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오월 안성 저수지 물멍을 스승의 날 선물로 준 제자가 오늘은 괴산 산막이옛길 물멍에 초대한다며 이른 아침 왔다. 아직 물 제의 커다란 얼개 넘어 세부 일정을 잡지 못한 나로서는 잠시 틈내는 일이 오히려 길잡이 노릇할 수도 있다 싶어 냉큼 따라나섰다.

 

예상보다 쾌청한 날이다. 큰길을 달려 먼 데로 나아가는 일은 그때마다 설레고 모든 게 궁금하다. 차 안에서, 지난 두 일요일에 걸었던 두물머리와 더 물머리를 이야기한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제국주의로 흘러간다. 두물머리 수인·해월은 그대로 더 물머리 나다.

 

제자는 수긍과 질문과 탄식과 분노를 넘나들며 대화에 참여한다. 어디를 지나왔는지 통 알 수 없는 채로 어느덧 목적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미 사람들로 붐빈다. 열 시 좀 넘었는데 벌써 먹으며 왜자기는 사람들로 들머리부터 어수선하다. 여기라고 어찌 예욀쏘냐.

 

산막이옛길은 옛길이라는 표현이 주는 느낌보다는 젊다. 해방 직후 어려워진 전력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세운 괴산댐 때문에 본디 옛길이 수몰되자 산막이마을 주민이 새로 만들었으니 칠십 년도 채 안 된다. 세월 따라다니지는 않아서 길 풍경은 저 스스로 좋다.

 

우리는 무심코 들어가다가 지도에 나오는 산막이옛길 아닌 강가 길로 방향을 바꾼다. 둘레길처럼 새로 닦지 않았나 싶다. 강물에 바짝 붙은 경로가 제법 극적이다. 발은 땅을 더듬지만 눈은 연신 물을 쓸고 지나간다. , 인제야 보니 숲이 물빛을 닮아 푸르구나.


 

사람이 많아 북새통을 이루건 말건 나는 곡진히 물을 숨 쉰다. 단 한 군데만이라도 물을 만질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워한다. 현실성 없는 생각인 꼭 그만큼 인간이 물 자연을 멀리해서 영성 없는 껍데기 생명으로 타락했다는 증거다. 똑 그렇다.


 

이 길을 걷는 허구한 사람들이 정말 숲을 찾아온 걸까. 파괴되는 숲을 애도하며 기리는 걸까. 저들이 알고 걷는 뭍 숲이 물 숲에서 올라왔다는 진실을 알기는 하는 걸까. 물 숲, 그러니까 강과 바다 파괴가 근원적이며 절대적인 범죄라는 진실을 짐작이나 하는 걸까.

 

물 옆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그 길로 되돌아온다. 본디 그 옛길로 이어지므로 한 바퀴 돌 수 있지만, 차가 지나가는 광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발과 눈을 꼭꼭 다져 물과 숲을 이어주면서 10km 남짓 제의와 놀이를 가로질러 한바탕 휘휘 저어 나온다.

 

이 강은 달천(疸川: 달래강)이다. 남한강에 속하는 한 지류다. 충주로 달려가 원 줄기와 만나면 여주를 거쳐 이내 두물머리에 닿는다. 두물머리 기세로 우당탕 서울을 가로지른 다음 세 물머리, 네 물머리로 한껏 농익은 몸은 마침내 백호 서해와 한 몸을 이룬다.

 

나는 상상한다: 남한강 물길 따라 평창·영월·원주·양평으로 번져간 수인·해월의 물 사상운동은 그들이 살해당하지 않았다면 마침내 바다로 나아갔으리라. 반제 통일전선 헌걸찬 선봉이자 본진으로 만방의 수탈·살해당한 생명과 비생명을 품어 안는 어미가 됐으리라.

