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여러 분야에서 일어나는 제국주의 부역 문제를 개인적 숲 걷기와 결합한 서사로 빚어 온 지 제법 됐다. 이제 한 동강 매듭지으려 한다. 마지막 발걸음은 개화산, 거기 있는 국립국어원이다. 나나보조 이야기가운데 아베의 축원이라는 부제를 지닌 공시적 이야기 첫 번째가 <말글 부역 서사>고 거기서 국립국어원 이야기를 했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 말을 혁명하다>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했다. 그만큼 중요하다. 마침내 여기서 마무리 이야기로 삼음으로써 바로 이 일이 더없이 중요함을 명토 박는다.



개화산 신목

 

공자 정명(正名)을 후대 사람이 해석할 때 대부분 실()과 부합하는 명() 자체에 집중하지만, 엄밀 문맥은 그 정명이 근본적으로 올바른 말글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에 주의하라고 일러준다. 여기에 기대지 않더라도 문명 실재로서 인간이 말글에 그 바탕을 둔다는 진실은 상식에도 앞선다. 말글살이 고갱이가 썩어 문드러진 권력 패거리가 나라를 대놓고 말아먹는 오늘날 이 문제와 죽기 살기로 씨름해야 한다. 저들이 싸지르는 말글 때문에 공동체 정신 생명이 궤멸하고, 문화 미학이 비속함으로 미끄러져 간다.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반말·비속어·욕설을 거리낌 없이 내뱉어도, 방송 매체가 영어·일어식 낱말은 물론 불필요하고 잘못된 외래어·외국어에 올라타도, 뜨르르한 지식인이 전문가 사투리로 처바른 말글을 쏟아내도 개화산 기슭 국립국어원에는 기괴한 정적만 감돈다. 국립국어원장이 차관급도 못 되는 1급 공무원일 뿐이어서 그런가. 물론 그렇기도 하겠지만 적극적·능동적으로 부역하는 측면이 크다. 피상적이고 진부한 업무 말고 이 언어공동체가 처한 식민지적 상황을 타개할 책무에는 무관심하다고 본다.

 

달포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국립국어원 업무 보고를 받은 뒤에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국어는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며 문화 창조의 원천이자 최고의 문화 자산이다. 우리 말과 글을 품격 있게 사용하는 문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여기에 국립국어원의 역할을 강조했다고 기자는 덧붙인다. 이 얼마나 훌륭한 발언이며 정확한 보도인가. 이 말에 녹아든 일본식 어법과 어휘를 장관도 기자도 모를 만큼 짙은 식민지 그림자를 밟고서 우리는 천연스럽게 국어가 지니는 위상과 품격을 말한다, 국립국어원이라서.

 

물론 내 말과 글에도 오욕이 우글거린다. 나는 모국어 근본주의나 순혈주의를 견뎌내지 못한다. 다만 나 또한 부역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실을 온몸으로 견딜 뿐이다. 깜냥대로 있는 힘 다해 똥 먹은 입에서나마 똥 냄새를 토해내지 않으려 찰나마다 애쓸 따름이다. 이런 애씀을 모으고 다독여 식민지 말글살이를 벗어날 수 있도록 민중 앞에 서는 일이 국립국어원 책무가 아닌가. 한류 운운하며 이벤트나 벌이지 말고 사전 하나라도 제대로 만들어야 하건만 피상적이고 진부한 부역 벼슬아치에겐 어림없는 일이다.

 

국립국어원이 만든 표준국어대사전 수준은 표준적으로이렇다. “첫날: 어떤 일이 처음으로 시작되는 날. 시작: 어떤 일이나 행동의 처음 단계를 이루거나 그렇게 하게 함.” 최종규 님이 우리말 꽃에서 비판한 대로 이 풀이는 돌림 풀이다. 사전이 지녀야 할 으뜸 가치를 저버린 짓이다. 게다가 시작이란 말은 일본에서 들어온 한자 말이다. 쓰지 말든가 최소한 지적은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몰라서 그랬다는 건 말이 안 되고 알면서도 그랬다면 더욱 용서할 수 없다. 이 국립국어원에 무슨 역할을 기대하겠나.

