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간단합니다. 과학에 적용되는 방법론을 창조과학의 주장에 적용해 이론으로의 정당성을 획득하면 됩니다. 가설을 세우고 증거를 제시하고 다른 학자들의 리뷰를 통과하면 됩니다. 진화론의 허점이 뭐니 하며 몰이해와 거짓으로 순진한 교인들 속이지 말고, 다른 과학자들이 따르는 과정을 따르면 됩니다.

예를 들어, 창조과학은 공룡과 인간이 같은 시대에 살고 있었다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가설을 세울 수 있습니다. “공룡의 유전자와 인간의 유전자는 동일한 시간을 거쳤다.” 이 가설을 증명하면 됩니다. 성경에 공룡으로 보이는 생물이 등장한다거나, 벽화에 사람과 공룡이 같이 그려져 있다 이런 증거 말고, 유전자를 분석해 증명하면 깔끔합니다.

유전자의 반감기는 대략 521년입니다. 유전자는 우라늄이나 루테늄 같은 방사선 동위원소에 비해 환경의 영향을 더 받습니다. 온도나 습기에 따라 유전자의 반감기는 달라지지요. 하지만, 지구 전체를 놓고 볼 때 공룡의 유전자와 인간을 비롯한 다른 유전자는 같은 환경의 영향을 받았다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모든 유전자는 같은 반감기를 가집니다. 말의 유전자가 인간 유전자보다 빠른 속도로 붕괴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공룡이나 인간이나 남겨진 유전자(정확하게는 유전자 링크)가 백 만개라 할 때 그 반인 오십 만개는 521년이 지나면 끊어집니다. 하지만 이는 확률이기에 개별 링크가 언제 끊어질지는 모릅니다. 한 시간 만에 끊어질 수도 몇 억년 후에 끊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제 가설을 더 좁게 만들어 보죠. ‘공룡의 유전자와 인간의 남겨진 유전자는 동일한 확률로 발견된다.’ 물론 더 정교하게 가설을 세울 수 있겠지만, 이 글의 목적상 이 정도로 하죠. 그러면 창조과학자들은 이를 입증하는 증거를 제시하면 됩니다. 아주 쉽죠.

현실은 어떨까요. 유전자가 온전히 복원한 가장 오래된 경우는 7만 년 전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말입니다. 인간의 경우 셀 수 없이 많습니다. 4만 년 전에 사라진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까지 100% 복원되었고, 이를 통해 현생 인류인 사피엔스와의 관계도 분석되었습니다. 공룡의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100% 복원은 커녕 부분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파편이 남았을 뿐입니다. 소위 창조과학의 이론가(라기보다 거짓말 생성가)들은 공룡 유전자 파편이 발견되었기에 진화론이 거짓이라 주장하지만, 이는 반감기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공룡과 인간 유전자에서 보이는 명확한 차이를 이들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설명하려는 시도조차 없습니다.

반복합니다. 창조과학이 과학으로 인정받으려면 가설을 세우고 이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면 됩니다. 공룡 유전자가 인간 유전자와 비슷하게 발견된다는 증거만 있으면 끝입니다. 아니면 차이에 대한 타당할 설명을 하던가요. 그때까지는 사이비 취급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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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봄비가 장맛비처럼 오는 일요일이다. 몸을 한껏 가벼이 한 다음, 젖히지 않고도 머리 위 숲 풍경을 보기 위해 투명 비닐우산을 찾아 든다. 마을버스를 타고 서울대학교 치과병원 앞에서 내려 관악산 줄기 나지막한 숲으로 들어간다. 지난주와는 정반대로 북쪽 길로 접어든다. 충무공 선영과 주위 숲을 찬찬하고 촘촘하게 걸으려 함이다.

 

덕수공원 정문에서 올라가는 경로를 택하지 않는다. 꿈이 위 숲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샛길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꿈과는 다른 풍경이지만 나는 어렵지 않게 길 아닌 숲길을 걸어 묘역으로 들어간다. 정정공(貞靖公) 이변과 정경부인 양성(陽城)이씨 무덤은 찾기 쉽다. 가장 높은 곳에 있어서다. 제물을 올린 뒤에 감사 말씀을 드린다.