 

요석(운향원효의 바리(화쟁) 사상운동과 더불어 수인·해월의 물 사상운동은 이제 패자 팡이실이를 마지막으로 불러낸다. 패자만이 팡이실이를 실행할 수 있고 팡이실이만이 승자 필멸 진리를 증명할 수 있다. 바로 이제가 승자 제국주의 필멸을 당겨올 카이로스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집단서방은 지금 제3차 대전을 일으키려는 것일까? 최근 며칠 우크라이나전쟁을 둘러싸고 나토에 속한 유럽국가들과 미국의 행태를 보면 그들은 꼭 러시아를 도발하여 본격적인 무력 전쟁을 벌이려고 안달이 난 것처럼 보인다. 5월 초에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 대사들을 외무부로 불러들여 자국과 교전 중인 우크라이나에 지상군을 파병하거나 미사일을 제공해 러시아 영토를 타격하게 하면 상응하는 반격을 하겠다고 강력하게 경고한 바 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기존의 태도에서 후퇴하는 듯한 모양새를 보여 사태가 안정되는가 싶었는데 몇 주 지나지 않아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 것 같다. 애초에 대러시아 강경 발언을 내놓던 영국과 프랑스, 발트해 국가들은 물론이고, 우크라이나가 자국의 미사일로 러시아 본토에 공격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고 하던 독일, 그동안 다른 나토국가들에 자제를 요청하는 시늉을 해오던 미국까지 우크라이나가 나토의 무기로 러시아를 공격할 수 있다는 발언을 하고 나선 것이다.

나토국가들이 우크라이나에 장거리 미사일을 제공해 자국을 타격하도록 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이 생긴 것을 보고 러시아의 대통령 푸틴이 내놓은 경고가 섬뜩하다. “[타격의] 과업은 우크라이나 군인이 아니라 나토국가들의 대리인들에 의해 준비되고 있다. 유럽의 나토국가들, 특히 소국들의 대표들은 자신들이 무슨 불장난을 하고 있는지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영토는 작고 인구 밀도가 매우 높은 나라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러시아 영토 깊숙이 공격하는 것에 대해 말하기 전에 이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건 심각한 일이고, 우리는 그것을 아주 면밀하게 지켜보고 있다.” ‘소국들’은 발트 3국 즉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 나라는 최근에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보내 러시아 본토를 공격해야 한다는 강경 발언을 계속해왔다.

독일 총리 올라프 숄츠도 태도를 바꾼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동안 독일이 생산한 타우러스 미사일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해야 한다는 국내외 요구에 상당히 굳세게 맞서 온 셈이다. 숄츠는 자국의 미사일 운영 요원도 함께 파견해야 한다는 이유로 우크라이나에 미사일을 제공하기를 꺼려왔다. 우크라이나가 독일 미사일로 러시아를 공격한다는 것은 사실상 독일 미사일 운영 요원이 러시아를 공격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독일이 우크라이나전쟁에 직접 개입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숄츠의 그런 생각은 올바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제는 그도 나토의 다른 국가들의 여론을 따르는 모양새다.

미국의 공식 입장은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크라이나가 나토 무기를 사용해 러시아 본토를 타격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몇 주 전 우크라이나를 방문하고 돌아온 국무장관 블링컨이 자신들에게 제공된 무기로 러시아의 영토를 공격할지 말지는 우크라이나의 선택이라고 하기도 했지마는 그것은 개인 의견에 머물렀던 셈이다. 불과 이틀 전까지도 우크라이나는 미국이 제공한 무기로는 러시아 본토를 공격하면 안 된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임을 국무부의 대변인 매튜 밀러와 국방부의 대변인 사브리나 싱이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마치 연막작전을 펼치는 것일까 미국은 오락가락하는 태도를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미국의 정치매체 폴리티코는 바이든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비밀리에 미국 무기로 러시아 영토 안을 타격해도 좋다는 허락을 했다고 전한다.

