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본동 백사마을은 마지막 남은 달동네라 불린다. 지도만 봐도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대뜸 알 수 있다. 백사마을은 남북으로 곧게 뻗은 불암산 남서쪽 자락 북서향 비탈에 자리한다. 그 앞으로는 너른 마들평야가 펼쳐져 있다. 마들평야와 백사마을 사이를 만만치 않은 야산(산책로 이정표에 누군가 손 글씨로 덧쓴 금화산이라는 이름이 있음) 하나가 갈라놓지 않았다면 운명은 지금과 전혀 달랐으리라. 금화산은 백사마을을 고립시켜 마지막까지 토건 세력이 주목하지 못하도록 작용했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어쩌면 백사마을이 생기게 된 배경에는 이런 정치·경제적 지정학이 처음부터 작용했을는지도 모르겠다.

 

백사마을은 1960년대 도시 정비사업을 밀어붙였던 박정희식 토건 독재 소산이다. 청계천, 영등포, 서대문 일대 판자촌을 때려 부수고 그 주민을 강제 이주시킨 곳이 바로 백사마을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기에 백사마을이라 했다는 설이 있을 만큼 삶의 터전으로 보기 어려운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가 버린 사람들은 스스로 더불어 공동체 마을을 일구기 시작했다.

 

먼저 온 사람이 평지 가까운 아래부터 집을 짓고 그다음에 온 사람이 차례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며 잇대어 집을 지어 마지막에는 산등성이까지 900가구를 이루었다. 나중 짓는 사람은 먼저 지어진 집 일조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배려하고 자투리땅을 살려 자연스럽게 이웃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훗날 이런 생태를 배려해 서울시가 보존형 재개발 사업을 기획했지만, 별별 우여곡절을 겪으며 뒤엉켰다. 아직도 갈등은 풀리지 않고 있다. 보존책이 온전하지 않았다, 정치 변화에 휘둘렸다, 주민대표자회의 간부들이 거액을 횡령했다,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린 주민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이다.

 

조폭 통치 판에 여당이 뭉그러지자, 보스 오른팔인 현직 법무부 장관이 장을 맡은 웃기는 비상대책위원회에 반해 백사마을 주민 비상대책위원회는 얼마나 눈물겨운가. 쫓겨와서 자리 잡은 곳에서 다시 쫓겨나야 하는 사람들이 처한 상황은 말 그대로 비상인데 대책이 없으니 말이다. 900가구 가운데 70가구 남아 터전을 지키면서 이길 수 없는 싸움을 기약 없이 하고 있다. 이야기 나누는 2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수시로 흩어져 허공을 떠도는 주민 눈동자를 보며 내 가슴에는 눈물이 한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내 가슴속 눈물은 결코 연민이 아니다. 백사마을 풍경은 내가 1010년을 살았던 동소문동 616번지 달동네와 많이 닮았다. 아니 근본에서 같다. 거기서 나는 재개발에 걸려 쫓겨가는 사람, 폐허가 되어가는 집을 목격하며 거의 마지막까지 버티다 떠났다. 그 무섭도록 슬픈 기억은 이내 도화선이 되어 그 뒤에도 두 번이나 재개발에 걸려 쫓겨났던 기억을 가차 없이 터뜨렸다. 시뻘건 공가 딱지가 나붙고, 버려진 고양이가 길냥이 되어 밤마다 울부짖고, 마침내 전기와 수도가 끊어지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들이닥치는 공포와 분노, 그리고 절망감은 실로 형언하기 어렵다.

 

이 공포와 분노, 그리고 절망감은 제국이 일으키는 정착형 식민주의 절멸 전쟁에서 북미대륙 토착민이 느낀 감정과 본질이 다르지 않다. 실제로 이런 토건형 재개발에서 살아남는 원주민은 10% 미만이다. 분담금을 감당하지 못해 헐값 딱지를 팔고 떠날 수밖에 없다. 권력과 업자는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사업을 벌인다. 주택 공급 정책이라 떠벌이지만 빈 땅에 짓는 것도 아니고, 무주택자에게 혜택이 실팍하게 돌아가는 것도 아닌 협잡이 그 요체다.

 

나는 폐허로 변해가는 백사마을 골목 골목으로 들어가 시린 풍경을 사진에 담는다. 자국 정착형 식민주의를 시전하는 허울 국가 부역 행위에 대한 증언이자 제국주의에 맞서는 항쟁이다. “찰칵소리마다 떠난 이들과 땅과 숲을 소환해 전우로 삼는다. 마을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보듬은 뒤 불암산으로 들어간다. 길 없는 숲을 헤치기도 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하며 중계동, 남양주시, 공릉동 경계를 넘나든다. 숲에서 나올 무렵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다. 소란에 들뜨는 성탄 전야 도심으로 발길이 향하지만, 가슴은 떠나온 백사마을에 내려앉는 정적으로 깃든다.