 

충무공을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묘 앞에서 쑥대 하나를 챙긴다. 남은 후손 묘들을 꼼꼼히 돌아보고 나서 공원으로 조성한 공간으로 이동한다. 예상보다 규모감이 떨어지고 허투루 가꾼 느낌을 물씬 풍긴다. 최근에야 세웠을 과시성 묘비도 좋아 보이지 않는다. 압권은 박정희식한옥 건물이다. 충무공을 배출한 가문에도 식민지 그림자는 어김없구나. 표표하게 떠나간다.


 

비에 젖은 몸도 무겁지만, 충무공 선영 풍경 때문에 마음이 더 무겁다. 나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강감찬 생가터로 간다. 탑을 빼앗겨 버린 낙성대 풍경도 오늘따라 처져 보인다. 나는 정색하고 결기를 세운다. 아까 거둔 쑥대를 유허비 아래 신목으로 둠으로써 두 영웅 사이를 잇는 의례에 갈음한다. 내 상상 시공이 빚어내는 서사 사건이다.

 

충무공이 인헌공을 삼가 뵙니다.”

 

그렇다. 오늘을 부끄럽게 사는 무지렁이 부역자 처지에서 각성하기로는 지푸라기 신주라도 모실 일이다. 거대와 치밀을 동일 무기로 구사하는 특권층 부역자 언··권과 맞설 때, 날카로운 이성은 빼빼 마른 관념이 되고, 진실 무비 과학은 그림의 떡이 되니 말이다. 내가 불러올 힘은 현실 세계 반대편 저 부정당하는 존재한테서나 나온다.

 

숲을 떠나 도시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교보 가서 온갖 뜨르르한 책에 눈 정을 붙여봐도 심사가 이미 관심을 놔버렸다. 국시 한 그릇 먹고 다시 길을 나서 인사동 뒷골목을 지나는데 담벼락이 나지막이 부른다. 홍범도 장군이 눈으로는 내 너머를 보고, 손가락으로는 내 심장을 가리킨다. 내게만은 덕수공원이 이순신 숲이어야만 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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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내 나이 또래라면 서구인 가운데는 자신을 68혁명 세대로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는 1960년 4월 혁명 세대는 있어도 68혁명 세대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1964년 6월에 한일협정반대 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난 적은 있으나 그 운동과 68혁명과는 큰 관계가 없다. 그렇기는 해도 나는 개인적으로 68세대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68혁명은 세계사적 혁명의 의미를 지닌다고 믿기 때문이다.

68혁명 이후 56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 그와 맞먹는 지각 변동이 생기는 것 같다. 이스랄의 가자 인민 학살을 두고 세계의 인민대중이 일떠선 모습이 그것으로, 미국의 대학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친팔레스타인 행동이 특히 눈길을 끈다. 4월 중순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에서 교정을 장악한 농성이 시작된 데 이어 미국의 전역에서 벌이는 학생들의 시위와 집회, 특히 농성이 만만치 않다. 전국적으로 100개 이상의 대학들에서 점거 농성이 벌어지고, 1,000명 이상의 학생들이 체포되거나 구류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엊그제 CNN을 보니 캘리포니아대학 로스앤젤레스 캠퍼스에서 학생들이 경찰에 잡혀가는 모습이 현장 중계되더라. 컬럼비아대에서는 1968년에 베트남전쟁 반대를 외치며 학생들이 점거해 농성하던 해밀턴홀이 이번에 다시 후배 학생들에 의해 점거되었다가 경찰에 탈환되기도 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것은 1970년인데, 그해 5월 미국의 한 대학에서 군인이 쏜 총에 학생 4명이 맞아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발한 적이 있다. 오하이오주 켄트주립대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날 사건을 기록한, 내 세대라면 상당히 많은 이가 기억할 사진 하나가 있다. 총에 맞은 남학생이 너부러져 있고 여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그 앞에서 양손을 들고 절규하는 모습.