 

국립국어원 앞에 망연히 섰다가 정화 의식을 하고 돌아서는데 문득 개화산 봉수대 이야기가 떠오른다. 임진왜란 때 순천에서 올라오는 봉화를 받아 남산 제5 봉수대로 전했다 한다. 왜군 침략을 알려주던 산마루 아래 기슭에 똬리 틀고 앉아 왜 말로 제 말 풀이를 하고 자빠진 토착 왜구 집단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내 꼬락서니가 다시없이 추레하다. 걸어서 맞서고 말해서 진실 밝히는 일이 그나마 내가 모멸을 견디는 알량한 길이다. 더 보람된 일을 하고 싶지만, 가장자리에 틀어박혀 숨만 쉬는 무지렁이 주제라···



돌이켜보면 내가 무지렁이 부역자라는 사실을 통렬하게 일깨웠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반제국주의 전쟁 주체로 드러냈으므로 숲이야말로 이 푸른 별에 범주적 전선을 일구어낸 장본이다. 앞으로도 숲에 귀 기울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으리라. 거기서 죽임당한 생명, 생명 아니라 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비생명 주체를 만나 반제국주의 통일전선에 깃들고 파닥이리라. 남은 날이 비록 많지 않으나, 상상하지 못할 변화를 바라는 일에서 물러서지 않겠다. 개화산을 떠나면서 걸음마다 홀가분해지는 게 꼭 마음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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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도산 마지막 이야기를 위해 국립중앙도서관을 걸은 뒤 따끈한 국수로 점심을 먹으며 저녁때까지 남은 시간엔 어디를 걸을까 생각한다.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은 개화산 국립국어원이다. 시간상 맞지 않아 다음으로 미룬다. 그다음으로는 관악산 국사편찬위원회다.



내가 국사편찬위원회를 떠올린 까닭은 특권층 부역 지식인 가운데 사학계 양대 아이콘인 이병도와 신석호에 대한 사전 지식 때문이다. 그들이 해방 후 무슨 짓을 했는지 소상히 알지 못하지만, 국사편찬위원회에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리라는 짐작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잠시 자료를 찾아보다 이헌동 님이 이병도·신석호는 해방 후 어떻게 한국사학계를 장악했는가(김병기)라는 책에 관해 쓴 글과 마주친다. 그 글만으로도 내가 국사편찬위원회를 반제국주의 걷기 대상으로 삼을 이유가 차고 넘친다.

 

특히 신석호, 그는 국사편찬위원회 전신인 국사관 수장이었다. 그런데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역대 위원장 소개란 첫 칸에는 국사관장 신석호(1946.3.23.~1949.3)”가 있고, 같은 칸 아랫부분에 작고 옅은 글씨로 문교부장관 겸직 위원장(1949.03~1965.01)”이라고 쓰여 있다. 그 기간에 문교부 장관은 이름만 걸어놓고 신석호가 사실상 위원장 노릇을 했다는 의미인가. 1990년 간행된 <국사편찬위원회사>는 신석호 재임 기간을 19294~19651월로 적시했다(1929년은 신석호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근무를 개시한 해다). 이 기록은 우리 의문에 대한 답일 뿐만 아니라, 국사편찬위원회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를 이어받았다고 하는 정체성 고백이기도 하다.

 

가슴에 날 세워 관악산 남동쪽 기슭으로 간다. 익히 아는 길이라 눈 덮인 관악산을 바라보기도 하며, 가로수에 돋아난 버섯 사진을 찍기도 하며 천천히 국사편찬위원회로 다가간다. 도착해 정문 경비실 직원에게 안으로 들어가 돌아볼 수 있느냐 물으니 안 된단다. 잠깐 사진 한 장만 찍겠다고 하자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 사진을 찍고 나와 크게 돌아 관악산 둘레길로 접어든다. 건너편 청계산이 바라다보이는 기슭에 이르러 국사편찬위원회가 깔고 앉은 아프고 슬픈 모순을 곱씹으며 석부(石符) 하나를 세운다.