서방의 호전적 자세를 놓고 우크라이나군이 최근에 전선 전체에 걸쳐 궤멸하는 양상을 드러내자 러시아의 전략적 패배를 꾀하며 우크라이나를 내세워 대리전을 펼쳐온 서방이 공황 상태에 빠져 막가는 반응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는 관측가도 있다. 러시아는 지난 2월 17일에 돈바스 지역의 군사 요충지 아브데예프카를 함락한 뒤로 1,400킬로가 넘는 모든 전선에서 우크라이나군을 몰아붙이는 형세다. 그에 따라 우크라이나 측의 사상자가 하루 1,000명을 훨씬 더 넘고 있고, 러시아군이 키예프를 공격하기 위해 예비군 30만 명을 동원했다는 소문도 있다고 한다. 그동안 전장의 현실을 외면하고 러시아의 패배를 바라마지 않던 서방으로서는 공황에 빠질 만도 한 전황이 전개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서방측이 갖게 된 두려움이 전쟁의 종식이 아니라 확전을 초래하는 방향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데 있다. 우크라이나의 패배는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이 갈수록 분명해지는데도 나토국가들은 전쟁의 판돈을 더 올려 밀어붙이려는 태도다. 가장 최근을 놓고 보면 5월 30일 노르웨이는 키예프의 승리를 앞당기기 위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영토를 대상으로 서방의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고 했고, 덴마크의 외무장관 라르스 뢰케 라스무센은 우크라이나가 덴마크 F-16 전투기로 러시아 내 군사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비슷한 대러시아 강경 태도를 보인 나토 세력은 영국, 스웨덴, 프랑스,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네덜란드, 에스토니아, 체코, 핀란드, 캐나다 등 무척이나 많다.

사실 우크라이나가 그동안 서방의 무기로 러시아 본토를 공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르코프와 가까운 벨고로드를 상대로 드론과 미사일로 공격한 지 이미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 단, 미국의 경우 그런 공격에 대해 표면상으로는 우크라이나를 질책해왔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런 태도는 러시아가 자국 영토에 대한 공격을 레드라인으로 설정한 것을 고려해 미국이 우크라이나 측의 벨고로드 폭격과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고 판단 결과일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폭격할 때 미국 무기를 사용한 것을 러시아가 모를 리는 없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우세하게 잘 수행하고 있는데 러시아로서는 우크라이나가 미국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구태여 문제로 삼아 미국과의 갈등을 표면화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벨고로드에 계속 공격한 것에 대해 철저한 응징으로 보복을 했다고 볼 수 있다. 2022년 가을에 철수한 뒤 하르코프 지역에서는 전선을 열지 않던 러시아는 최근에 벨고로드와의 안전거리 확보를 이유로 볼찬스크라는 작은 도시에 공격을 개시해 우크라이나군에 큰 타격을 입히는 중이다. 볼찬스크를 함락하고 나면 러시아군은 80킬로가량 떨어진 우크라이나 제2대 도시 하르코프로 진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집단서방이 일제히 내놓고 있는 발언대로 우크라이나에 장거리 미사일을 제공하고,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영토를 공격하면 어떻게 될는지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영국의 스톰쉐도우, 독일의 타우러스, 그리고 미국의 에이태큼스 미사일이 러시아 영토를 타격한다는 것은 그들 미사일의 운영을 모두 나토의 전문 요원이 한다는 것을 전제하면 나토국가들이 러시아를 직접 공격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것은 우크라이나군이 ‘공식’ 허락을 받지 않고 나토국가들의 무기로 러시아 영토인 벨고로드 등을 공격해온 것과는 결을 완전히 달리한다.

최근의 흐름을 놓고 세계지정학 분석가이자 저널리스트인 페페 에스코바르는 5월 30일 러시아의 스푸트니크 지에 실린 기고문을 통해 집단서방이 지금 러시아를 도발해 전면 전쟁을 일으키려고 광분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러시아의 대통령 대변인 드미트리 페스코프도 서방이 확전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의 혼미상태’에 빠졌다고 말했다고 한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일 것이다. 서방의 태도를 보면 사실 그렇게 보인다. 자신들이 지원하는 우크라이나가 전쟁에서 대패할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외교적 협상을 통해 사태를 해결하려 하는 대신 오히려 확전을 도발하는 것이다.

