 서걱대거나 떨어지는 소리, 새소리, 그리고 물소리를 듣는다.

 


숙정문이 까꿍 나타나 대사관로 따라 성북동으로 내려가는 길을 안내한다. 성북동은 내게 평창동과 흡사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박정희 유신정권 말기 실세로 군림했던 차지철이 성북동 살았다. 50년 전 그 집에 에스컬레이터가 있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 성북동도 도둑촌이구나 하면서 살았다. 가난한 얼굴을 틈틈이 내밀긴 해도 과연 대부분 집은 저택 수준이다. 특권층 부역자 소굴이 틀림없다.

 

성북동을 벗어나자마자 북악산로를 가로지르면 정릉동이다. 능선을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세상이 드러난다. 눈앞을 가로막는 골프 연습장은 정릉동 사람 아닌 성북동 사람을 위한 시설일 가능성이 크다. 그 아래 무슨 갤러리도 마찬가지다. 백악산 북동쪽 사면 자락은 가난을 즈려밟고 재개발 아파트를 쌓아 올린 욕망으로 낭자하다. 그 한가운데에 사방팔방 물어뜯긴 신덕왕후 유택이 있다. 그곳으로 나는 간다.

 

8자 모양 그리며 산책로 모두를 천천히 걷는다. 작은 물소리를 가만 들여다본다. 사위어가는 단풍 검붉은 빛 냄새를 맡는다. 거칠고 빠르게 날아오는 직박구리 노랫가락을 톡톡 건드린다. 마침내 신덕왕후 체취를 귀 기울여 듣는다. 그 육백 년 체취는 내 육감으로 피어나 비원을 빚어낸다. 나는 곡진히 신덕왕후를 역사에서 현실로 이끌어 모신다. 신덕왕후는 어디부터 나투시기 시작할까? 물론, 나는 아직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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