 

이헌동 님은 글에서 짝퉁 진보역사학계가 어떻게 내부 부역을 자행하는지 통렬하게 비판한다. 제 나라 역사를 부역질 도구로 써먹는 이 간악한 패거리와 나는 과연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이 알량한 글 쪼가리 저들이 볼 리 없으니 내 마주함이란 결국 외눈길일 뿐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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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를 살펴 미리 빨래를 해놓은 터라 2월 마지막 일요일 아침 시간이 여유롭게 흐른다. 숲 걷기를 끝내고 점심 먹기 알맞을 만한 시각에 일어나 미도산으로 간다. 빠뜨릴 수 없는 이야기 하나 남아서다. 오늘은 학술원·예술원 가는 길에 스치듯 말했던 국립중앙도서관을 이야기한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얘깃거리가 있을까 싶어서 사실은 그냥 지나칠 뻔했다. 그럴 리 없는데 그럴 뻔했으니 내 부역 풍경 탐색 이미지는 아직도 엉성한 모양이다. 부끄러울 따름이다.




이반 일리치는 말한다: 도서관, , 자전거가 인류를 구원한다. 인류 차원까지는 아득하고 한 국가적 범위에서 말하자면 정보사회를 살아가는 국민이 지식정보에 접근하는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도서관은 기본적·근본적으로 중요하다. 우리나라에는 대통령 직속 국가도서관위원회,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국립중앙도서관이 이런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법이 있다. 국가도서관위원회는 도서관 정책에 관한 주요 사항을 수립·심의·조정한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우리나라에서 발간되는 모든 저작물을 수집, 제공, 보존하며 국가 서지 정보를 작성하고 표준화한다. 강력하거나 화려한 위상을 지닌 다른 기관에 비해 존재감이 거의 없지만 도서관은 실로 중요한 사회정치적 기반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괴이한 일이 벌어진다. 이 특권층 부역자 집단이 권력을 잡은 이래 국가도서관위원회 위원장은 20225월부터, 국립중앙도서관장은 20229월부터 내내 공석이다. 국가도서관위원회 위원장은 장관보다 높은 직급으로서 국가적 지식정보 정책을 수립하는 자리다. 국립중앙도서관장은 직무 대리로는 수행할 수 없는 전문적 업무 영역을 지닌 자리다. 이런 업무 정지 상태가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어떤 결과가 올까? 비단 여기뿐만이 아니다. 한겨레신문 보도에 따르면 222일 현재 342개 공공기관장 가운데 51개가 공석(임기 만료 포함)이라고 한다. 총선 대비라는 관측이 유력하지만, 그보다 이 정도 규모와 기간에 이르는 업무 정지 상태라면 사실상 국정 마비와 다름없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다.



국중도에서 바라본 미도산 마루

 

일부러 비워두든 정치 성향이 맞는 자를 찾든 전반적으로 공직 사회가 더 깊숙이 부역 진경으로 들어가리라는 예측은 불가피하게 하나다. 국립중앙도서관 주위를 천천히 걸을 때 내 귀는 괴괴한 정적을 찢고 아비규환으로 열린다. 그 울부짖음은 특권층 부역자 집단이 되빼앗은 권력으로 일부러 나라를 망가뜨리는 중이라 한다; 식민지 따위가 종주국을 넘어서면 반역이므로 정색하고 무너뜨리는 중이라 한다. 이 울부짖음을 누가 차마 음모론이라 일축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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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 다리가 놓인 재 건너 몽마르트르 공원 일대도 미도산이라면, 미도산 자락에는 또 다른 특권층 부역 집단 소굴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서남쪽 모퉁이 맞은편에 똬리 튼 대한민국 학술원과 예술원. 보통 시민은 여기 그 소굴이 있다는 사실조차 잘 모른다. 자신이 낸 세금에서 떼어내 종신직 회원에게 매달 180만 원씩 수당을 지급하는 곳이라는 사실은 더욱 모른다. 여기는 지킬 얼굴 뒤에 숨은 하이드가 희희낙락거리며 범죄를 저지르는 밤 세상이다.



피상적으로 생각할 때 학술·예술원 종신회원은 대한민국 학자와 예술가가 누리는 최고 명예다. 그러나 일제 문부성 1호 국비장학생이자 대한 총독 윤석열의 아버지인 윤기중이 학술원 회원이었으며, 특권층 부역 예술가의 대표 아이콘인 서정주가 예술원 회원이었다는 사실은 단박에 그 생각을 범주적으로 부숴버린다. 나아가 대한민국학술원과 예술원이 무엇을 위해 만들어지고 누구를 위해 존속하는가, 깊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한눈에 알 수 있게 한다.