2024년으로 돌아와서 미국에서는 지금 수많은 대학에 데모가 일어나고 있지만 아직은 경찰이나 군인이 쏜 총에 학생이 목숨을 잃는 불상사가 일어나진 않았다. 그러나 바이든 정부가 시위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참극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어 보인다. 개별 주마다 대응하는 방식은 달라 보이나, 대학에 따라 학생들의 평화집회 현장에 자동화기로 무장한 경찰이 진입하기도 하고, 미시간 대학인가에서는 대학 행정요원이 총을 든 저격병을 대학 건물 옥상으로 안내하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미 의회는 학생들의 시위를 불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그와 관련해 의원 몇 명이 기자회견을 하면서 이스랄의 인종학살에 반대하는 학생들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기도 했다. 우리는 미국이 테러리스트를 어떻게 대하는지 잘 알고 있다.

2024년 현재 세계는 1968년에 있었던 것과 비슷한 반체제 운동을 목격하기 시작한 것 같다. 역사의 반복인 셈이다. 단, 역사의 이번 반복은 맑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말한 것과는 다르다고 여겨진다. 맑스는 거기서 “역사는 반복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번은 소극으로”라고 했다. 그러나 2024년 미국과 유럽 등의 대학에서 일어나는 반체제 운동을 소극으로 볼 일만은 아닌 듯싶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일으킨 쿠데타와 루이 보나파르트가 일으킨 쿠데타를 비교하면 후자가 소극임은 분명하나, 지금 미국과 세계 다른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항의 운동은 1960년대 말 운동의 반복인 것 같기는 해도 소극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물론 현재의 운동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는 알 수 없으나 만약 지금 상황이 지속된다면 소극 수준을 넘어서는 잠재력을 지닌 것 같기도 하다.

1968년의 혁명은 세계혁명으로 치부된다. 프랑스 파리의 5월 혁명으로부터 시작된 68혁명은 미국과 영국, 독일, 그리스, 일본 등 서방 주요 국가들 가운데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68혁명은 ‘반체제’ 운동으로 규정되곤 한다. 그것이 반기를 든 대상이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등 당시 기득권 세력 전체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내놓고 보니 혁명의 가장 큰 적이었던 자본주의의 경우 받은 타격이나 상처가 그리 컸다고 여겨지진 않는다. 당시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196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한 이윤율 하락을 겪으며 축적의 위기에 빠졌고, 그에 따라 상당히 취약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0년대를 거치며 세계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 축적 전략을 구사하며 자신의 생존 능력을 입증해냈다. 그 사이에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퇴조하여 세계는 갈수록 자본주의 유일 체제로 환원된 셈이다. 199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소련과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속에 자본주의 체제는 그래서 역사의 장에 ‘종말’ 글씨가 쓰인 승리의 깃발을 꽂기까지 했다. 이런 점을 놓고 보면 1960년대 말의 반체제 운동은 때를 잘못 맞춘 셈인지 모른다.