세르비아의 대통령 알렉산다르 부치치가 며칠 전에 했다는 말이 지금의 상황을 잘 말해주는 듯하다.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남은 시간이 없어서 걱정이다. 나는 끝낼 수 있기를 바라지만 가능성이 없지 않나 싶다. 그리고 기차가 이미 역을 떠나서 움직이기 시작했고 아무도 그것을 막으려 하지 않아서 걱정이다.”
“내가 볼 때 사태는 훨씬 더 복잡하고, 훨씬 더 나쁠 것이며, 우리가 제2차 세계대전 때보다 훨씬 더 큰 비극을 맞을 것 같다. 내가 틀렸으면 좋겠다. 특히 한 가지를 잊으면 안 된다. 전쟁 기계가 가동되기 시작하면 군대 로비와 군수업체 로비가 생겨나서 전쟁의 열기가 강화되길 원하고 그러면 더 이상의 노력은 없어질 것이고 중단시키기 어렵다. 누군가가 다른 쪽에다 책임을 넘기기만 하지 말고 이 일을 중단시킬 진짜 뭔가를 시도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가 재앙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다.”

부치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세계는 극도로 위험한 상황에 있다. 서방의 불장난, 장난이 아니다. 머리에 떠오르는 끔찍한 생각, 그것이 기우이기를 바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두 번째 물 이야기는 김포시 통진읍 보구곶으로 가면서 출발한다. 지하철보다 갈아타는 횟수가 적다는 이유로 버스를 탔는데 여간 지루하지 않다. 특히 신촌역에서 강화터미널을 왕복하는 버스는 가끔 막히기도 하고, 김포 들어가면서는 마을버스처럼 자주 서는 데다가 외진 마을까지 돌아 나오느라 직행이라는 이름과 영 다르게 꾸물댄다. 설상가상 난지 기산지 책임 묻기가 어정뜬 실수로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가 버린다. 그 한 정거장이 물경 강화대교다. 졸지에 강화도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니 심사가 사뭇 헝클어진다. 다행히 예상치 못한 발견 하나로 단박에 정돈된다.

 

처음부터 물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택한 길 들머리께에서 걸어 건널 수 있는 강화교를 본 것이다. 다리 앞에는 평화의 길이라는 글귀가 씌어 있다. 좌우로 쳐진 철조망이 그 평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려준다. 강화도에 갈 생각은 아니지만 얼마만큼 그 다리를 걸어 물 위에 선다. 직접 닿지는 못하더라도 철조망 사이로 보지는 않으니 한결 낫다. 앞으로 몇 시간 동안 이어질 그 시야를 이렇게나마 걷어내면서 출발하니 위로로 삼는다. 물을 따라 난 길로 접어들어 걸을 때 먼저 눈에 들어오는 방치와 후패 풍경은 심사를 다른 결로 흔들어 댄다. 철조망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철조망은 완고해 보이지만 거기로도 시간은 흐른다. 벙커를 포함한 군사 시설도 모두 녹슬고 삭았으며 인적이 전혀 없다. 걷는 내내 딱 한 번을 빼고는 군인을 보지 못했다. 강과 바다가 경계를 이루는 지점이 분명하지는 않겠지만 여기쯤이다 싶은 지점에서 사진을 찍으려는데 느닷없이 군 차량이 나타나 제지한다. 한참 멀어지는 내 모습을 확인한 다음에야 떠난다. 나는 다시 돌아와 기어이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는다. 물의 정치적 죽음에 애도하며 삼 배를 올린다. 물의 부활을 기원하며 다시 일 배를 올린다. 건너편 개풍군을 바라보면서는 눈물을 흘린다. 가슴이 저려온다.



김포와 강화 사이 좁은 바다(염하강)


한강과 바다가 만나니 여기도 두물머리다. 좀 더 분명히 하자면 임진강도 만나니 세물머리다. 지금 지명으로 남아 있는 조강(祖江)은 옛사람들이 이 부분을 따로 불렀던 이름이다. 한강, 임진강, 조강이 만난다고 해서 삼기하(三岐河)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범위를 좀 더 넓히면 예성강도 만나니 네물머리다. 네물머리는 백제 건국 때부터 삼국, 고려, 그리고 조선, 심지어 국권 상실기까지 2천 년 동안 가장 중요한 물머리로 위상을 떨쳤다. 제국주의 마수에 걸려 분단되고 내전까지 겪으면서 이 물머리는 돌연한 죽음을 맞았다. 검문소에 막혀 내 물 제의 또한 돌연한 죽음을 맞는다.