 

두 얼굴 가진 도둑 떼가 입 모아 지절거리는 소리를 들어보시라. 먼저 <대한민국학술원 선언문>이다. 정말이지 기가 막힌다.

 

 

우리 民族原來 文化尊重하고 學問愛護하는 知性所有者이었다. 知性으로써 각 時代難局打開하여, 國家社會民族文化發展시켜 왔던 것도 事實이다. 그러나, 近世 以來 우리 社會跛行性과 밖으로부터 물결쳐 오는 新文明과의 渦中에서, 後進社會文化的 理想的 混亂을 면치 못한 채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民族文化的 思想的 危機克服하기 위하여 한 새롭고 참다운 文化建設특히, 科學的現代文明精粹集大成이란 커다란 精神的 指標確立과 그 實踐이 이때처럼 火急한 때는 다시없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民族的 現實要請에 의하여 科學者最高機關學術院誕生을 오늘에야 보게 되었지만, 意義야말로 深且大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學術院歷史的 發足하여, 우리 科學者들은 우리에게 負荷使命하여 새로운 認識覺悟를 거듭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다.

 

우리 民族이 이 땅위에 새롭고 참다운 文化再建하고, 그것을 發展시키는 에서 새로운 民族生理發見하게 될 것은 再言치 않거니와 그러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學問自由確保하고 獨創性發揮하여야 하며, 適時 適宜 文化政策에 관한 의견을 政府에 건의할 權利義務賦課된 것을 잊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學術院使命은 이 分明目標達成을 위하여 學問的 實踐行動活潑推進시킴에 있는 것으로 認識된다. 그러면, 우리는 아래와 같은 當面課題推進을 거듭 約束하여 둔다.

 

1.

우리는 過去文化傳統에 대하여 再批判 再檢討를 가하는 同時에 새롭고 健全民族文化 再建指標와 그 實踐具體案確立한다.

 

2.

學問自由確保하고 獨創性發揮하여 우리의 民族文化 뿐만 아니라 널리 人類文化에 있어서의 寄與 貢獻이 있기를 自期한다.

 

3.

先進諸國學術院緊密連絡하여 우리 學界後進性克服한다.

 

1954717

대한민국학술원

 

 

다음은 예술원 <宣言文- 藝術院創立에 즈음하여 ->이다. 참으로 참담하다.

 

 

學問藝術自由保障하고, 科學者藝術家地位向上시키기 하여 制定 公布文化保護法藝術院이 오늘 우리 나라에서 正式으로 發足됨을 宣言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創設되는 藝術院大韓民國憲法해서 保障藝術自由守護 發展시킬 義務法律해서 明示國內外藝術家代表機關이라는 名譽負荷한 것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榮光스러운 義務名譽를 깊이 自覺하고 이를 하여 우리의 最善을 다할 것을 嚴肅盟誓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古典的民族藝術傳統正確繼承하고 現代世界藝術精粹正當吸收하여 우리의 民族藝術正統形成 發展시키는 것이 우리의 基本的路線이며, 이를 해서는 藝術自律性嚴格保障되고 藝術家國家的處遇가 한改善되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것을 이에 闡明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偉大國家礎石偉大藝術創造에 있음을 깊이 認識하고 우리 民族不幸藝術해서 除去되고 우리 民族幸福藝術해서 造成될 것을 믿으며 우리는 藝術하여 靈魂理念榮光創造하는 偉大課業國內外의 모든 藝術家들과 協力 共進할 것을 이에 公約 宣言 하는 바입니다.

 

西紀 1954717

藝 術 院

創立會員一同

 

 

당대 최고급 엘리트 대뇌에서 나온 허접한 개소리가 저들이 지닌 정체성을 웅변해 준다. 학술원 회원 중 친일 인명사전에 수록된 자만도 열다섯이다. 회원은 각종 상, 훈포장을 받아 영예와 이익을 챙겼다. 심지어 골수 부역자는 그 행적을 지워 역사를 왜곡했다. 그뿐만 아니라 회원 80%가량이 서울대(경성제대) 출신이다. 서울대 총장을 지낸 이장무는 이완용의 증손이자 이병도의 손자인데, 그가 바로 현임 학술원장이다.