오늘날은? 1960년대와도 1990년대와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은가 싶다. 56년 전과 30여년 전에 자본주의 특히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는 오늘날에 비하면 심각한 위기였다고 보기 어렵다. 베트남전 반대 운동에 참여했던 당시의 서방 신세대는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운동에 참여한 셈이기도 하다. 반제, 반식민주의 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으로부터 인도의 독립 등으로, 그리고 당시 신생 독립국의 우후죽순 탄생으로 성공의 양상을 보이기도 했지마는 그때의 성공은 형식적 수준에 머물렀을 뿐이다. UN의 창립 시에 51개이던 회원국 수가 1974년에 이르러 136개로 대폭 늘어난 것은 언뜻 보면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 운동의 위대한 성과로 여겨질 수 있으나, 신생 독립국 대부분이 나중에 신식민지로 전락한 점을 놓고 보면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체계의 상황이 정말 크게 변했다고 봐야 한다. 과거 반식민지였던 중국이 이제 PPP 기준 GDP 세계 제1위 국가가 된 것, 대부분이 과거 피식민지 국가들로 구성된 브릭스 국가들의 GDP가 제국주의 국가들로 구성된 G7의 그것을 능가한 것이 그 증거다. 오늘날 미국 등지에서 학생들이 일으키는 반체제 운동의 거대한 반향을 기대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던 선배 세대의 노력이나 정성에도 불구하고 68혁명은 자본주의 극복에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셈이다. 그것은 그때는 아직 혁명의 시간이 무르익지 않았던 점과 무관하지 않다. 지금은? 아직은 운동이 미약할지 몰라도 시간은 무르익은 셈이라 할 수 있다. 서방 제국주의는 지금 더 이상 과거의 위력과 지배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지금 반체제 운동의 핵심 안건은 이스랄의 가자 인민 학살 문제일 것이다. 세계인이 뻔히 지켜보는 앞에 가자 인민을 무참하게 할살하는 이스랄의 안하무인식 태도가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이스랄의 그런 태도는 반인륜적이고 반국제법적이며 반-무슨무슨적이겠지만 시대착오적이기도 하다. 이스랄의 잔혹 행위를 과거 서방의 제국주의가 비서방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던 전통의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미국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등이 오늘날 백인 국가로 된 것은 유럽의 백인들이 광활한 비유럽 지역으로 진출하여 그곳 원주민들을 불법적이고 사악하고 포악한 각종 방법으로 제거해버린 결과다. (최근에 한 팟캐스트를 통해 들은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 리처드 울프에 따르면) 이전에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때는 비서방 사회가 서방의 공격과 침략을 막을 방어력이 태부족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스랄이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과거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이 하던 행태를 반복한다? 이것은 더 이상 용납되어서도 될 수도 없는 일이다. 이스랄에는 그럴 권리도 없으려니와 그럴 능력도 없다고 봐야 한다.

이스랄이 만행을 저지르는 것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지원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미국도 계속 이스랄을 지원할 능력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것은 우크라이나에서 지금 지리멸렬한 모습이 말해주는 바다. 게다가 이스랄이 인종학살을 자행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이 속한 서아시아의 국제정세도 크게 바뀌었다. 이전과는 달리 이란과 터키, 이집트, 사우디, UAE, 예멘, 레바논, 시리아 등 팔레스타인을 지원해줄 수 있는 아랍과 이슬람 국가들이 도열해 있지 않은가. 물론 이들 나라 가운데는 이집트와 사우디 등 ‘아브라함 협정’을 통해 이스랄과 우방이 된 나라도 있으나 그들은 올해부터는 브릭스에 새로 가입한 상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스랄이 속한 오늘날의 서아시아 국제정세는 그 일대에 제대로 된 국가가 형성되지 않았던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인 것이다. 유럽인이 아시아와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아프리카를 유린하며 그 일부 지역의 원주민을 학살하거나 제거하고 정착 식민지를 개척하던 시기는 이제 지난 지 오래라고 봐야 한다.

미국과 유럽에서 지금 새로운 세대가 들고일어난 것은 세계사적 사건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서는 그것을 아직은 강 건너 불로만 보고 있다. 그러나 기대컨대 대학소요가 잠잠해지지 않고 가을학기까지 이어진다면 어쩌면 우리는 새로운 역사의 장이 쓰이는 것을 볼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사태는 68혁명과 닮은꼴이라는 점에서 역사의 반복에 해당하는 것 같다. 단, 반복되는 역사가 꼭 불변을 낳기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제자리에서 돌고 도는 결과만 낳는다면 역사의 반복은 소극으로 끝날지 모르나, 반복을 통해 어떤 벡터 운동이 일어날 것을 기대할 수도 있다. 아직은 섣부르지마는 제국주의의 심장부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에서 희망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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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bé Pierre가 말했다: Le contraire de la misère ce n’est pas la richesse. Le contraire de la misère, c’est le partage. 빈곤의 반대는 부유가 아니라 공유, 그러니까 나눔이다, 그런 말이다. 이 말에 따르자면 신자유주의를 기치 삼은 제국주의는 99.9% 인류를 빈곤으로 몰아가는 음모 자체일 수밖에 없다. 자본은 그 마름 가운데 센 한 놈일 따름이다.