세물머리-철조망 밑바닥에 미미하게만 보인다


 

카메라 초점도 철조망을 넘지 못해 강화도 북단과 개풍군이 희미하게 보인다.


크게 돌아 용강리 쪽으로 나오려던 물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아쉽지만 들어온 길과 최소한으로 겹치게 경로를 다시 구성해 되돌아온다. 들어올 때는 군대가 닦은 길과 간척지 논길을 주로 걸었는데 나갈 때는 대부분 마을 길을 걸었다. 방치와 후패의 풍경은 마을 이곳저곳에서 나타난다. 외지인 전원주택이나 별장 빼놓고는 까부라진 자루처럼 힘없고 지친 듯한 분위기를 감추지 못한다. 통일되면 무조건 좋아진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려면 철조망에 막힌 지금 같겠는가. 지도 검색 때 점심 식사를 위해 확인해 둔 음식점은 한 군데 빼고 모조리 폐업 상태다. 이런 세상에···.


 

영업 중인 그 음식점은 혼자 들어갈 수 없는 전문 음식점이다. 2인분 시키겠노라 하니 그러면 괜찮단다. 허기질 정도로 배가 고프고 선택의 여지도 없다. 우주 최강 가난뱅이 한의사로는 여태껏 써보지 못한 거액을 이 절반 실패한 물 제의 현장에서 음식값으로 치르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김밥 한 줄 들고 오지 않는 것을 몇 번씩이나 후회했다. 그나마 딸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이라 포장해 가니 조금 위안은 된다. 인간을 떠나온 곳에서 불가피하게 인간 신세를 져야 하는 이런 행로 중 가장 심한 모순 의식에 휘감긴 시간이 천천히 흘러간다. 실패가 준 넉넉한 시간이라도 잘 써야지.



문수산성에서 본 보구곶, 그 너머 개풍군의 아린 풍경

 

전화를 건다. 김포시 월곶면 갈산리 출신인 한국화가 김구가 내 오랜 벗이다. 여기 왔으니, 오랜만에 만나서 막걸리 한잔하는 게 좋겠다. 마침 화실 작업이 끝나고 나오던 차란다. 막걸리에 파전 한 장 시켜 놓고 그가 아는 김포 이야기를 듣는다. 조강, 전류리, 준치, 건너편 강화도 연미정, 병인양요···마치 오늘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구수하게 얘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며, 제국주의, 부역 엘리트 실체, 그리고 두물머리를 터전으로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던 해월 최시형 선생과 후계로 지목됐으나 너무나 일찍이 비참하게 살해된 이수인의 물 이야기를 보탰다.

 

앞으로 당분간 내 물 제의에서 해월과 이()로 자칭했던 이수인 이야기가 화두로 등장할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필경 이 서사는 김지하가 쓴 수왕사(水王史)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김지하가 늙바탕에 보인 일탈 탓에 그를 인정하지 않지만, 저 주체할 수 없어, 누구 말도 듣지 않았던 신끼를 짐작하기에 적절히 걷어내면서 범주 인류학 맥을 더듬어 보려 한다. 결코 누락시킬 수 없는 민족지 진실을 품고 있으리라 본다. 거기에는 박경리 문학도 있을 테고. 물론 나는 한껏 절제하고 한껏 더 나아간다. 해월이 안 두물머리, 그 너머 물머리를 나는 알고 있으니까.

 

그 너머 물머리는 반제국주의 전선 총 본진이다. 제국주의는 불의 시대를 열어 구가한다. 과학기술과 탄소 에너지로 지구 전체를 불바다로 만드는 중이다. 특히 앵글로아메리카 제국이 정착형 식민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토착민, 그들과 공생하는 동물들과 숲에 멸절의 총칼을 쑤셔 넣은 짓은 그 생명을 이루는 물에 소진의 네이팜탄을 퍼부은 짓이다. 그러나 불은 물을 이기지 못한다. 물이 마침내 불을 잠재운다. 불을 잠재우는 그 물로 무고히 살해당한 생명들이 모여들어 팡이실이 사건을 한껏 일으킨다. 여성과 아이와 숲이 고요한 함성으로 모여드는 곳을 물머리라 부른다.