금화산에서 건너다본 백사마을




처음 만난 공가




백사마을 언덕길에서 저 멀리 보이는 전혀 다른 세상




누군가의 이름이 있었던 자리 




아직도 누군가 있을 듯한데




못다 쓴 연탄 몇 덩이가 는적는적 뭉그러져간다 




골목 끄트머리 저기, 화장실 아닙니다




이름 자체만으로 눈물겹다




예수 믿는 사람 떠난 자리에서 예수는 여전히 고난 받는가




백사마을 떠나며 불암산 자락에서 바라본 북한산 능선이 유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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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끈 매고 나서도 한참 동안 현관 앞에 앉아 있는다. 갈 데를 정하지 못해서다. 경험상 이럴 때는 무조건 일어나 걷는 쪽을 택하면 된다. 평일에 늘 걸어서 넘어가던 산길을 따라간다. 살피재 지나 청림동으로 들어서면 옛친구들이 살던 봉천동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골목 풍경이 펼쳐진다. 그 위에 덮치듯 들어앉은 고층 아파트단지와 극적 대비를 이루며 나지막한 웅얼거림 소리를 낸다. 멈춘 시간 틈에서 나는 냄새를 곰곰 풍긴다.

 

까치산 숲으로 들어가 어머니 싸리나무를 뵙는다. 내가 본 싸리나무 가운데 가장 오래되어 보호수로 지정할 방법을 찾아보았으나 결국 막혔던 싸리나무다. 그 사이 숲 관리인이 수관 절반을 떠받치는 줄기 하나를 베어버렸다. 그 탓인지 생명력이 다해 가는 듯, 돌꽃과 곰팡이가 큰 줄기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나는 물을 부어 드리고 속죄와 감사와 기원을 담아 간절한 마음으로 머리 숙인다. 주위 나무들도 바람 소리를 빌어 동참해 준다.

 

소곡으로 내려와 건너편 숲으로 들어간다. 거기 계신 어머니 참나무를 뵙기 위해서다. 인근 숲 네트워킹 허브로 믿어지며 자태가 수려하고 옹골지다. 이 정도 참나무는 실제로 50종 이상 생명을 품어 함께 산다. 예컨대 도토리거위벌레는 도토리 속에 알을 낳는데 유충은 그 도토리를 먹고 자라며 성충이 되면 도토리가 열린 가지를 잘라내 적과(摘果) 작업을 해주어서 튼실한 도토리가 생산되게 한다. 나는 물을 부어 드리고 머리 숙인다.

 

까치산길을 따라가다가 중간에 나와 인헌시장으로 들어간다. 해장국으로 점심을 먹은 뒤 다시 능선길을 걸어 관악으로 들어간다. 마애미륵불 좌상이 새겨진 큰 바위를 조금 지난 곳에서 왼쪽으로 내려가 내 지성소 골짜기로 향한다. 본디 이름이 없는 골짜기지만 나는 이 골짜기를 은천골이라 부르기로 한다. 그 아래 마을에서 강감찬 장군이 태어났고, 장군의 아명이 은천이었기 때문이다. 골짜기와 물을 세심히 보듬은 뒤 숲에서 나온다.


 

안국사로 간다. 안국사와 안국문 현액이 아무래도 박정희 글씨인 듯해서 가보려 함이다. 내가 아는 박정희 필치와 일치한다. 직접 증거는 없으나 안국사가 1974년 정권 유지를 위한 상징 조작 고리로 박정희 지시에 따라 지어졌다는 기록을 보니 거의 분명하다. 그 의도와 무관하게 성웅 기리는 일이 잘못은 아니되 나는 이제 안국사 영정 말고 생가터(낙성대)와 거기 있던 석탑 앞에 서련다. 나라 구한 분과 배반한 놈, 구분은 해야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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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균 사망 사건에 대한 원청 책임을 부정한 대법원판결이 나왔다.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이런 비판은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하청부(下請負-이하 그 준말인 하청)라는 시스템 자체가 원청 책임을 피할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하청 시스템 전체가 착취적 본성을 지니는지도 모른다. 하청 업자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웠다고는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 실형을 받은 하청 업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그 방증이다. 그렇다면 하청 자본주의, 궁극적으로 하청 제국주의 체제를 정조준한 사회적 담론이 나와야 할 시점인데 어디에서도 그런 움직임을 찾을 수 없다.

 

하청은 일본 제국주의가 만들어 낸 공급 사슬이다. 원말은 したうけ/下請. 하청 시스템은 일본 경제가 한때 미국을 위협할 만큼 잘 나가다가 쇠락 일로를 걷게 만든 근본 원인 가운데 하나다. 일본 하청 시스템은 9차 하청이 있을 정도로 모질다. 전 기업 99.7%가 하청 회사라 30년 동안 임금이 오르지 않았다고 하니 일본에 대한 국가는 부유한데 국민은 가난하다라는 표현은 빈말이 아니다. 하청 자본주의는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경제 구조도 타락시켰다. 직접적인 피해는 물론 대한민국이 입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정말 심대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인류학자 애나 로웬하웁트 칭은 세계 끝의 버섯이라는 책을 통해 이 문제에 다른 관지로 접근한다. 일본식 하청 시스템을 공급 사슬로 부른 이가 바로 그다. 자본주의 시장 안팎을 넘나드는 공급 사슬을 통해 송이버섯이 지구 여러 곳에서 일본으로 흘러가는 현상을 자본주의가 만든 폐허 넘어 인간과 곰팡이(송이버섯)와 소나무가 더불어 엮어가는 경이로운 서사라고 본다. 포스트 휴머니즘에 터 잡아 다종 민족지 쓰기라는 인류학적 관지를 잘 드러내 준다. 나는 읽는 내내 읽고 나서도 뭔가 다른 할 말이 있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다. 역자 <해제> 또한 다른 말을 암시조차 해 주지 않는다.

