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로 예순을 맞은 여성이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왔습니다. 촘촘히 문진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제 어법이 어떤 울림을 주었는지 침 치료가 다 끝난 뒤, 자신에게 우울증이 있는 게 아닐까 의심된다며 잠시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저는 어떤 근거에서 그런 의심을 품었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삶이 즐겁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우울증은 꿀꿀한 정서가 깊어진 상태를 의미하지 않고 그 생각이 일상의 삶을 무너뜨릴 때 확인되는 자기 비하/부정을 의미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는 일상의 삶을 사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 전혀 문제없는 일상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는 한 평생 친정어머니와 남편, 그리고 자녀의 뜻에 따라 ‘짊어진 의무’를 빈틈없이 이행하며 살아왔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바로 그런 삶이 무너진 삶이라고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는 얼른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짊어진 의무 말고 ‘거머쥔 권리’도 있다는 사실이 전혀 증명되지 않은 삶 그 자체가 우울증이라는 제 설명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삶의 주체성을 복원하기 위한 전사의 길에 서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남편과 자녀들에게 각기 그들이 짊어져야 할 삶의 몫을 넘겨주고 자신의 권리를 거머쥔 삶으로 이동하는 이치를 간단하게 덧붙여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는 크게 깨달은 듯했습니다.
바로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는 전혀 예상 밖의 이야기가 터져 나왔습니다. 남편이 상담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듣고 보니 남편도 치료가 필요한 사람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삶을 바꾸는 이야기를 하는 시점에서 그는 왜 다른 사람을 떠올린 것일까요?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자신을 ‘가볍게’ 여길 뿐만 아니라 자신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에 생긴 병조차 가볍게 여깁니다.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드는 돈과 시간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재빨리 다른 사람의 ‘무거운’ 문제 쪽으로 예의 그 의무감을 발동시키는 것입니다. 자신보다 엄마, 남편, 아이들 문제가 더 무겁다고 판단하며 살아온 60년의 습관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우울증 환자들이 이만하면 됐다거나 더는 안 된다는 핑계를 대며 서둘러 치료를 중단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에게 저는 말해줍니다.
“그대 삶과 그대 병은 우주만큼 육중한 것입니다.”
박근혜가 새해 첫날부터 흰 옷으로 결백의 상징을 조작하며 하염없는 비문의 모국어를 개·돼지처럼 가볍게 여기는 ‘백성’에게 흩뿌려댔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육중한 존재인지 과시하는 아둔하고 우매한 저 짓거리에 머리 조아리며 스스로 한없이 가벼운 존재라 여기는 우울증이 혹시 우리 ‘백성’ 내면에 깊이 똬리 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진정한 공화국은 우리 '시민' 각자가 이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비로소 오지 않을까요.
“그대 존재는 우주만큼 육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