 

삿된 무당 하나가 졸개 둘을 시켜 사적 이득만 노린 해괴한 짓을 기탄없이 하고 있다. 한 나라의 수장, 또는 그 부부가 이렇게 대놓고 주술 통치를 하는 데도 한패인 언론이야 그렇다 치고 당대 일급 지성들이 입 처닫고 있는 짓은 그들 또한 특권층 부역자에 지나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다. 이번에는 석유 bullshit이다. 석유야말로 제국주의 서사의 백미 아닌가. 모르고 바치는 충성 같은 맹독은 다시없다. 망해가는 나라를 살해당함으로써 부둥켜안아야 했던 해월과 이의 음성이 오늘따라 더욱 아프게 들린다. 그 웅숭깊은 이명이 대취에 갈마들며 내 귀갓길을 막아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눈부신 은빛 풍뎅이가 홀연히 날아들기에 가볍게 붙잡는다. 붙잡는 순간 황금빛으로 바뀐다. 그 경이로움을 옆 사람에게 전한다. 꿈에서 깬다. 일어나 앉아 생각에 잠긴다. 카를 구스타프 융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황금풍뎅이 일화를 기억하는 데다가 요즘 그의 어록을 심심치 않게 마주해서 일어난 꿈 작용이라고 일단 이성적·합리적 해석부터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황금풍뎅이는 본 적이 없다. 어릴 적 강원도 산골 마을에서 본 풍뎅이는 검푸른 빛이었다고 기억한다. 나는 워낙 식물적인 사람이라 물방개, 몇몇 민물고기, 알 품은 새 둥지 따위를 빼곤 동물과 관련한 각별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다. 풍뎅이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동시성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글을 읽던 중 카를 구스타프 융 일화와 마주쳐 새로운 인상으로 각인된 듯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그 꿈 서사를 단순하게 구성하는 일은 동시성을 대하는 내 태도는 물론 동시성 자체에 모독이 된다.

 

이 꿈만으로 완결된 메시지가 있을까, 곰곰 묻는다. 당최 어떤 심상 작용도 일어나지 않는다. 통속한 길몽이라 여기기에는 내가 너무 냉정한 무당이다. 요즘 내가 화두 삼은 문제와 연결해 생각을 이어가다가 Irena Buzarewicz 트위터 그림과 돌연 마주친다.


 

거기 Ego 대신 인간, Nature 대신 인류를 집어넣으면 요즘 내가 드러내려 애쓰는 범주 인류학구도를 시각적으로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오른쪽 사람 색마저 검게 해야겠지만 어쨌든) 그 구도에서라면 인류는 다른 생명체와 다를 바가 없고, 따라서 범주 인류학의 공동 주체인 다른 생명체와 소통(해야 )한다. 그게 자연 이치며, 지구생태계 본성이다. 문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 인류가 그러니까 풍뎅이와 소통할 수 있느냐다. 늘 여기서 멈춘다. 자리에서 일어나 탕전실로 간다. 바깥으로 난 창문 통해 하늘을 볼 수 있어 생각이 어지럽거나 멈출 때 찾곤 한다. 창밖으로 나가던 눈길이 무심히 한곳에 머문다. 바로 거기서

 


황금무당벌레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와 내 손등에 앉는다. 황금풍뎅이는커녕 평범 풍뎅이조차 전혀 볼 수 없는 서울 한복판에서라면야 황금 무당벌레야말로 범주 인류학 팡이실이 전령으로 충분하게 감동적이고 충만하게 경이롭지 않은가. 황금 무당벌레가 이내 날아가고 없는 허공 향해 나는 깊이 허리를 접는다. 더는 꿈을 해석할 까닭이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늘 아침엔 조금 일찍 일어나 움직이기로 한다. 두물머리로 갈 생각이 있어서다. 일요일 중앙선은 사람은 물론 자전거까지 더해져 매우 혼잡하다. 혼잡을 조금이라도 피하려면 양수역에서 내려 남한강 쪽부터 걷고, 그다음 북한강과 만나는 언저리를 걸은 다음 북한강 물가 길 타고 운길산역으로 가 돌아온다, 이렇게 가닥 잡는다.