 

예술원도 화려하다. 친일 인명사전에 오른 예술원 회원은 미술계: 김경승 김기창 김은호 김인승 노수현 윤효중 이상범 장우성, 음악계: 김동진 김생려 김성태 이흥렬 현제명, 문학계: 곽종원 모윤숙 백철 서정주 조연현 최정희, 연극계: 유치진이다. 이들이 일제에 어떻게 부역했는지, 해방 이후에 어떻게 표변해 예술계를 지배했는지 알려지지 않은, 아니 덮어버린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 그런 채 시간은 계속해서 쌓여만 간다.

 

나는 아프고 슬픈 마음을 끌어안고 저들 소굴 앞에서 한참을 서성인다. 학술과 예술이 문화에서 무엇인지 모를 수 없으므로 분함과 안타까움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인적 끊어진 고요한 틈으로 배어들어 버드나무 부()를 심는다. 간절한 팡이실이 기도를 올린다. 저들 소굴 주위를 육중하게 걸어 신령한 외끌이 저인망에 가둔다. 저들 소굴에 가라앉은 흑역사를 죽고 나서도 기억하기로 다짐하며 가슴 식혀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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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정상 진료하느라 미룬 대청소를 초이튿날 한다. 한 시간 반에 걸쳐 진공청소기로 해묵은 먼지와 냄새를 샅샅이 걷어낸다. 갑진년 맞이다. 느지막이 집을 나서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러 책 한 권 품고, 중학천 버드나무-수송동 소나무-조계사 안팎 회화나무-관훈동 이이 집터 회화나무로 이어지는 도심 나무 순례를 한다.


 

점심 먹고 나서 천천히 미도산으로 들어간다. 익숙한 자락길을 거쳐 바로 누에 다리로 향한다. 다리 위에서 서초경찰서를 사진에 담는다. 몽마르트르 공원 남쪽 끄트머리에서 대검찰청을 사진에 담는다. 공원을 나와 동광로와 서초대로로 돌면서 대법원을 사진에 담는다. 이어 반포대로로 들어가 소로를 따라가면서 서울중앙지방검찰청과 서울중앙지방법원을 사진에 담는다. 서초중앙로 고개로 올라가 29길로 돌아들며 서울회생법원을 사진에 담는다. 이는 사법 권력 기관을 보행으로 포위하고 사진으로 체포하는 의례 행위다. 마침내 미도산 출발 지점으로 다시 돌아와 외끌이 저인망에 저 눈먼 특권층 부역 떼거리를 가두어 버린다.


 

미도산 언저리를 떠돌며 살아온 내 삶이 머금은 서사와 오늘 비로소 본격 접속한다. 항일무장투쟁 전사인 내 증조부가 일제 군대에 생물학적으로 살해당했다면, 나는 부역 사법 권력에 사회경제적으로 살해당했다. 저들과 맞서 내가 싸우는 길은 법도 총도 아닌 팡이실이, 그 영적 네트워킹이다. 뼈아픈 경험과 뼈저린 깨달음 사건을 모두 함께한 미도산은 말한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자 그 돌부리를 짚고 일어선다. 나는 잔잔해서 격동에 찬 걸음걸이로 서초중앙로 건너 서초대로를 따라간다. 교대역 지나 조금만 더 걸어가면 15년 전 권력이 짓밟은 내 옛 진료소가 생때같은 기억으로 변함없이 서 있다. 저곳이 바로 내 빈 무덤이다.


 

한참을 서서 바라보다가 사진에 담는다. 애도다. 기림이다. 그대로인 것은 그대로 없어진 것은 없는 대로 보듬으며 옛길을 걸어 도로 미도산 초입에 닿는다. 오늘 팡이실이 표지를 참나무 둥치에 남겨 간절한 비원으로 심어둔다; 죽어서도 이 참담한 부역 역사와 서사를 잊지 않기로 새겨둔다. 일몰 타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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