  

다른 맥락에서 곱씹을 우리 속담 하나 떠올린다: 가난 구제는 나라/나라님도 못 한다. 가난 구제가 어렵고도 끝없는 일이라는 말로 흔히 이해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나라/나라님은 부자를 가리킨다. 부자는 빈자를 구제하지 않는다. 빈자는 빈자가 구제한다. 그게 바로 나눔이다. 나눔은 어떻게 이루어지나? 가장 맑은 영혼으로 살았던 권정생이 말한다.

 

겨우겨우 사는 삶이 가장 잘사는 삶이다.”

 

나눔 이치를 꿰뚫는 표현이다. 이 이치가 내 한평생을 관류했음에도 깨닫지 못해서 고마워하지 못하다가 최근 끈덕지고 빈틈없이 이어지는 어떤 사건으로 말미암아 엄밀하게 깨닫고 고마워하게 됐다. 제법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제자 하나가 뜬금없이 전화로 안부를 물은 데서 사건은 처음 벌어졌다. 그런 연락은 백발백중 그냥 안부 인사가 아니지 않던가.

 

그 입에서 돈이 필요하다는 말이 튀어나오는 순간 나는 일반적으로 예상하는 바와 사뭇 다른 까닭에서 놀랐다. 왜냐하면 그는 정승이고 나는 거지였으니까. 게다가 적어도 내가 아는 그에게 그 돈은 푼돈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절반을 다른 사람한테 꾸어 채워서 보냈다. 약속한 날을 어기기는 했지만, 그 돈은 돌아왔다.

 

물론 그다음 이야기는 더욱 놀랍게 이어진다. 얼마 뒤 그보다 조금 적은 돈을 다시 요청했고, 나는 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냈다. 얼마 뒤 그는 그 돈의 1/10가량을 요청했다. 그 뒤 두 번 더 같은 요청을 되풀이했다. 나는 드디어 물었다: 그 푼돈이 도움이 되기는 한가? 그렇다고 한다. 그렇겠지. 암은. 나는 그런 경우를 아직도 상상해 보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돈 아닌 좋지 않은 상황 소식만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서 보내지면서 아홉 달째 마지막으로 접어들었다. 전화가 왔다. 더는 죄송하단 말조차 하지 못하겠다면서도 그가 대화를 끊지 않는다. 여전히 그 푼돈이 유용하구나, 짐작했다. 실은 나도 결제해야 할 돈이 필요해서 시한을 주고 이 부분만 그때 먼저 갚는 것을 조건으로, 다시 돈을 보냈다.

 

다음 날 새벽 다른 날보다 일찍 눈이 떠져 일어나 보니 그에게서 전화가 세 번이나 와 있었다. 이번에는 그 푼돈의 반을 마지막이라면서 요청했다. 다급했던 그 상황에서 내가 전화를 받지 않아 얼마나 당혹스러웠을지를 헤아리며 아침 되어야 보낼 수 있는데 그래도 유효한가, 문자를 넣었다. 내 계좌에 그 정도 돈도 없어 채워 넣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대답을 기다리면서 지갑을 열어보았다. 놀랍게도 그가 요청한 돈에서 부족한 딱 그만큼 남짓이 현금으로 들어 있었다. 나는 서둘러 은행으로 향했다. 채워서 송금하고 나니 계좌에는 이제 3,626원 있다. 완전히 텅 비지 않았으니 겨우겨우에 미달일까. 카드로 넣고 꺼낼 수 없는 돈이라 사실상 0원이니 그 수준으로 쳐도 괜찮을까. 홀연 내면이 울린다.

 

“쌀 한 톨 남으면 빈 독이 더 잘 느껴진다.”

 

한의원에 앉아 빈 지갑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여기 있던 푼돈은 숲 걷기를 하다 보면 카드로 결제하지 못할 만큼 영세한 음식점을 만나기도 하는데, 그 경우를 대비해 넣어두었던 거다. 그마저 털어냈으니 단식 숲 걷기도 하겠구나, 중얼댄다. 바로 그 찰나, 내 영혼은 절대 고요로 술렁인다. 여기까지 오라고 숲 생명들이 초대했음을 깨달아서다.