 

양수역은 의외로 그리 붐비지 않았다. 아마도 오후에 비 오신다는 예보 탓일 테다. 스마트폰 지도로 용담리 가정천과 남한강 마지막 물길이 만나 이루는 만 모양 물 서쪽 숲길을 찾기 위해 사람 다니는 차선이 그어지지 않은 차도로 들어서다 몇 걸음 못 가고 그만두었다. 급회전하는 지방도는 바위투성이 산등성길보다 더 무섭다.

 

동쪽 둔치에 만들어 놓은 산책로로 방향을 바꾼다. 그 끝에서 서쪽을 향해 난 양수로를 걸어 남한강 큰 물길과 만난다. 6번 국도 경강로와 만나는 곳에서 한참 간 다음 더는 나아가지 않고 높은 언덕에 올라 남한강을 내려다본다. 저 물길 시원인 오대산 우통수 발치 간평리 마을 내 고향을 떠올린다. 언제이든 다시 걸을 곳이기에.



돌아오는 산모퉁이에 무덤이 하나 보인다. 가까이 인기척 있어 다가간다. 파평 윤씨 선산이란다. 이 산을 넘어 양수역 가는 길이 있는가, 물으니 그렇단다. 아까 실패를 만회할 양으로 거침없이 숲으로 들어갔으나 이내 길을 잃었다. 그가 있다고 한 산길은 옛 기억일 가능성이 크다. 늘 그랬듯 나는 직진했다, 이번엔 물에 닿으려.

 

산은 작지만, 숲이 커서 길 잃은 자는 아뜩해진다. 홀연 길 하나가 보인다. 마치 익숙한 산 사람이 남긴 증거처럼. 그런데 이상하다. 그 산 사람이 아이 또는 난쟁이라면 모르지만, 어찌 기어야만 갈 수 있는 곳이 이토록 많을까? 이제 길이 트이는구나, 하는 찰나 소름이 훅 끼쳐온다: , 바로 이게 짐승 길이구나. 아이고, 맙소사!

 

회룡 계곡 때 사람 발자국과 달리 짐승 길은 끊어지지 않고 샘이 있는 곳과 닿아 있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샘에서 물을 받던 등산객들이 놀란다: 거기 워낙 가팔라 길이 없는데요? 내가 웃으며 일부러 물 가까이 걷기 위해 길을 내며 왔다고 하니, 다들 고개를 갸웃한다. 그 와중에 기어이 물에 닿아 손을 담갔음은 똑 사실이다.


 

알고 보니 그렇게 간 길은 처음 무서워 그만둔 그 길과 마주 이어져 있었다. 거꾸로 한 바퀴 돌았으니 목적 달성이 분명하다. 거기부터 내 발걸음은 헤매지 않고 용담리를 관통한 다음, 양수리 물가 길을 샅샅이 돌았다. 두물머리 나루에서 두 한강 물과 손을 맞잡았다. 북한강 물과도 손뼉을 마주쳤다. 네 시경 운길산역에 닿았다.

 

지지난 주 안성 저수지 물·멍에서 물과 만난 뒤 사실 어떻게 숲에서 물로 이동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그냥 오늘 두물머리로 향했다. 물은 숲과 특성이 달라 뭍 생명 인간을 쉽게 단도직입으로 품어 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태초에 숲은 물이었다. 지구 팡이실이 창발로 물기 던 숲을 발현했을 뿐. 숲에서 물로 가는 길은 숙명이다.

 

운길산역 아래 북한강 물에 다섯 번째 손을 담금으로써 내 첫 물나들이는 마무리되었다. 앞으로 이 걷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나는 모른다. 반걸음 앞을 내다보고 한 걸음씩만 내디디려 한다. 팡이실이, 그 살아 움직이는 현실에 내가 극진히 참여하는 한, 물은 물로 그 길을 열 터이므로. 바야흐로 새로운 한 시절이 일어나는 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