 

인류학자라면 특히 제국주의를 근원 범주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 학문 본성에서도, 지구 위기 상황인 시점에서도 그렇다. 몰살·제국주의·식민지에 대해서 언급하지만, 칭은 대체로 자본주의를 범주 삼아 이해한다. 제국주의를 직시한 내용은 찾기 어렵다. 심지어 일본 식민지였던 한국 관련 이야기를 할 때조차 피상적이다. 결정적인 대목은 공급 사슬을 자세하게 말할 때다. 그것이 일본식 하청 시스템임을 알면서, 그 시스템이 무역상을 축으로 자본주의 돌연변이종을 만들고 그 방식으로 부역 집단을 통해 식민지를 수탈한 역사의 소산임을 알면서, “창발이란 찬사로 경이로움을 돋을새김한다.

 

1970~80년대 일본과 미국이 경제적 힘겨루기를 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스스로 일본식 하청 자본주의, 아니 하청 제국주의 길로 들어섰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까닭을 칭은 자본주의 범주에서 설명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미국은 정착 식민주의 경험을 토대로 그때까지 세계 지배를 추구해 왔다. 생산자이므로 체제 비용이 필요하다. 이와 달리 일본은 금융 패권을 통해 하청 식민주의로 제국을 경영해 왔다. 장사꾼이므로 체제 비용이 필요하지 않다. 미국이 금융 제국으로 돌아서면서 흑역사를 은폐했지만, 실은 일본식 장사꾼 제국주의 숙주로 전락했다. 이를 분명히 해야 참된 창발이 틈탄다.

 

김용균 재판을 다시 생각한다. 대한민국 하청 시스템이 그러하듯 대법관들이 지닌 관련 법률적 지식과 판단력은 기본적으로 근본적으로 일제에서 발원했다. 저들은 특권층 부역자로서 대한민국 사회와 시민에게 애정을 품지 않은 종자들이다. 대한민국은 허울뿐이라는 사실에 감사하며 제국 논리를 기쁘게 하청받는 엘리트 계층”(칭의 용어)이다. 작금 대한민국 엘리트 계층이 하는 짓을 보면 일제에 나라를 가져다 바친 대한제국 엘리트 계층과 똑 닮았음을 알 수 있다. 원청이 무죄란 대법원의 선고는 일제 지배가 감사할 일이라는 천공의 개소리와 같은 본성을 지닌다. 문제는 제국과 그 하청업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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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생각 끼어들 여지 없는 아침, 나는 육상궁으로 향한다. 눈에 한껏 진심을 담아 초군초군 살피고 조용히 서서 역사 속 숙빈을 현실로 모셔 온다. 정중하게 고한다: 신덕왕후께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비원 머금어서 다시 한번 궁을 향해 묵념하고 나온다.


 

육상궁을 끼고 백악정으로 가는 가장 서쪽 길에 들어선다. 이 경로는 처음이다. 60대 초반 대여섯이 왁자지껄 떠들며 내려온다. 신라 사투리를 장전한 울대 하나가 소음들을 압도적으로 거느리고 있다. 그 개소리 때문에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청와대 전망대 근처도 고요에 금이 가 있다. 연방 셔터를 눌러대는 사람과 멀찌막이 떨어져서 나지막이 축원 주()를 낭송하고 표표히 떠난다. 오늘따라 무리를 이룬 사람들이 길목 길목 둘러앉아 숲을 흔들어 댄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나는 숲에 사과한다.

 

숲에서 나와 성북동 골목을 더듬으며 나아간다. 지도를 보고 등성이 작은 골목 골목을 살핀다. 빈곤의 고고학이 여러 층위를 이루어 쌓여 있는 지붕이며 담벼락이며 널린 빨래며 깨진 화분이 초겨울 햇살에 바래고 있다. 건너편 저택들과는 돌아앉아서.


 

해가 제법 기울어진 시각 정릉에 들어선다. 능침 진입을 막아 놓았으므로 금천 건너편 언덕에 서서 고한다: 숙빈을 모셔 왔습니다. 나는 두 분을 현실에서 이어드린다. 두 분께서 일제 부역 정권 암괴가 빙의한 사령을 거두어 주십사 간곡하게 빌어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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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하순 풍경이다.




2023년 같은 시기 풍경이다.



다른 나무들도 거의 비슷하다. 단순히 작년과 올해 기후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기후 위기 증거인지 아직 단언할 수는 없지만 느낌이 좋지 않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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