 

제자 편에서 보면 열 달째 자기 애옥살이를 함께해 준 가난뱅이 선생이 더없이 고마울 테고, 내 편에서 보면 빚두루마기 주제에 탈탈 털어 제자 곤경 나눈 일로 그를 방편 삼아 영적 삶 일깨우려 하신 팡이실이 니마고마께 엎드려 큰절해야 할 테다. 팡이실이 니마고마는 반제국주의 전사, 곧 나눔 주체들이다. 3,626원은 차고도 넘치는 군자금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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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구청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따라 정능산을 오르면서 오늘 숲 일정 막이 오른다. 비록 작은 골짜기지만 물과 습기를 품은 고운 풍경을 펼쳐내어 나를 대뜸 심취 상태로 데려간다. 천천히 오르다 재를 넘어 서울대학교 치과병원 맞은편으로 내려간다. 길을 건너면 남북 방향으로 좁다랗게 누운 곧은 능선을 만난다.

 

지도에는 이름조차 없는 나지막한 산줄기지만 남쪽 끄트머리께에서는 버쩍 머리를 들었다 놓으면서 서울대학교 교정을 동서로 가르는 분기점을 마련해 준다. 반대로 그 북쪽 끄트머리에서는 관악산깨나 드나드는 사람들 대부분이 모르지만, 유서 깊은 공간 하나를 품는다. 덕수공원이다. 나도 여러 번 스치듯 지나갔다.

 

덕수공원 이름은 덕수(德水) 이씨에서 왔다. 덕수 이씨 중흥조인 이변(李邊)과 그 아들을 포함한 일족이 여기 묻혀 있다. 이변은 조선 전기 고위 문관으로 국가에 세운 공이 많아 그가 죽자, 조정에서 예장을 치러주고 여기에 모셨으며 후손이 수호 봉사를 계속해 왔다 한다. 충무공 이순신이 바로 그 이변의 5대손이다.

 

서울서 태어나 자란 이순신이 걸출한 중흥조 선영에 다녀갔을, 나아가 드나들었을 가능성은 작지 않다. 그런데, 개울 건너 바로 맞은편에 인헌공 강감찬 생가터가 있다. 왜놈들이 훼손하기 전 원형을 간직한 석탑서껀 마을 사람들이 기려온 신성한 낙성대를 모른 채 지나쳤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거의 없으리라고 본다.



왜놈들이 훼손하고, 그 부역자 박정희가 멋대로 옮겨 놓은 강감찬 탑


이순신이 어렸을 그 무렵 이미 왜구 소란은 물론 국가적 전란 위기 담론이 일반 백성에게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면, 강감찬 석탑 아래서 왜적 물리치는 장수가 되는 꿈을 꾸는 이순신을 상상하는 일이 마냥 소설은 아니다. 수백 년을 가로지르는 공시성으로 두 영웅을 서사화하는 일이 그저 드라마는 아니다.

 

한참이나 숲을 떠나지 못하고 나는 서성거린다. 특권층 부역자 박정희가 억지스럽게 꾸면 놓은 안국사, 동네 한복판에 이지러진 모습으로 명맥을 이어오는 생가터를 들여다보는 강감찬과 골프연습장·구민운동장에 둘러싸여 오그라진 선영을 들여다보는 이순신 시선으로 오늘 내가 어떻게 알량한 부역자인지 들여다본다.

 

숲길을 이따금 뒤돌아보면서 음식점으로 간다. 여느 때처럼 삼삼오오 떼지은 개신교도들로 북적인다. 한쪽 구석에 앉아 천천히 밥을 먹는데 주인이 다가와 빨리 먹으라고 재촉한다. 수긍은 하지만 수용할 수 없다. 그렇다고 괭하게 마음 드러내지도 못한다. 무지렁이 부역자다운 소심한 응징은 다신 안 가는 정도 따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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